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33, 마가복음 4, 에스더 9,10, 로마서 4
묵상구절
[삼하24:1-25]
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2 이에 왕이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
3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4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사령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
5 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오른쪽 곧 야셀 맞은쪽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6 길르앗에 이르고 닷딤홋시 땅에 이르고 또 다냐안에 이르러서는 시돈으로 돌아
7 두로 견고한 성에 이르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에 이르고 유다 남쪽으로 나와 브엘세바에 이르니라
8 그들 무리가 국내를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9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10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를 위하여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
14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18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19 다윗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20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를 향하여 건너옴을 보고 나가서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21 이르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하니 다윗이 이르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 하는지라
22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아뢰되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 하는 도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23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백성의 계수(사무엘 하 24:1-9)
💡 본장에서 다윗이.행한 인구 조사 범죄는 다윗 한 사람의 잘못에 따른 것만이 아닐 뿐더러,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 아래 이루어졌음이 강조된다(1절). 또한 범죄를 회개함에 있어서도 다윗은 선지자의 지적 이전에 자신의 범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회개하며(10절), 속죄를 위해서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17-25절).
이러한 본장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측면을 관찰할 수 있다.
첫째, 다윗의 신앙이 성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앞선 11-20장의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연단을 받은 다윗은 영적으로 보다 성숙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신정 왕국 역사에 있어서 대표자 왕과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알 수 있다.
즉 백성들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다윗 왕의 인구 조사란 실책을 경유하여 내려진 것은, 왕이 백성을 대표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백성의 잘못은 곧 왕의 잘못이며, 왕의 잘못은 백성의 잘못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앞선 1-20장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명시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지만 이제 본장에서 이를 보여줌으로써 왕의 잘못의 배후에는 백성들의 잘못이 있음을 전달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만이 후에 왕국 멸망을 비롯한 신정 왕국의 각종 비극적 역사의 책임이 단지 왕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왕과 더불어 백성들도 회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를 알 수 있다.
즉 심판을 거두시기로 결정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제단을 쌓을 것을 요구하시는 모습은, 죄악에 사로잡힌 온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의 필연성을 보여준다.
Ⅰ. 다윗은 요압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을 계수하라고 명령한다(1, 2절). 여기에는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1.백성의 계수를 죄악시하는 것은 이상하다. 이 일에 무슨 해악이 있단 말인가? 모세도 두 번씩이나 백성을 계수했지만 범죄로 치죄받지 않았지 않는가? 정책적 인구 조사는 군주의 여타 정책 속에 들지 않는가? 목자가 자기 양떼의 수를 알아서는 안 되는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속한 모든 자의 이름을 아시지 않은가? 그는 이 계수를 선용할 수 없는가? 그가 이 일을 한다면 어떤 악을 행하는 셈인가? 대답해 보라. 백성의 계수가 죄였고 그나마도 큰 죄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일의 죄악이 어디에 소재하는지는 그다지 확실치 않다.
💡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는 다윗의 범죄가 다윗 한 사람만의 책임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사단의 사주로 다윗에게 생겨난 인구 조사하려는 마음을 이스라엘을 징계하려는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이 막지 않으시고 방기하셨음을 강조해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묘사를 근거로 인구 조사를 감행한 다윗의 무죄를 주장할 수 없다. 즉 다윗의 인구 조사는 이스라엘의 군사력을 확인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해 보려 한 다윗의 마음을 단지 사단이 적극적으로 충동질하고 하나님이 방기하심으로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자신의 군사력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더 컸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런 다윗의 마음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할 신정 왕국의 통치자로서 그 마음에서 하나님을 추방한 큰 범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1) 혹자는 신장이나 체력 면에서 무기를 들 정도만 되면 이십세 이하라도 계수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이 계수가 다윗왕의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법적 계수였던 때문이다(대상 27:23, 24 참조).
(2) 다른 이들은 다윗이 반 세겔을 요구하지 않은 게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반 세겔은 백성의 계수 시마다 생명의 속전으로 성소 예배를 위해 바쳐야 할 돈이었던 것이다(출 30:12).
(3) 또 다른 이들은 다윗이 자신의 공세를 부과할 목적으로 계수했다고 생각한다. 즉 다윗은 자기 내탕고에 넣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했고 따라서 그 액수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은 전혀 비치지 않으며 다윗은 세금을 징수하지도 않았다.
(4)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인구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성도 없었다는 것이 잘못이었다. 그것은 다윗 자신이나 백성을 불필요하게 괴롭히는 일이었다.
(5)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옛 약속을 모독하는 행위였다고 혹자는 생각한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아지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약속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거나 아니면 그 약속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계수할 수 없다고 하신 자들을 계수하려고 했다. 하나님이 말씀을 반박하려는 자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6) 이 일에 있어서 가장 그릇된 점은 다윗이 교만한 마음으로 이 일을 행했다는 것이다. 히스기야의 죄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는 교만심에서 자기의 보물 창고를 사신들에게 보였던 것이다.
[1] 그것은 헛된 교만이었다.
그것은 그토록 무수한 백성을 좌우할 수 있다는 교만심에서 나온 것이다. 순전히 하나님의 축복 탓으로 돌려야 할 인구증가를 마치 자기가 증가시킨 양 뽐낸다는 것은 교만이 아닐 수 없다.
[2] 그것은 자기 힘을 믿는 교만이었다.
그는 자기 나라의 인구 수효를 열방 중에 공포함으로써 더 두려운 나라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면 자기 군대 수로써 적을 압도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이로써 그는 그답지 않게 육체의 팔을 더 신뢰하였다. 하나님만 신뢰하자고 많이 기록했던 그가 이렇게 행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하는 죄를 심판하지 않으신다. 우리에게는 무해한 것 또는 적어도 조그마한 허물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큰 죄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살피시며 심령의 생각과 의도를 식별하신다. 그러나 그의 심판은 사실대로 행해진다.
2. 계수의 동기는 더욱 이상하게 표현되고 있다(1절).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신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다윗의 복된 통치를 감사하긴 커녕 이상하게도 먼저는 압살롬에게 빌붙고 나중에는 세바에게 혹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평화와 풍족이 그들을 방심하게 만들고 육욕적으로 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진노하셨다고 해서 다윗의 마음을 감동하사 백성을 계수하게 하셨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 범죄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극렬한 분노를 불러일으킨 이스라엘의 범죄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드러나지는 않음.
