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2월 16일 금요일 삼하 2:12-3:1 이스라엘과 유다의 전쟁

Jeehyun 2022. 12. 16. 18:52

맥체인성경읽기

역대하 18, 요한계시록 7, 스가랴 3, 요한복음 6

묵상구절

2:12 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 기브온에 이르고

2:13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 기브온 못 가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앉으니 이는 못 이쪽이요 그는 못 저쪽이라

2:14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청년들에게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요압이 이르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2:15 그들이 일어나 그 수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두 명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두 명이라

2:16 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헬갓 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

2:17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2:18 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

2:19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2:20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이르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나로라

2:21 아브넬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가서 청년 하나를 붙잡아 그의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그의 뒤를 쫓으매

2:22 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2:23 그가 물러가기를 거절하매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의 배를 찌르니 창이 그의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이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

2:24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 가 기아 맞은쪽 암마 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2:25 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무리를 이루고 작은 산 꼭대기에 섰더라

2:26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이르되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

2:27 요압이 이르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2:28 요압이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2:29 아브넬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2:30 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무리를 다 모으니 다윗의 신복 중에 열아홉 명과 아사헬이 없어졌으나

2:31 다윗의 신복들이 베냐민과 아브넬에게 속한 자들을 쳐서 삼백육십 명을 죽였더라

2:32 무리가 아사헬을 들어올려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조상 묘에 장사하고 요압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헤브론에 이른 때에 날이 밝았더라

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Ⅱ. 양군 간의 충돌

1.양측이 내란에 군사력을 다 출전시켰는지의 여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사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30, 31절).

다음 사실에 주의하자.

(1) 유다 족속의 사람들은 표면에 많이 나타나지 않으나 모든 백성들을 다윗에게 복종시키기 위해서 더 용감하고 활기있게 행동한다. 그러나 다윗은 모든 일이 원만히 이루어지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 흘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와주시기를 기다리면서 공격적으로 행하지 말라고 하는 듯하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은 그렇게 하는 것이 고귀하기 때문이다(시 72:14). 심지어 자기의 원수까지도 부하로 생각하고 그렇게 대했다.

(2) 이스라엘 사람들은 중립인 태도를 취하면서 다른 족속들이 이와 같은 시기에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를 주시하면서 묵묵히 이스보셋의 지배 하에 있을 수 있었다. 두 마음을 품지 않은 현명하고 힘세고 싸움 잘하는 군사들 대부분은 통치자의 손아귀에서 7년 동안 유명무실하게 지내왔다. 하나님의 섭리는 경우에 따라 이 사람들의 우매함을 통해서 이행되기도 하고 또 때에 따라서는 행동을 통해서 이행되므로 이들은 일치되지 않지만 하나님 섭리는 동일하다.

2.이 내란을 일으킨 사람은 아브넬이다.

다윗은 사건이 진행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으나 사울의 집과 그들의 두목인 아브넬은 도전을 가했지만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러므로 "급히 나가서 다투거나" 말다툼에 앞장서지 말아야 한다. "욕을 보게 될 때에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 이다(잠 25:8). 어리석은 자의 입술과 손은 분쟁에 개입한다.

3.내란이 벌어진 곳은 기브온이었다.

아브넬이 이곳을 택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고 사울의 친구가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아브넬이 전쟁을 벌렸기 때문에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은 이를 거절하지 않고 이 전쟁에 가담하여 "기브온 못 가에서" 아브넬과 만났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했기 때문에 지리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양측 중간에 있는 연못은 양측에 생각할 여유를 가지게 했다.

4.양측에서 각기 12명씩 출전시키자는 제안을 아브넬이 했고 요압은 이를 수락했다.

👉 13절, 스루야의 아들 요압
본절은 기브온으로 향하는 아브넬 일행을 저지하기 위하여 요압 일행이 기브온 못가에 진침으로 그들과 조우하게 되었음을 보도한다. 사울 왕가에 군대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 이 있다면, 다윗 왕가에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 이 있었다. 이러한 대구적인 표현은 두 왕가 사이에 조성된 팽팽한 긴장 관계를 더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요압: 다윗과 친인척 관계, 다윗의 생질.
이렇게 다윗과 친인척 관계에 있는 ‘요압'은 다윗외 군대 장관으로서 용사 중에 용사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23:18.19). 그는 다윗 왕국이 자리를 잠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독단적인 성격으로 다윗의 뜻에 반하여 아브넬, 아마샤, 압살롬 등을 살해함으로써 다윗의 마음을 괴롭혔으며 (3:27; 18:14; 20:10), 결국 그러한 이유로 후에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왕상 2:28-34).

