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9월 30일 토요일 묵상수절 대하16:7-10 <선견자 하나니>

Jeehyun 2023. 10. 3. 18:58

맥체인성경읽기

사무엘하 12, 고린도후서 5, 에스겔 19, 시편 64, 65

묵상구절

7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8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10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서론

💡 7-10절

신정 왕국의 통처자로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외교•군사적인 세상의 힘을 빌어 문제를 해결한 아사 왕의 불신앙적이고 인본주의적 행위에 대한 선견자 하나니의 책망과 그 선견자를 감옥에 가두는 아사 왕의 오만함에 대한 기록.

이 부분은 병행되는 왕상 15장에는 없는 기록으로서 여호와의 백성이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 교만한 태도를 버리지 않을 때에 어떤 대가를 받게 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열왕기의 기록에는 없는 기사를 본서의 저자가 단독적으로 소개한 것은 비록 여호와를 열심히 찾아 측복을 받았던 왕이라 할지라도 교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인간을 의지할 때에는 여지없이 징계를 받는다는 사설을 교훈하기 위함이다. 

아사왕이 최후(역대하 16:7-14)

Ⅰ. 아사가 벤하닷과 동맹함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선지자를 통해 아사에게 명백하고도 진실한 질책이 가해진다.

꾸짖은 이는 선지자 하나님였는데, 그는 우리가 열왕기 상 16장 1절과 역대하 19장 2절에서 읽은 다른 한 선지자 예후의 아버지였다.

아사가 벤하닷과 맺은 조약에는 몇 가지 그릇된 점이 있음을 살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선지자가 가장 큰 잘못이라고 책망하는 죄는, "그가 수리아 왕을 의지하고 그의 하나님이 자기 편이라고 하더라도 벤하닷을 자기 편에 확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지 못하실 것이며, 또 그러지도 않을 것이요, 하나님은 이러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도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불신 당하며, 또한 당신의 권능과 인자하심보다 사람의 팔에 더 의지하는 자들을 볼 때 분노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곧 그에게 영예를 돌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그 영예를 딴 것에 바치게 되면, 하나님은 자신이 모욕당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신다.

💡 7절,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하나니
아사 왕을 책망한 선견자 ‘하나니’는 ‘은혜로운', ‘자비로운’이라는 이름 뜻을 지닌다.
이 사람은 선견자 ‘예후'의 아버지이기도 하였는데(19:2), 아사 왕이 신앙의 길을 이탈하자 그를 준열하게 책망하였다.
선견자 : ‘그 보는 자’ 라는 의미. 하나니는 앞일을 내다보는 자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후부터 아사왕에게 전쟁이 있을 것임을 예언한다(9절).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이는 아사가 여호와가 아닌 아람 왕을 의지한 것에 대한 결과.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 즉 아사가 철저히 의지한 대상이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벗어났나이다’
히브리 원형은, 본래 ‘미끄러지다’란 단어. 구약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도망하다', ‘피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됨(창 19:17; 삿 3:26).

선견자 하나니의 이와 같은 언급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이는 아사 왕이 하나님을 의지했다면 이스라엘 왕 바아사에게 뿐만 아니라 아람 왕 벤하닷에게까지도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란 아쉬움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본절에 이어지는 8절에서 하나니는 과거 아사 왕의 승리 대상으로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를 언급 한다. 그런데 '룹 사람'은 아사 왕의 전쟁에 관한 기사인 본서 14:9-15에 언급된 바 없다. 그럼에도 볼구하고 8절에서 구스 사람과 더불어 룹 사람이 언급된 것은 ⇒ 아사 왕이 본래 물리쳐야 했던 대상이 이스라엘 왕과 아람 왕 두 왕이었어야 했다는 본절의 언급과 대칭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다(Raymond B. Dallard). 아사는 물리쳐야 할 아람 왕을 물리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뇌물을 보내 군사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였던 것이다. 

그 예언자는 그것이 왕의 우행이었다고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9절).

우리에게 우리가 의지할 만세 반석이 있으면서도, 꺾어진 갈대에 기대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는 그의 우행을 납득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점을 보여 주고 있다.

1. 그는 자기 경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는 것(8절).

