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4월 5일 수요일 왕상 22:29-40 아합의 죽음(대하 18:28-34)

Jeehyun 2023. 4. 6. 08:33

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8, 시편 9, 잠언 23, 데살로니가전서 2

묵상구절

22:29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22:30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니라

22:31 아람 왕이 그의 병거의 지휘관 삼십이 명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22:32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그들이 이르되 이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고 돌이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는지라

22:33 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22:34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22:35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22:36 해가 질 녘에 진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어 이르되 각기 성읍으로 또는 각기 본향으로 가라 하더라

22:37 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22:38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22:39 아합의 남은 행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건축한 상아궁과 그가 건축한 모든 성읍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2:40 아합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아합의 최후(열왕기 상 22:29-40)

👉 13-28절: 참 선지자인 미가야가 아합의 죽음을 예언함으로써 핍박을 받게 된 사건을 보도.
29-40절: 아합과 여호사밧이 미가야의 예언을 무시하고 아람과의 3차 전쟁에 참여했다가 아합이 변장에도 불구하고 우연한 사고로 죽은 사건을 다룬다.
→ 이러한 본단락은 인간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하나님의 선지자와 아합의 선지자 사이의 싸움이 곧 결판나는데, 어느 편이 옳은가가 나타나 있다.

Ⅰ. 두 왕은 군대와 더불어 길르앗 라못으로 행진한다(29절).

👉 29절,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올라가니라

본문에서 북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남유다의 왕인 ‘여호사밧'의 이름만이 언급되어 나온다. 이러한 차별적인 기록 방식은 본단락 전체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는 여호사밧에게 다소 호의적어고 아합에게 비관적언 저자의 관점을 반영한다.

아합에 비호의적

즉 본장에서 선지자 미가야가 예언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죽음을 자초하는 아합의 이름을 생략하고 단지 ‘이스라엘 왕'이라고 거리를 두어 표현함으로써, ⇒ 그가 하나님의 보호에서 벗어나 죽을 운명에 처한 가련한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31절에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모두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상태로 나란히 등장하는 것 ⇒ 아합이 하나님께 있어 신정 왕국의 왕이 아닌 이방의 왕처럼 여겨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여호사밧에게 호의적

여호사밧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그가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을 무시하고 아합과 더불어 전쟁에 참여했지만, 근본적으로 다윗 언약을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통치권을 인정함으로 인하여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목숨을 부지할 것임을 암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고 겸손히 행하여 유다를 강하고 바른 나라로 세운 왕이었다(2절 설명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 왕과 긴밀한 관계를 갖다 보니 아합의 행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잘못을 범한 것.
그가 미가야의 예언을 듣고도 전쟁에 참여한 구체적인 이유로는 : 먼저 아람과의 전쟁을 치르자는 아합의 제의에 대해 여호사밧 자신과 아함이 운명 공동체라는 설부른 약속을 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4절). 물론 여호사밧은 승리를 장담하는 아합의 선지자들의 예언에 신뢰가 가지 않아 다른 선지자를 요청해 미가야외 예언을 듣기는 하였지만(5.7절)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예언을 무시하였으므로(24-27절) 자기 혼자 미가야의 예언을 좋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여호사밧은 그동안 북이스라엘과 맺어온 정치적 유대와 주변 상황 등에 떠밀려 하나님께서 미가야를 통해 주신 전쟁에 나가지 말라는 참 예언을 따르지 않고 길르앗 라못 전쟁에 아합과 함께 참여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성경의 다른 사례)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아담과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으며(창 3장),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둘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결혼했다가 타락하여 홀수로 멸절되었고(창 6:1-3),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무시하고 대적하던 고라를 따르던 무리들은 함께 땅에 삼키운 바 되었다(민 16:32,33).
⇒ 이처럼 신앙의 문제에 관한 한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최우선에 두어야 할 것(애 1:2)을 이러한 여러 사례들과 더불어 본문의 여호사밧의 경우를 통해 다시 한번 교훈받게 된다.

