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신들과 백향목과 석수와 목수를 보내 그의 궁전을 건축하게 하였더라
2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줄을 깨달았으니 이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의 나라가 높이 들림을 받았음을 앎이었더라
3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또 아내들을 맞아 다윗이 다시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니
4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5 입할과 엘리수아와 엘벨렛과 6 노가와 네벡과 야비아와 7 엘리사마와 브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다윗 왕국의 번영(역대상 14:1-7)
💡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기 순서에 따라 비교적 충실하게 기록한 사무엘서와 달리,
역대기 저자는
- ‘하나님의 영광과 다윗 왕조의 번영'이라는 신학적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배열한 경우가 많다. 본장이 바로 그 대표적 실례이다.
- 우리는 이러한 특성을 가진 역대기를 통해 이스라엘 역사의 신학적 의미룰 사무엘서나 열왕기서의 저자와 다른 역대기 저자의 관점을 통해 재음미할 수 있다.
- 역대기 저자는 앞선 13장에서 다윗이 예루살렘에 언약궤틀 안치할 계획을 세우고 백성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이를 시행하였으나 언약궤 이송 도중 발생한 웃사의 죽음으로 인하여 언약궤 운반이 잠정 중단된 기사를 기록하였다. 시간 순서와 사건의 일관성을 감안하여 내용을 배열한 다면 이러한 일차 언약궤 운반 시도 실패 기사 후에 예루살렘성으로 언약궤가 운반된 15장의 기사가 곧바로 이어져야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기사 사이에 본장의 내용이 삽입된 것은 저자의 특별한 의도를 반영하기 위해서이다.
본장 개요
- 1,2절: 언약궤 운반 기사 사이에 위치하여 두로 왕 히람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다윗이 궁궐을 짓는 기사
- 3-7절: 다윗 가문의 번영
- 8-17절: 사사 시대 이래 이스라엘을 가장 오랫동안 적대시하고 침략해 온 볼레셋 정복 기사(8-17절) 등을 비연대기적으로 삽입하여 소개하고 있다.
본장이 갖는 의미
- 이러한 본장의 내용은 언약궤의 예루살렘 안치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13,15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별다른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여진다.
- 그러나 구약 역사의 구속사적 흐름과 거기에 면면히 흐르는 신학적 관점을 이해하고 이에 비추어 보면, 본장의 내용이 이처럼 언약궤의 예루살렘 안치를 다루는 내용 사이에 들어간 것은 본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신학적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의도적 구성이라 할 수 있다.
- 이를 이해하기 위헤서는 언약궤의 운반과 안치가 갖는 신학적 의미와 본장 후반부에 수록된 블레셋 정복의 구속사적 의미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 언약궤 운반과 안치가 갖는 신학적 의미
- 언약궤의 역사, 상징하는 바: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인 언약궤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을 할 때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을 지휘하고 인도하며 그들로 거룩한 전쟁을 승리케 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민 10:33-36).
-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나안 땅에 정착하도록 보호하고 인도하심을 나타내준다.
- 그리하여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과업인 가나안 정복 전쟁이 끝마쳐질 때까지 언약궤는 실로의 성막에 안치되어 있었지만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의 진영과 함께하였음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 블레셋 정복의 구속사적 의미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고자 처옴으로 시도한 때는 표면적으로 볼 때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여부스 족속을 몰아내고 가나안의 거의 모든 족속을 정복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은 여전히 사사 시대 이래 가장 큰 대적 중 하나인 블레셋의 위험 속에 있었다.
- →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거하지만 여전히 안식이 없는 상태 즉 가나안 땅에 대한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당시까지 자신들에 의해 정복되지 않은 채 가나안 땅에 남아 었던 마지막 족속 블레셋을 굴복시키고 안정을 찾은 것은
- 명실공히 출애굽 제2세대가 언약궤를 앞세우고 약속의 땅에 입성한 이후 시작된 가나안 정복 사업이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16절).
-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인 언약궤는 블레셋이 정복되기 이전인 일차 언약궤 운반 시도 때가 아니라 블레셋을 정복함으로 가나안 정복 사업이 완결된 시점 ⇒ 즉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을 온전히 차지한 이후에 언약의 성취를 확증하는 차원에서 예루살렘에 안치될 수 있었던 것.
다윗 왕의 번영의 이유: 하나님의 축복과 그의 신앙
- 본장 전후의 내용은 다윗이 한 번의 실수와 그에 따른 실패에도(13:9-12) 불구하고
낙담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한(15:1-15) 인물임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 다시 말해 역대기 저자는 다윗 왕의 번영의 이유를 다름아닌 하나님의 축복과 그의 신앙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상의 내용을 연결해 주는 본장은 전체 세 단락으로 구분되는데
- 각각 다윗의 명성(1, 2절)과
- 그의 자손에 의한 번성(3-7절),
- 다윗의 블레셋에 대한 승리의 사실(8-17절)을 다루고 있다.
