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2월 19일 월요일 삼하3:22-30 아브넬이 살해되다

Jeehyun 2022. 12. 21. 09:07

맥체인성경읽기

역대하 22, 23, 요한계시록 10, 스가랴 6, 요한복음 9

묵상구절

3:22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3:23 요압 및 요압과 함께 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말하여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갔나이다 하니

3:24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그를 보내 잘 가게 하셨나이까

3:25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3:26 이에 요압이 다윗에게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3: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3:28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3: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3: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아브넬의 피살(사무엘 하 3:22-39)

여기서는 요압에 의한 아브넬의 피살과 그에 대한 다윗의 깊은 분개를 볼 수 있다.

Ⅰ. 요압은 아주 건방지게도 다윗이 아브넬과 약정을 맺은 것은 잘못이라고 대들었다.

 👉 이제껏 되어진 아브넬과 다윗의 정치적 협상이 요압의 부재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브넬이 헤브론에 왔는데도 어떻게 요압이 잠잠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함을 풀어주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에 의해 죽었다. 때문에 다윗은 아브넬과의 협상에 요압이 방해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요압과 그 부하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마침 아브넬이 다윗과 같이 있을 때, 요압은 외지 근무를 하고 있었다. 아마 블레셋 군대나 사울 일파를 추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압은 돌아오자 아브넬이 막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다(22, 23절). 더구나 다윗이 그에게 큰 친절을 베푼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아브넬이 다윗에게 다녀간 사실이 전쟁에서 돌아온 요압에게 보고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는 2:12 이후 다시 ‘아브넬' 이 그 아비 ‘넬'과의 연관하에 소개되고 있다. 이는 보고 내용의 핵심이 북부 이스라엘의 군장 아브넬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도 아닌 북이스라엘의 군장 아브넬이 다윗에게 다녀갔다는 사실을 요압에게 확실하게 보고하기 위해 그의 혈통까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윗 진영의 군대 장관인 요압에게 충격적인 보고가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의 군장 아브넬은 남유다에 있어서 국가적인 원수일 뿐 아니라, 요압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동생을 죽인 개인적인 원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러한 원수가 다윗 왕에게 왔는데, 어떻게 평안히 갈 수 있느냐׳ 라는 반어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

요압은 실상 다윗의 신중한 처사에 만족하고 거기에 묵종해야 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런 일을 당하든 다윗은 지혜롭게 선하게 처신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명분에 회의를 가졌듯이, 요압도 마치 다윗의 명분에 회의를 가졌다는 듯이, 다윗을 면박하며 어리석다고 했다(24, 25절). "어찌하십이니까?" 마치 다윗이 자기의 처신을 그에게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식이다. "어찌하여 저를 보내었나이까? 그를 투옥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는 간첩으로 온 것이니, 필경 당신을 배반할 것입니다."

👉다윗과 아브넬 사이에 이루어진 정치 협상의 진상을 모르고 있는 요압이 아브넬의 방문 목적을 이와 같이 고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과연 요압이 자기 군주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뻔뻔했는지, 다윗이 그것을 견딜 만큼 인내심이 강했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사실 요압은 다윗을 "바보" 라고 불렀다. 아브넬이 자기를 속이려고 왔는데도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다윗이 뭐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무서워 말못했듯이(11절),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마 요압을 무시해서 대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요압이 다윗의 답변을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오만한 자였는지도 모른다.

Ⅱ. 요압은 무모하게도 아브넬을 다시 불러오게 하려고 사람을 보냈다.

👉 요압은 다윗과 대화를 마친 뒤 아브넬을 잡기 위해 비밀리에 사람들을 파견하였다.

본문에서 요압이 아브넬에게 ‘사자들’ 을 보냈다는 것은 다윗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아브넬이 안심하고 헤브론으로 돌아오도록 하였음을 암시한다. 만약 군사들을 파견했다면 아브넬은 눈치를 채고 저항하거나 도망갔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요압의 계략은 성공을 거두어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오게 했으며 이때 요압은 아브넬을 자신의 손으로 죽임으로써 동생의 원수를 갚게 된다.

그와 은밀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구실을 붙였다. 그리고는 잔인스럽게 자기 손으로 아브넬을 죽였다. 마치 다윗이 더 자세한 지시를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처럼 꾸며서 다윗의 이름을 빙자했다는 사실은, "그러나 다윗은 알지 못하더라" 는 말속에 숨어 있다(26절). (다윗은 아브넬 암살 사건과는 무관하였음)

아브넬은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하게 헤브론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성문에서 요압이 기다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다가가서 은밀히 말했다. 그는 자기가 아사헬을 죽일 때 한, "내가 어찌 그대의 형 요압에게 낯을 들랴?" (2:22)고 했던 말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요압은 그를 죽였다(27절). 그리고 아비새도 이 계획에 공모했으며, 조력했던 것 같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자기 형을 도우려 했던 것 같다(30절). 그래서 그는 공모자의 비난을 받았다.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였도다." 그러나 실상은 아비새는 단지 그런 의향을 알고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서 보면,

1.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는 것이 확실하다.

