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17, 누가복음 20, 욥기 35, 고린도후서 5
묵상구절
11:26 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그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스루아이니 과부더라
11:27 그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는 까닭은 이러하니라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읍이 무너진 것을 수축하였는데
11:28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청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더니
11:29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11:30 아히야가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고
11: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11: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11:33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경배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
11:34 그러나 내가 택한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그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의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11:35 내가 그의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11:36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11:37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11:38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11:39 내가 이로 말미암아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한지라
11:40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여로보암의 출세가 예언됨(열왕기 상 11:26-40)
우리는 저 치욕스런 이름 곧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설명을 여기서 처음으로 대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솔로몬의 대적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하나님은 솔로몬 왕국의 대부분을 그의 신복에게 주리라고 분명히 예언하셨는데(11절) 여로보암이 바로 그자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읽게 된다.
Ⅰ. 그의 혈통.
그는 유다 지파 다음으로 명예로운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섭리는 남편을 여윈 그녀에게 활동적이고 솜씨좋은 아들로 보상해 주셨던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우리는 그렇게 상상할 수 있다).
💡 여로보암
‘백성들의 수가 증가하다’ 라는 이름.
이러한 이름 속에는 앞으로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의 마음을 사로잡아 북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극하게 될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절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다윗의 집이 속한 유다 지파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에브라임 지파 사람으로, 요단강 동편 숙곳과 그곳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13km떨어진 아담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스레다(사르단) 지역 출신으로 소개된다 (7:46; 수 3: 16). 그는 솔로몬 왕이 죽은 이후에 유다와 시므온 지파를 제외한 북쪽 10지파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12:16-19), 이 반란은 민족 독립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하닷과 르손의 반란과는 달리 자국 내에서 일어난 일종의 혁명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앞서 있던 모든 반란보다 솔로몬 왕국에 더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또한 여로보암은 열왕기서 저자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악을 행하던 열왕들의 죄를 반복적으로 지적하면서 이들 악인들의 원류로 평가하고 있는 우상 숭배의 대표자이다. 그는 남북 분열 이후 민심의 이반을 막기 위해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남유다에 위치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예배하기 위하여 가는 것을 막고 이를 대체하려는 목적으로 금송아지 우상 숭배를 부활시킨 인물이었다 (12:27-30; 출 32:1-5). 이후 열왕기서는 여로보암을 이스라엘 모든 왕들이 따라야 할 긍정적 기준으로 제시된 다윗과는 정반대의 인물, 즉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들을 평가하는 부정적 평가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16:19, 26;22:52; 왕하3:3; 10:29; 13:2 등).
본문에서 저자는 여로보암을 솔로몬의 ‘신복’ 으로 소개함.
대개 한 인물을 처음 소개할 때 출신 지역과 가족 관계를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구약의 일반적 표현 방식과 비교할 때 그를 솔로몬의 ‘신복’으로 소개하는 것은 문맥상 분명 특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묘사한 데에는 저자의 분명한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을 솔로몬에게서 빼앗아 그의 ‘신복’에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예언이 (11절) 솔로몬의 ‘신복’인 여로보암을 통하여 서서히 실현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는 왕의 신분에 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삼아 ‘신하’로서의 충성을 다해야 할 의무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언약을 고의로 어겼을 뿐 아니라, 급기야 그를 배신하고 이방의 우상을 숭배하는 범죄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그가 이스라엘의 참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해 일으킨 이같은 반역에 대한 징계 조치로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솔로몬에게 복종하던 ‘신복’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배신하도록 허용하셨던 것이다.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신복’ 이었던 것과 같이 그 동안 이스라엘에 복속되어 ‘신하’ 국가로 존재하던 에돔과 아람이 종주국인 이스라엘을 대항해서 일어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여로보암이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함
본문은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교만해져서 솔로몬 왕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권세를 내세웠음을 뜻한다. 이러한 본문은 물론 여로보암의 교만과 반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으로 본서의 저자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권자이며 유일한 왕이신 하나님을 향해 반역을 저지른 솔로몬의 교만을 꼬집기 위해 이같은 표현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에브라임 혈통
사실상 ‘에브라임’ 지파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내에서 강력한 지파였을 뿐 아니라 당시에도 언약적 왕인 다윗이 소속된 유다 지파와 대결 구도를 형성할 만큼 이스라엘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점하고 있었다. 우선 이스라엘이 출애굽후 광야에서 장막 생활을 하던 시기에, 에브라임은 서편 진지의 주도 세력으로 군림했었다(민 2:18-24). 또한 에브라임은 모세의 후계자이며 가나안 정복 전쟁의 위대한 영웅인 여호수아를 배출한 지파였다. 뿐만 아니라 왕정 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이 종교의 중심지가 되기 전에는, 에브라입의 ‘실로’가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종교적 중심지였다.
