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4, 시편 1, 2, 잠언 19, 골로새서 2
묵상구절
20:22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께서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하니라
20:23 아람 왕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
20:24 또 왕은 이 일을 행하실지니 곧 왕들을 제하여 각각 그 곳에서 떠나게 하고 그들 대신에 총독들을 두시고
20:25 또 왕의 잃어버린 군대와 같은 군대를 왕을 위하여 보충하고 말은 말대로, 병거는 병거대로 보충하고 우리가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하리이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그리하니라
20:26 해가 바뀌니 벤하닷이 아람 사람을 소집하고 아벡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매
20:27 이스라엘 자손도 소집되어 군량을 받고 마주 나가서 그들 앞에 진영을 치니 이스라엘 자손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20:28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20:29 진영이 서로 대치한 지 칠 일이라 일곱째 날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 명을 죽이매
20:30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벽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명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20:3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들은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하니 만일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로 나아가면 그가 혹시 왕의 생명을 살리리이다 하고
20:32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러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이르되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 그는 내 형제이니라
20:33 그 사람들이 좋은 징조로 여기고 그 말을 얼른 받아 대답하여 이르되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그를 인도하여 오라 벤하닷이 이에 왕에게 나아오니 왕이 그를 병거에 올린지라
20:34 벤하닷이 왕께 아뢰되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보내리이다 또 내 아버지께서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이르되 내가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벤하닷의 두 번째 패배(열왕기 상 20:22-30)
여기서 우리는 아합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전번 싸움에서 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두는 성공담을 볼 수가 있다. 아합이 우상 숭배자임에도 싸움의 승리자이요, 박해자이면서 정복자인 것이니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이 사악한 자가 번영을 누리게 허락하시는 데는 거룩한 지혜와 목적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신다.
Ⅰ. 아합은 선지자의 권고로 또 다른 싸움에 대비한다(22절).
이제 그는 안심하고 있었고, 자기 앞에는 큰 난관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영혼을 소홀히 하는 자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소홀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선지자는(하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아람 사람들의 계획을 알려 주신다) 해가 바뀔 무렵이면 벤하닷이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고 그들이 입었던 타격을 복수하고자 새로운 기도를 세우게 되리라는 것을 아합에게 가르쳐 준다. 선지자는 아합이 힘을 기르고 방어 태세를 갖추어 강한 저항을 하도록 분부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결과에 대해서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합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너의 힘을 기르고 준비하라. 하나님이 도움을 주시며 저를 튼튼히 할 것이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항하는 적은 원한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며 가끔 그들 스스로 휴식을 취하지만 교회에 대하여 위협과 학살을 감행할 뜻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영적인 적으로부터 공격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하여 주의하며, 항상 대처해야 한다.
💡 22절, 직역하면, “너는 가라, 너는 힘을 길러라, 그리고 너를 깨달아라, 그리고 너는 살피라’
본문에서는 명령형으로 이루어진 네 개의 동사가 연이어 사용 ⇒ 상전이나 왕이 종이나 신하에게 명령하는 듯한 강한 뉘앙스를 전달하고 있다. 선지자가 이와 같이 아합에게 강력히 명령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자신은 자기 개인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람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를 거둔 아합과 북이스라엘 군사들이 지나친 자신감으로 인해 경계를 느슨히 하고 정신 상태가 헤이헤져 있을 수 있음을 아시고, 앞으로 다가올 아람의 재공격에 대비해 준비할 것을 강력하게 명령하시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전쟁에서 북이스라엘의 총지휘관은 아함 왕이 아니고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는 암울한 상황에서 한 선지자를 통해 북이스라엘에게 전쟁 승리에 대한 확인을 주심으로 북이스라엘의 사기를 북돋우어 주셨고, 전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도 친히 알려 주셨다(13-15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승리 이후에도 앞으로 아람의 제2차 침공이 있을 것을 미리 알려주시어 그에 대비하도록 조언해 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북이스라엘에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채워주시며 또한 예비케 해 주신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 신설하시며 시기 적절하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은혜로운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비록 험하고 주변의 대적의 공격이 극심하더라도 역사의 주관자되시며 우리 인생의 총지휘관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뢰하는 자들로 결코 수치를 당치 않게 하시며 최종적으로는 항상 승리하도록 측 복해 주시기 때문이다.
