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5월 30일 화요일 왕하 20:1-11 히스기야의 발병과 회복(대하 32:24-26; 사 38:1-8, 21-22)

Jeehyun 2023. 5. 30. 15:03

맥체인성경읽기

신명기 3, 시편 85, 이사야 31, 요한계시록 1

묵상구절

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7 이사야가 이르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상처에 놓으니 나으니라

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하니

9 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10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뒤로 물러갈 것이니이다 하니라

11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

[대하32:24-26]

24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25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26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사38:1-8]

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2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3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4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6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7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8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

[사38:21-22]

21 이사야가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하였고

22 히스기야도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 하였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히스기야의 기도(열왕기 하 20:1-11)

💡 본장은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 6년 전에 남유다의 제13대 왕이 된 히스기야의 통치에서부터 남유다가 멸망하기까지 약 140년 간의 역사를 기록한 본서의 후반부인 18-25장에 속하는 부분이다.
특별히 본장은 분열 왕국 이후 가장 탁월한 왕으로 평가받는 히스기야의 주요 업적과 남유다의 멸망 전조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18-20장의 마지막에 위치한다.

18-19장: 18장에서 시작된 앗수르의 남유다 침공은 19장에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호와께서 강권적으로 개입하셨고 이로 말미암아 앗수르 군대가 퇴각하면서 일단락되었다.

20장(본장):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 이후에 위치한 본장에서는 히스기야외 질병과 회복, 바벨론 사신의 방문과 남유다의 멸망 예언이 버연대기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본장의 사건들이 비연대기적이란 점은 본장의 시간적 배경이 앗수르로부터의 구원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고(6절과 18:17 비교) 왕실의 보화는 여전히 가득한 시점(13절과 18:15, 16비교)이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처럼 저자가 히스기야와 관련된 사건들을 연대기 순서에 따라 기록하지 않고 주제별로 배처한 것은 신학적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즉 본장의 사건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18장과 19장에서 기술되었던 예루살렘 구원 사건을 재해석하는 관점으로 제시됨으로써, 남유다가 앗수르로부터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후에 바벨론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을 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 원인을 밝히고 있다.

[20장 개관]

1-11 절: 죽을병에 걸렸던 히스기야가 기도 응답을 통해 15년의 생명을 연장받은 사실과 그 표징으로 일영표 위의 그림자가 십도 후진한 사실을,
12-21 절: 바벨론 사신들에게 히스기야 왕이 왕궁의 모든 보화와 시설을 공개함으로써 이사야 선지자에게 책망받은 사실과 남유다의 최종 멸망 예언을 다룬다.

이와 같은 내용 구분에서 알 수 있듯이, 본장은 1)히스기야외 경건과 생명 연장을 다룬 앞부분과 2)히스기야의 어러석음과 남유다의 멸망 예언을 다룬 뒷부분이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히스기야 왕이 아무리 경건한 왕이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방심하고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면 어러석음을 범할 수밖에 없다는 사설과 계속적인 여호와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남유다의 멸망이 점차 가까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전달한다.

이러한 부정적 암시는 히스기야가 저자로부터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18:3)라는 최상의 평가를 받고 앗수르의 1차 침공시 여호와의 힘을 의뢰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 방법, 곧 앗수르에 조공을 바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18장에서도 이미 감지되었던 바이다.

[히스기야 질병 발병의 시기]

본장은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른 히스기야 왕의 질병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다. 본장 서두에 나오는 ‘그 때에'로 번역된 ‘빠이야밈 하헴'은 문자적으로 ‘그 날들에' 로서, ‘불특정한 어떤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남유다가 앗수르의 침공에서 벗어난 19장 이후의 시점이 아니라, 18장에 나타난 앗수르의 제1차 침공 시기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히스기야의 전통치 기간이 29년이었고(18:2) 그가 병에서 회복한 후 15년간 더 통치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본문의 배경이 되는 히스기야의 발병 연대는 앗수르 군대의 제1차 침공이 있었던 ‘히스기야 왕 14년' (18:13)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또한 왕궁의 창고에 많은 보물이 쌓여 있었던 점 (13절)으로 미루어 볼 때도 이 시기는 구체적으로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전 문과 모든 기등의 금까지 벗겨 조공으로 바친 앗수르의 제1차 침공이 있기 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열왕기를 쓴 역사가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산헤립이 삶의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파멸되는 사건을 보여 주었는데, 여기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 기도한 히스기야가 구원받은 사건을 보여 준다. 산헤립의 생애는 단축되었고, 히스기야 생애는 연장되었다.

Ⅰ. 히스기야에게 병이 들었다.

