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9, 시편 10, 잠언 24, 데살로니가전서 3
묵상구절
41 이스라엘의 아합 왕 제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니
42 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43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44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45 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전쟁하였는지는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6 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47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더라
48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49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50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대하20:30-21:1
20:31 <여호사밧의 행적(왕상 22:41-50)>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20:32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20:33 산당만은 철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마음을 정하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20:34 이 외에 여호사밧의 시종 행적은 하나니의 아들 예후의 글에 다 기록되었고 그 글은 이스라엘 열왕기에 올랐더라
20:35 유다 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였더라
20:36 두 왕이 서로 연합하고 배를 만들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었더니
20:37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이르되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므로 여호와께서 왕이 지은 것들을 파하시리라 하더니 이에 그 배들이 부서져서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
21:1 <유다 왕 여호람(왕하 8:17-24)>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유다 왕 여호사밧의 최후(열왕기 상 22:41-53)
👉 29-40절
앞선 29~40절 단락에서는 16:29 이후에서부터 계속되었던 북이스라엘의 제7대 왕 아합의 행적이 결국 참 선지자인 미가야가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의 비참한 죽음으로 종결된 사실을 다루었다.
41~50절
긴 지면을 할애하면서 서술하였던 아합의 악한 통치를 마무리하고 남유다의 제4대 왕 여호사밧의 사적을 간략히 다룸.
이같이 B.C.874-853년에 있었던 아합의 통치를 다룬 후 본절 이하에서 아합의 통치 초창기인 B.C. 872년에 즉위한 여호사밧에 대하여 다루는 것은 이를 읽는 독자들에게 성경의 내용어 역사의 흐름에 모순 되고 역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나 이는 열왕기 저자가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인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시대 인물인 아합 왕과 여호사밧의 기사에서는 동일 한 내용어 반복되기도 하는 것.
이같은 중복에 따른 오해를 감안하면서까지 열왕기서 기자가 인물 중심으로 사건을 기록하는 이유는 열왕기서가 단순히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책이 아니고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세워진 인간 왕의 공과를 신학적 관점에서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왕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열왕들을 판단하는 동시에 후대의 신앙인들에게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기록한 기전체에 가까운 역사책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 역시 단순히 얼마를 살았으며, 어떠한 인간적 업적을 남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기억하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중심을 가지고 얼마나 합당하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여호사밧: ‘여호와가 심판하신다’
여호사밧은 그의 이름에 걸맞게 대체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공의를 실천하며 살아간 것으로 열왕기 저자에 의해 평가받는다. 여호사밧의 치적에 대해서는 역대기가 더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 중 3대 업적은, 그는 방백들로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르치게 함으로써 범국가적인 신앙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대하 17:7-9). 두번째로는 국고성을 건축하고 전대의 왕들 보다 월등한 대군을 소유함으로써, 국방 사업에 성공을 거두었다(대하 17:7-9). 마지막으로 말씀에 입각하여 전국의 재판 제도와 조직을 정비했다(대하 19:4-11).
이러한 업적으로 미루어, 여호사밧은 신앙적인 면에서든 세속적인 면에서든 충분히 후한 점수를 얻을 만큼 경건하고 유능한 왕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열왕기 저자는 역대기 기자가 가진 시각과 비견되는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각각의 왕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능력보다 그 왕이 견지한 신앙적 태도에 근거해 그 왕의 전반을 평가한다.
역대기의 내용과 비교해 볼 때 본단락에서 여호사밧의 다른 치적에 대한 언급은 아예 생략하고 오히려 아합과의 군사 동맹이나 산당을 남겨둔 일(43절)과 같은 부정적인 과거만을 주로 들추어내고 있다는 점은 열왕기서 기자가 가진 이러한 신앙적 평가 기준과 비판적인 시각을 잘 반영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Ⅰ. 유다 왕 여호사밧의 통치에 대해 잠깐 설명된다.