따라서 그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들이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에서만 배출되었고 남쪽 지역 중심으로 만 이스라엘이 운영되어 왔던 상황에 대해서, 북쪽의 대표적 지파였던 에브라임이 불만을 가졌을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이스라엘 남북 분열 이변에는 에브라임 지파와 유다 지파간의 반복과 질시가 숨겨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 사후에 에브라임 지파와 유다(베냐민 포함해서) 지파는 더욱 첨예하게 대립했고, 타락 이후 우상 숭배만 아니라 쾌락과 탐욕에 도취되어 민생까지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을 그 동안의 솔로몬의 통치에 불만을 품어오던 대다수의 지파들은 에브라임 지파인 여로보암의 봉기를 열렬히 후원했던 것이다(12:12, 16-19).
Ⅱ. 그의 승진.
할 일이 있을 때 적당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솔로몬의 지혜로움이었다. 그는 여로보암이 매우 부지런한 청년임을 관찰하였다. 솔로몬이 관찰한 여로보암은 자기 일에 전념하고 그 일에 즐거움을 느끼며 그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점차로 그를 승진시켜서 마침내 그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두 지파에게 대한 국세청장으로 삼기까지 하였다. 또는 아마 솔로몬은 그 두 지방의 도백에 해당하는 직임을 그에게 맡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요셉가의 부역이나 공납 즉 세금이나 동원을 담당하는 관원이었던 때문이다. 근면은 승진의 지름길임을 명심하자.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자를 보느냐? 자기 일을 보살피고 수고하며 끝까지 해내려는 자를 보느냐?(잠 22:29). 그런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늘 비천한 자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윗과 그의 전임자와 후계자 이 세 사람의 차이를 살펴 보자. 사울은 용맹있는 자를 보면 자기에게 모아 들였다(삼상 14:52). 솔로몬은 부지런한 자를 보면 그를 등용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눈은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자기와 함께 거하게 하였다(시 101:6). 그는 경건한 자를 보면 등용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사람이었고 정직한 자를 보는(시 37:37)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여로보암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든 이유
솔로몬은 유다 지파의 성읍이라 할 수 있는 밀로의 건축과 다윗성의 보수 공사를 유다 지파가 아닌 에브라임 지파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였다(28절). 이러한 솔로몬의 조치는 그렇지 않아도 유다 지파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에브라임 지 파의 불만을 가중시켰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이스라엘 자국민이 아닌 주로 이방 노예들을 역군으로 삼아 건축 사업을 시행하던 당시 상황에서 (9:21.22), 이와 같은 조치는 에브라입 지파에게 상당히 큰 정신적 모멸감을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에브라임 지파의 불만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여로보암이 들고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솔로몬이 교만해져 왕국의 번영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건축 사업과 같은 외적인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의 수하에 있던 자들 가운데 그를 대적할 여로보암 을 미리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솔로몬은 왕권을 상징하는 예루살렘성의 안전을 위해서 밀로를 건축하고 왕권의 위엄을 드높이고자 다윗성을 수축했지만, 이러한 사업을 벌이는 와중에 점점 솔로몬의 왕권이 퇴락하고 왕국 분열을 주도한 여로보암이 급성장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그의 인간적인 지혜와 계획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술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반증해 주고 있다.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이런 인간적인 능력이나 장점, 자랑거리가 왕권 보존의 절대적인 조건은 되지 못한다. 