"그 날에" 즉 앗수르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로 그 해에 있었던 일이다. 왜냐하면 히스기야는 모두 29년을 재위했는데, 15년은 더 살았으므로, 이 해는 그의 재위 14년째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18:13). 어떤 이는, 앗수르 군대가 그 성읍을 포위하고 있거나 혹은 포위를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던 바로 그 때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6절) "내가 그 성읍을 보호하리라" 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후에 반복되었다. 즉 위험이 극도로 임박하게 되었을 때 그 약속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19:34). 다른 이들은 생각하기를, 산헤립의 패망 직후의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평안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원수의 군대를 이기고 한창 승리하는 중에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고, 죽음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떨리는 마음으로 기뻐하여야 한다.

종기 혹은 역병에 대하여 읽을 수 있기 때문에(7절), 히스기야는 역병에 걸렸던 것 같다. 앗수르 사람들을 죽이던 바로 그 질병이 그에게 침입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서 역병을 취하셔서 그의 원수들에게 주셨다. 위대함이나 선함도 쓰리고 치명적인 질병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줄 수는 없다. 어느 누구보다 하늘의 은혜를 입은 히스기야도 병들어 죽게 된다. 그것도 40세 이하의 한창 때에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까지도 그만한 나이 또는 2, 3년 어렸을 적에 죽었기 때문에, 이 병이 자기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히스기야는 더욱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 죽임이 있도다."

💡 1절, ‘병들어 죽게 되매’

직역하면, ‘그는 죽음에 이를 병에 들었다’ → 특히 ‘병들어’란 표현은 부정 과거형으로 이 상태가 이미 확정되어 벗어날 방도가 없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부정적 상황만을 나타내는 표현이라 할 수는 없다. '병들어'에 해당하는 '할라'는 '약하다', '슬프다'라는 일차적 의미 외에도 '간구하다'라는 긍정적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도움을 구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히스기야 역시 죽을 병에 걸림으로써, 앞으로 그가 여호와 앞에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3절). 

Ⅱ. 그에게는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준비하라는 경고가 주어졌다. 그 경고는 이사야를 통해 전달되었다. 앞 장에서는 이사야가 두 번씩이나 히스기야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로 언급되었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 외에 다른 것을 전해 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만족하든 혹은 불만족하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예언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1.그의 병은 죽을 병이다. 그리고 그가 자비의 기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분명히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라고 말했다.

2.그러므로 그는 아주 신속히 죽음을 맞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너는 짐을 처리하라" 라고 말씀했다. 이런 일은 우리가 건강할 때에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 재촉을 받는다. 참회하는 새로운 행위와 신앙과 또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써 마음을 안정시키라. 그리고 이 세상과 즐거이 작별하고 다른 세상을 맞이하라. 그리고 만일 미리 해놓지 못했다면(이것이 최선의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너의 집을 정리하라. 너의 뜻을 정하라. 너의 재산을 정리하라.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로 너의 일들을 정리하라. 이는 너희 뒤에 올 자들의 편안함을 위해서이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그의 왕국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다만 그의 집에 대해서만 말한다. 다윗도, 예언자의 자격을 가지고, 자기를 이어 다스릴 자를 지명할 권위를 가졌지만, 다른 왕들은 자기 왕관을 그들의 소유물이나 재산처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다.

 💡 1절, “너는 집을 처치하라”

직역하면 '너의 집을 위하여 명령하라' → 히스기야가 죽은 후 왕위 계승 쟁탈전이 벌어지지 않도록, 죽기 전에 왕의 권한으로 후계자를 지명하라는 뜻.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직역하면 '왜냐하면' 너는 정녕 죽을 것이고 결코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 있음. 히스기야의 병이 매우 치명적임을 나타내며, 동시에 인간적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적 도움만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암시.
이스라엘에서 왕이 인생의 전성기에 죽을병이 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식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본문에는 직접 나타나지 않지만, 히스기야 역시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사망 통보를 받았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에게 임하였다고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본문은 '신앙적으로 신설한 왕은 장수하고 악한 왕은 단명한다' 내지는 '선한 왕은 복을 받으며 악한 왕은 벌을 받는다'라는 열왕기서의 기본 도식을 벗어나고 있다. 즉 히스기야 왕은 즉위 초기부터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여호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실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18:18;1-8), 통치14년 만에 질병으로 인한 사망을 통보받고 있는 것이다. 히스기야의 형편은 단순히 히스기야 개인의 운명만을 지시하지 않음. 히스기야 발병으로 인한 남유다 대내적 위기 상황과 앗수르 침공으로 인한 남유다의 대외적 위기 상황을 동시에 암묵적으로 반영함. 히스기야 관련 기사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는 본서 일차 독자들에게 그들이 처한 위기 상황을 올바로 인식시키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지침으로서 제공된 것. 

