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14, 시편 17, 잠언 28, 데살로니가후서 2
묵상구절
2:19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2:20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2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2: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24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2:25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다시 먹게 된 우물물(열왕기 하 2:19-25)
👉 앞선 12-18절에서는 엘리사가 엘리야가 승천하기까지 그와 동행하며 그가 승천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실과, 엘리야가 남긴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는 이적 및 여리고 선지 생도들의 어리석은 엘리야 서신 수색 시도와 관련된 권면을 통해 선지 생도들로부터 승천한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하는 참 선지자로 인정되는 과정을 보도하였다.
이제 본장의 마지막 부분인 19-25절에서는 엘리사가 여리고 성에서는 수절을 정화시키는 이적을 일으키고 벧엘에서는 자신을 조롱하는 젊은 아이들을 저주로 죽게 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참된 선지자로 객관적으로 입증받게 된 사건을 다룬다.
엘리사가 엘리야보다는 더욱 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의미에서 보면, 그는 영을 갑절이나 받은 셈이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사가 기적을 행한 수는 엘리야에 비해 꼭 두 배가 된다고 생각한다.
본문에는 두 가지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즉 여리고에 자비를 베푼 기적과 벧엘에서 심판을 행한 기적이 그것이다(시 101:1).
👉 19~22절은 여리고성 수질 정화 이적을 다룬다. 이러한 새로운 내용은 그 성 사람들, 즉 여리고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와 수질이 좋지 못하여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고 호소함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다수의 여러고성 거민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온 것으로 보아 → 엘리사의 선지자적 권위가 이미 여리고성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정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리고성 사람들은 겸손한 태도로 엘리사에게 자신들의 형편을 간청했는데, 이는 그들의 상황이 너무나 심각했음을 드러내준다.
Ⅰ. 여리고의 물이 축복을 받게 된다. 즉 그들의 물을 좋은 물로 바꿔 주었다.
여리고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또 그 성읍을 재건하는 자들의 자녀들이 죽는 희생을 치르고서 재건된 마을이다. 그러나 일단 건설되고 나자, 그 성읍을 철폐하라는 명령이 다시 내리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예언자들이나 백성들에게 거기에 거주하지 말라는 금지령도 내려지지 않았다. 물론 그 성읍을 재건한 자들은 악을 행했지만, 그 성읍에는 경건을 낳는 산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로운 자들이 들어가 살 집을 짓는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보면, 죄인들의 재물이 의로운 자들의 거처를 마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리고에 가신 적이 있다(눅 19:).
이제 엘리사가 바로 그곳으로 온 것이다. 그는 예언자들의 생도들이 밀파한 정탐꾼들이 멀리에서 보고 들려 주는 것보다는 더 자세히 엘리야 승천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 줌으로서 그들을 안심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는 그 용사 50인들이 엘리야를 수색하는 동안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
1. 그 때 여리고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의 고통을 말한 것이다(19절).
신실한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남의 일을 기꺼이 돌본다. 예언자들의 빛이 아직 잠시 우리에게 함께 있을 때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들은 그 문제를 엘리야에게는 말하지 않았었다. 아마 엘리야는 엘리사보다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았던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신학교의 감화를 받아 그 마을에도 개혁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 마을의 지리적 형편은 쾌적하여 좋은 전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먹기에 좋은 물이나 식물을 생산해 낼 옥토가 없었다. 전망이 아무리 좋은들 이런 곳에서 무슨 낙이 있으랴? 물은 일반 자비이다. 물이 부족하거나 먹을 수 있는 물이 없을 때 당할 극심한 곤경을 생각하고 우리는 물로 인해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이는 여리고 땅 전체가 불모의 땅이고 물도 나쁜 지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일부만 그러한데, 바로 "거기에" 예언자 생도들의 숙소가 있었다는 것이며, 그들이 여기서는 "그 성 사람들" 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 여리고
의미: ‘향기로운 곳' 이란 문자적 의미, ‘종려의 성읍’, ‘종려나무의 성’ 으로 불리울 정도로 환경이 쾌적하고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물이 좋지 못하므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그 땅에는 소산이 없다’, 더 나아가는 ‘그 땅에 사는 여인들은 유산한다’ 라는 뜻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 토지의 소산이기 때문에 전자의 번역이 본문에 더 합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물은 사실 사람이나 동물의 유산과도 관계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본문은 후자의 해석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나쁜 물 때문에 여자들은 유산하고 가축들은 그들의 새끼들을 조산하며, 식물들은 익기도 전에 떨어지는 것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1절에 나오는 엘리사의 말 가운데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란 표현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는 → 사람, 가축, 식물 모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엘리사가 여리고성의 수질을 정화한다는 것은 = 이 지역 전체를 척박함에서 풍요로움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역은 과거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양식을 제공하고 그녀의 죽은 아들을 살렸던 사역과 성격상 동일한 것으로(왕상 17장), 엘리사가 엘리야의 사역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그는 곧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정신을 수양하기 위해서 적당한 곳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불모의 사람들을 옥토의 사람들로 만드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 자들이다.