과거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등극한 사울의 경우, 자신의 인간적 장점이 도리어 하나님과 멀어지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던 것은 이를 반증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될 여로보암을 소개하는 ‘큰 용사’ 라는 본문의 표현은 그가 앞으로 일으킬 반역과 관련해 여로보암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가 장차 솔로몬에게 반역할 뿐 아니라 사울과 같이 하나님께도 반역함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버림받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로보암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던 성실한 자세를 보임. 솔로몬 당시에 여로보암이 부역을 관장하는 감독으로 택함 받은 일은 결코 그가 가진 기득권에 의 한 것이거나 무작위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관찰 결과, 솔로몬으로부터 근면함을 인정받았기 때문. 이처럼 솔로몬은 자신의 눈으로 오랜 동안 관찰하여 가장 성실하고 능력이 있는 자라고 판단되는 사람을 선택하여 그를 감독으로 세웠지만, 오히려 바로 그 사람이 자신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치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Ⅲ. 솔로몬의 사후 열 지파의 통치자로 선정됨.
👉 28절,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함
‘요셉 족속’ 은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지칭함.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바 솔로몬이 유다 지파와 오랫동안 경쟁 관계에 있었던 요셉 족속에 게 유다 성읍과 관계된 ‘역사’를 맡겼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부분.
역사: 단순히 국가적 차원의 공역에 통원되어 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노예처럼 강압에 못이겨 수행하는 일(시 81:7)이라는 부정적 뉘 앙스를 강하게 전달하는 말
→ 따라서 이를 감당했던 요셉 지파의 솔로몬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요셉 지파의 역사에 총 책임자로 임명했던 것
혹자는 여로보암이 직접 솔로몬에 거역하는 음모를 꾸몄으며 왕위에 오르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는 거칠고 야망에 불타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여로보암이 솔로몬에 의해 밀로 건축의 책임자로 발탁되자 기회를 다잡아 솔로몬을 백성의 학대자로 비난하고 백성을 그의 통치로부터 이간시키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가 그런 의도로 말을 많이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랬다면 솔로몬이 목석이 아닌 이상 그 통보를 받았을 터이고 그렇게 되면 그의 출세도 막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심중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 선지자가 그에게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리게 될 것이다" (37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게 된 일의 원인이다. 아니, 이것은 오히려 그 일의 줄거리이다. 솔로몬은 그를 요셉 지파의 치리자로 삼았다. 그는 통치권을 인수하러 가다가 선지자를 만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가 왕이 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듣는다. 이리해서 그는 담이 커져 높은 자리를 엿보게 되고 몇몇 일로 왕을 대적하며 성가시게 만든다.
1.이 말씀을 전달한 선지자는 실로의 아히야였다.
우리는 이 아히야에게 대해서는 다시 읽게 될 것이다(14:2). 실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고 망각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전 날을 기억하사 하나님은 한 선지자로 그곳을 축복하신 듯하다. 아히야는 길에서 여로보암에게 사신(使信)을 전달하였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을 전달할 때 그랬던 것처럼(삼상 9:27) 아마 그의 종들도 명하여 물러가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눈에 띄지 않게 여로보암한테 전달됐다고 하여 그 신성함이나 확실성이 덜하게 되지 않는다. 비록 울타리 아래서 전달된다고 해도 말이다.
👉 아히야
그는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인 실로(Shiloh)의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다윗과 솔로몬의 초기에 활동했던 나단 선지자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 시대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으로 이스라엘에 큰 영향을 끼친 충실한 선지자였다. 그는 일생 동안 철저히 하나님만을 따랐으며, 훗날 여로보암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냉철하게 그에게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전하였다(14:1-13).
