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4월 8일 토요일 왕하1:1-18 엘리야와 아하시야 왕

Jeehyun 2023. 4. 10. 23:48

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11, 12, 시편 13, 14, 잠언 26, 데살로니가전서 5

묵상구절

1:1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1: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1: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1: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1:5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하니

1:6 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1:7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1: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1:9 이에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그가 엘리야에게로 올라가 본즉 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지라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1:10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1:11 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그가 엘리야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12 엘리야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1:13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1:14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

1:15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엘리야가 곧 일어나 그와 함께 내려와 왕에게 이르러

1:16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의 말을 물을 만한 하나님이 안 계심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

1:17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

1:18 아하시야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모두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매튜헨리/옥스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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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리포트

1. 열왕기하의 기본 이해

성경 전체가 역사서는 아니다. 그러나 ‘역사(History) '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성경 전체는 대략적으로 태초에서 종말까지를 망라하여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성경에서 소위 역사서로 불러는 책들은 연대기적 순서에 따른 배열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특히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는 저자의 기록 관점이 서로 같을 뿐만 아니라 연대기 적으로도 연결되고 있다. 즉 사무엘서는 사사 시대 말기부터 다윗 시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면 열왕기서는 다윗을 이은 솔로몬 시대로부터 남북 이스라엘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두 역사서가 서로 연결되는 것은

  • 사무엘서가 이스라엘의 분열 왕국 시대에 기록된 반면,
  • 열왕기서는 이스라엘 남북 왕조가 멸망한 직후에 기록된 책으로서 열왕기서 의 기자가 사무엘서가 이미 기록된 것과 그 내용을 전제한 상태에서 사무엘서와의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솔로몬 이전 시대의 역사적 기록을 생략한 까닭이다.

열왕기서와 역대서의 차이

한편 사무엘서나 열왕기서와 동일하게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역대기서는 그 내용에 있어서 열왕기서와 상당 부분 중복되고 있다.

그러나 역대기서의 이러한 내용의 중복은 단순히 역사 기록의 반복이 아니다. 즉 역대기서의 저자는 열왕기서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즉

  • 열왕기서 기자가 소위 선지자적 관점(prophetic point of view)에서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B.C. 586년 남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상황에서 선민 이스라엘이 멸망까지 자초한 과거 자신들의 죄악사를 회고•반성케 하기 위하여 비교적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며 기록하였다면.
  • 역대기서 기자는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한 상황에서 소위 **제사장적 관점(priest point of view)**을 가지고 하나님은 한 번 당신이 택한 백성에 대해서는 그들이 잘못을 범하면 징계는 하시되 회개하고 돌이키면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분임을 확신시켜 선민 역사의 영속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통해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투철한 여호와 신앙에 근거하여 선민의 새 역사를 창조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며 기록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 역대기서는 선민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다윗 언약을 열왕기 서에 비해 강조하고 있으며, 다윗 왕가를 배반한 북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다.
    • 또 역대기서 기자는 여호와 신앙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전 제사 제도를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열왕기서 기록 시기

한편 열왕기서는 B.C. 561-537년 사이에 기록되었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둘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던 때이다. B.C. 1050년 사울의 즉위로 시작된 이스라엘 신정 왕국은 사울을 이어 왕위에 오른 다윗과 그의 아들인 솔로몬 시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을 모두 차지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특히 솔로몬 시대에는 근동 지역에서 애굽과 그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성해지고 경제적 번영도 누리게 된다. 또 이때에는 전민족적 여망이었던 성전도 건축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이스라엘의 영광은 일순간에 불과하였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하더니 남북 왕조가 점점 쇠락의 길을 걷다가 급기야는 북이스라엘이 먼저 이방 나라에 멸망하고, B.C. 586년에는 남유다마저도 이방 나라에 의하여 멸망하여 백성들은 이방 땅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가지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그것은 “왜 여호와의 선택된 백성이 나라를 잃고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해야 하는가?” 였다. 특히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마저도 파괴된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서까지 회의를 갖게 만들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열왕기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돌의 그러한 의문에 답을 주어 그들에게 믿음과 정체성을 다시 심어주기 위해 본서를 기록한 것이다.

열왕기에서 기자가 답으로 제시한 이스라엘 민족의 몰락의 원인은 한 마디로

  •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둘의 조상들이 역사의 주권자이시고 사랑의 주이신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데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 왕정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되 신정 왕국의 대리 통치자로서 선민의 대표자였던 여러 왕들의 행적, 곧 다윗 사후 솔로몬의 행적으로부터 시작하여 분열 왕국 시대 여러 왕들의 행적을 비판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물론 그 사이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왕들의 죄악을 책망하고 회개를 선포한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사역도 기록하고 있다.
  • 특히 저자는 왕들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아사나 여호사밧과 같이 남유다 왕들 가운데 선한 왕들의 행적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인 논조는 남북 왕들의 악한 행적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 어는 이스라엘어 멸망하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참 신어 아니거나 또는 언약에 신 실하지 않기 때문어 아니라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의 타락과 범죄에 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어다.

그러나 열왕기서 기자가 남북 이스라엘의 몰락의 원인이 그들의 타락과 범죄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멸망의 원인을 밝혀 그들의 멸망의 정당성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저자가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어 그들의 범죄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

  • 그들이 비록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을지라도,
  • 자신들이 몰락하게 된 원인인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절대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기만 하면 하나 님이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맥락하의 열왕기서의 상권은

  • 솔로몬 시대로부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이 후 남유다의 경우는 제4대 왕인 여호사밧 왕까지, 북이스라엘의 경우는 제8대 왕인 아하시야 왕의 통치 중반까지 대략 120년 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열왕기서의 하권

  • 상권을 어어 계속해서 남북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 기사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되 B.C. 586년 남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대략 260년 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 즉 열왕기하는 북이스라엘의 경우는 제8대 왕인 아하시야 왕(B.C. 853-852년)의 통치 후반부터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의 왕인 제19대 왕 호세아(B.C. 732-722년) 때까지, 남유다의 경우는 제5대 왕인 여호람 왕(B.C. 848-841년)부터 남유다가 멸망할 때의 왕인 제20대 왕 시드기야(B.C. 597-586년) 때까지의 역사를 다룸.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경우는 B.C. 930년 여로보암에 의해 건국된 이래로 왕국이 존속한 약 200년 동안 무려 아흡 왕조 19명의 왕이 교체되었으며. 열왕기하에 기록된 약 130년 간의 짧은 역사 기간 동안에만도 무려 여섯 왕조 12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 이에 반하여 남유다의 경우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이래로 단 한번도 왕조가 교체됨이 없이 다윗 단일 왕조로 끝까지 유지되었다.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에 비하여 약 150년 가량 더 오래 지속되었옴에도 불구하고 아달랴를 남유다의 왕으로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왕의 수에 있어서 남북이 19명으로 동일하다.

