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사무엘하 18, 고린도후서 11, 에스겔 25, 시편 73
묵상구절
11:13 온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지방에서부터 르호보암에게 돌아오되
11:14 레위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을 해임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11:15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친히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11:16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레위 사람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11:17 그러므로 삼 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 년 동안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제사장들의 행방(역대하 11:13-23)
💡 서론
본절부터 17절까지는 여로보암의 우상화 정책에 반감을 가진 북이스라엘의 제사장과 레위인 및 일부 경건한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남유다로 남하하였으며 이들로 인하여 남유다 왕국이 번영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본단락과 병행 기사로 분류 가능한 왕상 12:25~33에는 이런 사실에 대한 언급 없이 오직 여로보암의 우상화 정책만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역대기 저자가 남유다의 언약적, 종교적 정통성을 특히 부각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열왕기 저자가 기록하지 않은 본문의 내용을 특별히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여호와 신앙의 바른 모습임을 강조함으로써, 포로 귀환 후 성전 중심의 여호와 신앙 회복에 지지부진하였던 본서 일차 독자들에게(느 13:10-14; 말 3:6-12) 도전을 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및 모든 신실하고 경건한 자들.
곧 저희 하나님과 자기 종교에 대해 진실한 모든 자들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옴으로 인하여, 그가 얼마나 강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1. 여로보암은 그들을 쫓아 내었다.
즉 여로보암은 자기대로의 예배 방침을 만들어 놓았으나, 저희들은 양심상 순순히 거기에 응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저희를 자기 제단에서 물러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또 동시에 저희가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에 경배드리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자 하였다. 따라서 한마디로 말해 그는 "저희를 폐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였다" (14절).
여로보암은 저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지위에서 물러나기를 아주 바랐으니, 이는 그렇게 되면 그가 "신앙의 제사장으로 임명" 했던 자들 곧 미천하고 천박한 자들을 위하여 자리가 생기기 때문이었다(왕상 12:31 과 비교). 하나님을 내쫓은 그가 그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쫓아 냈다고 해서 놀라울 것은 조금도 없지 않는가? 저들은 여로보암의 목적에 타당치 않았고, 자기가 하라고 시키는 일은 무엇이나 시행하려 들지 않았으며, "그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그가 세운 황금 우상을 예배하지도"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 11:14 레위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을 해임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히브리어 원문 어법상) 여로보암이 기존 제사장들을 제사 직무로부터 철저하게 배제시켰음을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의 행위
열왕기 저자는 여로보암이 레위 지파가 아닌 일반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왕상 12:31), 이를 통해 볼 때 여로보암이 제사 제도 자체를 폐지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레위 지파를 제사장에서 배제시키고 일반 백성들을 그 직분에 임명한 것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출 28:1)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였다.
레위 지파 사람만 성전 봉사 직분을 수행하게 한 데 대하여 평소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 여로보암의 개방적 정책을 대대적으로 환영했을지 모르지만, ↔ 북이스라엘 가운데 바른 여호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 그로 인해 그 땅을 떠나 남유다로 남하하였다.
💡 11:15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친히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여로보암의 죄
제사장을 세우는 권한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으며, 제사장이란 직분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직분이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여 레위 지파가 아닌 일반 백성 중에서 임의로 제사장들을 임명하였으며, 그들을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이용하였다.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책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성전이 없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그의 백성들이 성전이 있는 남유다의 예루살렘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제사 지내러 갔다가 결국에는 르호보암에게 귀환할까봐 노심초사하였다.
왜? 그러게 되면 여로보암의 왕권은 급속히 몰락할 것이 자명한 이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분열을 고착화시키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우상 숭배 정책을 취하였다. 곧 이스라엘 곳곳에 산당들을 짓고, 벧엘과 단에 각각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 이라 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올라갈 필요 없이 그곳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숫염소 우상, 금송아지 우상과 — 출애굽 시기 우상의 연관성
‘숫염소 우상’
역대기 저자는 이 사실에 덧붙여 여로보암이 ‘수염소 우상'까지 만들었다고 기록.
이에 해당하는 ‘사이르'는 — 수염소 모양의 털이 덥수룩한 우상을 지칭한다(레 17:7).
하나님의 우상 금지 명령
광야 시대에 여호와께서는 —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수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레 17:7)고 말씀하셨다.
⇒ 이런 점에서 볼 때 여로보암이 만든 숫염소 형상의 우상은 새로운 고안물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섬겼던 우상임을 알 수 있다.
‘금송아지 우상’
또한 금송아지 우상 역시 애굽의 고센 근처 멤피스에서 성행하던 우상이었다.