⇒ 이 세 가지 사실은 다윗의 대내외적 명성과 축복, 번영과 승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13장 내용과 연결시켜 볼 때
- 다윗이 비록 언약궤의 예루살렘 안치에는 실패하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징표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본서의 일차 독자들인 포로기 후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 신앙적인 열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배열임과 동시에
- 13장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한번 택하신 자는 실수와 잘못을 범하여 징계를 당할 수는 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대상임을 분명히 한다.
- 이러한 본문의 배열은 사무엘서의 저자가 본장의 내용(삼하 5:11-25)을 다윗의 통일 왕국 수립(삼하5:1-5)과 예루살렘 정복 기사(삼하 5:6-10) 이후에 연대기적으로 다룸으로써 다윗 왕국의 번영의 이유를 그의 정처, 군사적 수완 및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시킨 점과 사뭇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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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처럼 스스로 풍족한 자는 없었으나, 그에게도 이웃이 필요했고, 또 그들의 도움을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다윗이 매우 큰 나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비해, 히람은 매우 보잘 것 없는 나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히람이 그에게 일군들과 물건을 보내 주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거할 집을 지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1절). 따라서 우리는 어느 때 누구에게 은혜를 입게 될는지 모르므로 아무도 멸시하여서는 안 된다.
💡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호의적인 외교를 펼치는 것 ⇒ 여호와의 섭리의 결과
히람의 행동: … ‘보내어’(‘솰라흐’ 동사) (삼하5:11)
- 13장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된 동사
-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치된 행동(2절, ‘보내이’)
- 웃사가 율법을 어기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 행동(9,10절, ‘펴서’)
- ⇒ 저자는 다윗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자 전국민적인 합의를 이골어 냈지만 언약궤를 운반하는 방법부터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송 과정에서 웃사가 손으로 언약궤를 붙잠아 죽임을 당함으로써 일차 언약궤 운반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음을 ‘솰라흐'란 단어를 사용하여 전달하였던 것.
언약궤를 이스라엘 통치의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모셔들이는 데 있어서 —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이 ‘솰라흐’ 동사를 통해 나타난다.
- 위와 같은 실패 뒤에 이스라엘에 대한 히람의 호의적 외교 행위를 같은 동사로 표현함.
- 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간적 노력둘을 완전 무산시키시고,
오직 당신의 은혜와 섭리를 통해서만 신정 왕국 이스라엘을 강성하게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을 ‘솰라흐' 동사의 반복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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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혜로운 자는 자리잡는 것을 매우 만족히 여기나, 선한 자는 그것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보는 것을 매우 만족히 여긴다. 백성들은 다윗을 왕으로 삼았지만,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로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을 깨닫기" (2절)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고,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신다면 누가 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 역대기 기자는 2절을 통해 다윗의 성숙한 신앙을 강조함.
- 본문의 표현에 따르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과, 그의 나라가 진흥케 된 것은 분리된 개별적 사건이 아니라 다같이 여호와를 통해 이루어진 은혜의 사건.
- → 다윗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진흥을 통해 — 교만해지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
-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만, 그토록 힘들었던 고난의 시간이 지나가면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역대기서가 강조하는 다윗의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통해서,
- 내가 번성하고 홍왕할 때에 더욱 겸손하고,
- 그 순간에 나의 삶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홍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꺼며
- 그분의 이름을 찬양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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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는 세상에서 영달을 얻은 것은 우리를 유용하게 쓰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다윗의 나라를 진흥하게 하신" 것은 → 다윗이 위대해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가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도록 한 때문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복된 근원이 되기 위해서 축복을 받는 것이다(창 12:2 참조).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위해 살도록 태어나지는 않았다.
💡 역대기 저자는 다윗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다윗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있음을 표현한다.
포로기 후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는 메세지
- 새로운 선민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헤 전력해야 할 포로기 후대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 결국 본서 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를 통해 포로에서 돌아온 일차 독자들에게 선민 신정 국가의 재건을 위해 더욱더 전력을 다하도록 격려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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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공하면 방심케 되고 육체의 일에 집념하기가 쉽다. 다윗 나라가 안정되었을 때, "그가 또 아내들을 취한 것은" (3절) 그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자손으로 인하여 영예와 힘을 더하였다. 보라, "자손들은 여호와의 유업이다." 다윗의 자손에 관해서는 사무엘에서 뿐만 아니라 이 책 3장 1절 이하,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들의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 사무엘서와 역대기서의 차이점
사무엘서와 달리 역대기서는 다윗이 아내 이외에 여러 첩들을 취한 행위를 수용하는 듯은 완곡한 표현을 사용.
- 역대기 기자의 다윗 왕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
- 본서 저자는 다윗이 많은 자녀를 낳은 사실을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의 결과로 빚어진 긍정적인 결과로 보고 본사건을 보도한다.
-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라는 시간적 배경을 생략함.
- 이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머문 7년 반 동안의 기간어 남부 이스라엘에 대한 부분적 통치 기간이었기 때문.
- 즉 본서 저자는 이런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다윗의 부분적인 통치와 이스라엘의 분열 양상을 생략하고,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이방의 많은 땅을 정복했던 예루살렘에서의 통치를 부각시켜 강조한 것이다.