22절의 명령을 내리는 이유: “해가 돌아오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 ‘왜냐하면 다음해 봄이 돌아오면 아람 왕이 당신을 다시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 북이스라엘 군대는 자신들에게 완전히 패배하여 많은 인명을 잃은(20절) 아람의 군대가 전투 의욕을 상실하여 이스라엘을 재차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지자를 보내사 아람이 이스라엘을 다시 공격할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다. 두 가지 면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발견됨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하러 올라올 아람의 대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게 하시는 은혜, 세상의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드러내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는 은혜 사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음 해 봄에 아람이 재차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을 목도하고 또한 그 두번째의 전투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게 된 아합과 북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우상 숭배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Ⅱ. 벤하닷은 다음에 있을 싸움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건의를 듣는다.
💡 앞선 22절: 익명의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긴장을 늦추지 말고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권면을 전하였음이 기술되었다.
이어지는 23-25절: 아람의 진영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즉 벤하닷의 신하들이 벤하닷에게 새로운 계획을 세워서 다시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준비하도록 권고하자 벤하닷이 신하들의 말대로 행한 사실이 기술.
그런데 이러한 벤하닷의 신하들의 권고는 앞선 이스라엘과의 일차 전투에서의 참패에 대한 그들 나름의 분석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들의 분석에 의하면 그들의 패배의 원인은 두 가지였는데, 첫번째는 이스라엘의 신 때문 두번째는 돕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벤하닷 수하의 32명의 지방 영주들의 무능력 때문. 물론 아람의 패배에는 벤하닷의 지나친 교만으로 인한 방심과 술취함이 큰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벤하닷은 이미 신하들의 그러한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벤하닷의 신하들은 이 두 가지 문제만 제거된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벤하닷의 모사들의 이러한 분석 중 본절은 첫번째와 관련된 것으로 그들의 잘못된 신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잘못된 신관은 북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두번째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 되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28.30절)
‘그들으 신들은 산들의 신들이다’
이는 고대 근동 사람들이 가졌던 다신관을 그대로 반영. 이들은 자신들의 다신관에 입각하여 이스라엘 역시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 신들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언 여호와시니"(신 6:4)
이들이 이스라엘의 신을 ‘산들의 신들’이라고 이해한 이유를 추측해보면,
첫째, 이스라엘이 과거 가나안 족속들과 행한 전쟁에서 취한 전략 때문. 이스라엘은 철병거로 무장한 가나안 군대를 어기기 위해 주로 산악 전투를 선호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악 지대에서 먹을 물을 찾아내면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자 가나안 백성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이 믿는 신이 ‘산신’ 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삿 4:1-16).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곳이 시내산이었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뒤에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주변국들이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오해할 수 있었다. 셋째, 고대 근동 지역에 자리잡은 지역신 개념 때문. 당시 사람들은 각각의 신은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특정 지역이나 민족에만 영향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는데, 사마리아는 높은 산지에 위치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의 신을 산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산의 신라고 여겼다고 볼 수도 있다. 넷째, 갈델산에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은 여호와가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고 엘리야에 의해 바알 선지자 450명어 죽임을 당한 최근에 있었던 사건을 통해 유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18:38). ⇒ 아마도 이러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벤하닷의 신복들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산들의 신들'로 오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신적 견해는 자기들의 작전대로 이스라엘과 들판에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철저한 패배를 당함으로써 잘못된 것임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29,30절).
1. 그들은 "싸움터를 바꾸라" 고 건의한다.
그들은 지난번 싸움에서 그들을 패배시킨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때문이라고 간주한 것이다(당시에는 이렇듯 보이지 않는 권세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를 지극히 어리석게 말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이며 이름도 하나인데, 여호와 하나님은 "많은" 분이 계시고,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모든 세계의 지배자인 데도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고 이스라엘 국가에 특유한 작은 지역만의 하나님이며 그들의 예언자 다윗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편 121:1)라고 말했다 해서 여호와를 "산의" 신 일 뿐이라 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기초가 성산에 있음이여" (시편 78:54; 87:1)라고 말했고, "그의 성산" 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다(시 15:1; 24:3).
이처럼 여호와를 아람 사람들이 상상하는 대로의 신이라고 치고 그들은 여호와께서 성산에만 거하시고 그곳에서 내려 오시지도 않고 오실 수도 없으리라 믿으며, 그러기에 평지에 군대는 여호와의 눈 아래 쪽에서 인지되어 보호를 받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방인이 상상" 이 터무니없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들이 초라하게 음울" 해지고 그들이 "매우 현명하다고 예언하지만," 그들은 "바보가 되는 것이다."
