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사무엘하 7, 고린도후서 1, 에스겔 15, 시편 56, 57
묵상구절
12 솔로몬이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과 마주 서서 그의 손을 펴니라
13 솔로몬이 일찍이 놋으로 대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다섯 규빗이요 너비가 다섯 규빗이요 높이가 세 규빗이라 뜰 가운데에 두었더니 그가 그 위에 서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14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천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주의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15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말씀을 지키시되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그들의 행위를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율법대로 행하기만 하면 네게로부터 나서 이스라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허락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17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는 주의 종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18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19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주의 종이 주 앞에서 부르짖는 것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0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1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22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에게 범죄하므로 맹세시킴을 받고 그가 와서 이 성전에 있는 주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23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의 행위대로 그의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24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주께로 돌아와서 이 성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25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26 만일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는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 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
27 주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시오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28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들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거나를 막론하고
29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과 고통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30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의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31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며 주의 길로 걸어가리이다
32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대하여도 그들이 주의 큰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33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모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34 주의 백성이 그 적국과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께서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그들이 주께서 택하신 이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35 주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보시옵소서
36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적국에게 넘기시매 적국이 그들을 사로잡아 땅의 원근을 막론하고 끌고 간 후에
37 그들이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들을 사로잡은 자들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행하였나이다 하며
38 자기들을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과 주께서 택하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보시오며 주께 범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옵소서
40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
41 여호와 하나님이여 일어나 들어가사 주의 능력의 궤와 함께 주의 평안한 처소에 계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하옵건대 주의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입게 하시고 또 주의 성도들에게 은혜를 기뻐하게 하옵소서
42 여호와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시옵고 주의 종 다윗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더라
주석 정리
[옥스퍼드 주석]
❖ 도입
💡 서론
앞선 1-11절에서 언약궤의 지성소 안치식에 즈음한 솔로몬의 성전 봉헌사가 기록됨 솔로몬은 자신의 왕위 계승과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건축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의 걸과이며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였음을 선포하였다.
12-42절까지 성전 봉헌 감사와 칠중 청원으로 구성된 솔로몬의 기도가 다루어진다.
[본 단락 구분]
12-13절 : 여호와를 향한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의 시작
14-17절 : 여호와의 약속 성취에 대한 감사와 다윗 언약의 영원한 성취의 간구
18-21절 : 성전을 향한 모든 기도의 응답을 위한 총론적 간구
22-39절 : 성전을 향한 일곱 가지 구체적인 기도 응답을 위한 간구
40-42절 : 성전 봉헌 기도를 마치는 네가지 간구
💡 12절, 솔로몬이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과 마주 서서 그의 손을 펴니라
▶︎ 솔로몬의 행동
‘온 회중과 마주 서서’
📌 왕상8:22 본서(열왕기) 저자가 본문에서 솔로몬이 서서 기도한 것처럼 표현한 것은
→ 언제나 보좌에 앉아 계신 것으로 묘사되는 여호와 앞에서 -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신하와 같은 겸손한 자세로 기도했음을 부각시키기 위함
‘그의 손을 펴니라’
📌 왕상8:22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하늘을 향해 손을 펴는 행동에 담긴 의미
🟰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펴다’ 의 원형의 의미는 — ‘겸손한 간청’
☛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드린 탄원의 기도였다.
과거 모세는 하늘의 뇌성과 우박을 멈추게 하는 기적을 일으켜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것을 바로에게 알리려고 했는데, 이때 그가 취했던 기도의 모습이 바로 본문과 같은 것이었다(출 9:29).
13절, 솔로몬이 일찍이 놋으로 대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다섯 규빗이요 너비가 다섯 규빗이요 높이가 세 규빗이라 뜰 가운데에 두었더니 그가 그 위에 서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 솔로몬은 여호와의 단 앞에 특별한 단을 만들고 그 위에서 기도했다.
본절은 열왕기서 병행 문단에는 기록되지 않은 부분. 역대기 저자가 의도적으로 삽입한 내용.
▶︎ 그렇다면 역대기 저자가 본절을 삽입한 목적은 무엇언가?
12절에 묘사되고 있듯이,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 앞에' 즉 성전 뜰에 있는 ‘번제단 앞에' 서 있지만, 그것이 제사를 드려 제사장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
— 즉 역대기 저자는 솔로몬이 이스라엘 회중들으로 하여금 그의 모습을 더 잘 보고 그의 기도를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특별 제작한 단상 위로 을라갔음을 강조하기 위해 본절을 삽입한 것 (Payne).
그가 그 위에 서서 …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릎을 꿇은 행위의 의미
🟰하나님께 대한 ‘존경’(왕하1:13), ‘경배’(빌2:10), ‘겸비’(막10:17)의 자세를 나타냄.
비록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의 신분이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백성들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내 보였다는 의미(Payne).
성경에 보면 에스라(스 9:5), 다니엘(단 6:10), 그리고 예수께서도 무릎을 끓고 기도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눅 22:41).
❖ 14-17절 : 약속을 성취해 주신 여호와께 감사하는 내용과 다윗의 언약을 영원히 성취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내용
➤14-15절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을 염두에 둔 다윗 언약의 성취에 대한 감사
💡 14절,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천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주의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진정한 주권자 되심.
여호와 :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 되심.
‘천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직역, ‘하늘과 땅에 당신과 같은 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
📌 왕상 8:23 강해,
상천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직역, ‘하늘 위에 그리고 땅 아래에 당신과 같은 신이 없습니다(RSV, there is no God like thee, in heaven above or on earth beneath)’ 이는 비교급 표현이 아니라 최상급 표현으로 이해해야 함.
솔로몬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많은 신들보다 더 힘이 세고 상대적으로 뛰어난 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며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삼하 7:22 ; 22:32).
또한 본문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함을 고백하는 것. 이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소부재하심에 대한 찬양은 성경의 기도문 도입부에 종종 등장하는 관용적 표현(출 15:11 ; 신 4:39 ;시 86:8).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주의 종들에게’
⇒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는 대상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줌.
이를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자가 취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이는 솔로몬 개인의 삶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솔로몬은 통치 초기에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후기에는 이러한 신앙적 태도를 지키 지 못하고 이방 우상을 허용하는 등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신정 왕국의 분열이란 볼행한 역사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 왕상8:23 강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방의 신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 그분은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
다윗 언약에서 드러난 여호와의 ‘헤쎄드’
1)첫째 내용: 다윗의 몸에서 날 자가 성전을 건축할 것.
2)다윗의 위를 보존하실 것→앞으로 성취되어질 것. ⇒ 이 둘째 내용에 하나님의 ’헤쎄드‘가 강하게 대조되어 있음. 솔로몬이 범죄를 저지르면 징계를 내릴지언정, 사울에게서처럼 ’은총‘을 거두어가시지능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여기에 다윗과 다윗의 몸에서 태어날 자식을 향한 하나님의 ’헤쎄드‘가 결정적으로 드러남.
하나님께서 ‘헤쎄드’의 언약을 주신 것처럼,
인간의 편에서도 하나님과의 언약은 ‘헤쎄드’로 지 켜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헤쎄드’는 ‘은혜’가 아닌 ‘성실함’과 ‘사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즉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되 율법의 명시된 사항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실히 준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드러나는 행동을 통해 율법을 어기는 것만 아니라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형식적인 자세만을 견지한다면 이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헤쎄드’를 파기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언약의 파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언약의 두번째 내용을 성취해 달라는 기도는 25, 26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
⇒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마음’
지,정,의를 모두 포함한 인간의 전인격.
‘행하는’
(일차적) ‘걷다’, ‘가다’ ‘준행하다’, ‘행하다’
👉 따라서본문은 하나님의 법과 율법을 사랑하여 이를 마음에 담아 삶의 기준으로 삼아 의지적으로 행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주께서 이러한 자에게 언약과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솔로몬의 진솔한 신앙고백이다.
► 본문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들
유혹들과 일상적인 어려움 속에 고통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온 마음과 온 듯과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당신을 전심으로 섬기는 자들을 사랑하사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로 보호하시며 (시 17:8),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사 말할 수 없는 탄식 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롬 8:26). 따라서 우리들은 현실의 어려움에 주목하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며, 환난과 유혹가운데서도 타협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숙한 신앙인의 면모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15절,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말씀을 지키시되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비다윗에게 약속하신 바를 지키심으로 현재의 성전 봉헌과 같은 축복된 상황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감사의 내용.
‘허락하신 말씀을 지키시되’
▶︎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심
원문의 늬앙스를 살려 직역하면, ‘당신은 당신께서 그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지키셨습니다’
⇒ 여기서 다윗에게 했던 하나님의 약속에는 — ‘선언적 의미’가 있음.
이러한 의미를 따라 다시 정리하면,
‘허하신 말씀’
다윗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권적으로 그리고 선언적으로 하셨던 약속을 의미한다. 즉, 다윗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뜻한다.
