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6월 2일 금요일 왕하 21:1-18 유다 왕 므낫세(대하 33:1-20)

Jeehyun 2023. 6. 3. 08:46

맥체인성경읽기

신명기 6, 시편 89, 이사야 34, 요한계시록 4

묵상구절

21:1 므낫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오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21:2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서

21:3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21:4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성전에 제단들을 쌓고

21:5 또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21:6 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

21:7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성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성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성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

21:8 만일 이스라엘이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떠나 유리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하셨으나

21:9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여러 민족보다 더 심하였더라

21:10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여 이르시되

21:11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21:1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21:13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를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

21:14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들을 버려 그들의 원수의 손에 넘긴즉 그들이 모든 원수에게 노략거리와 겁탈거리가 되리니

21:15 이는 애굽에서 나온 그의 조상 때부터 오늘까지 내가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나의 진노를 일으켰음이니라 하셨더라

21:16 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21:17 므낫세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범한 죄는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1:18 므낫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궁궐 동산 곧 웃사의 동산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서론

본서 18-25장은 앗수르에 의한 복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남북 분열 왕국의 역사가 종결되고 남유다만 남은 상황에서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기까지의 열왕들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 이러한 남왕국 단독의 역사는 제13대 왕 히스기야의 사적을 보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히스기야는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18:3)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는(18:5) 극찬을 들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선한 왕이었다. 따라서 그의 사적이 기술된 18-20장에서는 선민 역사의 부흥이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 20:12-21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21에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앗수르에 대적하기 위한 전략으로 바벨론과 동맹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바벨론 왕의 사절단에게 보물고와 군기고와 내탕고 등 주요 시설물들을 공개한 부정적인 사설 또한 볼 수 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이사야 선지자에게 남유다가 바밸론에 의해 멸망당할 것을 선고받는 비극적 역사가 기록된다.
  • 21장
    그런데 본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예언이 금방이라도 성취될 듯한 유다의 급격한 타락상이 소개된다. 즉 본장에는 남유다 제14대 왕 므낫세와 제15대 왕 아몬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모두는 제13대 왕 히스기야와 달리 여호와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열렬히 숭배하며 악정을 펼침으로써 남유다의 멸망을 앞당겼던 것이다.

1.1-9절:

므낫세의 통치를 다루는데 이 부분은 히스기야의 뒤를 어어 유다 왕이 된 므낫세(B.C. 697-642년)의 악정과 극심한 우상 숭배의 범죄를 중점적으로 다룸.

2.10-18절:

이러한 므낫세의 범죄가 여호와의 진노를 격발시켰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 북이스라엘이 당한 멸망과 동일한 정벌을 남유다 역시도 당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예언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므낫세의 악정(열왕기 하 21:1-9)

지난 왕대를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기쁜가! 우리는 영광 중에 있는(즉 순결을 지키어 승리를 차지한) 시온을 보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왕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즐거웠던가!(이사야 33:17 은 히스기야에 관해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그 다음 구절에 나오는 바와 같다. 사 33:20) 예루살렘은 "의로운 도시" 이기 때문에 "하나의 조용한 처소" 였다(사 1:26)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우울한 심정으로 일해야 하고, 불쾌한 땅을 밟아야 하며, 심하게 자동차를 몰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황금이 이토록 흐려지게 되며, 정금이 이토록 변한단 말인가!"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은 더럽혀졌고, 그의 모든 영광과 기쁨이 사라져 지나갔다.

본문의 기록은 모든 점에서 지난 왕대와는 반대가 되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이 왕대의 멸망에 관한 기록이다.

Ⅰ. 므낫세는 어려서 즉위했다. 그는 불과 "12세에 통치하기 시작했다" (1절).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병이 든 후 3년 뒤인 약 42세 때에 그가 태어났다.

만일 그의 아버지에게 므낫세보다 먼저 난 아들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죽었든가 아니면 유망하지 못해서 물러났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서는" 아직 악한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연고로, 그가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악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마도 므낫세가 그렇게 젊은 나이게 왕위에 오른 사실이 그를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그를 변명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손자 요시야는 그보다 더 어려서 왕위에 나아갔으나 그보다 더 잘 행동했기 때문이다.

 💡 므낫세에 대하여

남유다 14대 왕.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가장 긴 기간을 통치함.
이름의 뜻: ‘잊어버리다’(창41:51; 렘23:39)란 의미를 갖는 동사 ‘나솨’에서 유래.
⇒ 이는 첫 자식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위로나 해산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아이 가진 어머니의 기쁨을 반영한 이름으로 볼 수 있다.
⇒ 그러나 본서 독자들에게 있어서 이 이름은 므낫세가 아비 히스기야의 선한 행적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게 한다.

1.그러나 그는 어렸으므로 명예심이 가득했고, 또 자기의 명예를 자랑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매우 지위 높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매우 지혜롭다고 생각했고, 자기 아버지가 행했던 일을 원상태로 돌려 놓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풋내기들이 교만한 마음으로 가슴 부푸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악마의 정죄에 빠지게" 된다.

2.젊었기 때문에, 숨어서 그를 속이려고 기다리는 유혹자에게 쉽게 이끌려 곁길로 나아갔다. 히스기야의 개혁 사업에 원수가 되었었고 옛날 우상 숭배에 애착을 가졌던 자들이 그에게 아첨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자기의 권력을 사용했다. 명예와 재산을 너무 빨리 얻게 되어서 멸망하는 자들이 많다.

Ⅱ. 그는 유다 열왕 중 가장 오랜 기간 55년 동안을 통치했다.

이것이 오랫동안 집권한 왕대로서는 유일하게 극악한 왕대이다. 요람의 통치는 8년에 불과했고, 아하스는 16년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생각에는 므낫세의 통치도 그의 통치 초기 얼마 동안은 그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남긴 길로 계속 나갔을 것이고, 그의 통치 후반기에 가서도 그가 다시 회개한 뒤에는 종교가 다시 흥성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최악의 사태 속에도, 하나님은 정직을 지킨 남은 자를 두셨을 것이다.

그가 비록 오랫동안 통치했지만, 그 기간 중의 얼마간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었다. 이 기간은 그의 통치기간에서 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물론, 그 후에 그가 다시 회개하고 개혁을 시작했기 때문에, 포로 기간도 그의 통치 기간으로 간주되고 있기는 하다.

💡[그의 통치 시기에 관하여] 

20:6의 기록을 참조해 볼 때 히스기야가 하나님으로부터 15년 간의 생명을 연장받았으므로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병에서 나은 지 3년째 되는 해에 태어난 아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는 함정이 있다. 왜냐하면 므낫세 통치 기간인 55년에 해당하는 B.C. 697-642년은 그의 단독 통치 기간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히스기야의 질병 및 치료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데, 20장의 보도대로 므낫세의 부친 히스기야는 병으로 인해 죽음에 직면한 적이 었다. 이 일로 히스기야는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15년 간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다(20:1-7).
따라서 자기의 생명이 언제까지라는 것을 알았던 히스기야는 그의 아들을 지도자로 훈련시키기 위하여 자신과 함께 미리 왕위에 올려 통치 전반을 배우게 하였을 것이다(Edwin R Thiele).