2.그들은 벤하닷에게 장관들을 바꾸고(24, 25절), 타고난 지휘관들인 왕들을 제거하고 대신 겉만 번드르르한 왕들보다 전쟁에 익숙하며 전쟁만을 철저히 수행하는 오직 공적을 인정받는 장교들을 활용할 것을 건의한다.
모든 아람 백성은 각자 마다의 여건하에서 익숙해진 분야에서 그리고 적재 적소에서 싸우도록 활용되어야 한다. 아람은 부하고 인구가 많아서, 그토록 크게 패배했음에도 말을 말로 전차는 전차로 보충을 충분히 해 낼 수가 있었다.
💡본문은 이들 지방 영주들을 전투에 기용하지 말고 다른 이들로 군대를 지휘하게 하자는 주장.
이들 왕들은 첫번째 전투에서 그들 각자가 이끌고 온 파견대를 지휘하는 부대장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 32명간의 엇갈린 이해 관계로 인하여 아람군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벤하닷의 신하들은 이러한 체제를 다시 적용하지 말고 완전한 군사적 통일체를 구성하여 북이스라엘과의 두번째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즉 벤하닷의 신하들은 32명의 지방 영주 대신 벤하닷 직속의 전투 지휘관들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함으로써 지휘 체계를 단일화하고 군대 운용의 효율성을 기하도록 건의한 것이다. 그리고 벤하닷은 실제로 전투 비전문가인 지방 영주보다는 실전적 경험이 많은 전투 지휘관들을 배치함으로 전력의 극대화를 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구상은 합리적인 것이었으나 이번 전투에서도 객관적 전력에서 약한 북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전투에 개입하셔서 북이스라엘로 이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계획과 지혜가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 이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확신은 ‘신들의 신들'이 아닌 ‘무소부재하시며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 하나님께서는 밴하닷의 신하들의 잘못된 신관을 여지없어 파쇄하는 행적을 보이심으로써
이방인들로 만유를 다스리시고 만유에 충만하신 당신의 실존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스라엘에게는 전능하신 참 하나님 여호와를 더 굳게 의뢰하고 섬기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다.
Ⅲ. 양쪽 군대가 평지에 진을 친다.
벤하닷은 아람 사람들과 더불어 아셀 지파의 아벡 근처에 진을 친다. 아셀 지파의 땅은 아마 벤하닷 부친이 빼앗었던(34절) 곳으로서, 그가 소유하던 도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땅 주위는 평평하여서, 그의 목적하는 바에 합당하였다(26절). 아합도 그의 군졸과 함께 얼마간의 거리를 띄우고 대치했다 (27절).
양군의 숫자상의 불균형은 현저하였다.
-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2개 대대로 배치되었고, "마치 어린애들이 두 개의 무리로" 모여 있듯이 보였고, 숫자도 적으려니와, 장비도 허술하여 외관(外觀)이 초라했다.
💡 ‘염소 새끼의 두 적은 떼와 같음’
당시 팔레스틴에서 목자들이 치던 염소 떼의 규모는 대개 양떼보다 적었다. 또한 염소들은 양떼와 달리 한산하게 흩어져 있었으므로 본문의 ‘염소 새끼의 두 적은 떼’는 이스라엘 군대의 모습어 매우 초라하였음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
⇒ 그들의 연약함을 강조하면서 ↔ 이러한 연약한 군대를 통해 강한 군대룰 무찌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역설적으로 드러냄.
- 그러나 "아람인들" 은 숫자와 소리, 전차, 수송차, 짐들로 온통 "그 땅
에 가득하였다."
Ⅳ. 아람의 유리한 점이나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용솟음치는 가운데 싸움을 전개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와서, 이 많 군대를 모두 "네 손에 붙이리라" 고(28절)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왕을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을 위해 이와 같이 할 만큼 아합이 가치 있는 왕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알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하심은 아합이 하나님을 찬양했거나 기도한 때문이 아니라(이스라엘 왕이 그렇게 했다는 기록은 없다) 아람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은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고 말했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옹호하시어 그의 이름의 영예를 유지하시는 것이다.