본문의 상황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분노하셨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러한 분노는 일차적으로 제21장에 기록된 ‘년부년 3년 기근'을 야기케 한 하나님의 분노와, 더 나아가 다윗 시대에 있었던 이스라엘과 다윗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분노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서 저자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본장에 기술되고 있는 내용이 일회성을 가진 특별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고 선민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형적 사건, 즉 ‘인간의 범죄’하나님의 징계-인간의 회개-하나님의 회복'을 보여주는 구속사의 전형적 패턴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본장의 사건이 이렇듯 구속사의 전형적 사건이라는 것은 결국 본장외 내용이 사무엘하 전체의 모든 사건, 그러고 더 나아가서는 구속사의 모든 사건을 풀 수 있는 해석학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의 장본인이 아니시란 것은 확신한다. 그는 사람을 시험하거나 유혹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사탄이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계수하게 했다(대상 21:1)는 말씀을 읽는다.
21:1 <다윗의 인구 조사(삼하 24:1-25)>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본문은 다윗이 범죄하게 되는 배경을 밝힘으로써 사무엘하는 물론 구속사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성경적 역사관을 소개하고 있다. 즉 본문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하도록 마음을 감동시키셨음을 밝힌다.
→ 이는 다윗의 범죄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 가운데서 진행되었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 것.
왕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긴밀한 관계
-본절의 기록은 앞선 사무엘서에 나오는 범죄 및 범죄에 대한 심판의 기록들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다윗의 대표적 범죄라 할 수 있는 밧세바 간음 사건과 우리아 살해 사건이 기록된 11장에서는 백성들과 상관없이 다윗만이 범죄의 주체로 나온다. 그러고 13-18장에서는 이러한 다윗의 범죄로 인하여 다윗 개인 뿐 아니라 다윗 주변의 여러 인물들과 나라 전체까지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기록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신정 왕국의 통치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즉 통치자 한 사람의 잘잘못에 따라서 통치자 자신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번영과 성공의 길을 걷기도 하고 고통과 분란의 비참한 운명에 빠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는 이후 열왕기서의 제반 기록들에서도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즉 사무엘서는 사울과 다윗 통치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 및 이로 인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역사를 기록하고, 열왕기서는 솔로몬과 이에 이어지는 분열 왕국에 있어서 열왕들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 및 이로 인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역사를 기록한다.
이처럼 사무엘서와 열왕기서가 왕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기록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왕의 중요성 때문이다. 왕의 신앙과 정책은 백성둘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이스라엘 역사의 번성과 쇠락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왕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는 신정 왕국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이 갖는 득특한 대표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왕은 하나님 앞에서 신정 왕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전체의 신앙을 가늠할 수 있었으므로 왕의 순종과 불순종에 성경 저자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왕의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신앙과 별개의 것이 아니며 왕의 순종은 백성의 순종을 대표하고 왕의 불순종은 백성의 불순종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양자간의 이러한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본장의 내용이다. 즉 본장은 이스라엘이 먼저 범죄하였고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다윗을 감동시키셔서 인구 조사를 실시케 하셨으며 그에 대한 징계로 이스라엘에 온역을 내리신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이는 백성의 범죄가 다윗의 범죄의 선행하는 원인이 됨을 보여준다. 이는 단지 인구 조사의 범죄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왕의 범죄와 백성의 범죄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본절은 비록 구약의 역사서가 왕정 시대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왕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었지만 왕의 공과가 백성들의 공과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본서 저자는 본서의 말미에서 왜 이러한 사실을 굳이 밝히고 있을까?
-이는 후대에 본서를 읽는 자들이 나라의 혼란이나 재앙 등의 책임을 통치자에게만 돌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 즉 본절은 역사적 비극의 책임이 왕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내용의 기록이 없었다면 본서의 일차 독자들은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 보다는 통치자들만을 원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 이하의 내용을 보며 왕의 과오를 통해 자신들의 잘못을 돌아보고 역사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탄은 가롯 유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배신할 생각을 심었듯이 이스라엘의 대적으로써 이 일을 제안했던 것이다. 의로우신 재판장되시는 하나님은 다윗의 이 죄를 이용해서 이스라엘의 다른 죄를 징벌하시려는 목적으로 이를 허용하셨다. 그는 이 일이 아니라도 당연히 그들을 벌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전에 사울의 죄에 대해 그들에게 기근을 내리셨듯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에 대해 역병을 내리신다. 이는 군주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날 때는 그들의 죄가 원인인 줄로 깨닫게 하며 따라서 스스로 회개하고 개선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백성들도 권세자들을 위해 기도할 줄 알게 된다. 백성은 하나님이 권세자들을 죄에서 지켜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니 권세자가 범죄하면 나라가 아픔을 당하기 때문이다.
💡사무엘서 저자는 문장의 주어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록한 반면, ↔ 역대기 저자는 '사단' 으로 기록.
⇒ 즉 동일한 행동의 주체를 각각 '여호와 하나님'과 ‘사단’ 으로 달리 기록하고 있는 것.
이는 성경 무오설에 대한 반박의 증거로 인용되기도 할 만큼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과연 하나님께서 하신 것인가? 아니면 사단이 행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님과 사단이 같이 행한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는 형식 논리학에서 ‘A는 B이다' 와 ‘A는 B가 아니다' 와의 두 판단 사이에 중간의 것은 없다는 사유 법칙 중의 하나인 서양 철학의 배중률에 근거한 생각이다.
그러나 서양 철학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서양 철학의 근간이 되는 고대 그러스 사고와는 현격히 다른 히브리적 사고에 따르자면,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은 곧 하나님이 그것을 행하시는 것이다.
-이는 신 중심적인 사고에서 근거한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영역으로 돌려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히브리인들은 이차적 원인들을 밝힐 때에, 그것들과 일차적 원인과의 적절한 관계를 설명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고로는 본문의 기록과 대상 21:1의 기록이 전혀 모순일 수 없었다.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사고는 우리에게 자칫 하나님께서 악을 조장하시 는 것처럼 여겨지게도 한다. 그러나 단정적으로 말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을 시험하시거나 미혹하시지 않는다(약 1:13-15). 그러므로 본문의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단과 같이 인간을 죄 짓도록 미혹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모든 사건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한 히브러적 표현일 뿐이며, 하나님의 죄에 대한 허용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실제로는 대상 21:1의 기록처럼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본서 저자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다윗 개인의 범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스라엘 전체 회중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다윗의 범죄가 밀접한 연관이 있옴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그러한 의도보다는 범죄의 일차 조장자가 사단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단을 문장 주어로 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하나님의 의도대로 행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다른 한 가지 의문이 더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사단이 마치 천사처럼 하나님외 수종자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 무오론의 선봉장 중 한 사람인 구약 학자 글리슨 아처는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단 자기에게 이롭다는 사실을 사단이 발견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물론 다윗에게 인구 조사를 하게끔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나라가 부강해짐에 따라 점점 교만하여져서 당신보다는 강대한 군사력 자체를 의지하고 그 세력을 뽑내려 한 다윗에게 큰 시련을 주심으로써 다시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하게끔 격동한 사단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동일한 그 일을 통해 오히려 다윗에게 크나큰 타격을 주고 그 가운데서 절망하게 하여 여호와를 떠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자비로운 동기에서, 다윗과 및 그의 백성이 배워야 할 교훈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며 또한 그둘을 영적으로 성장시키고 겸손하게 만들기 위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하도록 부추기신 반면, 사단은 근본적으로 악의에 찬 동기에서, 이스라엘에 혹득한 타격을 가하며 다윗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기 위하여 다윗을 부추겼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하나님과 사단이 동시에 다윗의 범죄에 관여한 것은 사실이나 이 일을 통해 성취하고자 한 목적이 서로 달랐으므로 결단코 사단을 여호와의 수종자로 볼 수 없다.