광야 시대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언약의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 아론을 지도자로 삼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다 여호와의 진노를 산 적이 있다(출 32;1-28). 즉 광야 시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생활하던 애 굽에서 익숙히 보아왔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것이다.
여로보암이 왜 출애굽 시기를 연상시키는 숫염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을까?
여로보암은 솔로몬 왕 통치 말기에 애굽으로 망명해 상당 기간 체류한 적이 있었다(왕상11:40; 12:2). 그는 아마도 그곳에서 숫염소 우상과 송아지 우상을 접했을 것이며, 그것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매우 유용하리라 생각하였던 듯하다.
[열왕기 저자와 기록 방식의 차이점]
14절과 본절에서는 여로보암의 악행을 짧으나마 매우 강한 어조로 다루고 있다.이는 열왕기 저자의 기록 방식과 매우 다르다.
열왕기 저자
남북 왕국의 분열 과정을 왕상 12:1-14:31에 걸쳐 자세히 다루되, 많은 지면을 북왕국을 새롭게 건립한 여로보암에게 할애하였다. 따라서 열왕기에서는 르호보암의 사적이 여로보암의 사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보충 자료로 기록 되었다는 인상까지 받는다.
그러나 역대기에 있어서는 완전히 반대이다.
역대기 저자는 르호보암의 사적은 매우 자세히 기록하는 반면 여로보암에 대하여는 남유다 왕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만을 선별하여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여로보암에 대해 다룰 때에는 그의 죄악됨을 매우 강력한 어조로 전달한다. 14b, 15절에서는 17절에 나오는 바 북이스라엘에서 남하한 자들에 의하여 르호보암 왕국이 번영을 누리게 되었음을 밝히면서 그들이 남하한 이유를 설명하는 중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책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책을 기술하되 비관적 입장에서 강한 어조로 기술함으로써 ⇒ 선민의 정통성은 다윗 왕조를 계승한 남유다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2. 그러므로 저희는 곧 "자기들의 향리(鄕里)와 산업을 떠났다" (14절).
원래 레위인들은 각 지파의 기업들 중에서 얼마씩 떼어내어 자기들의 성읍으로 허용받았었고, 거기서 저들은 편안히 먹고 마시며 많은 선행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었다. 그러나 이제 저희는 유다와 베냐민에 있는 성읍들을 제외한 모든 저희 성읍에서 축출당하게 되었다. 혹자는 저희들의 생계가 퍽 안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으나, 저희들은 그것을 곧 상실하고 말았다. 율법이 자기들에게 "여호와는 그들의 기업이라" 는 것을 상기시켜 줄 때마다 그것이 저희에게 위안이 되었으나, 이제 저들이 그 집과 소유물에서 축출당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찾아야만 되었다.
💡 11:14 레위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을 해임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마을들: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에게 가나안 땅 여러 곳에 분산하여 주신 성읍과, 이를 둘러싼 사방 들.
산업: 땅과 구분되는 재산을 가리킴.
레위 사람들이 자기 마을과 산업을 떠난 이유는?
북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직분을 빼앗기고 여호와를 섬길 수 없게 되자, 고향을 미련없이 버리고, 참된 여호와 신앙을 지킬 수 있는 남유다로 내려왔던 것.
레위 사람들의 삶의 목적
안정됨의 추구가 아닌 만유의 주권자이시며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 정통 신앙의 추구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왜 자기들의 소유지를 떠나야 했던가?
(1) 그들이 그 이웃 사람들 가운데서는 선을 행할 수 없음을 알았던 까닭이다. 곧 이웃 사람들은(여로보암이 그의 금송아지들을 세웠기 때문에) 우상 숭배의 옛 습성에 새로이 젖어 들었던 것이다.
(2) 저들 자신이 속된 것에 따르고 싶은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릴 것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악한 것에 이끌릴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우리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달라고 진지하게 기도 드린다면, 우리는 그 유혹의 길에서 최대로 멀리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저들이 만약 저들의 순전함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여로보암과 그 아들들로부터 당연히 박해를 받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귀들을 위해 세워진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제사장들이 자기들 중에 오래도록 거하게 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 무엇이 우리를 세속적 이득에로 잡아끌든지, 거기에는 항상 신앙과 양심을 난파시킬 위험이 있다.
3. 저희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러" (14절) "스스로 르호보암에게 나아왔다" (13절의 난외).
하나님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제단이 있는 곳 이외 어느 곳에 있어야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지정한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기 때문에 그리로 온 것이다.
💡 1:13 온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지방에서부터 르호보암에게 돌아오되
‘온 이스라엘’
북이스라엘 전역을 지칭.