→ 이것은 북이스라엘의 정치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옴에 비하여 남유다의 정치 상황은 비교적 안정적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 사실 북이스라엘의 경우는 19명의 왕들 가운데 7명이 2년 이하를 통치하고 그 중에는 1개월, 심지어는 겨우 7일 간 통치한 왕도 있었던 사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정치적으로 매우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 그러나 남유다의 경우는 아달랴의 왕위 찬탈 시도(11:1)와 제8대와 제9대 왕인 요아스와 아마샤의 시해 사건, 그러고 왕국 말기 에굽과 바 벨론의 정치적 간섭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큰 정치적 혼란이 없었다.

남북 두 왕국이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 먼저는 정치적인 요인이다.
    • 정치적으로 보면 북이스라엘의 정권이 정통성을 지니지 못한 반면 남유다의 정권은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 북이스라엘
      • 주지하다시피 북이스라엘을 건국한 여로보암은 다윗 왕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북부 열지파를 규합하여 다윗 왕조를 배반하고 북이스라엘을 세운 다음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왕권에 대한 정통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복이스라엘에서는 누구나 힘만 있으면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군사 적 힘을 가진 자둘이 너도나도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던 것이다.
    • 남유다
      • 이에 반하여 남유다는 비록 나라가 분열되기는 하였지만 다윗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속 이어 받았으며 그로 인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지님으로써 정권이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남유다에서도 모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반 역시도 역성 혁명은 아니었으며. 비록 왕은 모반에 의해 죽었어도 왕위만은 다윗 자손이 이어갔던 것이다.

    2. 두번째 요인은 신앙적 요인이다.

이 두번째 요인은 남북 왕국이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된 실제적인 요인이다. 사실 정치적 요인은 부차적인 것이다.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신정 왕국이다. 그것은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왕은 여전히 하나님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만일 왕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행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페하고 다른 왕을 세우시게 된다.

북이스라엘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단 한 왕도 바른 여호와 신앙을 가진 적이 없다.

그들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절기틀 지키러 가는 것을 막음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견고히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여호와로 숭배하게 함으로써 여호와 신앙을 금송아지 숭배로 대체한 이래로 한결같이 여로보암의 길을 답습하였고, 심지어는 바알과 같은 이방의 우상을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많은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북이스라엘에서는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었던 것이다.

남유다

이에 반하여 남유다는 비록 많은 왕들이 타락하기는 하였지만 완전히 여호와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고 또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등의 선한 왕들이 나와 종교 개혁을 하는 등 여호와 신앙 유지와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거기에 하나님은 다윗에게 비록 그의 자손이 범죄한다 할지라도 사울에게서처럼 왕위를 빼앗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다(삼하 7:15.16). 그리하여 남유다는 많은 왕들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타락하여 그 멸망이 불가피할 때까지 다윗 한 왕조로 유지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두 왕국이 이러한 상반된 모습을 지닌 것은 사실이나 시간적 차이만 있을 뿐 공히 이방 나라에 멸망하고 만다.
즉 북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사마리아가 함락됨으로 써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멸망하고 만 것이다.
→ 이는 남북 왕국이 공히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하나님의 심판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고 계속해서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이사야, 예레미야 등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셨다.
이사야서에서부터 말라기서에 어르는 선지서들 중 바벨론 포수 이후에 기록된 에스겔. 다니엘.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을 제외한 다른 선지서들은 대개가 타락한 남북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책망과 회개의 메시지이다.

→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키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셨는지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간곡한 메시지를 무시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남북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린 결과이다. 결국 본서 저자는 이 사실을 본서에서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포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멸망과 그로 인한 고통의 원인이 바로 그들의 죄에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열왕기하의 메시지 요약

1.축복과 저주의 기준.

열왕기서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신명기 사관적 관점에서의 이스라엘 왕정 시대의 역사 기록.

  • 신명기 사관적 관점=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 평화와 측복을 누러게 되고 반대로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저주를 받게 된다는 사상.

즉 본서의 저자는 솔로몬 시대의 번영이나 르호보암 시대의 왕국의 분 열, 남북 분열 왕국 시대의 번영과 재앙, 앗수르에 의한 복이스라엘의 멸망,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과 포로 등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순종 여부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본서의 독자들, 곧 나라가 멸망한 상태에서 이방 땅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당하고 있는 불행의 원인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데 있음을 상기시켜 그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킴으로써 다시금 하나님의 측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본서를 기록한 것.

 2. 타락한 인간의 뿌리깊은 죄성.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왕들이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금송아지 숭배 정책을 취한 데 대하여 그들을 심판하셨다. 그러한 이유로 북이스라엘은 208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무려 아흡 왕조 열아홉 명의 왕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선왕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도 그들의 죄악을 그대로 담습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으로도 막을 수 없는 타락한 언간의 뿌러깊은 죄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인간의 절대 한계를 보게 된다.

북이스라엘은 B.C. 930년 여로보암이 나라를 건국한 이래로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아홉 왕조 열아홉 명의 통치가 이어지는 동한 단 한 왕조, 단 한 명의 왕도 선한 왕으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한결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제10대 왕 예후는 바알 우상과 바알 산당, 바알 숭배자를 척결하는 대대적인 개혁 조처틀 단행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였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10:30). 그러나 그 역시도 여로보암의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다.

3.하나님의 신실성.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범죄할 때마다 그들을 징계하셨고, 심한 경우에는 아예 왕가를 멸하기도 하셨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에서는 아홉 왕조나 교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유다에 대해서는 왕들이 범죄할지라도 그들을 징계는 하시되 왕가 자체를 멸하시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남유다의 다윗 왕조는 비록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단 한순간도 단절되지 않고 단일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다윗 왕조가 북이스라엘의 왕들에 비하여 특별하게 선하였기 때문은 아니다. 남유다의 왕들이 비록 북이스라엘의 왕들에 비하여는 대체적으로 선하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남유다의 왕들 중에도 북이스라엘의 왕들 못지 않게 악한 왕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경우와 달리 다윗 왕조를 멸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 때문이다. 하나님은 일찍이 다윗에게 언약하시기틀 다윗의 자손들이 범죄하던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는 하되 왕권 자체는 빼앗지 않겠다고 하셨다(삼하 7:14.15). — 하나님은 바로 이 언약에 따라 다윗 왕조가 타락한 때 에도 다윗 왕조를 폐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여 주신 것이다.

이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잘 증거하여 준다. 실로 우리 인간은 언약을 거슬러 행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만큼은 반드시 이행하시는 것이다.

4.인간의 불순종.

하나님은 범죄한 당신의 백성들을 각성시키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하여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우셨다. 뒤에 나오는 선지서들은 대개 남북 분열 왕국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서 그 선지서들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외 애끓는 권면도 외면한 채 계속해서 죄악의 길로 달려감으로써 끝내 멸망을 자초하고 말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끝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청중하는 자가 적을 것이다. 그러하여 많은 사람이 그들의 불순중으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5.남은 자(remnant).