더 충분한 얘기는 역대기에서 읽게 되며, 유다 왕의 위대함과 인자함은 깎이거나 훼손되지 않으나, 그가 아합과 교분을 자주 가짐으로써 몰락을 재촉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미 본 대로, 아합과 동맹하여 전쟁에 참여했던 것은 그에게 위험스러운 일이었고, 아합의 아름 아하시야와의 교역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하시야는, 상선 솔로몬의 해군이 그랬듯이(49절) 오빌에서 금을 캐오는데 함께 가자고 여호사밧에게 제의했었다(대하 20:35, 36). 그들이 선박을 출범시키려 했을 때, (" 에지온 게벨에서") 폭풍이 일어 파선되었는데, 한 선지자가, 이것은 여호사밧이 사악한 아하시야와 교제를 맺은데, 대해 하나님께서 노하신 것이라고 그에게 알려준다(대하 20:37). 아하시야가 다시 한 번 여호사밧과 합작하자고 원했고, 그것이 어려우면 여호사밧의 선박에 그의 종들만이라도 보내려 했으나 여호사밧은 이를 거절했다. "여호사밧은 원치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해석된 바에 의하며, 하나님의 막대기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행한 왕과 여호사밧의 동맹 관계를 효과적으로 끊어버리신 것이다.
지혜는 비싸게라도 구입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경험은 바보들의 애인이라고 한다. 바보들이란 경험을 통해서 배우게 될 때까지는 배우려 하지 않으며, 특히 사악한 자들과 교제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서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여호사밧의 통치는 가장 긴 것은 아니었으나, 가장 훌륭한 통치의 하나였다.
1.가장 길지 않았다는 것은, 겨우 25년간만 통치했기 때문이다(42절). 그러나 그의 일생 중 가장 원기 왕성한 때인 35세에서 60세까지였고, 그의 25년간과 그의 부친의 41년간의 통치는 유다 왕국이 번영할 수 있었던 좋은 여건을 조성해 주었다 하겠다. 이스라엘에서 모든 사정이 여의치 않았을 때에도 유다 왕국에서의 신앙생활은 상당 기간 번성되었던 것이다.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만큼 장기간 통치하지 않은 것은, 그의 부친이 말년에 저지른 실수(대하 16:9, 10, 12)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혜와 명예로써 명성을 얻고, 그 명성이 한창일 때 죽는 것이 오래 살면서 그 명성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 여호사밧은 섭정 기간을 포함하여 B.C. 872-848 에 걸쳐 통치했다. 그는 35세에 즉위하여 25년간을 통치했으니 거의 60세까지 살았던 셈이다. 북이스라엘 왕들이 비교적 짧은 기간 왕위에 있었고 단명했던 것에 반해, 여호사밧과 그의 부친 아 사는 오랫동안 재위하며 장수를 누렸다.
이는 그들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사실과 무관 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기 때문이다(43절). 그래서 본서 저자는 그 동안의 내용을 통해 이들과 대조적으로 단명했던 북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해 백성들과 여호와 앞에 악행을 저질렀다는 평가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같은 대조를 통해 본서 저자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행하는 자가 내세에서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잘된다는 교훈을 전달해 주고 있다.
한편 지금까지의 남유다 왕의 등극을 기술할 때에는 마처 공식처럼 어머니 등의 가족 관계가 소개되었던 반면(14:21; 15:2,10), 북이스라엘 왕의 즉위를 기술할 때에는 마치 공식처럼 이러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15:25.28; 16:8,10,23,29).
이는 남유다의 왕위 계승은 다윗의 위를 영원히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 아래 다윗 가문의 정통성을 지키며 평화롭게 지속되고 있는 반면, 하나님과의 언약(11:38)을 상실한 북이스라엘의 왕위 계승은 어떠한 정통성이나 대의명분도 없이 오직 모반과 살언이라는 인간적 계획과 폭력에 의해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명한 대조틀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그러나 경건함과 번영의 관점에서 보면, 여호사밧은 훌륭히 통치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니" (43절),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했고 그의 아버지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 안에서 부지런히 힘썼던 것이다. "그는 거기서 돌이켜 떠나지 아니했었다."