‘오늘과 같으니이다’
► ‘오늘’의 의미는?
본문과 같은 표현은 현재적 시점을 강조하는 경우에 사용되는데, 때때로 성경에서 ‘오늘'은 = 영원히(in perpetuity) 라는 뜻도 가지고 있음(Dillard).
병행 구절인 왕상 8:24의 동일한 표현의 문맥적 의미는,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함께 다윗의 언약이 바로 헌재 성취 되었음을 강조하는 표현.
역대기 저자와 본서의 일차 독자들에게 ‘오늘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치고 감사 제사를 드러는 현장과는 시간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었었던 역대기 저자와 본서의 일차 독자들에게, ‘오늘날’은 ⇒ 과거와 그 당시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
역대기는 일종의 설교와도 같다.
👉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 그들은 포로 귀환 후 ‘정말로 우리가 언약의 자손인가?'라는 회의적인 질문과 함께, 성전은 재건되었으나 여전히 선민의 영광은 요원하였던 현실적 상황으로 인해 낙심에 빠져 있었다.
👉 이러한 상황에서 역대기 저자의 메세지는, ‘하나님의 언약'에 회의적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는 여전히 언약 백성이며 다윗 언약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싶었던 것.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오늘날'은 — 역대기 저술 당시의 오늘날로 볼 수도 있다. 즉, 과거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솔로몬 시대에 함께하셨던 하나님어 본서의 일차 독자들에게도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역대기 저자의 의지를 담고 었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 주의 손으로 이루심’
📌 왕상8:24 강해,
본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바를 잊지 아니하시고,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이행하심으로.
그 언약이 오늘날 성취된 데 대한 감격에 찬 고백이다.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 주의. 손으로 이루심
▶︎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을 성취하셨음을 고백하는가?
‘하나님께서 신적 권위를 가지고 하시는 말씀’ (애 3:38) 과 ‘하나님의 주권적 역 사와 신적 능력’ (신 6:21) 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크신 신적 권위 로 다윗과 언약하셨고(삼하 7:11-16), 이 언약을 당신의 주권적인 역사로 성취하셨음을 나타낸다. 여기서 말하는 성취란 솔로몬을 다윗에 이어 왕위에 세우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평화를 허락하사 성전을 건축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성전을 언약 성취의 표적물로 보고, 성전을 완공케 하심으로 친히 언약을 성취하신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있다.
➤ 16-17절 미래의 영원한 다윗 언약외 성취를 위한 간구
💡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그들의 행위를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율법대로 행하기만 하면 네게로부터 나서 이스라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허락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내 율법대로 행하기만 하면’
왕상8:25, ‘내 앞에서 행하는 것’
왜 역대기 저자는 열왕기서를 수정하여 ‘내 율법대로'라는 말을 삽입하였을까?
→ 이는 기록 당시 정황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뒤에 그들의 종교 생활의 중심에는 ‘성전'이 아닌 ‘회당'과 ‘율법(Tora)' 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을 반영하듯이 포로 귀환 시대에 쓰여진 역대기서는 남복 왕조 멸망 직후에 쓰여진 열왕기서보다 율법에 대한 언급이 많다. — 즉 한글 개역 성경에 따르면 ‘율법'이라는 말이 열왕기서에는 12희 나오는 반면, 역대기에는 20회나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흥미롭게도 역대기는 열왕기서와 달리 제사장, 레위인 등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에게 율법 교육을 시킨 역사적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15:3 ;17:9). → 이 때문에 딜라드(Dillard)는 역대기 기록 당시에 율법은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책이자 ‘생활 실천(a living praxis)'의 지표로 활용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본문은 역대기 저자가 열광기서를 참고하면서 자신의 해설을 덧붙인 셈이 된다. 더욱이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견해대로 역대기 저자가 율법을 연구하던 학자겸 제사장인 에스라였다고 본다면, 그의 율법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을 것이다(스 7:11). 이러한 제반 상황의 연장선상에 서 역대기 저자는 열왕기서의 ‘내 앞에서 걷는 것'이라는 표현을 좀더 구체화하여 ‘나의 율법 안 에서 걷는 것'이라는 말로 바꾸었던 것. ⇒ 즉 본서 저자는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것' 🟰 ‘율법을 따라 사는 삶' 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율법' 어란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 왕상8:25,
불행하게도 솔로몬 및 솔로몬의 후손들은 다윗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왕권은 위축되었으며 심지어 단절되고 말았다.
즉 솔로몬은 통치 후반기에 하나님보다 재물과 군사력, 주변 나라의 힘을 의지하는 방향으로 치우쳤고 이방 여인들을 연모한 나머지 많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이들을 통해 도입된 우상 숭배를 조장하는 동 그의 신앙이 현저히 퇴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언약의 상대자인 다윗 후손의 이러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다윗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셨다.
즉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로 삼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선포하는 선지직과 인간을 대신 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직을 완전하게 수행하셨을 뿐 아니라 우주를 통치하는 권한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위입받아 영원히 왕직을 수행하시는 완전한 왕이 되셨던 것이다. 이는 구약에서 거듭 예언된 바이며(삼하 7:16; 사 9:6; 시 2:6; 단 7:13.14; 미 5:2; 슥 9:9) 또한 신약에서도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거듭 밝히고 있다(마 3:2; 막 1:14, 15; 눅 1:31-33).
다윗은 범죄했으나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의 태도만은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 솔로몬은 치정 말년에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우상을 따름으로 부친 다윗이 걸어간 길을 가지 못 했다. 솔로몬의 치명적인 문제는 이방의 우상을 섬겼다는 사실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하나님을 지워버리고 그분의 통치를 거부했다는 데 있었다(11:9, 10). 이러한 솔로몬의 마음 상태를 본서 저자는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라고 평가하고 있다(11:4).
💡 17절,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는 주의 종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역대기 기자는 본장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란 표현을 → 3번 반복.
→ 이러한 호칭의 반복적인 사용은, 솔로몬의 기도가 개인적 차원을 뛰어넘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대표하는 공식적 차원에서 드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 열왕기와 달리, 역대기 원문에는 ‘원컨대’ 란 표현이 없음 (한글 개역 성경은 삽입해서 번역함)
역대기 저자가 생략한 이유는 무엇인가?
‘원컨대 ‘ = ‘제발’ —> ‘개인적 소원이나 간절한 기원'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표현.
앞서 지적한 대로 솔로몬 왕이 개인적 차원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러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즉 개인적 소원의 차원에서 다윗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확설 히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으로서 공식적인 요청을 하나님께 올리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열왕기에 비해,역대기서에서 솔로몬의 기도는 — 보다 공적이고 언약적인 기원으로 비쳐지도록 기록함.
이러한 묘사에도 역대기 기록 당시 다윗의 나라는 무너졌지만, 다윗 언약의 실현에 대한 요구는 정당한 것임을 보여주려는 본서 저자의 의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 18-21절 성전을 향한 모든 기도의 응답을 위한 총론적 간구
💡 18절,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여호와의 광대하심을 찬양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직역하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로 사람과 함께 땅 위에 거하실 것입니까’
‘사람과 함께’ (’메타 안드로폰’)
흥미롭게도 신약 성경 계 21:3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는 이 세상 마지막 시점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내려와 ‘사람과 함께 거하신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의 ‘사람과 함께'라는 표현 역시 ‘메타 안드로폰' 이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거하다(RSV, God dwell with man)'라는 표현은
⇒ 하나님의 지상 임재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말.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역대기의 표현은 ‘하나님의 지상 임재'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열왕기서의 ‘하나님이 땅에 거하시다' 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추상적 표헌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불분명하다. 이에 반하여 역대기서의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신다'라는 표현은 ‘사람 가운데 자신의 거처를 삼으시고 인간과 영적 교통을 이루는 것' 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하늘’이 = 하나님을 뜻한다면,
‘땅’은 = 피조물을 뜻하고 나아가 ‘
사람' 이 = 피조물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 결국 본문은 인간이 결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거처를 같이할 수 없다는 비천함과 한계성을 표현한 것이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 하물며 … 이 전이오리이까’
편재하신 여호와의 광대하심에 비하면, 자신이 지은 성견은 너무나 초라하여 결코 하나님을 모실 수 없음을 나타내는 솔로몬의 겸손의 고백.
📌 왕상8:27 강해,
본문은 죄인되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과 함께 거하실 수 없는 — 하나님의 거룩성과 무한성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간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흘하심과 자기비하(自己뿔下)의 은혜를 강조적으로 드러낸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들이라도..’
‘최상급적 표현’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드넓은 우주 공간도 담아낼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성, 편재성, 지존성 등과 같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절대적 속성을 수사적으로 표현한 말.
