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사무엘하 10, 고린도후서 3, 에스겔 17, 시편 60,61
묵상구절
- 솔로몬 성전에 대한 여호와의 열납과 솔로몬을 향한 약속 및 경고
1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을 마치고 솔로몬의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그가 이루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12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13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17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법규를 지키면
18 내가 네 나라 왕위를 견고하게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버지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하리라
19 그러나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을 경배하면
20 내가 너희에게 준 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 내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한 이 성전을 내 앞에서 버려 모든 민족 중에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리니
21 이 성전이 비록 높을지라도 그리로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22 대답하기를 그들이 자기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붙잡혀서 그것들을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다 하리라 하셨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 서론
앞선 1-10절은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낙성 제사를 거행한 동시에 장막절을 준수한 사실에 대헤서 다루었다.
본단락 11-22절은 성전 건축 뿐 아니라 왕궁 건축까지 마친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주시는 말씀을 다룬다.
따라서 이는 앞절의 사건으로부터 약 13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발생한 일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과 그 계승자들이 당신의 율례와 규례를 순종한다면 다윗 언약대로 그 왕위가 계속 이어질 수 있겠지만,
그들을 비롯해 이스라엘이 범죄할 경우에는 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날 뿐 아니라 성전까지도 훼파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본단락 특징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신 28:1-68에 나오는 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중에 따른 저주라는 경고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이를 신 28장의 요약 형태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전반적으로 다윗 언약의 재확인으로서 의 성격을 지닌다. 즉 다윗 언약의 영속성에 대한 보증인 것이다.
병행 본문과의 대조
왕상 9장과 비교할 때 순종에 따른 측복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차이점 1 :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신 사실과 성전을 열납하신 사실에 대하여
열왕기는 단 한절로 간단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 역대기는 12b-16절에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 역대기 저자의 의도
이는 저자가 포로 귀환 세대인 본서의 일차 독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 생활을 강조하기 위함.
차이점 2 :
13, 14절 부분 즉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여러 가지 재앙을 만났을 때 그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사하며 그 땅을 희복시키러라는 약속의 말씀은 오로지 역대기에만 기록되어 있는 내용.
즉 본서 저자는 열왕기서의 기록에 13.14절의 내용을 첨가한 것.
➤ 그렇다면 이렇게 한 역대기 저자의 의도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아마도 본서가 쓰여질 당시 본서 일차 독자들이 선민 신정 국가의 회복과 재건을 갈망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회복과 재건을 위해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
5.솔로몬은 자기의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하나님의 전과 그 자신의 집을 장식하려는 모든 계획을 잘 수행했다(11절).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로 시작하는 자들의 사업은 성공적으로 되어 갈 것이다. 솔로몬이 자기가 시작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었고, 그가 그 가운데서 형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 1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을 마치고 솔로몬의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그가 이루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직역하면, ‘솔로몬이 그 마음속에 만들고자 한 모든 것을 다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 원문은 성전 건축이 처음부터 솔로몬의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건축 사업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병행구절 왕상 9:1과 비교
열왕기 저자는 긍정/부정의 의미를 포함한 기록
왕상 9:1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을 마쳤다'
솔로몬이 여러 건축 사업을 성공리에 완수하여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긍정적 의미와, 더불어 솔로몬의 암울한 미래를 내다보면서 그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같은 내적인 일이 아닌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은 외적인 일에 치중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의미도 포함시켜 그와 같이 기록했다.
반면 본서 저자는
다윗 언약에 입각하여 솔로몬의 행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 그의 건축이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형통하게 이루어졌음을 나타내기 위해 본문과 같이 기록하였다.
●솔로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역대하 7:12-22)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불을 나타내시어 솔로몬의 기도가 열납되었음을 알리셨다. 그러나 기도는 상달되었을지라도 그것에 대한 회답은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에 한번 그러하셨던 것 같이(1:7) 그때처럼 제물을 드린 다음날 밤에 나타나시어, 그의 기도에 구체적인 응답을 주셨다. 우리는 그 내용을 이미 읽었었다(왕상 9:2-9).