본문에서 아합과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간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계획되고 허락된것(20절) —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

미가야의 환상에 의하면 하나님은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 할꼬' 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미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을 심판하실 계획을 세우셨으며, 이에 따라 거짓말하는 영은 아합을 꾀어 죽음의 장소인 길르앗 라못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리 가운데 진행된 일이라 하여 잘못된 결정을 한 아합과 여호사밧의 어리석음과 죄책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고 마땅히 그들은 이같은 경고하심을 따라 자기들이 가던 길을 돌이켜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같은 재난에 대한 책임은 결국 끝까지 자기들의 고집을 주장한 여호사밧과 아합 자신들에게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신들의 잘못된 의지를 굽히지 않은 그들의 악한 태도를 방기하심으로써 죄악된 아합을 심판하시려는 당신의 섭리를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미워하던 이스라엘의 왕은 자기의 고집을 계속 주장하는 만큼 그 선지자의 말에는 불신을 보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신앙심이 두텁고 아합의 선지자를 싫어하며 불신하고 "여호와의 선지자" 를 알아보았던 여호사밧왕이 그토록 공정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원정에 나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고분고분한 성격 때문에 그의 친구의(위선에 빠졌던 바나바처럼. 갈 2:13) 기만에 빠졌다. 여호사밧은 아합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전해 주는 듯이 가장했고, 자기 나라에서는 그런 협잡에 속아 본 일도 없는 까닭으로, 아합의 예언자들의 말에 지나치게 유의하였다. 여호사밧은 대다수의 예언자들과 의견을 같이 하려했고, 두 왕이 성공하리라는 말은 400대 1의 비율이라고 결론지었다. 미가야도 두 왕이 원정에 나서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었다. 처음에는 "나가시오, 승리를 거두소서" 라고 하지 않았던가! 만사가 최악의 경우가 된다 하여도 예언대로 아합이 멸망하는 것 뿐이니, 여호사밧은 안심하고 모험해 볼 만한다고 생각했다.

Ⅱ. 아합은 자기 자신은 안전하게 하고, 자기의 친구 여호사밧이 위험을 당하게 할 계략을 꾸민다(30절).

"나는 변장을 하고, 일반 병사처럼 행동하겠으며, 여호사밧에게는 왕복을 입혀 장군으로서 나타나게 하리라." 그리하여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경의를 표하는 체하고 이 전투에서 총 지휘를 할 것을 권했다. 여호사밧이 지휘하고 명령을 하달하면, 아합은 그의 지휘 하에서 병사처럼 싸우게 된다.

👉 여호사밧에게 굳이 왕복을 입으라고 지시한 점은 — 분명히 여호사밧을 전쟁의 총 지휘관으로 오해하게 만들어(32절), 자신을 찾는 적들의 시선을 혼란에 빠뜨러려고 했음이 분명하다(33절).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왕의 체통도 잃어버린 채, 스스로 일반 군사로 변장하고 있는 아합 왕의 구차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적군의 집중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감추기 위해 변장한 구 차함과 간교함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우연히 쓴 아람 군사의 화살에 의해 중상을 입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34-36절).

아람과의 전쟁에 나가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을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간적 방법으로 그것을 모면할 방도를 강구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 왕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같은 본문은 죄인이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화살은 결코 피할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아합은 다음과 같이 작정하였던 것이다.

1.선한 선지자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일이요.

이렇게 함으로써 위험을 피하고, 자신이 가장함으로써 하나님의 눈과 추적하는 심판을 벗어나기만 할 수 있다면, 그 선지자가 말한 경고를 물리치게 되리라 생각한다.

2.선량한 왕(여호사밧)을 바보로 만드는 일이다.