혹자는 여로보암의 반역 과정과 관련해 아히야가 이스라엘 내에서 에브라임의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여로보암을 충동질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아히야의 이후 행적과 비교해 볼 때 전혀 타당하지 않은 주장이다. 아히야는 오로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알았던 것이고 이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여로보암에게 예언하였을 뿐이다. 본문은 아히야가 하나님의 지시를 듣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즉시 여로보암이 있 는 장소로 달려가 그를 찾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선지자 아히야가 보여주는 이같은 신탁에 대한 적극적인 증언 자세는 솔로몬에 대한 여로보암의 반란이 단순히 지파간의 갈등 즉 세력 다툼의 과정에서 빚어진 정치적 결과물이거나, 한 개인의 야심 즉 여로보암 자신의 탐욕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여로보암을 사용하셔서 솔로몬의 죄악을 징계하시기 위한 목적에서 발생한 심판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이는 우선 남북으로 분열될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이 신생 왕국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상징물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입은 적이 없는 새 의복은 앞으로 이루어질 심판은 어떤 인간 적인 요소도 개입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비롯되고 준비될 것이라는 신적 기원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J. Gray). 이같은 상징적 주제 (motif)는 이후 엘리사가 여리고의 생 을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새 그릇을 필요로 했던 사건을 통해서도 반복적으로 발견된다(왕하 2:20).
의복: 정식 의복이라기보다 밤에 덮고 잘 수 있는 ‘담요’, 물건을 쌀 수 있는 ‘보자기’를 의미하는 물건. 본문은 아히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이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찢기에 용이한 담요 같은 것을 의도적으로 결치고 왔음을 뜻한다.
2.여로보암에게 보여 준 표적은 의복을 열 두 조각으로 찢어 열 조각을 그에게 주는 것이었다(30, 31절).
이 의복이 보통 당연히 여기듯 여로보암의 것인지 아니면 아히야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후자의 옷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즉 선지자)는 여로보암에게 표적을 주려는 의도에서 새 옷을 입었다. 사울에게서 왕국이 종결된다는 것은 외투자락의 찢어짐으로 예고되었는데 찢어진 옷은 사울의 것이 아니라 사무엘의 옷이었다(삼상 15:27, 28). 여로보암의 옷이 아닌 것을 열 조각 준 것은 여로보암의 옷을 주기 보다 더 의미심장하였다. 진짜든 가짜든 신약에서조차 아가보 같은 선지자도 그런 표적을 사용하였다(행 21:10, 11).
👉 찢어진 옷을 통해 왕권의 이동을 상징하는 것은 이미 선지자 사무엘이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때에도 사용된 바 있다(삼상 15:27- 29).
하지만 솔로몬의 경우는 사울의 경우와 차이가 있다. 즉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폐위 선고를 받고 급한 나머지 사무엘을 붙잡는 과정에서 그 옷이 찢어져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심판의 결과를 스스로 드러낸 반면, 본문에서는 선지자 아히야가 스스로 자신의 옷을 잡아서 찢음으로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 의지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이기 때문에, 본문의 행동은 하나님 자신의 행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행동은 이스라엘 왕국 분열이 우연한 사건이거나 사람의 계획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과 의지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3.전언 자체는 매우 자상하다.
(1) 아히야는 그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 열 지파의 왕이 될 것이라고 납득시킨다(31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왕들은 그를 의지하여 통치한다-" 내가 열 지파를 네게 주리라" 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의 미천한 출생이나 고용살이가 그의 출세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여로보암은 요셉 지파의 공사를 독려하고 감시하는 일개 감독으로서,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솔로몬의 거대한 권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조그마한 권세만을 가진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솔로몬의 권능을 강권적으로 파하사 그의 관할 아래 있던 10지파를 찢어내어 여로보암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 이는 누가 보아도 불가 능해 보이는 사건이나 전능하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친히 약속하시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실행될 사건이기에 필연적으로 성취될 사건이었다.
(2) 아히야는 그에게 이유를 설명한다.
여로보암의 선한 인격이나 공적 때문이 아니라 솔로몬의 배반을 징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솔로몬과 그의 가족과 많은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숭배함이라" (33절).