엘리사는 그들이 물을 고쳐 줄 것이다. 그러나
(1) 그들은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지고 엘리사에게 주어야 했다(20절).
소금이 물을 순화시키는 작용을 한다면, 그렇게 소량의 소금으로 무엇을 할 것이며, 왜 하필 새 그릇에 담긴 소금이라야 되겠는가?
그러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스스로 힘써야 하며, 신앙과 복종을 단련받아야 된다.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어떤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칙을 준수함으로써 가능해진다.
👉 소금
고대에 ‘소금’은 음식물의 양념으로(욥6:6)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제물을 정결케 하는 재료로나(레2:13) 신생아의 출생시 소독제(겔16:4) 등으로도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소금을 뿌리는 행위’는 도시를 폐허로 만들겠다는 저주를 상징하기도 함(삿9:45) 본문의 맥락에서는 이 소금이 저주받았다고 생각되는 여러고의 샘을(수 6::17, 26) 깨끗하게 만들고 거룩하게 만도는 일중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새 그릇
‘새롭다’ — ‘하다와'는 일차적으로 전혀 손상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며 동시에 다른 부정적 요소에 영향을 받지 않은 거룩한 상태를 의미함(삿16:11; 삼상6:7; 왕상11:29). 따라서 새 그릇에 소금을 담은 엘리야의 행동은 여리고의 부정한 상태를 → 깨끗한 상태로, 불완전한 상태를 → 완전한 상태로 변화시키는 행동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엘리사는 "물 근원으로 나아가" 서 소금을 던졌다. 그래서 물줄기와 그 기초를 치료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생활을 개혁하는 길은 곧 그들의 마음을 갱신시키는 것이다. "생명의 과실을 맺고자" 하는 자들은 이렇게 은총이라는 소금으로(자기 자신을) 간을 맞추어야 한다. "나무를 좋게 하면, 그 열매도 좋아지리라." 마음을 정결케 하라. 그리하면 손도 깨끗해지리라.
(3) 엘리사는 이 기적을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듯 가장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 물을 고쳤느니라" 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의 도구였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치유의 효험을 기꺼이 내어보내시고자 하신 그 통로에 불과했다.
👉 ‘고쳤으니’..
이 단어는 창세기에 나오는 그랄 왕 아비멜렉의 여자들의 생식력이 회복된 것으로 묘사하면서도 사용되었음.(창20:17) ⇒ 즉 이 단어는 ‘치료하다'라는 뜻과 ‘생산 능력을 회복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그 물을 ‘고치다'라는 의미와 더불어 이 물을 고침으로써 이 물로 인하여 저하되었던 여러고성의 생산 능력이 회복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본문에서 유의할 점은 → 동사의 주체와 시제.
여리고의 샘을 고친 주체는 = 소금이나 엘리사가 아니라 여호와이시며,
시제 = 강의형 완료, 이미 물이 완전하게 치료되었음을 나타낸다.