Ⅲ. 이때 그는 기도하였다. "그는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고 했다(2절).

병든 자가 있는가? 기도하게 하라. 그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또 그 자신도 그것을 위해 기도하게 하라. 히스기야는 앞 장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지 않으며 신앙의 기도는 평안의 응답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을 찾을" 것이다. 기도가 응답되는 행복한 경험을 하면, 기도를 계속할 수 있는 약속과 용기를 얻게 된다. 그는 마음 속으로 죽음의 선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운명이 역전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도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려고 하시면, 그는 "이 일을 위해서, 간구하게 할 것이다" (겔 36:37). 우리가 만일 구하지 않거나 혹은 잘못 구한다면 얻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 선고가 역전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기도는 역시 죽음에 대한 최선의 준비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의 은총과 힘을 얻어 우리의 생을 잘 마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할 수 있다.

1.이 기도자의 주위 형편을 살펴 보자.

(1) 그는 침상에 누워서 "벽으로 얼굴을 향했다."

아마 은밀히 기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늘 하던 대로 자기 골방으로 물러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하여 그의 주위에 있는 무리들을 최대한으로 피했다. 우리는 우리가 은밀히 기도하거나 경의와 엄숙한 형식을 갖추어 예배하고 싶은데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그렇다고 기도나 예배를 빠뜨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서 기도와 예배를 드려야 하는 법이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는 얼굴을 성전으로 향하여 돌렸고, 그것은 그가 기도를 하려고 성전에 올라가기를 얼마나 원하였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19:1, 14). 그는 할 수 있다면 성전 안에서나 그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그를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리고 어떤 예배도 "그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 2절, “히스기야가…향하고…기도하여 가로되”

히스기야 왕의 반응
계속적 '와우'의 사용: 이사야 말을 듣자마자 즉시 행동을 취함. → 히스기야는 문제 해결이 오직 여호와께 있음을 알고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해 즉시 하나님께 간곡하게 기도함.
기도 자세: 낯을 벽으로 향함→ '세상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오직 마음을 여호와께로만 향하겠다'라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상징적 행위.
죽음을 목전에 둔 히스기야의 간절함이 담긴 행위이자 그의 단호한 신앙심의 표현.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오직 여호와께만 의지했던 히스기야의 태도는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음을 믿었던 그의 성숙한 신앙을 잘 보여 준다. 

(2) 그는 "심히 울었다."

이 사실을 어떤 이는 그가 죽기 싫어한 것이라고 추단한다. 영과 육의 분리를 다소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나 신약 성서의 성도들과는 달리, 구약 성서의 성도들은 그들에게는 저 세상이 음울하게만 보였다. 그러므로 이 세상 떠나기를 원치 않았다 할지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경우에는 독특한 사정이 있었다. 즉 그는 한창 활동하고 있었고, 훌륭한 개혁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죽는다면 그 사업이 실패로 끝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또 어떤 이의 생각과 같이, 만일 이 사건이 앗수르 군의 격퇴에 앞서 있었다면, 그는 죽기를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왕국이 멸망 받을 위험의 직전에 있었고, 그 때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대를 이은 므낫세는 그 후 3년이 지나서 태어났다. 만일 그가 자식 없이 죽었다면 그의 왕국의 평화와 다윗과의 약속은 위태롭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그것은 그의 안타까움을 표하는 눈물이며 그의 기도 속에 나타난 간절한 애착의 표현에 불과했던 것 같다. 야곱도 눈물로 간구했다. 우리의 복되신 구주께서도 기꺼이 죽으려 하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그리스도)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눈물로 크게 부르짖었다(히 5:7).

히스기야의 기도로 그의 눈물을 해석하자. "그" 기도 속에는, 속박이나 고통을 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일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 3절, “심히 통곡하더라”

이 눈물은 회개나 참회의 눈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런 모습은 그가 하나님 앞에 고하였던 바 그의 진심을 더욱 분명하게 부각시켜 주면서 히스기야가 처한 절망적인 다급함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히스기야가 통곡한 이유를 굳이 따진다면
1.아직 그에게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다.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 받은 후 얻은 아들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왔던 히스기야의 입장에 후사가 없이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큰 형벌로 느껴졌을 것이다.
2.이스라엘에서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졌음.
당시 40세였던 히스기야의 입장에서 한창 나이에 죽는다는 것이 억울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히스기야의 심정은 (사38:10 이하)에 잘 나타남.