- 자녀를 낳은 주체:
- 사무엘서: ‘아내들과 첩들’
- 역대기저: ‘다윗’으로 묘사.
많은 자녀를 낳은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본문의 문맥에서 볼 때, 역대기 저자는 던저 쓰여진 사무엘서의 표현을 바꾸어 가면서까지 다윗 왕조가 하나님으로부터 다산의 복을 받게된 사실을 강조하고, 그 주체인 다윗을 분명하게 지목하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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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절: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자녀들만 언급함.
그렇다면 본서 저자가 여기서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다윗의 아들들의 이름을 3장에 이어 또다시 반복해서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 ‘예루살렘'이라는 지명과, ‘솔로몬'이라는 인물의 중요성 및 독특성 때문이다.
- 다윗 왕가는 이미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목동으로 있을 때부터 준비되었으며(삼상 16장) 헤브론에서 그 출발점을 마련한 것이 사실이다(삼하 2-5장).
그러나 본서 저자는 다윗 왕가외 완전한 기틀은 하나님이 택하신 ‘예루살렘'에서 본격적으로 마련되었다고 본 것이다.
-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을 시작으로 하여 이루시고자 했던 신정 왕국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다윗의 아돌 솔로몬의 계열을 따라 계승되며 왕국의 최고 전성기 역시 ‘솔로몬' 시대에 구가하게 된다.
이러한 저자의 두 가지 신학적 관심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다윗의 아들들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언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울 왕가와의 명백한 대조
- 저자는 4절부터 본절까지 비교적 긴 지면을 할에하여 다윗의 후손들의 이름을 열거함으로써 다윗 왕가가 하나님의 측복을 받아 당분간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이룰 것임을 외적으로 증거했다.
- 이러한 문단은 역대기 기자가 다윗과 의도적으로 대조하는 사울의 집과 비교할 때 명백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즉 본서 저자는
- 사울에 관하여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과 그 세 아들과 그 온 집이 함께 죽으니라"(10:6)고 기록하여 그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 언급한 반면,
- 다윗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의 건흥을 이룩하는 주체로서 소개하며 이와 더불어 자녀가 번성하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 등을 기록함으로 두 가문의 운명에 대한 명백한 대조를 보여주는 것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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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주석 영적교훈 부분
1.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2절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로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줄을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된것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것은 자기가 잘났거나 똑똑하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출중하였기 때문이 아님을 잘알고 있었습니다. 즉 다윗은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명확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다윗이 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을 왕으로 삼으신 것이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가 이전부터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다시 이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그가 왕이 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큰 은혜를 경험하면서 그 사실을 보다 확실히 알게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알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원어는 피상적인 앎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구체적인 깨달음, 본질적인 파악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다윗은 인생의 과정속에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함으로 명확한 자기 이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명확한 자기 인식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을 지으시고 그 위에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불어넣으신 하나님이 없다면 결코 인간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경험함을 통해 비로소 분명한 자기 인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함으로 스스로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갈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씀합니다. (벧후3:18) 또한 바울 역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합니다. (빌3:8)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기 자신을 알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의 의미를 깨닫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2. 우리는 말씀을 의지하여 앞에 있는 죄의 유혹의 산을 넘어야 합니다.
3-7절을 보면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취한 아내와 그들에게서 낳은 아들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아홉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는 3:5-9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다윗은 헤브론에서 이미 여섯명의 아들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3:1-4) 그런데 구약에서는 자식의 많음을 부귀와 축복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의 말씀도 1,2절과 함께 다윗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가족 개념은 현대의 가족 개념과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는 가족 경제의 중요한 버팀목이었습니다. 자녀의 수는 그 가족이 생산할 총샌산량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위협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내는 군사적 개념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분명하엿습니다. (시127:3) 그러나 다처, 많은 아내를 두는 것은 당시 근동 지방의 문화와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이는 결코 하나님의 축복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일부일처를 결혼제도로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에 저촉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이미 미갈을 비롯한 일곱명의 아내를 두고 잇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다시 여러 명의 아내를 맞이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이방 여인들 중에서 처첩을 취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다윗 왕가로 하여금 큰 환난을 겪게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즉 다윗 왕가에는 근친 상간과 골육 상쟁, 형제간의 왕위 쟁탈전, 반란 등 불화와 싸움이 끊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비극은 육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다윗에게서 비롯된 결과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의 삶도 세상의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죄의 비극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얼마나 많은 죄의 습성들과 인습들이 존재합니까?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죄의 문제들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고 방치해 두는 죄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나?, "다들 그렇게 사는데 어쩌겠나?"하고 체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호리라도 남김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6)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합당하고 용인될 죄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죄의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묵인하고 용인한다면 그것은 부메렁처럼 나에게 되돌아와 큰 시련과 비극을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또 우리 앞에 있는 죄의 유혹은 너무나도 강렬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유혹을 이긴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성도들도 자주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큰 시련과 비극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이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죄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죄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죄의 유혹이 올 때 나 육신의 정욕이 일어날 때,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로 쳐 복종시키시기 바랍니다. (고전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