👉 솔로몬이 아는 하나님,
결국 본문은 광활한 땅 뿐 아니라 하늘 아니 그 이상의 우주라 할지라도 무한하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을 결코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에 대한 솔로몬의 이러한 이해는 당시 지역신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고대 근동의 보편적 신관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이는 솔로몬의 지혜로운 유추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정확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물며 … 이 전이오리이까’
무한하시고 광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처소를 유한자 인간이 짓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성전에 임하심은 성전 자체에 어떠한 가치나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성전을 당신과 당신의 백성이 교통하는 공식적 장소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공간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광대 무변하신 분이셨지만, 당신의 백성을 향한 극진하신 사랑으로 스스로 낮아지사 크신 긍흘로 인간이 지은 성전에 임하여 당신 의 백성들과 교통하시는 은총을 베푸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비하와 극진한 사랑은 — 하늘 보좌를 버리고 죄인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절정을 이루었다(히 1:3).
💡 19절,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주의 종이 주 앞에서 부르짖는 것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 인간이 지은 좁은 성전에 거하실 수 없 는 광대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자신의 기도만은 들어달라는 의미
📌 왕상8:28 강해,
‘그러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돌아보시며’ : 방향을 바꿔 ‘돌이키다', ‘바라보다(주의하여 주시함)’
‘기도’ : 대표자로서 모든 이를 대신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림.
‘간구’ : ‘은혜’, ‘탄원’
➤ 이는 비록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과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청원하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 들어달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 결국 본문에는 솔로몬이 왕의 권위로 하나님께 떳떳하게 요구하는 것이 아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기도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앞에서 부족한 인간이기에 오직 존귀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 청원자를 불쌍히 여기사 소원을 들어주실 것을 구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 이는 솔로몬이 겸손한 모범적 중보 기도를 드렸음을 보여준다.
💡 20절,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 ‘이름을 성전에 두시겠다’ 라는 표현의 의미는?
70인역은, ‘당신의 이름이 거기에서 불리울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성전에 두신 이유는 백성들로 성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영영히 부르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 왕상8:29절 강해,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본절에는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이란 표현이 나와 지금 솔로몬이 과거에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근거하여 기도의 응답을 간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본문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셨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본문과 유사 한 표현이 성막과 관련해서 등장할 뿐이다(신 12:5.11 ; 14:23 ; 15:20). 과거 하나님께서는 성막이 불완전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당신의 이름을 두시기로 스스로 작정하셨었다.
→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솔로몬의 성전 역시 이러한 모세의 성막과 별로 다르지 않다. 즉 솔로몬의 성전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할지라도 광대하신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에는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처소로 선택하셨다는 점에서 성막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 따라서 본문은 솔로몬의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실 유일하고도 영원한 장소임을 선언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당신의 영광을 나타낼 거룩한 처소로 선택해 주실 것을 바라는 일종의 기원문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이러한 간절한 기도를 열납하셔서, 그의 성전에 당신의 이름을 영영히 두시며 당신의 눈과 마음을 항상 머물게 할 처소로 삼으실 것을 약속하셨다(9:3).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원어의 맛을 살려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낮 동안에도 밤 동안에도 계속적으로 이 전을 향하여 당신의 눈이 열린 상태로 있도록 하읍소서' 가 된다. 즉 솔로몬은 하나님을 향하여 밤낮없이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성전을 살펴주시기를 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성전 안에서 혹은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는 근거는 인간이 지은 성전 자체에 특별한 능력이나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눈이 항상 성전을 향해 있기 때문.
‘여호와의 눈’
눈은 ’지식, 성격, 태도 성향, 견해, 열정 및 반응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눈‘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인간에 빗대어 설명한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 선악을 감찰하시며, 의인을 지키시고(대하16:9), 은총을 주시며(창6:8), 인간을 살피시고 구원해 주시는 신적 속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냄(시33:18; 34:15.
👉 따라서 하나님의 눈이 성전을 향해 주야로 항상 열려 있기를 구하는 내용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항상 주목하사 누구든지 성전에서, 그리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관심을 가지고 응답해 달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솔로몬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당신의 눈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성전에 두시겠다고 약속하셨다 (9:3).
➤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후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는 관습을 낳게 하였다(시 5:7 ; 단 6:10 ; 욥 2:4).
💡 21절,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왕상 8:30에는 ‘간구’에 해당하는 단어가 단수 ‘테힌나트’ 로 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본문에서 ‘간구함'으로 번역된 ‘타하누네’는 개인적인 ‘간청(KJV, supplication)' 혹은 ‘용서를 위한 탄원(NRSV, plea)’이란 뜻을 가진 ‘테힌나'의 복수형이다.
→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종과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간청하는 것들을 들어주소서'가 된다.
👉 이러한 역대기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개인적으로 찾아와 간청할 때마다 그 간청들을 들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열왕기의 기록보다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본문의 표현은 금방이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둘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서 하늘에서부터 내려올 듯한 역동적인 의미.
⇒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좀 더 밀접하게 다가 오셔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
(왕상8:30) — ‘하늘에서’
정적 의미. 하나님께서 하늘 안에서 좌정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정적인 의미의 표현.
📌 본문은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성전 안에 두는, 즉 여호와께서 그곳에 임재하시느냐의 여부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결정하실 문제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성전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성전의 부재가 여호와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하나님의 초월성)
성전과 여호와 임재 사이에 드러나는 이러한 신학적 해석은 성전의 훼파와 바벨론 포로 유수를 경험한 본서 기록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방 땅에서 성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상황이 여호와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성전이 없는 상황이지만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자신들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 왕상8:30 강해,
‘들으심’
기본적 의미는 ‘듣다 (hear, 창 27:6) , ‘주목하다(listen to , 시 132:6) ’ 이나.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서 마음에 간직하려고 주의 깊게 ‘듣다 (heed, 창 17:20 ; 30:6) ’ 란 의미도 지닌다. 또한 이는 공정한 판결을 위하여 송사를 ‘듣다(신 1:16) ’ 란 의미도 지닌다. 즉 이 단어는 어떤 사실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여 ‘알아듣다( understand, 창 11:7) ’ 란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의 ‘들으심’은 자기 백성이 성전에서 혹은 성전을 향해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이를 주목하시며 주의 깊게 들으시고 그 사정을 김이 이해하셔서 은혜로써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솔로몬의 간절한 호소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를 입술과 마음으로 시인하여 용서를 구하면
— 아버지가 아들의 잘못을 덮어주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듯이(녹 15:11, 또 진정 잘못을 인정하는 죄인에게 법적 사면이나 특사를 선포하듯이, 은혜를 베풀어 사유해 달라는 뜻이다.
솔로몬의 기도 모범
성전 봉헌에 즈음해, 솔로몬이 드린 이와 같은 기도는 → 하나님의 실제적 임재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드릴 기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즉, 성도는 어떤 태도로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되(렘 29:13) 여호와의 긍휼에 의지하여(시 69:16; 109:21; 단 9:18) 죄사함을 호소하여야 한다(대하 7:14).
❖ 22-39절 칠중 청원 기도
📌 왕상 8:31-53 강해,
본절부터 53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마 6:9-13)과 유사한 7중 청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솔로몬이 이와 같이 철중으로 청원한 것은 → 성경에서 ‘7-칠’ 이라는 숫자 가 완전성과 총체성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솔로몬의 칠중 청원 기도는 ⇒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칠중 청원 기도는
1.맹세와 관련된 악인의 정죄와 의인의 보호 (31, 32절)
2.범죄함으로 전쟁에서 패하였을 경우 회개하고 성전에 나아와 빌 때 회복시켜 주실 것에 대한 간구 (33, 34 절)
3.죄를 고백할 때 가뭄과 기근으로부터의 구원 (37-40절)
4.경건한 이방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과 이를 인해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외케 할 것을 구하는 내용 (41-43절)
5.전쟁에서의 승리 간구 (44, 45절)
5.죄를 고백할 때 포로된 것에서의 해방을 구하는 간구 (46-53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상 7가지로 정리된 가정된 상황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할 수 있는 전형적인 위기들이나 어려움들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그 모든 상황에 대해 온전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또한 가정하고 있다.
➤ 22-23절 첫째 간구
💡 22-23절
첫째 경우 :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악의 유무 판결을 위해 성전에서 기도할 때 공의로 판단해 주설 것을 청원
22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에게 범죄하므로 맹세시킴을 받고 그가 와서 이 성전에 있는 주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 왕상8:31 강해,
31, 32절은 이웃에 대하여 범죄한 사람이 성전에 나와서 맹세하는 것을 전제한 간구.
‘맹세시킴을 받고’
‘시킴을’ 이 부분만 직역하면 ‘그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는’ .
이는 이웃에게 범죄한 사람이 있는데, 증인이나 증거가 없을 경우에 그 범죄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맹세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출 22:6-12; 레 6:1-5).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위탁받은 재물 혹은 짐승의 분실 혹은 부상의 사고가 그의 과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증거나 증인이 없을 때 최후로 선택하는 방법으로서, 자신에게 결코 거짓이나 과실이 없음을 증인되시는 하나님께 맹세함으로 결백의 확실한 보증을 삼았던 것이다. 이는 만약 자신에게 거짓이나 과실이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처벌이라도 기꺼이 받겠 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맹세이기도 하다.