아브넬은 악의를 품었었고, 자기 양심을 거역하고 다윗에게 반역했었다. 게다가 이제 비열하게 이스보셋을 버렸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생각한다는 미명 하에 그를 배신했다. 그러나 실상은 교만과 원한과 불만 때문에 저지른 일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비록 이스라엘의 통일이라는 지극히 선한 사업을 기도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토록 사악한 자를 들어 쓰시려 하지 않으셨다. 아브넬과 같이 야비한 인간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2. 그러나 요압이 불의하며, 그가 한 행동이 약하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자였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그의 마음을 따르는 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수 많은 선왕들이 나쁜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다.

(1) 이런 짓을 한 그 구실로써 매우 부당했다.

아브넬은 사실 요압의 동생 아사헬을 죽였다. 그리고 요압과 아비새는 그의 피의 원한을 갚으려고 가면을 썼었다(27, 30절). 그러나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것은 정정당당히 전쟁터에서였다. 그 전쟁터에서 아브넬은 실로 도전을 보였고, 그래서 요압은 친히 그 도전에 응수하여 아브넬의 친구 여럿을 죽였다. 아브넬이 그를 죽인 것은 마치 정당방위와 같았다. 죽이기 전에 먼저 정당한 경고를 보냈다(그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지 못해 그렇게 했다. 그러나 요압은 여기서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 (왕상 2:5)를 흘린 것이다.

👉 아브넬은 처음부터 아사헬을 죽일 의도가 없었으며 정작 죽이게 된 것도 정당 방위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요압은 불의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르려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걸국 요압의 생애에서 반복된 이러한 불의한 행동들 때문에 요압은 다윗 왕가의 성립에 있어서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3:28-29; 16:10; 19:22). 그리고 본절의 이 행동은 다윗의 죽는 날까지 기억되어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그를 제거할 것을 당부하게 된다(왕상2:5,6).

2:23에서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할 때에두 → ‘배를 찌르다’ 라는 표현을 사용함.

아사헬은 너무 빠른 속도로 아브넬에게 달려든 나머지 아브넬의 창 뒤끝에 배가 찔려서 죽옴을 맞이했던 것이다. 저자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행동은 국가적인 원수를 척결한다는 대의 명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동생의 죽음을 그대로 갚아주려는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아브넬을 죽인 요압의 행동은 율법적인 근거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 오히려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적 복수심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다윗과 아브넬이 쌍방간에 언약을 맺었고 그 언약 안에서 다윗이 아브넬의 평안을 보장했다면 요압은 한 나라의 왕이 맺은 언약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맥하에 등장하는 본문은 요압에 대한 저자의 부정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다.

(2) 아브넬에 대한 요압의 적개심의 저변을 생각해 보면, 이 사건은 더욱 비열해진다.

요압은 당시 다윗 군대의 장군이었다. 그러나 아브넬이 이 진영에 들어오게 되면, 그가 요압보다 더 원로요 전술에도 능하기 때문에,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터였다. 요압은 이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경쟁 의식에서 머물지 않고 피 흘림의 죄를 졌던 것이다.

(3) 비겁하게, 그리고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나서 죽였다(신 27:24).

정당하게 도전을 했더라면, 그는 군사다웠을 것이다. 그러나 자객처럼 은밀히, 비겁한 겁쟁이처럼 죽였다. "그의 말은 기름보다 더 매끄럽다. 그러나 뽑힌 칼이로다" (시 55:21). 그는 역시 이처럼 비열하게 아마사도 죽였다(20:9, 10).

(4) 그런 짓은 다윗에 대한 모독이요 권리 침해였다.

요압도 알다시피, 다윗은 아브넬과 협약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아브넬은 당시 사실상은 자기의 주인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요압은 바로 다윗의 측면을 공격한 셈이었다.

(5) 게다가 성문에서, 공공연히, 얼굴하나 붉히지 않고 처치했다는 데서, 그의 살인죄는 더 한층 무거웠다.

