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역대상 23, 베드로전서 4, 미가 2, 누가복음 11
묵상구절
5: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5: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5:3 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5: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5: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5:6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인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이 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라
5:7 그 글에 일렀으되 다리오 왕은 평안하옵소서
5:8 왕께 아뢰옵나이다 우리가 유다 도에 가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본즉 성전을 큰 돌로 세우며 벽에 나무를 얹고 부지런히 일하므로 공사가 그 손에서 형통하옵기에
5:9 우리가 그 장로들에게 물어보기를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 하고
5:10 우리가 또 그 우두머리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아뢰고자 하여 그들의 이름을 물은즉
5:11 그들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예전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
5:12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이 성전을 헐며 이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더니
5:13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고
5:14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금, 은 그릇을 옮겨다가 바벨론 신당에 두었던 것을 고레스 왕이 그 신당에서 꺼내어 그가 세운 총독 세스바살이라고 부르는 자에게 내주고
5:15 일러 말하되 너는 이 그릇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라 하매
5:16 이에 이 세스바살이 이르러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지대를 놓았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오나 아직도 마치지 못하였다 하였사오니
5:17 이제 왕께서 좋게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보물전각에서 조사하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
매튜헨리/옥스퍼드
포로기 선지서, 역사서의 배경
💡 포로 귀환 시대 선지서들간의 역사적 관계성과 그 의미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이방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귀환자들이 선민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기술함으로써 B.C. 586년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수로 인해 영원히 사라질 것만 같았던 이스라엘 선민 역사의 영속성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리고 에스더서는 포로로 사로잡혀 간 어스라엘 민족어 저 이방 땅 바사 즉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부에서 전멸 당할 뻔한 위기에서 구출된 소위 부림절(Purim Feast) 사건 또는 부림절의 기원을 기록함으로써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보호에 의한 선민 역사의 영속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 앞선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들이 어쨌든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과정의 기록이었다면
- 에스라-느헤미야-에스라서는 인간들이 잠시 세운 체제에 불과한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도 블구하고 하나님이 한번 택해 주신 이스라엘 민족 자체는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에 근거하여 보호받고 지속된다는 선민 역사의 영속성을 보여주는 책들인 것.
한편 포로 귀환 세대의 선민 공동체의 회복 과정에 있어서 발생한 주요 사건으로는 B.C. 537년 제1차 포로 귀환의 핵심 인물인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B.C. 516년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제2차 포로 귀환의 핵심 인물인 에스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B.C. 458년의 신앙 개혁 운동, 제3차 포로 귀환의 핵심 인물인 느헤미야에 의하여 이루어진 B.C. 444년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제반 개혁 운동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에스라-느헤미야서는 자연히 이들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사건들의 등장인물들
- 선민 신앙의 영웅들 : 선민 공동체의 회복에 앞장섰던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머야, 학개, 스가랴 등과 같은 신앙 영웅들 뿐 아니라
- 고레스(Cyrus, B.C. 539-530년), 다리오(B.C. 521-486년), 아하수에로(Ahasuerus, B.C. 486-465년), 아닥사스다(685 B.C. 465-425년) 등과 같은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들,
- 그리고 르홈, 심새, 닷드내, 산발랏, 도비야과 같은 지방 행정 관료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 이상의 다양한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서 자기 시대의 역사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 항상 하나님이 계셔서, 언제나 당신이 뜻하신 대로 역사의 매듭을 이루어가셨다.
이로 보건대 역사는
- 우발적 사건의 연속이나 일부 인간들의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태초 인간의 범죄와 그로 인한 인생과 우주의 원상태의 훼손에서부터 저 세상 마지막 날 인생과 우주의 원상태의 영원한 희복을 향하여 면면히 이어지는 구속사의 장인 것이다.
- 그리고 성경은 가장 궁극적으로는 구속사의 실체와 그 본질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 선지자들의 격려(스 5:1,2)
◆ 5:1-5 서론
💡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곧 스룹바벨 성전의 건축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제3-6장 기사의 연속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훗날의 예루살렘 성벽 공사 중단에 대한 삽입 기사 및 에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의 중단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4:6-24에 이어 선지자들의 독려로 인한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의 재개와 총독 닷드내의 진상 조사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2절
- 다리오 왕 때에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일어나 성전 재건 공사 재개를 촉구하자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유다 귀환민들이 다시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하였음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학개서와 스가랴서에는
⇒ 학개와 스가랴 두 선지자에게 다리오 제2년 6월과 8월에 각각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 두 선지자가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를 중단하고 신앙의 열정마저 상실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하여
- 그들의 신앙적 무사안일과 나태함을 질책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용기를 내어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를 재개하면
-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물론,
- 재건되는 성전이 비록 솔로몬 성전만한 위용은 지니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영광만은 솔로몬 성전보다 클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학2:4-9; 슥4:6-9).
그리하여 유다 귀환민들은 다시 힘과 용기를 얻어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주도 하에 성전 공사를 재개하게 된 것입니다.