(1) 이 기교있는 대결은 운동 경기 같이 시작됐다.

아브넬이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고 했다. 아마도 사울이 폭군같이 자기 부하들에게 이런 야만적인 장난을 해서 아브넬이 그에게서 배워서 부상을 입고 전사하는 것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유혈과 공포심을 잊으려 했다.

아브넬이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는 말은 "우리 앞에서 싸우게 하자" 는 뜻이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긴다" (잠 14:9). 인간의 피를 낭비하는 아브넬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고 내가 희롱하였노라" 고 하는 자이다(잠 26:18, 19).

 👉아브넬은 양측을 대표하는 기량이 뛰어난 용사들로 하여금 싸우게 함으로써 승부를 결정짓자고 제의하였던 것.

다윗 밑에서 성장한 요압은 지혜가 있어서 이같이 어리석은 제안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그 같은 말을 할지라도 그 말에 저항하거나 부정할 결의도 약했다. 왜냐하면 그는 명예로운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도전을 거절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압은 "일어나게 하자!" 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요압이 이같은 장난을 좋아하거나 그 결투에서 승리하리라는 확신에서가 아니라 자기의 적수로부터 지분거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줏대없고 거만한 사람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고귀한 생명을 잃었을까! 양측에서 각각 12명이 명단에 의해 선수로 출전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 운명을 걸었다.

아브넬의 선수들이 진지를 먼저 차지했기 때문에 그들이 먼저 출전한 것 같다(15절). 아브넬은 미련한 야망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 일파의 두목이 되었다.

👉 베냐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둘.. 다윗의 신복 중 열둘..
-사울의 진영을 나타내는 데 특별히 ‘베냐민׳ 이 언급된 것은 북이스라엘 군대가 사울이 속해 있던(삼상 10:21) 베냐민 지파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베냐민 지파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다윗의 진영파 대적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사울에게 속한 사람들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이머 여호와께 버림을 받은 왕이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어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선발된 자들의 수가 열둘인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 두 진영 중에 누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지녔는지를 입증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2) 이 결투가 어떻게 시작되었든지 피로 끝났다(16절).

출전한 사람들은 각기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하여 이들은 일제히 쓰러졌다. 24명 전원이 칼에 찔려 쓰러져서 양측이 팽팽히 비기는 결과를 초래해서 어느 측에서도 용서를 빌거나 살려달라고 애걸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본문은 스물네 명의 사람들이 모두 죽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저자는 이 사건이 동족간에 벌어진 격렬하면서도 무모한 전쟁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들이 서로 약속한 대로 서로 죽음으로 해결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도 해하고 오직 죽음을 통해서 승리를 쟁취한다. 양측의 완고한 고집은 그들의 격투장에 붙여진 "헬갓핫수림" (완고한 사람들의 들판)이란 지명이 잘 상기시켜 준다. 육체적으로 강인할 뿐만 아니라 굳고 흔들리지 않는 이들의 의지는 죽음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잔다" (시 75:5). 광대한 것을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희박한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생명을 잃는 사람은 다시 얻게 된다.

5.전군이 교전하여 아브넬의 군대가 패전한다(17절).

앞서 있었던 기브온 못가에서의 격투는 양측 군사가 다 죽은 무승부의 전투였다. 그래서 아브넬은 다른 전쟁을 일으켰으나 그들의 실패로 끝났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므로 다윗 측이 승리했다.

👉 17절, 그날의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양진영의 대표자들간에 이루어진 싸움의 참혹함과 승부가 명확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원문의 단어 사용은 이 날 있었던 전투가 굉장히 잔인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이 패함
패함: 수동태를 사용, → 이는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패하게 한 결정적인 주체가 다윗의 신복들이 아니라 배후에서 역사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신적 수동태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다윗의 신복들을 사용하셔서 사울의 진영에 패배를 안겨주신 것이다.