이러한 섭정의 실례들은
유다 제3대 광 아사(B.C. 910-869년)와 제4대 왕 여호사밧(B.C. 872-848년) 계승 과정에서, 제10대 왕인 웃시야(B.C. 791-739년)와 제11대 왕인 요담(B.C 747-731년), 제12대 왕인 아하스 (B.C 731-716년)와 제13대 왕인 히스기야(B.C. 715-687년) 등의 계승 과정에도 있었던 일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므낫세가 10년 정도(B.C. 697-687년)는 아비 허스기야와 공동 통치를 했으며 공동 통치를 시작할 때의 나이가 12세였던 것으로 추정하여, 그가 단독 통치를 시작한 것은 22세 정도이며 그의 출생은 히스기야가 생명 연장을 약속받기 약 7년 전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


[므낫스의 외교정책&장기집권의 배경]

아비 히스기야와의 공동 통치 기간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므낫세가 사상 유례가 없을만큼 오랜 기간을 통치하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고 므낫세가 이처럼 오랜 기간 통치하는 동안 고대 근동의 페권을 쥐고 있었던 앗수르는 산헤립, 에살핫돈, 앗슈르바니팔로 이어지는 최강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앗수르에 대한 므낫세의 외교 정책은 그의 부친 히스기야와는 달리 친앗수르 정책이었다. 므낫세는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이러한 외교 정책을 고수하였고 상대적으로 앗수르는 자신들에게 친화적인 므낫세 정권을 인정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외교적 역학 관계 속에서 므낫세는 전례없이 오랜 기간 동안 통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열왕기 저자의 의도]

하지만 므낫세가 유다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왕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며 결국 유다를 멸망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권이 남복 왕조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를 읽는 이로 하여금 모순을 느끼게 하고 이에 대한 신학적 의문마저 들게 한다.

물론 본장이 단순히 그가 악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평안과 번영이 계속되었음을 기록한 것이라면 이는 열왕기서의 전반적인 내용과도 모순을 형성하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장에 기록된 므낫세 관련 기사는 그가 이 기간 동안 앗수르의 승인하에 평안하고 어려움이 없었다는 보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내용과 상관없이 본장은 ⇒ 기나긴 통치 기간 동안 므낫세가 저지른 심각한 죄의 양상을 서술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다시 말해 가장 극악한 왕이 오랜 기간 동안 통치하며 선조들의 선한 유업들을 파괴하고 백성들을 미혹하였으며 백성들 역시도 이에 동조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과 빼신 성, 심지어 성전까지도 더럽힌 실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긴 악정의 기간은 그만큼 남유다의 영적 오염과 죄악이 누적되었음을 보여주면서 이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 갱신과 희복이 필연적임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므낫세의 악행과 그의 오랜 통치 기간의 관계는 모순되는 사항이 아니라 도리어 독자들로 하여금 더욱 합리적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파멸당한 신학적 이유를 확연하게 인식하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역대기 기자의 보도]

한편 본서에서는 므낫세의 죄악만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본서와 병행되는 역대기에서는 그가 친앗수르 정책을 펼치다가가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였고 그 결과 그가 앗수르 왕의 군대 장관에 의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징계를 받은 이후 므낫세는 회개하였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였을 뿐 아니라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종교 개혁까지 단행하였옴을 기록하고 있다(대하 33:1-20).

이러한 역대기의 기록은 그가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고 앗수르를 의지한 것이 결국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무가치한 것임을 부각시켜 줌과 동시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만이 진정한 부흥과 회복의 길임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열왕기서의 내용을 통해 살펴본 이상의 내용과 이와 병행 문구로 기록된 역대기의 내용을 통해서 므낫세의 사적을 재정리해 보면 중요한 신학적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므낫세의 일대기가 남유다의 영적 실상과 현주소 그리고 희복을 위해 필요한 과제가 무엇인가를 암묵적으로 반영해 준다는 것이다. 열왕기에 나타난 극악한 므낫세의 일대기는 부왕 히스기야의 선한 영향력 아래 자라서 10여년을 섬정하는 등 선한 길을 걸을 수 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지만 이와는 정반대의 악한 길로 들어서서 반역과 죄악을 일삼는 것으로 그 시작과 전개를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므낫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

역대기 저자는 이것이 반전의 계기가 되어 므낫세가 그간에 저지른 사악한 죄악에서 돌이켜 회개하였음을 보도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므낫세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신정 통치를 회복하려 하였다는 것으로 므낫세의 사적을 마무리 짓는다.

이러한 므낫세의 일대기에 관한 열왕기 기자와 역대기 기자의 보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남유다의 역사적 현실을 함축적으로 반영해 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즉 남유다는 본래 하나님의 은혜와 측복 속에 세움을 입어 의로운 길을 가야 하고 그럴 수 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 길에서 신속히 떠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행을 저지르며 하나님을 격노케 한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고 결국 그들이 의지하는 헛된 것으로 인해 징계를 받아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진노와 책벌의 현장에서 회개하며 회복을 간구함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희복되어 다시금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이러한 일치를 감안할 때 므낫세의 기사를 읽는 독자들인 — 포로기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은 므낫세를 통해서 자신들의 죄와 어두움의 단면을 다시금 볼 수 있었을 것이며 이에 대한 신앙적 각성과 함께 회복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1절, “그 모친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남유다 왕의 즉위 공식 문구'의 첫부분에서 거의 대부분 언급되고 있는 왕의 모친에 대한 소개 → 다윗의 직계 혈통을 이어받은 남유다 왕조의 혈통적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저자의 관심.

‘헵시바’ 이름의 의미.
‘기쁨(사44:28)을 의미하는 명사에서 유래, ‘나는 그녀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나의 기쁨은 그녀에게 있다’란 의미. 이는 아이를 가진 가족의 기쁨을 표현한 이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헵시바’ 란 이름은 이사야서에서 장차 재건될 예루살렘성을 지청하는 이롬으로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사 62:4). 

Ⅲ. 그는 매우 악정을 했다.

1.전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는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그리고 그는 교육을 잘 받았으므로, 자기가 그러하다는 사실을 필경 알았을 것이다(2절).

 💡 ‘여호와 보시기에’ (빼에네 예흐와)

의미: ‘여호와의 눈 안에’,
여기서 ‘눈’ = 판단력을 의미함. 따라서 ‘빼에네 에흐와'는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에'란 의미. ‘여호와 보시기에'란 이 표현은 열왕기에서 각 왕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부의 측적과 같은 경제적 측면이나 전쟁에서의 승리와 같은 군사적 측면에 있지 않고 왕들이 취하는 신앙적 노선과 종교적 정책 등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따른 것임을 부각. 

"그는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많은 악을 행했다." 마치 그가 하나님을 자극시켜 노하게 만들려는 목적에서 고의로 그렇게 행하듯 했다(6절).

(2) 그는 "이방인의 가중한 것들을 좇아 행했다" (2절).

그리고 우상 숭배 때문에 가나안 제 민족과 아합의 집이 멸망한 것을 보고도 경고로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여호와께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다." 거룩한 자손이 타락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가장 악한 자들보다 더 심하게 타락된다.

💡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본문의 표현은 16:3에서 아하스의 범죄 행위를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16:3에서는 ‘케토아보트 학고임'이 인간 희생의 제사로 자기 아둘을 불로 태워 신에게 바처는 것과 관련된 ‘몰렉의 제사' 행위에 국한되어 사용된 데 반해, 본문에서는 3-7절에 자세하게 묘사된 므낫세의 수많은 종교적 범죄 가운데 이방인과 관계된 다양한 범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본문을 직역하면, ‘가증한 일들같이’
⇒ 이는 유다의 종교적 범죄가 우상 숭배자인 이방 사람들의 범죄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는 므낫세 통치하의 유다의 영적 현실을 고발하는 것으로 본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여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악을 자행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히스기야의 죽음 이후 남유다의 영적 상태]
실제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남유다를 통치하였던 히스기야가 죽은 후 남유다는 민족적 정체성과 신앙적 정체성을 잃고 앗수르의 정치, 종교, 문화에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였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이방 우상을 받아들였는데, ⇒ 이는 므낫세의 55년 간의 통치 기간 동안 친앗수르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악행에 대한 고발은 이전에 가나안 땅에서 악행을 저지름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에 의해 그 땅에서 쫓겨났던 가나안 족속들의 운명을 상기시켜 준다.
⇒ 즉 본서 저자는 이러한 유다의 죄악된 행실들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보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남유다 역시도 그들 자신들이 멸하고 쫓아냈던 가나안 족속들의 운명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에 처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2.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 3-7절
므낫세가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극악한 우상 숭배 행위들을 일일이 제시하며, 여호와께 대적하여 행한 악행을 4가지로 제시함. 이러한 므낫세의 악행은 그의 부친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의 시도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고 말았다. 