3-5절
유다 귀환민들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에 대한 유프라테스강 서편 관할 총독 닷드내의 진상 조사에 대하여 보도.
- 유다 귀환민들의 16년 만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의 재개는 유프라테스강 서편 관할 총득 닷드내의 입장에서 보면 페르시아 왕의 뜻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일로 보였을 것.
- 그러므로 일단 닷드내는 누구의 명으로 성전 공사를 하는지를 묻고 다리오 왕에게 성전 재건에 대한 진상 조사를 하기에 이른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 닷드내가 유다 귀환민들의 성전 공사에 대하여 다리오에게 보고하면서도
- 공사 자체만큼은 중단시키지 않았다는 것인데, 성경은 이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6-17절
총독 닷드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성전 재건 공사와 관련하여 다리오 왕에게 올린 보고서의 내용을 다룸.
보고서에 담긴 이스라엘 사람들의 겸손한 심령
본문에 다리오를 향한 닷드내의 보고서 내용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앙 고백이 간접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 즉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종으로 소개하면서 자신들이 성전을 재건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와 관련하여
-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 말미암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고백은 그들이 70년 간의 이방 포로 생활을 하나님의 징계로 겸손히 받아들였음을 반증하여 줍니다.
성전 건축이 보류된 것을 단 9년간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나는 최대한 15년간으로 보고 싶다. 이 동안에는 저들에게 제단과 성막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이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행할 수 없을 때는, 할 수 있는 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우리가 좀 더 잘할 수 없음을 안타까와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동기를 방해하는 목적으로 고용된 모사꾼들(4:5)은, 그들에게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1:2)고 말하면서, 영감을 얻어 말하는 듯이 가장했다. 또한 멀지않아 솔로몬의 성전을 건축할 때가 온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을 황폐케" 한 채 자기들의 "내실" 에서 편히 쉬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죽은 것처럼 보이는 이 선한 사업에 어떻게 생기가 주입되는가를 읽게 된다.
Ⅰ. 그들에게 2명의 훌륭한 사역자가 있었다.
이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일을 다시 가동하도록 진심으로 권유했다.
💡 5: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 앞선 4장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시대로부터 다리오 제2년까지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된 사설을 다루었다(4:5.24).
- 그리고 본절로 시작되는 5.6장에서는
이제 학개와 스가라 선지자들의 예언과 독려 및 바사 왕 다러오의 성전 재건 비준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사실을 다룬다.
4장과 5장에 기록된 사건 사이에는 무려 16년의 공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서 기자는 5장의 첫절을 사건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접속사 ‘와우’로 시작함으로써
⇒ 하나님의 역사가 세상 권력에 의해 잠시 지체되었을 뿐 중단 없이 게속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예언하였더니’ —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역사
- 본문을 원문의 어순에 따라 직역하면 ‘그리고 예언하였다. 그 선지자들이’.
- 한글 개역 성경은 누가 예언을 했느냐에 강조점을 두었지만 원문은 예언한 사람보다는 예언한 사실 자체를 더 강조하고 있다.
- 예언은 : 선지자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지만,
- 그 예언의 실질적 주체이자 근원은 : 하나님이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의 재개 사실을 다루고 있는 본장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사실 자체를 강조하며 시작하는 것은
→ 성전 재건 공사가 하나님의 촉구로 인해 재개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공작으로 잠시 중단된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역은 하나님의 섭리적 경륜에 의해 다시 재개될 수 있었던 것.
- 이러한 본문은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되신 하나님의 사역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1. 이 하나님의 종들은 누구였는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로서, 학개 1장 1절과 스가랴 1장 1절에 나타난 대로 다리오 제 2년에 예언하기 시작했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인간들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은 예언에 의해 건축되어야 한다. 즉 세속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그것은 흔히 성전의 건축을 방해하며 거의 진척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 에 의해 건축되어야 한다. "우리의 싸움의 병기" 처럼, 건축의 도구도 역시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건축하는 자들은 복음의 일꾼들이어야 한다.
(2)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촉구하고 그 일을 하는 그들을 도우며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해주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깊이 묵상해 보고서 그들에게 의무를 잘 수행하도록 촉구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할 일이다.
(3)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선지자들을 일으키시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을 가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돕는 자들이 되게 하며, 인도하는 자들이 되며 감독하고 다스리는 자들이 되게 하신다면,
— 그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긍휼을 예비해 두신 증거이다.
💡 5: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선지자들
본서 저자는 ‘선지자들’이란 포괄적 표현과 더불어 ‘학개’와 ’스가라׳ 란 선지자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밝혔다.
- 이는 16년 간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역을 재개하는 데까지는 많은 선지자들의 사역이 있었지만 특히 그 중심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 즉 여호와의 계시가 이들의 피 끓는 외침을 통해 전해짐으로써 — 유다 귀환민들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가 재개되었던 것이다(학 1:1).
당시 유다 귀환민들의 영적 상태
-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대한 열정을 잃고 신앙적 안일과 나태함에 빠져 있었다.
