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사무엘하 16, 고린도후서 9, 에스겔 23, 시편 70, 71
묵상구절
1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
2 이 년 후에 그가 사마리아의 아합에게 내려갔더니 아합이 그와 시종을 위하여 양과 소를 많이 잡고 함께 가서 길르앗 라못 치기를 권하였더라
3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시겠느냐 하니 여호사밧이 대답하되 나는 당신과 다름이 없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다름이 없으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 하는지라
4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 보소서 하더라
5 이스라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하니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하나님이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6 여호사밧이 이르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7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는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하더라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하니
8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여러 선지자들이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10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11 여러 선지자들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승리를 거두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더라
12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좋게 말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소서 하니
13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14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하는지라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거두소서 그들이 왕의 손에 넘긴 바 되리이다 하니
15 왕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16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는지라
17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 예언하지 아니하고 나쁜 일로만 예언할 것이라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더라
18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0 한 영이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2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23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하는지라
24 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바로 그 날에 보리라 하더라
25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미가야를 잡아 시장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26 왕이 이같이 말하기를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게 하라 하셨나이다 하니
27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된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고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 서론
제 17-20장은 남유다 제4대 왕 여호사밧(B.C. 872-848 년)의 행적을 다룬다.
앞선 17장은 남유다 역사상 최전성기를 구가한 여호사밧의 업적에 대하여 다루었다.
18:1-19:3
그러나 여호사밧의 선정과 번영을 보여준 앞장과 달리 이어지는 18:1-19:3,
여호사밧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킨다. 여호사밧은 북이스라엘의 열왕들 가운데 우상 숭배에 가장 열심을 보이고 악정을 펄친 제7대 왕 아합(B.C. 874-853년)과 연합하였으며, 참 선지자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 ⇒ 큰 패배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
이러한 18:1-19:3은 크게 세 부 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18:1-11
여호사밧과 아합의 결혼 동맹과 길르앗 라못 수복을 위한 남북 연합군 결성 및 거짓 선지자들의 남북 연합군 승리 예언.
2.18:12-27
아합 왕이 전쟁에서 패하여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 미가야의 참 예언과 미가야에 대한 아합의 박해.
3.18:28-19:3
미가야의 예언을 무시하고 전쟁에 나간 남북 연합군의 패배와 아합의 비참한 죽음
이와 같이 본장은 여호사밧 개인의 신앙이나 정책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거짓 선지자들과 참 선지자의 예언 행위에 대해 상술하고 있다.
그런 맥락 가운데 여호사밧은 참 선지자를 찾아 그 예언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실천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런 정황 가운데서도 아합은 여호와의 심판의 칼을 맞았지만, 여호사밧은 목숨을 부지한다.
이러한 차이는 비록 두 왕이 모두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미혹되긴 하였으나, 아합은 우상을 숭배하는 악인이었던 반면 여호사밧은 여호와를 신실히 섬기는 의인이었던 점에 있다. 하나님은 그 앞에서 정직하게 행한 여호사밧이 비록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오류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언약을 따라 악인의 심판 가운데서 그를 보호해 주셨던 것이다.
💡 아합 왕
역대기에서는 북이스라엘 제7대 왕 아합(B.C. 874-853년)의 이름이 본절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34절에서는 아합이란 이름조차 생략하고 ‘이스라엘 왕'이라는 표현만을 사용하여 그의 죽음을 보도한다.
이러한 역대기의 기록은 열왕기의 기록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열왕기 저자는 아합의 통치 개시를 보도하는 왕상 16:29부터 시작하여 아합의 사망을 보도하는 왕상 22:40에 이르기 까지 무려 7장에 걸쳐 그의 행적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즉 여기에는 그가 이방 여인 이세벨과 결혼하여 아내의 영향으로 바알 등 이방 우상을 이스라엘에 도입한 것과(왕상 16:30-33)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3년 반 동안의 가뭄을 경험한 것(왕상 17:1-18), 그리고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고(왕상 21:1-16) 엘리야로부터 심판 선고를 받는(왕상 21:19-24) 등 역대기에는 기록되지 않은 많은 악행들이 소개된다.
열왕기와 역대기의 차이점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 북이스라엘에 우상 숭배가 만연하며 결국 멸망에까지 이르게 된 내력을 보여주려 하였으나 본서 저자는 정통성이 없는 아합 왕의 잠다한 사적에 대하여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정통성 있는 유다의 왕 여호사밧과 관련된 부분만을 간단하게 기록하였다.
●아합과 여호사밧의 동맹(역대하 18:1-3)
❖ 1-3절 : 아합왕의 길르앗 라못 수복을 위한 연합군 제안과 여호사밧의 수락
Ⅰ. 여호사밧는 점점 강성해져 갔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풍족히" 누렸다는 것은 앞에(17:5) 나왔었는데, "그의 부귀와 영광이 경건과 선한 경영에 의하여 더하여졌다" 고 여기에 다시 나와 있다.
💡 18:1,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여호사밧은 부와 명예를 겸비한 왕이었다. 그런데 본서에서 부귀와 영광은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일천 번제를 드리고 여호와께 백성 통치를 위해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1:12; 9:22)과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유다를 여호와 앞에 바로 세운 히스기야(32:27) 등에게는 부귀와 영광이 주어진 반면, ↔ 여호와의 뜻을 거슬러 제사장의 권한을 침범한 웃시야에게서는 부귀와 영광이 떠나가 버린(26:18) 사실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런 측면에서 여호사밧이 누린 부귀와 영광은 그의 능력의 산물이 아닌, 그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적극적으로 추구한 데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로 볼 수 있다
Ⅱ. 그러나 더 지혜로와 지지는 않았다.
만약 더 지혜로와졌다면 저 타락한 이스라엘인 곧 스스로를 사악한 일에 팔아 먹은 아합과는 애당초 결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악한 자에게서 무슨 선한 것을 얻어낼 수 있었겠는가? 또 그가 그렇게까지 완고한 행악자 곧 우상 숭배자요 박해자인 아합에게 무슨 선을 행할 수 있었으랴! 여호사밧이 그런 자와 인척을 맺었다. 곧 자기 아들을 아합의 딸 아달리아에게 혼인시켰다.
💡 18:1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아합의 딸 아달랴의 결혼은 B.C. 865년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여호람과 아달랴 사이에서 태어난 아하시야가 22세에 제6대 남유다 왕으로 즉위하였던 것에 비추어(왕하 8:26) 추정한 연대이다.
아합과의 결혼이 합당하지 않은 이유
그런데 아합은 시돈의 왕녀 이세벨과 결혼하여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등 여호와의 신앙에서 완전히 떠나 있던 악인이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호사밧이 이러한 이방 우상을 숭배하는 가문과 결혼 동맹을 맺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흔인하지 말라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명시적으로 기록된 내용이기 때문이다(출 34:16).
비록 아합의 딸이 이방인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방 우상 숭배자였다는 점에서 이방인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여호사밧이 아합 가문과 결혼 동맹을 맺은 것은 분명한 잘못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밸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라는 말씀은 신•구약을 관통하여 변화될 수 없는 성도의 결흔 법칙이다.