히스기야에게 닥친 질병과 죽음에 대한 선지자의 통보: 히스기야 개인만의 운명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다스리는 유다의 불안한 대내적 상황과 위기에 처한 대외적 정세를 암묵적으로 반영함. 앞서 18, 19장에서 앗수르 침공이라는 외부 위기를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그분께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받았다. 외부 위기 뿐 아니라 내부에 닥친 심각한 위기 상황 역시 '기도'를 통해 해결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백성들이 당면한 문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 해결책을 제시함. 

2.기도의 내용을 생각해 보자.

"여호와여! 내가 진실로 주 앞에 행한 것을 기억하소서. 그리하여 나의 생명을 보존하여 나로 그 사업을 계속하게 하시든가, 혹은 나의 일이 마치면 주께서 이와 같이 행한 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그 영광스런 곳으로 나를 영접하소서."

여기에서는 다음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다.

(1) 히스기야의 경건이 표현되어 있다.

그는 세상에서 정직한 의도를 가지고 "나는 주 앞에서, 마치 주의 눈 아래에서, 그리고 언제나 주를 바라보고 행하였다." 그리고 올바른 원리에 입각하여(" 진실로 그리고 진심으로"), 그리고 의로운 법칙으로-" 나는 주 보시기에 선한 것을 행하였나이다." -생활했던 것이다.

(2)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위안을 가졌다.

그 사실이 그의 병상을 편케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성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양심을 증거해 준다면, 그것은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용기와 기쁨을 줄 것이다(고후 1:12).

(3) 그는 그 사실을 하나님께 겸손히 아뢰었다.

"여호와여! 이제 그것을 기억하소서." 그러나 하나님께도 우리가 뭔가를 생각나게 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그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며, 만물을 알고 계신다). 혹은 거기에 대한 보상을 해 줄 책임이 하나님께 있어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한 것도 아니다(자비와 은총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서만 바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계약의 조건으로서의 성실을 내세울 수 있다. 즉 "그것은 주의 손으로 친히 하신 역사이옵니다. 여호와여! 그것을 인정하소서" 라고. 히스기야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지 않았다. "여호와여! 나를 용서하소서. 혹은 여호와여! 나를 취하소서. 그리하여 주의 뜻을 이루소서." 오히려 그는 "여호와여! 나를 기억하소서.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나를 주의 것이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다.

💡 3절, “여호와여 구하오니…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병행구절: 사38:3)

히스기야의 기도의 특징
자화자찬이 아니라 은혜와 믿음의 기도.
히스기야의 기도는 그의 의로운 생활을 드러내는 듯한 호소 때문에 '자화자찬'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율법에 따라 의로운 생활을 요구했던 구약의 기준을 감안할 때 본문의 히스기야의 기도는 오히려 그 기준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이것은 신약의 기준으로 볼 때에도 히스기야 자신의 단순한 공로에 대한 자랑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만일 본문의 기도대로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행하는 삶을 살아왔다면 이러한 그의 삶 자체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 없이는 볼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비록 보잘것없는 자신의 행적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행하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 겸허한 자세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윗과 언약을 상기케 하는 기도(왕상2:4; 11:38)
자신이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맺은 언약 내용을 성실히 수행했던 것을 들어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며 탄원을 올리고 있는 것.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히스기야를 치료하셨다는 6절 말씀은 히스기야의 기도가 다윗 언약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간곡한 기도
구하오니: 원문을 보면 히스기야의 기도의 간곡함이 잘 나타난다. 간절한 기도였음.

철저히 하나님만을 향한 기도.
'여호와여', '주 앞에', '주의 보시기에': 인간의 판단이나 이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에 근거해 자신의 모든 것이 평가받기 원하는 히스기야의 성숙한 신앙적 면모가 잘 드러남.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 보시기에 선을 행한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성실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히스기야의 삶의 모습온 결코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교만함으로 풀이될 수 없다. 물론 아무리 온전한 자라 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부족함이 없을 수는 없다. 아니 인간적 견지에서 아무리 온전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죄인일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 저자가 히스기야의 삶의 자세를 소개하면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견지해야 할 삶외 자세와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와 관련해 다윗 같은 경우도 시편에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시 7:8)라고 기도를 드린 바 있다.  사무엘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다윗 역시도 심각한 범죄와 허물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죄를 범하였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삶의 자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견지해왔기 때문이라 할 수 었다. 

Ⅳ.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이 기도에 즉시 응답하셨다.