- 여호와 의 전을 건축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핑계하면서
↔ 정작 자신들은 호사스러운 집을 짓고 살았다.
이런 사실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였던 학개 선지자의 말을(학 1:2-4) 통하여 볼 때,
성전 재건 공사 중단의
외부적 요인은 물론 사마리아인들의 집요한 방해였지만
내면적이며 근본적 요인은 하나님을 향한 유다 귀환민들의 신앙 열정의 상실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학개와 스가랴를 통하여 이런 유다 귀환민들의 태도를 책망하시면서(학 1:5-9) 성전 재건 사역의 재개를 촉구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이 왕성하게 전개되지 못하는 데에는
- 물론 외부적인 요인도 작용하지만
- 그보다는 이 일에 부름받은 자들의 신앙 상태 등 내면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따라서 성도는 외부적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적 신앙 상태를 돌아보는 일에 더 큰 힘을 기울여야 한다.
‘학개’ 선지자
- 당시 학개 선지자는 과거 솔로몬 성전을 직접 목격했었을 정도로 연로한 나이였다(학2:3).
- 학개 선지자와 관련하여서는 학개서를 기록한 인물로 성전을 재건하라는 여호와의 계시를 전한 사실 외에는 별반 알려진 사실이 없다.
- 그는 자신의 저서인 학개서에서 건물로서의 성전 재건 사역의 중요성에 대해서만 강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이자 예배 처소로서의 성전의 필요성을 함께 강변함으로써 유다 귀환민들로 성전 재건 사역의 당위성을 인식토록 하였다.
‘스가랴’ 선지자
- 이름 :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
- 스가랴는 소선지서 중의 하나인 스가랴서를 기록하였다.
-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에 대한 예언 사역에 큰 비중을 두었다는 점에서 학개 선지자와 공통점을 갖는다.
- 하지만 학개가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해 예언서를 기록하였다면 스가랴는 환상과 비유 등의 간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예언서를 기록하였다는 차이점이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재건의 중요성을 일관성 있게 강조하였고,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성전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한 점에서 두 사람의 사역과 예언은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
2. 그들은 누구에게 보내어졌는가?
그들은 "유다 사람들" 에게 예언하였다[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예언의 은사를 지녔고 그들은 "선지자들의 자손" 이라 불리웠다(행 3:25). 왜냐하면 그들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에스겔이 "마른 뼈들에게" 예언하여 생기 있게 하려 했던 것처럼(겔 37:4) "그들에게", "그들에게까지" (원문에는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예언하였다. 그들은(패트릭 주교의 견해대로) 백성들을 "거슬러" 예언하였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지 않은 것을 책망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는 증언으로 수락치 않는다면 그것은 어느 날엔가는 고발하는 증언이 되어 우리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 5:1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포로 귀환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는 유다 지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로부터 여호와의 계시를 받는 주체를 ‘유다 지파’ 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한계를 짓는 이유는?
- 첫째,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였고
- 둘째,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유다 지파였기 때문.
여기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한 것은
-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여 성전 재건의 사명을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과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거절하고 여전히 바벨론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뚜렷하게 구별하기 위함이다.
3. 누가 그들을 보내었는가?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혹은(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예언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말했으며,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 및 하나님 영광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 5: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 원문에 근거하여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처럼 본서 저자가 학개와 스가라 선지자의 예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사실을 굳이 밝힌 이유
⇒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선지자 자신으로부터 기원한 것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실제로 학개와 스가랴는 여호와로부터 직접 받은(학 1:3; 슥 1:1,2) 계시의 말씀만을 그대로 전하였다.
Ⅱ. 그들에게는 두 명의 훌륭한 치리자가 있었다.
그들은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들은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였다(2절). 권세와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그들의 권세로 선한 사업을 하는 영예를 이루어야 하며, 그 모든 선한 사업을 원활하게 하는 데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 남의 앞장에 서고 다스리는 일을 맡은 자들은 "모든 의로운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앞서서" 모범적인 배려와 성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이 요인들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지도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지 않고 행복하게 생각했으며, 이 선한 사업을 복구하는 일을 기쁘게 도와주었다. 여기서 학개의 예언서 제1장을 읽어보자(왜냐하면 그것은 이 두 구절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해 얼마나 크게 역사하는가를 보라.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을 존귀케 하시며, 성령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신다.
💡 5: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앞선 1절은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된 때로부터 16년의 공백을 건너뛰어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중심한 선지자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귀환민들에게 성전 재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음을 보도하였다.
이제 본절은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여호와의 계시가 전달된 후에 성전 재건 공사가 재개되었음을 밝힌다.
⇒ 이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중단된 지 16년 만이었고 학개가 성전 재건의 신탁을 말한 지 24일 만이었다(학 1:1,14,15). 성전 건축 재개의 의미는 원문으로 보면 더 잘 드러난다.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 ‘시작하매’ — 원형 (’쉐레’)의 의미
- 일차적으로 ‘풀어놓다’ 란 뜻.