‘르호보암에게 돌아오되’
‘도착하여 곁에 서다’ 란 의미(신31:14; 삼상3:10) →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NIV) ‘그의 편이 되었다’ 라는 의미로 번역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르호보암에게 온 이유
레위 사람이 아닌 일반인으로 제사장을 삼고 벧엘과 단에 각각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게 한 여로보암의 이단적 종교 정책 (왕상 12:28-31)에 반감을 품은 북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 단순히 남유다로 귀환한 것 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남유다의 왕 르호보암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그들의 직분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르호보암에게 적지 않은 힘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르호보암은 분단 후 3년 동안은 강성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다(17절).
(1) 그들이 도망할 피난처가 있었다는 것은 저희에게 베풀어진 긍휼이었으며, 여로보암이 비록 그들을 내쫓았을 때에라도 저희를 반갑게 맞아 들여서 환대할 만큼 친밀한 자들이 있어서 저희가 이방인의 땅으로 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저희에게는 큰 자비였다.
(2) 저희가 "자기 향리와 자기 나라의 산업을 버려두고 떠났다" 는 것은(그곳에 그대로 있었다면 마음대로 편히 살 수 있었으련만), 저들이 자기들의 먹고 살 생계보다 자기들의 일을 더 소중히 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그들이 그곳을 버리고 떠난 것은, 거기서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고, 또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또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서 하나님의 법도를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곳에 살고 있는 형제들의 자비를 의지했기 때문이다.
의무의 길에서 만나는 궁핍이 죄악의 길에서 만나는 풍요함보다 더 택할만한 것이다. 타락된 양심을 가지고 부귀와 쾌락 속에 딩구는 것보다는 연보에 의존하여 먹고 살거나 감옥 속에서 죽더라도 양심적인 것이 더 나은 삶이다.
(3) 르호보암과 그 백성들이, 비록 자기들만 해도 너무 혼잡할 정도에서도-아마 그들을 수용할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저희를 환영하여 받아들인 것은 지혜로운 일이요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다. 양심적인 피난자들은 그들을 추방하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남기고 떠나지만 동시에 자기들을 즐겨 맞는 나라에는 축복을 가지고 가는 법이다. "진리를 지키는 의로운 민족이 들어올 수 있도록 대문을 열지어다." 이것이 좋은 책략이다(사 26:1, 2)
4.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 때에, 각 지파 중에서도 신앙심이 돈독하고 경건한 이스라엘인들이 모두 그들을 따라 왔다.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 곧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양심의 명령으로 삼고 그 의무에 진지하며 확고 부동한 자들은 자기 조상의 유업을 팽개치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주할 집을 구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원하던 하나님의 제단에 자유로이 나가고자 함이었고, 또 송아지 우상을 경배하는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었다(16절).
다음 사실을 명심해 두자.
(1) 우리의 영혼에 제일 좋은 것이 곧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다. 또 우리의 모든 선택 중에서도 종교에 대한 유리한 배려가 모든 외적인 편의보다 우선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신실한 제사장들이 있는 곳에 그의 신실한 백성들도 있어야 한다. 여로보암이 하나님께 사역자들을 쫓았다고 하더라도, 모든 참 이스라엘인들은 그 하나님의 종들을 인정하며 옹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너는 네가 사는 동안 레위인들 곧 쫓겨난 레위인들을 버리지 말라." "법궤가 옮겨 가거든 너도 옮겨서 그 법궤를 좇아가라" (수 3:3).
💡 11:16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레위 사람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 여호와를 찾는 자들’
→ 직역하면, ‘그들의 마음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데에 둔 사람들’
본절은 북이스라엘을 떠나 남유다로 내려온 사람들 중에는 레위인과 제사장들 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들의 한결 같은 공통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견지하는 것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삼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찾은 하나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서 15절에서 소개된 숫염소 우상이나 송아지 우상 등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위용을 강조하기 위해서 긴 명칭으로 소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라는 호칭의 의미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 그리하여 열조 때부터 섬겨온(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하나님’(엘로힘) 신명
‘엘로힘’ 이란 신명은 허무하며 실체가 없는 거짓 우상과 구별되는,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각시킨다.
‘여호와' 신명
자존하신 유일신이시며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사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부각시킨다.