여호사밧의 잘못된 판단/오류
그러나 여호사밧은 영적 측면보다는 정치적이고 실리적인 측면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아합과 걸혼 동맹 맺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아합은 → 비록 악한 왕이기는 하였으나 북이스라엘을 정치•군사적으로 강대국 대열에 올려 놓았는 바, 여호사밧은 이러한 아합과 결혼 동맹을 맺음으로써 북이스라엘과의 갈등과 동족 상잔의 위험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오류로 인한 결과 여호사밧은 당대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맛보았을 뿐 아니라 아들인 여호람 시대에는 아합의 딸 아달랴로 인해 남유다에 우상 숭배가 횡행하였고, 훗날 정치적 학살이 일어나는 등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되었다(21:6-11).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 가치와 기준을 버리고, 실리적 가치를 쫓아 세상과 영합할 때에는 — 결국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이것은 다윗 가문의 결혼 가운데에서도 가장 좋지 못한 배필을 얻은 셈이다. 나는 여호사밧이 이 혼사로 무엇을 기대할 속셈이었는지 궁금하다.
(1) 순풍에 돛단 듯 상승일로에 있는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아마도 자만심이 이 혼사를 성립시켰을 것이다. 그의 종교는 그 아들들 주위에 있는 모든 이방 군왕의 딸에게 장가보내는 것을 금하였었다. "너희는 네 아들들을 위하여 저희 딸들을 취하지 말지니라."
그러나 여호사밧은 부귀와 영광을 한 몸에 다 지녔으므로, 자기 아들을 평민의 딸에게 결혼시킨다는 것은 명예의 손상이라고 생각하였다. 왕의 딸이어야 하되 이방인이 아닌 자를 염두에 둔 그는 이세벨이 그 여자의 모친이라는 것은 별반 생각지 않고 아합의 자식을 택하였다.
(2) 혹자는 여호사밧이, 이 임기응변적 수단으로 자기 아들 대에 가서는 왕국의 통일을 염원하면서 정략적인 결혼을 추진하였으며, 아합은 아마 그런 것까지 의도는 하지 않았더라도 그를 자기의 상속인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호사밧에게 아첨하였을 듯하다고 본다.
2.이 결혼으로 인하여
(1) 여호사밧은 아합과 아주 친근한 교제를 맺게 되었다.
그는 사마리아로 아합을 예방하였고 아합은 여호사밧이 자기에게 표한 경의에 기뻐하며 당시의 관례에 따라 굉장히 성대한 환대를 하였다. 아합은 "저를 위하여 양과 소(즉 순고기)를 풍부히 잡았더라" 고 했다(2절). 이 점에 있어서 그는 그의 다윗의 길로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윗은 "행악자의 회중을 미워하며 악인과 같이 앉고자 아니 하였고" (시 26:5) "저희 진수 성찬을 먹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시 141:4).
(2) 이 결혼은 여호사밧으로 하여금 아합과 동맹하여 수리아와 대전하게 하였다.
아합은 여호사밧을 설득하여 길르앗-라못의 수복을 위한 원정군에 가세하도록 하였는데, 이 길르앗 라못은 요단 저쪽에 있는 갓 지파의 성읍이었다. 아합은 그 성읍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스라엘 성읍들을 다윗 가문의 상속자인 여호사밧에게 당연히 속하는 줄을 알지 못하였던가? 이스라엘 왕이란 칭호는 찬탈하였던 것이요, 근거가 없는 왕위였던 터에, 무슨 면목으로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는 데 도와 달라고 여호사밧에게 청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도 여호사밧은 호인인지라 그와 같이 가기로 양보한다. "나는 당신과 일반이라" (3절). 사귐은 물론이요 친절도 해가 될 때가 있다. 아합이 여호사밧을 위해 베푼 잔치는 단지 그를 감언이설로 꾀어 이 토벌 전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원수의 입맞춤은 기만으로 하는 행위이다."
💡 18:2 이 년 후에 그가 사마리아의 아합에게 내려갔더니 아합이 그와 시종을 위하여 양과 소를 많이 잡고 함께 가서 길르앗 라못 치기를 권하였더라
2년 후에,
여호사밧이 아합 가문과 결혼 동맹을 맺은 후 2년 정도가 지나서 사마리아를 방문. NIV는 ‘레케츠 와님'을 ‘몇해(some years later) '로 번역하였다. 실제 이 해는 22년 간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아합이 (B.C. 874- 853년) 죽은 해이므로, B.C. 853년경이 되며, 앞절에서 밝혔듯이 이 두 가문의 결혼이 B.C. 865년경에 이루어졌다면 이는 결혼 후 약 12년 정도가 흐른 때가 된다. 비록 성경에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여호사밧은 결혼 동맹을 맺은 아합과 왕래를 자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문 당시에도 여호사밧은 사마리아로 직접 가서 아합과의 정상 회담을 가졌다.
사마리아 : 당시 북이스라엘의 수도.
아합의 부친 오므리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당시 세멜이라는 사람에게서 온 두 달란트를 주고 사마리아산을 사서 그 산 위에 견고한 성을 건축하고 세멜의 이름을 따라 그 성 읍을 ‘사마리아'로 일컬었었다. 그의 뒤를 이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아합 역시 그 성에서 이십 이년을 통치하였다(왕상 16:23-29). 아마 당시 여호사밧은 사돈인 아합의 초청을 받고 사마리아 를 방문하였을 것이다.
‘권하더라’
결혼 동맹을 맺은 여호사밧을 극진히 대접한 아합은 만찬 후에 한 가지 정치적 문제를 놓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의 골자는 ⇒ 요단 동편 에 있는 길르앗 라못을 남북 연합군을 결성하여 함께 공격하자는 것.
‘권하더라’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단순히 권면한 정도가 아니라, 갖은 수단을 동원해 그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음. 3절에 따르면 마치 아합이 여호사밧에게 길르앗 라못 정벌에 대한 의사를 단 한번 물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호사밧의 동의를 얻으려고 —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설득하고 설득했던 것이다.
‘길르앗 라못’은 어떤 지역?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편 바산 지역에 위치한 상업적, 전략적 요충지.
아합이 여호사밧을 초청한 이유
이곳은 본래 이스라엘의 땅이었으나 아합의 부친 오므리가 아람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빼앗겼었다(왕상 15:20-22). 그리고 아합이 벤하닷 2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곳의 반환을 약속받았으나(왕 상 20:34) 계속 지연되자 아합은 결혼 동맹을 맺은 여호사밧의 힘을 빌어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여호사밧을 사마리아로 초청하였던 것이다.
왕상22:3 강해 (길르앗 라못 지역에 대한 아합의 갈망)
📌 아합의 마음속에 길르앗 라못 수복을 향한 열망이 매우 강하였다.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올리브와 포도가 잘 자라 농업에 적합한 비옥한 땅이기도 했다. 또한 무역의 중심지였으므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종교적, 군사적, 상업적 이유에서 아람으로부터 반드시 탈환해야 할 성읍이었다.
이곳은 아람 왕 벤하닷 1세가 이스라엘 왕 바아사로부터 빼앗은 땅이었다는 데에서도 드러나듯 이(15:20-22) 본래 이스라엘의 땅이 분명하였으며, 벤하닷이 아합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다시 이 곳을 반환하여 주기로 약속까지 한 터였다(20:34).