북이스라엘이 극도로 타락하여 소망의 빛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 가운데에는 약 300여 명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지 생도를 비롯하여 엘리사를 지극 정성으로 공궤한 수넴 여인과 같이 여호와를 진심으로 경외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이 극도로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러한 남은 자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주듯 하나님은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여도 그 가운데 소수의 남은 자를 남겨두신다(왕상 19:18:사 46:3). 오늘 이 시대의 남은 자는 바로 우리 성도들이다. 따라서 우리 남은 자들은 더욱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삶으로써 이 시대가 더욱 썩어 가는 것을 방지하고 이 시대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하여야 할 것이다.

6.하나님의 인내의 한계.

하나님은 남북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당장에 멸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푸사 선지자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물론 그들에게 일정 기간 동안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과 인내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더욱 악한 길로 행하자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여 그들을 심판하셨다.

이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실로 하나님은 사랑의 주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그래서 죄인이 범죄하던 오래 참으시며 회개하기를 기다리시지만 그래도 회개치 않고 계속해서 죄악의 길로 행하면 용서치 않고 심판하신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 대하여 인내하시는 때이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 라고 하였다(고후 6:2). 그러나 이 때가 지나면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로 이 세상을 심판하여 악인들을 영원한 멸망에 처하실 것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지체되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없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말할 때에 홀연히 멸망의 날을 맞게 될 것이다(살전 5:3).

7.지도자의 역할의 중요성.

남유다의 역사를 보면 선한 왕이 다스릴 때와 악한 왕이 다스릴 때의 형편이 확연히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즉 선한 왕들이 남유다를 다스릴 때에는 나라가 강성해지고 평안했던 반면 악한 왕들이 다스릴 때에는 나라가 쇠퇴하고 외부의 침공으로 인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하기를 거듭하였다. — 이는 지도자의 처신이 곧 나라의 형편을 좌우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렇다. 어떤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리느냐는 곧 나라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이는 우리 나라와 세상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민주 사회에서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바른 지도자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고. 우리 성도들은 그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행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8.선민의 보존.

하나님은 선민의 자손인 남북 이스라엘 왕국이 범죄하고 또 선지자들을 통한 회개 촉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어 회개치 않자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을 들어 그들에게 결정적인 심판을 가하셨다. 그리하여 남북 이스라엘 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은 비록 왕국(Kingdom)은 멸망하였으나 민족(Nation)은 멸절되지 않고 남옴으로써 선민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민의 역사는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 성도들을 통하여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범죄하면 징계는 하시되 그들을 영원히 멸하지는 않고 보존하시며 마침내는 영생 구원을 얻게 하실 것임을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비록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도무지 구원의 빛이 보이지 않는 때에라도 구원의 확신과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 1:1-18의 두 문단은 왕상 22:51~53에 이어지는 북이스라엘 제8대 왕 아하시야 왕 (B.C. 853-852년)에 대한 기사.

→ 그의 불신앙과 죽음에 대하여 다룬다.

열왕기하를 시작하고 있는 본장은 열왕기상 12장에서부터 시작된 신정 왕국의 분열과 열왕의 통치 역사의 흐름 가운데 있다. 구체적으로 본장은 북이스라엘이 창건된 이후 최대 왕가로 떠오른 오므리 왕가가 왕상 16:21 이래로 계속되다가 제7대 왕 아합을 거쳐 제8대 왕 아하시야에 이르러 완전한 쇠퇴기를 맞이하는 국면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보다 좁은 범위에서 본장은 아합 왕이 죽은 후 왕상 22:51에서 시작된 아하시야의 북이스라엘 통치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잘못된 길을 따라간 아하시야의 불신앙적 모습과 그 말로를 집중 소개하고 있는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8절

아하시야 왕은 왕궁 다락에서 낙상하여 중병에 걸리자 에그론(Ekron)의 신인 바알세붑(Baal-Zebub)에게 자신의 치유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것은 아하시야가 선민의 자손인 북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마땅히 의지해야 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불신하고 이방의 우상을 의지하고 있음을 역력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중 엘리야를 통해 아하시야의 불신앙과 우상 숭배를 책망하시고 그가 죽을 것임을 선포하게 하셨다(1-8절).

9-14절

그런데 자신이 바알세붑에게 보내었던 사자들로부터 엘리야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 경고를 들은 아하시야는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엘리야를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오십인의 군사를 파견하는데,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사르게 하였다.

이후에도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거듭해서 두 번이나 더 오십인의 군사를 파견하게 되는데 두번째 파견한 오십언의 군사 역시 첫번째 오십인의 군사와 동일한 방법으로 몰살 당하게 된다. 그러나 세번째 파견된 오십인의 군사들은 그들을 지휘하는 오십부장의 지혜와 겸손한 태도로 생명을 보존하게 되는 것은 물론 엘리야를 왕궁으로 데리고 갈 수 있었다(9~14절).

15-18절

아하시야 앞에 선 엘리야는 다시 한번 아하시야가 죽으리라고 선포하는데 이 엘리야의 선포대로 아하시야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재위 2년 만에 죽고 만다(15-18절).

●아하시야 왕의 병(열왕기 하 1:1-8)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하시야가 하나님의 섭리와 예언자, 그리고 그의 말씀과 채찍으로 견책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Ⅰ. 아하시야 왕에게 개인적인 곤경이 닥쳤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며, 그를 분노하게 만든" 자들이 어찌 잘되기를 바랄 수 있으랴!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배반하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거절하자, 모압도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배반하고 이스라엘 왕들에게 오랫동안 바쳐오던 충성을 거절했다(1절).

유다의 국경 지대에 자리잡고 있던 에돔 족속은 유다의 왕들에게 곡물을 바치는 속국이었는데, 전 장(前章) 47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계속 유다의 속국으로 있었으나, 악한 왕 요람이 즉위하자, 그 멍에를 꺾어 버렸었다(8:22). 그런데 이제 바로 모압 족속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 모압: 이스라엘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큰딸이 그 아비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함(삼하 8;2).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된 후에도 그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모압이 오랜 세월 계속된 속국으로서의 멍에를 벗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해 반역을 일으킨 것.

모압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모압이 아합 사망 직후 이스라엘을 배신하게 된 것은 무엇 보다도 아합의 아들 세대에 아합 왕가에 대한 멸망의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왕상 21:29).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자손인 북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와 같은 범죄를 통하여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때,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모압과 같은 이방 민족들을 일으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와 맺은 계약을 파기하여 그들의 임무를 다 수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도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위배하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식을 소홀히 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죄는 우리를 약화시키고 파멸시킨다.

모압에 관해서는 3장 5절에 가서 알게 될 것이다.

Ⅱ. 아하시야는, 어떤 신체적인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치명적인 사건을 당하여 병에 걸렸다. 즉 그는 "떨어져서 병들었다" 고 했다. 추락 사고로 인하여 타박상을 입은 것이다. 아마 그 사고는 열병까지 몰고 온 것 같다(2절). 우리가 어디에 있든, 죽음과 우리 사이는 한 발자국의 거리밖에 안 된다.