(1) 그는 "자기 아버지가 파괴했던 산당들을 재건했다" (3절).

그는 유덕한 아버지의 시체를 짓밟고, 아버지의 기념물을 모독했다. 그러나 그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으며, 사람들에게서 얼마나 큰 존경을 받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랍사게와 기분이 일치했던 것 같다(18:22). 즉 히스기야가 산당을 파괴한 것은 잘못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산당을 재건하면서 하나님의 명예와 백성들의 편익 및 교화를 구실 삼았다. 이렇게 시작을 했으나, 그는 훨씬 더 나쁜 것에까지 나아갔다.

 💡 가장 먼저는 부친 히스기야가 철폐한 ‘산당'을 다시 세웠음을 언급하고 있다.

‘다시 세우고’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 돌이켰고, 그리고 그는 세웠다’ (계속적 와우, 미완료형 동사의 나열)
= 그가 즉위하자마자 열심히 이 일을 했다는 뉘앙스를 전달.
⇒ 이때 므낫세는 산당을 일시에 일으킨 것이 아니라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끊임없이 세워나갔을 것.

[’산당'을 세운 사건이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은]
⇒ 산당 철폐 유무가 왕들의 종교 정책을 가늠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유다의 역사에서 산당에 대한 왕들의 정책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

1.산당을 세우는 경우.
남왕국의 왕들 가운데 르호보암(왕상14:22)과 본문의 므낫세가 그 대표적 인물.

2.기존에 존재하였던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경우.
남유다에서는 통치 전반에 있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왕상 22:43) 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일로 인해 온전히 선한 왕으로는 평가받지 못한 왕이 몇있다.
이처럼 산당과 관련된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부분적으로 부경적 평가를 받은 대표적인 왕으로는 아사(왕상 15:11), 여호사밧(왕상 22:43), 요아스(12:2.3), 아사랴(15:3), 요담(15:34) 등.

3.산당을 제거한 경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는(18:3; 22:2)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기존의 산당까지 헐어버린 왕들. 전장의 히스기야(18:3; 22:3)와 본장 이후 나오는 요시야(22:2)가 그 대표적 인물. 이들 양자는 단호하고 철저한 종교 개혁을 일으킨 왕으로 평가받는다.

히스기야 ↔ 므낫세
본문에 나오는 므낫세의 아버지 히스기야는 산당을 헐어버림으로써 선한 왕으로 평가받는 반면 그 아들 므낫세는 아비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는 죄악을 범했다. 이는 아비 히스기야의 중교 개혁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결정적인 죄악이었다. 즉 므낫세는 유다의 도처에 산당을 세움으로써 부왕 히스기야가 개혁을 통해 추구하였던 바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제사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따라서 본문에서 제시되고 있는 므낫세의 ‘산당 재건 사건'은 단순히 과거로의 희귀만이 아니라 히스기야가 시도한 종교 개혁의 전면적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 그는 다른 신들도 세웠다.

즉 바알과 아스다롯(이것을 KJV는 "숲" 으로 번역했다. 역주) 그리고 해, 달, 다른 유성들과 성좌들의 우상을 세운 것이다. 그는 이것들을 예배하고 섬겼으며(3절), 그가 만든 우상들에게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에게서 도움을 기원했다. 그가 이것들을 위해 제단을 세우고, 그 제단 위에다 희생 제물을 드렸을 것은 틀림없다.

 💡 본문은 므낫세가 여호와께 대적하여 행한 악행의 두번째로, 바알과 아세라 및 천체를 숭배한 사실을 언급.

특히 그의 이런 행위가 남복 왕조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사악한 우상 숭배자로 여겨지는 북이스라엘 제7대 왕 ‘아합'과 비교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범죄 행위가 우상을 숭배하고 자녀를 불사롬으로써 악한 왕으로 평가받았던 남왕국 제 12대 왕 아하스 (16:1-20)보다 더 극악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즉 16:3에서 아하스의 행위는 ‘이스라엘 열왕'과 비교되고 있지만 본문에서 므낫세는 보다 구체적으로 북왕국에 우상 숭배를 만연시켰으며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는 ‘아합'과 비교되면서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

1.‘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음’,
2.‘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음’
3.‘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김’

(3) 그는 "자기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들들을 몰록에게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것은, 그 아들들이 하나님에게 바쳐졌다는 표시인 할례에 대한 경멸을 뜻한다.

(4) 그는 마귀에게서 신탁을 받았다. 그리고 우림과 예언을 멸시하여 그 "마술을 사용했고 사술(邪術)을 행했다" (6절). 그것은 사울의 행동과 같았다. 마술사들과 점쟁이들(별들 혹은 구름들, 길일과 불행한 날, 행운과 불운, 새들의 비상, 혹은 짐승들의 꼬리로써 장차 올 일들을 예언하는 것처럼 꾸미는 자들이다)은 그와 그의 친족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위대한 인물들로 등장했다. 그들의 재주가 그의 몽상을 즐겁게 했고, 그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그의 고문들은 그들의 지시를 받았다.

(5) 우리는 그 후에(16절) 그가 무죄한 피를 매우 많이 흘려 자신의 욕망과 보복을 만족시켰음을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은 몰래 살해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미명으로 처치되었던 것 같다. 그가 피를 흘린 많은 사람들은, 아마 우상 숭배를 반대하여 그것을 죄악시하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으려던 자들이었던 것 같다. "예언자들의 피" 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예루살렘에 채워진다. 그리고 아마 그는 많은 예언자들을 처형했던 것 같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예언자 이사야를 산산조각으로 톱질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이것을 히브리서 11장 37절에서 언급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보면, 그렇게 고생한 자들에 관한 말이 나온다.

3.므낫세의 우상 숭배를 더욱 악한 행위로 만드는 세 가지 사건이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1) 그는 자기의 우상들과 재단들을 "여호와의 전 안에다" (4절) 세웠다.

 💡 4절, 여호와를 대적하는 우상 숭배와 관련된 범죄로, 그가 여호와 종교를 의도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여호와의 전에 이방신을 위한 제단을 쌓았음.

므낫세로 인하여 남유다에 만연된 우상 숭배 행위가 급기야는 성전까지도 오염시킬 정도로 심각하여졌음. 본문에 나타난 이러한 므낫세의 우상 숭배 행위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여호와를 심하게 모독하는 대적 행위였다. 이는 여호와 종교와 이방 종교를 혼합하여 유일신 하나님의 권위를 상대화시키는 범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 거룩히 구별된 성전을 우상의 전각으로 전락시키는 추악한 범죄 행위라 할 수 있다.

제단
원래 여호와의 전 에는 성소에 향단이 있고 성전 뜰에 번제단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단수로 표기된다는 점에서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한 단이 거기 있어야 하고 그 외의 단은 예배의 유일한 대상인 하나님과 관련해 결코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러한 단과 구별되는 복수의 단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므낫세에 의해 장려되고 점점 성행하였던 우상 숭배의 단들이었다. 성전이 본래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이방인들이 섬기는 여러 다른 신들을 모시는 만신전이 되고 말았음. 
 💡 5절,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므낫세의 세번째 범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
므낫세가 성전에 여러 우상의 제단들을 쌓았는데, 특히 성전의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기는 단까지 세웠음을 고발하는 내용.

일월성신을 위한 단을 언급하는 이유
우상 숭배로 성전 뜰까지 더럽혀진 암울한 현실을 지적
유일하신 여호와의 전에 우상 숭배틀 위한 단을 쌓은 것으로서 그가 종교 혼합주의 정책을 펼쳤음을 의미

므낫세는 왜 이렇게 했을까?
그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과거 자신의 조상둘이 믿었던 신으로 이방의 다른 신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신에 불과했던 것. 따라서 그는 하나님보다 우월하게 여겨지는 이방인들의 여러 종교들을 도입하였는데 이는 여러 신들의 힘을 빌어서라도 유다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월성신 숭배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이나 앗수르의 승배 의식을 본따 들여온 것이었으며, 다른 대상보다 더 집중적으로 숭배되었기 때문에 성전 뜰에까지 그것을 섬기는 단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 6절, 또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앞서 언급된 우상 숭배와 관련한 므낫세의 세 가지 범죄
즉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운 범죄(3a절),
아합의 행위를 본받아 바알과 아세라와 천체를 숭배한 범죄(3b절),
성전에 우상 승배의 단을 쌓은 범죄(4.5.7a절)에 이어
네번째로 자식을 불 가운데 지나게 하며 각종 미신을 행하는 자들을 신임한 범죄를 지적한다.