모든 사람 중에서도 아사만은 하나님을 불신할 이유가 없었으니, 그는 그토록 능력이 큰 조력자가 자기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였었고 그 앞의 자기 아버지와 같이 "그가 자기 하나님 여호와께 의지하였기 때문" 에 그 구조자 즉 하나님에 의하여 위협적인 적군에게서 승리를 거두게 되지 않았던가!(13:18; 14:11) 그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즉 "에티오피아인들(구스인들)과 룹 사람은 한 나라를 집어 삼킬만한 거대한 무리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당신이 여호와께 의지한고로, 그가 저들을 당신의 손에 붙히지 않았었는가? 그래 그런 하나님이 바아사를 대적하여 당신을 돕기에 부족하신 분이겠는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많이 체험하였지만, 그 많은 경험도 그에 대한 우리의 의혹을 더욱 가중시킨다. 하나님은 여섯 번이나 곤경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일곱 번째 궁지에서는 그를 의심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간사한 것인가.

우리는 어쩔 수 없어서, 필요에 의해서만 하나님께 신뢰를 둔다. 그렇지만 일단 우리가 기대어 있을 수 있는 다른 것들이 생기는 날에는 쉽사리 그것들에게 너무 의지를 하며 우리 자신의 이해력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상이 미소지으면서 아주 그럴듯하게 비위를 맞추는 때에라도, 하나님께만 믿음직한 신뢰를 둘 수 있다.

 💡 16:8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선견자 하나니는 이번 전쟁에서 나타난 아사 왕의 불신앙을 확연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그가 전에 행했던 전쟁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과거 아사 왕은 일백만이 넘는 세라의 군대와 전쟁할 때에 여호와를 의지함으로써 극적인 승리를 거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동안의 평안으로 교만하여져, 그때와는 규모상 비교조차 되지 않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남유다의 진정한 주권자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가 싸워야 대상인 할 이방 사람을 의지하는 불신앙적 면모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 이를 통해 보이는 것에 유혹되기 쉬운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한결같이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 7절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과거 아사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을 때에는 여호와께서 적군을 그의 손에 붙이셨지만,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적군이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손에 붙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확실한 승리를 안겨주신다는 의미의 관용어(수 8:7). 마치 부모가 사냥감을 잡아 그 자녀의 손에 쥐어주며 맘대로 처리하게 하는 것처럼 왕이 여호와를 의지할 때에는 여호와께서 적군을 잡아 아사의 손에 쥐어 주며 그들에 대한 처분을 맡겼다는 의미. 

2. 아사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그의 섭리에 대한 지식과는 동떨어진 행동을 하였다는 것이다(9절).

아사는 "여호와의 눈이 지면의 여기 저기를 두루 감찰하시어서 그 마음이 온전히 자기께로 향하는 자들을 강하게 붙잡으신다" 는 것을(그렇게 해독할 수도 있다) 몰랐을 리 없었다.

(1) 즉 하나님은 무한하신 지혜로 이 세상을 지배하셔서 피조물들과 그 피조물들의 행동은 끊임없이 그의 감시 하에 있다.

섭리자 하나님의 눈은 빨리 보는 눈이다. 그 눈은 "달리고" 있다. 그 눈은 열심이다. 그 눈은 "여기저기 이리저리" 달린다. 그것은 멀리 보는 눈이다. "온 땅을 두루 살피며" 지구의 어느 구석이든 그의 감찰 아래 있다. 가장 암흑의 땅도 가장 먼 곳도 그의 살핌 아래 있다. 그의 눈은 그의 손을 그의 권능의 팔을 지휘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강하심을 스스로 나타내 보이시기 때문이다. 사탄이 지상의 여기저기를 걸어다니느냐? 섭리자는 이리저리로 "달리신다" 또 섭리자는 결코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는다.

💡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션견자 하나니는 사람의 심령을 궤뚫어 보시는 여호와의 눈에 아사의 이번 행동은 망령된 것이었음을 지적함.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여호와의 눈’
여호와 하나님은 순수한 영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인간과 달리 육체가 없다(눅 24:39 ; 요 4:24; 딤전 6: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눈과 손과 입 등을 가지고 계시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출32:11; 시 17:8; 사 40:5).
⇒ 이는 영적 존재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분을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지 실제로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눈’
자기 백성의 거처를 항상 지켜보고(신 11:12), 인생을 통촉하며 (시 11:4),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는(잠 15:3)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한 길 사람의 속을 알 수 없는 인생과 달리,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살피사 그의 중심을 궤뚫어 보신다(렘 17:10).