인간의 집은 그에게 있어서는 성(城)과 같은 곳이나,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부서진 창살(KJV에는 창살 때문에 떨어졌다고 되어 있음-역자주)이 그 아들, 아하시야에게 그렇게도 치명상을 주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하셨기 때문이니, 모험적으로 당긴 우연의 화살이 그 아버지 아합에게 그렇게 치명상을 준 것과 같은 경우이다. 아하시야는 적어도 전장터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 모압을 진압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집 안에 쳐박혀만 있었지만, 안전하지 못했다. 왕궁이 언제나 튼튼한 터전이 되지는 못한다. 죄인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곳에, 죄인들을 기다리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욥 18:9, 10). 인간의 죄 때문에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이 왕국의 창살처럼, 마침내는 그 중량 때문에 견디지 못하여 무너져 버릴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가 된 자들은 결단코 안전할 수 없다.

👉 아마 아하시야 왕은 다락방의 창문에서 밖을 내려다보다가 나무로 만들어진 창살이 부서지면서 밖으로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압이 북이스라엘을 배신한 급박한 상황에서 군 통수권자인 왕에게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왕국이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불길한 징조이다.

한편 아하시야의 추락 장소인 ‘다락’은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엘리야는 이 ‘다락’에서 사르밧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으며(왕상 17:19-23), 엘리사 역시 자신의 처소로 마련된 ‘다락’에서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다(4:10.32-35). 이처럼 **열왕기 기록에서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다락’**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선지자들이 죽은 아이들을 살린 이 두 사건은(왕상 17장; 왕하 4장) 아합의 비참한 죽음(왕상 22 장)과 그 아들 아하시야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왕하 1장)과 대조되면서,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살겠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는 죽는다는 단순 명료하면서도 준엄한 심판의 말씀을 전달한다. 

Ⅲ. 곤경에 빠진 왕은,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인지 아닌지를 물어 보도록, 에그론 신에게 사자를 보냈다(2절).

  1. 그의 질문은 매우 어리석었다. "이 병이 낫겠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차라리 이렇게 물을 것이다. "내가 무슨 수단을 써야 낫겠느냐?" 그러나 그는 자기의 장래도 모르고 의무도 모르면서 그저 조급한 나머지, "이 병이 낫겠는가?" 라고만 물었다. 그런 문제라면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해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언제, 그리고 어디서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 보다는 사후에 우리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더 생각해야 하며, 또 병에서 나을 것인지, 아닌지 보다는 병중에 어떻게 처신할 것이며 그 병으로 우리의 영혼에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하여 더욱 알려고 해야 한다.

  1. 그가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냈다는 사실은 지극히 잘못된 일이었다.

아마 근래에 새로 건립되었을 죽어 있고 벙어리인 우상(우상 숭배자들은 새로운 신을 좋아한다)을 자기의 신탁 의뢰처로 삼았다는 사실은 자기의 신앙에는 물론이요 바로 자기의 이성에도 모욕인 것이다. 바알세붑이란 "파리의 주(主)" 란 의미인데, 그들의 바알 신의 일종이었다. 아마 바알세붑은 큰 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와 같은 시끄러운 소리를 마귀의 권세를 통해서나 바알 제사장을 통해서 내었을 것이고, 그 소리로써 자기의 답변을 전달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나라에 들끓던 파리 떼들을 제거했거나(이것은 그들의 망상이다) 또는 파리 떼들이 가져오는 어떤 유행성 열병을 그들에게서 제거해 주었을 것이다. 아마 이 쓰레기 같은 신이 먼 훗날 그리스의 델포스(Delphos) 신탁처럼 당시에는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바아세붑" 을 "마귀의 왕" 이라고 했다(마 12:24). 이방 신들은 모두 마귀인데, 그 중에서도 이 신이 제일 유명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 ‘물어보라’(따라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답변을 얻기 위해 그분께 묻거나 계시를 구하는 특별한 행위를 묘사하는 단어. 이처럼 하나님께 묻거나 계시를 요구하는 ‘따라쉬'로 묘사되는 이 행위는 ⇒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인 이스라엘에게는 특 권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죽은 자에게 묻는 것'이나 ‘가나안의 신에 게 묻는 것'은 율법에서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신 18:11). 그런데 다락에서 떨어진 북이스라엘의 아하시야 왕이 자신이 나을지에 대한 여부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바알세붑에게 물었다. 이는 신정 왕국의 왕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서 도저히 해서는 안되는 행위이다. 우상에게 묻는 행위 =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찾고 경배하는 행위와 다름 없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큰 죄였다.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러한 배은망덕한 행위에 대해서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 20:5,6 ;신 5:9)께서는 진노를 발하실 수밖에 없다.

바알세붑

‘파리의 주, 날벌레의 주인’ 이 우상은 블레셋의 5대 도시 중 최북단에 위치한 에그론(3.6.16절), 즉 야파에서 남동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아키르 근처의 텔 알 무쿠안나(Tell al-Muquanna)에서 섬기던 대표적 우상으로서 파리를 통해 질병을 발생시키기도 하고 파리로부터 오는 질병을 막아주기도 하는 존재로 믿어졌다. 고대 근동에서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불안정한 생활 가운데서 여러 가지 풍토병에 시달리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에게 질병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던 지역신의 노여움을 진정시키기 위한 종교 의식을 행했는데, 본문의 바알세붑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약에서는 ‘바알세불’이라 읽힘.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에 걸린 뒤에 바알세붑을 찾아 신탁을 얻어올 것을 신하들에게 요구했던 이유는?

바알세불이 이처럼 당시 그 지역의 질병을 주관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됨.

이런 아하시야의 모습을 통해 — 그의 영적 상태의 위중함까지 알 수 있음
 👉 3절,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름..

여호와의 사자
구약 시대에 성육신 하시기 전의 제2위이신 하나님. 이는 구약 시대에 제2위이신 성자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보호자로 직접 나타나심과 같이(출 23:20,21; 사 63:9) 본절의 여호와의 사자도 우상을 숭배하는 자기 백성 북이스라엘과 그 왕을 경계하고 징계하시기 위해 나타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3절,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본문에서 북이스라엘의 왕인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의 왕’으로 지칭됨. 1-8절의 맥락에서, 아하시야라는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 않고 ‘사마리아 왕’ 이나 단지 ‘왕' 으로만 언급된 것은 그가 ‘여호와의 것’ 이란 이름 뜻을 지니는 ‘아하시야’로 불리는 것조차 꺼려절 정도로 하나님과 소원한 관계에 있음을 전달한다. 또한 **‘사마리아’**는 → 아하시야의 부모인 아합과 이세벨에 의해서 우상 숭배의 온상지가 된 곳(16:3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 왕'으로 불리우는 것은 그가 부모들처럼 우상 숭배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는 왕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우상 숭배의 성향은 자신의 질병 치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에그론의 신에게 사신을 파견한 사실에서도 충분히 보여진다. 본문에서 엘리야는 과거 아합에게 속한 바알 선지자들과 대면했던 것처럼(왕상 18), 이제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우상을 의지하기 위해 보냈던 사자들과 대면할 것 을 새로운 사명으로 부여받고 있다. 