암몬 사람둘의 국가 신으로 밀곰, 말감으로 알려진 몰렉 종교의 인신 제사 제의
몰렉: 베니게인듈의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으로 불과 번개, 그리 고 전쟁과 관련하여 주로 등장한다.
몰렉 숭배자들은 전쟁이나 재난이 이 신의 노여움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자녀들을 몰렉 신에게 인신제물로 바치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불

행하게도 이러한 잔인 무도한 이교적 제의가 아합, 아하스, 므낫세 같은 남,북왕국의 왕들에 의해서 신정 왕국 이스라엘에서도 자행되었던 것 특히 남유다의 아하스와 므낫세 시대에는 희생 제물을 태우기 위해서 만든 거대한 화장용 제단인 도벳이 세워짐. 힌놈 골짜기에서는 몰랙 숭배가 공공연히 행해짐.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제사 드리기에 앞서 제물이 될 자식을 불로 정화하는 의식을 묘사한 것. 그 후에 제단에서 살륙이 행해졌을 것.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여러 제의 가운데서도 몰렉 제사는 인간들이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맹목적으로 무죄한 자의 피를 홀러는 가장 사악한 종교 의식이었다.

남유다의 므낫세 왕 때에 이런 몰렉 제사가 행해졌다는 것은 당시 종교적 타락상이 극에 다 달았음 을 반영.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고 우상 숭배에 힘쓰다가 멸망한 사건을 목도하고서도 이러한 동족의 역사에서 교훈을 받지 못하고 북이스라엘보다 오히 려 더 사악한 우상 숭배에 빠져 이에 몰두하는 므낫세의 악행에 대한 묘사는 북이스라엘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이 남유다에도 내려질 것을 에감하게 한다. → 남유다 멸망의 필연성을 보여줌.

'점치며…박수를 신임하여'

므낫세 통치 시대에 사람들을 사로잠았던 각종 이교 제의들 소개
점치며: 주술 행위로서 미래 운명 및 길흉을 판단하는 행위.
사술을 행하여: 속임수를 통해 사람을 미흑 하는 전반적인 미신 행위
신접한 자: 접신술을 하는 사람, 즉 죽은 자와 교통하는 자를 가리킴.
박수: 남자 무당

신18:11-14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러한 거짓 이교 술사들이 이스라엘 내에 거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므낫세가 이런 자들과 가까이한 것은 그가 하나님 을 떠나 이방 종교에 심취하였음을 보여준다. 므낫세는 여호와를 의뢰하기보다는 이교 술사들을 의지하였고 문제가 있을 때 이들과 상담하였던 것이다.

여호와 보시기에…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앞선 2절에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와 서로 대응하는 구문
이미 보도한 므낫세 왕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구체화시켜 설명하고 있는 3-7절 중반부에 삽입됨으로써 므낫세의 죄악을 한 번 더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진노를 격발
므낫세가 행한 죄악들에 대해 여호와께서 관망하고만 계시지 않고 그의 죄악에 대해 진노로써 반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냄.

진노를 격발하였으며(레하크이쓰): 전치사 '레' + '카아쓰'(불쾌하다, 침울하다) -사역형으로 쓰이면 '초조하게 하다, 애타게 하다, 슬프게 하다' 등 감정 상태를 나타내고 더 나아가 '화나게 하다', '동요시키다', '분발시키다' 등의 의미까지 나타냄.

이는 므낫세와 유다 백성의 악행이 하나님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였는지를 반영해 줌과 동시에 그것에 대해 이후 하나님이 특별한 행동을 취하실 것임을 효과적으로 도러내주는 표현.
이후 남유다에 이루어질 심판은 차치하고라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 백성둘에 대해서 애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와 그둘이 범하는 죄악에 대하여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시는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과 아무런 언약 관계를 가지지 않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악을 행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표현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대개 악인들이나 하나님과 무관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을 행할 경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시 바로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심으로' 본래 행한 죄악을 따라 완전한 파멸에 이르게 하시든지 (출 4:21;신 2:30:롬 9:18), 아니면 그들을 비웃으시며(시 2:4) 그들에게 '분'과 '진노'를 발하사(시2:5) 그 진노하심대로 그들을 철저히 파멸에 던지시는 것(시 2:9;슥 1:15)으로 반응하신다. 따라서 본서 저자는 이러한 '카아쓰' 동사를 통해 단순히 므낫세와 남유다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와 그 결과로 임할 심판의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언약 백성이 범하는 무수한 범죄로 인해 근심하고 애타하며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을 더욱 강렬하게 묘사헤 주고 있다 할 수 있다. 

"내가 여기에(성전에) 내 이름을 두겠다" (7절)고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성전 두 마당 안에다가 세웠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스렸고, 무례하게도 하나님의 대적들을 하나님 눈 아래 둠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하였다. 그는 마치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악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처럼 행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위해 성별된 것들을 모독했다.

그는 사실상 하나님을 그의 집에서 쫓아내었고,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들에게 그 전을 소유하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한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자기들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지명해 준 곳에 나아갔을 때, 그들은 큰 비애와 두려움을 느꼈다. 다른 우상들이 그들의 번제를 받으려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곳에다가 당신의 이름을 기록하시고, 영원히 그 이름을 거기에 두시겠다고 말씀하셨었다. 따라서 그 이름은 거기에 보존되어 왔고, 우상의 재단들은 거기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므낫세가 하나님의 전 안으로 우상의 제단들을 가져 옴으로써, 성전의 주인은 바뀌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게 되었다.

💡 7절, 또…아세라 목상을…세웠더라

이미 므낫세의 악행이 나오고 그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이 나왔는데, 왜 굳이 또 므낫세의 악행을 언급할까?
진노('카아쓰') 동사의 의미와 관련해서 이해하면 의미가 분명해진다. 즉, 이 동사는 하나님이 므낫세와 남유다의 우상 숭배 범죄에 대하여 그토록 슬퍼하며 애타하실 뿐 아니라 이에 대하여 격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우상 숭배 범죄를 자행한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 므낫세의 범죄가 돌이킬 수조차 없는 정도에 이르렀음을 강조하기 위한 본서 저자의 의도적 표현

아세라 목상을 성전 안에 두었다는 것은…
므낫세가 의도적으로 여호와 신앙과 아세라 신앙을 혼합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종교 혼합주의적 양상은 유다의 악한 왕으로 평가받았던 아하스 시대에도 나타난 바 있다(16:11-14). 따라서 본문의 보도는 므낫세를 중심으로 당시 유다 사희가 과거 아하스 시대처럼 극심하게 종교적으로 타락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2) 이로써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계약을 크게 경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이름을 두신 그 백성들을 보여 준 은총을 살펴 보라-" 그들이 그 좋은 땅에서 떠나 결코 유리하지 않게 하리라" 고 하셨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그리고 "만일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켜 행하면" 하고 그들에게 대해 가졌던 하나님의 정당한 기대(7, 8절)를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이렇듯 행복한 조건의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백성이 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예상하는 정정당당한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9절). 그들은 하나님의 계율이나 약속에 따라서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계율도 약속도 모두 저버렸다.