아합은 여호사밧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여호사밧이 하나님을 신봉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의 변절을 비난했던 것이다. 그는 누구든지 멸망해야 한다면 그것은 목자(미가야가 그렇게 예언했다)가 망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적이 주로 "이스라엘의 왕에 대하여" 싸운다는 것을 알리며, 여호사밧을 비열하게도 위험에 직면케 하여 배반하기로 하고, 자기 자신의 안전만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아합은 멸망되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다. 아무리 큰 돈을 준다 해도 누구나 그의 옷을 입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합은 강력히 권고하여 신앙심 높은 여호사밧이 대신 불려나가게 한다. 양심이 타락되고 명예로운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악의에 찬 사람들과 유사성으로 인하여 합류되는 자들이 얻는 것이 무엇인가 보아라. 하나님에게 진실하지 못한 자가 친구에게 진실하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 31절, 아람 왕이 … 삼십이인에게 명하여

아람 왕이 자신을 변장하여 북이스라엘의 왕임을 속이려고 했던 상황에서, 아람 왕은 마치 아합의 속임수에 넘어가듯이 이스라엘 왕만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아합의 의도가 그대로 적중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아합은 한 군사가 우연히 쓴 화살에 맞아 죽게 된다.
32명의 병거의 장관들은 — 아람 왕 벤하닷이 아멕 1차 전투에서 패한 뒤에 지방 영주둘을 대신하여 세운 전투 지휘관들이다(20:24,25). 이들은 오직 이스라엘의 총사령관인 아합 왕의 생명만을 노리는 일종의 특공대로서, 상대의 지휘 여하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들과는 아예 싸움조차도 하지 않도록 지시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아합의 속임수에 넘어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지라도 어느 병사가 쓴 우연한 화살이 아합에게 명중하도록 하심으로 그에 대한 당신의 심관 예언을 성취하셨다. 실로 하나님은 인간의 꾀와 노력, 예상을 초월해서 역사하는 당신의 섭리틀 아합의 죽음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신 것이다.

31절, 벤하닷은 작은 자나 큰 자나 ..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고 명함

벤하닷이 이러한 병사들과 싸우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그의 목표가 이스라엘 군대를 멸절하는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의 왕 아합을 죽여 효과적인 승리틀 거두는 데 있었음. 이러한 지시의 배경에는 과거 자신이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아합에게 겪었던 수모를(20;34) 되갚아 주려는 의도도 작용했을 것이다. 아합 왕은 미가야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모든 아람 군사들의 유일한 표적이 됨. 비록 아합이 변장을 통해서 이러한 아람 왕의 계획을 무산시켰지만, 하나님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Ⅲ. 약삭빠름보다는 경건한 마음을 가진 여호사밧은 비록 위험하지만 명예로운 지위(지휘관)에 올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아람 왕은 말다툼한 일조차 없는 유다 왕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특히 증오하는 이스라엘 왕 바로 그 인물을 향해 똑바로 돌격하도록 명령한다. 이제 아합는 그가 벤하닷의 생명을 구해 준 대가를 치르게 된다. 벤하닷은, 독사의 새끼들처럼, 자기가 자라났고, 거기서 멸망을 면했던 그 가슴을 상하게 한다. 혹자는 벤하닷은 아합을 생포하여, 그전에 자신이 받은 똑같은 명예로운 대접을 아합에게 해 주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가 어떠했든, 장관들은 그런 명령을 받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왕이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사밧이 이 왕복을 입은 것을 보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간주하여 그를 포위했기 때문이다.

1.그러나 여호사밧을 위험에 직면케 함으로써, 하나님은 아합과 동맹을 맺은 그를 좋게 여기지 않음을 알게 한다.

여호사밧은 일찍이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4절)라고 아합에게 경의를 표했었는데, 이제 그는 아합으로 잘못 보여진 것이다. 나쁜 짓 하는 자와 가까이 지내는 자는 벌도 함께 받게 되는 것이다.