☛ 이러한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졌기에,
죄를 짓고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거짓 맹세할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홀히 여겨 모독하는 더욱 큰 범죄 행위가 된다.
☛ 따라서 거짓 맹세로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보응하여 달라는 솔로몬의 기도는
일차적으로 — 백성들의 질서와 안전을 위한 것이지만,
이차적으로는 —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걷지 말라’는 제 4계명(출 20:7)과 ,
➤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라는 주기도문의 첫부분을 상기시킨다.
23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의 행위대로 그의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 역대기 기자가 인식한 하나님:
본문을 통하여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이 단순히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직점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위로를 주기도 하시지만, 때때로 죄에 대한 심각한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신다. 본장 21절에서는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강조되었으나, 본문(23절)에서는 ‘우리외 죄를 낱낱이 살피시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다.
👉 이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그릇 행한 과거가 있던 본서 일차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죄에 대한 심각한 각성을 촉구하는 의미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 병행 구절인 왕상 8:32과의 원문상 차이점은 → 율법의 기능을 가르쳐줌
→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상으로는 본문과 똑같지만 원문상으로는 차이가 있다.
‘돌리시고’
역대기
(슈브)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 ‘거기에 상응하는 죄값을 보상하고’ 돌이킨다’
⇒ ‘죄인이 죄값을 치르고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는 것'에 강조점 제사장적인 관점에서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것을 강조
율법의 기능 : 율법이 ‘은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법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열왕기
(라솨으) ‘죄로서 정죄하다’
⇒ ‘죄인에 대해 정죄하는 것'에 초점.
선지자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긴 죄에 대해 책망하고 비난하는 어조.
율법의 기능 : 사무엘서나 열왕기서가 율법의 ‘정죄적 기능'을 강조
★ 율법이 가지는 ‘정죄'와 ‘은혜'라는 이 두 날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바르게 향하여 가도록 돕는 중요한 도구가 됨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이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되어서는 안된다. 율법은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고 우리가 잘못했을 때 우리를 정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범죄하지 않도록 우리의 삶에 울타리를 쳐주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파수꾼이 되어주기도 한다. 역대기서가 주로 이스라엘의 왕정사를 기록하되, 특히 율법에 나타난 은혜의 측면과 관계된 역사를 부각서키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역대기서가 단순히 사무엘서 나 열왕기서의 주요 내용을 다시 한번 반복해 적은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더욱 부각시켜 보여주는 역사서라는 사설을 확설히 알 수 었다.
📌 왕상8:32 강해,
‘주이 종들을 국문하사’
‘국문하사’
‘판단하다’는 의미.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행위와 마음을 감찰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자들의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표현
‘주의 종들’ 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나님을 왕과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 백 성 모두.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종들’로 지칭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들’로 지칭한 것은 그들에 대한 지배권이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또한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통일 왕국의 위업을 달성한 다윗과 이스라엘 민족의 뛰어난 지도자 모세를 ‘주의 종’ 이라고 칭했으며 (25, 53절), 현재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는 자기 자신도 ‘주의 종’이라고 일컬었다(28, 30절). → 이는 한 나라의 왕이나 위대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의 유일한 왕되시고 주인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다스 림을 받아야 할 미천한 종의 신분일 뿐임을 신앙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직역하면 ‘악한 자를 정죄하셔서 그의 길을 그의 머리에 주소서’
본문의 의미☛ 이미 범죄를 저지른 악인들의 죄의 경중을 규정해 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악인은 악인으로서의 응분의 대가를 마땅히 치르게 해달라는 의미이다.
‘행위대로’
그의 길 — 이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죄악된 삶의 방향인 동시에, 죄의 발자취를 상징함.
‘그 머리에 돌리시고’
그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이웃이 감당해야 했던 손해와 고통을 그 자신도 똑같이 받도록 벌을 내려달라는 의미이다.
➤ 따라서 본문의 전체적 의미는
죄없음을 증거하는 이들의 맹세를 하나님께서 직접 보시고 악한 자와 의로운 자를 판단하사, 죄를 지었음에 도 불구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는 이에게 그가 행한 악을 그대로 갚으심으로 그가 악인임을 증거해 달라는 의미이다.
➤ 결국 본문에서 솔로몬은 맹세의 선악 판단을 하나님의 공의에 의지하고 있는데,
⇒ 이는 하나님의 절대 공의에 근거하여 신정 국가의 공의를 올바로 세우고자 하는 그의 확고한 신념을 보여준다.
▶︎ 본문은 솔로몬이 백성들을 대표하는 왕의 입장에서 간구한 것, 이러한 하나님의 보응에서 솔로몬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왕의 신분이며 성전 건축이라는 대과업을 완수했다고 할지라도, 말년에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방의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악인으로 규정되어 왕국 분열이라는 응당의 대가를 치른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 준다.
➤ 24-25절 둘째 간구
- 칠중 청원 기도 중
- 앞선 31.32절에 나오는 첫번째 기도가 백성들 사이에서 벌 어지는 범죄와 그 해결을 요청하는 간구라면,
- 본절에서 40절까지에 동장하는 세 가지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범죄로 인한 국가적 재앙을 가정하며 그 해결을 요청하는 간구
💡 24-25절, 둘째 간구
이스라엘의 범죄로 전쟁에서 패하고 성전에 나와 회개하며 기도할 때 용서해 주시기를 청원
24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주께로 돌아와서 이 성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 빌며’
▶︎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경우 회복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 3단계공식 (35절에서도 강조됨)
1.회개(주께로 돌아옴)
‘돌아오다’ ‘뉘우치다' ‘회복하다’
죄를 단순히 지각이나 감정으로만 뉘우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죄악의 길에서 완전히 떠남으로 주께 돌아와,
이전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의지적 측면과 적극적 행위까지 포괄.
2.인정(주의 이름을 인정함)
‘고백하다' ‘인정하다' ‘찬양하다’
지극히 존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이를 고백하며 감사의 찬양을 올리는 적극적 행위.
3.기도(주께 빌며 간구함)
‘빌며’ — 대표자로서 모든 이를 대신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는 의미.
‘간구함' — 청원자가 자신의 의로움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보고 애타게 애원하는 것.
📌 왕상8:33 강해,
‘만일 … 주께 범죄하여 … 패하게 되므로’
선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군사적 열세나 정치적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다.
→ 즉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내려지는 징계의 결과였던 것.
이러한 징계의 심각성은 그것이 일시적 시련이 아니라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등 장기적 시련이라는 데 있었다(레 26 :17, 34-39; 신 28:25, 36-37).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은 물론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를 거치는 동안 불순종으로 인한 패배, 회개로 인한 회복의 과정을 거듭하여 경험하여 왔다.
— 이를 통해 솔로몬은 어떠한 삶이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을 가져오는지를 분명히 깨달았던 것이다.
때문에 솔로몬이 간구하는 바는,
지금의 평안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복된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음을 자각하여, 비록 불순종에 의해 적국에게 패하더라도 이스라엘이 다시 회개할 때 회복시켜 주시기를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해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25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 ‘그들’ 은 누구인가?
⇒ ‘역대기 공동체’
병행 구절인 왕상 8:34에는 본문의 ‘그들에게(라템)'란 표현이 빠지고 단지 ‘그들의 열조들에게 주셨던 그 땅'이라는 표현만 나와 있다.
▶︎ 본서 저자는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임을 역설하는 것.
본서 저자는 실제 징계로 인한 포로생활을 경험하였던 역대기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열왕기서에는 없는 ‘그들에게'란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
‘역대기 공동체' = 하나님께 범죄한 까닭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가 귀환한 본서 기록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열왕기서를 참고하면서 현재의 독자들에게 더욱 생생한 교훈을 주기 위한 의도,
⇒ 이를 통해 역대기 기자는 가나안 땅이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들에게 주셨던 땅일 뿐만 아니라 본서 저술 당시 선민 공동체에게 도 주셨던 ‘약속의 땅' 임을 역설하고 있다.
➤ 26-27절 셋째 간구
💡 26-27절,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해 가뭄의 형벌을 당하여 성전을 향해 회개하며 기도할 때 용서해 달라는 청원
26 만일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는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 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
📌 왕상8:35 강해,
‘만일 …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
‘하늘이 능동적으로 활동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여진 결과.