👉 ‘그들’ 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는 단지 이스라엘의 대표되는 솔로몬 개인의 배척과 반역 때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배척과 반역 때문이다.
결국 본문은 솔로몬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마음 깊은 데에서부터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하고 우상에게로 온 마음을 쏟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당시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영향으로 우상 숭배가 왕궁 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 사이에서도 만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백성들이 합심하여 강경히 하나님을 배척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결코 용서하실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 행하지 않았음”
다윗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킴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숭인을 얻었으나, 지금의 솔로몬은 정도에서 벗어나 우상을 섬기는 범죄를 저질렀기에 하나님께서 결코 그를 인정할 수 없다. 사실 다윗도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했다. 그도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는 등의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삼하 11:1-27),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 일로 인해 나단 선지자의 책망를 들었을 때 즉각적으로 깨닫고 하나님께 진실한 회개를 통하여 죄사함을 간절히 구했다(삼하 12:13;24:10;시 51편),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이를 어여삐 보시고 그의 죄과를 도말해 주셨다.
오늘날 성도들 또한 완전하게 주의 말씀대로 살지 못 하고 늘 과오를 범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들고 그를 소망하며 회개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는 사랑과 위로와 구원의 역사로 응답하실 것이다(빌 2:12; 히 3:14)
그가 왕이 되는 것은 저희가 그릇되이 행한 때문이지 여로보암이 더 잘 할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그들이 가나안의 주인이 된 게 자기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인들의 악함 때문이었다는 것을 인식해야했다(신 9:4). 여로보암은 그토록 훌륭한 자리에 앉을 만한 가치가 없었으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못된 군주를 맞이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히야는 솔로몬가로부터 왕국을 분할하는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는 가운데 여로보암도 범죄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3) 그는 여로보암의 기대를 제한시킨다. 열 지파만 기대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의 사후에 그 열 지파가 그에게 귀속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전부를 노리거나 즉각적으로 솔로몬의 통치를 교란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듣게 된다.
[1] 두 지파(여기서는 한 지파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소수의 베냐민이 어떤 의미에서 다수의 유다 지파 속에 파묻혀버린 때문이다)는 다윗가의 보루로서 확실히 남을 것이므로 결코 그들을 도모해서는 안된다는 것. ******
"내가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라" (32절). 그리고 다시***(36절) "다윗에게 한 등불이 있게 하리라"*** 고 말씀하신다. 즉 빛나는 이름과 기억 그리고 왕가로서의 그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시 132:17 참조).
👉 32절, 실제로 열두 지파 가운데 여로보암에게 약속된 지파는 열 지파이기에 솔로몬 에게 주어질 지파는 두 지파라고 말해야 옳다. 그럼에도 본문은 솔로몬에게 약속된 지파는 한 지 파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시므온 지파와 유다 지파를 하나의 지파로 보았기 때문이다. 과거 야곱 이 그의 아들들에 대하여 예언할 때 레위 후손과 더불어 시므온 후손은 흩어져 버림을 당할 것으로 예언되었다(창 49:5-7). 이 예언대로 시므온 지파는 한 지파로서의 독특성을 잃어버렸으며 유 다 지파에 할당된 지역인 남부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수 19:1-9). 따라서 여기서도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와 한 지파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일부를 다윗 후손의 통치하에 남기셨음을 의미한다. 열 지파를 받은 여로보암에 비교하면 다윗 왕 조의 왕권은 극히 미약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하나님은 다윗의 위를 영원히 보존하시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성실히 수행하셨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의 계보를 통하 여 나신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성취되었고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여로보암은 다윗이 사울처럼 배척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이 사울한테서는 그러셨으나 다윗에게서는 자기 인자를 거두시지 않으려고 하셨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다윗가는 옹호받고 그 명성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로부터 메시야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상하지(원뜻: 멸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음이라" (사 65:8).
[2] 솔로몬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가 열 지파를 소유하지 못 하리라는 것(34, 35절).