💡 12절,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나타나사’
여호와의 현현. ‘그가 자신을 보이셨다’로 직역됨.
시기
여호와께서 밤에 나타나 계시를 주셔다.
병행 구절, 왕상 9:2에는 ‘하나님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 열왕기서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기브온에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셨다(왕상 3:5). 그렇다면 왕상 9:2에서도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기브온에서와 같이 ‘꿈'에 나타나셨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본문에서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밤'에 나타나셨다는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솔로몬에게 더 직접적으로 전달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1:7).
본문에는 그 시점이 명시되지 않았으나 11절에 궁궐 건축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궁궐 건축까지 완성된 솔로몬 즉위 24년 즉 B.C. 946년경 으로 보인다.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선택하다’(빠하르)
1인칭 단수, ‘내가 선택하였다’
특히 ‘빠하르'는 하나님이 주어가 될 때 ‘특별한 섭리와 계획에 의한 선택'을 의미함.
따라서 원어의 의미를 살려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내가 이 장소를 제사하는 전으로서 나 자신을 위해 선택하였다'가 된다. 결국 본문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섭리로 당신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곳으로 솔로몬이 지은 이 성전을 택하셨다는 의미이다. 이는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열납 사실을 반영해 보여주는 표현이다.
병행 구절인 왕상 9:
2 본문의 ‘제사하는 전’이라는 표현 대신에 — ‘여호와의 이름을 둘 곳'이라고 표현되어 있음. 이 역시도 제사장적 관점에서 기록된 역대기의 특징을 반영하는 표현이 라 할 수 있다.
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Ⅰ. 하나님은 이 전이 "이스라엘의 제사하는 전" 이며,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인정해 주시기로 약속했다(사 56:7).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겠음이라" (12, 16절). 즉 "거기에서 내가 내 자신을 알리겠고, 거기에서 내가 청을 들으리라" 는 것이다.
Ⅱ. 그는 그 곳에서 하는 기도는 언제든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했다(13-15절).
1. 국가적인 심판.
즉 기근과 염병 또는 전쟁이 있으리라는 것이 여기에 가정되어 있다(13절). 왜냐하면 토산물을 먹는 메뚜기는, 메뚜기처럼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황폐케 하는 대적들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13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본문의 문맥상 메뚜기가 먹는 것은 ‘땅에서 나는 산물’
한글 개역 성경이 번역하지 않은 ‘아차웨'는 ‘명령하다’라는 뜻의 단어의 강의형, 강한 의미를 지닌다. — 즉 하나님께서 메뚜기에게 적접 명령하신다는 의미이다.
➤ 따라서 메뚜기에게 토산을 먹도록 명령한다는 말은 특별한 뜻이 담겨져 있다.
사실 메뚜기는 풀을 주로 먹으며 무화과나무나 올리브나무나 대추야자나무 같은 과실수들은 다급한 경우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메뚜기가 그 땅 소산을 다 먹어처운다는 것은 이러한 재앙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본문에 표현된 ‘아차웨’는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본절에 언급된 가뭄, 메뚜기 재앙, 염병 등은 6;27.28에서 솔로몬어 기도하였던 내용 중에 포함된 것으로 모두 국가적 차원의 대기근과 연관된 재앙이다.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유행하게 할 때에’
‘보내다’, ‘가게 하다’ 란 뜻의 단어에서 유래한 말. 특별히 그 주체가 하나님이실 경우
⇒ ‘특별한 사명을 위해 보내다' (창 37:13; 왕하 2:2)라는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만약 내가 나의 백성들 가운데 염병을 보낼 때에'가 된다.
원문을 통해 볼 때 이 ‘염병' 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돌의 죄악을 징계하시고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자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것임을 더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2. 국가적인 회개 기도, 그리고 개혁이 요구되어 있다(14절).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그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악으로 인해 그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한다면, 그들의 죄악을 형벌하심으로써 그 이름을 다시 영예롭게 하시리라 했다. 그들은 그의 손길 아래에서 스스로를 겸손케 해야 하며, 그 심판이 지나가 주기를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얼굴과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그들이 이전에 배반했던 그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결코 그러한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 14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
한글 개역 성경은 ‘그들 위에'라는 뜻의 ‘알레헴'의 번역을 생략하였다. 이를 살려서 본문을 직역하면 ⇒ ‘그리고 나의 이름이 그들 위에 불려지는 나의 백성이'가 된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위에 불려진다'라는 말의 의미
‘그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라 는 뜻을 함축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워진다'라는 뜻까지 포함하는 표현이다.