Ⅳ.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왕이 보낸 사자들을 만나서 에그론 신에게로 가는 수고를 덜어 주는, 한 답변을 주어서 그들을 되돌려 보낸다.

아하시야가 겸손한 태도로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기도를 부탁했었더라면, 아마 평화의 응답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에그론의 신에게 사람을 보냈으니, 그것은 사울 왕이 무녀에게 찾아갔던 것과 같이, 그의 죄악의 분량을 가득 채우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결국 사형 선고를 받게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안을 삼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본인들이야 원하든 않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게 될 것이다.

1.엘리야는 왕의 죄를 충심으로 비난했다(3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즉 그들은 그렇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는 전혀 신이 없기 때문이냐." 라고도 읽을 수 있다). "에그론-팔레스틴의 아주 초라한 마을이었고(슥 9:7) 이스라엘에게 이미 오래 전에 패배된 마을-의 신에게 물으러 간단 말이냐?

(1)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그 영광을 마귀에게 돌렸다면 그 죄는 지극히 악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마귀에게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고 신탁까지 청한 것이다. 어떤 경우든, 또는 어떤 회개를 하든, 마귀와 의논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사악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이러한 사악한 행위는 이방 세계에서 횡행하고 있으며(사 47:12, 13) 심지어는 기독교 세계 속에도 많이 남아 있다. 마귀들의 세계라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행위로 인하여 존속되는 것이다.

(2)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기에 해석을 가했는데, 그와 같은 행위는 더욱 사악한 일이라고 말했다.

"너는 이스라엘의 신은 도대체 너에게 말을 해줄 수 없는 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는 전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한 때문에 그런 일을 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네가 어찌 신의 응답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먼 곳으로 사람을 보냈다는 것인가" 라고 했다.

실제적이고 구조적인 무신론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연고요, 그 결과로 생기는 사악성 때문이다. 우리가 막연하게 살거나 육체로 우리의 무기를 삼으며 이 세상 일을 추구할 때는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없다" 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2.그는 왕의 운명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가서 그가 "분명히 죽으리라" 고 일러 주라(4절).

👉의학적으로 아하시야의 죽음은 낙상에 의한 것이나, 신앙적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방 우상을 신뢰한 죄 때문.

"즉 그는 자기의 운명을 알려고 그렇게 극성이었으니 이제 그것을 알려 주라. 그리고 그에게 가서 이것을 최대로 선용하도록 하라." 그렇게 공포 속에서 메시지를 찾는 자들은 마침내 그 메시지가 가져오는 심판과 분노로 인하여 가슴이 사무치게 될 것이다.

 👉 이처럼 구체적인 범죄를 먼저 지적하고 이어서 징계를 선포하시는 것은
→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두 려워함으로 회개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서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기 시지 않고 먼저 주어질 심판의 내용을 말씀으로 선포하심으로 죄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마련해 놓으신 것.

아하시야는 자신의 질병 치료 여부를 이방 우상에게 물으려 했으나(2절), 그것에 대해서 정확한 대답을 주시는 분은 거짓된 우상이 아니라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참 신이신 여호와였다.

4절, 침상
이 ‘침상'은 앞서 2절에 나타났던 ‘다락’ 이라는 장소처럼 특별한 의미를 전달한다. 즉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사가 등장하는 왕상 17장에서 본서 4장까지의 내용을 보면 엘리야의 ‘침상' (왕상 17:19)과 엘리사의 ‘침상' (4:10.21.32)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죽은 아이가 살아나는 장소인 반면, 그 가운데 위치한 아하시야의 ‘침상’은 이방의 우상을 의지한 결과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장소.
⇒ 여호와의 도움으로 생명을 얻은 자와↔ 여호와를 배신하고 우상을 의지함으로 죽음을 맞어한 자의 대조적 운명을 효과적으로 전달.
⇒ 뿐만 아니라 본서 저자는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아하시야 왕과 ↔ 산꼭대기 위에 앉아 있는 엘리야(9절)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두 인물의 대조적인 신앙 상태도 암시하고 있다.

엘리야의 순종
엘리야는 이 심판의 메시지 명령을 받자마자 바로 자기의 처소에서 떠나갔다. 엘리야는 순종하였다.

5절,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우리는 아하시야의 사신들이 어찌하여 왕의 명령에 따라 에그론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사신들은 엘리야의 예언을 듣고 매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왕궁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아하시야가 다락 에서 추락한 사실과 질병의 치유 여부를 우상에게 묻도록 명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 따라서 이들은 엘리야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왕의 죽옴에 대한 예언도 신뢰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의 사자들이었던 그들은 아하시야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을 전달하는 여호와의 사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실 6절에 나오는 이들의 보고는 3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엘러야에게 전한 신탁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엘리야의 권위와 신탁 내용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그 예언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한 것이다.

Ⅴ. 이러한 메시지가 그의 하인들을 통해서 왕에게 전달되자 왕은 누가 자기에게 그 메시지를 보냈느냐고 물었고, 그 신하들의 말을 따라서 그는 틀림없이 엘리야라고 결론지었다(7, 8절).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그들이 말하는 선지자의 옷차림이 그가 자기 아버지의 궁정에서 보았던 엘리야의 옷차림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털이 난 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르고 있었다. 즉 그의 옷차림은 검소하고 소박했다. 신약 성서의 엘리야인 세례 요한도 여기에 나온 엘리야와 비슷했다. 옷은 털옷이었고 그의 띠는 가죽 띠였다(마 3:4). 성령으로 옷 입은 사람은 온갖 부귀와 아름다운 옷을 경멸한다.

2. 엘리야가 전달한 메시지는 왕의 아버지에게 전달되었던 메시지와 비슷했다.

그는 한 번도 좋은 것을 예언하지 않았고 오직 나쁜 일만 예언해 주었었다. 엘리야는 지상의 거민들을 여전히 괴롭히고 있는 증인들 중에 하나이다(계 11:10). 아합의 눈에 가시와 같았던 자는 그의 아들이 여전히 악한 길을 답습하고 있는 한 그 아들에게도 역시 가시 노릇을 할 것이다. 그 왕은 이제 자기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나를 위하여 나의 원수를 찾았느냐" 라고 소리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죄인들은 "열조를 삼가라" 는 그 말은 아직도 힘이 있고 강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슥 1:6히4:12 참조).

👉아하시야는 이같은 부왕 아합의 죽음을 분명히 상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외침 속에는 과거 아합에게 임한 것과 같이 현재 자신에게 임하는 심판에 대해 아하시야가 느끼는 두려움이 함축되어 있다.