Ⅱ. 요압은 이 명령에 이의를 제기했다.
요압까지도 인구 조사를 하려는 다윗의 어리석음과 헛된 자만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다윗이 이유를 설명치도 않고 다만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 고 하는 데 주목했다. 그러므로 그는 왕의 자만심을 돌이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압살롬이 죽었을 때도 다윗의 비탄스런 감정을 돌이키려고 했었다.
💡 대상 21:3 요압이 아뢰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하나
-물론 요압의 전적이 있으나, 요압의 이러한 발언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적 측면에서 우러난 다윗에 대한 간언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나 이제 요압은 그때보다 더 공손한 태도로 왕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노력한다.
그때는 요압이 무례하고 퉁명스런 투로 말했지만(19:5-7), 이제는 자기에게 어울리는 말을 한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백성을 백 배나 더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3절).
💡
-삼하 본문의 ‘기뻐하시나이까' 에 해당하는 단어보다는 감정적 요소가 비교적 적고 의지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는 표현으로 죄에 있어 다윗의 책임을 더욱 부각.
-대상 21:3의 기록은 범죄를 향한 다윗의 의지적 측면이 강조되어 있는 반면, 본문은 감정과 열정에 사로잡혀서 다윗이 죄를 짓게 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역대상에서는 요압이 다윗에게 인구 조사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다 윗이 그러한 간언을 무시하고 인구 조사를 한다는 점에서 다윗의 죄가 더욱 무거운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본서 저자가 이렇듯 같은 사건을 두고서 역대기 저자보다는 다윗의 죄를 덜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기술하는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 다윗의 범죄가 다윗 개인의 잘못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온 회중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본서 저자는 요압과 더불어 군대 장관들도 다윗 왕에게 설복 당하는 것으로 기록하여 이번 인구 조사 범죄에 여러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역대기와의 차이를 통해 본서 저자는 인구 조사 범죄에 있어 다윗 한 사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공동으로 책임이 있음을 부각시켜 드러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백성에게 과세하거나 인명부에 등재시키거나 그들을 분재할 일도 없었다. 백성은 모두 평안하고 행복하였다. 그래서 요압은 백성의 수효가 증가하고 늘었지만 왕도 살아 생전에 백성의 증가를 보고 만족을 누리기를 소원하였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그렇게 하실 필요가 무엇이니이까? Pauperis est numerare pecus-즉 양떼를 세는 일은 가난뱅이에게나 맡겨라. 특히 하나님께 대한 즐거움과 신앙행위를 그토록 많이 지껄이던 다윗이 어찌하여 이런 유의 일을 기뻐해야 하는가? 누가 생각해도 노인이 다된 다윗은 치졸스런 행위를 벌였을 게 아닌가? 요압은 이렇게 점잖게 말하지만 실은 다윗의 교만을 지적하고 있다. 그 자체로는 죄가 되지 않지만 터무니 없이 즐기다 보면 죄로 변하는 일이 많다는 데 주목하자. 요압은 이 일에서 다윗의 헛됨을 깨닫고 있었으나 다윗 자신은 깨닫지 못하였다. 우리가 자만심에서 행동할 때 충실히 충고해 줄 친구가 있다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헛된 자부심에서 행동하지만 우리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Ⅲ.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령은 실시된다.
다윗은 인구조사를 원했고 요압은 이를 반박하지 못했다. 이는 그가 왕을 섬기는 일에 시간과 수고를 아끼는 것으로 오해받을까봐 두려워해서였다. 권세자들 주위의 인물들이 악한 일로 권세자를 섬기고 방조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요압은 다소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명령대로 이 불유쾌한 작업에 착수했고 군대 장관들의 도움을 얻었다.
그들은 가장 먼 지방부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인구 조사한 방향은 요단 저편 동쪽부터였다(5절). 그 다음 북쪽의 단으로 향하고(6절) 거기서 다시 동편의 두로로, 거기서 또 남쪽의 브엘세바로 행하였다.
💡 요단 동편에서부터 이스라엘 전체를 두루 돌아 인구 조사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
-본문에 나오는 요단 동편의 지역이 이와 같이 역사적 굴곡이 많았던 것은 이 지역이 전략상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압은 전략상 다윗 왕국의 취약 지구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부터 인구 조사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본장은 병행 본문인 대상 21장에는 나타나지 않는 인구 조사의 경로를 자세하게 기술함.
이에 담긴 본서 저자의 특별한 의도는?
-이 경로에 언급되어진 도시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의 범죄, 우상 숭배 등과 같은 비극적 역사와 깊은 연관을 가진 도시들이다. 이는 흩어져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상기케 하는 것으로 사무엘하가 전반적으로 헤브론(2-4장)과 예루살렘(5-20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온 것과 대조된다.
-그 중에서도 톡별히 본절의 표현은 민수기에 나타난 인구 조사와 밀접한 연관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수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인구 조사 전에 요단 건너편에 모압과 대처하여 진을 쳤고 모압 백성외 유혹으로 범죄하였음이 기록되었다(민 22:1; 25:1).
-그런데 본절에서 나타나는 아로엘, 야셀은 모두 모압 과 깊은 관련을 가진 도시들.
그리고 본절의 '장막을 치고' 라는 표현은 민 2:1의 표현과 원어상 동일한 것이다.
