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월 20일 금요일 삼하19:9-15 다윗의 귀환 준비

Jeehyun 2023. 1. 21. 04:07

맥체인성경읽기

창21, 마20, 느10, 행20

묵상구절

19:9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19:10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19:11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19:12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19:13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19:14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19:15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본토로 돌아온 다윗(사무엘 하 19:9-15)

다윗이 압살롬의 패잔병들이 수도권 회복을 위하여 급히 예루살렘으로 행진하는 것을 보고 폭도들의 혼란을 일으켜 재결합을 하지 못하도록 곧 처리해 버리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무슨 이유로 그가 거기에 왔는지? 길르앗에 그와 함께 있는 개선군과는 함께 돌아올 수 없었는지? 물론 있었다.

① 그는 물론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온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왕으로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백성들의 자유를 회복시켰다. 백성을 강압으로 수탈하거나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다.

② 그가 환궁하는 데는 반대자도 없고 어떤 장애도 없을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가 출발하기 전에 백성들이 그에게 감화를 준 것은 더욱 그를 기쁘게 했을 것이다.

③ 그는 도의상 야인으로 가고저 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군대의 지휘관으로서가 아니라 일반 예속된 군인으로서 돌아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백성들의 총애를 받을 만큼 선하고 지혜로운 왕이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공포를 주는 강한 왕이라는 것보다는 더 위대하고 훌륭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는 자기 가정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축하식을 가지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협정을 볼 수 있다.

Ⅰ. 이스라엘 10 지파의 모든 백성들이 변론했다(9, 10절).

다윗 왕을 데려오는 일에 대해서 백성들은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반대하기를 "그를 혼자만 오게 하든지 그가 지금 있는 곳에 머물게 하라" 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이에 대해 이유를 들어 열광적인 계획을 보이기도 했다.

1.다윗은 자기들을 도와 적과 싸워 적을 물리쳤으며 자기들을 위해 봉사했으므로 이렇게 큰 은혜를 끼친 백성들로부터 추방생활을 계속하게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공익을 위한 선행은 잠시 동안은 잊혀질 수 있어도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잡히면 다시 기억될 것이다.

💡잠시 잠깐 압살롬의 수려한 외모와 간교함에 혹하여 다윗 왕을 거부하고 압살롬의 반란에 참여했던 백성들이 자기들의 경솔함을 반성하고 다윗 왕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평가하였기에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냄을 기억하였을 것.

2.압살롬은 그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우리는 어리석게 우리를 다스릴 사람으로 병든 삼목의 가지를 택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압살롬이라면 질색이다. 그는 사라졌다. 우리도 함께 그와 같이 죽을 자리를 간신히 모면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왕을 모셔다가 전과 같이 충성을 다하자." 아마 이 말은 왕을 모셔오자 혹은 말자는 것이 논쟁의 초점이 아니라 그를 모셔오지 않은 것이 누구의 잘못이냐는 것이 모두 그들의 논쟁거리였다. 이런 경우는 언제나 있는 것처럼 사람은 모두 자기를 의롭게 생각하고 남을 비난하는 법이다. 백성들은 장로들에게 잘못이 있다 하고 장로들은 백성들에게, 이 지파는 저 지파에게 전가했다. 자극적인 선행을 서로 찬양하고 그렇지 못하면 비난을 서로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적인 봉사는 언제나 무지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듣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관습을 뜯어 고치거나 상처를 싸매는 등등의 일보다는 책망하기를 더 좋아한다.

💡 10절,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일방적으로 책망한 것이 아니라,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셔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상당히 많은 의견이 오고간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셔 오는 일에 상당히 주저했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들 자신이 압살롬에게 기름을 부음으로 그를 이스라엘의 정식 왕으로 삼는 즉위 형식을 이미 거쳤기 때문이다. 이는 곧 다윗 왕위의 폐위를 뜻한다. 따라서 비록 압살롬이 죽기는 하였으나 폐왕의 왕위를 선뜻 다시 인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즉 복위를 위해서는 압살롬에 대한 이스라엘의 기름부음을 무효화시키는 절차가 필요하였는데, 이를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 바로 다윗에 대한 이스라엘 전체의 전폭적인 지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도 전쟁에서 승리한 후 환궁을 서두르지 않고 민심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백성들이 자신의 환궁을 자발적으로 요청하기까지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환궁 과정에서 지파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던 또 다른 이유는 다윗이 왕권을 되찾을 경우 압살롬의 반란에 동참하였던 자신들에게 돌아올지도 모를 불이익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Ⅱ. 유다 사람들이 다윗의 계획대로 먼저 왕을 영접했다.