성문이란 바로 법정이요 민중의 회의 장소였다. 따라서 요압은 정의를 모독한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이나 사람을 도무지 무서워할 줄 모르며, 자기가 최고인 양 생각하는 자로서, 법관들의 공정한 선고와 군중들의 정의로운 분개심을 모두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헤브론은 레위인들의 성읍이요, 도피성이었던 것이다.

Ⅲ. 다윗은 이 비열한 행동에 대해 몹시 가슴 아파했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혐오의 감정을 표했다.

1.그는 아브넬의 피의 죄책에 대해서 손을 씻었다. 아무도 요압이 다윗과 어떤 내통을 하고 나서 그런 것을 한 것이 아닌가(그리고 요압은 오랫동안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하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무죄함을 진지하게 하나님께 아뢴다.

"나와 내 나라(내가 그러니 내 나라도 그러하도다)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무죄하나이다" (28절).

어떤 불상사가 생겼을 때 우리가 거기에 무관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위안이 된다. "우리는 이 피를 흘리지 아니했도다" (신 21:7).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비난을 당하고 의심을 받을 수는 있다.

 👉 여기서 다윗이 요압을 저주한 것은?

단순히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한 것이 개인적 복수에 의한 불의한 행동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요압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이스라엘의 통일이라는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아브넬을 살해함으로써 막으려 하는 사단적인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2. 다윗은 이 사건으로 인해 요압과 그의 집안을 저주했다(29절).

"그것이 요압의 머리로 되돌아갈지어다. 피가 요압을 고발하여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복수가 그에게 임하기를…… 어떤 유전적인 질병이나 그밖의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자식들에게 징벌이 임할지어다. 이 처벌이 지연되면, 일단 그 처벌이 내렸을 때는 그만큼 오래 지속되리라. 이 자손들이 유출병이나 문둥병같이 사회 생활을 금지시키는 그런 질병으로 인해 혐오스럽게 낙인이 찍힐지어다. 그들이 거지나 불구자가 되어,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게 될 것이요, '그도 요압의 혈족이라'는 말을 듣게 하리라."

이 말을 보면, 피 흘림의 죄는 집안에 저주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복수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복수하실 것이요, 그 피해가 자손들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살인자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라고 하는 이런 격한 저주보다는 다윗이 그 살인자 자신을 처벌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 다윗은 왜 요압에게 사법적인 형벌을 내리지 않고 대신 저주하는 것을 택하였을까?
아마도 39절의 언급으로 보아서 이 당시 다윗은 요압을 사법적으로 처리할 정도의 세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저주를 내렸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이 처리하지 못하는 현실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서 하나님의 손에서 처리되기를 바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후에 솔로몬은 요압을 처형하면서 그것이 자신을 대항한 정치적 역모의 대가일 뿐 아니라 과거 아브넬의 살인 사건에 대한 사법적 형벌임을 확실히 하였다(왕상 2:31). 또한 다윗은 요압에게 이러한 끔찍한 저주를 내림으로써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결백을 더 확실하게 입증해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백탁병자, 문둥병자…
요압 가문에 임할 저주로 언급된 이 두 가지 질병은 부정하게 되는 병이다.
이 병을 가진 자는 어떤 종교 의식에도 참여할 수 없었으며, 일반 백성들 과 격리되어 살아야만 했다. 따라서 요압의 집안에 대한 이러한 저주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 의식과 일상 사회 생활에서 소외되고 배제될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지팡이를…
이스라엘 내에서 땅을 가는 일을 결코 할 수 없을 것 → 요압의 집안이 기업의 땅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에서 배제될 것.

칼에 죽는 자..
전쟁 때에 요압 집안의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멸절되어 갈 것. 본래 이스라엘의 율법은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를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저주가 요압의 집안에 내린다는 것은 그들의 집안이 율법이 적용되지 않는 이방 민족과 동일한 취급을 당할 것임을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0절, 죽인 것은(먼저 나오는 죽인 →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
이 단어는 학살하다, 살해하다. 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아벨의 피를 흘린 가인의 범죄를 묘사하는 창 4:8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동물에 대해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사람에 대해서도 매우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에 대해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것이 명백히 불법적인 살인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여기서 ‘아비새’가 ‘요압’과 함께 등장하는 것은 아브넬의 죽음이 두 형제의 공모에 의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원어 성경은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하라그’)와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헤미트’)에 차별성을 드러낸다. 전자는 학살, 살해의 의미이고, 후자는 자연스러운 죽음.
저자는 이처럼 다른 동사틀 사용하여 각각의 죽음을 묘사함으로써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것은 볼법이 아니었는 데 반해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개인적인 복수에 의한 부당한 범죄이었음을 확실히 하는 동시에, 이 죽음에 대해 다윗은 무고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