-그 밖에도 백성을 계수함(민 26:1-4), 범죄로 인한 정계로 주어지는 염병(민25:9; 26:1), 비느하스의 대속의 행동(민 25:6-9) 등은 본장의 인구 조사(1절), 하나님의 징계인 온역(15절), 그리고 다윗의 대속적 행동(25절) 등과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본장의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하여 주는 것으로 민수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범죄 사건과 같이 이스라엘 전체 회중의 범죄가 재앙의 원인임을 다시 한번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요압의 인구 조사 경로를 나타내는 지명의 기록은
-이스라엘의 범죄가 아니었다면 결코 인구 조사로 인해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즉 이는 하나님의 징계로 주어지는 이스라엘의 모든 비극적인 일들은 단순히 왕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범죄에 그 책임이 있다는 신명기적 역사관을 소개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러한 역사관을 보여주는 사건이 신명기적 사관으로 쓰여건 사무엘서외 말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무엘서 전체와 앞으로 신명기적 사관에 의하여 전개될 열왕기서를 이해하는 해석의 열쇠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 7절, 요단 동편 남쪽으로부터 출발해~북쪽 시돈을 기점으로 요단 서편에 이름. 그리고 요단 서편 북쪽~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음.
-고대 두론: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 경제적 요충지이기도 함. 다윗, 솔로몬 시대에는 다윗의 영향력 아래 있었음. → 이스라엘이 얼마나 강성했었는지를 보여줌.
-히위 사람, 가나안 사람: 갈릴리. 다윗은 여기 거주하는 사람들 역시 군사로 징집하거나 부역을 시키기 위하여 그들도 인구 조사의 대상에 포함시켰던 것으로 보임.
8절, 대상21:6에 따르면 요압은 다윗의 인구 조사에 불만을 품고 인구 조사시 레위와 베냐민 사람을 계수하지 않음.
이 조사를 하는 데 9개월 이상이 걸렸고 이 인구조사로 나라 안에는 많은 곤란과 놀램이 야기되었다. 결국 인구 총계가 예루살렘에 있던 왕에게 보고되었다(9절).
그 숫자가 다윗의 기대에 부응했는지 안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또 그 조사가 그의 자만심을 충족시켰는지 욕되게 했는지도 알 수 없다. 백성의 수효는 무척 많긴 했으나 그가 생각하던 만큼 많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나안에서는 애굽에서의 인구 증가 추세에 미치지 못했고 사백년 전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입주하던 당시 인구의 두 배를 훨씬 상회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좁은 지역에서 이토록 중다한 무리가 연명했다는 것은 가나안이 매우 비옥한 땅이었다는 증좌이다.
💡 이 수효는 역대기 기록과 다름.
이와 같은 인구 조사 보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왜 본서에서는 역대기의 기록에 비해 유다인들의 숫자를 많게 그러고 이스라엘인의 숫자를 적게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구 수가 많은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축복과 관련된다는(창 16:10; 35:11; 신 1:10) 측면에서 본다면 본서 저자는 계수된 유다 지파의 수효 중 보다 많은 수효를 제시하여 다윗과 유다 지파가 보다 융성하였음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하여 상호 비교되는 이스라엘의 수효는 보다 적은 숫자로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구 조사에 대한 징벌(사무엘 하 24:10-17)
💡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우쳤을 때에는 즉시 회개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 외에도,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이 죄를 짓고 회개할 때에는 죄 범한 그 사람 자체는 용서하시지만 그 죄에 대한 징계는 철저히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죄를 지은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회개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죄악의 씨로 태어난 아기를 죽이심으로써 당신은 죄에 대해 분명히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적이 있다(11:1-12:23).
죄에 대한 심판이 없다면 인간은 더욱 교만하여져서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더욱 담대해질 것이다(전 8:11).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 범죄할 때마다 적절한 징벌을 내리심으로써 그가 완악해져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사울의 경우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사울은 여호와의 명을 두번씩이나 어기고 불순종하는 죄를 저질렀지만(삼상 13.15장), 여호와께서는 그에 대혜 어떠한 징벌도 내리지 않으셨다. 이로 인해 사울은 그의 마음이 점점 더 교만해고 완악해져서 결국에는 죄악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삼상 16:23; 18:10-12; 28:6-20).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죄에 대한 징벌이 당시에는 매우 고통스럽지만 그로 말미암아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기 때문에(히 12:11), 성도에게 매우 유익하다는 것이다.
히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는 것이다(히 12:6).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따라서 만약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도리어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롬 1:28; 히 12:8)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롬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다윗은 자기 죄를 회개하지만 그 죄로 벌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뉘우치시고 다윗은 그로 인해 더욱 참회하게 된다.
Ⅰ. 여기에는 백성을 계수한 다윗이 자기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구조사가 실시되고 있는 동안 다윗이 자기 죄를 깨달았다는 흔적은 없다. 그가 만일 각성했다면 자기 명령을 취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가 완료되어 그에게 보고된 바로 그날 밤 그의 양심이 눈을 뜨고 그가 즐거움을 기대하던 바로 그 순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자기 백성의 수효에 만족하여 잔치를 하려던 때 그의 만족감은 쓰디쓴 쓸개즙으로 변했다. 죄의식이 기쁨을 변질시킨 것이다(10절).
1. 그는 자기 죄를 확실히 깨달았다.
선지자가 그에게 이르기 전에 그는 그 마음에 자책하였다. 그의 양심은 그가 한 일의 나쁜 점을 가리켜 주었다. 이전에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던 죄가 나타났고 그 눈에 비친 죄는 심히 악하였다. 그는 그 죄를 회상하고 크게 뉘우쳤다. 그의 마음은 그 죄로 인해 그를 부끄럽게 하였다. 사람이 범죄했을 때 그에게 자책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자책은 은혜의 원리가 마음 속에서 작용한다는 좋은 표시이며 회개와 개혁을 향한 좋은 디딤돌이다.
💡 다윗의 회개의 자발성
-이전에 다윗이 밧세바 간음 및 우리아 살해의 죄를 범하고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다가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야 회개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본문에서는 그 누가 죄를 지적하기 전에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본장에서 다윗은 이렇듯 자신의 범죄를 스스로 깨닫고 즉시로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람은 누구나 양심이 있어서 죄를 지으면 스스로 깨닫게 된다(롬 2:15).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로 인해 회개에 이르지만, 어떤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다.
회개할 줄 아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함으로 생명에 이르지만, 회개할 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인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필경 멸망에 이르게 된다.
2.그는 자기 죄를 하나님께 고백했고 그에 대한 용서를 간절히 구했다.
(1) 그는 자기가 범죄했다는 것을 시인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등 죄가 안 되는 것 같을지 모르나 그는 자기가 크게 범죄 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은 그 양심이 부드럽고 박식하여 남이 보지 못하는 죄악을 발견한다.
(2) 그는 자기가 교만한 마음으로 이 일을 행했기 때문에 심히 미련하게 행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가 자기 백성의 수효를 자랑했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였고 비록 그들의 수가 많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곧 그들을 소수의 무리로 만들 수 있으신 때문이다.
💡 ‘미련하게 행하다’
-사실상 한 나라의 통치자가 세금의 징수, 또는 국방력을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하는 것은 지혜로운 행위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것이었음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이를 심히 미련한 행위라고 했다.