- 성전 재건 공사는 페르시아 정부에 의해 규제를 받아 중단된 상태였는데 이제 그 규제가 풀려 다시 공사를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강조.
- ‘놓아주다’란 뜻도 있음
- 본문에서 이 단어는 성전 재건 공사 중단으로 싸매 두었던 건축 자재들을 꺼내어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일차적으로 ‘풀어놓다’ 란 뜻.
- 본서 저자는 성전 건축 재개가 페르시아 정부의 법적 규제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잠들어 있었던 건축 장비들을 다시 사용하는 감격적인 일임을 전달하기 위하여 ‘쉐레' 란 특별한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 원문을 보면 : 이는 예루살렘 지역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사실만을 나타냄.
-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같은 어떤 특정한 지역에만 한정되는 분이 아니시다.
- 가나안인들이 믿는 바알은 가나안 땅의 신으로 그 지역의 농업을 주관하고, 바벨론 사람들이 믿는 마르둑은 바벨론이라는 나라의 수호신에 불과하였지만
-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에 한정되는 분이라는 식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번역되어서는 안된다.
-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이라는 특정한 지역에 한정되는 분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특정한 민족과 동행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 하나님의 선지자들 : 1절의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
- 그들은 성전 재건 사역을 중단한 유다 귀환민들을 향해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여호와의 계시를 전했다.
- 뿐만 아니라 그 어후 스룹바밸벨과 예수아의 주도로 성전 재건 공사가 재개되자 그들도 직접 재건 공사에 참여하였다.
- ‘함께 있어’ (’웨임메흔’)
-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여’
- 이는 선지자들의 도움은 일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의 도움이었음을 암시한다. ⇒ 선지자들은 성전 재건 실무를 감독하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하여' 그들을 도운 것이다.
-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 성전 재건의 실무를 감독하고 관장하였다면
- 스가랴와 학개는 — 경고와 책망과 격려를 통해 성전 건축의 정신적 측면을 감독하고 독려하였다.
- 선지자 학개의 예를 들면
- 책망 : 그는 성전 재건에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신앙적 안일함에 빠져 개인적 삶의 안락함을 쫓는 당시 유다 귀환민들을 책망하였다(학1:4).
- 격려 : 반면에 성전 재건 사역은 인간의 힘으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심으로 도우시는 일이므로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고 독려하기도 하였다(학 2:4).
‘스알디엘의 아들 사룹바벨과 유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 ‘일어나’
- 원형 =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다’란 뜻.
- 하지만 이 단어는 일어나는 몸의 동작만이 아니라 ‘어떤 중대한 일을 하기로 결단하고 시작하다׳ 라는 의미를 나타낼 때도 쓰인다(삼상 16:12; 사60:1).
- 여기서도 본서 저자는 성전 재건 공사의 재개가 이스라엘 민족사와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 계속되는 성전 건축 사업(에스라 5:3-17)
Ⅰ. 이 선한 사업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이웃사람들이 즉시 알았다.
그들은 유대 사람들을 시기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성전의 친구들을 깨우쳐 성전을 계속 건축하게 하자마자, 악한 영도 자기의 대적들을 깨워 거기에 대항하도록 만들었다. 백성들이 자기들의 집을 건축하고 중수하였을 때는, 상관하지 말라는 명령을 왕이 내렸었다(학 1:4). 그러면서도 왕의 조서는 도성 건설을 중단시키었다(4:21). 그러나 그들이 다시 성전을 건축하려 했을 때는, 비상 경보가 울렸고, 총독들은 모두 그들을 방해하기 시작했다(3, 4절). 그 반대자들의 이름이 여기 적혀 있는데, 그들은 "닷드내" 와 "스달보스내" 였다. 우리가 4장에서 보았던 총독들은 관례대로 새 왕이 즉위할 때 면직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흔히 방백들과 총독, 그리고 각 도의 수령을 바꾸는 것이 흔히 있는 왕들의 정책이다.
이들은 비록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대적들이기도 했지만, 전번 관리들보다는 더 나은 성품을 지니고 있었고, 진상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다. 만일 믿음은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때에(살후 3:2), 다소나마 믿음을 가지는 것은 훌륭한 일이요 명예로운 일이다. 교회의 적들은 모두 똑같이 사악하고 무모한 것은 아니다. 본서를 역사가는 건축자들과 심문관들 간에 있었던 일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3, 4절). 그러나 그의 설명을 중단하고서, 그들이 왕에게 보낸 상세하고 장황하게 기록된 편지의 초본을 요약(4절) 혹은 발췌해 놓고 있다. 비록 그것은 회고하여 쓴 것이긴 했지만, 전체의 내용을 기재해 놓았다.
💡 5:3 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다 나아와(’아타’)’
- 사마리아인들의 경우 ‘나가쉬’를 사용 — 그들의 불순한 의도를 묘사함.