그 예언자가 궁정 가운데에도 이르기 전에, 히스기야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가지고 가라는 전갈을 받았다(4, 5절). 즉 그가 회복될 것을 알릴 메시지였다. 하나님께는 "예" 해 놓고 "아니오" 하는 것이 없다. 즉 그가 말한 것을 다시 취소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해서는-그 기도는 하나님이 예지했던 바요 하나님 자신의 영이 그로 하여금 그럴 마음을 주셨던 기도이다-하나님께서 다른 때에는 하려하지 않으셨을 일을 히스기야를 위하여 하셨다. 하나님은 여기서 히스기야를 "내 백성의 주권자" 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원하여 그의 생명을 잠시 동안 연장시킨다는 사실을 뜻한다. 왜냐하면, 전시에는 백성들이 그러한 주권자를 살려 둘 능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 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그가 다윗과 맺은 계약 관계 때문에, 그리고 그가 항상 다윗을 위하여 한 등불을 명하겠다고 한 약속 때문에 그를 살리고자 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이 응답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할 수 있다.

1.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주시하셨고, 그 메시지에다가 그 기도를 언급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영광스럽게 하신 것이다. 그는 메시지에서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고,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도다" 라고 하셨다. 기도 생활을 많이 하고 기도를 특별히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특별히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다.

2.하나님은 그가 기도한 것 이상을 들어 주셨다. 그는 다만 하나님이 자기의 성실을 기억해 주시기를 빌었지만, 하나님은 다음의 것들을 약속하셨다.

(1) 그를 병에서 일으키시겠다는 약속이다. "내가 너를 낫게 하겠다" 고 말씀하셨다. 질병도 하나님이 부리는 종이다. 그들은 그가 보내는 곳으로 가며, 또 그가 송환할 때 온다(마 8:8, 9 절). "너를 치료한 자는 나 여호와니라" (출 15:26).

(2) 그가 감사 기도를 드리기 위해 "3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 갈" 만큼 급속히 건강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마음을 아시되, 그가 얼마나 열렬히 하나님의 전에 거하기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영예가 머물렀던 그 곳을 얼마나 간절히 사모하는지를 아신다. 그리고 그가 회복되면, 즉시 공적 규례에 참여하러 가기 원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병들었을 때는 자기 얼굴을 성전 쪽으로 돌렸고, 그가 회복되었을 때는 성전으로 발걸음을 향하기 위했던 것이다. 다른 아무 것도 그를 보다 더 즐겁게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영혼을 소생케 하소서. 그러면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리이다" 라고 하나님께 약속한다. 그리스도께서 고쳐 주신 그 사람도 그 후 곧 "성전에서 발견" 되었던 것이다(요 5:14).

(3) 그의 생명을 15년을 더 연장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렇다고 그가 노인이 되기까지 살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14년 혹은 15년이 연장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살려고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그의 차용기간이 갱신되었다. 그는 그 기간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가 얼마나 오래 살리라는 것을 미리 예고 받는 사람은 일찍이 아무도 없었다. 틀림없이 이 선한 사람은 그 예고를 잘 선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롭게도 우리에게 우리의 생애 기간을 모르게 하셨으니 그것은 우리로 언제나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4)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에게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다(6절). 히스기야의 마음은 자신의 건강 회복에만 집중되었으므로, 그 약속이 여기서 반복되어진다. 만일 이 사건이 포위 공격이 중지된 후에 있었던 일이라면, 산헤랍의 재규합을 두려워하는 공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말라. 내가 이 성을 보호하겠다" 고 말씀하신다.

 💡 4절, “이사야가 …이르기 전에 … 가라사대”

4-6절: 이사야가 다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히스기야에게 병의 치유와 생명의 연장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구원의 예언까지 전달하는 내용.
이사야 선지자가 왕궁을 채 벗어나지 못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음. →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그만큼 신속했음.
히스기야의 눈물 어린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꿔 놓았음을 더욱 확실하게 부각시켜 주고 있다.

5절,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응답하시면서 그를 '왕'이 아니라 '주권자'로 호칭하심.
주권자: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 뜻을 전달하거나 실천하는 사람, 인도자-지도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들에게 주어진 칭호. (삼상9:16, 10:10초창기 사울/ 삼상 13:14, 삼하5:2 다윗에게 사용됨) → 초기 사울이나 다윗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왕의 반열에 올랐음을 암시.
그가 이렇게 하나님께 인정받는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1) 그가 여호와를 의지하고 2)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며 3)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왕하18:6,7) 본서 저자는 히스기야를 통해 독자들에게 올바른 경건과 신앙의 모본을 제시하고자 함.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과 언약을 맺으셨던 여호와께서 그 누구보다도 히스기야의 기도 내용을 잘 아신다는 뉘앙스를 전달.
'다윗의 하나님'이라는 호칭: 다윗의 후손들의 반복되는 범죄에 도 불구하고 다윗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러한 호칭이 사용된 본문은 여호와께서 이미 히스기야의 죽음을 선고하셨지만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사 그 언약에 부합되게 선하고 진실된 삶을 살아온 히스기야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을 암시한 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히스기야가 이러한 청원을 올러면서 하나님 앞에 심히 통곡하였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목하여 보셨음. 히스기야의 기도의 내용과 자세 모두를 하나님이 면밀히 지켜보셨음을 자세하게 나타내주는 본문은 이후에 히스기야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응답이 은혜적 차원에서 베풀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슬픔을 목도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자기 백성의 슬픔에 인격적으로 반응하 시는 분임.