만약 아람인들이, "아합과 그의 백성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망각하였으니, 하나님의 보호를 벗어났도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을 쳐부수리다" 라고 말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이스라엘을 멸하셔 아람 사람들에게 굴복케 하였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과 하늘과 땅, 계곡과 산의 만군의 주님이신 그 영예와 전능하심을 그토록 무시 했으니, 그들의 자부심과 자신감의 근원이었던 군대를 모두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러한 잘못을 깨닫게 되리라
💡 “여호와의 말씀이 … 하도다…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막강한 아람 군대와 맞서 다시 또 위기에 직면한 이스라엘에게 과거의 그 선지자를 다시 보내어 북이스라엘로 승리케 하실 것임을 말씀하신다. 아합과 북이스라엘은 앞선 아람과의 1차 전쟁에서 이미 이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진 신탁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였기에 이 선지자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
‘코 아마르 예흐와'라는 표헌은 본절과 13절 외에 42절에서도 사용됨. 그런데 13절과 본절에서는 구원의 메시지에 앞서서, 그리고 42절에서는 심판의 메시지에 앞서서 이 어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세 번의 경우 모두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어구로 시작하는 세번의 말씀은 모두 현실 상황이나 일반적인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즉, 암울한 때에는 — 승리의 말씀을(13.28절), 전쟁에 승리한 때에는 — 아합의 죽음을 말씀하셨다(42절).
⇒ 본서 저자는 현실 상황이나 사람들의 생각에 제한 받지 않고 오로지 당신의 뜻하신 바에 따라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이 예언을 들었던 아합과 그 시대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본서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지자 엘리야를 통하여 북이스라엘에게 당신은 전능하고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알리신 바 있다(18:3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섬기지도 않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이 직면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또다시 당신의 능력을 보이심으로써 — 북이스라엘로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올 수 있는 기희를 다시 베푸시고 있다.
Ⅴ. 서로의 군대가 칠일 동안을 대전하고서(아마 아람인들은 기고만장 했을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겠지만) 이스라엘 사람의 칼에 살육당한 아람인의 숫자는 10만이 되고(29절), 강고하게 방어된 도시 아벡의 성벽 밑에 있으면 안전하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네들을 보호해 주리라 기대했던 성벽에서 파멸했다(아벡 도시의 성벽에서는 활쏘는 자들이 적을 괴롭힐 수도 있었다. 삼하 11:24).
아마 지진으로 성벽이 그들 위에 무너지고 가나안의 도성들은 하늘 높이 싸여져, 그들은 모두 죽거나 다치거나 놀랐을 것이다. 자기의 도성 아벡이 정복자들을 막아내리라고 믿었던 벤하닷은, 그 도성의 성벽이 이렇게 무너졌고 그의 군대의 자존자들도 사기가 저하되고 분산되자, 그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비밀히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추적자를 피해 "골방" 에 들어갔다. 비할 데 없이 큰 자신감도 이따금 최대의 비겁으로 끝나게 됨을 기억하자. "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계곡의 하나님인가 아닌가?" 이제 벤하닷은 "자기를 숨기기 위해 골방에 들어가야" 함을 알라(왕상 22:25).
💡앗시리아의 기록에 따르면 약 3년 뒤에 발생한 카르카르의 전투에서 아람의 군대 보병을 2만명 정도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본절의 10만명의 군사의 수가 과장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이스라엘과의 2차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여 많은 전사자를 낸 후 크게 감소한 사설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라 하겠다.
30절, 그 성이 그 남은 자 2만 7천 위에 넘어짐
이러한 표현은 아벡성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졌다기보다는 아벡성의 한쪽 벽이 무너졌음을 암시한다. 압도적인 군사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루만에 10만의 군사들이 몰살하자(29절) 나머지 아람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아벡성으로 몰려들었고 혹시나 이스라엘 군대가 다시 쳐들어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모두 성벽에 몰려 방비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Rawlinson). 그리고 바로 그렇게 방비를 하는 중 성벽이 갑자기 무너졌기 때문에 27,000명이나 되는 사상자가 발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아벡의 성벽이 무너진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군사들이 성 벽쪽에서 땅을 파서 넘어지게 했을 것이란 견해도 있지만(Thenius), 본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행위의 주체를 나타내지 않음으로 이 성벽을 무너뜨린 주체가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성벽의 무너짐을 하나님의 전쟁 개입으로 인한 초자연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Keil).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감
본문은 벤하닷이 성벽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데, 벤하닷의 생존은 앞으로 진행될 사건의 중요한 발단이 됨. 즉, 본절에 이르기까지 긴장의 주요 요소였 던 아람과의 전투가 북이스라엘의 극적인 승리로 끝나면서 이제 새로운 사건이 전개되는데 전쟁에서 죽지 않고 생존한 벤하닷이 이후 사건의 중심 인물이 되는 것. 벤하닷은 자신의 군대가 단 하루 만에 10만명이나 죽었을 뿐만 아니라 성벽이 무너져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한 것을 목도하고 겁에 질려 허겁지겁 도망하기에 바랐던 것. 그리고 그 도시의 가장 깊숙이 있는 골방으로 숨어 들어가 목숨을 부지하려 하였다. 겁에 질린 이러한 벤하닷의 모습은 과거 아합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과 같은 어조로 교만하게 전언을 보내었던 모습과 대조된다(5,6절).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교만한 자세를 취하는 악인은 결국 이처럼 비참하게 낮아질 수밖에 없다(시 37:38; 잠 2:22).