- 그러나 본문의 경우 ‘나가쉬' 가 아니라 ‘아타׳ 를 사용한 것은 닷드내 일행이 과거 사마리아인들처럼 불순한 동기를 가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 즉 닷드내 일행은 유다 귀환민들의 성전 재건 공사 재개가 페르시아 왕의 뜻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닌지 순수하게 점검해 보려는 차원에서 나아왔던 것이다.
총독 닷드대, 스달보스내, 그들의 동관들
- 달보스내를 비롯하여 여러 관리들을 대동한 지방 총독 닷드내의 등장은 여호와의 계시에 따른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역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독자들로 긴장감을 가지게 한다.
이들의 질문의 초점
- 성전 재건.
- 이 일을 하도록 지시한 자가 누구인지?
💡 5: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5: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 앞선 3, 4절은 유다 귀환민들의 성전 재건 공사 재개 소식을 접한 총독 닷드내 일행이 예루살렘까지 와서 진상을 조사한 사실을 다루었다. 이제 본절은 이에 따른 닷드내 일행의 조치를 다룬다.
- 그들이 취한 조치는 공사를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리오 왕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본절은 그들이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된 원인이 어디 있었는지를 밝히는 본문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보셨으므로’
‘하나님이’
⇒ 본서 기자는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았는가?
- 법률이나 정치 역학적 관계에서 찾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란 영적 측면에서 찾았다.
-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본서 저자의 신본주의적 역사관을 읽을 수 있다
‘돌아보셨으므로’
- 직역하면 ‘하나님의 눈이 유다 장로들의 위에 있었다’
- = 하나님의 눈이 유다 장로들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한 것은 지금 유다 귀환민들이 당면한 위기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 유다 귀환민들의 당면한 위기는?
유다 귀환민들은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다가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곧 중단하여야 했다(4:1 이하).
이후 학개와 스가라 선지자가 전한 여호와의 계시에 힘입어 성전 재건 공사를 다시 재개하려고 했지만(1, 2절) 다시 페르시아 관리인 닷드내 일행이 들이닥쳐 또다시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시며 그들이 당하는 위기 상황을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도와주신다.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저자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페르시아 관리 일행이 성전 재건을 추진하는 유다 귀환민들을 결코 멈출 수 없었음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어법상)
슥 4:6-9의 스가랴 예언의 실현
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4: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4: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 스가랴는 성전 재건이
인간의 힘이나 능으로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고 예언하였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돌아보심으로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 진행되었던 것이다.
[본서 저자가 이를 부각시킨 이유]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사단이 아무리 세상의 권력자들을 이 용할지라도
↔ 하나님께서는 그들 배후에서 더욱 강력하게 주관하사 끝내 당시의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 페르시아 관리 닷드내는
- 예수아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유다 귀환민들의 성전 재건 사역을 중지시킬 근거를 찾지 못했다.
- 뿐만 아니라 성전 건축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역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 지시된 일임을 전해들었을 것이므로 정확한 진상 규명에 따른 왕의 결정어 내려지기 전에는 성전 재건을 막을 수 없었다.
- 과거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4:4,5, 24) 달리 여기서 페르시아 관리들이 성전 재건 공사를 중단시키지 않았던 것은
⇒ 실로 본절 서두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유다 귀환민들을 돌아보신 자비로운 섭리의 결과였다.
Ⅱ. 하나님의 섭리는 이 선한 역사를 돌보셨다(5절).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보셨다.
그들은 이 일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었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적은 이전처럼 공사를 그치게 할 수 없었으므로, 마침내 다리오 왕에게 보고하기까지 되었다. 그들은 왕명이 있기까지만 그 일을 멈추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들이 그것을 포기하도록 강권하려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 곧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을 돌아보셨기" 때문이다.
1. 그래서 그들의 대적은 낭패를 당했고, 당황하게 되었고, 약화되었다. 반면에 그 건축자들은 그들의 사악한 계략으로부터 보호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업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의 특별한 보호를 얻게 된다. 그는 영원히 우리를 돌아보실 것이며, 그의 성전 안의 돌 하나에 7 눈이 지킬 것이다(슥 3:9; 4:10).
2. 그것은 그들을 재촉했다.
유다 장로들은 "자기들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눈" 을 깨닫고, 자기들이 행한 것을 살펴보고는 잘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적과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으며, 어떠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일을 강력히 밀고 나갈 담력을 얻었다.
Ⅲ. 그들은 이 문제를 왕에게 고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5:6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인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이 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라
5:7 그 글에 일렀으되 다리오 왕은 평안하옵소서
왕에게 보고서를 올린 사람들
- 이미 소개된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 외에 + ‘아바삭 사람’이 새롭게 등장.
- 아바삭 사람은 누구?
- 스달보스내의 동료라는 표현을 통해 스달보스내가 아바삭 사람들 혹은 아바삭이라는 조사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책임자나 대표 자격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
‘그 글에 일렀으되’
- 원문에 충실히 번역하면, ‘그들이 그(왕)에게 그 글을 보내었다. 그리고 그 글에는 이와 같이 기록되었다’
⇒ 닷드내는 왕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성전 재건 사건과 관련한 자세한 사항을 아뢰고 과연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한 적법한 것인지를 문서를 통해 품신하고 있는 것.