'들었고'의 '솨마으'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될 경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까지도 포함한다. 여기서는 반대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어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필연적으로 주어질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꾸며낸 거짓 신인 비인격적이고 무능한 열방의 우상들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하나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계 1:14) 땅 끝까지 감찰하시는 분이시고(욥 28:24)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수욕을 감찰하시는 분이다(애 5:1).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들으시고(창 19:21:시 10:17)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며(13:4:요일 5:14,15) 성실함으로 응답하시는 분이다.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방 우상과 구별되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속성 때문이다.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올라가겠고”

'보라 내가' 감탄사로 시작. → 히스기야의 기도틀 들으시고 그의 눈물을 보신 여호와께서 그에 대한 응답을 주시기에 앞서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사용된 것. 치료의 주체가 여호와 자신임을 강조한 것.

또한 '낫게 하리니'-'치료하다'라는 뜻의 동사 '라파'의 능동 분사형으로서, 막연한 미래가 아닌 확실하고 임박한 미래를 나타냄. →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를 근시일 내에 확실히 치료하실 것을 나타낸다.

한편 히스기야가 3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리라는 약속은 그가 3일 안에 완전히 치료된다 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왕이라 할지라도 질병으로 인하여 정결하지 못하면 성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동안 히스기야가 중병으로 언해 성전에 올라가서 행사해야 할 왕의 권한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뜻하며, 이제는 병이 완전히 치료될 것이므로 의식으로 정결하여 다시 왕의 권한과 의무를 행사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는 곧 히스기야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에배의 삶을 회복할 것을 의미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육체적 희복과 영적 회복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침공으로부터 유다를 보호하실 것이라는 의미까지 전달한다(6절).

한편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단순히 병의 치유 뿐만 아니라 이에 결부해서 '네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라는 말씀을 주신 것은 이를 읽는 본서의 일차 독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받아둘여졌을 것. → 즉 하나님의 징계로 바벨론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소망은 바로 나라의 회복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었을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있어 히스기야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와 성전 출입 약속은 그들 자신들도 히스기야와 같이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기도한다면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회복케 하시는 역사틀 경험할 것임을 교훈하는 소망의 메시지로 들렸을 것. 
 💡 6절, “내가 네 날을 십오년을 더할 것이며”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응답: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시겠다는 것 남유다의 백성둘을 앗수르의 손으로부터 보호하시겠다는 것

하나님의 응답은 히스기야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음.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단지 자신을 긍휼히 여겨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하여 앗수르의 군대로부터 남유다를 보호하시겠다는 약속까지 주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구하는 것 외에 필요로 하는 것까지 넘처도록 채워주시는 분이다(엡 3;20). 독자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넘처는 은혜를 체험한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서 더욱더 올바른 왕으로 서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12-15절에 나타난 히 스기야의 어리석은 행동과 앗수르 1차 침공시 조공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히스기야의 불신앙적 자세(18:14-16)는 이러한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러게 된다.

”내가 너와…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국가적 재난까지 해결해주실 것을 약속함.
하나님께서는 앗수르가 남유다를 침공하고 있는 상황, 아니면 준비 상황에서 본문같은 약속을 허락하셨다. 앗수르 1차 침공을 물질로 해결하려고 했던 행동이 여호와 앞에서 얼마나 불신앙적이었는가 확인하게 됨.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서 치유받고 생명을 연장받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을 뿐 아니라 남유다를 반드시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음에도 앗수르 공격에 대해 인간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대하35:25에서는 이런 히스기야의 행동을 '받은 은혜에 보답하지 않은 교만'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함.

즉 본문의 약속은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진실하게 행하였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고 이러한 자세를 견지한다면 그 약속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치료를 경험한 뒤에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자기에게 찾아온 바밸론 사신들에게 나라의 모든 보물을 자랑하는 등 하나님의 도움을 망각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과 동맹을 맺는 불신앙적인 결정을 내린다. 이뿐 아니라 앗수르가 침공하였을 당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거두어들여 앗수르 왕에게 바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이 앗수르로부터의 보호를 분명히 약속 헤 주셨음에도 이에서 떠나 군사력이나 물질 등 세속적인 험을 의지하였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던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하게 행한 히스기야와 남유다에 위험과 재난이 닥친 것은 결코 모순된 것이 아니다. 

