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2월 20일 화요일 삼하3:31-39 아브넬을 장사하다

Jeehyun 2022. 12. 21. 09:12

맥체인성경읽기

역대하 24, 요한계시록 11, 스가랴 7, 요한복음 10

묵상구절

3: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3: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3: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3: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3:35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3:36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3:37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3:38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3. 다윗은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요압까지 불러모아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게 했다(31절).

"옷을 찢고 아브넬 앞에서 애곡하자." 즉 아브라함처럼, 그의 상여 앞에서 애곡하라는 것이다.

💡 본절에서 39절까지는 아브델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애도이다. 이 단락에서 다윗은 백성들은 물론 살인자 요압에게도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할 것을 명령하는 동시에 아브넬을 위한 애가를 지어 부른다. 또한 다윗은 금식을 통하여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비통함을 나타내며, 애가를 통해 정치적 조력자인 아브넬을 방자한 요압에 의해 잃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한다. 이로써 다윗은 자신이 요압을 조정하여 정적 아브넬을 죽였다는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오히려 이로 인하여 다윗의 의로움이 더욱 널러 알려져 국민 통합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다윗은 당시 관습을 따라 백성들로 하여금 슬픔을 나타내는 복장을 갖추게 하고 큰 소리의 애곡을 하게 함으로써 아브넬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자 하였다.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요압을 선두에 내세우며 자기와 함께한 모든 백성에게 본문과 같은 명령을 내린 것은 다윗 자신이 아브넬의 죽음과 아무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요압의 살인을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본절에서 다윗에게 사용된 ‘정관사’ 는 ‘한 왕’ 이란 뜻으로, 다윗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는 다윗을 이미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는 다윗이 아브낼의 죽음을 유다의 왕으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신하 아브넬의 죽음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결국 이 정관사는 본문 이후에 계속적으로 등장함으로써(32.33.36.37.38절), 북이스라엘의 세력이 아브넬의 죽음으로 완전히 무력하게 되었고 그 결과다윗의 왕좌가 더욱 공고해졌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리고도 다윗이 왜 그렇게 그들이 진실하고 엄숙히 애곡하며 그의 장례식에 참례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 준다(38절). 즉 "오늘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대인인 자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울과 맺은 동맹, 장군으로서의 그의 지위, 그의 권세,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해 온 위대한 봉사는 그를 "방백이요 위인" 이라고 부르기에 족하다.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백성들에게 알림으로써,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며 동시에 불의한 죽음을 당한 아브넬을 조상하였다.

다윗은 그를 성자나 성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으므로, 결코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록 자기의 원수였지만, 그를 찬양하는 것이 합당했을 때에는 그를 "방백(군지)이요 위인" 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에서 이런 사람이 죽었도다. 바로 이 날에 죽었도다. 바야흐로 그가 생애 중 최대의 일을 막 수행하려던 바로 그 때에, 백성의 복리를 위해 가장 충성할 수 있었던 바로 이 날에 죽었도다."

(1) 모두가 이 일로 통애하라.

죽음이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저 비천한 변화는 마땅히 통애할 일이요, 특히 유능한 방백과 위인이 죽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슬프다, 슬프도다!(계 18:10 참조) 살아 있는 자들의 영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도 죽음으로 인하여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가! 그러나 유능한 자들이 가장 필요한 그 때에 그런 자들이 죽는다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다. 공적인 손해는 모든 자들의 슬픔일 수밖에 없다. 모든 자들이 그 손해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다윗은,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공을 세운 자를 기념하여 영예를 돌리도록 조처했다.

👉 다윗은 남유다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대적 관계에 있었던 북이스라엘의 군장 아브넬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다윗이 자신은 상여 뒤를 따라간 반면 요압 과 그 백성들로는 상여 앞에서 애통해하도록 명령한 것을 볼 때에 아브넬의 죽옴에 대한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는 이 행사의 모든 일을 다윗이 통제하고 있음을 암시받을 수 있다. 또한 아브넬을 죽인 살인자 요압이 상여 앞을 걸어간 것은 그가 수치를 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2) 특별히 요압은 이 일을 통애하라.