-‘미련하게 행하다’는 표현은, → 본문에서처럼 수동형으로 사용될 경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혹은 사악하게 행동하는 것을 나타냄(삼상13:13; 대하16:9)
-다윗은 자신의 인구 조사 행위가 불신앙에서 나온 것임을 이 단어를 통해 밝히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굳이 인구 조사를 통해 군대의 수효를 확인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 에게 주신 언약대로(7:6-17) 자신의 나라를 견고하게 세워주실 것인데,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자신이 인구 조사를 행했다는 의미에서 '내가 심히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이는 인간의 눈에 아무리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이상 그 행동은 미련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고전 1:25).
(3) 그는 하나님께 용서를 바라서 외쳤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며 믿음으로 사유하심을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사하실 것이며 우리가 진정한 회개로 죄를 불식해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자비로 그 죄를 가져가 버리실 것이다(요일 1:9).
💡 ‘사하여 주옵소서’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지나가는 것, 또는 강이나 경계썬 따위를 건너거나 가로지르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다윗은 바로 그러한 영적 축복을 아는 자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진정 복이 있는 자이다(시32:1)
-만약 하나님이 그의 죄를 눈감아주지 않고 계속해서 기억하고 계신다면, 다윗은 고통에 사로잡혀서 절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눈감아주고 용서해 주시길 간구하였던 것이다.
Ⅱ. 그가 이 죄 때문에 받은 징계는 지당하고도 필요한 것이었다.
다윗은 죄의식에서 밤새도록 전전긍긍했고 조금도 안식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서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들으리라고 각오했거나 아니면 자기의 선견자 갓과 더불어 이 일에 대해 얘기하기로 마음 먹었을 것이다.
갓을 그의 선견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항상 갓을 가까이 두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 그의 자문을 받으며 그를 자기 고해사와 상담자로 이용한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예방하여 선지자 갓에게 미리 다윗에게 할 말을 지시하셨다(11절).
💡 아마 이 아침에 선지자 갓이 다윗을 찾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은 간밤에 다윗의 깊은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을 것이다.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본문의 ‘일어났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잠에서 깼다’, 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다윗이 왕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는 의미이다(12:20).
⇒ 이는 앞선 11장에서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 그 일을 은폐하려고 우리아를 죽이는 등 범죄에 범죄를 거듭함으로써 왕의 직무를 소홀히 한 것과 대조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는 앞선 13-20장에 언급된 일련의 연단을 통해 변화된 다윗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즉 다윗은 비록 여러 번의 시행 착오를 거듭하였지만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정 왕국의 통치자로서의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하려는 자세만큼은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범죄 이후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범죄 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실한 모습을 회복하는 것만이 범죄로 말미암아 위기에 놓인 자신과 공동체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그러나 분열 왕국 시대 이스라엘은 불행하게도 다윗의 이러한 모습을 본받지 못하고,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국가적인 위기가 닥칠 때에 오히려 연락을 즐기며, 악의 구렁텅이를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까지 상실하고 만다(사 22:12-14). 사설 열왕기에 언급되는 이스라엘과 온 유다의 일반적인 죄악에 대한 성향과 완고함, 회개치 않음, 불성실은 이들이 본장에 기록된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향해 서 있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그리고 그 결과 열왕기하 18장과 25장의 기록처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결국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 다음 세 가지가 여기서 당연한 일로 간주되고 있다.
(1) 다윗은 자기 과오에 대한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
다윗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너무나 큰 죄악이며 하나님을 너무 욕되게 하는 것이기에 벌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 죄 중에서 첫째 가는 것은 교만이다(잠 6:17). 자기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받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아직도 그 죄 때문에 가책을 받는다는 데 주목하자.
💡 다윗의 죄에 대한 징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중간에 거두어짐(16,25절)
(2) 벌이 죄에 따라야 한다는 것.
다윗은 자기 백성의 수효를 자랑했다. 그러므로 이 죄 때문에 징계받아야 할 그의 심판은 백성의 수효를 줄이는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 교만의 재료로 삼는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으시거나 우리에게 고통의 재료가 되게 하시거나 우리를 벌하시는 재료로 삼으셔도 지당하다.
(3) 그 벌은 백성이 대거 연루되는 징벌이 되어야 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신 때문이다(1절). 직접 수문을 연 것은 다윗의 죄였으나 홍수가 되게 한 것은 백성 전체의 죄였던 것이다.
2.그들에게 벌이 과해지고 있다.
(1) 다윗은 어떤 회초리로 맞을 것인지 선택하라는 말을 듣는다(12, 13절).
그의 하늘 아버지는 그를 징계하셔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즐겨하지 않으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다윗에게 전쟁과 기근과 역병이란 세 가지의 쓰라린 심판 중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다. 이 세 가지는 전부가 한 민족을 크게 약화시키는 심판이다.
💡 본문은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결정을 할 것인지를 말하라는 의미이지만 사용된 동사의 뉘앙스를 감안하면, 이 세 가지 중에 어떤 것을 선텍할지를 잘 숙고하라는 충고의 의미가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 갓의 이 말은 결정 자체가 아니라 결정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갓의 말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데에는 저자의 특별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결정 과정에서 다윗의 신앙적 면모가 드러나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갓의 말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세 가지 제안 하나하나를 깊이 생각해 본 다윗은 이 셋 중 어느 하나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것들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셋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다윗에게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자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에게 그 이상의 은총과 자비가 필요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윗은 이 선택 사항 중 어느 하나도 감당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의 기회가 아닌 하나님외 자비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다음 절에서 이들 중 하나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 있는 대답, 즉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죄의 삯은 사망이고(롬 6:23) 모든 인간은 죄인이므로 인간은 죽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죄 값을 치를 수 없다.
→ 이는 본장 마지막에 다윗이 대속을 위한 제단을 쌓은 것처럼
→ 우리 모두를 위한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를 대속의 제물로 바치실 수밖에 없었던 십자가 구원 사건의 필연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다윗으로 하여금 삼자 택일하게 하시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1] 그를 자기 죄에 대해 더욱 겸비케 하시기 위하여.
이 심판이 심히 두렵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는 자기 죄가 매우 컸다는 것을 알게 될 터였다.
[2] 또는 그의 교만심을 견책하시기 위해서.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의 통치권을 자만했었다. 그는 강대한 군주가 되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자! 그러면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택하려느냐?" 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 다윗의 자유처럼 칼과 열병과 기근에 속한 자유이다.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갈지니라" (렘 34:17; 15:2 참조).