⇒ 즉 소금이라는 물질 자체가 신비한 효능을 일으키거나 엘러사의 영감이 물을 정화한 것 어 아니라 여호와의 능력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임을 여호와의 말씀 자체가 강조하는 동시에,
⇒ 엘리사는 다만 여호와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여호와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고쳐진 물의 근원은 현재 ‘아인 아스 술탄(Ain as Sultan)’으로 불리는 샘으로서, 지금도 이 샘에서는 많은 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여리고 남쪽에 위치한 유다 광야에 대한 최근의 지질학적 탐사와 수질 탐사를 통해, 이 지역의 일부 샘들이 방사능에 노출되어 있 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헌상은 물이 방사능 지질층과 접촉할 때 생기는 것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수질 오염은 큰 단층 계곡 안의 지극히 불안정한 지역에서 일어난 지질 변동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 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가뭄 시의 지하 수면의 변동과 같은 요인으로 발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하튼 이러한 방사능이 불임의 원인어 된다는 사실이 과학적 실험 결과 밝혀졌고 이는 사실만 아니라 동식물에 대해서도 동일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본문의 여러고성 거민들이 겪었던 어려움(19절)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같은 사실들과 관련해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 현상들까지도 초자연적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드러내 주고 있다. 아울러 본문은 그같은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 시기 위해 엘리사와 같은 당신의 종을 세우시고 사용하신 사실 또한 보여주고 있다.
그가 이렇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으므로, 이후로는 그들이 그와 같은 서두로 시작되는 그의 견책과 충언과 명령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좇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었다면,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통솔해야 될 것이다. 이후부터는 엘리사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하고 말하면, 그들에게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 오염된 물의 정화가 우연한 자연현상이나 소금의 효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엘리사의 말, 즉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통해서 하셨던 그 말씀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
이러한 본문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잇는 참된 선지자임을 18절에 이어서 또 한번 입증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쇠잔해 가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말씀으로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의미도 전달한다.
(4) 그 치유의 효과는 영속적이었다. 잠시 잠깐의 일이 아니었다. "그 물이 고쳐져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22절)고 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영원토록 있으리라" (전 3:14).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으로 "영혼(사람)을 치유하시면", "다시는 죽음이나 불모성이" 있지 아니하리라. 그 성질이 변경된다. 무용하고 악하던 것이 고마움을 알게 되고 쓸모가 있게 된다.
👉 이 진술은 적어도 저자가 열왕기서를 집필할 당시까지는 여리고의 물이 깨끗하여 백성들에게나 땅의 소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러한 본문은 앞절에서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하신 여호와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한다.
한편 현재에도 이 샘에서는 많은 물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여호와의 약속은 당시 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본문을 대하는 오늘날의 시점까지도 계속해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 23절과 24절은 — 엘리사가 여리고를 떠나 벧엘로 올라가는 도중에 있었던 이적을 소개.
이와 더불어 25절은 — 엘리사가 다시 갈멜산으로 갔다가 사마리아로 돌아간 사실을 밝힘으로 엘리사는 사역 초기부터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장에 여러 차례 나오는 여러고와 벧엘은 선지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가 방문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Ⅱ. 벧엘의 어린아이들에게 저주가 임한 기록이 있다.
그 저주는 실상 그들을 죽여 버렸다. 그 저주는 이유 없는 저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벧엘에도 예언자 학교가 하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엘리사가 그리고 갔다. 이것은 그의 처음 방문이었다. 아마 거기에 있던 생도들은 최대의 성의를 다하여 그를 환영했을 것이 틀림 없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다. 여로보암의 송아지 상 하나가 벧엘에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자랑하며 좋아했고, 그것을 비난하는 자들을 미워했다.
율법이 이 경건한 학원 폐쇄의 권한을 그들에게 부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자들이 거리에 나오면 별명이나 기타 다른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을 놀려대곤 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멸시하고 청년들로 그들에게 대해서 반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가능하다면 그 예언자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도록 충동질하기 위해서였다.
엘리사에게 욕을 퍼부은 것이 그런 짓의 첫 사례였다고 하면, 그렇게 지독한 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들을 조롱하는 것" 과 "예언자들을 학대하는 것" 은 하나님께 그 복수를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죄" 중 하나였다(대하 36:16 참조).
이에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그러한 죄의 실례를 보라.
"벧엘의 아이들" 곧 거리에서 놀고 있던 소년 소녀들(아마 그들은 엘리사가 오는 것을 보고 그 마을로 내려 왔을 것이다.)이 엘리사를 만났다.
👉 벧엘의 아이들의 연령대?