마음에는 없었겠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이 일을 슬퍼해야 할 이유가 있다. 만일 그가 진심으로 통애했다면, 그를 살해한 자기의 죄를 회개했다는 표시가 될 것이다. 그가 단지 겉치레로 그런 일을 했다면-아마 그랬을 것이다-그것은 그에 대한 벌칙이요, 동시에 그의 형벌에 대한 당분간의 감면이었다. 아직 살인자를 피로써 속죄시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먼저 뭔가 눈물로써 속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마 요압은 그렇게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여기에 순복했을 것이요, 일단은 그가 이긴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어떤 허식을 부리더라도 그 몸은 영구차에 실려 있는 셈이다. Sit divus, modo non sitvivus-즉 성인으로 추앙받게 하라. 그러면 죽음은 면하리라.

4. 다윗 자신이 마치 상주인 양 시체를 뒤따르면서, 무덤에서 장례 식사를 했다. 그는 영구차를 수행하였고(31절), "무덤에서는 울었다" (32절).

아브넬이 지금까지 자기의 원수였고, 별로 좋은 친구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전쟁터에서 용맹스러웠었고, 이 난국에 공공복리를 위해 크게 기여할 수도 있었으므로, 과거의 모든 싸움은 잊어버렸고, 다윗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했다. 장례식에 참예한 모든 자들이 자기들은 이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그 때에 다윗이 무덤을 보고 한 말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자들에게 새로이 눈물을 자아내고 말았다. "아브넬이 어찌 미련한 자처럼 죽었는고?" (33, 34절)

👉 다윗의 애가의 목적은?
이 애가에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한 노래에서 발견되는 정교한 운율이나 감탄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애가는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아브넬이 죽은 경위를 밝히는 데 보다 직접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1) 그는 아브넬과 같은 위인, 행실과 용기로 이름난 자가 어리석은 자처럼 자기의 생을 마치게 되고, 우정을 빙자한 급살을 맞아야 했다는 사실로 심히 괴로운 듯이 말했다.

아무리 지혜롭고 강한 자라도 배신에서 면제될 수 있는 방편을 지니고 있지는 못하다. 아브넬, 곧 그 자신도 자기는 이스라엘의 난국을 타개할 지주가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시련을 겪는 정부를 바로 잡는 데 일익을 담당하리라고 믿었던, 그리고 훌륭한 복안을 가득히 가지고 있던 자가 비열한 적수에 의해서 우롱을 당하며 급기야 야심과 질투심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보라. 야심과 질투심은 지극히 영광스런 자만을 더럽히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이 세상적인 어떤 자랑 때문에 자만심에 빠져서는 안 된다. "방백들을 신뢰하지 말지어다" (시 146:3, 4). 따라서 우리는 우롱당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라. 사람이 자기의 생을 누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귀중한 모든 것도……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때가 오리니, 지혜와 염려와 정직으로도 그것을 막아낼 수가 없다. 그러나 윗 세상에는 어떤 도적도 훔쳐갈 수 없는 것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과 위안을 지속시키는 것은 스스로의 분별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은혜를 입고 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이 악인들의 양심을 견제해 주시지 않는다면, 약자와 무흠한 자들이 순식간에 강자와 악인들에 의해서 희생물이 될 것이며,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바보처럼 죽게 될 것이다.

(2) 또한 아브넬이 바보처럼 자기의 생을 마친 것은 아니라고 말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브넬이 어리석은 자처럼 죽었는가? 아니다. 아브넬은 범인, 곧 반역자나 중범인으로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런 자들은 공공의 정의에 의해서 죽는다. 그러나 아브넬의 손은 결박되지 않았고, 그의 말도 차꼬도 채우지 않았다. 즉 악인의 취급을 받지 않았다. 아브넬은 의인 앞에서, 법의 선고를 받고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사나이로서, 무흠한 자로서 불의한 자 앞에서 엎드러졌다. 도적과 강도들이, 가장 잔인한 자들이 그대를 죽였도다."