●아합의 어리석은 자비(열왕기 상 20:31-43)
👉 앞선 1-30절의 단락에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전력상 절대 열세인 이스라엘 군대로 막강한 아람의 군대를 격퇴하게 하신 사실이 기술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장 31-4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를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합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벤하닷을 살려주었으며, 이러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합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 경고가 주어진 사실이 기술된다.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람에게 거둔 승리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이 설명되어 있다.
Ⅰ. 벤하닷의 비겁하고 비열한 항복을 보자.
골방 속에서조차 그는 무서워하여, 아무도 쫓지 않는데도 할 수만 있으면 더 도망하려고 한다. 그의 부하들은 벤하닷과 부하들 스스로가 극도로 위축이 되어 있음을 보고, 항복하여 스스로 포로가 되고, 아합왕에게 자기들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탄원하자고 권유한다(31절).
벤하닷의 부하들이 그들의 목숨을 내맡겨 먼저 나서게 되면 그들의 독촉 때문에 벤하닷 왕도 따르리라. 그들이 이러한 방도를 권유함은 이스라엘 왕이 어떤 주변 나라보다 인자스럽다는 평판 때문에서였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자비로우시며 그 백성들에게도 탄압적이 아니며" (그 당시 이스라엘 정부가 가장 선하고 유했다), "이스라엘의 적일지라도 자비를 구하면 잔인하게 대하지 않는다 하옵니다."
이스라엘 왕들에 대하여 그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졌던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의 이름이 "자비심이 많으니라" 고 선언한 것을 들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스라엘 왕들이 그 하나님의 모범을 따를 것이라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자비를 베풀 듯" 자비로 옷 입고 있었다는 듯이 여겨졌다는 것은 이스라엘 왕들에게는 하나의 영예로운 일이었다. "그들은 자비심 많은 왕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항복에 어떤 자비의 혜택이 있을지 모른다" 고 생각했다.
가엾은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지고 회개하기 위해서는 이런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듣지 않았는가? 그러한 자비스러운 분임을 우리가 보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을 찢고, 그에게로 돌아가라" (욜 2:13).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는 데서 흐르는 복음주의적 참회이다. 즉 "하나님에게는 용서함이 있도다."
👉 한편 이처럼 목숨을 구걸하는 벤하닷의 말에 아합은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그에게 ‘헤쎄드'를 베풀고 있다. 그러나 벤하닷에 대한 아합의 이러한 ‘헤쎄드’는
북이스라엘로 승리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자비(헤쎄드)'를 짓밟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헤쎄드)'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42절).
만약 아합이 북이스라엘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하심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 벤하닷을 마땅히 죽여야 했다.
벤하닷의 부하가 아합에게 설명한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 그들의 왕 벤하닷은 참회자가 되었다. 그들은 마치 아합의 나라를 침범하여 그 나라의 안온함을 깨뜨려 죽을 죄를 지었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듯, 조객처럼 "굵은 베로 허리를 묶었다." 여기에서 보면 저들은 잘못을 회개하려고 그들이 상처를 입혔던 아합 왕의 발 앞에 부복했다. 못된 짓을 한 자는 그 짓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회개하는 체하고, 반면 그 짓이 성공하게 되면 이를 정당화시키고 자랑한다.
👉 굵은 베로 허리를 묶는 것
본래 ‘참회'를 상징하는 행동이지만 여기서 이들이 이같은 자세를 취하는 것은 아합의 동정심을 자아내기 위해서이다.