본문에 ‘젊은 아이’ 로 표현되는 이들이 연령대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엘리사를 조롱할 정도의 행동을 하고 그들의 엘리사에 대한 거부와 그에 대한 조롱이 노골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소년기를 넘어선 청년기 정도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당연히 "호산나" 하면서 영접해야 했지만, 욕설로 맞이했다. 그들은 마치 엘리사가 바보인 양, 또는 그렇게 놀림을 받을 사람인 양, 생각하여 그 주위에 모여들어 그를 놀려대었다. 그들은 다른 때에도 여러 가지 농담으로 예언자들을 놀려대곤 했었는데, 엘리사를 이렇게 놀려댔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도대체 사람이 자연적으로 타고난 어떤 약점이나 기형을 가지고 비난을 한다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다면,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의 경우는 그렇지도 않았다. 대머리는 결국 흠이 될 수 없으며, 그들이 다른 이유를 품지 않았던들, 결코 그를 그런 식으로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비난한 것은 그가 예언자라는 이유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러한 영예를 주셨다면, 그것은 그가 대머리라는 사실을 감싸주기에 넉넉하며, 그러한 비난을 막아 주기에도 넉넉함이 틀림 없다.
👉 일반적으로 고대 근동에서는 ‘대머리’를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문둥병은 —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의 표징으로 간주되었는데 대머리가 문둥병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레 13:42-44) 이는 충분히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문둥병에 의하여 대머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가 대머리란 점을 굳이 지적한 것은 엘리야가 머리가 길고 숱이 많은 것에 비해 (1:8) 그의 계승자라는 엘리사는 엘리야와 너무 다른 대머리인 것을 비꼬아서 엘리야의 계승자라는 점을 부인하며 조롱한 것.
대머리다 대머리다 — 두 번 반복
본문의 이 표현을 이들은 두번이나 반복하였는데, 이 역시 이들의 조롱의 말이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계획된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이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엘리야를 이어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려는 엘리사 를 대적하려 했는지를 드러내 주고 있다. 이는 단순히 엘리사 개인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엘리사를 엘리야의 선지직의 계승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결정과 권위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그 아이들은 "올라가라" 고 엘리사에게 말했다. 그것은 아마 엘리야의 승천을 비꼬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너의 선생이 올라갔는데, 왜 너는 그를 좇아 올라가지 않았느냐? 불수레는 어디 있지? 너도 언젠가 없어지겠지?" 하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엘리사의 벧엘 진입을 막고 그의 사역을 대적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
이 아이들은 배운대로 지껄인 것이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부모들에게서 그렇게 별명을 부르며 욕설을 퍼붓고, 특히 예언자들을 놀려대는 것을 배웠다. 말하자면, 이 아이들은 새끼 닭으로서 어미 닭이 울면 같이 우는 것이다. 아마 이 때 그들의 부모들이 그들을 그 곳으로 내어보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예언자들을 쫓아낼 심산으로 말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년기부터 가정에서 율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들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서 그들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인도해야 되는 의무를 가졌고 자녀들은 그 부모들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되는 의무를 지녔다(신 21:18-21).
이처럼 이스라엘은 율법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였을 뿐 아니라 율법을 가르치는 자가 존중받는 사회였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율법을 가르처는 선지자를 존경하여야 할 청넌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조롱하고 있다.
어찌하여..?
이는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이지만 이면적으로는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대하36:16; 눅23:36). 이러한 그들의 행동의 배후에는 당시 만연해 있던 우상 숭배 세력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그들이 나온 곳이 ‘벧엘'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본문에서 엘리사가 향하여 가고 있는 벧엘은 선지 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일면 그곳은 여로보암 이래 우상 숭배의 어머니 도시라 불릴 만큼 타락한 도시였다(왕상 12:28,29). 본문에서 엘리사를 만나게 된 이들 일단의 무리들은 이같은 우상 숭배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여호와 신앙을 반대하고 우상 숭배를 적극 추종하였던 자들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원문의 표현에 어느정도 암시되어 있다.
⇒ ‘젊은’에 해당하는 단어의 원형은 → ‘미혹되다(시95:10)’, ‘더럽히다(겔20:43)’란 의미를 갖는 ‘쿠트’. 이같은 점을 고려할 때 이들에 대한 이같은 원문의 표현은 이들이 이미 우상 숭배에 미혹되어 신앙적•도덕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상태에 있었던 자들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엘리사 조롱 사건이 우연인가?