▶︎ 본서 저자는 이스라엘이 바로 이러한 면모를 지니신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하여 맺어진 신앙 공동체임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북왕국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여호와 신앙에 근거해 남하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이주한 목적 :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사하고자
→ 직역하면 ‘그들은 제사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
‘예루살렘 에 왔다'
방문차 잠깐 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계속 그곳에 거주하기 위해 완전히 이주해 왔다는 의미. 이는 참으로 역설적이다. 즉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 그 백성들로 예루살렘에 제사하러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왕상 12:28), 오히려 이것 때문에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복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제사의 대상 : ‘조상들의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 나타내는 의미는 상당히 심오하지만, 핵심적인 것은 → 하나님께서는 과거 애굽에서 중 살이하던 조상들을 구원하사 이곳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지금까지 보호하신 분이라는 것.
북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들은 바로 그 하나님을 저버리고 애굽의 숫염소 우상과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것은 — 그 열조의 하나님에 대한 배반 행위라고 결론을 내리고, — 그 열조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남하하였던 것이다.
[포로기 귀환민들에게 주는 교훈]
선민 역사의 영속성과 정통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제사장적 관정을 가졌던 본서 저자가 본서를 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여 본문을 본다면, 그는 성전 제사를 소홀히 하던 당시 포로기 후대 사람들에게 그들이 따라야 할 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술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
본서 저술 당시 이스라엘은 사람들이 레위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를 내지 않아 레위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성전 봉사 직무를 내팽개쳤으며(느 13:10), 제사장들은 무성의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였다(말 1:6-14). 이러한 세태 속에서 저자는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서라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자 하는 성전 제사 중심의 성숙한 신앙을 가졌던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들에게 본을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aside>
5. 저들은 "유다 왕국을 강성케 하였으니" (17절), 그들은 그토록 많은 인원을 더하며 자기들이 가져온 재물을 보탰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피난처가 된 유다 왕국을 위해 경건과 기도로써 복을 빌어줌으로써 그 나라를 튼튼하게 하였던 것이다(슥 12:5 참조).
종교와 그 신도들을 보호하고 격려하는 것은 국가의 이익이 되고, 국력의 신장에 무엇보다 큰 보탬이 된다. 저들은 르호보암과 그 백성을 "3년간이나 강성하게" 하였다. 그동안 그들이 "다윗과 솔로몬의 길" 즉 그 두 왕의 "선한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길을 버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권 밖으로 떠나고 말았을 때는, 저희가 가졌던 가장 좋은 친구들도 이미 그들을 도와 강성케 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집념할 동안에는 힘을 보유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엔 이미 그 힘을 상실하게 된다.
💡 11:17 그러므로 삼 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 년 동안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
→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은 유다 왕국을 굳건하게 하였으며 르호보암을 강하게 하였다’
본 구절의 주어 : 북이스라엘에서 남하한 경건한 사람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주어가 나와 있지 않으나, 원문에 따르면 본문의 주어는 3인칭 남성 복수로서, 북이스라엘에서 남하한 경건한 사람들. 이들은 유다 왕국과 그 왕국을 통치하는 르호보암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강성하게 하였으니’
‘단단하게 하고 견고하게 하는 것’ 이러한 원어의 의미를 살려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러므로 그들은 유다 나라를 단단하고 견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르호보암을 강하게 하였다가 된다.
무엇을 강성하게 하였는가?
한편 그들은 남유다와 르호보암을 군사적으로 강하게 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 측면에서 본이 되어 르호보암 및 남유다 백성들을 바른 신앙으로 이끎으로써 — 영적으로 강하게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역대기 저자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물질적 측면이 아니라 신앙적 측면이기 때문. 이는 역으로 그들이 떠나버린 북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더욱더 피폐해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르호보암과 남유다가 3년간 강성한 이유
르호보암과 남유다가 3년 동안 강성하였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북이스라엘에서 남유다로 남하한 경건한 사람들의 본을 좋아 온 유다 사람들어 다윗과 솔로몬의 신앙을 따라갔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솔로몬은 통치 말기에 그의 부친 다윗의 길을 떠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다(왕상 11:4-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저자 가 솔로몬을 다윗과 동일한 위치에 두고 언급하는 하는 것은 → 그가 성전을 건축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을 뿌리 내러게 하였으며, 전반적으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호와께 바른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7:12-15; 왕상9:25).
그러나 본서 저자는 르호보암과 그 택성들이 이런 바른 신앙을 3년 동안만 견지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제4년째부터 르호보암은 교만해져서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기 시작하였고 온 백성들도 이를 본받아 행하였다(12:1). 나라가 부강해지자 르호보암과 그 백성들은 교만하여 졌으며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르호보암과 그 백성들의 영적 타락의 원인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어려울 때의 의지처였을 뿐. 형통할 때의 감사 대상은 아니었던 것.
💡 영적 교훈 부분,
▶성도와 교회는 위정자들이 바른 길로 가도록 적극 도와야 합니다.