= 비가 오지 않음이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발생된 우연한 사건이 아닌,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징계의 결과 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레 26:19.20 ;신 28:23.24),
팔레스틴 지역은
샘이나 강이 흔치 않아 가뭄이 들면 아예 전체가 황무지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농작물은 오직 때를 따라 내리는 이른비(가을비)와 늦은비(봄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스라엘 땅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땅으로 설명(신 11:8-12),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순종하였을 때에는 — 때를 따라 내리는 적절한 비의 은총을, 불순종하였을 때에는 — 비를 막으사 가뭄의 심판을 내리심으로 이스라엘에 당신의 절대 주권을 나타내셨던 것이다(신 11:17),
‘그 죄에서 떠나거든’
1)죄에서 떠나는 것과, 2) 주께로 돌아오는 행위는
→ 동시에 일어나는 행위
반대로 말하면,
→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 곧 죄악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란 의미
이와 같이 범죄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심각한 결과를 동반하기 때문에, 이는 솔로몬의 기도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주요 주제로 심각하게 다루어진다.
‘떠나거든’ — (‘슈브’)
이 단어는 포로에서 귀환하는 것을 나타낼 때에도 자주 사용된다. 이러한 단어의 사용은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현실적 상황이 — 죄악에서 자신을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가는 영적 상황과 직결되어 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 낸다 (33, 34, 47, 48절)
27 주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시오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 솔로몬의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의 들으심과 사죄만을 간구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 달라는 간구로 이어지고 있음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 ‘가르쳐 주옵시며’
이는 범죄한 사람을 어떠한 고난의 상황 가운데로 던지심으로, 마치 복병이 쏟 화살처럼 불현듯 얻게 되는 깨달음과 친절한 교사와 같이 세세히 지적해 주심으로 얻게 되는 지혜의 교훈을 가리킨다.
이는 내적 소질을 계발하는 것과 같은 인간적 가르침을 뜻하지 않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교훈을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허락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율법 (출 12 :49)으로 번역되는 ‘토라’가 바로 이 동사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주지할 만한 사실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율법이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단순한 교훈이나 법률 조항이 아니라,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당면한 생생한 역사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기 위해 강권적으로 허락하신, 하나님 자신의 살아 있는 말씀임을 암시한다.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 이스라엘 자손들이 살고 있는 그 땅이 어떤 땅인지를 잘 보여주는 표현.
이러한 표현은 특히 본서의 일차 독자들인 포로기 후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신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정착한 그 땅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사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땅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땅임을 확인케 하여, 그 땅에 대한 깊은 유대감을 가지게 하였을 것이다.
📌 왕상8:36 강해,
직역하면 ‘당신이 당신의 백성에게 유산으로 주신 당신의 땅 위에’.
이러한 번역에서 잘 드러나듯이 솔로몬은 이 짧은 문장에서도 하나님을 지시하는 2인칭 대명사를 3회나 반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지배권과 그들이 딛고 살아가는 땅에 대한 소유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해서 고백하고 있다.
‘기업’ (’나할라')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은 그들이 수고하고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유업(遺業)의 선물로 받은 약속의 땅임을 잘 보여 준다. 즉 이 단어 속에도 땅에 대한 고유 권한이 여호와께 속해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주신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업이 되고, 그 안에 거하는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의 유업이 되는 → 순환 관계를 지니고 있음
⇒ 따라서 본문은, 솔로몬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땅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표현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 땅에 재앙을 내리실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유업으로 후손들에게 전해질 땅이므로, 백성이 회개할 때에는 곧 다시 회복시켜 달라는 기원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 28-31절 넷째 간구
💡 28-31절, 넷째 간구
이스라엘에 임한 여러 가지의 재앙들로 인해 성전을 향해 회개하며 기도할 때 용서해 달라는 내용.
28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들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거나를 막론하고
▶︎ 본문에 열거되는 재해들
근동 지역에서 발생하는 대표적인 자연 재해들. 솔로몬은 이 기도를 통해 이러한 자연 재해의 종류는 각기 다르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근과 전염병이 있거나’
📌 왕상8:37 강해,
‘기근이나 온역이’
기근과 온역은 전쟁과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우기가 짧은 팔레스틴 지역의 특성상, 전쟁이 있으면 물을 제대로 저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물이 부족하거나 오염되면 곧바로 기근과 역병이 함께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재앙이 모두 백성들을 당신에게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 섭리의 일환이라는 사실이다.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흉년의 대표적인 원인들
➤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작물에 발생하는 이러한 현상들을 단지 자연 현상으로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죄악에 대한 징계와 회개에 대한 촉구의 표현으로 여겼다.
‘곡식이 시들거나’
식물들이 성장하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 고 조기에 바싹 말라버리는 현상. 이는 팔레스틴 동남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시라코(sirocco) 열풍의 결과였다(창 41:6). 이 바람은 곡식 수확의 계절인 5월이나 10월 이전에 불며, 며칠 간 계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결과 마치 불이 농작물을 태우고 지나간 것과 같이 곡식이 순식간에 건조하여 농사를 망치는 현상이 종종 일어났다(암 7:4),
‘깜부기가 나거나’
농작물의 잎 혹은 어린 열매 따위에 곰팡이가 퍼렇게 피어 시들어 말라 죽게 되는 ‘백분병 (mildew)’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흉년의 직접적인 원인이나 기근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요인. 이러한 벌레들이 이스라엘에 창궐할 수밖에 없었던 지정학적 원인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곤충들의 번식이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는 사막에서 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재해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정학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있다고 말씀한다(신 28:38.42).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본문에 나타난 상황을 본절에 언급된 여러 가지 재앙들 중 독립된 하나의 재앙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앞서 언급된 바 있는 기근이나 온역들을 발생시키는 인위적 요인으로 간주할 수도 었다.
왜냐하면 적들이 성읍을 포위했을 때, 성내에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하는 것이 당시 통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 왕상 8:37 강해,
사실상 당시 솔로몬에게는 이와 같이 군사적으로 그를 위협할 만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솔로몬에게 평화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역사상 지속적으로 팔레스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 사하였던 앗수르와 애굽은 쇠퇴의 길에 있었으며 (3:1 강해 설명 참고), 주변국들은 이스라엘의 강대함에 눌려 감히 도발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나라의 흥망 성쇠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면
⇒ 분명 지금의 이 평화는 사라지고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신 28: 15. 25. 52).
29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과 고통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 역대기 저자의 왕과 백성들과의 관계 인식
본서 저자의 경우, 왕들과 백성들의 연대 관계와 그들이 공동으 로 당한 비극적 운명을 지적하는 것보다, 선민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주제에 더 큰 강조점을 두었다. 따라서 본서 저자의 시각에서는 왕들이건 백성들이건 어느 누구이건 상관없이 스스로의 잘못을 깨달았을 경우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과 고통을 깨닫고’
⇒ 28절의 고통의 상황으로 인한 회개와 간구를 가정함.
마음의 재앙과 고통은 — 죄로 말미암은 ‘육체적 고통' 만 아니라 그에 따르는 ‘정신적 고뇌’도 동시에 의미한다. 역대기 본문은 원어의 의미를 통해 열왕기서보다 훨씬 더 죄와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 더 섬세하고 민감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왕상8:38 강해,
하나님이 주신 재앙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회복의 지름길임을 제시.
본문 전체는 재앙에 담긴 징계의 의미와 목적을 분별하여, 각 개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마음 아파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회개할 것을 교훈한다.
‘재앙’ (네가으)
‘재앙, 징책, 상처’라는 뜻.
본래 이 동사는 ‘닿다’, ‘어루만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의 손길이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감동시키신다’ (삼상 10:26)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이 범죄한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함이며, 최종적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당신께로 돌이키기 위함임을 보여준다.
▶︎ 솔로몬이 요구하는 합당한 회개는?
본문은 죄에 대한 개개인의 책임 잇는 회개를 강조하고 있다.
솔로몬은 현재의 고통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한 일시적이거나 가식적인 기도가 아닌,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진실한 회개를 하나님께 드려야만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30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의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 하나님의 응답을 간구함.
▶︎ 응답을 간구하는 근거 :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
📌 왕상8:39 강해,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마음' (’레바브')
단순히 마음, 즉 인간의 내적 감정의 측면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지(知) , 정(情) , 의(意)를 포괄한 인간의 전인격적 측면 모두를 의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인 후회의 감정이나 가식적인 종교 행위에 속으시는 분이 아니다.
실로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그의 숨은 계획까지도 모두 아시는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다.
본문은 백성들이 재앙에 직면하여 그 재앙을 하나님께서 주신 징계로 깨닫고 각자 그들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슬퍼하며 뉘우치고 그 죄 가운데서 돌이킬 때, 그들의 이러한 진심 어린 마음을 살펴보시고 그들에게 긍훌과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의미의 기도이다.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당신이 당신 혼자 당신이 아십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거듭 3중으로 반복함으로 강조.
31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며 주의 길로 걸어가리이다
⇒ 28-30절의 청원이 응답될 경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나타날 결과
▶︎ 역대기 기자가 제시하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역대기 기자는 열왕기서를 참고하고 있지만 그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신앙의 적용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왕기서는 ‘여호와를 경외하였다'고 추상적으로 말하지만, 구체적 방법이 명시되어 있지 않음)
폰 라드(von Rad)가 역대기를 가리켜 ‘레위적 설교(Levitical sermons)' 라고 청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역대기 저자는 제사장적 관점을 가진 훌륭한 설교자였다. 때때로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인지를 모틀 때가 있다.