💡 7절, 옛적에…이르시기를…영원히 둘지라

3-7a절: 므낫세의 우상 숭배 범죄에 관한 구체적 사례를 기록
7b-9절: 성전을 통한 여호와의 축복 약속과 므낫세 시대의 성전 모독 현실을 대조함으로써 므낫세의 범죄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부분
즉 여호와께서 다윗(삼하 7:13)과 솔로몬(왕상 9:3)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을 본문과 8절에 이어 기록하여 이를 므낫세 시대의 백성둘의 죄악된 현실을 보도하는 9절과 비교하게 함으로써 므낫세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
'이름': 한 개인의 인격을 드러내주거나 반영해 주는 것, 말하자면 제2의 자아.
여호와의 이름: 실제적인 여호와의 현존을 의미.
→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는 말씀은 즉 여호와께서 '성전'과 '예루살렘'에 영원히 현존해 계신다는 의미로 이해됨. 성전과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 이해되는 신성한 곳이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남유다의 왕이 더러운 이방 우상을 거록한 성전에 끌어들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였으니 이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범죄임. 
오늘날의 성경 구분법에서 열왕기서는 역사서에 해당하지만 이와는 달리 히브리 성경의 구 분법을 따르면 열왕기서는 전기 예언서에 해당한다. 이러한 명청이 내포하는 의미와 같이 열왕기 서는 그 자체에 에언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열왕기서의 특징과 관련해 지금까지 살펴 본 본장 2-7절은 본서를 읽는 독자들과 성전에 장차 이루어질 궁극적인 운명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솔로몬 당시 성전이 처옴 지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지어 봉헌한 성전을 받 으시고 이에 대하여 측복과 약속의 말씀을 허락하여 주셨다(왕상 9:3-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측복의 말씀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다윗의 후손들과 그 백성들이 악을 행할 경우 내릴 징계의 말씀까지 예고하셨다.

그 중에 가장 비극적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다른 신들을 섬길 경우에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요 내 이틈을 위하여 내 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러리니"(왕상 9:6)
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볼 때 본서를 읽는 일차 독자들은 이미 이러한 심각한 재난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준 땅에서 끊어져서 이방 땅에 사로잠혀 와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과 임재의 상징이었던 성전마저도 이방인에 의해 파괴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비극 속에 처해 있는 그들에게 므낫세가 저지른 악행들 즉 그가 예루살렘과 성전에서 범한 심각한 범죄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과 관련해 분명한 신학적 해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즉 자신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이방 땅에서 포로 가 된 사실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이 불경건한 이방인의 손에 의해 훼파된 현실도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경고와 에언의 말씀을 무시한 결과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3) 이것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꾀여서 그들을 타락시키고 우상 숭배로 그들을 끌어들였다(9절). 그는 유다를 범죄케 했다(11절). 그것은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그가 보인 본이 무사려한 백성들 대다수를 타락시키기에 충분하였고, 그들은 옳든 그르든 자기들의 왕이 행하는 대로 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승진을 목표로 한 모든 사람들은 궁실이 행하는 대로 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왕의 행실을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왕을 적으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럭저럭 그 거룩한 도성은 사창가와 같이 되었다. 바로 므낫세가 그 도성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자기들도 물론 사악하고 남들까지도 악해지도록 조장하는 자들에게도 구실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성전에) 내 이름을 두겠다" (7절)고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성전 두 마당 안에다가 세웠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스렸고, 무례하게도 하나님의 대적들을 하나님 눈 아래 둠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하였다. 그는 마치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악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처럼 행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위해 성별된 것들을 모독했다.

그는 사실상 하나님을 그의 집에서 쫓아내었고,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들에게 그 전을 소유하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한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자기들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지명해 준 곳에 나아갔을 때, 그들은 큰 비애와 두려움을 느꼈다. 다른 우상들이 그들의 번제를 받으려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곳에다가 당신의 이름을 기록하시고, 영원히 그 이름을 거기에 두시겠다고 말씀하셨었다. 따라서 그 이름은 거기에 보존되어 왔고, 우상의 재단들은 거기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므낫세가 하나님의 전 안으로 우상의 제단들을 가져 옴으로써, 성전의 주인은 바뀌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게 되었다.

(2) 이로써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계약을 크게 경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이름을 두신 그 백성들을 보여 준 은총을 살펴 보라-" 그들이 그 좋은 땅에서 떠나 결코 유리하지 않게 하리라" 고 하셨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그리고 "만일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켜 행하면" 하고 그들에게 대해 가졌던 하나님의 정당한 기대(7, 8절)를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이렇듯 행복한 조건의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백성이 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예상하는 정정당당한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9절). 그들은 하나님의 계율이나 약속에 따라서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계율도 약속도 모두 저버렸다.

 💡 8절, 만일…다시는…떠나나 유리하지 않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둘에게 율법을 수여하실 때 함께 주신 측복의 약속을 회상시키고 있다(신 4:25-27). 이 말씀은 율범 수여 당시 뿐만 아니라 그 후에 이스라엘 의 가나안 정복시 다시 확인되었고(삼하 7:10),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영구적인 하나님의 인도하 심과 보호하심을 받을 수 었는 조건으로 계속 반복되어 주어지고 었다(창 26:5;출 15:26; 20:6 ;레 26:3 ;요 14:15-23).

이런 반복적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은 별개의 사실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양식과 같으며 따라서 율법을 떠난 백성은 곧 그의 백성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 것임을 본문은 암시한다. 더 나아가 본문은 율법 준수가 곧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거주 여부와 직결되어 있옴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본문의 보도는 이미 율법을 떠나서 이방인처럼 행동하는 유다가 더지 않아 궁극적으로 멸망할 것임을 염두에 둔 표현으 로 볼 수 있다.

'유리하다'(누드): 지향점 없이 불안정하게게 움직이는 물리적 동작을 가리킴. 사람에게 적용될 경우 '도망하다'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의미.이 단어는 단순 도망이 아니라 '도망하여 거처할 곳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상태'를 말함. 또한 '누드'는 탄식, 슬퍼함, 통곡, 애통하다는 의미를 포함함. → 도망하며 정처없이 방황할 때 느끼는 비탄의 감정과 관련 깊음. 따라서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올바로 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주신 땅에 서 안전하게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땅에서 쫓겨나 방황하는 가련한 신세가 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처럼 물리적 의미 뿐만 아니라 심러적 의미도 지니는 *누드'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3) 이것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꾀여서 그들을 타락시키고 우상 숭배로 그들을 끌어들였다(9절). 그는 유다를 범죄케 했다(11절). 그것은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그가 보인 본이 무사려한 백성들 대다수를 타락시키기에 충분하였고, 그들은 옳든 그르든 자기들의 왕이 행하는 대로 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승진을 목표로 한 모든 사람들은 궁실이 행하는 대로 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왕의 행실을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왕을 적으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럭저럭 그 거룩한 도성은 사창가와 같이 되었다. 바로 므낫세가 그 도성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자기들도 물론 사악하고 남들까지도 악해지도록 조장하는 자들에게도 구실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 9절,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앞선 7b,8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근거한 축복의 약속을 상기시켜, 이 축복을 현실 가운데 누릴 수 있는 여부는 '바로 하나님 말씀의 준수 여부와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본절 서두는 앞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웰로'로 시작됨. 즉, 7,8절의 하나님의 약속을 유다 백성들이 전면적으로 거절해 왔음을 보여 준다.
이 백성: 율법을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부르실 때 사용되는 표현.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행한 것이…더욱 심하였더라

유다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저버리게 된 원인: 므낫세의 꾀임에 있음. 그 결과 유다 타락상이 이전에 그 땅에 거주하던 가나안 족속들보다 더욱 심하였음을 보여준다. 가나안 거민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명령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우상 숭배라는 죄악을 저질렀다. 유다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께 율법과 계시를 받고 선지자를 통한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의 죄악을 저질렀음을 지적한 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큰 죄인줄 알면서 불순종했으니 그 죄가 열방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 과거 열방이 그들의 죄로 인해 멸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남유다 역시 우상 숭배 등 죄악으로 인해 멸망할 것이 확실함을 우회적으로 나타냄. 