▶성도는 신앙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인에게 전답을 팔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들이 향리와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들 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였음을 시사하여 줍니다.
여러분, 레위인들의 이러한 포기가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소유에 집착하게 마련입니다. 누가 여러분의 소유를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누가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겠습니까? 특히 본문의 레위인들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믿음과 생명까지도 버릴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을 위해서라면 이처럼 자기의 모든 소유, 심지어는 자기 생명까지라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각오와 결단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께 합당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다 보면 — 결국에는 하나님을 버리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찾아왔던 유대 관원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 관원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눅 18:18-23). 이처럼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바른 신앙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6:24) 고 말씀하셨고,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세상에 대한 포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형제와 야고보, 요한 형제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신들의 생업의 기반인 배와 그물, 심지어는 자신들의 부모마저 버려둔 채 주님을 따른 것이 신앙입니다.
물론 신앙을 갖기 위하여 가족이나 사업, 직장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어디서도 그러한 가르침을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둘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닥친다면 본문의 레위인들처럼 신앙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자 한다면 그는 결단코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포기하는 신앙,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빌3:7-8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우리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잡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본서에는 언급이 없으나 열왕기서의 기록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일반 백성들 가운데 서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한 마디로 여로보암은 복이스라엘에서 철저한 우상 숭배 정책을 실시한 것업니 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다윗의 길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을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듯이, 여로보암의 길이라고 하면 우상 숭배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 이후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줄곧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이 이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의 길로 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왕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을 반역하여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하고 북이스라엘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비록 나라는 분열되었지만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동경하며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으로 같 것이 자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왕래하다 보면 여로보암으로 향했던 민심이 다시 다윗 왕조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여로보암은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할 산당을 세우고 또 숫염소 우상과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둘에 제사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민심을 잡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책은 순전히 사람의 마음을 잡으려 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민심을 잡기 위한 여로보암의 이러한 우상 숭배 정책은 치명적인 악수 중의 악수였습니다. 그것은 누가 역사의 주인가를 알지 못한 자의 지극히 어리석은 선택이었습 니다.
여러분,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워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르호보암의 북부 지파 응질 계획을 막아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를 보존하고 지켜주실 분도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잡으려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잡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잡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을잡으려고 애썼으며, 그 결과 씻을 수없는 악행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물론 북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의 입장에서 볼 때 백성들의 이탈은 곧 자기 정치 생명의 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사실 백성들의 민심이 돌아서면 왕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 한 점에서 그가 백성들의 이탈을 막으려 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역사의 주, 곧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며, 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잡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대적이 됨으로써 그 이름이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가 되었고, 북이스라엘 백성들마저도 고통으로 몰아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잡기 위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은 정치인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입니다. 빌라도는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기 위하여 예수께서 죄가 없는 줄을 알고도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줌으로써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사람들의마음도잡지못하고 자신의 정치적 생명도 완전하게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보면 소위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정치인들 중에 민심을 잡기 위하여 선거 때만 되면 다른 종교의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잡기 위하여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사람의 마음은 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버림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잡기 위하여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은 비단 정치인들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사업 파트너의 마음을 잡기 위하 여,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잡기 위하여, 직장에서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사람들이 이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간의 생과 사, 화와 복을 결정하는 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정녕 여러분은 사람의 마음을 잡기 위하여 하나님의 대적이 되면 아무리 사람의 마옴을 잡았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버 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행4:19-20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행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환난의 때에라도 하나님의 길로 가는 사람
17절을 보면 삼년 동안 르호보암이 강성하였다고 말씀하고 었습니다. 물론 이 말씀에는 3년 후에는 르호보암이 강성하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르호보암이 3년 간 강성하였다는 사실만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여러분,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의 상황이 어떠하였습니까? 다윗이 다윗 왕조를 연 이래로 가장 큰 위기의 때였습니다. 나라는 둘로 갈라지고 왕위조차 보존할 수 있을지 의심스런 때였습니다. 한 마디로 환난의 때였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르호보암은 그러한 때에 강성하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본절은 이에 대하여 “무리가 삼년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과 솔로몬의 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율례와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르호보암은 나라가 분열되는 엄청난 위기를 만났으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북이스라엘에서 남하한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강성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진정한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원대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섭리해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 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자는 비록 환난 중에 있을지라도 형통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환난이 찾아왔다고 하나님을 원망 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더욱 하나님의 길로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굴곡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성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성도에게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형통할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절망적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생의 굴곡은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찾아오는 환난 중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환난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징계로 찾아옵니다. 르호보암에게 찾아온 환난도 하나님의 징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로 고통을 당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길로 행하게 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