2.이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을 미워는 하여도 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여호사밧을 알고 있는 몇몇 장교들이 그들의 잘못을 알고 여호사밧을 쫓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여호사밧에서 떠나가도록" 하신 것이라 했다(대하 18:3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으로 만물을 관장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해, 여호사밧은 비겁심에서가 아니라, 신앙심에서 울부짖었더니, 하나님의 구원이 그에게 온 것이다. 아합은 여호사밧을 구원해 주는 데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친구들이 우리를 저버려도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는 친구이니라.

👉 여호사밧이 비록 아합의 요청에 따라 아람과의 전쟁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이 단어의 일반적 용례와 더불어 그의 신앙이 독실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호사밧의 ‘부르짖음(자아크)'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대하 18:31은 “여호와께서 저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저희를 감동시키사 저를 떠나가게 하신지라”라고 당시의 상황을 더욱 상세히 기록하여, 위기에 처한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기도했을 가능성을 더욱 강력히 시사한다. 그리고 본문의 흐름은 이같은 부르짖음 이후 급격하게 전환되어 아합에게서 점점 멀어져만 가는 듯한 하나님의 심판의 화살이 드디어 제 방향을 찾아 아합을 향해 날아가게 된다.

Ⅳ. 아합은 일개 보초병 노릇으로 그의 안정을 도모해 보았지만 전투 중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다. 가면을 쓴다 해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숨을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말라. 어떻게 변장했어도 "주의 손이 모든 적을 찾아 낼 것이다" (34절). 아합을 쏜 아람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과 자기의 왕에게 봉사를 한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특히 어떤 적을 겨냥했던 것이 아니라 우연히 활을 당겼던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화살이

1. 하나님께서 파멸시키기로 결정한 바로 그 장본인을 맞추게 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초 계획대로 아합을 생포했더라면 아마 벤하닷이 살려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죽이기로 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2.화살은 바로 정곡을 맞추었다. "아합의 갑옷 솔기를" 쏜 것인데, 이 죽음의 화살이 뚫고 갈 곳이라고는 그곳뿐이었던 것이다. 어떤 갑옷도 하나님의 분노의 화살을 막을 수는 없다. 강철 속에 범인을 집어 넣어도 매일반이라. "사람을 만든 하나님께서 그의 칼로 범인을 칠 수 있느니라." 우리에게는 전혀 뜻하지 않는 일같이 보이는 것도 실은 하나님의 단호한 생각과 선견지명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 이 화살온 아합의 치밀한 인간적 계획의 틈을 뚫고 들어온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아합과 여호사밧의 다른 결말

아합이 왕복을 입게 한 여호사밧은 32명의 병거 장관들에게 둘러 싸였다가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숨을 구한 반면(32절), 일반 군사로 변장을 하여 포위망을 흐트러뜨리고 철흉갑으로 자기 몸을 휘감아서라도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던 아함 왕은 일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 하나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37절). 이처럼 하나님이 구원코자 하시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이 심판하시고자 하면 아무리 깊고 은밀한 곳에 피한다 해도 끝내는 멸망을 당하고 마 는 것이다.

Ⅴ. 군대는 적에 의해 분산되고 왕의 명으로 집에 돌아가게 되었다.

여호사밧이나 아합이, 목자가 다쳤으므로 양떼를 돌려보냈을 것이다. "각기 성읍으로 가라." 왜냐하면 그 이상 다른 것을 기도하여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36절).