여로보암은 솔로몬을 폐위시키겠다고 나서서는 안 되었다. 그는 자기의 시간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했다. 솔로몬이 생전에는 그로 온 나라를 주관하게 할 것이다. 이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그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왕관을 몰수당했으므로) "내 종 다윗" 을 위해서였다. 다윗은 "내 명령" 을 지켰기 때문이다. 자녀가 부모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선한 부모의 경건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경우가 왕왕 있다.
👉 내가 저를 위하여 … 주관하게 하려니와
본문에서는 멸망시켜야 할 자에게 오히려 관용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 하고 있다. 즉 본문은 솔로몬과 그의 백성들의 범죄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나라 전체를 빼앗아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다윗을 기억하사 진노 중에도 솔로몬의 주권 을 빼앗지 않는 은혜를 베풀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계속해서 세우시겠다는 적극적 의지를 표명하신 다. 결국 본문은 비록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는 등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 의 부친 다윗의 믿음과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사 솔로몬을 즉시 버리지 아니하시고 왕국 분열 심판의 시행을 그의 아들 때로 미루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여전히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 도자의 자리를 유지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임을 의미한다.
35절,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줄 것
솔로몬 때가 아닌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빼앗으리라 하신 것은 ‘각기 자신의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 (렘 31:30)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 원리와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쉽게 해결된다. 왜냐하면 르호보암 때의 왕국 분열의 직 접적인 책임은 르호보암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왕국 분열은 르호보암 자신이 솔로몬의 치리 기간 동안 무거웠던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더욱더 가혹하게 백성들을 노예처럼 압제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함으로 발생된 결과였다 (12: 1-15).
37절, 내가 너를 취하리니
‘취하리니’ : 이는 강하게 붙드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으로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동사에는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즉 본래 의도하셨던 바가 아니라는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사용되는 ‘라카흐’ 동사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왕으로 선택된 자들에 대해서 사용된 동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왕으로 선택된 다윗과 솔로몬의 경우 에는 ‘라카흐’ 동사가 아니라 ‘선택하다’, ‘뽑다’라는 의미의 ‘빠하르’ 동사가 사용되었었다 (8:16 ; 대상 28:5).
따라서 본문은 여로보암이 하나님 보시기에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합당하여 선택되어진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스라엘을 정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취하여진 자라는 뉘앙스를 전달해 주고 있다.
여로보암은 왕이 되었을 때 제한된 왕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증하시는 완전한 왕권을 행사하게 될 것, 즉 본문은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허용하신 왕권이 솔로몬을 징계하기 위한 진노의 막대기 역할만을 하고 마는 일시적이며 불완전한 왕권이 아니라(사 10:5), 열 지파에 해당하는 북이스라엘에 국한되기는 하겠지만(35절)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증된 온전한 왕권이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4) 그는 여로보암이 선한 행실에 의존하고 있음을 그에게 이해시킨다.
면류관은 quamdiu se bene gesserit-즉 선한 행실을 보이는 동안에만 허용되어야 한다. "네가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면 내가 너를 위해 견고한 집을 세우리라. 네가 그러지 않으면 나도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 (38절).
👉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도 다윗의 자손과 똑같이 순종 여부에 따른 왕권 보존의 약속을 주셨음.
하나님이 이같은 조건적 약속을 여로보암에게 주신 것은?
비록 솔로몬의 죄악으로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분열될 것이지만, 두 왕국 백성들 모두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전에 솔로몬에게 그리하셨던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북왕국의 지도자가 될 여로보암에게도 당신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여로보암의 가문이 계속해서 왕위에 오르도록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오래도록 굳건히 지키실 것을 약속하셨다.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솔로몬의 범죄를 징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방적 섭리의 결과이지만, 여로보암의 왕위가 그 후손들에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느냐의 여부는 말씀에 대한 여로보암의 순종 여부에 달려 있었다.