아브넬의 무리(아느눼) ↔ 요압의 무리(암)
암: 군사들, 혈통적 동실정을 강조하는 ‘백성들’이란 개념으로 흔히 쓰임.
→ 이러한 용어상의 차이는 싸움의 결과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외형적으로는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요압의 군대보다 여러 지파들의 연합체라 할 수 있는 아브넬의 군대가 강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요압의 군대가 더 강하며 걸국 승리할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의 휘하에 있는 요압의 군대는 선민 의식으로 뭉쳐진 군대인 반면,
↔ 아브델의 군대는 단지 싸움을 하기 위한 집단어란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이다. 둘중 어떠한 업장을 취하더라도 본문의 ‘아느쉐’ 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다고 볼 수 었다. 따라서 ‘아느쉐' 와 ‘암'은 두 집단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저자가 의도적으로 사용한 단어임어 분명하다.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피살됨(사무엘하 2:18-24)

 👉
-앞선 12-17절: 남부 유다와 복부 이스라엘이 기브온에서 전투를 하였으며 복부 이스라엘이 패하였음 기록.
-18-23절: 북이스라엘이 남유다에게 페한 이후에 요압의 형제인 아사헬이 아브넬을 잡으려다 그에게 오히려 죽임을 당하는 일화가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이 사건을 굳이 다루는 것온 이 일로 인하여 요압과 아브넬이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이 후에 요압이 아브넬을 암살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3:26-30).
-스루야: 훗날 이새의 아내가 된 나하스의 딸(대상2:16). 다윗의 이복 누이.
-아사헬: 스루야의 막내 아들. 저자가 이를 밝히는 것은 이후에 연약한 막내 동생 아사헬의 죽음으로 인해 요압이 가졌을 아브넬에 대한 분노의 정도를 가늠토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사헬이 아브낼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은 복이스라엘과 남유다간의 전쟁 자체(17절)보다 더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저자가 다윗의 왕국이 첫걸음을 내믿는 중요한 시점에서 아사헬의 죽음을 이렇게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다윗의 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그의 형 ‘요압’ 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요압’ 은 아브넬과 압살롬을 비롯한 다윗의 정적들을 제거함으로써, 다윗 왕국의 기틀을 공고히 한 일등 공신이었다. 그러나 요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행동하는 인본주의적 인물의 대표자로서 앞으로 다윗을 통해 세워질 신정 왕국 체제의 가장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저자는 정당 방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아사헬 사건을 미러 언급함으로써 요압이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아브델을 죽인 것이 부당한 것이었음을 앞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아브넬과 아사헬의 대결에 대한 기록이다. 요압의 동생이고 다윗의 생질인 아사헬은 다윗의 군대장 중의 한사람인데 걸음이 빠르기로 유명했다. "그의 발은 들노루같이" 빨랐다. 이 같은 이름은 날아다녀서가 아니라 추격하는 데 빠르기 때문에 주어졌다. 아사헬은 기능있게 훈련된 군인으로는 아브넬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주시하자.

Ⅰ. 아사헬이 아브넬을 생포하려는 것은 경솔했다. 아사헬은 다른 사람들은 제쳐놓고 아브넬만 추격했다(19절).

다윗과 요압과의 혈연 관계를 자랑하는 아사헬은 그의 재빠름과 자기측의 승리의 전리품으로는 아브넬을 죽이든가 생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브넬만 처치하면 전쟁도 끝나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는 길이 무난히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이 아사헬로 하여금 아브넬을 맹렬히 추격하게 하였고 그의 좌우편에서 여러 사람을 손쉽게 생포할 수 있는 기회마저 망각하게 했다. 아사헬의 눈은 아브넬만 주시했다. par negotio-즉 성취할 수만 있었다면 그의 의도는 매우 용감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한 사람을 제쳐놓고 발이 빠른 사람이 영광을 얻어서는 안 된다. magnis excidit-즉 지나친 포부는 위험하다.