그러나 이러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벤하닷은 일단 위기를 모면하자 자신의 약속을 지난 3년 동안이나 이행하지 않고 버려온 것이다. 따라서 길르앗 라못의 탈환에 대한 아합의 주장은 그 효용성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당성 면에서도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아합의 승리에 대한 확신과 함께 길르앗 라못을 차지해야 하는 이러한 객관적 이유들은
— 이번 전쟁에 대하여 선지자 미가야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갈등을 일으키며(17절),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지 아니면 인간적 판단에 따를지 독자들로 하여금 귀추를 주목하게 한다.
아합의 교만과 비참한 결말
아합이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군대의 힘을 자신하며 교만하게 말하는 모습은 앞선 20:10에서 아람 의 왕 벤하닷이 보여준 바로 그 모습과 동일하다. 아합은 벤하닷의 교만과 그의 패배를 타산지석으로 삼지 못하고 동일한 우를 범하였던 것이다. 아합은 자신의 이러한 교만으로 인해 결국 미가야 선지자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거부하고 끝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37절).
💡 18:3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시겠느냐 하니 여호사밧이 대답하되 나는 당신과 다름이 없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다름이 없으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 하는지라
여호사밧의 답변 —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
나북 연합군을 결성하여 아람이 점유하고 있는 길르앗 라못을 수복하자는 아합의 끈질긴 설득에 여호사밧은 그의 청을 수락한다. 아마도 아합은 이번 기회에 약속의 땅을 회복하고 주번 강대국들의 위협에 민족적인 차원에서 공동으로 대처하자고 여호사밧을 설득하였을 것.
여호사밧이 이와 같이 결정한 이유는?
여호사밧이 아합에게 설득되어 그의 청을 받아들인 것은 순전히 정치적 선택.
1.그는 결혼 동맹을 맺은 사돈의 제안을 인간 정리상 뿌리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2.이번 기회에 아람으로부터 길르앗 라못을 탈취할 경우 팔레스틴 북동쪽에 위치하였으며 역사상 여러번 히브리인을 괴롭혔던(삼상 14;47; 삼하 8:3-5; 10:1-8) 아람의 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더 이상 아람의 군사적 위협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정략적인 계산에 의하여 아합의 청을 수락하였던 것이다.
그의 결정이 합당했는가?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아합이 내세운 약속의 땅 회복과 선민의 위협 요소 제거라는 명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분이 어떠하든, 이번 여호사밧의 행위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 하나님을 대적하 고 미워하는 우상 숭배자와 손잡은 것이라는 점에서 비난을 면할 수 없다.
한편, 여호사밧온 아합의 청을 수락하기는 하였지만, 먼저 여호와의 뜻을 물어본 후에 상세한 전략을 수립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는 그에게 아직까지는 신앙 양심이 살아 있어, 이것이 그의 삶을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왕상22:4 강해,
신하들에게 길르앗 라못 수복 의지를 밝힌 아합 왕은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도 길르앗 라못 수복에 대한 도움을 요청한다. 당시 여호사밧은 강성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대하 17:13-19), 여호사밧의 원조는 아합에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 하였다. 그러므로 본몬의 표현에는 분명허 나타나지 않았으나 여호사밧의 방문은 길르앗 라못 공략을 위한 군사 동맹을 맺기 위한 아합의 초청으로 이루어졌고 여호사밧의 아합을 방문하기 이전에 이미 이 일에 대하여 서로간에 상당한 공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의 지휘관인 왕, 전투를 직접 수행하는 백성, 그리고 전투를 수행하는 각종 도구들을 대표하는 말을 함께 공유한다는 여호사밧의 말은
= 남유다의 전력을 다하여 이 전투를 지원하겠다는 의미이다. 여호사밧의 이러한 말이 외교적이고 수사적 표현임을 감안하더라도 두 왕 사이의 연대 의식이 매우 강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병행 구절인 대하 18:3에서는 본문의 ‘말'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있는데, 이는 본문이 역대기의 기록보다 여호사밧의 길르앗 라못 수복 전쟁 지원 의사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여호사밧의 적극적 지원 약속은 아합으로 하여금 길르앗 라못 수복 전투에 대한 승리를 확신하게 하는 하나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예언자들과의 자문(역대하 18:4-27)
이 문단은 열왕기 상 22장에 나오는 기사와 거의 축자적으로 흡사하다. 열왕기에 나온 것은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좋겠고, 또 더 첨가할 것은 많지도 않다. 그러나 이 기회를 이용하여 생각해 볼 것은 다음과 같다.
❖ 4-5절 : 아합이 선지자들을 모으고 전쟁 수행 여부에 대한 신탁을 구함
1.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지 물어 보아야" 하며 하나님을 인식하고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본 연후에야 기꺼이 그 원정에 착수하였다(4절).
구체적인 믿음과 기도로써 성경말씀과 우리 자신의 양심과의 사심 없는 자문을 통하여서, 또 섭리의 미묘한 암시에 주의 깊은 응시를 통하여서 우리는 그러한 물음을 물어 볼 수가 있다. 또한 그렇게 하면 그 결과는 크게 만족할 것이다.
💡 18:4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 보소서 하더라
여호사밧이 인간적 정리와 정치적 목적 때문에 아합의 청을 수락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서, → 이번 전쟁이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뜻을 묻기를 아합 왕에게 공손히 청하였다.
‘오늘’
‘바로 오늘’ 여호와께 물어보기를 청한 것.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 보소서’
묻다 (따라쉬)
여호사밧 부친 아사 왕의 신앙 특성(14:4,7; 15:2,4,12,15)을 단적으로 나타내준 단어.
여호와를 찾는 신앙이 그 아들 여호사밧에게까지 물려졌음.
특히 여호사밧은 그의 부친이 말년에 평생 구하던 여호와를 구하지 않는 모습(16:12)을 보면서 ↔ 자신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는 삶을 일관되게 지속하겠다는 결심을 하였을 것.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아함 왕 앞에서도 자신 있게 이와 같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왕상22:5 강해,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서 다시 번역하면 → ‘청컨대 당신은 지금 당장 여호와의 말씀을 잘 찾아 구하소서'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뜻인지를 열심히 추구하고 조사하여 정확하게 분별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러한 요청은 여호사밧의 경건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호사밧은 대하 17:4~9과 19:5-7 에서도 이와 동일한 모습을 나타낸다. 사실 당시 강한 군사력과 행정력을 가지고 있었던 여호사밧이 이처럼 모든 일을 결정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우선 순위에 두었다는 것은 → 참으로 아합에게 귀감이 될 만한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잘 조사하여 분별하라는 조언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거짓 예언(6절)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며, 설혹 거짓 예언이 있더라도, 이에 속지 않고 하나님의 참된 뜻을 잘 간파해 내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아합의 입장에서 본다면 멸망의 길에서 둘이키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또 한번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헌데 이는 당시 아합이 처한 선택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여호사밧은 한편으로는 전쟁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힘으로 인하여 아합의 전쟁에 대한 승리를 전망하게 하였으면서(4절),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라는 조언을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간언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2.악한 친구는 선한 사람들에게도 큰 해를 끼친다는 사실이다.