⇒결국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또한 이방인들에 의헤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로 일컬음 받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여호와의 이름'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고 그의 백성으로 불려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백성들이며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살고 죽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이스라엘은 그들 위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라 불러는 성도들에게도 요구되는 바이고 적용하고 계승해야 할 바이다.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 여호와의 재앙을 경험한 백성들이 취해야 할 회개의 태도
= 겸비하고 (’카나으’)
어원적으로 ‘전쟁의 패배로 말미암아’ ‘굴복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를 살려 본문을 이해하면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에 굴복하여 자기 스스로 겸손하게 낮추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시 37:11에 보면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 여기서 ‘온유한 자'라는 말은 본문의 ‘카나으’와 같이 ‘굴복하다', ‘겸손해지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유래함.
예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말씀하셨다.
➤ 여기서 ‘온유한 자'로 번역된 단어는 ‘온유한' 내지는 ‘겸손한'의 뜻을 가진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 결국 본문과 시 37:11 그러고 마 5:5은 동일하게 겸손한 자, 온유한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함측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그러면 국가적인 긍휼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던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땅을 치료하시어, 그들의 모든 슬픔을 없애 줄 것이다. 용서의 긍휼은 고치는 긍휼의 길을 마련해 준다(시 103:3; 마 9:2).
💡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회개의 기도에 응답하사 회복시켜 주실 것에 대한 약속
⇒ 본절은 역대기 메시지의 요채라 할 수 있다.
‘사하고’
‘사면하다’, ‘용서하다’ 란 뜻의 ‘쌀라흐’에서 유래한 단어.
특히 ‘쌀라흐'는 어원적으로 — ‘뿌리다(scatter)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제사장이 피를 뿌려서 죄를 덮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쓰인 것으로 볼 수 있음. (레16:14)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재정리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버리고 겸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피의 제사’를 통해 죄를 속하듯이 그들의 허물과 죄악을 용 서하신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 땅을 고칠지라’
고칠지라
‘치료하다, 회복하다’ (라파) 에서 유래.
땅을 고칠지라 = 땅을 회복시키겠다.
여기에서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를 뜻하는 ‘예흐와 로페에카’ 라는 말이 나왔다(출 15:26).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죄에 대한 용서가 ⇒ 땅의 회복으로 나타난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본문은 열왕기서의 병행 문단에는 없고 본문에만 있는 표현. 즉 이는 11절과 같이 역대기 저자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삽입한 표현인 것.
💡 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
병행구절 왕상 9:3의 기록
솔로몬 성전에 대한 여호와의 선택을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의 결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솔로몬이 자신이 지은 성전을 열납해 주실 것을 기도 했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솔로몬의 성전을 선택하시고 거룩한 장소로 구별하셔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열왕기 저자가 인간의 신앙적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응답을 강조한 결과이다.
반면 역대기 저자는
굳이 이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성전에 대한 여호와의 주권적 선택 사실을 부각시킨다. 이는 역대기 기자가 성전 열납을 포함한 솔로몬 왕국의 번영이 — 솔로몬 왕의 행위의 결과가 아닌 다윗 언약에 업각한 여호와의 주권적 섭리의 결과임을 강조한 데 서 비롯된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내 눈과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기도 응답의 확실성.
Ⅲ. 그는 솔로몬이 자기의 의무를 잘 지킨다면, 그 나라를 영영히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17, 18절)
💡 17-18절: 다윗 언약에 대한 여호와의 영원한 성취 약속
17절,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법규를 지키면
⇒ 다윗 언약 성취를 위한 전제 조건
►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따라야 할 모델을 제시하심 = ‘다윗’
‘네가’ = 솔로몬 개인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 왕상9:4 강해,
👉 본문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이 따라야 할 신앙의 표본으로 그의 부친 다윗을 제시하심
‘행하다(할라크);
원래 ‘걷다’ 라는 뜻 :
본문에서는 단순히 걷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삶의 방향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행동 방식을 나타냄. 따라서 본문은 다윗이 생전에 여호와 앞에서 살아갔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솔로몬도 닮을 것을 권고하시는 내용이다.
