묵상하는 법

묵상 말라기 2:10-16절 (목요일 청년 묵상 강의)

하나지기 2022. 1. 10. 04:58

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11 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 버리시리라
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15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본문의 중심된 교리
: 양심의 원리

 

양심은 본능에 속한 것이고, 자연적 양심은 병든 양심이고, 문화의 차이에서 각 나라마다 차이가 있고, 배움으로 인해 습득하게 된다. 병든 양심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을 못한다. 옳은 것도 겁을 먹는다. 그래서 올바로 배워야 하는데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정결케 해주셔야 되는 것이다.

양심은 믿음과 같이 간다. 믿음도 배움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배우면 배울수록, 하나님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인간을 알수록 양심이 더 민감해지고 정결해진다.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 믿음이 심각해진다. 양심이 정결케 되는 원리가 믿음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자연적 원리 안에서도 양심이 믿음처럼, 신앙같이 보일 때도 있다. 때로는 종교심, 신념, 관념의 원리가 신앙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하는 것일 뿐이다.

양심은 회개와 직결된다.
양심이 정결하게 되고 민감해지면 죄를 짓고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원리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생각으로 신앙하는 게 아니다. 믿음으로 신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자연스럽게 깨달아 알아서 그대로 해나가는 것이지, 혼동하는 게 아니다.
이게 맞아? 저게 맞나?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 하면서 혼동하는 이유는 생각에 빠져든 것이고, 이것은 죄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양심이 화인 맞으면 감각이 없어진다. 죄를 지어도 악을 행하고 있으면(자기주장, 자기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이미 마음이 악하다) 말을 해도 듣지를 않는다. 마음이 악한 사람에게 그것을 말해주면,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고 선을 쳐낸다.
그리스도인은 몰랐다가도 양심이 찔려서 인정하게 된다. 또는 잘못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눌러버리면, 그것은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다시는 양심을 치시지 않을 수도 있다.

은혜 안에서 율법의 기능으로 인해 꺾인 양심은(사람은) 주장하려다가도 거기에 순종하게 되지, 반대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 못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양심을 다스리고, 마음을 통치하시는 원리이다.

양심과 믿음과 신앙은 매우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양심이 계속 정결해져서 선한 양심을 간직한 자가 되어야지, 그것을 거부하고 버리는 자는 믿음을 버리는 것과 같다.

신앙을 할 때 내 양심과 상관없는 신앙을 하는 것은 거짓 신앙이다. 교회는 이성적 교리를 따라가는 게 아니다. 오늘날 교리를 가지고 싸우고, 어떤 사람들을 혐오한다. 그 마음에 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알지를 못하는 것이다.

정결케 되는 원리는 양심이 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
영의 양심은 말씀에 기준이 되게 된다. 말씀에 기준 된 양심은 말씀을 항상 외우고 있지 않더라도, 상황에 따라 양심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인지하고,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불을 켜지게 한다. 양심이 나를 먼저 깨우는 것이다. 거기에 민감해져야 한다. 조금이라도 그렇다면 하지 말아야 하고, 멈춰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교만한 것 같다 싶으면 말을 그만둬야 한다. 그냥 멈추지 않고, 무시하게 되면 죄에 빠지게 되고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한두 번 빠지게 되고, 계속 무시하면, 양심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병든 양심은 100% 잘못 배워서 그런 것이다. 중생한 자나, 자연인이나 여기에 걸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율법주의자들이 그렇다.
자기의 의지로 열심히 행해야 하고, 금욕주의가 될 때 안 해야 되는데 하게 되면 불편해진다.
영의 양심의 원리와 율법주의식 양심의 원리는 약간 다른 것이 있다.
율법주의식 양심은 자신의 행동에 근거를 둔다. 이들은 내 마음에 초점을 두지 않고, 행동에 비중을 많이 둔다.
영의 양심은 내 사고와 내 중심(마음)에 근거를 둔다. 이들은 내 중심, 내 마음, 사랑하지 못하고, 선을 행하고자 하지 않는 마음을 먼저 자책한다.

그 둘은 힘든 것 자체도 다르다. 양심을 치고 마음에서 힘든 게 정말 힘든 것이다.

본문을 연결해 봅시다.

 

14절부터 보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드리는 예물을 받지 않고, 배척하신 것에 대해 이스라엘은 묻고 따진다. 양심부터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아내들을 피눈물을 쏟게 했다. (아내를 배신한 것) 이것에 대한 좀 리얼한 배경은 '더 스토닝' 이라는 영화를 보면 남편이 아내를 배신하는 것이 얼마나 피눈물을 쏟을지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악한가.
그러한 문화에서 사는 여자들이 얼마나 힘이 없고, 남자들을 통해 핍박과 억압을 당하고 온갖 수치와 수모와 억울함이 클 수밖에 없는가. 본문에서도 아내들을 내친 것이 무엇때문이냐 라고 하시는 것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스라엘도 아내를 내치고, 이방 여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본문의 이들도 양심에 화인을 맞은 것이다.

말 2:10-16절은 우상숭배하는 이방 여인과 통혼하고, 어린 아내를 버린 범죄를 지적하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문제가 번지고 있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들은 오히려 백성들의 문제를 올바로 지적하고, 가르치고 바로잡았어야 하는 것이었다.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영적인 문제를 잡아주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의 문제인데, 생각의 방향, 생각이 진리냐, 비진리냐, 그 사람이 대체적으로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의 패턴이 말씀에 근거하냐, 세상적인가, 의지가 어떤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육적인지 영적인지) 생각을 교정하고, 사고를 올바르게 하고, 의지가 힘이 없으면 어떻게 힘을 얻게 하는지 이런 전체를 청교도들은 가르쳤다.

중요한 것은 결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을 올바른 방향으로 진리 안에서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가르쳤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모른다.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교리를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적용이 올바로 되어서 무너지고 겸손하게 되고 깨지게 되어야 올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머리로만 알아서 교만해지게 되는 것이다.

묵상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동일하게 내 삶에서 나를 다루고 계시는가?를 알고 때로는 양심이 쳐지고, 때로는 위로와 믿음이 더해지는 것이다.

 

묵상의 적용

 

영의 양심 vs 자연적(육의) 양심 vs 병든 양심만 알고 끝나면 안 된다.
나의 양심은 어떤가?
뭐가 영의 양심이고, 자연적 양심이고, 병든 양심인지 모르고 그냥 내 양심은 어떤가를 비교하는 것도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원리를 알고, 대답을 해야 한다.
올바로 알았으면, 그것이 나에게 있는가? 없으면 구하라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거룩하고 깨끗해진 양심인가?
내 양심이 거룩해졌는가?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 죄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내가 안 할 수 있었는데 해서 수치스러운가? 그래서 다음엔 안 해야지 하고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가는가?

이런 것을 구분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영적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사고의 원리가 올바르게 말씀 중심으로 잡히도록 가르쳤어야 하는데, 그것을 게을리하고, 자신들이 부패해서 문제가 커지게 된 것이다. 영적으로 거짓된 것과 영적으로 참된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과제

 

히 9:22; 딤전 3:9; 딤전 1:19; 딤전 4:2; 행 24:16; 고전 8:12; 히 13:8; 행 23:1; 딤후 1:3; 히 9:9; 히 10:22; 고후 5:11; 벧전 3:16; 롬 2:15; 딛 1:15; 고전 8:7; 요 8:9; 벧전 3:21; 고후 4:2; 고후 1:12
위의 구절들을 생각해 보고, 믿음과 양심과의 관계를 공부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