👉 여호사밧이 비교적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던 이유
그는 비록 산당을 없애지 못한 오점을 남기기는 했지만(15:14), 남색하는 자들을 남유다 땅에서 물아냈으며 열조가 지었던 모든 우상을 없애 버렸다(15:12). 뿐만 아니라 여호와에 대한 그의 신앙 열정은 모친조차도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자 태후의 위에서 폐할 정도로 뜨거웠다(15:13). 여호사밧은 남유다의 제4대 왕으로 41년 동안이나 선정을 베푼 아버지 아사처럼, 25년 동안(B.C. 872-848) 왕으로 재임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통치 사역을 감당했던 것(대하 17-20장). 그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현실 가운데서 성실하게 이행했다. 또한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는, 여호와로부터 벗어난 불신앙적 삶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여호와 앞에서 행하는 것”과 “정직을 행하는 것” 의 직접적 연관성.
정직히 행하다 =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구체적인 규례에 따라 인생 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결에 항상 더불러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 ↔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곁을 떠나 다른 세상적인 것으로 마옴을 향하게 되면 결국 멸망으로 향하는 굽은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한편 본서 저자는 여호사밧의 선정의 뿌리를 그의 아버지 아사에게서 찾았으나, 사실상 그의 아버지의 선정은 원래 다윗의 선정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의 선정은 결국 근원적으로는 다윗 왕에게서 출발한 사랑과 충성의 정치에서 온 것이었다.
따라서 여호사밧이 부친의 길을 본받으며 선정을 베풀 수 있었던 궁국적 원인은 ⇒ 솔로몬을 비롯하여 언약 이행에 볼성실한 왕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의 언약을 끝까지 성취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 남유다 왕정 역사의 배후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성격에 "다소" 의 결함이 있듯이, 여호사밧도 그랬다. 즉 "산당은 제하여지지 않았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에 지극히 가까이 있어서, 쉽사리 그곳에 가서 제사와 분향을 드릴 수도 있었으므로, 다른 지파들처럼 멀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산당이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유구한 제악이 뿌리 뽑히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있는 법이니, 특히 그 산당은 사무엘이나 솔로몬 등과 같이 위대한 인물들이 후원하던 것이므로, 그들도 거기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더욱 어려웠다.
👉 여호사밧은 모든 면에서 그 아비 아사의 길을 본받음으로 여호와께 인정받는 삶을 살았지만, 공교롭게도 산당을 없애지 못한 부정적인 일에 있어서도 부왕을 본받은 것이다(15:14).
이처럼 산당에 대한 소극적 태도는 ‘아사' (15:11), ‘아사랴' (왕하 15:3), ‘요담' (왕하 15:34) 등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남유다의 다른 왕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과오였다. 이는 산당이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얼마나 뿌리뽑기 힘든 고절적인 종교적 범죄의 온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는지를 반증해 주는 것이라 고도 할 수 있다.
열왕기서 기자의 관점에서 여호사밧 왕의 치적의 공과를 논한다면,
왕 개인의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 어느 정도 훌륭했으나 일반 백성들 전체의 신앙을 지도하는 영적 리더십에 있어서는 —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서의 저자는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소홀히 하고 산 당에 제사를 드리는 어리석은 삶을 계속적으로 지속했던 것은 여호사밧이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 산당을 제거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왕이란 개인적인 인격과 신앙과 업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살피고 섬기라고 맡겨주신 백성 들을 그분이 원하는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왕기 저자의 관점에서 여호사밧은 절 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한 왕이었다.
👉 ‘이스라엘 왕으로 더불어 평화함’
본단락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사실상 여호사밧은 북이스라엘과 외교•군사적인 평화를 누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여호람과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 아달랴와 정략 결혼을 하게 했다(대하 18:1). ⇒ 즉 인위적 방법으로 우상 숭배가 만연해 있던 북이스라엘과 평화 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인위적 평화 관계를 맺은 결과는?
그러나 정략 결을 통한 북이스라엘과의 평화 관계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이는 여호사밧으로 하여금 후일 아람과의 불필요한 전쟁에 휘말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13:29-32절). 후일 남유다에 우상 승배와 정치적 분쟁을 초래하는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게 했다(대하 22:3,10).