‘두루 감찰하사’
원형 ‘슈트’는 -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민 11:8; 삼하 24:2; 욥 1:7). 하나님의 눈이 온 땅 이리저리 돌아다닌다는 본문의 표현은 —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행위, 생 각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의 진심을 살피는 그러한 여호와의 행위가 과거에 끝나지 않고 시대를 초월하여 계속된다

(2)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이익을 위해 세상을 다스리시며 저희의 구원에 대한 자기 사랑의 계획을 추구하여 만사를 행하시되, 모든 것을 "자기 종 야곱을 위하여 자기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다는 것이다(사 45:4).

"그리스도께서는 만물 위에 있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엡 1:22).

💡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전심으로’
‘그의 마음’ + ‘완전한’ = ‘그의 완전한 마음으로’

무엇이 ‘완전한’ 마음의 상태인가?
상황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지 않고, 언제나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 것. 본절에서 선견자 하나니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여호와를 찾는 아사 왕의 마음이 일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가?
사람의 마음을 살피사 그의 진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고 의지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능력을 베푸시나니’
여호와께서 붙잡아 형통하게 만드신다는 의미. 여호와의 축복은 아무에게나 임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초월하여 변함 없이 그를 의지하는 자만이 여호와의 측복을 받을 수 있다.

(3)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지켜 주심을 확신할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도 그것에 의존할 수 있는 온갖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희들을 의무의 길에서 보호하실 수 있으시며(지혜와 힘은 그의 것인고로), 실제로 그는 저희를 보호하시려고 의도하신다. 이 점을 실제로 믿지 못하는 불신앙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되는 모든 일의 기초가 되며,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아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였고, 그런 까닭으로 벤하닷에게 추파를 던졌다.

3. 그는 자기 이득에 상반된 행동을 하였다고 했다.

(1) 그는 수리와 왕의 세력이 증대해지지 못하도록 억제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다(7절).

"그의 군대가 네 손아귀에서 빠져 나갔으니",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람의 군대가 바아사와 연합했을 것이고, 그 결과 바아사의 군대와 함께 멸망당했을 것이었다.

(2)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여, 그 후부터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전쟁이 가져다 주는 끊임없는 경보를 각오하여야 했다(9절).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상실하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권 밖으로 벗어나게 하는 자이다.

💡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이 일 = 아사 왕이 벤하닷을 의지한 행위.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망령되이 행하다 = ‘어리석게 굴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지적 어러석음을 나타내기보다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갖추어야 할 바를 갖추지 못한 결여를 나타낸다.

(성령의 다른 용례)
사울 왕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주관한 일을 사무엘이 질책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된 것(삼상 13:13),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어 인구 조사를 시행한 다윗이 스스로를 한탄할 때 이 단어가 사용 된 것(삼하 24:10). 본문에서도 선견자 하나니는 아사의 영적 어리석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을 의지하는 것이 —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역력히 보여준다.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어떤 전쟁을 말하는가? 아마 본서 저자는 본문에서 아람과 국한된 전쟁을 말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유지되었던 평화가 깨어지고 계속적인 전쟁을 겪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성경에는 그 후에 아사 왕이 전쟁하였다는 기사가 나오지 않지만, 기록이 없다고 해서 전쟁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성경은 역사상 일어난 모든 사건을 다 기록해 놓은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혹자는 본문이 아사가 아닌 그의 후손에 해당되는 사항어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본문을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것이다.

Ⅱ. 이 꾸짖음에 대해 아사는 불쾌했다.

비록 이 말이 하나님의 사자로 알려진 자에게서 나왔고 그 견책이 합당하고도 정당한 논리 위에 서 있고 구구절절이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된 것이라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우행을 지적해 말하는 이 선지자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그 선지자에게 격노하였다" (10절).