Ⅴ. 그의 회복을 위하여 사용되었던 처방을 보자(7절).

이사야는 그의 의사였다. 그는 외과적 처방을 지시했다. 매우 값싸고 쉬운 일을 시켰다. 즉 "그 종처에 무화과 반죽을 놓으라. 그리하면 그 종처가 곪아 머리까지 퍼졌다가, 그 길로 사라지게 되리라" 고 했다. 이것은 그 치료에 무엇인가를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질병이 절정에 달했다가 갑작스레 멈추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 치료는 하나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주의하자.

1.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시험하는 것이 된다.

2.평범하고 일상적인 치료약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시어, 은혜롭게도 그러한 많은 것들이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3.하나님의 약속은 축복이 되며 또 효력이 있다.

 💡 7절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나으니라

무화과 반죽' 에 의한 치료는 오늘날까지도 중기를 치료하기 위한 민간 요법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항생제 역할을 함) 하지만 히스기야의 경우에 있어서는 무화과 나무가 갖고 있는 이러한 고유의 성분으 로 인헤 병이 치유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의 병은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위중하였기 때문이다(1절). 그러므로 이사야가 사용한 '무화과 반죽'은 하나님의 이적을 나타내는 도 구로 사용되었을 뿐(요 9:6), 실제로 그의 치유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히스기야가 죽옴의 문턱에 이르러 회생이 불가능했으나, 하나님의 치유 약속과 그에 따른 이적으로 인해 극적으로 살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남유다의 운명도 여호와 께서 책임지신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할 히스기야가 후에 앗수르에게 재물을 바쳐 나라의 안전을 꾀하려 하는(18:13-16) 등 불신앙적인 면모를 보인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Ⅵ. 그의 신앙을 격려하는 표적이 주어졌다.

1.히스기야는 한 표적을 요구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대한 어떤 불신에서거나 반신반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약속된 내용이 지극히 위대한 일이므로 어떤 확인이 필요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며, 또한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일은 하나님께 늘 있어 왔던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께 표적 구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노했었던가를 기억하고 있었다(사 8:10-12). 히스기야는, 그가 심판의 보좌에나 성문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될 그 표적이 무엇이니까?" 하고 물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는 "시온의 딸의 문들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건강이 회복되기를 원했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2.해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혹은 뒤로 물러갈 것인가 하는 것은 그가 선택해야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보여 주는 표적이었다. 그가 그 두 가지 중에서 더 힘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했다 할지라도, 역시 그 표적은 그의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해 주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예언자의 말은 아마 이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사 45:11). 태양의 변경 각도는 10도였고 그 제안이 있었던 때는 정오였다. 그리고 그 질문은, "해가 아침 7시에 그 자리에서 뒤로 물러 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저녁 5시에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였다.

3.그는 태양이 10도 뒤로 물러 가기를 겸손히 원했다. 왜냐하면 어느 것이든 큰 기적일지라도 태양이 앞으로 나가는 것은 자연스런 방향이고, 뒤로 물러나는 것은 더 기이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히스기야의 "젊음의 날들의 되돌아 옴" 에 대하여 (욥 33:25), 그리고 그의 생명의 날의 연장에 대하여 그것이 더욱 의미 있기 때문이었다. 그 표적은 이사야의 기도에 따라서 이루어졌다(11절). 이사야는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과 명령을 받아 "여호와께 간구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태양을 10도 물러가게 하셨다. 그리고 그 사건은 아하스의 일영표 위의 그림자가 뒤로 물러감으로써 히스기야에게도(그 표적이 그를 위하여 의도되었으므로) 보였다. 아마 침실 창문으로 그가 이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현상이 다른 모든 일영표 위에서도, 심지어 바벨론에서도(대하 32:31) 관찰되었다. 이 태양의 역행 운동이 점진적으로 있었는지 혹은 급작스레 일어났는지, 또 앞으로 나아갈 때와 똑같은 속도로 뒤로 물러가서 하루를 평소보다 열 시간이나 더 길게 했는지, 혹은 그것이 갑자기 뒤로 물러갔다가 잠깐 동안 계속 된 뒤에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게 되어서 천체의 상태에는 전혀 변경이 없었는지(박식한 학자 패트릭 주교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경이로운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을 땅에서는 물론 하늘에서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가지는 관심과, 자기의 선택받은 백성들에 대하여 품고 있는 큰 사랑을 나타낸 것이다. 이교도들의 가장 그럴 듯한 우상은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써 그것은 가장 터무니 없는 허위요 모순이라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왜냐하면 이로써 그들의 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제약을 받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도수의 노래" (Songs of degrees: KJV에는 이렇게 표제가 붙어 있다-역주) 열 다섯편은(시 120편 이하) 태양이 뒤로 물러 갈 때의 일영표 위에 변경된 도수와 히스기야의 생명이 15년 간 연장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수금(竪琴)으로(사 38:20) 노래하도록 히스기야가 선정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라이트푸트는 이들 시편들 중의 많은 부분이 이스라엘의 고통과 구원, 그리고 히스기야의 질병과 회복을 의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 8절, “히스기야가 …이르되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