●불을 내린 엘리야(열왕기 하 1:9-18)

Ⅰ. 왕은 이제 엘리야를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했다.

만일 네그론의 신이 그는 죽으리라고 말했다고 하면 그는 아마 그 예언에 순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의 예언자가 그렇게 말하자-그것은 그 왕의 죄를 책망하는 것이고 그에게 이스라엘의 죄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는 그 예언을 참을 수 없었다. 아하샤 왕은 자기에게 주어진 경고를 선용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그 예언자에 대해서 화를 냈다. 그 질병이나 죽음에 대한 생각도 결코 그에게 어떤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주지 못했다.

어떠한 외적 경고도 죄인들을 놀라게 하거나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지 못한다. 더욱 그들을 격노하게 할 뿐이다. 이 아하샤 왕은 엘리야가 예언자, 곧 참 예언자라고 생각이나 했는가. 만약 그가 참 예언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찌하여 그를 감히 박해하려고 했었던가. 왕은 엘리야가 일반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엘리야를 사로잡기 위하여 그와 같은 군대를 보냈다는 사실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께서도 일단 병사들에 의해서 체포되어야 했었다.

👉만약 아하시야가 엘리야의 에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회개의 자세를 취했다면 한 명의 사자를 파송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명이 아닌 50명을, 그것도 군인들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그를 체포하려 하였던 것이다.
→ 자신의 죄악과 죽음에 대한 예언을 듣고도 변함이 없는 아하시야의 비신앙적 태도.

Ⅱ. 자기의 부하 오십 병사를 데리고 엘리야에게 보내진 오십 부장은, 엘리야가 산꼭대기(어떤 사람은 갈멜산이라고 생각한다)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하샤 왕의 이름으로 항복을 명령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번에는 전과 같이 동굴 속에 숨어 자취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그 산 꼭대기에서 대담한 모습을 하고 나섰다. —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한 사람은 더욱 담대해지는 법이다.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한 나라의 왕에게, 더군다나 잔악하기로 소문난 아하시야 왕에게(왕상 22:52) 그가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답게 담대히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권력과 부 귀에 편승해서 비굴해지기 쉬운 현세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귀감이 된다.

그 오십부장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 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믿었거나 그를 존경해서가 아니고 단지 통상적으로 부르는 칭호였을 뿐이다. 그 오십부장이 진실로 엘리야가 예언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결코 그를 체포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엘리야를 하나님의 말씀을 위임받고 있는 자라고 생각했더라면 그는 결코 왕의 명령으로 엘리야에게 명령하는 과장은 떨지 않을 것이다.

👉 오십부장의 태도는 — 엘리야의 신적 권위를 인정한 존경의 표시가 아니라 그를 죄인인 동시에 체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조롱하는 의미가 강하다. 이러한 태도는 엘리야를 선지자로 보낸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하시야의 태도

여기서 명령의 전달자는 아하시야의 사자이고 명령하는 사람은 아하시야 왕이며, 그 명령을 듣는 자는 엘리야.
아하시야 왕은 자신의 부하인 오십부장을 시켜서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에게 강세 명령형을 사용함으로써, 엘리야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기는커녕 그에게 거만하게 명을 내려 자기의 권위에 굴복할 것을 명하고 있다. 즉 아하시야는 죄를 짓고 병에 걸려서 심판을 선고받은 자리에서도 회개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향하여서까지 군주로서의 자신의 권위만을 행사하는 교만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내려오라’고 하셨나이다

문맥상 아하시야가 침상에서 ‘내려가는 것' — 은 병을 치료받아 생명을 구하는 의미.
엘리야가 산에서 ‘내려가는 것'은 — 아하시야를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을 뜻한다.
결국 엘리야는 여호와의 지시를 따라 산에서 ‘내려가' 아하시야를 대면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본서 저자는 ‘야라드' 동사의 반복을 통해서 인물들의 객관적 행동 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각 인물돌의 ‘내려옴' 즉 아하시야의 생명과 엘리야의 사역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표현. 

Ⅲ.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거만한 죄인들을 불사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거나(그는 다른 방법으로도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엘리야의 행동은 자기 자신만의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가 아니라 자기의 사명을 입증하며 "불경스럽고 불의한 인간들에게 대해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오십부장은 아주 냉소적으로 그를 "하나님의 사람"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엘리야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정 그러하다면 너는 그러한 농담에 대해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할지니라." 오십부장은 자기의 사명을 자랑했다(왕이 "내려오라" 고 말했느니라). 그러나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보다 위대하시며 그의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더 큰 권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 오십부장에게 알리려 했던 것이다.

👉 엘리야의 겸손한 요청

본문은 엘리야가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서 불을 내릴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시기틀 겸손히 요청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바알 선지자들과 대적했던 상황에서 제단에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던 엘리야의 과거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왕상 18:36, 37). 엘리야는 자신을 무례하게 대했던 자들에게 상한 감정을 저주의 분노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종을 모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공의를 나타내실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을 받아주신다는 표시로 그 제물을 불사르기 위해서(왕상 18:38)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린 사건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무시했고, 그것 때문에 이제 불은 제물이 아니고 바로 그 죄인들 머리 위에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10절).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예언자들이란 하늘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 그 예언자들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기를 원하고 있다. 엘리야는 다만 말만 했지만 그 말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전에는 하늘에서 물을 내리게 했던 그가 이번에는 불을 내리게 했다. 오! 과연 기도의 권능은 얼마나 큰가. "네 손으로 한 일에 대해서 너는 내게 부탁하라" (사 45:11).

2.하늘도 예언자들과 이해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예언자들의 사건을 해결해 줄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그들에게 가해진 피해를 복수할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왕들은 그들 때문에 책망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하나님)의 예언자들을 해하지 말라" 는 책망(시 105:15)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엘리야 한 사람이 오십부장 일만 명과 그들의 오십 병사들보다 훨씬 더 귀중했던 것이다. 물론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런 일을 했지만, 우리 구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전례와 같이 그런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으셨다(눅 9:5-4).

그 장소는 신약의 엘리야인 세례 요한이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정의의 행동을 하던 장소, 그리고 그와 비슷한 경우를 당하여 하나님을 격노케 한 저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을 내리자고 요청했던 그 장소와 그렇게 멀지 않다.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어떠한 영을 받았는지 결코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그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1) "너희는 어떠한 영을 받았는지 모르고 있도다. 제자들의 직분을 너희들은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구약 성서의 율법시대의 영과 너희들의 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공포의 율법과 문자의 율법에 있어서는 그것이 충분히 합당하다. 즉 그런 시대는 엘리야가 불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령의 시대와 은총의 시대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느니라."

(2) "너희들은 너희들이 이 때를 당하여 행동하는 그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으며 그 정신이 엘리야의 정신과 얼마나 다른지를 모르고 있느니라. 즉 엘리야는 거룩한 열성 때문에 그렇게 했지만 너희들은 감정으로 그렇게 하려 하느니라. 엘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염두에 두었지만 너희들은 네 자신들의 명성만 생각하고 있느니라.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실을 그 사람들의 원칙에 의해서 판단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판단은 진실에 의거한 것이니라."