👉아사헬은 오직 아브넬을 잡는 일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했음. 이러한 아사헬의 행동에는 적장을 죽여 전쟁을 마무리하고 공을 세우겠다는 그의 군인으로서의 충성스런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는 아사헬의 무모하고 노련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발의 빠르기만을 믿고 상대의 군사적 능력이나 정황은 살피지 않은 채 무조건 아브넬의 뒤만 쫓았기 때문이다. 23절을 보면 아사헬은 걸국 자기 의 달리는 속도에 못 이겨 아브넬의 창에 찔려 죽고 만다.

Ⅱ. 아브넬은 아사헬이 자신을 지나치게 노출시키는 위험에 주의를 주고, "화를 자처하지 말라" (대하 25:19)고 권고하리만큼 관대하다.

1.아브넬은 자기보다 작은 전리품(prey)에 눈을 돌리라고 권했다. "너는 소년 하나를 잡아(21절) 포로로 삼고, 너보다 힘이 우월한 자에게 관여하지 말라" 고 하였다. 모든 경쟁에서 자신의 능력을 상대방의 능력과 비교하고 합당한 적수인가를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자신의 능력을 평가하고 주의해야 한다.

👉 아브넬은 자신을 뒤쫓아오는 자가 아사헬임을 확인하고 그에게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너를 위하여..’ → 3번이나 명령함

원문의 아브넬의 명령은 모두 아사헬을 위한 것으로 아브넬은 아사헬을 해칠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본서 저자가 짧은 명령의 구문에서 거듭 이 전처사구를 기록한 것은 이후에 등장하는 아사헬의 죽음이 아사헬 스스로 자초한 것임을 미리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아마도 아브넬은 당시 북이스라엘이 쇠락하여 가는 상황에서 장차 이스라엘이 하나로 통합될 경우 요압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아사헬을 죽이지 않고자 하였을 것이다.

아브넬이 아사헬에게 제의한 것은 그에게 합당한 상대를 찾아서 노락물이나 취하고 자신을 쫓지 말라는 권고한 것이다. 말하자면 본문은 자기처럼 노련한 자가 아사헬과 같은 경험 없는 자의 상대가 되어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

이러한 본문에는 아사헬을 해처지 않으려는 아브넬의 의도와 자신의 상대가 안되는 아사헬에 대한 아브넬의 조소가 동시에 담겨 있다.

아사헬은 아브넬의 제안을 정면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아사헬은 사울 진영의 최고 통솔자인 아브넬만을 붙잡기를 원하는 야심을 가졌다. 본문은 ‘치우치기 원하지 않고…’ 라고 표현하며 아사헬이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공을 세우려는 공명심에 휩싸여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2.아브넬은 자기를 기필코 죽이려고 하는 아사헬에게 오히려 아사헬 자신이 죽을까 조심하라고 간청한다(22절). → 4번째 명령

👉네번째 명령으로, 아사헬을 끝까지 해치지 않으려는 아브넬의 태도를 반영한다.

아브넬은 요압을 사랑하거나 두려워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사헬을 죽이면 그의 미움을 사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수가 서로 존경하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 아브넬이 요압을 어떻게 대면하겠느냐고 근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명으로 종국에는 다윗이 왕국을 차지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확신을 무시하고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

👉아브넬과 요압은 현재 대적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지만, 과거 사울이 통치할 당시에는 동료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넬은 요압의 동생인 아사헬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20절). 그리고 아브넬은 자신이 아사헬을 죽인다는 것은 그의 형인 요압의 원한을 사는 것이란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말 가운데에는 아브넬 자신과 견줄 수 있는 인물은 다윗측의 최강의 용사라 할 수 있는 요압이기 때문에, 자기와 경쟁 상대도 안되는 아사헬을 죽이는 것은 용사로서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일이라는 뉘앙스도 포함되어 있다.

Ⅲ. 아브넬에 대한 아사헬의 경솔함은 치명적이었다.