지혜와 은혜 그리고 결단심을 가진 자들도 악인들과 화기애애하게 교제하면서 그 사악자들로 인해 피해를 전혀 입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본문에 보면 여호사밧도 아합에게 아첨하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는 가짜 예언자들의 말을 참을성 있게 보좌에 앉아 듣고 있었다(9절). 그래서 아합이 여호와의 예언자를 증오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런 책망도 못했으며, 게다가 충성스런 선지자를 야비하게 학대하는 그 거짓 예언자를 꾸짖지도 못했고, 그 참된 선지자를 감옥에 쳐 넣은 아합에게 이의를 제기하지도 못했다. 남을 조롱하는 자들의 좌석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는 사람들은, 비상한 지혜와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는 한, 자기들의 의무를 불이행하는 중한 죄를 범하지 않고서는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3.아첨하는 무리들에게 둘러 쌓인 자들은 불행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아첨하는 자들은 아부하는 예언자들로서 저희에게 평화를 외치며, 오직 귀에 거슬리지 않는 일만 예언한다. 이리하여 결국 아합은 속아 넘어가고 파멸을 당하였다. 그것은 정당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되리라는 예언을 듣고도, 자기에게 공정하게 위험을 경고해 준 예언자보다도 자기의 비위를 맞춰주는 자들을 더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자기 친구들 특히 목회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에게 솔직하고도 충실한 책망을 할 자유를 주고 또 그것을 참을성 있고 친절히 들어줄 수 있는 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 하는 셈이다. 우리에게 가장 기분 좋게 들리는 충고라고 해서 항상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만은 아니다.
💡 18:5 이스라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하니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하나님이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선지자 400인’ = 아합의 형식적 대처
여호사밧의 제안에 아합은 매우 형식적으로 대처하였다. 그는 즉시 선지자 400명을 모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여호와의 참된 종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었으며(22절), 아합 왕의 비위에 맞는 말만 하는 어용 선지자들이었다.
‘선지자’(나비)
마치 물이 끓어올라 거품이 이는 것처럼 마음 속에서 터져나오는 말을 선포하는 사람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갖는 단어. 흔히 신의 감동을 입이 혀가 움직이는 대로 예언을 하는 사람을 가리킴.
아합 왕이 불러들인 선지자들은..?
그런데 6절에 의하면 여호사밧이 그들의 예언을 못미더워하자 마지 못해 ‘여호와의선지자’를 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이는 당시 아합 왕에게 나아왔던 선지자 400명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세속적인 왕실 어용 선지자, 더 나아가 악한 영과 결탁한 종교인들.
어용 선지자들의 예언
아합에게 모여든 400명의 선지자들은 그럴 듯한 말로 아합이 원하는 예언을 하여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하였다. 내용인즉슨 하나님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실 것이므로 주저 말고 길르앗 라못을 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의 손에 붙인다', 즉 ‘나탄 빼야드’는 어떤 대상을 철저하게 몰락시켜 그에 대한 처분을 맡긴다는 의미를 나타내었다. 여기 400명의 선지자들온 이러한 관용어구와 함께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예언을 전달하는 참 선지자인 것처럼 가장하였던 것. 그러나 그들의 그 예언은 여호와의 참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에 의해 보기 좋게 깨지고 만다.
👉 왕상22:6 강해,
아합이 어용 관변 선지자들을 일시에 400명이나 소집한 사실은 아합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를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하기에 바랐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이처럼 많은 수의 선지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합이 이처럼 많은 선지자를 두고 부른 이유는?
자신의 전제 왕권을 비호하며 정당화해 줄 종교 집단으로서, 또한 자신에게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이렇게 많은 수의 선지자들을 고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격의 선지자들이 아합의 구미에 맞는 승리의 예언을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합이 이렇게 하나님의 참 선지자를 미워 하였다는 것 = 결국 그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미워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는 엘리야의 심판 신탁을 들을 때에 보여주었던 겸비함(21:27)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시금 아합이 완악하고 교만해졌음을 잘 보여준다.
❖ 6-8절 : 여호사밧의 요구에 따라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를 추천함
💡 18:6 여호사밧이 이르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여호사밧은 다른 선지자를 요구함
여호사밧은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 400명의 선지자들을 믿지 못하고 믿을 만한 다른 선지자를 찾았다. 400명의 선지자가 길르앗 라못 수복을 장담하여 예언한다 해도, 그들의 말은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오직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실하고 진실된 하나님의 선지자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본절에는 5절에서와 달리 ↔ ‘선지자'라는 단어가 ‘여호와의'라는 단어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단어 ‘라이흐와' — 문자적으로 ‘여호와께 속한'이라는 의미.
따라서 ‘나비 라이흐와' ‘여호와께 속한 예언자 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표현은 전쟁 승리를 장담한 400명의 선지자들이 여호와께 속한 자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역설적 뉘앙스를 담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유다 왕국 말기에
백성들과 왕에게 유다의 평화를 예언한 수많은 선지자들 역시 모두 여호와께 속한 선지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왕에게 신임을 얻으려는 정치적 목적에 혈안이 되어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는 거짓 예언을 남발하였을 뿐이다(렘 8:8-17). 여호와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고 경고하였다(렘 23:16).
이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악한 자들이 횡행하고 있다. 이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성도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깨어 있어야 한다.
💡 18:7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는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하더라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하니
미가야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 혹은,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인가?' 라는 의미. 이러한 이름 뜻에서 미가야의 부모는 여호와 신앙을 인생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가야에 대한 아합의 평가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은 — 항상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악할 뿐이었다. → 이 말은 그의 예언이 아합 왕의 마음에 항상 거슬렸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그에게 — 하나님의 참 선지자로부터 긍정적인 예언이 주어질리 만무하다. 아합은 그 동안 그러한 미가야의 예언을 들으면서 자기 자신의 문제점을 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선지자를 멀리해 왔다. 즉 그는 미가야 선지자의 참된 예언을 통해 여러 차례 깨닫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을 더욱 강팍히 하였던 것. 그는 한마디로 ‘깨닫지 못하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인물이었다(시 49:20).
아합의 말에 대한 여호사밧의 반응
→ 아합 왕을 부드럽게 저지(질책)함.
아합은 자신에 대하여 불리한 예언만을 하는 미가야를 매우 싫어했고 이번 전쟁에 대해서도 그에게 신탁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를 부르지 않았는데, 여호사밧은 이러한 아합의 선지자에 대한 잘못된 태도와 지식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원문으로 볼 때 아합의 말은 매우 강렬한 어조를 띠고 있는 데 반하여, (히브리 어법 ‘로’) 여호사밧의 말은 은근한 질책이었다. (히브리 어법 ‘알’) 여호사밧은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이 전달하는 뉘앙스와 같은 강한 질책을 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저지하였던 것.
여호사밧의 대처에 대한 평가
그러나 이는 영적인 문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신념을 확고하게 밝히기보다는, 인간 관계를 중요시하여 신앙적인 면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잘못된 태도이다.
📌 왕상22:8 강해,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말씀은 좋건 싫건 하나님 말씀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긴 본문의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전하는 미가야를 불러오게 함으로써 아합으로 하여금 을바른 길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여 순종하는 그 길로 돌이키지 않음으로 → 결국 멸망을 자초하고 말았다.
★ 이를 통해 우리의 의지에 거슬리는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쫓아 순종하는 것만이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 18:8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아합은 이번 일에 있어서 여호사밧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때문에 미가야를 불러 그에게 여호와의 뜻을 물어보라는 여호사밧의 말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하였다.