[3] 또는 징계 속에서도 그를 다소 격려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가 그를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배척하시기 않으시며 그에게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교통하심" 이 있고 그에게 고통을 주시는 가운데도 "그의 체질" 을 참작하셔서 그가 가장 잘 견딜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을 알리심으로써(잠 3:32; 시 103:14 참조) 그를 격려하신다.
[4] 그로 하여금 징계의 회초리를 보다 잘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선지자는 다윗에게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자기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라고 말한다.
목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파송된 자들이다. 그래서 목사는 위임받은 사명의 실적을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우리들한테서 어떤 대답을 얻어갈지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그들이 우리에게 관한 보고를 기쁨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끔 노력해야 한다.
(2) 다윗은 칼의 심판 만큼은 반대하며 나머지 두 심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소관사로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암암리에 온역을 더 바라는 듯이 말한다(14절).
"내가 곤경에 있도다."
그는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그 앞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렘 48:43, 44). 그는 한 가지를 피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재난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죄는 인간을 큰 곤경에 빠뜨린다는 것을 명심하자. 지혜롭고 선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곤경을 자초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1] 그는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해 주기를 간청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로 석 달을 대적 앞에서 도망하지 않게 해주소서."
석 달간의 도주는 다윗의 온갖 승리의 영광을 먹칠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적들의 교만한 행동을 야기시킬 터였다(신 32:26, 27 참조). "그들의 긍휼은 잔인하며 석 달이면 그들이 여러 해 동안에도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이 민족에게 입힐 것입니다."
[2] 그는 하나님께 투신한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하노라."
사람은 하나님의 손이다(그렇게 부른다. 시 17:14, 즉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칼이다). 그러나 기근이나 역병 같은 심판은 하나님의 손에서 직접 나온다. 다윗은 이 두 천벌을 가리키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화해 받음을 보다 빨리 깨닫도록 하기 위해 가장 짧은 심판을 택하신다. 그러나 혹자는 다윗이 이 말로써 온역의 선택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그 땅은 삼 년 전 기브온인 때문에 입은 기근의 피해를 아직 복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근의 회초리로 징계받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 역시 우리 이웃 민족의 자랑거리가 될 것임이니라."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기근의 욕이란 표현을 읽을 수 있다(겔 36:30). "그러나 이스라엘이 어차피 감소되어야 한다면 온역으로 감소되게 하소서. 왜냐하면 그것이 여호와의 손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 죽이는 재앙 때처럼 보통 자신이 직접 보낸 종이나 사자의 손으로 심판을 하신다. 그 심판은 다윗과 그 가족도 극히 비천한 자와 마찬가지로 당해야 하는 심판이지만 칼과 기근은 그렇지가 않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죄를 뼈저리게 깨닫고 후자를 택한다.
칼과 기근은 이 자나 저 자를 다 삼킬 것이지만 멸하는 천사는 하나님께 가장 죄인된 자들에게만 칼을 뽑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심판은 가장 단기간에 끝나는 심판이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노여워하시는 표징 아래 있다는 생각만 해도 두려움을 느낀다.
사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히 10:31)고 말한다.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로운 모든 소망에서 차단된다는 것은 죄인에게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회개하는 다윗은 여호와의 긍휼이 크신 줄을 알기에 감히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내던진다. 선한 자들은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있을 때조차 하나님께 대한 선한 생각을 품는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욥 13:15 난외주).
(3) 하나님은 이에 따라 역병을 보내신다(15절).
- 그 범위로 말하자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였다. 즉 왕국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였으니 이것은 역병이 어떤 자연적 원인에서 발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나타낸다. 다윗은 자기가 선택한 것을 받았다. 그는 보통 수단의 수난을 당하지 않고 불가사의한 일로 수난을 겪는다.
💡 이와 같은 사실은 다윗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그 나라의 모든 영역이 여호와의 재앙에 빠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로써 하나님은 다윗의 교만을 일시에 꺾어버리셨던 것이다.
더욱이 다윗은 그가 통치하는 이스라엘에 존재하는 군대의 숫자, 혹은 백성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함으로 자기를 과시하고 만족감을 얻으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중에서 '칠만 명׳ 을 일시에 온역으로 죽게 하심으로써 사람의 숫자를 의지하는 다윗의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일시에 무너뜨려 버리셨던 것이다.
인간이 제 아무리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번만 치시면 그런 것들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러고 만다는 사실을 다윗온 이 사건으로 철저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 그 온역은 그날 아침(다윗이 선택한 바로 그 날 아침)부터 정한 시간까지 계속됐다. 즉 풀(poole) 선생이 생각하듯 사흘까지 계속됐거나 아니면 패트릭 감독 외 여러 사람이 생각하듯 첫 날 저녁 곧 저녁 제사 예정 시간까지만 계속됐을 것이다. 후자의 계산에 따르면 온역은 단지 아홉 시간 동안만 계속됐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대한 긍휼심에서 처음 언급하셨던 시간을 단축시켰다는 것이다.
온역의 위력은 매우 엄청났고 가혹했다. 백성의 죽은 자는 칠 만이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건강하던 자들이 다 병들어 죽은 것이다. 장자가 살육되던 때의 애굽처럼 이스라엘 온 땅에 얼마나 큰 호곡이 일어났는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전자가 한 밤중에 있었다면 후자는 백주에 있은 일이었다(시 91:6 참조).
하나님이 임무를 부여하실 때 천사들의 구원하는 능력이나 멸망시키는 능력이 얼마나 굉장한지 주목하자.
요압은 봇으로 돌아 다니는 데도 구 개월이 걸렸지만 천사는 칼로 온 이스라엘 땅과 해안을 두루 행하는 데도 단 아홉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극히 교만한 죄인들을 얼마나 쉽사리 낮추실 수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의 덕을 얼마나 많이 입고 있는지 주목하자. 다윗의 간음은 그 당장 한 아이의 죽음으로만 처벌되었으나 그의 교만은 칠 만의 인명으로 처벌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교만을 증오하신다. 역병으로 죽은 자는 칠만 명으로 그들은 거의 스무 명에 한 명 꼴로 죽었다. 우리는 다윗의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그가 또 주의 판단을 두려워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시 119:120).
Ⅲ. 온역이 예루살렘에 창궐하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이 심판을 완화시켰다(16절).
천사는 마치 딴 어느 곳보다 예루살렘에 더 큰 심판을 행하려고 하는 듯이 그곳을 향해 손을 들었고 심지어 멸하려고 하기까지 했다. 지방은 쓴 잔을 마셔야 했지만 예루살렘은 그 찌꺼기를 마셔야 했다 예루살렘은 마지막으로 계수된 듯하다. 그러므로 그곳은 마지막에 재앙을 입도록 예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마 예루살렘에는 다른 어느 곳보다 죄악이 많았을 것이며 특히 교만의 악이 심했을 것이다(그리고 이 심판은 교만의 죄에 대한 징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멸망자의 손은 예루살렘을 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여호와께서는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셨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마음을 바꾸시지 않고 그 방법을 변경하사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긍휼로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게 하라" (약 2:13 참조)고 하셨다.