물론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홈 없이 완전한 삶을 살았다는 의미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다윗은 유부녀 맛세바와 간음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서 충성된 신하를 죽이는 극악한 범죄를 행했으며(삼하 11장), 말년에는 여호와만을 의지하지 않고 군사력에 의존하는 연약한 신앙인의 모습을 드러냈다(삼하 24장).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따라야 할 신앙의 모범이자 표본으로 다윗을 제시하신 것은
→ 그가 자신의 범죄 사실을 깨달은 즉시로 회개했다는 사실에 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겸허하게 기다렸던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다윗의 삶의 태도를 솔로몬이 본받을 것을 권고하고 계신 것.
‘다윗의 행위를 본받아 행하되 ‘하나님 앞에서’ 행할 것’
‘내 앞에서’
이에 해당하는 ‘레파나이’는 직역하면 ‘나의 얼굴 앞에서’이다.
→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 앞에 직면해 있는 인간의 실존을 나타낸다(Coram Deo).
하나님 앞을 떠나지 말고 동행 하여야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외식적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진실된 행위를 하라는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고 있다.
⇒ 따라서 본문이 전달하는 하나님의 뜻은,
비록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 들을 다스리는 왕의 신분이지만,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되시며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이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고 계심을 직시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야 함을 나타낸다.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 솔로몬이 따라야 할 표준으로 제시되었던 다윗의 마음가짐
‘온전히 하고’
이 명사는 결과 그 자체가 아닌 설정된 결과를 이루기까지 성실함으로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 강조점이 있다.
따라서 본문은 신정 국가 이스라엘 왕들이 따라야 할 삶의 척도가 되었던 다윗이 생전에 여호와 앞에서 항상 결함이 없는 완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다윗의 신앙
앞의 본문에 대한 설명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다윗은 결코 완전한 삶을 살지 못하 였다(삼하 11:2-12:5; 24:10 등).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 실수에도 불구하고 회개함으로 끝까지 신앙을 부여잡고, 성실히 주를 사모하며 그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였던 다윗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를 받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마음 자세를 솔로몬에게도 요구하셨으나, 결국 솔로 몬은 말년에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이방의 우상을 향함으로써 ‘솔로몬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 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된다. ‘바르게 하여’ 원형은 ‘곧다’(잠11:5), ‘바르다’(잠9:15)라는 뜻을 가진 ‘야솨르’에서 유래한 명사, ‘정직함’(신9:5), ‘옮음’(욥6:25)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이는 좌우로 치우치거나 굽힘이 없이 곧게 행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기준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법도와 율례이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변조하지 않는 자세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의대로 그분의 말씀에 어떠한 말을 더하거나 뺑으로 그 뜻을 곡해하는 행위를 철저히 금하셨으며, 당신이 주신 말씀 그대로 행하는 자를 마음이 바른자, 즉 정직한 자로 여기셨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여, 하나님 말씀을 곡해하거나 사욕을 위한 도구로 오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회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 4:2).
18절, 내가 네 나라 왕위를 견고하게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버지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하리라
‘내가 네 아비 다윗과 언약하기를’
▶︎ 삼하7장, 여호와와 다윗 사이에 맺은 영원한 언약
언약하기를 (’카라티’)
언약 : ‘자르다’(카라트)
특히 고대 근동에서는 계약 체결시 짐승을 반으로 잘라 그 가운데로 계약의 당사자가 지나가는 의식을 행했는데, 이는 계약을 확실히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계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잘려진 동물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셨는데, 이 역시 신체의 일부를 잘라 언약의 징표를 삼으신 것이다(창 17:10).