이를 통해 배우는 교훈은,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가면서까지 행사하는 인간의 계략이 결국 자신에게까지 커다란 폐해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알게 한다.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맺어진 인위적인 평안은 거짓 평안이요, 언젠가 다시 불화로 돌아올 것이므로 성도는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하나님의 평안을 구해야 하겠다(요 14:27). 한편 여호사밧은 아합의 아들인 아하시야와도 평화 관계를 유지했는데, 역대기 저자는 이 를 두고 여호사밧이 ‘심히 악을 행한 자'와 교제한 것이라고 통렬히 비판하였다(대하 20:35).
(1) 그의 사업은 번영했다. 그는 영속적인 평화를 수립함으로써(44절), 이스라엘 왕과 동맹하여 전쟁에 참예했던 피해를 막았다.
만일 그가 스스로 평화에 힘쓰고, 이스라엘과 동화되려 하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사업은 더 큰 번영을 가져 왔을 것이다. 그는 에돔 나라에 자기의 부관 내지는 대리 총독을 줌으로써, 그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47절). 그리고 이것으로써 에서와 야곱에 대한 예언, 곧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는 것이 실현되었다. 그리고 그의 권력과 전쟁에 대해서 일반적인 언급이 나와 있다(45절).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국력과 성공으로 축복해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마감하기 위해서 그의 죽음(50절)이 언급되어 있지만, 이후에도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사에서 그는 다시금 언급됨을 볼 수 있다(왕하 3:7).
👉저자는 시종일관 왕의 권세에 대해서 중립적 태도 내지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저자에게 최우선되는 관심사는 왕이 하나님과 올바른 신앙 관계를 유지했는가에 있으며,
절대 권력은 오히려 왕으로 하여금 여호와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백성들을 탄압하는 부정적 측면을 다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45절, 여호사밧의 행적들 가운데 ‘전쟁에 관한 것'을 부각시키는 이유는?
저자의 특벌한 의도를 반영한다. 그가 어떻게 전쟁한 것에 관해서는 대하 18:28-34과 20:1-30에 잘 나타나 있다. 전자(대하18:28-34): 여호사밧이 미가야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합과 동맹하여 아람과 전쟁을 감행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릴 뻔했던 사건이며, 후자(대하20:1-30): 여호사밧이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함으로 모압과 암몬을 정벌한 사건.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본문은 여호사밧의 신앙 상태에 따라서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교훈하기 위해 기록. 즉 이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세상의 왕을 의지할 때에는 아무리 월등한 군사적 조건과 인간적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적에게 패할 수밖에 없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에는 어떠한 조건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신학적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46-49절,
46절, 우상 척결과 함께 남색하는 자를 완전히 돌아냄
자신의 아버지가 못다한 종교개혁과 남유다 안의 성적인 타락의 양상을 정화시켜 나간다. 당시 이스라엘 안에는 가나안의 우상 숭배와 문란한 성문화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어 우상 제사에 미혹되어 우상 제사를 드리는 사제와 이성이나 동성을 가리지 않고 성적 관계를 갖는 등 종교적으로나 성적으로 매우 혼탁한 시대였다. 그러므호 여호사밧은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냄으로 인해 단지 성적 정결만이 아니라 우상 숭배를 약화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런 척결 작업은 매우 강도 높에 시행되었다.
47절, 에돔을 갑자기 언급 → 여호사밧이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띄울 수 있던 배경을 설명
에돔 = 이삭의 두 아들 중 하나인 야곱의 형 에서의 별명(창 25:30). 에서의 후손들은 주로 세일산에 거하며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다른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다(36:1.9).
두 민족이 원수된 배경과 여호사밧 때의 관계
: 이처럼 두 민족은 혈연적으로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후일 에돔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은 일로 인해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었다(민 20:18 ;21:4). 그 후 에돔은 가나안의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의 영토를 넓게 확장했던 다윗 왕에 의해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편입되었고(삼하 8:14) 솔로몬에게 자신의 나라 왕 족 출신의 여인을 첩으로 줄 정도였으나(11:1) 중간에 독립을 한다. 그러나 다시 에돔은 여호사밧 왕에 의해 이스라엘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왕하 8;20.22).