예루살렘은 법궤를 인하여 목숨을 건지게 될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얼마나 기꺼이 용서하시며 벌하는 것을 얼마나 즐겨하지 않으시는지 살피자. 이로써 우리는 심판 도중에라도 용기를 얻어 회개하게 된다.
이 일은 모리아 산상에서 있었다.
💡 아리우나 타작 마당 곁
-본문의 표현은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으면 예루살렘에도 큰 재앙이 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즉 백성을 멸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예루살렘 도성을 내려다볼 수 있는 모리아산에 위치한 아라우나음 타작 마당에 섰다는 것은 이제 막 예루살렘에도 재앙을 내릴 순간이었음을 보여준다. 타작 마당은 일반적으로 바람이 잘 통하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은 전승에 의하면 과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산에 있었다(창 22:1-14). 또한 후에는 솔로몬 성전이 이곳에 세워졌다(대하 3:1).
-이와 같이 자세히 밝히는 이유는, 허구가 아닌 실제 역사적 사건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사건이 사람들에게 잊혀질 수 없는 인상 깊은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아브라함이 하늘의 명령 취소로 자기 아들의 살해를 중지한 바로 그 장소에서 이 천사가 그때와 비슷한 제지로 인해 예루살렘의 멸망을 중지했다고 관찰한다. 우리의 몰수된 생명이 멸하는 천사에게서 보존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저 큰 희생 때문이다.
Ⅳ. 이 때 다윗은 자기 죄에 대해 새로이 잘못을 뉘우친다(17절).
오는(하나님께서 그 눈을 여신 까닭에) 그 천사를 보았고 그 천사가 멸하려고 빼어든 칼을 보았다. 그는 명령 일하에 그 천사가 막 칼을 칼집에 꽂고 심판을 중지하는 것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을 보고 난 그는 천사에게 말하지 않고 여호와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이는 크신 주인의 면전에서 종에게 말하거나 창조주께 돌려야 할 존귀를 피조물에게 돌리는 일이 도리가 아닌 줄 알았던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자는 하나님의 살려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자비를 많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 더 자기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를 용서한 후에는 그들이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겔 16:63).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고발하는가?
그는 자기 잘못을 아무리 악평해도 모자라는 듯이 자기를 고발하고 있다.
"나는 범죄 하였고 악을 행하였삽나이다. 죄는 내가 지었사오니 십자가도 내게 지워 주소서.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나는 죄인이오니 나로 고난자가 되게 하소서."
이와 같이 다윗은 비록 자기가 백성 만 명에 해당하는 자였을지라도 자기 죄에 대한 벌을 기꺼이 감수하려고 했다.
2. 그는 백성을 위해 어떻게 중보의 기도를 올리는가?
백성들의 비통한 애곡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고 그의 귀를 울렸다.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그들은 많은 잘못을 범했다. 하나님을 격동시켜 다윗으로 하여금 이와 같이 인구조사를 하도록 내버려 두게 한 것은 바로 그들의 죄였다. 그럼에도 그는 참회자답게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엄한 반면 그들의 죄는 경감시키려고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널리 시행될 때 대개의 사람들은 남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면서 비난하고 그 심판으로 누가 엎드러지든지 개의치 않는다. 그럼으로써 그 심판을 모면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다윗의 참회 정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공중심이 있는 자였다.
💡이러한 표현은 다윗이 이 국가적 재앙인 온역에 대하여 강한 죄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모습에는 그가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 였다는 사실 이상의 것, 즉 모든 이스라엘에 대한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옴이 부각되고 있다.
사실 이 국가적 재앙인 온역은 다윗이 실시한 인구 조사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1절).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어 겪는 이 재앙은 전적으로 다윗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다윗은 이 모든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엎드려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병행 구절인 대상 21:16에서는 다윗과 장로들이 함께 얼굴을 땅에 대고 있었던 것으로 기술되지만 본문에서는 장로들의 이러한 행위가 생략되어 있다.
이는 본서 저자가 다윗 한 사람의 중보적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사 이미 징계를 멈추기로 결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16절)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다윗의 이러한 기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다. 백성을 대표해 서 있는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온역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은 온 인류를 대표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필연성을 예표해 주고 있다.
-다윗은 자신과 자신의 집만 심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용서해 줄 것을 간구한다.
-‘이 양무리’ :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우셨옴을 깊이 인식한 데서 나온 표현이었다.
사실상 그는 이스라엘 장군과 왕이 되기 이전에 아버지의 양무리를 치는 목자였으며(삼상 16장),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도 ‘목자와 양' 의 관계로 보았다(시 23편).
그런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이 먹이고 돌보아야 할 양무리로 여긴 것은 그가 백성들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였는가를 매우 잘 보여준다 하겠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상기시켜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으며 우리가 피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치도록 기꺼이 원하셨다. 양 무리가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목자 자신이 맞으신 것이다.
●물러가는 온역(사무엘 하 24:18-25)
Ⅰ. 다윗은 천사를 본 바로 그 장소에 제단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는다(18절).
이 명령이 다윗에게 시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다윗이 재차 승복하고 뉘우치자 완전히 그와 화해를 하셨다는 사실을 이로써 암시하신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만일 그를 죽이기를 즐겨하셨다면 제사를 열납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 단을 쌓으라고 명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 제사를 드리라고 권면하신다는 것은 그가 우리와 화해하셨다는 위로의 증거가 된다.
💡 ‘여호와의 명하신 바 갓의 말대로..’
-선지자 갓의 말은 다윗의 겸손한 희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 동시에 자애로운 화해 선언이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17절), 그 기도대로 다윗과 그 가문을 치는 대신 다윗에게 제사를 요구하셨다.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온역 재앙을 멈추고자 하신 하나님의 작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여준다. 죄사함은 반드시 희생 제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피흘림이 없이는사함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범이기 때문이다(레 17:11; 히 9:22).
하나님께서 그 화해의 장소로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지시하신 것은?
-그곳에서 천사의 심판 활동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곳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나타난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곳을 화해의 장소로 지정하시고 성별케 하신 것이다.
-후에 이곳에는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져 택한 백성들을 위한 ‘시은소' 가 된다.
2. 그것은 희생 제물로 하나님과 인간에 화해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위대하신 화목 제물이시다. 율법의 모든 희생 제물은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것이다. 멸하는 천사가 그 손을 멈추라고 명령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이다.