‘내시’ (싸리쓰)
본래 남자의 고환을 잘라내는 거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명사. 구약에서 44회 사용. 주로 ‘신하’ (창37:36), ‘관원장’(창40:7), ‘내시(에4:5), ‘환관(단1:7) 등의 의미로 번역.
그런데 이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들이 → 주로 이방 지역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싸리쓰' 는 주로 이방 문화와 관계되어 있는 직책이다. 그런 직책이 북이스라엘에 있었다는 사실은 초대 왕 여로보암 때부터 여호와의 말씀을 버린 북이스라엘이 이미 이방 문화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는 사실을 암시한다.
‘속히 오게 하라’
본문에서 매우 촉급함을 보여줌(강의 명령법) 그러나 그러한 다급함은 진실로 여호와의 뜻을 구하고자 하는 절박함 때문이 아닌, 여호사밧과의 관계 및 전쟁에 한시라도 빨리 출정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다.
❖ 9-11절 : 5절의 사건을 보다 사세히 설명함
💡 18: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여러 선지자들이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
본래 아합과 여호사밧의 정상 회담은 왕궁 안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지자 400명의 예언을 듣기 위해서는 왕궁 안보다는 성문 어귀 광장이 더 적합하였다. 사실상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 성내의 중요한 공동 회의나 재판 따위는 성문 어귀 광장에서 개최되었다(룻4:1). 당시 고대 사회에서 성문 어귀 광장온 여론의 발원지요, 여론의 교환 장소, 공적 업무가 처리되는 장소였다. 아합 왕과 여호사밧 왕이 바로 이 곳에서 왕복을 입고 보좌에 앉았다는 것은 어제부터 선지자의 예언을 듣는 공적 절차가 시작됨을 보여준다.
📌 왕상22장 강해,
예복을 입음, 왕좌에 앉음
왕의 자격으로 행사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 400명의 선지자 집단의 예언함이 국가의 중요한 대사를 결정하는 공식적 행사였고, 이들의 예언을 듣는 것이 여호사밧과 아하브이 개인적 의견 수렴을 위한 절차 정도가 아니라 공식적 의전 절차였음.
→ 전쟁 재개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요식 행위
여러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모든 선지자들이 그들 앞에서 예언 을 하고 있었다'*가 된다. 본절부터 11절까지는 사실상 8절 사건에 뒤이어 일어난 연대기적 사건이 아닌, 5절의 사건을 보다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그들 모두 예언을 하였으며, 그 예언들의 내용이 한결같이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 18:10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시드기야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란 뜻.
그는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B.C. 597-586년)와 동명 이인으로 서 아합 왕에게 영합한 타락한 종교 지도자였다. 그는 여호와를 떠난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자 하는 여호와의 뜻을 무시하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실 것이라고 거짓 예언을 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의 의미를 무색하게 하고 말았다.
‘철로 뿔들을 만들어’
→ 자신의 예언의 확실성을 주장하기 위헤 상징적 도구를 사용.
당시 근동 사회에서 뿔 = 권세를 상징(왕상 1:50),
그것을 철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 아합에게 매 우 강한 권세가 주어졌음을 나타낸다. 즉 시드기야는 여호와께서 아합에게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권세를 주어 아람 군대를 궤멸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철로 된 뿔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구약 시대 히브리 사회에서는 선지자들이 예언의 객관성을 사실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 시각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곤 했다. 에스겔 선지자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의 날을 시각적으로 예언하기 위해 좌우편으로 무려 430일을 누워 지내야 했으며(겔 4:4-6), 예루살렘 포위의 확실성을 사실적으로 예언하기 위해 밧줄에 묶여야 했다(겔 4:7.8)
예레미야 선지자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이 썩고 그 백성들이 무가치하게 될 것을 시각적으로 예언하기 위해 자신의 허리띠를 유브라데 물가에 두고 썩어서 쓸모 없어지게 만들기도 하였다(렘 13:1-11).
‘여호와의 말씀이 … 하셨다’
이 말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여호와 께서는 아합이 아람을 물리칠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시드기야는 여호와로부터 그 어떤 말씀도 받지 못하였고, 단지 거짓말하는 영에게 미혹 당하였을 뿐이다(22절). 그를 비롯한 400명 의 어용 선지자들이 거짓 예언을 한 원인 이미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고, 영적으로 부패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거짓말하는 영에 미혹 당하여 거짓된 예언을 하였던 것이다
👉 왕상22:11 강해,
11절, 시드기야의 예언
시드기야가 만든 철로 된 뿔 ⇒ 아합이 막강한 힘과 능력으로 길르앗 라못을 충분히 차지할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됨.
또한 이렇게 ‘철 뿔'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시드기야의 예언 활동은 모세가 수송아지의 위엄과 들소의 뿔에 비유하여 요셉 지파를 축복한 내용을 연상하게 한다(신 33:16.17).
만약 아함 왕이 이러한 모세의 예언을 익히 알고 있었다면 시드기야의 이 철뿔은 틀림없이 그의 패권주의적 야심을 들끓게 하는 것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신 33:17의 내용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에브라임 지파가 세상 열방과 싸워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18:11 여러 선지자들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승리를 거두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더라
400명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동일한 예언을 하였다. 그들은 길르앗 라못 공격에 이미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아합의 마음을 더더욱 부추겼다.
❖ 12-15절 : 참선지자 미가야의 조롱
💡 18:12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좋게 말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소서 하니
미가야를 부르러 간 아합의 내시가 미가야에게 길한 예언을 할 것을 요청함.
아합이 파견한 내시의 종용
아합의 성향과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400명의 선지 자들의 예언이 아합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미가야에게도 왕의 마음에 영합한 예언을 할 것을 종용하였다.
선지자의 사명
선지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예언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아합의 내시는
예언자 미가야에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쫓아 예언하도록 지시하였다. ⇒ 이는 만유의 주권자되시는 여호와를 무시하는 오만이며, 그 자신을 음부의 맨 밑으로 떨어뜨러는 자기 파괴의 행위일 뿐이다(사 14:12-15).
‘그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소서 하니’
한글 개역 성경의 ‘여출일구'라는 표현은 ‘한 입에서 나오듯이 동일하게'라는 의미
400명의 선지자들이 마치 한 사람이 이야기하듯이 동일한 예언을 하였음을 나타낸다. 즉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아합의 전쟁 승리를 예언하였던 것이다.