 💡 10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아사가 노하여’
‘노하여’ 원형 ‘카아쓰’는 본래 ‘고통을 주다’ 라는 의미의 단어 심장이 찢어질 만큼 큰 고통으로 격노하는 것을 나타낸다(신 4:25; 삿 2:12).

신정 왕국의 왕이 선견자의 말을 듣지 않고 그 말에 격분한 것은 그 선견자를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 결과 아사는 비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후 그의 아들인 여호사밧, 백성들에게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러하면 형통하리라"(20:20)고 말하였다. 여호사밧은 자신의 부친이 선견자 하나니를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함으로써 형통하지 못하고 비참한 말년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어떻게 대헤야 하는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아사는 이런 인물인가? 이런 사람이 자기의 일생동안 그 하나님 여호와께 마음이 온전하였던 자인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하라! 지혜로운 자라고 하면서도 화를 내다니! 이스라엘인이라고 하면서 예언자에게 성을 내다니! 선량한 사람이라는 그가 책망을 참지 못하고 자기의 허물에 대한 훈계를 견딜 수 없었다는 말인가!

여호와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간들의 마음대로 하도록 방임해 두실 때 그 인간은 꼴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행위를 우상화하는 자들은 반박에 견디지 못하며, 까다롭고 열정적 기질에 멋대로 만족하는 자들은 그 때문에 무례한 행실과 불경건에 빠지고 말 것이어서 언젠가는 하나님에게까지 정면으로 덤벼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쓴 뿌리가 어떤 몸서리 나는 열매를 맺는가 살펴 보라.

1.그는 노하여서 선지자를 옥에 넘겼으며, "그를" 죄인처럼 "수옥에 넣었다." 어떤 이는 "착꼬대에" 들여 보냈다고 해석하기도 하며, "감방(길고도 좁은)에" 넣었다고도 한다. 하나님의 예언자는 책망에 견디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는 많은 사람들을 겪게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옥’
문자적으로 : ‘비트는 집’, ‘차꼬대가 있는 집’ 이로 보건대 하나니는 단순히 감방이 아니라 고문을 당하는 감옥에 던져졌던 것으로 보인다.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는 이러한 일은 성경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훗날 선지자 스가랴가 요아스 왕을 책망하다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24:20-22)과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의 죄악을 지적하고 패망을 예언하다가 시드기야 왕에 의해 감옥에 갇히는 일(렘 32:2) 등이 있게 되지만,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는 불명예를 맨 처음 떠안은 왕은 아사 왕이었다.
그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던 아사 왕이(15:17) 그런 일을 행하였다는 사실은,
→ 참으로 항상 깨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자라도 죄악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다윗 왕과 대조되는 아사 왕의 행위
아사의 행위는 다윗 왕의 행위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살인한 죄를 범하였지만, 나단 선지자가 죄를 지적하였을 때 철저하게 회개하였다.

반면 아사는 선견자 하나니의 정당한 질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투옥하였다. 그에게는 죄를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먼저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중요하나, 더 중요한 것은 죄를 지었을 때 철저히 그리고 겸허히 회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상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시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아니라, 지은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는 자이다. 다윗의 위대함은 바로 이러한 죄의 인정과 철저한 회개에 있다. 

2. 이렇게까지 그릇된 행동을 한 "그가" 그 위에다 "백성 중 몇몇을 학대하기" 까지 하였는데, 아마 그들은 수난중인 그 선견자를 인정하는 사람들이었거나, 아니면 그의 특수한 친지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박해하는 데에다 자기 권력을 남용한 그는 나아가서 그 자신의 수하인들을 분쇄하기 위해 그 권력을 오용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로써 아사는 스스로를 약화시켰으며 자기의 이득을 상실하였다. 대개의 박해자들은 폭군들이었다.

 💡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
학대하다
히브리 원형은 ‘산산조각나다’, ‘눌러 부수다’ 란 의미. 백성들을 철저히 압제하였다는 것.

의로운 선지자를 박해하는 왕을 보면서, 의로운 백성들은 이를 만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사 왕은 그들마저 잠아 압제함으로써— 아무도 자신을 대항하지 못하도록 봉쇄하여 버렸다.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는 사실은= 아사 왕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또 한번 주어졌음을 의미하는데,아사 왕은 그 회개의 기회마저 묵살해 버림으로써 화를 자초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