⇒ 본문은 그것에 대해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 왕상8:40 강해,
‘그리하시면 … 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
죄의 용서와 회복의 결과, =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신4:10; 시130:4)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진실로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면, 이스라엘은 그 때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 하지만 본문을 하나님의 사유를 조건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제의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즉 솔로몬은 지금 하나님을 경외할터이니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솔로몬은 다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근거하여 그분의 긍휼하심을 기대했던 것이며, 또한 사유 하심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여 이러한 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 32-33절 다섯째 간구
💡 32-33절, 다섯째 간구
이방인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경우라도 응답하실 것을 간구함.
32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대하여도 그들이 주의 큰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본문은, 구속사의 전개 방법상 선민 이스라엘이 그 주역이었던 구약 시대에도 결코 이방인이 그 구속 대상에서 배제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 왕상8:41 강해,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대하여도’
‘이방인’(’노크리’)
‘이방인’, ‘타국인 이란 뜻.
‘게르'와는 전혀 다른 의미(나그네, 타국인, 거류자)
‘게르’ → 비록 혈통적으로는 비히브리인이나 히브리 사회에 통화되어 히브리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체류민
‘노크리’ 이스라엘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이질적인 타국인. 자신의 고국과의 유대를 끊지 않고서 상업이나 여행 등의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이스라엘에 머무는 사람들.
(예) 스바 여왕이나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과 같은 경우.
본문의 간구가 의미하는 바,
그러므로 본문은 비록 이스라엘과 관계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성전에 자기 이름을 두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와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어달라는 간구.
이는 구약에서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전우주적인 통치를 인정하는 표현,
앞으로 복음이 온 세계에 전해짐으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구원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었 다(창 22:18 ; 출 22:21 ; 민 15:14-16 ; 시 22:27.28 ; 사 49:6 등).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 솔로몬 왕국의 확장된 영향력을 보여줌
▶︎ 이들의 방문 목적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에 온다는 것은 —
단순히 성전의 화려함이나 영광을 구경하기 위해서이거나 이스라엘과 교역을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를 신뢰하기에 여호와께 경배하기 위해서 오는 것을 뜻한다 (사 56:6,7).
⇒ 본문을 통해서 이미 솔로몬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여호와를 경배하는 미래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상8:42 강해,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
▶︎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여호와를 경배하게 된 원인
능한 손, 펴신 팔
=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붙잡고 있는 바로의 강팍한 마음을 치시기 위해서 당신의 ‘강한 손’을 사용하셨다(출 3:19;6:1).
또한 ‘팔을 펴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기도 하시고 원하시는 때에 그 재앙을 거두기도 하심으로 이 세상이 당신께 속한 줄을 바로에게 분명히 알리셨다(출 9:15, 29).
→ 하나님의 능력의 현시(顯示)와 함께 이루어진 이러한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 대대로 기억되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본문에 해당하는 솔로몬의 기도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자신들에게도 그와 같은 구원의 능력이 임하기를 기대함으로 성전을 향해서 기도할 경우, — 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총의 손길과 능력의 팔을 나타내실 것을 간구하는 내용이다.
▶︎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인정한다는 사실은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세계 만방에 퍼져 있는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될 신약 시대를 예고한다.
즉 구약 시대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펴신 팔은,
신약 시대 죄의 종으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팔과 손이 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33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모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 이방인들의 성전을 향한 기도에 대한 응답의 결과 하나님의 명성이 더 널리 퍼질 것
📌 왕상8:43 강해,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야다')’
► ‘알고’ (’야다’)
성경에서 ‘야다으’는 단순히 이성을 통해 어떠한 사실을 깨닫는 것(창 29:5) 뿐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부름에 응답하여 말씀을 실천함으로 긴밀하게 관계를 맺는 것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삼상 2:12 ; 겔 6:7; 22:15-16),
➤ 결국 본문은 주의 명성이 세계에 알려지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닌,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깨닫고 그를 믿으며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의 율법을 사랑하여 지키기를 바란다 는 뜻이다(시 119:97, 105, 127).
➤ 이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대로 살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이다.
이 기도대로 하나님의 이름은 신약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유대인의 테두리를 벗어나, 땅 끝까지 전파됨으로 만민이 믿게 되었다(사 11:9.10; 롬 3:29),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 ‘성전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불려졌다'는 것의 2가지 의미.
1.성전의 주인이 왕이나 백성들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
이는 고대의 왕들이 한 지역을 정복했을 때 자신의 소유됨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를 세운 관습과 관련된다(삼상 15:12),
2.이름이 불려진 대상, 즉 여호와 자신이 성전 안에 상징적으로 임재해 계신다는 것.
➤ 솔로몬은 ‘성전'이 어떤 의미로 알려지기를 바라는가?
→ 솔로몬은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을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이 알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솔로몬은 자신이 건축한 성전이 화려한 재료로 구성된 웅장한 건축물로만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으며, 본래 그 건축 목적에 부합되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거기에 당신의 권위와 영광을 드러내시는 곳으로 이스라엘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알려지기를 소원했다.
➤ 34-35절 여섯째 간구
💡 34-35절, 여섯째 간구
전쟁에 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을 향한 기도를 들으시 고 그들의 사정을 살피실 것을 간구
34 주의 백성이 그 적국과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께서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그들이 주께서 택하신 이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한 전쟁, 즉 성전을 행해야 할 패에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
📌 왕상8:44 강해,
‘주께서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주께서 보내신 길’
여기서의 전쟁은 국익(國益)만을 도모하는 사사로운 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 하기 위한 성전(聖戰, Holy War)을 의미함. 이는 하나님께서 인정한 정당한 전쟁으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심판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전쟁을 뜻한다(출 14:13.14;수 6:2-5), 그러므로 솔로몬은 전쟁에 종군(從軍)하는 것(삼상 17:42)을 본절과 같이 ‘주의 보내신 길’로 표현하였던 것
‘보내신’
단순히 물건이나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왕이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신하를 ‘파송하는’ 것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의적으로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된 신분으로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 되시는 여호와의 뜻을 적들과 세상에 알리고 실현하기 위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
‘나가다’
단순히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전쟁을 위해 군대가 ‘출전(出戰)’하는 것. 특히 본절의 상황에서는 자국으로 쳐들어 온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출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 적국으로 출전하는 것을 뜻한다.
⇒ 즉 군사들이 이방 지역에 있기 때문에—성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성전 있는 편을 바라보고 여호와께 기도할 경우를 가정하고 있는 것.
► 이러한 기도가 가능하였던 것은
성전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성전에 자신의 이름을 두신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고 능력으로 응답하시기 때문이었다.
‘주께서 택하신 이 성과’
► 예루살렘이 거룩한 이유
예루살렘성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실 성전을 지을 곳으로 유일하게 선택하신 장소(대하 6:5.6).
따라서 예루살렘은 원래 거룩하거나 성전이 있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장소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35 주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보시옵소서
⇒ 적국에서 전쟁하는 이스라엘 군사들이 성전과 예루살렘성을 향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를 기원하는 간구
‘그들의 일을 돌보시옵소서’
☛ 직역하면, ‘그리고 당신이 그들의 공의를 행하소서’
‘그들의 일’
‘공의', ‘직무' 라는 뜻. (’솨파트'에서 유래)
‘돌보시옵소서’
‘행하다' ‘실행하다’
► 이러한 표현은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 이 전쟁의 성격, 이스라엘의 사사로운 욕구를 채우기 위한 전쟁이 아닌 하나님 자 신이 악의 세력들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는 성전.
► 전쟁을 수행하는 이스라엘의 합당한 자세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전쟁을 대행하는 이스라엘은 전쟁시에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대의 명분이 분명히 있어야 했으며, 전쟁의 과정 역시 철저히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해서 수행해 나가야 했다.
➤ 36-38절 일곱째 간구
📌 이 단락은 앞에서 언급된 다른 기도 문들보다 양적인 면에서 2배 이상이나 길다. 이는 칠중 청원 기도 중 마지막 기도에 강조점이 있음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솔로몬의 기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 상황을 가정한 일곱번째 기도에서 강조점을 나타내는 것은 본서가 일차적으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임을 암시한다.
💡 36-39절, 마지막 간구
⇒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적국에 포로로 끌려간 경우 성전을 향헤 기도하면 회복시켜주실 것을 간구함.
36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적국에게 넘기시매 적국이 그들을 사로잡아 땅의 원근을 막론하고 끌고 간 후에
► 본서가 기록될 때의 상황에서는 ⇒ 이 일이 과거에 이루어진 것이었음.
‘먼 땅’은 → ‘바벨론 포수' 사건을 상기케 하였을 것.