본문의 ‘카라트'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맺으신 언약을 성설히 이행하실 것이란 의마를 내포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 다윗 왕조를 영원히 보존하실 것에 관한 약속
본문은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계속 이어져서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될 것이다’ 란 의미를 내포. 그러나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왕하 25:7) 사실상 다윗 가문의 왕권은 끊어지고 말았다. 이는 앞서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요구하셨던 바를 그 계승자들이 이행하지 않은 결과였다.
📌 5절은 다윗 언약의 반복이자 솔로몬이 기도했던 내용에 대한 직접적 응답(8:25,26).
이같은 본문의 표현은 표면적으로는 긍정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본절이 4절의 조건문에 이어지는 표현임을 감안할 때 조건에 부합되지 않을 경우 닥칠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까지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 하나님 편에서 본문과 같은 축복된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말년에 우상 숭배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저버림으로 파국을 맞게 된다 (11:4, 10-13),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던 솔로몬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솔로몬 이후 유다 왕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결국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함으로 다윗 왕통은 끊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택한 백성의 영원한 통치자 로 세우심으로 궁극적으로 당신이 약속하신 언약을 성취시키는 자비를 베푸셨다(녹 1:31-33), 즉
약속을 받았음에도 심판을 받게 된 이스라엘의 운명은 솔로몬과 그 후대 왕들의 불순종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견고함과 영원성에 대한 약속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영원하신 의의 왕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은 삼하 7:16에 나오는 다윗 언약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삼하 7:16에 서는 본문에 나오는 이러한 부정적 전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 그렇다면 동일한 다윗 언약에 대한 언급임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을 향한 본문의 언급에는 부정적 전제가 깔려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이는 다윗에게 직접 언약이 수여된 삼하 7:16은 장차 메시야로 오실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영원한 왕권과 관련된 언급인 반면, 솔로몬에게 다윗의 언약을 상기시키는 본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영원한 왕권과 관련된 언약을 전제하되 르호보암 때의 북부 지파의 이탈로 인한 왕권 약화와 시드기야 때의 남유다 멸망으로 인한 세속적 다윗 왕권의 단절을 초래하는 바 다윗 가문의 육적 왕권과만 관련된 언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하여 미리 불순종에 따른 다윗 왕권의 단절을 경고하신 것이다.
만일 그가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혜택을 소망한다면, 그는 다윗의 본을 따라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앞에 생명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셨고, 축복은 물론 저주도 두셨다.
💡 19-22절 :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경고
19절, 그러나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을 경배하면
18절까지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상대로 말씀하시다가 본절에서부터 갑자기 그 대상을 바꾸어 말씀하신다.
~18절 ‘너희’ = 솔로몬을 비롯한 그의 계승자들을 가리킴.
19절 ‘너희’ = 이스라엘 백성들.
열왕기 기록 ⇒ ‘너희나 너희의 자손’
역대기 저자가 강조하려는 바,
⇒ ‘너희 자손'이라는 말을 빼고 ‘너희'라고만 기록함으로써 본문 기록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마주 세워 하나님의 말씀의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너희가 … 돌아서서 … 버리고 가서 … 섬겨 겸배하면’
► 여호와로부터 마음이 떠났을 때 나타나는 적극적 3가지의 행동 양식
📌 왕상9:6 강해,
‘만일 …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단순히 일시적 실수로 나타나는 범죄가 아닌,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완전히 저버리 고 돌이켜서 그를 떠나는 적극적 배신 행위.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배신행위, 즉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저버리고 그를 떠나 다른 신을 섬기며 각종 죄악을 저지르는 완전한 배교 행위를 의미한다.
‘내가 너희 앞에 둔’ … ‘지키지 아니하고’
⇒ 여호와로부터 마음을 돌이킬 때 나타나는 소극적 현상
⇒ 명백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지키지 않은 것은 — 그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닌 고의적 범죄임을 드러냄.