오히려 다윗이 속한 지파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는 데 서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다윗은 항상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다 지파 외에 다른 지파들은 자기를 선대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가장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가장 불친절한 위험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지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낼 때까지는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유다 지파는 그의 입법자였다(시 60:7 참조). 그의 귀향 길은 더욱 뚜렸해졌다.

 💡 다윗은 자신의 메시지를 유다 지파에 직접 보내지 않고, 사독과 아비아달을 통해 보냈다. 이는 자신의 환궁 문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는 유다 지파 사람들 사이에 내재한 자신에 대한 거부감이나 불안감을 상쇄시키기 위해서는 중재인이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압살롬의 반역에 앞장선 유다 지파 내에는 아직까지 다윗에 대한 반감과 함께 다윗이 왕권을 회복할 경우 자신들에게 가해질 복수에 대한 우려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이러한 유다 지파를 오히려 자신의 환궁 추진에 앞세움으로써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함은 물론 반역에 앞장선 유다 지파까지 자신의 환궁을 환영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려 하였을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강력한 지파였던 유다 지파와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비록 왕위를 되찾는다고 하더라도 다윗의 통치력의 약화는 필연적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침묵하는 유다 지파에게 보다 능동적으로 다가서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신망을 받는 두 제사장을 특사로 파견하였던 것.

1.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을 유다 족속의 장로로 대우하고 그들로 왕을 자기 집으로 초빙할 것을 암시했다. 그것은 그 지파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11, 12절).

이런 일을 수행함에는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도 있고 신중성이 있고 다윗의 뜻을 잘 따르는 이 두 제사장들보다 더 적당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유다 족속들은 부주의하고 무기력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일을 시키는 이도 없고 하는 이도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은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들이 말없이 나태하게 계속 머물러 있다는 것이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압살롬과 관계를 가짐으로 다윗에게 큰 자극을 주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그의 은혜를 배신한 것을 앎으로 그의 왕위 환궁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로부터 확실한 보증을 요구했다.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정열적으로 자기를 불러 주지 않는가를 물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데 유다 족속은 어째서 가만히 있는가? 라고 책망을 했다.

어느 지파가 충성이 있고 용감한가 생각해 보자. 충성의 정도는 신분에 따라 다르고 혈통이나 친분에 따라 다른 것이다. 지위가 높은 자라고 의무에도 첫째가 되는 것은 아니다.

 💡 혈연에 호소하는 다윗의 이러한 환궁 정책은 이후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즉 이로 인해 다윗은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있었지만 다른 한편 이스라엘 전체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는 세바의 반란의 원인이 되고 만다(20:1,2).

2.다윗은 압살롬의 장군이었던 아미사에게 특별히 환심을 얻으려고 했다. 그는 요압가 마찬가지로 그의 조카뻘 되는 사람이었다(13절). 만약 그가 다윗을 위해 뜻을 비치기만 한다면 요압을 대신하여 그의 군대 장군으로 삼을 것을 약속했다. 그는 그를 친척으로 인정하고 그를 매우 좋아했다. 적이었던 사람과 친교해서 손해보는 일은 별로 없다. 아미사에게 다윗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위기에 대처해서 매우 좋은 처사였다.

그러나 다윗이 건방진 요압을 참을 수 없어 그 자리에 아미사를 지명했다. 아미사는 다윗의 계획을 방해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윗의 이러한 처사는 현명한 처사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이 일로 인해 아미사는 요압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다(20:10 참조).

💡 앞선 12절에서 유다 지파에 자신과의 혈연 관계를 상기시키며 지지를 호소한 다윗은 이제 본절에서는 범위를 좁혀 유다 지파의 실제적인 수장 아마사에게 혈연 관계를 언급하며 그를 자신의 군장으로 삼겠다고 제의함으로써 회유하고 있다.