보고서의 구정 (7-17절)
- 7절: 신하로서 왕에 대한 문안 내용,
- 8-10절: 자신들이 성전 재건자들을 심문한 내용,
- 11,12절: 재건하고 있는 성전의 역사,
- 13-16절: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지시한 고레스의 명령,
- 17절: 고레스의 명령이 역사적 사실인지 조사해 줄 것을 의뢰하는 내용
- 핵심은 17절
: 여기에는 유다 귀환민들의 성전 재건 사역이 페르시아 국왕이었던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 이루어진 적법한 것인지 조사해 달라는 본 보고서를 올린 목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
성전 재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온 닷드내 일행은 성전 재건이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한 것이라는 유다 귀환민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또한 스스로 관결하여 성전 재건을 중단시키지 않고 왕에게 보고서를 올려 그 적법성 여부를 판단하려 하였다.
→ 이런 행동은 지극히 객관적이고 공정한 처사. 성실한 관리의 자세를 보여준다.
유다 귀환민들의 성전 재건 공사도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바람직한 조치로 시작되었고(1:1-3), 중단된 성전 재건 공사를 재개하는 일도 페르시아 관리의 공정한 조사가 그 배경에 있었던 것이다.
본서 저자가 밝히고자 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본서 저자가 이처럼 이방 왕이나 이방 관리들의 바람직하고 공정한 조치로 인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재건될 수 있었던 사실을 굳이 밝히는 이유는,
- 하나님께서는 만왕의 왕으로
- 당신의 백성 뿐 아니라 이방의 왕과 관리들도 사용하여
- 당신의 뜻을 차질 없이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1. 유대 장로들은 이 일을 진행시킨 것에 대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충분히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건축하는 일에 모두 합심하여 일을 빨리 진척시키는, 분주하고 순조로운 상황을 목격하고는 그들에게 이처럼 물었다.(9,10절) "무슨 권한으로 너희가 이 일을 행하며 누가 너희에게 그 권한을 주었는가? 누가 너희로 일을 착수하게 했는가? 너희를 지원하는 자들이 있는가?"
💡 5:9 우리가 그 장로들에게 물어보기를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 하고
5:10 우리가 또 그 우두머리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아뢰고자 하여 그들의 이름을 물은즉
닷드내의 성실하고 정직한 자세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
1.닷드내는 이 보고문에 자신이 성전을 재건하는 유다 귀환민들에게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옮겨 적다시피 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 누구의 권위로 시작되었는지를 알기 위헤 다리오 왕에게 보내는 상소문에서 그간의 정황을 이처럼 정확하고 틀림이 없이 기록하였다.
닷드내의 이와 같은 정직한 태도의 결과,
→ 정확한 진상 조사로 이어지고
→ 결국 다리오 왕이 하나님의 전 재건에 대하여 비준함으로써
→ 유다 귀환민들에게 전화위복의 결과를 가져다준다(6:7-9).
2.한 사람이 아닌 성전 재건에 관여한 여러 두령들의 이름을 모두 파악하려 했음.
이 질문에 대해 유대인들은 이렇게 행할 수 있는 충분한 허락을 얻었다고 답해주었다. 왜냐하면
(1)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지엽적인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영예를 위한 이 성전을 건축한다고 해서, 내분을 일으킨다거나 파벌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을 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터전이 되는 신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므로,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의해 보호받고 도움을 얻어야 하며, 그 어느 것으로도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하늘의 하나님" 의 종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왕들의 의무인 동시에 지혜이다.
💡 5:11 그들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예전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
자신들의 정체성을 밝힘 :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천지의
- ‘천지’ 라는 표현은 히브리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극단 어법 가운데 하나.
⇒ 단순히 ‘하늘과 땅’ 만을 가리키지 않고 우주의 앙극단으로서의 하늘과 땅을 가리킨다.
-
- 히브리인들의 개념
- 우주의 가장 높은 곳을 하늘로 가장 낮은 곳을 땅으로 생각하였고는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인 하늘과 땅을 동시에 말함으로써 우주라는 포괄적 개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였다.
- 단순히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만유의 주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
- 히브리인들의 개념
2. 그리고 이와 같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천지의 하나님, 즉 온 우주의 하나님이란 표현에는 당연히 페르시아 관리들과 페르시아 왕 다리오까지도 그분의 통치 대상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 이러한 표현에는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 땅에만 국한된 지역신이 아니라 페르시아를 포함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으로 이 세상의 그 어느 곳도 그분의 통치권 아래 놓이지 않은 곳이 없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곧, 페르시아 관리들의 질문에 대해 : 자신들의 정체성을 밝힌 것.