이들이 엘리사를 만나서 그를 조롱했던 사건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이를 우연이 아닌 의도적으로 계획된 사건으로 볼 수 있는 단서들은 본절과 24절의 내용 가운데 충분하게 언급되어 있다.
먼저 24절을 보면, 엘리사가 그들을 여호와의 이롬으로 저주하였다고 나오는데 이는 본장에 표면적으로 소개되어 나오지는 않지만 분명 그들이 엘리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까지 모독하는 저주스런 짓을 하였음을 암시한다. 아울러 그들 중 암곰에 찢겨 죽은 자가 42명이 었다는 것은 이들 외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에 가담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본절에서는 이들이 엘리사를 조롱하기 위해서 벧엘성에서 나온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42명이 넘는 무수한 젊은이들이 성밖으로 나와 일제히 엘리야를 계승하여 선지자직을 감당하기 시작한 엘리사를 조롱하였던 이 사건은 결코 우연한 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 이같은 내용들은 이들이 우상숭배에 깊이오염되어 여호와 신앙을 적극적으로 배격하고 박해하는 자들이었음을 더욱 분명하게 입증해 준다. 즉 이들은 분명 우상 숭배를 적극 추종하는 자들로서 엘리야 사역을 계승해 하나님의 일을 감당 하려는 엘리사에게 깊은 적개심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그를 대적하기 위해서 함께 뭉쳐서 성밖까지 나와서 엘리사를 조롱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2.마침내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학대한 이스라엘 위에 내릴 폐망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정당한 경고를 주려는 것이었다.
엘리사는 잠시 동안 그들의 조롱을 참고 들었다. 그러나 이윽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성의 불이, 그 계속되는 자극으로 인하여 그의 가슴에서 불타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돌이켜 저들을 보았다"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면 행여나 그들을 누그러뜨릴 수 있거나 물러가게 할 수 있을까 해서였으며, 혹시 그 아이들의 얼굴에 어떤 순진한 표정이라도 있는지 확인하려 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부끄러워하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엘리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앞으로 내릴 심판을 불러서 선포한 것이다. 자기 개인에게 가해진 일로 인하여 사적인 보복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로우신 입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가해진 치욕을 벌한 것이다.
그의 저주는 즉각 실현되었다.
👉 엘리사가 저주를 내리자마자 마치 암곰 둘이 그 저주의 말씀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풀에서 갑자기 나왔음.
숫곰보다 더 사납기로 알려진 암곰의 등장은
엘리사의 초자연적 능력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한마리가 아닌 두마리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 사건이 우연한 사건이 아닌 선지자의 저주에 의한 필연적 사건임을 입증하는 역할을 한다. 즉 이 사건에 등장하는 암곰 두마리 역시 과거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군대에게 두 번에 걸쳐 임했던 불(1:10 , 12) 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다.
두 마리의 암곰(아마 자기 새끼들을 빼앗긴 곰들)이 근처의 숲에서 나와 아이들 42명을 현장에서 죽여 버렸다(24절).
(1) 이 사건에서 볼 때, 예언자 엘리사는 정당하다.
그는 거룩한 충동을 받아서 저주했기 때문이다. 그 저주가 어떤 나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그 저주에 "아멘" (긍정)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는 그 두 마리의 곰을 그 아이들을 죽인 곰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을 징계한 두 개의 채찍이라고 부르는게 더 마땅할 것 같다. 그는 이들이 얼마나 악질적인 독사의 자식들인지 알았고, 이렇게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커서 어른이 되고 나면 그 예언자들에게 얼마나 악랄한 원수들이 될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이로써 그는 그들 부모들을 벌하고, 그 부모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도록 만들려 했던 것이다.
(2) 이 사건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으셔야 했다.