Ⅳ. 이와 같은 사건이 다시 한 번 반복되어 있다. 누가 이런 일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1. 아하샤는 다시 한번 엘리야에게 체포령을 내렸다(11절).

그는 마치 자기에게는 전능한 힘이 있어서 결코 좌절될 수 없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다. 완악한 죄인은 결국 하늘에서 내린 지옥불에 의해서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고 정복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하늘의 불이 자기들을 정복할 수 없을 것처럼 생각한다.

2. 다른 한 오십부장이 자기의 오십 부하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는 그 예언자에게 대해서 맹목적인 분노를 가지고 있었고, 자기의 왕에게 대해서는 맹목적인 복종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난 사건 때 있었던 그 치명적인 운명에 다시 도전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도 지난번 사건 때처럼 역시 경솔한 짓이고 위험한 짓이다.

그러나 보다 더 서둘러 진행되었다. "더 이상 버티지 말고 속히 내려오라" 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실이 일어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속히 내려오라 머뭇거리지 말라. 왕이 용무가 급하니라. 내려오라. 내가 너를 끌고 내려가리라."

 👉 첫번째 왔던 오십부장과 군사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인 엘리야에게 이러한 태도로 일관하다 죽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10절), 두번째 보냄을 받은 자들도 비슷한 태도 내지는 더 불손한 태도틀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하시야의 군사들에게 내려진 심판의 불은 바로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입증하는 불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왕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오십부장, 오십인의 군대와는 달리, 하늘에서 불을 내리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존재였다.

엘리야의 권위를 무시하면서 아하시야의 명을 수행하는 아하시야의 군사들이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심판받게 되는 본문은 앞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끝까지 무시하고 완악한 자세를 버리지 않는 아하시야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다.

3.엘리야는 조금도 측은히 여기지 않았다. 단지 다시 한 번 하늘의 불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그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들은 즉석에서 죽음을 당했다. 남들과 같은 죄를 지으려는 자들은 그들과 같은 수난을 또한 각오해야 한다. 하나님은 변함 없이 공의로우시기 때문이다.

 👉 13절, 왕이 세번째 사람을 보냄. ⇒ 아하시야의 극에 달한 악의 상태

한글 개역 성경은 번역을 생략했지만, 원문상 ‘와이야와브’는 ‘그리고 그가 돌아왔다’로 직역된다. 이미 11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표현은 거듭된 불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아하시야가 여전히 자신의 완악한 마음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사람인 엘러야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세번째에 해당하는 ‘쉘리쉼’은 상태의 완전함 내지는 충만함을 상징하는 숫자로서, 아하시야의 완악함이 극에 달했음과 그에 대한 심판이 더 이상 지연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효과도 전달한다. 즉 이는 아하시야가 회개의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한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에서 완전히 멀어진 상태임을 보여준다. 

Ⅴ. 제3의 오십부장은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과 엘리야의 자비를 구했다.

물론 아하시야 왕이 직접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 같지는 않다(그의 완악한 마음은 전과 동일했다. 그는 여호와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가 출현한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무반응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부하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결국 엘리야를 자극시키는 동일한 메시지를 주어서 제3의 사자를 보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 사자는 자기 선임자들의 운명에서 경고를 알았다. 아마 그들의 시체를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는 예언자더러 내려오라고 하는 대신에, 자기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자기와 자기 병사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자기들의 죄악이 받아야 할 벌을 시인하면서 엘리야의 권능을 인정한 것이다(13, 14절).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라고 했다.

👉 앞선 오십부장들의 사건을 마음에 세기고 스스로 낮아짐으로 그 결과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세번째 오십부장의 운명은 ↔ 앞선 첫번째 오십부장의 사건을 경험하고도 동일한 태도를 취함으로 죽음을 맞이한 어리석은 두번째 오십부장이 당한 결과와 대조를 이룬다.

전임자들의 끔찍한 운명을 통해 그는 엘리야가 비록 무력해 보이고 초라해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싸우고 계신다는 사실과 자신이 이끌고 온 군대로는 대적조차 할 수 없는 하늘의 군대가 그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처럼 세번째로 엘리야에게 보내진 이 오십부장은 자신의 임무가 단지 자기가 섬기는 아하시야와 관계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와 그를 위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된 것임을 명확하게 깨달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서와 같이 그는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 그에 합당한 겸비한 자세를 취함으로 하나님의 진노 를 피하여 생명을 보전하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이다.

셋째 오십부장의 겸손한 간구하는 태도
거듭된 심판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일관하여 멸망을 자초했던 아하시야의 행동과 대조를 이루며 하나님이 그토록 많은 전조를 보여주시고 회개의 기회를 부여하였음에도 회개치 않는 아하시야의 완악함을 더욱 극명하게 부각시켜 주고 있다. 원문을 보면 오십부장의 간곡함이 더 잘 드러난다. 오십부장은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엘리야의 긍휼을 간곡히 요청하는 겸손함을 지녔기 때문에 자신과 부하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엘리야를 왕에게 모셔가는, 왕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책임까지 완수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생명 뿐만 아니라 부하의 생명을 위해서 간구하는 이 오십부장의 모습은
자신의 부하들이 두 번에 걸쳐 하늘의 불에 의해 비참한 죽옴을 당했음에도 또다시 파견하는 아하시야 왕의 잔인하고 무책임한 모습과도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아하시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임을 당한 것은 근본적으로는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의지한 결과이지만, 동시에 더 이상 백성들을 보호할 수 없는 자질 없는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며 이끌어 가는 이스라엘 왕의 본래 모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이다. 이처럼 끝까지 자기의 원하는 바만을 고집하고 자기 백성들의 안위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는 자가 계속 왕의 자리에 머무는 것을 하나님은 간과할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아무 득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가 하나님을 이기고 싶으면, 그에게 간구를 드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남들이 고집을 부리다가 어떤 결과를 당하는지를 보았으면, 거기에서 스스로를 겸비케 할 줄 아는 법을 배우는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이다.

Ⅵ. 엘리야는 이 제3의 군대장이 요구한 것 이상을 허락했다.

하나님은 그 앞에서 끝까지 버티는 자들에게는 그토록 가혹하시지만, 스스로 통회하며 복종하려는 자들에게는 즉각적으로 자비를 보이신다. 이 군대장은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뜻을 달성하게 되었다.

 👉 하나님이 엘리야로 하여금 두 번에 걸쳐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여 그를 체포하려는 자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재앙의 사건을 보이신 이후에 비로소 아하시야 왕을 만나도록 명령하신 의도는 무엇인가?