이같은 의미에서 여기 나온 조건적 축복의 공식 (신 28:1-14)은 모든 왕들에게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Gates). 그러나 불행히도 여로보암은 이 축복을 결코 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유능 하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어떤 악한 일도 서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자신의 사욕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앙까지도 자신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한다(12:25-33). 결국 이런 그의 교활하고 패역한 행동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징벌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그의 아들의 죽음과 더불어 가문이 멸절되는 참화를 당하고 만다(왕상 15:29).
이 말씀은 그가 하나님을 버리면 비록 왕좌에까지 올랐다고 하더라도 그 집안은 티끌에 놓이게 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에 반해 다윗의 자손은 환란 중에 있긴 하나 영원히 환란을 당하는 건 아니며(39절), 다시 흥왕하기도 할 터였다. 사실 유다에서는 유명한 임금이 여러 명 나왔던 것이다. 여로보암 가문이 멸절된 때에도 그들은 영광 중에 통치를 하였다.
👉 39절, 하나님께서 북부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신 것이 다윗 자손에게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보여줌
괴롭게 할 터이나..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 뿐만 아니라 겸손하게 만드는 것까지도 포함.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물리적 고통 뿐 아니라 심리적 고통까지 포함하는 괴로움으로, 하나님께서 겸손한 마음, 즉 회개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허락하시는 사랑의 징계를 가리킨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는 아버지가 그 자식을 훈계함과 같은 사랑과 애정이 담긴 질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다윗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변치 않고 계속됨을 나타낸다(신8:5 ; 욥5:17).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비록 다윗의 자 손들이 그들의 죄로 인해 징계의 고통을 당하나, 이는 결코 영원한 징계가 아님을 강조.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 자손들의 징계에는 분명한 시한이 있다는 것과, 그 징계의 최종적 목적이 회개에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Ⅳ. 애굽으로 도주하는 여로보암(40절).
솔로몬은 우여곡절 끝에 이 모든 일을 알게 되었다. 아마 여로보암 자신의 입에서 이런 말이 새어나왔을 것이다. 그는 사울과는 달리 이 일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자기만 알고 있지 못하고 남에게 말해버렸다. 만일 그가 혼자만 알고 있었더라면 본국에 남아서 미래의 웅비를 위해 준비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 40절 상황은 여로보암이 ‘손을 들어 왕을 대적했음’ 을 알려는 26절에 연결되어 일어난 상황으로, 반역을 일으킨 여로보암을 솔로몬이 죽이기 위해 온 지역을 수색하며 그를 찾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본절의 내용으로 볼 때, 여로보암은 아히야의 예언을 듣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여 즉시 반역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솔로몬으로 죽기 전에 반역을 일으킨 것은 솔로몬 생전에는 온 나라를 여전히 솔로몬으로 주관하게 하시 겠다고하신 하나님의 뜻 (34절)을 거스르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무관한 왕권 자체에 대한 성급한 욕심에서 출발한 잘못된 혁명이었다.
이러한 여로보암의 성급한 처신은 사울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선택하실 때의 상황과 선명하게 대비된다(삼상 16:1).
다윗
다윗은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삼상 24장),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의 자리에 세우실 때까지 겸손히 기다렸다.
여로보암
아히야의 예언을 듣고 즉시 솔로몬을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켰다. 이것은 솔로몬 사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을 나누어 주리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한 것이었다. 결국 성급했던 여로보암의 일차 모반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이로 인해 그는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으로 피신해야만 했다(40절).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위적 노력만으로 이루려고 하는 것은 결코 성공으로 이어질 수가 없다.
이 일이 알려지고 난 뒤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어리석게도 솔로몬은 자신의 후계자를 살해하려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에 어떤 계획이 있더라도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 19:21)고 남에게 가르친 이는 솔로몬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의향을 꺾어보겠다고 생각하는가?