히스기야가 징조를 구한 것은 어사야의 처유 의식 후 곧바로 종기가 낫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히스기야 가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징조를 구한 것은 그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였음을 암시한다.
병행 구절인 사 38:7.8은 그가 하나님께 정조를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조틀 직접 주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3일 간의 희복의 기간 동안 허스기야가 겪을 심적 불안을 아시고 그에게 징조를 주시기를 기꺼어 허락하셨음을 보여준다.

징조를 구하는 허스기야의 태도를 부각시킨 의도는 무엇인가?
앞으로 있을 히스기야의 행동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히스기야는 스스로 하나님께 구 하여 징표를 확실하게 받았옴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의 1차 침공 때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조공으 로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이것어 곧 얼마나 큰 불신앙적 행동인가를 역설적으로 부각시켜 주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18:14-16). 즉 남유다가 앗수르에 의해 계속적으로 침공당한 사건이 남유다의 왕 히스기야의 불신앙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유다를 포기하시지 않고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인 것이다. 저자의 의도는 포로 상태에 있는 본서의 일차 독자들에게, 비록 이스라엘이 현재는 배도로 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을 당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것이라는 미래의 전망을 제시한다.

징조: 구약 성경에서는 '오트', '모페트'가 나옴
오트: 초자연적 사건이나 특별한 뜻을 나타내는 징표. 본절에서 사용된 단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과 승리의 표징으로 사용된 경우는 기드온 기사, 사울 기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음. 여호수아 시대에 태양이 멈춘 사건이 대표적 경우. 히스기야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중병이 회복되어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초자연적 이적을 보여줄 것을 요구함.

모페트: 미래 일어날 일들에 대한 전조로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해 사용됨.
💡 9절, “해 그림자가 … 나아갈 것이니이까…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히스기야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두 가지 징표 중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요구함. 히스기야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함. 당시 해시계 사용. 히스기야 부친 아하스가 친앗수르 정책을 펼칠 당시 유입된 것. 유다가 앗수르 영향 아래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물.

10절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 물러갈 것이니이다”
히스기야는 확실한 징표를 구하고자 당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그림자가 짧아지는 쪽을 선택함.

11절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본문에서 히스기야의 선친 '아하스'를 언급한 것은 본서 저자의 특별한 의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저자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징표를 얻게 된 일영표가 다름아닌 아하스 왕과 관련 된 일영표란 사실을 부각한다. 남유다의 보호와 관련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사 7:3-7), 아하스가 앗수르를 계속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징표를 구하지 않았던 불신앙적 태도(사 7:11,12)를 상기시키기 위함.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흘러간 과거를 회상케 하거나 아하스만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징표를 받고도 앗수르를 의지했던 히스기야까지 간접적으로 비판하기 위함.

일영표의 십도 후진 이적 사건의 두 가지 의미
1.하나님의 약속의 확증.
지금까지는 유다가 앗수르의 세력권하에서 위협받고 었지만 이후 앗수르 왕의 손에서 히스기야를 구 원하고 예루살렘성을 보호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6절)을 확증→병을 고치신 것처럼 앗수르에게서도 보호하실 것을 암시.
2.히스기야의 불신앙적 단면 지적
하나님의 이러한 기적적인 역사와 보호를 암시하는 표징을 보았음에도 히스기야가 앗수르 일차 침공 당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을 의지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한 사실(18:14-16)을 상기하면서 불신앙적 단면을 지적함. 
💡 1-11절 단락이 가장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주제는 '간구와 응답' 이다(5.11절).

여기서 본서 저자는 남유다의 운명이 다윗의 언약에 근거하되, 왕이나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성실히 기도할 때 개인이나 왕국의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19장에 나타난 히스기야의 기도와 본단락에서 그 응답으로 주어진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및 남유다의 구원 예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19:4.15). 이러한 도식으로 구성된 19.20장의 내용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완전히 멸망하여 이방에 포로로 잡혀간 상태에 있는 본서의 일차 독자들에게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 회복을 간구할 수 있는 근거와 용기를 제공했을 것이다 (스 9장 ; 느 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