👉 왕상22:13 강해,
이 사자는 참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아합 왕이 원하는 예언을 하라는 일종의 지침을 미가야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
일찍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능력을 두 번이나 목도하였을(20장) 아합의 사자의 이러한 태도는 아합만 아니라 아합의 신하들에게까지 팽배해 있는 불신앙적 면모를 확인하게 한다. 이것은 그 사자가 스스로 생각한 내용이 아니고 아합 왕의 명령을 따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여도 이러한 그의 처사는 ⇒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 왕을 두려워 한 데서 비롯된 것이므로 책망을 면할 수 없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참된 예언은 현실 정책에 대한 지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정책이 먼저이고 예언이 나중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리어 예언이 정책의 방향을 가늠하고 현실 정책의 문제를 지적해 주고 교정해 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참 예언을 따를 경우 일시적으로는 괴로울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왕하 6:20-23). 한데 이러한 영적 진리를 모르고 아합 왕의 사자는 모든 것의 우선 순위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 정책에 종속된 것인 양 이해하고 있었던 것.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그러고 궁극적 의미에서 ‘왕에게 길한 것'이 되었을 미가야의 바른 예언을 저지하고, 반대로 본문에서와 같이 왕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릇된 예언들을 지지하라는 어리석은 발언을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선지자에게까지 정치적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
💡 18:13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본절은 미가야의 참 선지자됨이 잘 드러나 있는 구절. 왕의 마음에 영함한 메시지를 말하라고 중용하는 내시에게 미가야는 — 여호와의 선지자가 어떻게 예언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말함으로써 자신이 그 400명과 다른 참 선지자임을 드러내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살아계시는데, 내가 어찌 선지자의 직분을 팽개치고 인간의 기분에 영합하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느냐?’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미가야는 선지자의 사명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 사명대로 살아가는 자였다.
선지자의 사명
결코 인간 개인의 의견을 선포해서도, 권력자에게 영합해서도 안된다. 그의 주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며, 그는 단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만을 전할 뿐이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말씀이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아도, 그것이 듣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지 않아도, 선지자는 바로 여호와께서 주신 그 말씀만을 선포해야 한다.
이러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인간 세상에 전달된다. 그러나 만약 선지자가 개인의 뜻을 앞세우고 권력자와 세상에 영합한다면 하나님의 뜻은 왜곡되고 만다.
영적 암흑기의 특징이 바로 세상에 영합한 거짓 선지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아합 당시 북이스라엘 역시 400명의 거짓 선지자와 한 명의 참 선지자가 있었다. 이러한 비율이 상징적으로 보여 주듯이 악한 왕 아합 치하의 북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몸시 어두운 시대였다. 그러나 엘리야가 850 명의 우상 선지자들에 맞서 여호와의 뜻을 전했던 것처럼, 미가야는 여호와의 참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고군 분투했다.
💡 18:14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하는지라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거두소서 그들이 왕의 손에 넘긴 바 되리이다 하니
‘와가서 승리를 거두소서’
사마리아 성읍 어귀 광장에 도착한 미가야 선지자는 아합의 질문에 대하여 비꼬듯이 대답을 한다. 본문은 11절의 400명의 거짓 예언자들의 말인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와 동일하다. 단지 11절에서는 2인칭 단수 명령형이 사용된 반면, 본절에서는 2인청 복수 명령형이 사용되었다.
→ 이러한 본문은 미가야 선지자가 아합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도 대상으로 하여 말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평소 신앙이 좋았던 유다 왕 여호사밧조차 악한 왕 아합과 함께 전쟁을 도모하는 것에 대하여 냉소하며 이 말을 한 것이다.
미가야는 본문에서 단지 아합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일 뿐이지, 여호와의 예언을 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처럼 처음에 자기의 맹세(13절)대로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은 권력자 앞에서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좋은 예언만을 바라는 아합에게 여호와로부터 온 예언을 전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18:15 왕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본문은 계속적 ‘와우’로 시작,
이는 아합 왕이 미가야의 예언을 듣자마자 곧바로 본절의 말을 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원문으로 보면 아합의 말은 대단히 신경질적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아합의 말은 직역이 힘든 전치사와 의문사가 계속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거의 이는 외마디 소리에 가깝다. 미가야가 말하는 태도로 보아 아합 자신은 물론 주위의 사람들까지 그가 아합을 조롱하며 거짓말하고 있음이 분명함을 알아차린 상황에서, 아합은 자존심이 크게 상하여 이러한 말을 신경질적으로 내뱉었을 것이다.
‘진실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고..’
이에 이어지는 아합의 말을 보면 아합은 미가야를 항상 거짓말만 하는 선지자로 매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 이외에는 나에게 어떤 것도 말하지 말라고'로 직역되는 본문을 통하여 잘 드러난다.
⇒ 이러한 표현은 아합이 마치 항상 여호와의 진실된 뜻을 찾아 구하였던 것처럼 보이게 하며, 미가야는 오히려 거짓말만 일삼았던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이외에는'으로 번역되는 부사를 사용, 항상 진설된 것만 말하라고 하였다고 강조하는 것이나, 동사의 미완료형을 수반할 때 영원한 금지 명령를 나타내는 부정어 ‘로’를 사용하여 거짓을 철저하게 금지하였음을 강조하는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
📌 왕상22:16 강해,
사실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라는 여호사밧의 의견에 따라 자기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어용 선지자들을 불러 모았고, 또한 그들 외에 다른 선지자들을 찾는 여호사밧의 요청에 못 이겨 미가야를 소환한 아합 왕으로서는, 미가야가 전쟁에 대한 승리의 예언을 하였으므로 그가 거짓말을 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문제삼지 않고 곧장 전투를 수행하러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갈 준비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함이 집요하게 미가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된 신탁을 토설하도록 압박한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것이기보다, 자기의 위신을 차리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미가야의 예언이 진실된 예언이 아니라는 것은 아합 자신은 물론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자신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아합은 ‘내가 몇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진실된 신탁을 말할 것을 강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아합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목적, 자기 계획, 그리고 자기 위신을 차리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참된 신탁도 우습게 여기는 그의 교만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
미가야의 예언과 상관 없이 이미 길르앗 라못 수복전쟁을 하기로 결심한 아합은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확신하였고 따라서 만약 미가야가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한다는 신탁을 낸 다면 자신의 승리를 통하여 이 선지자의 예언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
신명기 율법에 의하면
선지자의 말이 응험되지 않는 경우 그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로 정죄되어 죽음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다(신 18:19~22). 실제로 아합이 미가야를 죽이려고까지 했는지는 본문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패배를 예언한 미가야를 길르앗 라못 전투의 승패 여부가 나기까지 구류에 처한 것으로 보아(27절), 전쟁 승리 후 어떠한 방식으로든 처벌을 하려했던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합은 평소 앙심을 품고 있었던 미가야를 율법의 규정을 이용하여 공식적이고 합법적으로 처벌하려 하였을 것.
이러한 아합의 행태는 이세벨이 거짓 증언을 통하여 나봇을 살해하였던 것보다(21:11-13) 더욱 가증하다고 할 수 있다.
아합의 죄가 가중되는 이유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신탁을 개인적 원한을 갚기 위한 빌미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쟁 수행 능력을 하나님 말씀의 성취 능력보다 더 높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은 심판 연기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1절 강해 참조) 아합이 또다시 무고한 자에게 악행을 저지르려 했다는 점은 그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 16-17절 : 참선지자 미가야의 예언과 아합의 반응
💡 18:16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는지라
미가야 선지자가 아합의 마음을 꿰뚫음
이미 미가야는 아합이 여호와의 참된 예언을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앞선 15절의 아합의 말도 진실이 아닌 자기 합리화를 위한 가장된 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야는 그런 아함의 뒤통수라도 때러듯이 여기서는 심판을 선언하는 예언을 거침없이 전한다. 미가야 선지자는 영적 눈으로 하늘의 궁정 회의를 보고서 아합의 죽음을 단호히 예언한 것이다.
‘내가 보니’
원형: 목적을 가지고 한 곳을 응시하는 것.