👉 한편 솔로몬은 그 자신의 대에서 나라가 분열되는 비극을 겪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죄의 대가로 말미암아 그의 말년을 내외적으로 혹독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길
이처럼 죄를 범한 자는 영육간에 결코 평안함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는 것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어려울지라도 그 안에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이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42절, 솔로몬의 통치기간
솔로몬의 통치 기간은 아버지 다윗의 통치 기간과 동일했지만, 솔로몬의 전생애는 다윗의 70년 생애에 미치지 못한 짧은 것이 었다(1:1;2:10.11).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한다면 지혜와 더불어 장수하는 축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3:14), 그가 이를 지키지 않고 노년에 이르러 우상 숭배의 죄 악에 빠짐으로써 (4절) 스스로 단명을 자초한 것이다.
열왕기 기자가 솔로몬의 죽음을 겨우 세 절(41-43절)로 종결지은 것은 다윗의 죽음을 묘사한 2:1-12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본서 기자는 솔로몬의 통치 말년의 행적에 대해서도 과감히 생략하고 있다. 이같은 방식으로 그의 말년을 기록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 숭배로 점철된 솔로몬의 말년과 관련해 그가 이루었던 업적이나 그가 누렸을 호화로운 생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해 주기 위한 본서 저자의 의도라고 보여진다.
아무튼 솔로몬의 최후에 대한 기술은 그의 화려했던 통치 초기와 비교할 때 너무 초라한 것이며 독자들에게는 허무감마저 느끼게 한다. 한편 솔로몬의 노년에 대한 기사를 이와 같이 과감히 생략했기 때문에, 솔로몬이 말년에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왔는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 생애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 대하11:17을 근거로 추론 해볼 때, 솔로몬이 죽기 전에 신앙을 회복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특히 전도서가 자신의 생애를 뒤돌아보는 가운데 쓴 솔로몬의 저작이라고 볼 때 이런 추정은 더욱 설득력 있는 것이 된다.
2.여로보암은 슬기롭게도 애굽으로 물러났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가 어디에 있든 안전히 지켜 줄 것이었으나 그는 자기 보존을 위한 수단을 강구하려고 하였다. 그는 결국 나라가 자기 수중에 들어올 것을 확신했기에 잠시 망명하여 미미하게 사는 데 만족하였다. 우리에게는 보다 좋은 나라가 예비되어 있다. 그런데 어찌 우리도 그러지 않을 것인가?
👉여로보암이 솔로몬 왕을 피해서 애굽으로 도망간 상황은 솔로몬을 대적했던 ‘하닷’ 이 어린 시절 다윗 왕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갔던 상황과 유사하다(17-20절), 이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왕 들로부터 도망하는 자들이었으며, 그 피난처가 애굽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하나님께서 도망하는 자들을 주권적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세워나가시려는 의도를 발견하게 된다. 즉 사울 왕에게 쫓겨 광야로 도망갔던 다윗을 준비하셔서 신정 왕국 이스라엘을 바 로 세우셨던 것처럼, 도망하는 하닷과 여로보암을 준비하셔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솔로몬과 이스라엘을 견책하시고 이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시금 새롭게 세우려 하셨던 것이다.
한편 그간의 내용을 통해 본서 저자는 솔로몬이 애굽의 공주와 결혼한 뒤 그녀를 위해 별궁을 지어주고 애굽으로부터 말과 병거를 수입하는 퉁 많은 면에서 솔로몬이 애굽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한 사실을 서술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솔로몬이 의지하던 바로 이 애굽을 솔로몬을 대적하는 자들을 위한 피난처로 삼으신 것이다. 이는 그간 애굽과 관련해 솔로몬이 취했던 인본주의적 정책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무한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본장은 솔로몬의 타락과 왕국 분열 예고를 다루면서,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은 솔로몬의 범죄에 대한 징계로 주어진 것으로, 그로 인해 다윗에게 허락된 영원한 언약이 폐기된 것은 아니었다. 즉 다윗 언약을 유지하면서도 솔로몬의 범죄에 대하여 공의로 징계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과거 다윗과 솔로몬에게 준 말씀 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는 여로보암에게도 동일하게 약속되고 적용된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만이 축복의 유일한 방편임을 강조하는 신명기 사가의 일원으로서 본서 저자의 신학적 입장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축복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