과거 솔로몬은 에돔에 있는 에시온게벨 항구를 이용하여 교역 활동을 펼친 바 었었는데(9:26~28 ;10:22), 48절에 의하면 여호사밧도 이 전례를 따라 에시온게벨에 선단을 운영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48절, 다시스의 선척을 제조하여 오빌로
여호사밧이 행한 일은 솔로몬의 정치 행적과 닮은 점이 많았다.
솔로몬이 배를 건조한 것처럼 (9:26) 여호사밧도 배를 제조하였음. 여기서 ‘다시스의 선척'이란 표현은 ‘다시스에 서 만든 배들' 혹은 해양 무역이 발달하였던 ‘다시스 양식의 배들'이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솔로몬이 정략적 목적에서 에돔 여인을 포함한 많은 이방 여인들을 첩으로 맞아들인 것처럼, 여호사밧도 동일한 목적에서 자신의 아들을 북이스라엘의 아합의 딸과 결혼시켰다(18:1). 솔로몬이 오빌의 금을 취한 것처럼(9:28), 여호사밧도 오빌의 금을 취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었다. 마지막으로 솔로몬이 초기에는 여호와의 신앙에 충실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상을 위한 산당과 신전을 짓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결국 그의 아들 르호보암 대에 가서 나라에 환난이 닥쳐왔던 것처럼 여호사밧도 초기에는 정처, 외교, 종교적인 모든 면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정 통치를 펼쳤으나 후기로 갈수록 그릇된 길로 행하여 그의 아들 여호람 대에 있을 커다란 재난의 씨를 남기고 만다(왕하 8:17,18).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남유다가 복이스라엘에 비해서 안정적인 시대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온
남유다의 왕들이 북이스라엘의 왕들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언약에 대한 그들의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사 끝 까지 남유다틀 지키시려 했던 하나님의 열심이 있었기 때문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여호사밧이 지은 배가 다시스로 가지 못하고 부서진 객관적 원인은?
알려진 바가 없으나, 역대기 저자는 이에 대해 신학적 해석을 가하고 있다(대하 20:37). 즉 여호사밧이 우상 숭배자인 아하시야와 교제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징계의 일환으로 여호사밧의 지은 배를 파선시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견자 예후를 통해서 여호사밧이 당신이 미워하시는 아합 왕가와 교제한 것에 대해서 진노를 발하고 계심을 경고하신 바 있었다(대하 19:2). 그러나 여호사밧은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고 아합 왕과 동일한 길을 걸었던 그 아들 아하시야 왕(52, 53절)과 교제함으로써 본문과 같은 징계를 받게 된 것.
여호사밧과 남유다는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큰 경제적 손실을 보게 되었을 것
배를 만들기 위해서 소비되었던 그 동안의 노동력과 물질이 물거품이 되었고, 다시스로부터 금을 들여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여호사 밧은 아하시야와의 교제를 일시 중단하게 된다(49절). 따라서 본문은 미시적 관점에서는 여호사밧에게 내려진 재앙으로 볼 수 있으나, 거시적 안목에서는 북이스라엘의 악영향으로부터 그를 벗 어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될 수 있다.
49절, 북이스라엘와 여호사밧의 긴밀한 관계를 대변함
본문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간의 동맹 관계가 매우 긴밀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으로서, 여호사밧이 아하시야의 부왕인 아합에게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4절)라고 했던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오래 지속되었던 분쟁 관계를 종식하고 본문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평화를 유지하며 서로 협력한 사실은 일면 바람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악영향을 미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신앙적 관점에서는 차라리 양국이 아무런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것이 낫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능성을 두 왕의 관계 속 에서 간파하셨기 때문에 강권적으로 개입하셔서 서로 교류하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하나님 없이 살아가기 위해 자신들만의 문화를 건설하며 서로 협력해서 바벨탑을 건설했던 인류를 하나님이 모두 흩으셨던 사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창 11:1-9).