테두리를 머리에 이는 것
자신의 생사가 상대의 손에 달려 있음을 나타내는 것.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을 깔보고 무시하며 그들을 공격하였던 아람 왕과 그의 신하들이었지만(5-10절) 이제는 처지가 완전히 바뀌어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자신들의 교만과 잘못을 고백하며, 생명 보존을 위해 굴종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2. 벤하닷 왕은 자기 목숨을 애원하는 걸인이 되었다. "왕의 종 벤하닷이 말하기를 나의 생활을 살려 주옵소서(32절). 비록 나의 조국을 떠나 영구적인 망명생활을 할지라도 어떤 조건하에서이건 나를 살게만 하소서."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 아합 왕에게 온 벤하닷의 신하들은 비굴하게 느껴질 만큼 겸손한 표현을 사용하여 벤하닷의 말을 전한다. 본문을 다시 번역 하면 ‘바로 당신의 종 벤하닷이 말합니다. 제발 나의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이다.
본절은 동일한 전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2,5절에 기술된 벤하닷의 교만한 모습과 대조되며, 본문에서 벤하닷 의 뜻을 전하는 그의 신하들이 벤하닷을 일컬어 ‘당신의 종'이라고 표현한 데에서 그가 이제 아합 왕의 봉신이 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음이 드러난다.
(1) 그의 처지에서의 변화.
권력과 부귀에서 망신(亡身)과 고통의 구렁텅이로, 그리고 온갖 빈곤과 심신의 고통과 노예 상태로 빠져들다니! 인간사의 불확실성을 유의하라. 인간사란 수레바퀴의 살처럼 최상에서 쉽사리 최하로 바꾸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2) 그의 성질의 변화.
본 장의 서두에서 나타난 벤하닷은 허세를 부리고 욕을 잘하며 공갈을 하며, 도저히 수락 못할 요구를 하던 그런 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움츠려 들어 흐느껴 울며, 최하의 요구를 하게 되었다. 지금껏 유린해 온 자 앞에서 목숨의 부지를 위해 비열하게 매달리고 있다! 번영을 만끽할 때 거만해지는 자는 흔히 역경에 부딛치면 가장 비열해지는 법이다. 평범한 마음을 가진 자는 번영의 때에나 역경의 때에나 꼭 같으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멸시하시며, 티끌 속에 묻어버리심" 으로써(욥 11:11-13) 자신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을 주목하자.
👉 한편 이러한 벤하닷의 글종적 모습은 그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돌이켜 회개하지 않는 아합의 죄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앞선 2, 5절에서 한없이 교만한 말을 내뱉었던 벤하닷이 전쟁에 패배하여 아합에게 용서를 비는 비굴한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의 아합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 교만한 이방 왕이라도 위기에 처하자 이렇게 둘이켜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데,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엄위한 심판의 말씀을 듣고서도 회개치 아니하였음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43절).
Ⅱ. 아합은 벤하닷의 항복을 어리석게도 수락했다.
이제 갑작스럽게 그와 맺은 동맹을 살펴보자. 몹시 두려워했던 벤하닷이 비위를 맞추어 오는 바람에 아합은 교만해지며, 매우 온유하게 그의 안부를 묻는다. "아직도 그가 살아있느냐? 그는 나의 형제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피를 나눈 자는 아니나 형제 왕이로다. 아합은 그의 신앙보다는 오히려 왕권이나 그에 부수적인 것을 더 중요시했다. "벤하닷이 당신의 형제란 말인가 아합 왕이요? 벤하닷이 그토록 야만스러운 전언을 그대에게 보낼 때에도 이런 말을 사용했었는가?(5, 6절). 벤하닷이 정복자가 되었다면 과연 그가 당시 아합을 자기의 형제라고 불렀을 것인가? 벤하닷이 최악의 곤경에 처하게 되지 않았다면 아합 앞에서 과연 당신의 종이라고 자신을 불렀겠는가? 억지이며 위조된 항복에 속아 넘어갔을 때 그대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형제라는 이 말을 듣고(33절), 그들은 벤하닷을 보고 아합왕에게 가라고 격려했다. 아합은 자기가 "형제" 라고 부른 자를 살려줄 것이다. 참회자들이여,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사랑하는 "자식들" 이라고 말씀하시니(렘 31:20), "아버지" 라고 반향을 올리라.