"아브넬이 나발처럼 죽었는가?" (칠십인 역은 이렇게 해독했다) 나발은 주정뱅이처럼 살다가 그렇게 죽었다. 그러나 아브넬의 운명은 세상에서 가장 슬기롭고 선량한 자가 지닐 수 있는 삶과 같았다. 아브넬은 아사헬처럼 무모하게 자기 목숨을 던지지도 않았다. 아사헬은 정당한 경고를 받고도 무모하게 창끝으로 돌진해 가서 급살을 맞은 것이다. 아무튼 자기들의 날수가 그렇게 단축되고, 게다가 저 세상을 위한 아무런 차비도 못 갖추고 바보처럼 죽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 다윗이 요압과 아비새를 암시하면서 ‘불의한’이란 말을 쓴 것은 다윗 자신의 세력이 약하여 그들을 지금 당장 처벌하진 못하여도(39절),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법함에 대해 반드시 형벌을 내리실 것이란 의미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사실 요압과 아비새는 당시 사회법상으로 볼 때에 죄를 면할 수도 었었다. 왜냐하면 고엘 제도에 근거하여 자기 형제의 살해자를 죽였다고 하면 그들의 아브넬 살해 행위가 죄로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엘 제도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살해 당하면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피의 복수를 할 수 있었다(민 35:9). 그러나 앞에서도 거듭 밝혔거니와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것은 전쟁 중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행위였다. 그러므로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것은 정당 방위였으며, 피의 복수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하나님의 공의를 기준으로 요압과 아브넬을 바라보았으며, 그에 따른 하나님의 형벌을 기대했기 때문에 애가를 통하여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였던 것이다.

5. 다윗은 그 날 종일 단식했다.

밤중까지는 아무 것도 먹지 않으려 했다(35절). 당시에는 크게 애통해 하는 자들은 당분간 육의 양식을 삼가는 것이 관습이었다(1:12; 삼상 31:13). 그런 때에 애통의 집을 잔칫집으로 바꾼다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짓이 되랴!

👉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불법한 자와 함께하지 않으려는 다윗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을 거론하며 맹세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자의 의지가 결코 꺾어지 않을 것을 공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이 아브넬에게 표한 이러한 경의는 백성들을 크게 기쁘게 했고, 다윗은 결코 살인 공모자가 아니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36, 37절). 시므온과 레위의 비행이 야곱을 의심하게 했듯이(창 34:30), 요압의 비행이 다윗을 곤란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다윗 자신은 신경을 썼다.

바로 이 때를 맞아, "왕이 한 모든 일이 온 백성을 기쁘게 했다" 고 했다. 이것은 다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1) 백성들에 대한 다윗의 깊은 애정.

다윗은 모든 점에서 백성을 기쁘게 해 주려고 애썼고, 불행한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유의했다.

(2)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호의.

백성들은 그가 한 일은 모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서로 즐겁게 해 주려하고, 또 기꺼이 즐거워하려는 마음 자세는 모든 관계를 원활히 해 줄 것이다.

6.다윗은 자기가 살인자들에게 안전하게 정의를 집행할 수 없었음을 한탄했다(30절).

그는 아직 약했고, 그의 나라는 신생국이었으며, 조그마한 동요가 와도 무너질 지경이었다. 요압의 집안은 큰 권력을 잡고 있었고, 대범했으며, 이제 와서 다윗이 그들을 자기의 원수로 삼는다는 것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던 터였다. 이들 스루야의 아들들은 다윗에게는 힘겨운 자들이었고, 법으로 다스리기에는 너무도 거대했다. 그러므로 사람, 곧 법권의 손에 의해서 살인자는 "죽여야" (창 9:6) 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었고, 자기는 사인으로서 만족하면서 심판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행악자들을 그 악행에 따라 보수하리로다."

그리고 이 일은 다음에 대한 감쇄라 하겠다.

(1) 다윗의 위대성에 대한 감쇄.

그는 기름 부음 받은 왕이다. 그러나 자기 부하들 때문에 겁을 먹고 있다. 부하들 중에는 그보다 강한 자도 있었다. 이름은 가졌고 책임은 져야 하나, 사용할 수 없다면, 어느 누가 권력을 좋아하랴?

(2) 다윗의 선함에 대한 감쇄이다.

그는 마땅히 의무로 알아서 이 일(처벌)을 해야 했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겼어야 했다. Fiat justia, ruat coelum-즉 정의는 집행하라.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만일 요압에 대한 법의 심판을 가했더라면, 이스보셋, 암몬, 그리고 그밖의 사람들에 대한 살인은 방지되었을 것이다. 요압을 살려 둔 것은 욕심에서 나온 정책이요 잔인한 동정심이었다. 의는 왕좌를 지켜 주지 결코 훼방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이 요압에게 내린 것은 단지 집행유예였다. 다윗은 임종시에 아브넬의 죄의 복수를 솔로몬(그는 전쟁의 칼을 뽑은 적이 없으므로 정의의 칼을 뽑기에 보다 적격자였다)에게 맡겼다. 형벌은 죄인들을 추적하며, 마침내는 사로잡고 말 것이다. 다윗은 아브넬의 아들 야아시엘을 등용했다(대상 2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