그는 죄를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죄를 헤아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어린 아이들에게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악의에 가득 찬 병아리들의 소름끼치는 비명을 듣는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자. 아이들도 나쁜 말을 삼가게 하자. 하나님은 그들의 말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정신이나 신체에 결함이 있는 자라고 하여 조롱하지 말자.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나 사역자들을 놀리고, 그들의 선행을 비방하는 것은, 목숨에 위험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본문에서 42명의 젊은이들이 재앙을 받아 죽은 사실을 밝히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암곰들이 본능에 입각하여 젊은이들을 무작정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42명 만을 죽였다는 뉘앙스를 전달하고 있는 것. 이 숫자는 후에 예후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아합 왕가를 심판할 때 죽였던 아합 왕가와 사돈지간인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의 숫자와 동일(10:14).
⇒ 이러한 사실은 이 일련의 재앙사건들이 우연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해 실행된 것임을 증거한다. 또한 여리고의 물을 정화하여 백성들의 생명을 살렸던 앞단락(19-22절) 의 사건과 짐승을 동원하여 젊은 아이들을 죽인 본단락의 사건은 서로 대조되지만 오히려 이 대조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이시라는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엘리사 사역 초기에 있었던 이 두사건은 엘리야 사역 전반이 갖는 상반된 두 측면을 시사해준다.
19-22절 사건 : 자신의 사역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축복을,
↔ 반대로 23,24절 사건 : 여호와의 말씀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가져다 주는 것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자녀들로 위안을 얻고자 하는 부모들은 그들을 잘 교육시키고, 그들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어리석음을 몰아내기 위해 일찍부터 부모들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홀(Hall)주교의 말과 같이, "교육을 소홀히 한 자녀들에게서 선을 기대한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돌보았더라면 예방할 수 있었을 불행을 당하여 탄식하는 것은 쓸데 없는 것" 이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벧엘에 왔다. 자식들을 잃은 부모들의 보복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했을 뿐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떠나 갈멜산으로 갔다(25절).
아마 거기에 휴양과 명상에 적합한 예배 처소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다음에는 사마리아로 돌아갔다. 그 곳은 예언자들이 모이는 공적 장소였다. 그는 거기에서 예언자들의 아버지(선생)로서 최상의 봉사를 할 수 있었으리라. 홀(Hall) 주교는 이 사실에서 이러한 사실을 주목했다. 즉 "항상 홀로 있거나, 또는 결코 홀로 있어 본 적이 없는 자는 유능한 예언자가 될 수 없다."
👉 저자가 굳이 ‘갈멜산’을 언급한 이유는
이곳은 바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적하여 여호와의 능력과 영광을 입증한 역사적 장소이다(왕상 18장). 엘리사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것은 그도 역시 엘리야와 같은 동일한 사역을 감당할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엘리사가 ‘사마리아’ 로 돌아왔다는 것
엘리야가 은둔 생활을 하면서 아합 왕가와 대립하였던 것(1장; 왕상 18:10)과는 대조적으로 엘리사는 왕궁이 있는 사마리아를 주요 사역의 근거지로 삼았다는 점(5:9; 6:9; 6:32; 8:4)을 부각.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본문은 사역에 있어서 엘리야와 엘러사의 연속성 및 불연속성을 동시에 증거한다고 할 수 있다.
불연속성: 본장에서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름으로 시작된 행선지들의 최종 종착점으로 소개되는 사마리아와 그간에 이루어진 사건들을 엘리사가 사역 장소와 사역 방식에 있어서는 엘리야와 다르지만,
연속성: 이스라엘 사회에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는 엘리야와 동일한 일을 수행할 것임을 예고한다.
👉 이상과 같이 본장은 엘리야의 선지직이 엘리사에게 어떤 과정을 통해서 계승되었으며, 그 계승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밝힘으로써 앞으로의 엘리사의 사역을 가늠하게 해준다.
엘리야에서 엘리사로 이어지는 선지직의 계승 과정은 다른 사람들이 철저히 배제된 상황에서
지속적인 엘러사의 엘리야 추종, 그리고 궁극적으로 엘리야의 승천이라는 초자연적 사건을 엘리사가 목격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이후 여리고와 벧엘에서 행한 이적들은 그가 엘리야를 대신해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참된 선지자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본장의 마지막에 언급된 엘리사의 사마리아 귀환은 다음 장에서 전개될 사마리아에서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아합의 아들 여호람과 엘리사 사이에서 일어날 사건을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