3. 하나님의 심판이 은혜로이 중지될 때 우리는 감사함을 고백하고 그를 찬양해야 한다. 이 제단은 감사의 제사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 세워졌던 것이다(사 12:1).
Ⅱ. 다윗은 제단을 쌓기 위해 토지를 매입한다.
그 땅의 소유자는 아라우나라는 이름의 여부스 사람인 것 같다. 그는 틀림 없이 이방 태생이지만 유대교에 개종해서 이스라엘인 사이에 거주가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성 안에 자기 소유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레 25:29, 30). 그 땅은 타작마당으로 보잘 것 없는 곳이었지만, 수고의 장소였으므로 이처럼 존귀한 장소가 된 것이다.
1. 다윗은 땅임자와 직접 거래하기 위해 그에게 갔다.
다윗이 공정성을 주목하자. 그는 이렇게 절박한 중에도 그곳을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비록 소유자는 이방인이었고 그 자신은 왕이었으며, 목하 그곳에 제단을 세우라는 지엄하신 하나님의 분부를 받았음에도 그는 그곳을 매입하여 값을 치르기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신다(사 61:8). 다윗의 겸허를 살피자. 그는 조금도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비록 왕이었지만 이제 참회자가 된 그는 자기 비하의 표시로 아라우나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 거래하지 않고 친히 아라우나에게 가서 이 일을 주선했다. 이 일은 얼핏 보기에 다윗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 일로 명예를 잃지 않았다. 아라우나는 다윗을 보자 왕 앞에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했다(20절). 권세자들은 자기 겸손 때문에 존경을 더 받으면 받았지 덜 받지는 않을 것이다.
💡 20절,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선지자 갓이 전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다윗은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기 위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으로 올라갔다. 당시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타작하고 있던 아라우나는 그들이 오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바라보다가’ : ‘기대감을 가지고 지켜보다’ 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음(창26:8; 시14:2; 53:3; 85:12)
이같은 단어를 사무엘서 기자가 채택하여 사용한 이유는
-이방 족속 여부스인 아라우나조차도 다윗이 이 국가적 재앙에 대해서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하였음을 암시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다윗에 대한 이방인 아라우나의 이러한 경외와 기대는 ⇒ 그리스도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21절, 다윗이 ‘타작 마당을 사서..’ 라고 표현할 떄,
-‘사서’ :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포로로부터 구속한다’ 라는 문맥에서도 사용된 동사(사11:11; 느5:8).
따라서 이는 일차적으로 다윗이 아라우나에게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타작 마당을 산다는 의미이지만, 이 표현 가운데는 다윗이 백성을 위하여 대속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뉘앙스도 포함되어 있다. 대속의 의미를 강조함.
2. 아라우나는 다윗의 내방 이유를 알게 되자 그에게 후한 제의를 했다(21절).
그는 제단 쌓을 토지뿐만 아니라 번제할 소와 제사에 소용이 될 다른 물건들까지도 내놓겠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을 무상으로 내놓는 외에 좋은 것까지 곁들였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 아라우나의 여호와를 경외함에서 나오는 헌신적 자세
-다윗 왕이 자신의 타작 마당에 온 목적을 안 아라우나는 그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신이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헌신적 자세를 보인다. 아라우나는 여부스 사람이었으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실한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헌신적 자세는 그가 제안하는 바, 번제를 드러기 위한 장소로서 그의 타작 마당 뿐만 아니라 다윗이 말하지 않은 번제물로서외 소와, 번제를 위해 사용되는 뗄감까지 자발적으로 제공하려는 모습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라우나는 이번 한 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이 드리는 제사와 더불어 다윗 그 자체를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말을 한다.
아라우나가 이렇게 행한 것은 다음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1) 그는 대재산가로 관대한 마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왕처럼 왕께 드렸다" (흠정역, 23절). 그는 평범한 백성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왕의 정신을 가진 자였다. 히브리 원문으로는 "그는 드렸으니 바로 왕이 왕께 드리는 것 같았다" 는 뜻이다. 이로써 우리는 아라우나가 그 곳 여부스족들의 왕이었거나 아니면 그때는 비록 다윗의 속민이더라도 여부스족의 왕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아라우나는 다윗이 비록 정복자였지만 그의 많은 개인적 공로 때문에 그를 크게 존경하였고, 그에게 아무리 많은 은혜를 베풀어도 신세를 갚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애착심을 품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에 내리는 재앙이 그치기를 간절히 염원했던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재앙이 자기 집 타작마당에서 그치게 되면 그것은 영광이 될 터였으므로 그는 다윗에게 바치는 모든 것을 귀중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3. 다윗은 충분한 대가를 치르기로 결심하고 또 그렇게 했다(24절).
여기에는 두 관대한 심령의 만남이 나온다. 아라우나는 기꺼이 헌납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한사코 지불하려고 했다. 그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그는 값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는 경건한 여부스인의 관대한 마음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윗은 틀림 없이 그의 친절한 제의에 대해 감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타작마당과 소에 대해 은 오십 세겔을 지불했고 나중에는 성전 건축을 위해 그 인접 구역에 대해 금 육백 세겔을 지불했던 것이다. 그 주된 관심이 값싸고 손쉬운 데 있는 자들, 가장 노력과 돈이 적게 되는 걸 기뻐하는 자들은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라는 것을 주의하자. 우리가 재물로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재물을 소유한단 말인가? 재물을 이보다 더 선용하는 것은 없다.
Ⅲ. 다윗은 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드렸다(25절).
그는 시행된 하나님의 공의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번제를 드렸고 그 심판 도중 적절한 시기에 중단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화목제를 드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나타내셨다(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워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재앙이 그친 것은 자비에서였고 하나님이 왕이나 백성과 다 화해하셨다는 표시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이요, 희생 제물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이 하나님께 은총 입기를 기대할 수 있고 그 안에서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으며 생명나무 길을 지키는 그룹들의 화영검을 피할 수 있다. 아멘
💡본서의 마지막장 마지막 절은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사울에게서처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다윗과 함께하였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다윗의 인간적 공로로 인한 것이 아니다.
-이는 실제적으로 다윗과 그의 후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7:15-16; 23:5)의 성취로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기꺼이 대속의 제물을 명하시고 받으신 하나님외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본장이 모든 세대들을 위해서 지니고 있는 의미는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윗에게 베풀어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게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모델로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라우나 타작 마당에서 드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기도를 들으셨다는 이 사실은
-구속사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제사가 드려졌던 이곳에 후에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들어섰고 그 성전에서 드려진 수많은 제사의 제물은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은 인간의 죄를 대속함으로 인간과 하나님간에 화목을 이루었는 바, 본절의 다윗의 제사와 기도 응답 및 후에 이곳에서 드려진 수많은 제사와 기도들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와 이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예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