아합은 죽기 전에, 미가야가 예언한 것, 곧 모든 이스라엘이 "길르앗 산에서" 흩어지리라(17절)는 것이 실현되는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34절) 군진에서 떠나고 싶었지만, 자기 군대가 과연 승리할지 알아보려고, "병차 가운데 남아" 있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세가 아합에게 불리해지자, 그의 사기는 떨어지고, 그는 죽는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서서히 다가왔으므로, 자기가 죽어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아합이 죽어가는 동안, 자기가 저지른 사악한 행위와 자기에게 준 경고를 경시한 것, 그리고 바알의 재판, 나봇의 포도원, 미가야의 감금 등으로 얼마나 공포에 떨었겠는가는 짐작이 간다. 아합은 자신이 파멸되어 가고 있다고 믿으며, 시드기야의 쇠뿔이 아람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를 파멸 속으로 밀어 부치고 있는 것을 보았으리라. 이렇게 하여, 아합은 아무런 "희망" 도 없이 "죽음의 공포의 왕에게로 끌려갔다."

👉 35절, 전쟁이 오히려 더욱 맹렬해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아합은 전쟁터 한복판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했으나 완전 무산되었음. 아합은 치명적 부상으로 인하여 기수를 돌려 전쟁터 한복판에서 나오려고 했으나, 싸움이 너무 맹렬하여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됨. 이는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를 인간적 계략을 앞세워 교만하게 묵살했던 아합이 그 결과로 하나님의 돌이킬 수 없는 심판에 직면한 상황을 생생하게 드러내준다.
아합이 부상당한 상황에서 전쟁이 진정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고조된 것은 걸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아합의 탈출 기도를 무산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 →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더욱 맹렬하게 가열시키심으로 어떻게든 궁지를 헤어나가 보려는 아합의 도모를 막으시고 이미 예고하신 심판을 이루어 가셨던 것.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 아합의 죽음은 매우 비참했음.
본문은 엘리야가 선포했던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을 것'이라고 하는 그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드러낸다(21:19)

36절, 이스라엘과 아람 간의 그 치열했던 전쟁이 완전 종료되었음 → 각기 자기 성읍으로, 각기 본향으로 돌아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과 ‘땅'은 삶의 터전을 넘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아 후손 대대로 이어가야 할 언약적 삶의 기반이었다. 따라서 이는 이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전쟁을 중단하고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자는 자성의 외침이었던 것. 사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전쟁임이 밝 히 드러난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명분 없는 전쟁을 계속해 자신의 목숨을 잃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1.본문은 아합의 죽음과 연속적으로 이어져 기록됨으로써, 마치 전쟁의 최종 목적이 아합의 죽음이고 그 목적이 달성되자 전쟁이 종료되었다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즉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결국 아합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자 중단된 것으로 묘사된다.
2.또한 아합이 죽고 백성들이 소망을 가지고 평화롭게 귀환하는 본문의 상황은 미가야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나타낸다(17,28절). 즉 미가야는 아합은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지만, 백성들은 아합이 없더라도 각자의 집으로 평안히 귀환할 것을 예언했는데 놀랍게도 그 에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Ⅵ. 왕의 시체는 사마리아에 운반되어 거기서 매장되었는 바(37절) 여기에는 또 그가 탔던 피묻은 병거와 갑옷도 운반되어 왔다(38절).

특히 지목되고 있는 사정은, 예언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그들이 사마리아 웅덩이로 병거를 씻으려고 운반해 왔을 때, 개들이(칠십인역에는 돼지도 있었다고 함) 모여들어 그 "피를 빨았다" 는 점이다. 혹자는 병거를 씻은 물에 피가 섞여 있었고, 그 물을 핥은 것으로 본다. 개들에게는 왕의 피이건 일반 사람의 피건 상관없는 일이다. 나봇의 피는 이제 복수를 받은 것이고(21:19), 다윗과 엘리야의 말들은 충족되었던 것이다(시 68:23). "네 발을 정의 피에 담그게 하고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죄있는 피를 개가 핥는다는 것은 아마도 죽음 후의 죄있는 심령을 괴롭히는 공포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교만함과 거만함으로 전쟁을 시작하고 수행했던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패망과 넘어짐을 당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잠 16:18).