우선은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에게 회개의 기회를 머리 여러 번 제공하심으로써, 엘리야가 아하시야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직접 선포할 때 변명의 여 지가 없도록 만드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두 번에 걸친 재앙 사건을 통해서 아하시야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되심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분명히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재앙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했던 오십부장 이 생명을 구했던 것처럼, 일반 백성들도 이 사건을 계기로하나님 앞에 지난 과오를 내어놓고 겸비하게 뉘우치며 회개함으로 생명을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궁극적인 결과였던 것이다. 이제 아하시야와 백성들을 위한 충분한 회개의 시간이 주어졌고 회개의 열매가 세번째 보내진 오십부장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부에서라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같은 시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아하시야에게 최종적으로 심판을 선포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엘리야는 천사의 명을 받아서 "그와 함께 왕에게 내려갔다" (15절).

이리하여 이전에 그가 내려가기를 거절한 것은 아하시야 왕이나 궁궐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러한 전제적 강요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었기 때문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은 자기의 주인의 명예를 깎아버리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직임을 크게 했다" 고 했다.

👉 엘리야가 여호와의 사자의 명령을 듣고 자신을 해하려고 했던 아하시야 왕을 만나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서 왕에게로 내려갔던 것은

→ 그가 자신의 판단에 따르거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드러내 준다. 본문에 나온 엘리야의 즉각적인 순종은 그 동안 엘리야가 두 오십부장을 향해 불을 내리게 하면서 자신에 대해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이란 가정을 확증해 주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내용을 통해 본서 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단순히 이적을 일으키고 표적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마 7:21-23).

그는 왕에게 담대히 나아가서, 그의 면전에서 이야기했다. 즉 그는 그가 전에 왕에게 보냈던 메시지를 다시 이야기 했다(16절).

 👉 엘리야는 지금 왕의 군사들에게 잡혀온 죄수의 입장이었지만 살기 등등하고 패역한 아하시야 왕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의 목소리 톤을 전혀 낮추지 않았다. 여기서 엘리야가 아하시야를 향해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리라'고 비교적 완곡한 표현으로 말했다 해도, 이는 곧 아하시야 왕의 시대가 끝났음을 통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엘리야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누구 앞에서든 전혀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변명함이 없이 담대히 외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용기와 담대함이 있었다.

한편 본서 저자는 본문에서와 같이 고대 사회에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왕 앞에서 이러한 심판의 말을 전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 본장의 핵심 이슈라 할 수 있는 바 어째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인지에 대한 해답을 선명 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은 왕이 분명히 머지 않아 죽으리라는 것이었다. 엘리야는 왕의 분노가 두렵거나 또 그의 불행이 동정스러워 하여, 이 선고를 지체시키지 않았다.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이미 그에게 선고를 내리셨다. 그러므로 이제 에그론의 신이 그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가를 알아 보도록 하자.

 👉 이전에는 아하시야 왕에게 직접 전해지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엘리야가 직접 아하시야의 면전에 선포함.

이 때 아하시야는 충분히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 이후의 시점이었다. 따라서 16절은 하나님이 직접 아하시야의 사형 선고를 최종적으로 확정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메시지는 아하시야에게 청천벽력 같았다. 그 말이 엘리야의 입에서 직접 나오자, 그 왕이나 그 주위의 어떤 신하들도 감히 엘리야에게 폭력을 가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아무 대꾸도 못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다니엘처럼, 엘리야는 그 사자 굴 속에서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 자를 누가 감히 해하랴!

끝으로, 그 예언은 며칠 안 있어서 실현되었다.

아하시야는 무자(無子)한 채로 죽었고(17절), 그의 나라는 그의 형제 여호람에게 넘어갔다. 그의 아버지는 22년 간 악정을 했으나, 그는 불과 2년간도 못 다스렸다.

때로는 "악한 자들이 살아 장수할 뿐 아니라, 권세를 얻는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불경스런 그 인간들은 스스로에게 이르기를 자기가 번영하고 있다고 하나, 실상은 스스로 속는 것이다. 홀(Hall) 주교가 여기에서 지적했듯이, "어떤 죄인들은 오래 살아서 자기들의 심판을 가중케 하나, 어떤 죄인들은 빨리 죽음으로써 그들의 심판을 재촉한다" 는 사실 때문이다. 아무튼, "재앙이 죄인을 좇아갈 것이요", 조만간 그들을 따라가 잡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저 아하시야의 치명적인 죄악, 곧 마귀의 신탁을 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신탁을 증오하는 그 죄악만큼, 죄악의 그릇을 빨리 채우는 것도 또 없다.

👉 원문의 표현은 — 아하시야 왕의 죽음과 관련해 중대한 사실을 설명해줌.

엘리야가 선포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격임을 나타낸다. 결국 이 구절은 엘리야와 아하시야의 싸움으로 표면화되었던 본단락의 내용이 실상은 세상 권력과 하나님 사이의 대결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하시야 왕의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

본래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체포하려 했던 것은 엘리야를 사로잡음으로 그의 예언의 능력을 무력화시키 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아하시야의 시도는 자신이 보낸 사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자기의 완악함만을 더욱 부각시켰을 뿐이고 끝까지 회개치 않는 아하시야 자신에 대한 심판의 성취를 앞당기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열왕기서는 한 개인의 범죄와 죽음이라는 단편적 사실을 전달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성취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아하시야의 죽음은 ↔ 유다의 여호사밧이 에돔을 정복하여 섭정왕을 두었으며(왕상 22:47), 25년이라는 비교적 긴 통치 기간을 가졌던 것(왕상 22:42)과 그의 아들 여호람에게 순탄하게 왕위를 물려준 경우(왕상 22:50)와 명확한 대조를 이룸.

⇒ 아하시야가 자신의 왕 위를 계승할 아들을 갖지 못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며, 동시에 그분의 섭리의 결과.

이는 아하시야가 부모인 아합과 이세벨의 잘못된 신앙 유산을 이어 받아 우상을 적극 의지했을 뿐 아니라, 선지자를 핍박하여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항하고 백성들의 목숨을 경시함으로 왕으로서의 자질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하시야의 악영향이 더 이상 북이스라엘에 확산되지 않도록 그의 통치 기간을 짧게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 뒤를 이을 후사까지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죄악으로 점철된 그의 최후를 더욱 비참하고 허무한 것으로 만드신 것이다.

본장의 전반적 내용은
우상 숭배의 대표자인 아하시야와 여호와 신앙의 수호를 표방하는 엘리야와의 대결에서 최종적 승리는 엘리야가 의뢰하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본장은 아하시야의 질병의 회복 여부 및 그가 3차에 걸쳐 엘리야에게 파송한 군대들이 처한 각각의 운명과 관련해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생명의 주권자가 오직 여호와이심을 다시 한번 강조.

앞선 왕상22장에서 아합의 죽음 이후 이어진 본장을 통해 → 왕조의 역사가 왕 개인의 역량이나 백성들의 뜻에 따라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행된다는 열왕기서의 신학적 주제를 알 수 있음.
열왕기 저자는 일반 역사적 관점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Coram Deo) 평가를 담아 이스라엘 분열 왕국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