‘너희 앞에 둔’ = ‘내가 너의 얼굴 앞에 주었던’
→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이 너무나 자명하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아니하고' = 하나님의 뜻을 마치 영원히 지키지 않을 것과 같은 범죄의 고의성, 회개의 불가능성.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은 바 있으며(2:4),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6:12)과 성전과 왕궁 건축을 마친 지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거듭 확인했다. 본서 저자 역시 솔로몬이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하고 있다(11:9).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솔로몬에게 너무나 분명하게 여러 번 계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저주에 대한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솔로몬 자신에게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가서’ .. ‘섬겨’ .. ‘숭배하면’
⇒ 여호와로부터 마음을 돌이킬 때 나타나는 적극적 현상
1.가서: 여호와 앞에서 그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방의 신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
2.섬겨: 여호와를 배신하고 이방의 신 을 주인이나 왕으로 섭기며 충성을 다하는 것.
3.숭배하면: 신적 존재에 대하여 ‘경배하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이킬 경우 적극적으로 나타내게 되는 행동을 보여주는 삼중적 표현. 그들이 다른 신에게로 가고, 섬기고, 숭배함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적으로 전달한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키게 되면 결국 거짓된 신을 섬기고 그에게 부속되어 그를 숭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그는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이 성전을 지었을지라도, 그들이 탈선하여 다른 신을 숭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19절). 그는 그들이 뒷걸음질쳐 죄에 빠지기 쉬운 경향성을 갖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 그는 만일 그들이 그렇게 탈선한다면, 교회와 국가는 틀림없이 망하게 되리라고 경고하셨다.
💡20-22절 :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저주의 경고
(1) 그들의 국가가 멸망할 것이다(20절).
"비록 그들이 이 훌륭한 땅에 깊이 그리고 오래 뿌리박고 있었을지라도, 나는 그들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온 민족을 전멸시킬 것이다. 사람들이 뜰에서 잡초를 뽑아내어 쓰레기 더미에 버리듯이, 그들을 뽑아버릴 것이다."
💡 20절, 내가 너희에게 준 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 내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한 이 성전을 내 앞에서 버려 모든 민족 중에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리니
‘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
직역하면, ‘그리고 내가 그들을 뿌리째 뽑아 추방하였다’.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땅에 자라는 나무에 비유하여 그들이 범죄할 경우 당할 운명을 확면하게 드러낸 표현.
앞서 14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스스로 겸비한 자에게 하나님은 그가 사는 땅을 회복시켜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반대로 하나님께 범죄한다면 그 땅에서 자라는 나무가 뿌리째 뽑히듯이 뽑혀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을 경고하고 계신다.
‘내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한 이 성전을 내 앞에서 버려 모든 민족 중에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리니’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의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을 경고하신다.
병행구절과 조롱의 대상의 기록상 차이
병행 구절인 왕상 9:7에는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열왕기는 ‘성전을 지었던 이스라엘 백성' 이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 하고 있는 반면, 역대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성전' 이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그렇다면 역대기 기자가 어처럼 열왕기와 표헌을 다르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바벨론 포수에서 돌아와 신정 국가를 재건하여야 할 사명이 있는 본서의 일차 독자들에게 과거 조상들의 범죄로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멸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즉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성전'은 버리셨을지라도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은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조하기 위해서 열왕기 병행 구절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수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2) 그들의 교회가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고 말하면서(렘 7:4), 그들이 상상한 것처럼, 이 성소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면케해주는 피난처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 구조면에서나 건립 목적에 있어서도 고귀한 집인 이 성전은 놀라움이 될 것이니, 기이하게 무너져내려 모든 이웃나라에게도 놀라움이 될 것이다" (애 1:9).
💡21절, 이 성전이 비록 높을지라도 그리로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할 경우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라도 황폐하게 만드실 것이라는 경고
직역하면, ‘그리고 높았던 이 전이 그 옆으로 지나가는 모든 자에게 하나의 놀라움이 될 것이다.’
왕상9:8에 ‘비웃어’ (’솨라크’) 삭제
역대기 기자는 ‘성전’을 모독하는 용어를 꺼려하여 왕상9:8 ‘비웃어’ 라는 표현을 생략한 것으로 추정. 고대 근동에서는 폐허나 황폐한 지역을 지날 때 그곳을 폐허로 만들고 이후 그곳에 계속 거처하고 있다고 여겨졌던 악마나 악령들을 쫓기 위해 휘파람을 불었다고 한다(Holladay). 따라서 역대기 기자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였던 바로 그 성전에 더러운 악마가 산다고 여김으로 유발될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러한 단어틀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이다.