아합의 불명예스럽고 비참한 죽음의 두 가지 원인

첫째, 아합 왕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전하였으면서도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한 아람 왕 벤하닷을 살려주었기 때문이다(33절).
둘째, 아합 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기업을 지키려던 나봇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괴를 흘려 죽게 하였는 바 그 자신도 그곳에 피를 흘리게 되었다는 것이다(21:19-21). 아합의 시신은 왕에 대한 예우대로 장사되었지만, 아합의 피만큼은 개들이 핥게 되어 그의 죽음이 수치스러운 죽음임을 온 이스라엘에 알리 게 되었다.
결국 아합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나봇의 생명을 부당하게 취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아람 왕 벤하닷을 살려줌으로써 자신의 생명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창 9:5).

아합의 수치스러운 죽음의 또 다른 모습 —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함

본절에 등장하는 창기들 ⇒ 오늘날처럼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직업 여성들이 X. 이 여인들은 아합 왕조가 들어서면서 가장 극심해졌던 바알과 아세라 숭배와 깊은 관련이 있다(16:31,32; 18:18,19). 풍요의 신 바알을 숭배하는 신전에서는 우상에 대한 제사가 끝난 뒤에 여성 사제둘이 제사를 드린 자들과 함께 혼음하는 악한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합은 자신이 장려했던 악한 우상 숭배 행습과 관련해서 창기들이 몸을 씻는 가장 수치스러운 장소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씻게 되는 치욕스러운 마지막을 맞이하였다.

본문은 아합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록되었을 것. 그러나 이는 동시에 당시 북이스라엘의 타락한 종교상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에 피는 생명의 본질로 여겨졌고, 왕은 신적 복을 매개하는 통로로 여겨겼다. 따라서 왕의 피를 씻은 물에 다시 바알의 사제들이 몸을 씻음으로 주술적인 접촉이 이루어져 백성들에게 축복과 번영을 가져다 즐 수 있다고 믿고 의도적으로 이 일을 행하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J. Gray).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본절은 가장 부정하고 잔혹하며 탐욕스러운 짐승으로 여겨지는 들개들이 왕의 핏물로 목을 축이게 되었음을 보여줌으로 이러한 그들의 미신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역겨운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합의 얘기는 일반적인 공식으로 끝맺어진다(39, 40절).

그의 여러 가지 일 가운데 그가 건립한 상아의 집이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그 집의 대부분을 상아로 새겨 넣었기 때문인 것이다. 아마 이렇게 호화롭게 한 것은 솔로몬이 건립한 으리으리한 유다 왕들의 왕궁과 경쟁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 상아궁

아합의 사치스러운 단면을 드러내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보다는 상아궁 자체가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함. 이 상아궁은 이스르엘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 정(21:1), 이세벨은 아합을 도와 나봇을 죽이고 이스르엘에 있는 그의 포도원을 강탈했으 며, 아합은 바로 그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정계를 받아 죽게 된 것. 저자는 이세벨을 연상시키고 더불어 나봇까지 생각나게 하는 이스르엘의 상아궁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아합의 참혹한 죽음이 그의 악행을 부추기고 북이스라엘에 우상 숭배를 만연시킨 이세벨의 악한 영향으로 이루어졌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 40절, 아합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아합의 죽음에 대한 본문의 표현은 아합이 극악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순탄한 생애를 마감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왜냐하면 아합 역시 여느 왕들과 같이 열조와 함께 묻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순간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모습을 보였던 아합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부분적으로 성취된 것에 불과하다(21:27,29). 즉 본문은 하나님께서 겸비함으로 회개했던 아합을 보시고 그의 당대에는 가문 파멸의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던 것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아합에 대한 심판은 그 아들들의 세대에서 이루어질 것이 예언되었고 실제로 예후의 대숙청 작업에 의해서 그 예언은 요람 대에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 10장). 따라서 본문은 결코 안식이나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파멸 예언이 여전히 유효한 상황에서 암담한 미래를 후대에 남겨 놓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아함의 무능력과 비참함을 부각시켜 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