‘가까운 땅’ → ‘유다 제12대 왕 아하스(B.C. 731-716년)때의 사건’을 상기케 하였을 것(28:6-15).
아하스는 왕이 된 후에 우상숭배에 열중하였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20만명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로 잠시 동안 끌고가도록 하셨던 것.
📌 왕하 8:46 강해,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결코 범죄치 아니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라는 뜻.
▶︎ 인간의 존재를 깨달은 솔로몬의 신앙고백적 간구
이는 근본적으로 부패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본질상 범죄할 수밖에 없음을 철저히 깨닫고(용 15:16 ; 롬 3:10-18),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 보며 비록 범죄하였을지라도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솔로몬의 신앙 고백적 표현. 인간의 본질적인 상태까지도 통찰하고 있는 이러한 솔로몬의 고백을 통해서 그의 지혜는 정치, 경제, 군사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 측면에서도 탁월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께서 진노하사’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맹렬하다는 것은
⇒ 그만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체적인 삶에 철저히 개입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범죄한 백성을 멸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당 신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사랑하는 자식이 잘못을 범했을 때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아비가 매를 드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히 12:6-8), 택하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그들을 적국에게 넘기시매’
►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넘기다 = 소유권을 일임하는 것.
→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할 때, 이스라엘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죄의 대가로 그들을 패하게 하사, 포로로 잡아가도록 이스라엘에 대한 소유권을 적 국에게 일임하신다.
이스라엘 패배의 의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전쟁의 패배는 군사적 열세의 결과가 아니라, 범죄한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다.
37 그들이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들을 사로잡은 자들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행하였나이다 하며
⇒ 포로 상황에서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오직 범죄한 길에서 돌이켜 여호와께 돌아가는 참된 회개밖에 없었다.
▶︎ 본문이 표현하는 참된 회개
⇒ 본문은 회개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정확하게 깨닫고, 의지적으로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 성경에서 일관적으로 강조되는 회개의 본질은
단순히 감정적인 동요나, 혹은 지적인 동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모든 것과 결부해서 자신의 행위를 고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적극적인 행동까지 포함한다(렘 18:11).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 회개하는 자의 고백
‘패역을 행하며’
진실이나 정의를 자신의 이익에 따라 구부려 왜곡시킴으로 다른 이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는 불의한 상태.
‘악을 지었나이다’
방종에 빠져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
38 자기들을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과 주께서 택하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지성과 의지, 감성의 처소로서의 ‘마음'
— 이는 살아 숨쉽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는 인간이란 존재의 전인격의 통합체를 의미하는 것.
본문은, 이스라엘이 범죄의 자리에서 돌이켜 자신들의 지성과 의지와 감성을 하나로 모아 주께 온전히 돌아옴을 강조한다.
▶︎ 이처럼 참 회개의 조건은,
1.전심전력하여 주께로 돌아오는 지성적 · 감성적 · 의지적 결단과
2.이에 이어지는 실천을 그 조건으로 한다.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과 주께서 택하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
► 땅, 성, 성전
=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과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언약의 성취를 나타내는 실체이면서 중요한 상징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디에 처하든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해야 한다.
► 어디서든 언약을 상기하고 기도하면 들어주시기를 구하는 솔로몬의 기도의 믿음의 기초는 어디에 있는가?
모든 곳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무소 부재하심과,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보시오며 주께 범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옵소서
⇒ 일곱번째 청원 기도를 끝내면서 백성듈의 성전을 향한 기도를 들으시고 긍홀을 베풀어 주실 것을 다시 한 번 간구함
위의 35절 강해와 동일함.
❖ 40-42절 성전 봉헌 기도를 마치는 솔로몬의 네가지 간구
💡 40-42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약속하신 것에 근거하여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호소함.
40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
► 간구1 : ‘나의 하나님이여 …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
눈이 감기지 않고 계속적으로 열린 상태.
누군가의 말에 귀를 예민하게 기울여 경청하는 자세.
⇒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세심하게 자기 백성들을 돌보실 것이란 솔로몬의 믿음을 반영하는 것인 동시에, 생생한 신앙 고백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4)
41 여호와 하나님이여 일어나 들어가사 주의 능력의 궤와 함께 주의 평안한 처소에 계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하옵건대 주의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입게 하시고 또 주의 성도들에게 은혜를 기뻐하게 하옵소서
► 간구2 : ‘… 주의 능력의 궤와 함께 주의 평안한 처소에 계시옵소서’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던 찬양 — 시132:8의 인용
132:8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시132편]
내용상 다윗이 하나님이 거하실 장소틀 찾는 행동(2-5절)과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킨 것(8절), 그리고 시온성과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10-13절) 등을 언급하고 있다. 즉 다윗 왕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있는 장막으로 처 음 모셨던 상황을 그리고 있다.
본문에서 역대기 기자가 시편 132편을 인용한 것은 다윗과의 연장선상에서 솔로몬의 성전 봉헌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원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살려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이제 당신께서 당신이 쉴 곳을 향하여 일어나 들어가셔서 당신과 당신의 능력이 깃든 궤와 함께 계시읍소서'
► 간구3 : ‘.. 주의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입게 하시고,
시132:9의 인용 — 봉헌하고 있는 성전에서 일할 제사장들을 위한 간구 132:9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 이러한 기도가 필요한 이유는 아무리 화려한 성전이 건측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제 성전에서 봉사할 제사장이 하나님의 구원을 힘업지 못한다면 — 그 성전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기 때문…
[시132:9, 제사장이 ‘의'를 입어다고 묘사됨]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사 59:17)의 표현을 연상할 수 있다.
➤ 입는다
= 궁극적으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러스도께서 전사의 모습을 갖춘 것을 예언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신약시대에 ‘만인 제사장’으로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한 것과도 관계된다(엡 6:13- 17).
► ‘주의 성도들에게 은혜를 기뻐하게 하옵소서’
직역하면, ‘당신의 경건한 자들이 선함 안에서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 이는 성도의 궁극적인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줌.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예의 유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때 주어지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빌 4:4).
42 여호와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시옵고 주의 종 다윗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더라
► 간구4 : 솔로몬이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함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서 얼굴을 돌이키지 마옵시고’
원어적 의미에 따르면, ‘하나님이 거절하심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가 얼굴을 돌이킨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 이러한 본문은 마치 기름부음 받은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문전박대틀 당하고 쓸쓸히 돌아서 가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주의 종 다윗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옵소서’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6:4-11)
다윗이 행한 자비로운 행위
시 132:1-5 단락의 서두에
‘다윗의 모든 근심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근심은 무엇인가?
다름아닌 여호와의 성전을 짓고자 하는 갈망. 다윗은 근심 가운데 자신의 장막에 들어가 침상에도 눕지 못하고 여호와의 처소 지을 곳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솔로몬은 왕이 되기 전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성전을 짓 기 위헤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 본문에서 솔로몬이 바라는 소원과 고백
하나님에게 신실하였던 아버지 다윗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모습이 되었으면 하는 소원과 함께 본문의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들에게 신앙적 모범을 보였던 다윗과, 그 아버지의 신앙의 유산을 소중히 간직하려는 솔로몬의 아름다운 관계가 멋진 감동으로 다가온다.
주석 마지막 부분 (역대기와 열왕기 비교/관점과 의미)
💡 주석 마지막 단락
이상과 같이 언약궤 지성소 안치식에 즈음한 솔로몬의 성전 봉헌사와 성전 봉헌에 즈음한 솔로몬의 기도를 기술한 본장은 왕상 8장과 병행되지만, 구절 곳곳에서 역대기 저자만의 독특한 관점과 신학이 배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바,
1.특히 본서의 저자는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 ‘포로됨과 회복’ 이란 주제를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2.또한 성전의 제의적 기능보다는 ‘기도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을 더욱 부각시켰다.
특히 철중 청원 기도에 나타난 바 솔로몬이 상정한 여러 가지 환난과 어려움은
본서 독자들이 이미 체험한 바이기도 하며 현재적으로 직면한 어려움일 수도 있었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 기도할 때에 구원을 베풀어주시라는 솔로몬의 기도가 어떻게 와닿았을까?
본서를 읽는 일차 독자들에게 너무나 생생하고 절설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장에 서술된 내용들은 열왕기서의 본문을 참고로 기록되었겠지만 무의미한 반복이나 인용이 아니라, 본서가 쓰여질 당시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필요한 권면과 실제적이고 신앙적인 도움을 주는 내용으로 서술된 것 임을 알 수 있다.
[영적 교훈 서론 참고]
이러한 본문을 열왕기서의 병행 문단과 비교하여 보면 13절의 못으로 만든 대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는 39절까지의 내용이 열왕기서의 병행 문단과 문자적으로 거의 일치함.
역대기만의 독특한 기록.