📌 왕상9:8절,
훼파된 성전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이중적으로 묘사
1.놀라며: 원형은 ‘놀라다’, ‘황폐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이는 내부적 요인으로 인한 당혹감이나 파멸이 아닌, 외부의 강한 힘으로 인한 극심한 훼손이나 멸망 혹은 경악을 의미하는 단어.
2.비웃어: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이 당한 심판을 보고 빈정거리며 냉소적으로 웃을 것.
➤ 성전 봉헌에 즈음해 드린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본문과 같은 충격적인 경고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이 만든 건물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과 성전 그 자체가 이스라엘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자에게 진노하여 단호히 심판하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이 경고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그대로 성취되어 B.C. 586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전 파괴가 자행되었 으며, 이후 스룹바벨이나 헤롯에 의해 재건되기도 했지만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침공으로 성전은 지상에서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엄정성과 함께 불순종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22절, 대답하기를 그들이 자기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붙잡혀서 그것들을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다 하리라 하셨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범죄에 빠져 이같은 결과가 촐되었음
📌 왕상9:9,
본절은 이방인들이 앞단락의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대답하는 대목
이는 이스라엘의 멸망 이유를 다른 민족들도 명백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이스라엘의 범죄와 멸망은 다른 민족들에게 즉각 큰 반향을 일으키는 흥미거리가 되어 그들이 이를 교훈과 비웃음 거리로 삼아 서로 이야기하게 될 것임을 가리킨다.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린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소유권과 지배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주인이신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주인으로 선택하여 섬길 수 있는 자격이나 권한이 전혀 없음. 본문의 내용과 유사한 신 29:25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다’ 라고 언급하지 않고,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버렸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하나님의 인격과 말씀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에, 여호와를 버린 것이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린 것은 동일한 뜻이다.
‘다른 신에게 부종함’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소극적 범죄라면, 본문은 적극적 범죄에 해당한다.
부종함: 이는 현혹 되거나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적 선택에 따라 어느 대상에 집착하는 고집스러운 모습을 나타낸다.
💡 결론
이상 본장(대하7장)의 내용은,
성전 봉헌식에서 드린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여호와의 불의 응답과 성전 낙성 제사와 장막절 준수 사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여호와의 열납과 솔로몬을 향한 약속과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사건은 13년이란 시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다.
그럼에도 이 두 기사를 이어서 배치한 것은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과 성전 건축으로 인한 하나님의 축복을 집중적으로 밝히기 위해서이다.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갖는 의미
사실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단일 중앙 성소 예배 명령을 실천하기 위한 첫걸음이었으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정 국가임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뜻깊은 사건이었다. 따라서 역대기 저자는 예루살렘 성전 낙성 및 여호와의 성전 열납 사실을 길게 기술한 것이다.
엄중한 저주의 경고를 하시는 이유
→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
그럼에도 불구하고본 장의 후반부에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할 경우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고 성전은 훼파될 것어라는 저주의 경고가 나온다.
이는 가시적인 성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상정적 처소인 성전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포로에게 주는 가르침
이러한 내용은 왜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에 포로로 잡혀갔는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단순히 과거의 문제를 반추하는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더 적극적으로 본장은 열왕기서에서 기록하지 않은 내용, 즉 어떻게 회복이 가능한지에 대한 내용을 첨가하여 기록함으로(14절), — 지금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방향 제시를 통해 본서 저자는 포로기를 거쳐 회복을 갈망히는 포로기 후대 공동체인 본서 일차 독자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자 한 것어다.
💬 영적 교훈 서론 부분
이러한 본문은 소위 ‘성전 언약(Temple Covenant)'으로불리는데, 다윗언약의 재확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본문을 열왕기서의 병행 부분과 비교하여 보면 열왕기 서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신 사실과 성전의 열납에 대하여 단 한 절로 간략 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왕상 9:3), 여기서는 12b-16절까지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에서도 거듭 언급한 대로 포로 귀환 세대인 본서의 일차 독자들에게 성전 중심의 신앙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