미가야에게 나타난 환상은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온전하고 맑은 정신으로 영적 눈을 열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장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나님은 참 선지자 미가야에게 이번 전쟁의 결과를 환상을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셨던 것.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길르앗 라못 수복을 위해 출전한 남북 연합군이 아람군에 대패하여 허둥대며 도망가는 모습.
‘흩어지다’
원형: ‘산산이 부수다’, ‘사방으로 흩어지다’
전쟁에서의 패배를 나타낼 때에도 사용된다(삼상 11:11).
본문에서는 수동형(Niphal)으로 사용되어, 전쟁의 상황에서 타의에 의해 흩어져 패배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본문은 ⇒ 하나님께서 남북 연합군을 패하게 하며 흩어버리실 것을 나타낸다.
‘목자’ (로에) — 아합을 지칭
‘로에'는 본래 가축을 돌보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 성경에서 흔히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과 여호와 하나님에 대 한 비유적 표현으로 쓰이곤 한다(삼하 5:2 ;시 23:1).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목자로 아합을 세우셨으나, 그가 전쟁에서 백성들을 잘 돌보지 못할 것임을 지적하기 위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 18:17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 예언하지 아니하고 나쁜 일로만 예언할 것이라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더라
본절 또한 15,16절과 마찬가지로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 와우법으로 시작. ⇒ 아합이 미가야의 예언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여호사바에게 말하였음을 보여준다.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득의양양한 아합
아합의 말투 : 본절에 나타난 아합의 말은 15절에 나타난 아합의 말이 신경절적인 뉘앙스를 지닌 것과 달리, 득의양양한 뉘앙스를 지닌다. 아합은 부정의 뜻을 갖는 반어법 (’분명히 내가 마하였다’)을 사용하여 자신이 이전에 한 말이 맞았다는 사실을 여호사밧에게 확인시키고 있는 것.
이에 이어지는 본문에서도 아합의 득의양양함이 드러나고 있다.
즉 본문은 금지 부정어 ‘로’와 미완료형 동사가 결합된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히브리어에서 영원한 부정을 의미한다. 이 역시 아합이 미가야에 대한 자신의 말이 사실로 입증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아합의 실수
이처럼 아합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듣고 이를 자신의 삶을 돌이키는 기회로 삼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감정적으로만 대응하여 심판을 재촉하고 말았다.
❖ 18-22절 : 미가야가 왕에게 본격적으로 재앙을 예언함
💡 18:18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17절의 아합의 말에 대한 미가야의 반응, 일종의 책망. 이는 곧 왕이 듣기에 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여호와께로부터 온 계시임을 인정한다면, 그 내용이 길한 것이든 홍한 것이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미가야가 전하는 대상
한글 개역 성경은 ‘왕’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나 원문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원문은 2인칭 복수 — 청자가 두 사람 이상.
27절에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 이를 본문과 연결시키면 지금 미가야 선지자는 아합 한 사람이 아닌 그 옆에 앉아 있는 여호사밧을 비롯하여 그들을 시위하고 서 있는 대신들, 그리고 거짓말하는 영에 미혹 당하여 거짓 예언을 한 사백명의 예언자들 모두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가운데는
아합 왕은 자신의 뜻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여호사밧도 아합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사백명의 선지자들은 거짓말하는 영에 미혹 당하여 아합에게 전쟁 승리를 예언할 것이 아니라, 전쟁 실패를 정해 놓으신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미가야 선지자가 자신이 환상 중에 본 하늘 궁정회의의 모습을 소개함.
‘내가 보니’
‘내가 분명히 보았다’ 는 뉘앙스. 미가야는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분명히 두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것.
미가야가 목격한 존재들
미가야의 환상 중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모두 육체를 갖지 않은 영적 존재. 즉 여호와께서도 인간이 볼 수 없는 영적 존재이시며 하나님을 수종드는 천사를 가리키는 ‘하늘의 만군' 역시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 존재. 따라서 미가야가 본 환상은 육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영안으로 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일을 보다 확실하게 예언할 수 있도록 당신의 종 미가야의 영안을 여셔서 하늘의 신비를 보여주신 것이다.
보좌에 앉으셨고
분사형 지속적으로 앉아 있는 상태. 여호와의 앉아 계심은 만왕의 왕이시며, 재판장으로서의 직위를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다(시 9:7).
💡 18: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집행
누가 이스리엘 왕 아합을 꾀어
‘꾀다’ : 사람을 속이는 행동을 의미.
속이는 행위는 거짓을 진짜처럼 믿게 하여 상대방을 기만하는 행위.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십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는 말씀과 배치되는 것으로, 하나님이 자기 모순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아합을 속여 죽이시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행위이지 걸코 자기모순적 행위가 아니다.
구약 성경 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수많은 악인들을 죽이셨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는 십계명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죽이는 하나님의 행위는 이 세상의 주권자이자 심판자로서 죄와 악에 대한 심판의 수행이기 때문어다. 아합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이며, 우상을 숭배하고 자신의 정욕에 빠져 수많은 사람들을 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람이다.
아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은 그와 같이 불의를 행하는 아합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게 하여, 스스로 멸망의 길로 달려가도록 하심으로 심판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쉽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1,12).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본문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계획과 작정을 말씀하시는 것과 관련하여 그 심판을 수행하는 존재가 따로 있음을 말해 준다. → 그 존재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 좌우편에 시립해 있는 천사들.
그 천사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실행하는가?
단순히 여호와의 심판 계획을 실행하기만 하는 로봇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본문과 같이 심판의 수행 방법 등을 고안하여 하나님께 건의할 수 있는 지적 존재이다.
4."불순종의 자녀에게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사탄의 권세" 에 대하여 생각하자. 거짓말하는 영 하나가 400명의 거짓말하는 예언자들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그들을 이용하여 아합을 기만할 수 있었다(21절). 마귀는 거짓말쟁이가 됨으로써 살인자가 되고, 인간들을 속여서 파멸케 한다.
5.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고 도리어 거기에 반역하는 자들은 강열한 미혹에 버려두어 거짓말을 믿어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생각해 보자(21절).
"거짓말하는 영" 은 의무와 행복의 길을 권해도 믿지 않는 자들을 유혹하여 멸망하게 하리라!
💡 18:20 한 영이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한 영’
본문에서는 인간과 직접적으로 관계 없는 독립적인 영적 존재를 가리킴. 본문에 나오는 ‘그 영'의 정체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욥 1장에 등장 하는 사단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사단 역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존재로 주로 거짓을 통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여호와 앞에 나온 한 영이 어떤 이이 있더라도 아합을 꾀고야 말겠다는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를 피력한 것이 된다. 하나님이 악인 아합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자 → 그의 뜻을 수행하는 한 영이 놀라운 책략을 만들어 냈는데, 그것은 아합으로 하여금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게 하는 것.
하나님의 진리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자들은 진리를 미워하므로, 거짓에 쉽게 현혹된다. 아합이 바로 이런 부류의 대표자였으며, 한 영은 바로 그런 아합을 거짓에 속아 넘어가게 만들겠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 18: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거짓 영의 아합을 속이려는 계획
1.‘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과거 하와에게 다가와 거짓말을 함으로써 선악과를 따먹게 하여 인류 전체를 불행으로 몰아넣은 사단이 (창 3:1-5), 이제는 또다시 아합을 속이기 위하여 왕의 모든 선지자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짓의 영 사단(요 8:44)의 속이는 일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멸망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단의 이러한 궤계를 잘 알고, 거짓을 대적하여 그것에 미흑되지 말아야 한다.