40-42절의 내용은 역대기서만의 독특한 기록. 또 여기에 이어지는 7:1-3의 하나님의 불의 응답도 역대기서만의 독특한 정보. 그리고 역대 기서는 열왕기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백성들을 향한 솔로몬의 축복과 권면 (왕상 8:54- 61) 을 생략함.
역대기서 기자가 열왕기서에 언급된 백성을 향한 축복과 권면을 생략한 것은
혹여 본서의 독자들이 솔로몬이 제사장의 권한을 침해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헤서라고 볼 수 있음.
열왕기 저자가 이 사실을 밝혔던 이유,
솔로몬의 축복이 제사장의 고유 영역인 하나님의 권위에 힘입어 하는 축복이 아니라 단지 백성을 통치하는 왕으로서 백성에게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라는 점에서 이러한 언급이 벌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40-42절의 내용과 7:1-3의 내용을 삽입한 의도,
역대기 서 기자가 열왕기서의 기자에 비하여 성전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려는 의도를 지닌 까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튜헨리 주석]
솔로몬은 앞에 나온 구절들 속에서 보면, 사실상 봉헌식에 서명을 한 셈이다.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성전은 하나님의 영예와 하나님 예배를 위해 사용되게 되었다. 이제 여기에서 그는 성전 성별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이 사실은 위대하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표상인 것이며,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려야 하며,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모든 은총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일을 행할 때에는 늘 그를 염두에 두고 해야 한다.
우리는 이 기도의 세부 내용을 이미 보았으므로(왕상 8장), 여기서는 묵상하기에 적합한 제목이 될 몇 구절을 단편적으로 모아 보았다.
Ⅰ. 가끔 제시되어 오는 몇 가지 교리적인 진리가 있다.
1.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말로 묘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천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다" 는 것을 알고 있다(14절). 모든 피조물에는 동류가 있으나 창조주에게는 그의 짝이 없다. 그는 모든 존재보다 무한히 높으시다. 영원히 미칠 축복의 "만유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라."
2.이스라엘 하나님은 말씀하신 사실에 신실하시며,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를 성실하게 섬기는 자들은 모두 그가 성실하고 자애로우심을 분명히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을 항상 염두에 두며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처럼 선하시고 또 그 이상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을 지키실 것이요, 또한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14절).
3.그는 무한하시고 광대하신 자이므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그를 포괄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그를 예배한다 해도 그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더하지 못한다(18절).
그는 피조물의 한계를 무한히 초월하고 계시며 이성(理性)을 가진 모든 피조물의 찬미보다 무한히 뛰어나신다.
4.그는, 아니 "그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신다" (30절).
사람의 모든 생각과 목표와 감정이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게 드러난다. 우리는 마음의 상상과 의도를 사람들이나 천사들 그리고 마귀들에게는 감출 수 있을지라도, 마음속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 자체와 그 모든 맥박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는 감출 수가 없다.
5.이 세상의 생활 속에서는 이처럼 흠없는 완전한 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36절).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 아니,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자는 없다. 그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전도서(7:20)의 말과 일치하고 있다.
Ⅱ. 여기에 주목해야 할 몇 가지 가정 또는 사례가 있다.
1.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혹이나 논쟁이 일어나서, 쌍방이 하나님께 호소하려고 한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증언을 할 자는 맹세를 해야한다는 것이다(22절).
고대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양심과 올바른 이성이 남아 있는 한 맹세에 대한 존경심은 지속되리라는 것을 추정하고 있다.
2.그는 비록 이스라엘이 깊은 평화와 평정을 즐길지라도 언젠가는 환난의 때가 오리라는 것을 생각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번영이 영구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죄가 생기면 그 번영을 요동시키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3.다른 때에는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던 자들이라도 환난을 당하여 급히 그리고 간곡하게 하나님을 구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환난 가운데 있을 때는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자백할 것이며, 주의 이름을 고백하고 주께 간구할 것이니라."
고난은 하나님이 떠나 주기를 바라던 자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이끌어 갈 것이다(24, 26, 28절).
4.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방인들이 멀리서 오리라는 것을 추측했다.
이것은 열방의 신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친히 온 세상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셨는가를 고려해 볼 때 당연한 일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Ⅲ. 여기에 매우 간곡한 탄원이 있다.
1.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거기 두리라고 말씀하셨던 장소이니, 그 전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그것을 주시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었다(20절).
만일 하나님께서 친히 그 전이 영원히 자기의 평안한 처소가 되리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더라면, 솔로몬은 다른 어떤 집보다도 이 전에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도록 해달라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매우 기뻐해 줍시사고 하는 것은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간구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매우 기뻐하신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러나 그는 어떤 집에 대해서도 "이는 내 사랑하는 처소라" 고 말씀하시지는 않고 있다.
2.그 성전을 향해 또는 그 성전 앞에서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용납하여 주실 것을 바라는 것이었다(21절).
그는 그들이 기도를 하든 말든 그들을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청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어서 그들을 도와주시기를 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까지도 우리의 간구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독려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하시는 장소에서 심지어 하늘에서 들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하늘은 그가 항상 거하시는 곳이니 이 성전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하늘에서 도움이 와야 한다.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모든 응답을 예시하여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내어 쫓은 악을 가까이 못하게 한다."
3.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호소를 공의대로 판단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23, 30절).
우리도 믿음으로 그것을 간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롭게 판단하는 보좌에 앉아 계신다.
4.백성들이 회개하고 마음을 바로잡아 하나님을 구할 때는, 그들에게 다시 긍휼을 베푸시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있다(25, 27, 38, 39절).
우리도 또한 이것을 믿음으로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을 용납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심을 거듭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5.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전에서 환영받도록 허락해 주실 것이며, 그들의 기도에도 응답하시기를 하나님께 바라고 있다(33절).
외국인이나 나그네에게도 의무를 규정하는 그런 율법이라면, 왜 특권인들 못주겠는가?(레 24:22)
6.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적대하는 자들을 대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호소를 들으시고 신원해 주시기를 구한다(35절).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소서" (39절에 반복된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면 그들의 사정은 하나님의 사정이므로, 하나님도 그것을 지원하실 것이다.
7.그는 이 기도를 자기의 인자하신 아버지에게서 배운 구절과 그의 시편 한 구절에서 빌어온 말로 끝내고 있다. 열왕기에서는 그것을 보지 못했으나, 여기에서 그것이 나와 있다(41, 42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를 지도하는 데 유용하다. 또 하나님의 영에서 나온 말 이상으로 하나님께 잘 말해줄 인간의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위의 말씀들은 솔로몬을 지도하는 데에 비상하게 사용되었다. 그것은 그 말씀들은 솔로몬이 지금 행하고 있는 바로 그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편에서 그 말씀들을 볼 수 있다(시 132:8-10). 그는 기도했다(41절).
(1)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소유하시고 계속 그것을 점유하시기를, 그의 안식처로 삼으시기를 기도했다.
"주와 궤" 가……. 법궤의 하나님이 없다면 궤가 무슨 소용이랴-의식(儀式)의 하나님이 없다면, 의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 성전 사역자들이 백성의 축복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들로 구원을 입게 하시고, 즉 그들 자신을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의의 제물을 드림으로써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3) 성전의 예배가 주의 모든 백성들에게 풍성한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 주기를 기도하고 있다.
"주의 성도들이 은혜를",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을(시 65:4) 기뻐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기뻐하며 돌아가게 하소서" 라는 것이다.
그는 두 가지를 탄원하고 있다(42절).
[1] 하나님께 대한 자기 자신의 관계.
"주의 기름 부음받은 자에게서 얼굴을 돌이키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를 왕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러하오니 주께서 나를 인정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2] 그의 아버지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
"주의 종 다윗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옵소서."
즉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경건함"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그렇게 풀이하고 있으며, 그 단어는 때로 그러한 뜻을 지닌다), 궤에 대한, 그의 경건한 보살핌과 관심을 기억하옵소서(시 132:1, 2 이하 참조)라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모든 환난 때에 그의 큰 도움과 위로가 되시겠다는 그 "약속" 을 기억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는 솔로몬처럼 그리스도를 주목하면서 이렇게 탄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시어 우리와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시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단어 그대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야(칠십인역대로) 주의 그리스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주께로 나아옵니다. 주께서 항상 그의 기도를 들으시오니 결코 그에게서 얼굴을 돌이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 아뢰올 만한 우리 자신의 의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여, 주의 종 다윗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이요(사 42:1), 다윗이라 불리우고 있다(호 3:5).
"주여 그가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시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를 용납하소서. 그가 그의 아버지의 영예와 사람의 구원에 대해 자상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 그가 그 원리에서 행하시고 고난을 겪으셨던 것을 기억하옵소서. 영원한 언약의 약속을 기억하소서."
그것은 대가 없는 은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신 언약이며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 이옵니다(사 55:3; 행 13:34).
이것이 우리 모두의 열망, 우리 모두의 소망, 우리 모두의 기도, 우리 모두의 탄원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