●므낫세의 멸망 예고(열왕기 하 21:10-18)

💡 10-15절: 여호와께서 므낫세에게 내린 심판의 말씀.

10절: 심판의 말씀이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짐.
11절: 심판의 이유를 밝힘.
12절-14절: 심판의 선언-남유다가 멸망할 것을 밝힘.
15절: 다시 한 번 심판의 이유를 요약하는 내용.

10절, '여호와께서…가라사대'

이어지는 내용이 여호와의 메시지임을 나타내는 전형적 표현.
11-15절 말씀이 인간 선지자 입을 통해 선포되었지만 그것이 여호와로부터 나온 말씀임을 확증함.
므낫세 통치 기간 동안 어떤 선지자가 활동했는지는 나타나지 않음. 왜?
16절에 나타난 '무죄한 자의 피'에서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즉, 므낫세는 자신의 정책과 이방신 숭배를 위해 여호와를 믿는 경건한 자들과 선지자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의 시대에 선지자의 활동이 현저히 위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종 모든 선지자들로 말씀하여': 그렇지만 므낫세 때에도 익명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여전히 예언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이 나와 있다. 이것은 매우 우울한 운명이다. 먼저 예언자들이 보내어졌다. 그것은 그들이 백성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치고,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어 그 의무에 열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예언자들의 그 다음 과업은 죄를 책망하고 그들 앞에 폭로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개혁하고 그들의 의무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만일 이것이 성공하지 못하여 죄인들이 계속 앞으로만 나아간다면, 그들의 다음 과업은,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의식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을 각성시켜 회개케 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때가 되면, 그 심판이 시행되어 그들에게 예언한 예언자들의 거룩한 사명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그 예언자들은 그들을 교사로 영접하거나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재판관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할 수 있다.

Ⅰ. 범죄 사실의 열거. 심판의 기초가 된 고소문이 읽혀진다(11절).

므낫세는 보다 나은 일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자신도 사악하게 행했다. 그는 아모리 사람들까지도 옳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의 본을 따랐고, 결국 그들보다 더욱 불경스러운 일을 했다. 또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시켰고, 그는 그들에게 죄를 가르쳤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했다. 그리고(그것도 물론 악했다 할지라도) 그 외에도 "그는 무죄한 피로 예루살렘을 가득하게 했다" (16절). 예루살렘 도성의 곳곳에서 그의 살인을 증가시켰고, 마침내 피 흘림의 죄악은 예루살렘에 한도까지 이르게 되었다(마 23:32). 이 모든 행위는 왕 중의 왕의 위엄과 왕관, 그리고 그의 나라의 평화를 거역하는 짓이요, 그러한 경우를 위해 만들어 놓은 모든 법규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 11절, '유다 왕 므낫세가 … 악을 행함이…더욱 심하였고'

심판의 이유를 밝히는 부분인데, 므낫세 죄악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지적해줌.
유다 백성들의 죄를 조장했던 므낫세의 죄의 정도를 이방인 중 아모리 사람의 죄악된 행위와 비교하여 언급하면서 므낫세의 행위가 '아모리 사람의 행위'보다 더 악했음을 보도.
아모리 사람: 가나안 원주민 가운데 한 민족. 우상 숭배와 가증하고 포악한 행습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가나안 땅에서서 쫓겨난 산지 거민. 아모리 사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했던 모든 족속들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사용됨.

'또…범죄케 하였도다'

범죄케 하였도다: 와우 접속사 + '하타'의 사역 능동형 결합.
하타: 죄를 짓다, 죄를 발생시키다.
이 동사가 기본형으로 사용되면 목적어는 주로 하나님이나 그분의 율법이 된다. 행위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조건들을 준수하지 못하거나 영적 완전함에 미치지 못함을 나타낼 때 사용됨. 하나님의 백성을 대리하여 통치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택함받은 왕이 소극적 의미에서 자기 직무를 소홀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도록 부추기고 조장하는 일을 했음을 부각.
므낫세의 악함을 아모리 사람들의 악함에 비교하는 이유는 아모리 족속을 공의로 심판하셨던 하나님께서 므낫세와 므낫세 치하 백성들을 심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전달함. 

Ⅱ.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심판을 내리리라는 것이 예언되었다. "그들이 악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다" (12절)고 했다. 심판은 올 것이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 그 심판은 이러할 것이다.

1.그 심판은 매우 두려운 것이리라. 소식만 듣고도, "사람의 귀가 울리게" 될 것이다(12절). 즉 그들의 마음이 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큰 소동을 낼 것이고, 많은 공론을 낳을 것이다.

💡 12절,' 그러므로…내가 이제…재앙을 내리리니'

10, 11절에서는 므낫세의 악행이 아모리 족속의 범죄와 같은 것임을 드러냄으로 유다에 필연적으로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었음을 언급. 12절은 보다 직접적, 강한 어조로 본문 이하 내용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직접적 심판의 메시지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니 내가 이제'라는 표현을 통해 확연히 드러남.

'보라'(히느니)
한글 개역 성경에는 안나오지만 원문에는 기록되어 있음.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앞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감탄어구. 선지서에서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메시지의 출처가 신적 기원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

'내리리니'(메비)
임박한 미래에 도래할 사건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 하나님의 심판이 유다에게도 임박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됨. 하나님이 이제 심판을 내리실 뜻을 굳게 정하셨고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심판의 임박함 뿐만 아니라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의미도 포함
'보라', '내리리니': 이제 임할 심판이 있으며 그것이 반드시 임할 것이니 주목하라는 뜻 전달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직역: 그것을 들은 모든 자들이 두 귀를 울릴 것이다.
삼상3:11, 렘19:3에서도 사용.
전에 들어본적 없는 그러한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가리키는 수사적 표현.

재앙
일차적: 연이어 닥칠 이방 열국들의 침입과 이로 인한 남유다의 곤경들
궁극적: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사건을 가리킴.

철저한 심판을 의미하는 본문의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는 표현은 9절에서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고 듣지 않은 백성들의 자세률 나타내는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라는 표현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즉 본서의 저자는 남유다 백성들이 두 귀가 울리는 공포스런 심판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이 모세의 율법(8절)과 선지자둘을 통해 전해진(10절)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결과임을 유사한 표현을 통해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2.(예루살렘의 죄가 그랬던 것처럼) 그 심판은 사마리아와 아합의 집에 내린 심판의 복사판이 되리라(13절). 그들의 줄을 측량해 보면, 즉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운명을 측량해 보시면, 그것은 바로 사마리아의 운명과 같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예루살렘은 사마리아의 운명을 걷고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 추로 심판을 베풀 때, 그것은 "아합의 집의 추" 가 될 것이고, 저 타락된 집안이 저주받은 것과 같은 파멸의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사 28:17 참조). 남의 죄를 모방하는 닮는 사람은, 저들이 살았던 운명을 살 것을 각오해야 한다.

3.그 심판은 완전한 파괴가 되리라. "내가 그것(예루살렘)을, 사람이 접시를 씻는 것과 같이, 씻어버리겠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들을 알려 준다.

(1) 모든 것이 혼돈에 빠지게 되면, 뒤집어 엎어진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혼란되어지고, 모든 기초들이 일괄될 것이다.

(2) 접시를 씻으면 접시가 빈 그릇이 되듯이, 그 도성에 주민들이 없어질 것이다. 그들은 그 속에 든 오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포로로 데려감을 당하고 그 땅은 안식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접시가 씻겨질 때와 같이 될 것이다." 이와 유사한 끓는 주전자의 비유를 보라(겔 24:1-14).

(3) 이것은 예루살렘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결케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 접시는 떨어지거나 산산이 깨어지거나 혹은 녹지 않고, 다만 씻겨질 뿐이다. 이 심판은 결실을 맺어, 먼저 죄인들을 제거하고 그 후에는 그 죄를 제거할 것이다.

 💡 13절, '사마리아를 잰 줄과…다림보던 추로'

선지자의 입을 통해 선포되어진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 가 운데 한 부분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이미 멸망한 사마리아를 심판했던 기준을 가지고 예루살램과 남유다를 심판할 것을 선포하는 내용.