2.‘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그 모든 선지자'
아합에게는 그 자신에게 속한 관번 어용 선지자들이 있었다.
‘입 안에’
그 영이 그 선지자들의 혀를 강제적으로 조종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영의 뜻을 말하게 할 것이라는 의미
하나님의 승인
‘너희는 나가라’ ‘그리고 너는 그렇게 하라’
— 본문은 두 개의 짧은 명령문으로 직역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명령을 통하여 사단의 계획을 승인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승인이 있은 후에 사단이 활동하였다는 것은 → 사단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와 통제하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 18:22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21절에서는 아합의 선지자들의 입에 들어가는 것이 한 영의 의지대로 되는 것으로 묘사된 반면,
↔ 본절에서는 여호와의 의지대로 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를 두고 혹자는 두 구절간에 모순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모순이 아니다. ⇒ 한 영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400명의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행위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일어난다. 즉 그분의 허락과 명령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여호와께서 그 행위를 하셨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본문은 ‘여호와께서 입에 주셨다'로 직역된다. → 이는 그 사건을 여호와께서 주권적으로 주도하셨음을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왕에게 대하여 ‘문자적으로, ‘당신을 대항하여(NASB, against you)’. —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아합에게 흉한 내용임을 나타내는 표현.
재앙 (’라아’) = 문자적으로 ‘악(evil)’. 여기서는 disaster, 재앙이란 의미로 사용됨.
여호와께서는 아합에게 사망의 심판을 선고하셨고, 이러한 사실을 계시를 통해 알게 된 미가야 선지자는 계시 그대로 에언하였던 것이다.
❖ 23-26절 : 바른 예언을 한 미가야 선지자가 거짓 선지자와 왕에게 핍박을 당함
💡 18:23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하는지라
미가야가 고난을 당한 이유
미가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참된 계시, 즉 진리를 말했다는 이유 한 가지 때문에 악인들에게 고난을 당했던 것이다. 동일한 이유로 핍박 받으신 예수님 이러한 모습은 이 땅에 진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다는 이유로 유대언들에게 고난을 당하셨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한편, 미가야를 가장 앞장서 핍박한 자는?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 그는 마치 양심에 화인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진실을 말하는 미가야 선지자를 구타하며 여호와의 영이 자신에게 나타났으므로 자신의 예언이 참되다고 주장한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하는지라’
본절에서 시드기야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영이 시드기야 자신으로부터 결코 미가야에게로 건너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 18:24 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바로 그 날에 보리라 하더라
시드기야에 대한 미가야의 반응
자신의 뺨을 때리며 망언을 한 시드기야를 향해 미가야 선지자는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예언이 성취될 무렵 시드기야는 사마리아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골방에 들어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러한 말을 시작하면서 미가야 선지자는 ‘힌네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힌네카' 직역하면 ‘당신은 보라’ ‘자, 다음 사실을 명심하라'는 뉘앙스. ⇒ 미가야는 시드기야의 과격한 행동과 말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것을 촉구한 것.
‘골방에’
골방이 암시하는 바
골방은 육체적•심리적으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소이다. 그런데 그 방 안에 있는 방에 숨는다는 것은 ⇒ 시드기야에게 있는 불안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암시.
위와 같이 예언한 배경
아마도 미가야 선지자는 아합의 전쟁이 실패하여 그 전쟁에 대한 책임이 시드기야를 비롯한 400명의 선지자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을 내다보고 이와 같이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가 되면 아합의 측근들이 거짓 예언으로 아합을 죽음으로 내몬 400명의 선지자들을 처형하려고 찾을 것이고, 거짓 예언을 강하게 주장했던 시드기야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골방에 숨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그는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이 참 예언인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칠지 모르나, 후회해야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 18:25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미가야를 잡아 시장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본절은 아합이 참 예언을 하는 미가야 선지자를 잡아 부윤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 끌고가 투옥시키라고 명령한 내용.
시장 아몬
사마리아 성의 성주.
아들
요아스는 왕자로 볼 수도 었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들’ 에 해당하는 ‘뻔'은 ‘아들'이나 ‘후손’ 등과 같이 혈육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주 신임하는 자'를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아스는 아마도 아합 왕의 시위대 뜰, 즉 왕궁 감옥을 담당하는 책임자였을 것이다. 유다의 패망 직전 선지자 예레미야도 진실을 예언한 까닭에 ‘왕의 아들' 말기야의 감옥 구덩이에 던져진 적이 있다(렘 38:6).
6. 신실한 사역자들도 곤경을 당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진실하고 인간들의 영혼에 대하여 인자하다고 하는 이유로 흔히들 증오를 받고 박해를 받으며 학대당하는 것은, 신실한 사역자들의 운명이다.
미가야는 양심적으로 그의 일을 이행하였다는 이유로 희롱 당하며 투옥되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는 정죄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들의 신실함 때문에 박해를 받는 모든 자들이 하듯 확신을 가지고 이 문제의 진상을 호소할 수 있었다(27절).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 날에는, 누가 옳은 자이고 누가 그릇된 자인가 하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 때는
- 그의 박해 받는 백성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될 것이고,
- 믿지 아니하던 자들에게는 영원한 부끄러움이 될 것이니, "그 날에" 그들은 자기들이 믿으려 하지 아니하던 것을 "보게 될" 것이다(27절).
💡 18:26 왕이 이같이 말하기를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게 하라 하셨나이다 하니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아함은 자신이 길르앗 라못 수복 전쟁에 나가 승리하고 사마리아성에 안전히 돌아올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평안히’
아합은 자신의 안전하고 평안한 귀환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의 참 선지자를 핍박한 아합에게 그러한 의미의 평강이란 있을 수 없었다. 더욱이 그는 이미 미가야 선지자로부터 이번 길르앗 라못 수복 전쟁에서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그는 자신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고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게 하라
본문에서는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적은 양의 음식을 가리킴. 이로써 바른 예언을 한 미가야는 감옥 속에서 큰 고난을 당했을 것이다.
❖ 27절 : 핍박 앞에서 미가야 선지자가 담대히 예언을 선포함
💡 18:27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된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고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본문은 미래 사실에 반대되는 상황을 언급하여 장차 되어질 일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가정법 문장.
미가야의 말의 의도
본문을 다시 번역해 보면 ‘만약 당신이 정말로 평안히 돌아오신다면'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는 미래 사실의 반대를 가정하는 것으로서, 아합이 결코 평안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언하는 화법.
아합의 무사 귀환이 불가능한 근거는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데에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고 핍박한다고 해서 좌절되겠는가? 결코 그 릴 수 없다.
미가야 선지자의 담대한 선포
미가야 선지자는 자신을 핍박하는 왕과 거짓 선지자들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자신의 예언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미가야 선지자의 담대함의 근원
자신이 전한 예언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참된 것이기 때문에 미가야 선지자는 담대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진리에 대한 확신은 위협과 핍박 가운데서도 담대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따라서 참된 선지자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