- ‘자신들은 페르시아 사람들과 달리 온 우주의 창조주인 여호와를 섬긴다’
▶사실 닷드내를 대표로 한 페르시아 관리들이 물은 것은
- 성전 재건을 명령한 자와 이를 앞장서 진행시키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즉 페르시아 관리들은 성전 재건자들의 신분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다에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있던 자들의 답변은
- 자신들의 이름을 말하는 대신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종' 이라는 자신들의 신앙적 신분을 밝혔다.
💡 유다인들의 답변에 함축된 의미
첫째, 이는 이 세상의 참 왕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힌 것.
- 즉 페르시아 관리들은 성전 재건자들의 이름을 물었지만
→ 유다 귀환민들은 종인 자신들이 아닌 자신의 주인이시며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소개했다. - 유다 귀환민들의 이러한 답변은
- 성전 재건의 대리자인 자신들에게 관심을 갖지 말고,
- 성전 재건의 참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
- 이는 더 나아가 참 왕은 지금 당신들이 섬기는 페르시아 왕 다리오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성전을 재건케 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소개하는 것.
둘째, 성전 재건의 원동력을 당당하게 밝힌 것.
→ 인간이나 민족의 의지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명에 따라 시작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 즉 자신들은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명에 순종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페르시아 관리들의 질문에 대한 유다 귀환민들의 지혜로운 답변을 통해 그들이
- 건물로서의 성전만을 재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우리는 이 전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오랜 옛날에 솔로몬이 우리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 건축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색다른 고안물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을 뿐이다" (사 58:12).
💡 11절, ‘…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역사를 밝힘.
- B.C. 966년에 착공되어 약 7년이 지난 B.C. 959년에 솔로몬에 의해 완공되었다(왕상 6:38).
- 그리고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가, B.C. 516년에 성전이 재건되었므로
→ 첫 완공 때로부터 약 450년이 지나서야 재건된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큰 왕'은 누구?
- 부친 다윗 왕의 계획에 따라 성전을 짓기 시작하고 완성한 솔로몬을 의미한다.
솔로몬 왕은
- 고대 근동에서 페르시아와 같은 제국의 왕은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큰 영향력을 미쳤었다.
- 바벨론이나 페르시아가 군사적 무력을 바탕으로 제국을 이루었다면,
↔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명철, 그러고 상업적이고 경제적인 능력으로 당시 근동의 모든 왕들의 존경을 받았다(왕상 10:13-23).
위축되지 않고 하나님을 전하는 기회로 삼음
- 이런 까닭으로 포로 귀환민들은 자신들의 건축 사역에 대해 점검하러 온 제국의 관리들 앞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당당하게 과거 이스라엘의 큰 왕이 이 전을 완공했었음을 밝힌 것이다.
- 즉 그들은 진상 조사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자신들이 재건하고 있는 성전의 역사성과 과거 이스라엘 왕의 위대함을 선파하는 기회로 삼았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역을 바르게 수행하고 있다면
- 설혹 그 일을 방해하거나 질책하는 어떤 세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하나님의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고
- 답변할 모든 지혜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4:26).
(3) "우리가 잠시 이 전을 빼앗겼던 것은, 우리의 죄로 징벌 받은 때문이었다. 그것은 열방의 신들이 우리 하나님을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격노케 했기 때문이다(12절).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 성전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신 것이지, 결코 우리의 믿음을 단절시키기 위해 그렇게 행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잠시 정지당했을 뿐이고 영원히 박탈당한 것은 아니다."
💡 5:12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이 성전을 헐며 이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더니
그들은 남유다의 멸망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았는가?
- 국제 정세와 군사적 측면에서 찾지 않고,
- 당신의 백성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는 신앙적 측면에서 찾은 것.
격노하신 주체 = ‘하늘에 계신 하나님’
→ 이는 페르시아 역시 성전 재건을 막는다든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 노엽게 하였으므로
- 원형 ‘레가즈’의 의미 : ‘진동시키다’
- 과거 우상 숭배와 각종 범죄를 일삼았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사지가 떨릴 정도로 극심하였음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 갈대아 = 종족의 명칭.
-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 사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반유목민으로 살아왔던 족속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명칭.
- 바벨론 = 국가의 명칭.
- 바벨론은 갈대아 족속에 의하여 세워져 한때 근동을 주름잡았던 강력한 국가.
- 느부갓네살과 남유다
- 이름 뜻 : ‘바벨론 신 나부가 왕위 계승권을 수호하신다’
- 바벨론 마지막 왕조를 세운 ‘나보폴라살״ 의 아들.
- 느부갓네살은 아버지가 왕이었을 때 애굽과의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승리는 바벨론이 애굽의 식민 통치 아래 있던 가나안의 여러 나라들을 지배하고 더 나아가 고대 근동의 패자가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느부갓네살 왕은 B.C. 605년에 남유다를 공격하여 유다의 왕족과 귀족들을 잡아갔고(단 1:1-5) 이후에도 군사와 기술자 수천명과(왕하 24:10) 일반 백성들을 잡아갔다(렘 52:30). - 그리고 B.C. 586년 마침내 남유다는 이러한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 갈대아 = 종족의 명칭.