줄, 추: 건축할 때 측량하는 도구

상징적 의미: 죄악의 유무를 가늠하는 측정 도구.
사마리아와 같은 파괴의 역사를 준비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재고 측량한다는 의미로 사용됨. 성경에서 죄악 유무를 측정하고 심판을 예비하는 도구로 '줄과 추'가 종종 언급된다(암7:7-9; 사28:17). 이것은 건축에 있어서 필수적 측량 도구인 줄과 추의 용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줄은 길이를 측정하는 '줄자'란 의미로 사용되고, '추'는 수직 여부와 수평 여부를 재는 건축 도구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줄과 추가 모두 인간의 행위를 재어보는 하나님의 정확한 측량 기구인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당신의 정확한 측량 기구인 율법과 말씀을 기준으로 심판하여 멸하셨던 것처럼 남유다도 그와 같은 기준으로 심판하겠다는 의미이다. 이같은 선언은 달리 말하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에게 적용한 기준을 남유다에게 적용하지 않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과 그 적용이나 시행에 차별 이 없는가? 

이같은 의문에 대하여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의 공의의 부족이나 부당한 차별성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복이스라엘에 대 하여도 오래 참으시며 회개를 촉구하여 왔으며 그들에게도 자비와 긍휼을 층분히 베푸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거로는 던저 개국 초부터 익명의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시고 미가야, 엘리야나 엘리사, 아모스와 호세아, 요나 등 무수한 선지자들을 파송하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드러내셨고 아람을 비롯한 여러 이방 나라들과의 전쟁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신 것을 돌 수 있다.  또 열왕기서 기자는 북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비록 그들이 다윗 언약을 배반하고 지속적으로 악을 일삼으며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그들을 멸하기를 즐겨 아니하셨다 고 증거하고 있다(13:23).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복이스라엘이 무수한 범죄틀 자행하고 있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당신의 택한 백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형편, 즉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놓인 자도 도울 자조차 없는 형편을 보시고 여로보암 2세의 처리하에서는 새로운 중흥과 희복의 역사를 허락하기까지 하셨다(14:26-27).

이처럼 북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행사는 결코 무자비한 심판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에 근거한 인내였으며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심판을 유보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북이스라엘은 끝내 멸시하였고 걸국에는 유보된 심판을 다 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적용은 남유다의 역사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확인해 볼 수 있다. 남유다 역시도 하나님 앞에 무수한 범죄를 자행하였고 남유다를 다스렸던 왕들 중에는 심지어 복이스라엘을 멸망의 길로 몰아넣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함의 집과 교류하며 백성의 죄악을 조장했던 이둘도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유다가 북이스라엘보다 오랫동안 왕조틀 유지하고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가운데에 북이스라엘과 달리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고 다윗이 행한 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라를 치리하였던 선한 왕들이 었었기 때문.

즉 이들로 인하여 하나님은 남유다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셨던 것이고 더 오래 인내하셨던 것이다. 아울러 남유다는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에 근거해서 나라가 유지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어러한 다윗 언약은 하나님어 남유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더 오래도록 인내하신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열왕기 기자는 심지어 아합의 집과 결혼하여 죄악을 행한 남유다 제5.6대 왕 여호람과 아하시야의 통치 시절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을 언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셨다(8:19)고 보도하고 있는데 이는 남유다가 조상 다윗으로 인하여 얼마나 큰 긍휼을 얻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확인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인내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갔고 궁국적으로 본문의 므낫세 대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여호수아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신 가나안 족속들의 행실보다 더한 악을 행하고 성 전을 더럽힘으로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키기에 어른다. 이는 히스기야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 대신 주변 나라의 힘과 정치적, 군사적 험을 의지하는 남유다 왕들과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그들을 심핀하시겠다고 선언(20:16~18)하신 뒤에 저질러진 죄악어어서 더더욱 돌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제 하나님께서 남유다에 심판의 줄과 추를 베풀겠다고 하신 본문의 말씀은 그 동안 남유다 역시 불신앙과 죄악으로 심판을 받아 마땅하였지만 다윗 언약과 이를 성실히 이행 하기 위해 경건한 삶을 살았던 선한 왕들, 그러고 궁극적으로 당신의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심판이 유보되어 온 것일 뿐이고 이제는 그 죄악이 극에 달하여 하나님께서 그 동안 유보해 오신 심판을 시행하실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었다.

북이스라엘에 비해 남유다에 더 오랫동안 심판이 유보된 이유와 원인?
다시 정리해 보면 남유다 역시 르호보암을 비롯한 대부분의 왕들과 백성들이 악을 행하여 심판을 받아 마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유다 왕들에게 허락 하신 다윗 언약을 이행하고 지키려 하신 결과로 인해, 그러고 남유다의 선한 왕들의 언약에 부합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에 비해 더 오랫동안 심판이 유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부추기는 남유다의 심각한 죄악들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본문의 므낫세의 극심한 범죄로 인해 그 동안 유보된 심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다윗 언약을 가지고 었는 남유다 왕들과 백성들의 죄라 해서 그것을 묵과하셨던 것어 아니라 다만 오래 참으심으로 그 죄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셨던 것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이 이제는 더 이상 유보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정도에 이르게 되었고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남유다에 대하여도 심판을 시행할 것임을 선언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이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를 전달하지 않으며 이러한 이해와 관련해 본문을 보게 될 때 남유다의 심판에 었어서도 북이스라엘에 적용되었던 기준, 즉 하나님께서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함의 집을 다림보던 추' 란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본문의 말씀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심판과 긍휼 적용 문제는 상당히 어렵고 난해한 문제다. 무수한 역사적 과정과 하나님의 숨겨진 뜻,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단언하는 것은 피조물이 할만한 것이 아님. 심판의 줄과 추라는 표현도 그동안 남유다에 누적된 죄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로 인해해 빚어진 심판 유보, 그리고 유보 시점이 다하고 궁극적으로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시점에 다다른 것과 관련해해 주어진 말씀으로 보아야 함.


'또…씻어 버릴지라'

하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예루살렘에 대한 강력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
그릇에 담긴 찌꺼기돌을 쏟아버리고 깨끗이 씻어 엎어놓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며 살아남은 백성둘은 바밸론에 포로로 잡아감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할 것이라는 의미.
이 심판의 메시지는 BC586년 바벨론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남유다가 완전히 멸망함으로써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공의 때문에 이와 같은 엄정한 심판을 행하셨으나 공의가 만족된 이후에는 자비를 베푸셨다. 즉 공의의 심판의 결과로 바벨론에 포로된 자듈을 다시 부르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재건토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은 사마리아처럼 완전한 심판이 아니라 다시 정화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기 위한 하나님이 구속사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삼하 7:4-16)을 기억하사 다윗의 자손 을 영영히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신 결과이다.

'씻어버릴지라': 노아 홍수 기사에서 육지 생물 말살할 때 사용된 단어. '삭제하다', 더 나아가 '도말하다'라는 의미까지 내포 

4."그러므로" 그들도 멸망하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14절). "내가 나의 기업의 남은 자를 버리겠다" 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버린 자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고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내버릴 때까지는, 하나님은 아무도 먼저 내어 버리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백성을 버리시면 그들의 방어책이 없어진 것이므로, 그들은 모든 적들에게 손쉬운 먹이거리가 된다. 본문에는 죄가 그들이 당할 비극의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했다.

💡 14절,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를 버려'

남은 자
남은 자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기본 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해 메우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 즉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세대 가운데서도 항상 당신을 경외하고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무리들, 곧 남은 자들을 선택해 두셨으며 범죄와 반역으로 인해 공의의 심판이 내려진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중심으로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심.

본문에서 남은자의 의미:
당시 상황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남은 지파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 북이스라엘 10지파는 이미 멸망했으므로, 남은 자는 남유다 구성을 이루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의미.

남은 자를 버리겠다는 의미
남유다 왕국을 버리겠다는 말.