아사헬은 아브넬이 자기를 두려워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 23절, ‘저가 치우치기를 싫어하매..’
아사헬은 아브넬의 거듭되는 권고를 계속적으로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다. 본문은 강의형이 사용되며 — 아사헬이 아브넬의 제안에 대해서 싫어한 정도가 아니라 강력히 거절하였음을 명확하게 나타낸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아브넬은 아사헬이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창 뒤끝으로 그 배를 찔렀다" (23절). 이 같은 공격은 아사헬에게 익숙치 않은 위기였고 경계하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아브넬은 전부터 사용해온 창으로 효과를 올렸다. 아사헬은 그 상처로 즉사했다.

👉 한글성경은 원문의 동사를 ‘찌르다’로 의역함. ⇒ 본래 ‘치다, 때리다’ 라는 의미.
이 동사의 원래적 의미를 살려서 본문을 이해한다면, 아브넬은 처음부터 아사헬을 창으로 찌를 생각없이 다만 창의 뒷부분을 이용하여 아사헬을 ‘쳐서’ 그의 공격을 저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사헬이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든 나머지 아브넬의 의도와 관계 없이 아브넬의 창 뒤끝에 찔려 죽고 만 것이다. 그리고 창의 뒤끝에 찔렸음에도 불구하고 창이 아사헬의 등을 뚫었다고 하는 것은 아사헬이 매우 빠르게 아브넬의 뒤를 쫓았음을 시사해 줌과 동시에 아브넬의 창 뒤끝이 매우 날카로웠음을 시사해 준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으로 인해 죽음을 직면한다. 재빠른 적과 창끝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재빠름과 창의 대결에서 아사헬이 죽음의 부상을 입는다.
  2. 인간은 종종 재능의 교만에게 배반당한다. 아사헬이 지나치게 이용한 재빠름은 그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그의 운명을 재촉했고, 그 재빠름으로 죽음을 피해 도망치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과 마주치게 되었다. 아사헬의 패망은 아브넬의 생명을 안전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침략자의 추격을 저지시켰고 아브넬에게 재규합의 기회를 주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사헬의 쓰러진 곳에서 머물러 섰고 요압과 아비새만은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격노하여 더욱 맹렬히 아브넬을 추격하여 해질 때에 그를 뒤쫓았으나 날이 저물어 할 수 없이 그 발을 쉬게 했다.
 👉 본서 저자가 거듭하여 아사헬의 죽 음을 스스로의 과오로 돌리는 것은 후에 이 사건을 이유로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3:27) 부당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만약 아사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그 스스로에게 있었다는 사실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으면 후에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에 대하여 다윗이 분개하고 요압을 저주한 것이(3:28,29) 오히려 부당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아사헬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23절의 ‘호메쉬’ 라는 단어 → ‘복부’ 라는 뜻으로 사용
-이는 구약 성경에서 오직 4회밖에 없음. 특별히 본서에서만 나타남.
-본서 저자가 이 명사를 사용하여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하는 사건, 이스보셋이 살해당하는 사건, 그리고 요압이 다시 무고한 아마사를 살해하는 사건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 묘사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즉 이는 인간의 과도한 욕심과 무모한 복수 등이 어우러진 부정적인 죽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아사헬의 죽옴과 4:6의 이스보셋의 죽음, 그리고 3:27과 20:10에 언급된 요압의 아브넬과 아마사 살해는 모두 부정적인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아사헬의 시체를 보고 다윗 진영의 군사들은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아브넬의 군사들을 뒤쫓아가지 않게 되었다.

●양군의 휴전(사무엘하 2:25-32)

Ⅰ. 침략을 한 아브넬이 비열하게 휴전을 제의한다.

아브넬은 마치 자기가 다시 두목이 된 듯이 그의 잔류 군사를 규합해 가지고 작은 산 꼭대기에 집결한다(25, 26절).

👉 아브넬의 군대, 요압의 군대 둘은 서로 소리칠 때 들릴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대치하고 있었음. 아브넬의 군대의 상황은 매우 열악해졌다. 처음에는 아브넬의 군대가 여러 군대로 나뉘어 편성되어 있다가 다윗의 군대에게 거의 다 죽고 겨우 한 군대 정도의 인원만 살아남았으며, 넓은 지역에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이제는 결국 산들 중 하나에, 그것도 작은 산꼭대기에 내몰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

전쟁을 추구하는 사람이 먼저 실증을 낸다. 피흘리는 것(살인)을 장난으로 여기던 사람(소년들로 일어나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14절)이 자기 자신이 패배하게 되자 피 앞에서 충격을 느낀 것이다.