아마사는 누구인가?
-사실 아마사는 다윗의 조카이기는 했으나 압살롬의 반란 때에 압살롬의 군장으로서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었다(17:25).

그렇다면 그러한 아마사를 다윗이 요압을 대신하여 자신의 군장으로 삼으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아마사는 당시 유다 지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자로서 다윗이 그와 및 유다 지파를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하지 못하였다면 유다 지파의 왕이 될 만한 자로 평가되는 인물이었다(Payne).
이러한 그를 자신의 심복으로 끌어들여 자신을 반대하던 세력의 마음을 얻고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다윗이 아마사를 자신의 군장으로 삼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다른 이면에는 다윗이 요압을 견제하고픈 마음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다윗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죽였다는 것에 대해 요압에게 전혀 항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압살롬을 잔인하게 죽인 요압에 대해 마음의 앙금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요압은 다윗에게 충복이기는 했지만, 때로는 다윗을 거칠게 몰아붙일정도로 무례하고(5-7절) 왕의 뜻을 여러 번 거스를 정도로(3:27; 18:14) 제어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요압은 수적 열세를 믿고 이번 압살롬의 반란군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수였으므로 그의 이스라엘에서의 위치는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쉽게 제어하기 힘든 요압의 급부상은 왕인 다윗에게 위협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다윗은 한편으로는 요압을 견제하고 한편으로는 유다 지파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아마사를 군장으로 세우겠다는 약속을 하였을 것이다.

다윗의 위와 같은 정치적 결정은 정당했는가?
-이러한 다윗의 행사는 결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반란을 진압하여 큰 공을 세운 요압을 봐두고 반란의 주도자를 군장으로 중용한다는 것은 공의롭지 못할 뿐 아니라 설득력도 없는 것이다. 또한 유다 지파만을 중용하는 것 역시 다른 지파와의 화합 차원에서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이러한 계획을 세운 것은 당시 다윗이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고 이해 관계에 따라 행동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윗의 이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유다 지파는 다윗의 왕권 회복이나 반란 진압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20:4,5), 아마사는 요압을 견제하는 역할도 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다윗이 그토록 견제하려 했던 대상인 요압이 아마사를 살해하고(20:10) 세바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20:22), 그외 위치만 더욱 공고해졌을 뿐이다.

3. 여기서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였다(14절). 이의없이 만장일치로 투표 결과 유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제사장들이 설득과 아마사의 관심을 통해 그들에게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 다윗은 이러한 환영을 받을 때까지 움직이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요단(그들이 거기서 만남)으로 돌아왔다(15절).

💡 유다 족속이 길갈로 옴
-유다의 긍정적인 반응에 고무된 다윗과 그의 신복들은 환궁을 위해 요단강에 이르렀다. 이에 유다 지파는 다윗의 요단 도하를 거들기 위해 요단강 근처의 길갈로 나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윗을 대적하던 유다 지파 족속들이 이제는 돌변하여 다윗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 지파는 다윗을 맞아 요단강을 안전히 건너게 한 후 예루살렘의 왕좌에 앉히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길갈로 내려왔다. 그런데 유다 지파의 이러한 행동은 다른 이스라엘 지파둘과 상의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다른 지파의 비난을 받았고 (43절), 결과적으로 세바외 반란을 초래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20:1,2). 이로 보아 유다 지파는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여 다른 지파들과의 유대 관계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길갈이라는 장소는 어디인가?
-이곳은 과거 하나님이 애굽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기억나게 하는 장소이며,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장차 얻게 될 기업을 소망 가운데 바라보았던 곳.
-길갈이 이러한 영적,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장소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곳에서 중요한 행사들을 가지곤 하였다. 특히 이곳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자 최초의 선지자라 할 수 있는 사무엘이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린 성읍 중 하나였으며(삼상 7:16),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의 왕위 즉위식이 거행된 곳이기도 하다(삼상 11:15).
-이러한 역사를 가진 길갈을 바라보며 다윗은 마땅히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여 하나님을 더욱 의지했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윗은 이 길갈로 건너가기 전에 만난 세 인물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16-3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의 왕좌에 그를 영접하고 모시는 사람들을 다스리신다. 주님을 먼저 마음으로 경배하고 그의 권능의 날에 즐거워하며 원수 중에서 다스리신다(시 10:2, 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