버리심의 결과
대적의 손에 붙여짐. 모든 대적에게 노략과 겁탈을 당함.

남유다가가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힘에 의한 것이 아님.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보호하심 때문.

그러나 남유다는 지속적으로 범죄하고, 이런 범죄는 하나님의 보호 자체를 무색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그분과 언약을 지킬 때만 유효하다. 므낫세 당시 유다 백성들은 언약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거역했으니 그들 자신들을 하나님의 보호와 무관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으로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이행하고 율법에 부합되는 삶을 살았다면 그들 주변의 대적들이 유다에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 성도의 생존과 평안의 근거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고 그분께 순종하는 삶에 있다. 

(1) 오랜 죄악이 죄의 그릇을 다 채우게 되자 다시 기억되었다(15절). 즉 "그들의 열조가 애굽에서 나온 때 이래로, 그들의 잉태와 출생에서부터, 그들이 나의 노를 격발하였도다." 열조의 전철을 밟은 이 세대의 사람들은 그들 열조의 죄에 대하여 함께 심판 받는 것이 정당하다.

💡 15절, '이는…노를 격발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심판의 원인
므낫세 시대의 범죄에 국한하여 유다를 심판하신 것이 아님. 이스라엘 민족의 출발점이 되는 출애굽 때부터 므낫세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을 면밀히 살펴보시고 심판의 결정을 내리신 것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이 계속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드디어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을 행하게 되었다는 하나님 심판의 당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노를 격발('카아쓰')
화나게 하다, 동요시키다, 분발시키다 배신과 죄로 인하여 화내고 분내는 하나님의 감정 상태를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됨. 하나님께 적용될 때 이 동사는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서 그분에게 격렬한 고통과 뜨거운 슬픔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 

(2) 피 흘림의 죄가 그 양을 채웠다는 것이다(16절). 다른 어느 죄도 피 흘림의 죄보다 더 큰 부르짖음을 가져오지 않으며, 그것보다 더 혹독한 보복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 16절, '또 무죄한 자의 피를•••가득하게 하였더라'

16-18절: 이러한 므낫세의 사적을 마무리하는 내용.
저자는 므낫세의 악행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시작함.
또 다른 범죄 언급: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림.

무죄한 자의 피에 대한 몇 가지 주장
1.몰렉 종교 인신 제사 때 희생된 피일 것이다. .2.가난하고 약한 민중이 므낫세에 의해해 착취당하고 억울하게 되었을 것이다. 므낫세가 앗수르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려고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고, 앗수르에 노동력을 공급하고 전투병을 파견했다는 기록에 기초한 견해.
3.종교적 의미로 해석해 우상 숭배를 거절한 경건한 자들과 므낫세의 악행에 반대하여 하나님 말씀을 전한 선지자들로 보는 견해.

실제로 성경에서 무죄한 자가 피를 흘렸다는 표현은 대부분 종교적 의미임. 즉 율법에서 '무죄한 자'는 죽옴의 심판에서 사면을 받은 자를 가리키는데 므낫세는 자신의 정권과 종교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이들을 죽였다고 볼 수 있는 것. 실제로 역사 문헌에 의하면 므낫세는 자신의 정책을 비판한다고 하여 신실한 여호와 신앙인들 과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도 이 시대에 므낫세에 의헤 톱질로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셋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듯함. 므낫세가 악을 행함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에대하여 '이 가에서 저 가 까지'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의 한쭉 문에서 그 반대편 문까지란 의미이다. 본서 저자는 므낫세의 공포 정치로 인해 무고하게 죽은 자의 피가 온 예루살렘에 가득할 정도로 많았음을 이와 같은 과장법을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므낫세의 악독한 범죄에도 므낫세 당대에 유다가 멸망하지 않은 이유?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 여 심판 집행을 유보하셨기 때문. 므낫세 그 자신은 남유다률 침범한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감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회개하고 유다로 다시 돌아와서는 일단의 종교 개혁을 단행한 까닭에(대하 33:14-20) 남유다 멸망 심관이 므낫세 이후로 유보되었을 수 있음. 

*이것이 우리가 므낫세에 관하여 들을 수 있는 전부이다. 그는 이제 유죄 선고를 받은 셈이다. 그러나 역대기에서는 그가 회개하여 하나님께 용납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는 동안에, 이곳에서는 그가 회개했다는 것(분명 그랬을 것이다)을 나타내는 한 암시만으로 만족해야겠다. 즉 그가 "그의 궁궐 동산에" 장사되었다는 점이다(18절). 이것은 아마 본인 명령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자기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겸비해지고 나서는, 자신을 더 이상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리 울 수 없는" 자라고 판단하여, "그의 열조의 무덤에" 장사될 가치조차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자는 스스로 수치를 취하나 명예를 취하지 않는다. 무죄한 자라는 명예는 잃어버렸으나, 회개하는 자라는 명예는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그리고 죄인이 회개하고 죽어서 동산에 장사되는 것이, 뉘우치지 않고 죽어서 대사원에 장사되는 것보다 더 낫고 더 명예롭다.

이것이 우리가 므낫세에 관하여 들을 수 있는 전부이다. 그는 이제 유죄 선고를 받은 셈이다. 그러나 역대기에서는 그가 회개하여 하나님께 용납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는 동안에, 이곳에서는 그가 회개했다는 것(분명 그랬을 것이다)을 나타내는 한 암시만으로 만족해야겠다. 즉 그가 "그의 궁궐 동산에" 장사되었다는 점이다(18절). 이것은 아마 본인 명령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자기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겸비해지고 나서는, 자신을 더 이상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리 울 수 없는" 자라고 판단하여, "그의 열조의 무덤에" 장사될 가치조차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자는 스스로 수치를 취하나 명예를 취하지 않는다. 무죄한 자라는 명예는 잃어버렸으나, 회개하는 자라는 명예는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그리고 죄인이 회개하고 죽어서 동산에 장사되는 것이, 뉘우치지 않고 죽어서 대사원에 장사되는 것보다 더 낫고 더 명예롭다.

💡 17절, '므낫세의 남은 사적과…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즉위 공식 문구, 사망 공식 문구가 일정한 패턴으로 열왕기에서서 반복됨: 내러티브 속 시간 확인시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함.
55년 긴 세월 동안 남유다를 통치한 므낫세의 업적이 간단히 언급됨. 열왕기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 잇는 사건들만 취사 선택해 기록했음. 므낫세의 행적이 그의 통치 기간과 관계없어 이처럼 짧게 언급된 것은 그의 치세 기간 동안 구속사적 관점과 관련하여 므낫세의 국악한 종교적 반역 행위 외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관련된 다른 특벌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절, '므낫세가 … 자매…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사망 공식 문구'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므낫세의 뒤를 이어 '아몬' 이 새로운 남왕국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소개. 다른 남유다 왕들과는 달리 므낫세가 '웃사의 동산'에 묻혔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남유다 왕들 대부분이 예루살렘에 었는 왕의 묘지에 묻힌 사실과 비교할 때 매우 파격적인 사건. 웃사의 정원이 궁궐 동산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곳은 왕궁 영역 내에 위치하고 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로암 연못 옆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므낫세가 '웃사의 동산'에 묻힌 것이 자신의 과거의 과오를 깊이 뉘우치고 스스로를 낮춘 결과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과거 행적으로 인하여 유다 백성들이 유다 왕 묘실에 장사하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왕이 왕의 묘실에 매장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경우든지 메우 이례적이며 그 자신에게 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즉 므낫세는 다른 남유다 왕들과 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생전에 극심한 악을 행하였으므로 죽옴 이후까지 이러한 수치를 겪었던 것이다. 아몬: 남유다 제 15대 왕 BC642-640. 2년간 다스림. 짧은 기간 동안 악정을 저지르다가가 마침내 신복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함.
아몬: 귀여운 것, 사랑하는 사람, 애굽 우상 명칭. 애굽 우상 명칭을 그대로 붙였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