여호사밧이 아하시야의 원조 제안을 거절함
여호사밧이 해운업과 무역업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아함의 아들 아하시야 왕의 제의를 완강하게 거절한 이유
선단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경제적 목적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선견자 예후와 엘리에셀의 예언과 연관 된 신앙적 문제 때문이었다. 아합과 동맹 관계를 맺고 아람과의 전투에 참여했다가 죽옴의 위기를 벗어나 간신히 살아 돌아온 여호사밧에게 선견자 예후는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아합을 ‘사랑한 여호사밧에게 징계가 내려질 것을 경고한 바 있었다(대하 19:2). → 아마도 특별한 이유 없이 자신이 지은 배가 파선되자 여호사밧은 곧바로 예후의 예언을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예후의 예언 이후에도 에시온게벨에 배가 완성된 직후에, 여호사밧이 아합의 아들인 아하시야와 교제한 것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 배를 파선하실 것을 선견자 엘리에셀 통하여 미리 경고하셨었다(20:37).
이렇게 두 번에 걸친 경고의 예언 뒤에 배가 파선되었기 때문에, 여호사밧 스스로도 배의 파선 원인이 아합 왕가와의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인하여, 여호사밧은 아하시야의 제안을 즉각 거절하고 그동안 친밀히 유지해 왔던 아합 왕가와의 관계를 단절했던 것이다.
👉 여호사밧에 대한 언급이 49절, 본문의 내용으로 종결된 것으로 미루어, 여호사밧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평가 역시 여호사밧 개인의 능력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님을 본단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것은 여호사밧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기하시지 않고 강권적으로 개입하셔서 을바른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다윗의 위를 영원히 하시겠다는 약속을 왕국이 분열된 이후에도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여호사밧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다.
50절,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조상 다윗성에 장사됨
유대인들의 사고로는 육신의 죽음이 영원한 종말이 아니라 잠깐 잠들었다가 마지막 날에 다시 깨어나는 것이었기에 이 단어를 사용하여 죽옴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여호사밧은 그의 조상 다윗성에 장사되었고 이것은 큰 축복이었다(11:43; 15:8).
여호람으로 왕위가 계승됨
여호사밧을 대신하여 그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왕위 계승의 반복 어구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북이스라엘의 아하시야 경우와 비교한다면 특별한 의미를 전달한다. 즉 본문과 같은 남유다의 왕위 계승이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 이어지는 51-53절 단락에서 앞선 41-50절 단락에 나오는 여호사밧과 집중적으로 비교되고 있는 아하시야는 결국 아들이 없어서 자신의 왕권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게 된다 (왕하 1:17). 이는 아하시야가 부모인 아합과 이세벨의 전철을 밟아 적극적으로 우상을 숭배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일환이었다.
⇒ 본문에서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순조롭게 여호람이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은 여호사밧이 여호와 앞에서 비교적 올바른 신앙 태도를 유지한 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사 그 위를 지속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난 결과로 볼 수 있다.
아합과 여호사밧 기록의 대조
동일한 시대를 살았던 두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합 왕과 연관된 기사는 장장 6장에 걸쳐 기록된 것에 비해(16~21장) 여호사밧 왕에 대한 기사는 겨우 10절밖에(41-51절)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더욱이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의 불순종한 왕들 중에 하나였고, 여호사밧은 남유다의 선한 왕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열왕기의 기록이 왕들의 선행보다는 악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아합 왕의 일대기가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그렇게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결코 의외의 일은 아니다.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범죄케 했던 초대 왕 여로보암보다 더욱 사악한 왕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길게 기술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얼마나 많은 분량에 걸쳐 기록되었는 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내용으로 기록되었느냐이다. 그리스도인의 인생 역시 얼마나 많은 일을 벌여 놓았는가가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이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열왕기 저자가 아합 왕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보도한 것은 아합 왕의 악행를 자세히 드러내 후대에 반면 교사로 삼으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아합 왕과 연관해서 활동했 던 선지자 엘리야가 있었기 때문이다. 열왕기 저자는 열왕들의 행적 그 자체보다는 그 왕들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대응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아합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행적둘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된 것은 그의 악함에 대하여 선지자 엘리야 등을 통하여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사역 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