👉 목숨을 구걸하는 벤하닷의 전언을 들은 아합은 본문과 같이 대답한다. 여기서 ‘형제'란 용어는 ‘동맹국' 또는 ‘동맹국의 수반' (9:13)을 나타내는 외교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 → 즉 본문의 이 말은 벤하닷과외 화친 조약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합은 이미 화친 조약을 파기하고 북이스라엘을 공격한 벤하닷을 동맹국의 수장으로 인정함으로써 그를 용서하고 생명을 살려주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표명한 셈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42절)일 뿐만 아니라 아람과의 전쟁을 자신의 힘으로 승리하였다는 교만함까지 담겨 있는 행동이었다.
만약 아합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을 인정하였다면
자신이 이러한 결정을 내릴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33절,'그 사람들이 징조로 여기, 그 말을 얼른 받아…'
‘징조로 여기고’ : ‘주의 깊게 관찰함’ - 그 말을 얼른 ‘받음’ 아람 왕의 사신들은 자기들의 말과 행위에 아합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와 관련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이에 대해 민첩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있음. 이같은 히브리어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 표징을 깨달아 알고 즉시 서둘러서 그로부터 그것을 확증하였다’이다. ⇒ 아람 왕과 그의 신복들은 허리에 베를 두르고 목에는 줄을 메었지만 이스라엘 왕이 자신들에 대해 자비를 베풀 것언지 확신을 갖지 못했었다. 그런데 아합 왕이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자신들의 말을 받아들여 너무나 쉽게 ‘저는 나의 형제니라' (32 절)고 말하자 아합이 그 말을 철회하지 못하도록 그 말을 받아 바로 확증하려 한 것이다.
벤하닷은 항복을 했지만 명예롭게도 병거에 실리워지고(아합이 "벤하닷을 병거에 실었다"), 또 한 친구처럼 대접받았다(34절). 아합은 하나님의 선지자나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아무 의논도 없이 자기 스스로 무엇을 강조할 것인가를 생각지도 않고, "벤하닷과 약조를 했다."
그런데 마치 벤하닷이 정복하자 된 듯이 아합에게 조건들을 제시한다. 승승장구한 아합의 마음대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때이니, 아합은 벤하닷이 소유했던 몇 개의 도시를 요구할 수도 있을 터인데도, 그는 자기네 도시가 반환된 것에만 만족한다. 아합은 자기 나라의 부강을 보충하기 위해 다메섹의 상점, 보물, 창고 들을 요구 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는 자기들이 비용을 들여 다메섹에다 이점이 아니라 명예로 도로를 만들어졌다는 것으로만 만족했다. 이것은 아무런 권력 행사도 할 수 없는 아람의 왕들이 사마리아에서 누릴 수 있었던 것과 동일한 정도의 것이었다.
👉사실 아합은 이 전쟁을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승리했다. 그러므로 적군의 수장 벤하닷의 처리 문제도 자신의 생각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처리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처 자기 자신의 힘으로 승리를 얻어 낸 것처럼 교만하게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어 뽐내며, 벤하닷을 살려줄 권리가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합은 하나님의 언약을 정면으로 파기하였다.
이 조약을 하고서, 아합은 벤하닷을 보냈다.
👉 약조함: 고대 근동의 언약을 맺는 행위를 가리킴.
본문에서 이 단어는 아합 왕이 벤하닷과 공식적으로 언약을 맺고 그를 살려주었음을 나타낸다. 아합 왕의 이러한 행위는 앞선 본문들에서 기술된 것과 같이 아합의 물질에 대한 욕심과 공명심에 이끌려 행하여진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시 근동의 정치적 역학 관계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즉 당시는 앗수르 왕 살만에셀 3세가 그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시기였기에 아합은 아람 왕 벤하닷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함으로 이를 효과적으로 견제하려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B.C. 853년경 아합과 벤하닷이 연합 전선을 구축하 오론테스(Orontes)강의 카르카르(Qarqar)전투에서 살만에셀의 군대를 저지시키기도 하였다.
아합은 벤하닷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가한 모독적이었던 언사에 대해 일언반구도 책망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 자신도 하나님의 영예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성공이 잘못 주어지는 때도 있음을 명심하라. 이스라엘이야말로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성공이 하나님과 자기들의 후손과 자기들 스스로의 참된 이익에 이바지하도록 하는 법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사악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은총을 주어도, 의를 깨닫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