아브넬의 말씨가 일변한 것에 유의하자. 칼(격투)을 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그가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고 말한다. 칼이 하루에 상하게 하였는데 아브넬은 그 칼이 자기에게 임하게 되자, "영원히" 상하게 하겠느냐고 생각한다. 아브넬은 형벌로 인해서 해가 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아브넬은 처참한 내란을 종결시키기 위해 요압 앞에 나타나서 "칼로 인해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 말한다. 전쟁을 결산하게 되면 아브넬에게 불리하게 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전쟁에 가담하면 손해를 입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 지파와 베냐민 지파 간의 전쟁이 끝났을 때 당한 쓰라림과 황폐함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른다(삿 21:2). 아브넬은 요압에게 휴전하기를 간청하면서 서로 물로 씹어서 멸망당해서는 안 될, 서로 형제임을 자처한다. (간교하게도 동족 의식을 내세워 휴전을 제안함. 아브넬은 요압의 군대로 하여금 자신을 추적하는 일을 중단시키기 위해 다양한 동사를 사요앟고 있음. )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1.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할 때에는 구실을 제기하기 쉽다.

만약 아브넬이 침략자라면 그가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불평하거나 양측이 형제임을 호소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아브넬로 하여금 전쟁에 패하였음을 알게 하고, 그가 제기하는 이유는 재규합하고 보완해서 흩어진 그의 병력을 패망에서 구출시키자는 것이다.

2. 사건의 결과는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한다.

아침에 기쁨을 주던 것이 저녁에 침울하게 하기도 한다. 분쟁에 앞장 서던 사람이 그 분쟁이 끝나기도 전에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분쟁에 개입하기 보다 회피하는 편이 좋다. 모든 죄는 마지막이 쓰고 종국에 가서는 뱀같이 문다.

Ⅱ. 요압도 침략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상관(다윗)이 피(흘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관대하게 휴전 제의를 받아들인다.

요압은 전쟁에 앞장 서려는 아브넬을 비난하고 피를 많이 흘린 그를 책망한다(27절). "네가 흔단의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면" (서로의 사이가 벌어지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역자 주)이라는 말은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더라면 격투하거나 칼을 뽑지 않았을 것이다. 불평하는 자는 칼에 멸망 당한다.

그러면 누가 먼저 칼을 뽑았는가, 누가 싸움을 시작했는가? 이제 백성들은 갈라졌다. 백성들은 싸움을 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명심해야 한다. 도전이 없었다면 싸움을 벌이지 않고 아침에 흩어졌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장난을 시작하는 사람이 먼저 후회하고 불평한다. 요압이 계속 공격해서 아브넬의 군사를 제압했더라면 결례를 범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수의 과오를 동정하고 이스라엘군 사령관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면서 나팔을 불어 추격을 중지시켜 아브넬을 후퇴하게 하였다(28절). 요압이 피흘림을 예방한 것은 잘한 일이다. 군인들이 자기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본 요압은 어떠한 사람도 해하지 않고 온 이스라엘의 행복을 추구하는 다윗의 교훈에 순종했다.

Ⅲ. 양 군은 분리하여 밤새도록 행군하여 아브넬 군대는 요단강 건너편 마하나임으로 돌아갔고(29절) 요압과 그의 군대는 다윗이 있는 헤브론으로 돌아갔다(32절).

양측의 전사자를 계수하였다. 다윗측에는 아사헬 외에 19명이 전사했고(30절) 아브넬 측에서는 360명이 전사했다(31절). 이보다 앞서 있었던 내란에서의 전사자(삿 7:6, 20, 44)에 비교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현명하고 온화해진 증거이다. 여기에 아사헬의 장례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다른 전사자들은 전장(戰場)에 매장하고 아브넬의 시체는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무덤에 장사하였다(32절). 여기서는 두 가지의 죽음의 특성을 볼 수 있으나 부활시에는 신앙으로 인한 부활과 불신앙으로 인한 영원한 죽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