느부갓네살의 이스라엘 정복이 하나님의 허용하심의 결과임을 밝힘.
‘하나님이 저희를 …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시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저희, 즉 이스라엘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임을 밝혔다.
이를 통해 본서 저자의 증거하는 바
- 고대 근동 세계를 재패한 왕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을 절대 멸망시킬 수 없었다고 분명히 증거한다.
- 더 나아가 이는 느부갓네살이 그 수많은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고대 근동의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 이 세상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었기 때문임을 밝히는 것이다. - 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이 세상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4) "우리는 우리를 인정해 주고 일을 지원해 주는 고레스 왕의 조서를 얻었다. 그는 허락을 내려, 우리를 용납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전을 건축하도록(13절), 그리고 과거에 지었던 바로 그곳에 세우도록 명했고, 우리를 지휘했다."
그가 이 명을 내린 것은 유대인을 불쌍히 여길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하나님을 숭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성전의 기명들을 그가 신임하는 자에게 주어 옛부터 두고 사용했던 그 자리에 가져다두도록 했다(14절). 그리고 그들은 그 증거로써 이것들을 보여줄 수 있었다.
💡 5:13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고
성전을 재건할 수 있게 된 계기와 근거(당위성) = 고레스의 조서
여기서 고레스는 ⇒ ‘바벨론 왕'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바벨론의 왕이 아니라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건국된 페르시아의 초대 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레스를 바밸론 왕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첫째, 고레스 스스로 자신을 바벨론 왕으로 표현했다.
- 고레스는 ‘나는 세상의 왕, 위대한 왕, 합법적인 왕, 바벨론의 왕, 쉐르와 아카드의 왕, 네 가장자리의 왕 고레스이다' 란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Pritchard).
- 고레스가 이처럼 자신을 바벨론 왕으로 칭한 것은
⇒ 페르시아 제국이 건국될 당시 모든 세계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바벨론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
-
-
- 고레스는 페르시아라는 제국을 세우면서도 바벨론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점을 강조하여 당시 사람들의 반감을 줄이려 하였을 것.
- 고레스를 뒤이은 왕들인 다러오나 아닥사스다도 바벨론 왕이란 호칭을 좋아했다.
- 이를 통하여 바벨론 왕으로 불려지기를 바란 것이
⇒ 고레스의 개인적인 기호에 의한 것이 아니고 페르시아 왕조의 전략적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
- 둘째, 이러한 표현에는 본서 기자의 신학이 반영되었다.
-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재건이라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하나로 연결하는 데는 고리가 필요하였는데, 본서 저자는 이를 ‘바벨론 왕' 에게서 찾았다.
- 즉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시킨 장본인도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었고, 그 후 50년이지나 에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명한 자도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바벨론 왕 고레스였음을 밝히고자한 것이다(12절; 1:2).
’이스라엘’ 나라를 세속 역사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을 지배하던 바벨론과 그 뒤를 잇는 페르시아 제국이 전개해 가는 역사의 큰 물줄기에 파묻혀 그 존재 자체도 희미한 작은 나라에 불과하다.
그러나 구속사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세상의 역사는 택한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라는 구속사적 관점에 따르면
-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나라이고
-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셨으며
- 고대 근동 세계를 다스리던 강대국들은 오히려 이스라엘 중심으로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잠시 등장하는 조연에 불과하다.
- 그런 의미에서 세상 역사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참된 의미를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느6:16).
💡 5:14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금, 은 그릇을 옮겨다가 바벨론 신당에 두었던 것을 고레스 왕이 그 신당에서 꺼내어 그가 세운 총독 세스바살이라고 부르는 자에게 내주고
성전 재건의 당위성을 한 번 더 강조함.
한글 성경에 생략된 부분이 있음 ⇒ ‘하나님의 전’
- 원문으로 보면 성전 기명이 원래 있었던 장소와 탈취되어 가서 있었던 장소, 탈취되어 보관된 장소와 반환되어 보관된 장소가 상술되어 있음.
올바로 정리해 번역하면,
- ‘하나님의 전으로부터 바벨론 신당으로 가져간 하나님의 금은 기명들을 바벨론 신당으로부터 다시 가져오다’
💡 5:15 일러 말하되 너는 이 그릇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라 하매
- 과거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약탈하여 갔던 성전의 기명들을 돌려주면서 이것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본처에 성전을 재건하라고 한 고레스의 칙령을 직접 인용한 부분.
‘제자리에’ 건축하라 하매.
이곳은
-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인구 조사를 하여 받은 온역 재앙이 그친 뒤에 제사를 드린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이기도 하다(삼하 24:16-18).
-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이 있던 모리아산은 → 아브라함이 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곳이다(히 11:17-19).
앞으로 성전이 재건되어야 할 예루살렘 성전터는
- 과거의 성전터라는 사실 이외에도 이처럼 역사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성전 재건의 당위성을 밝히는 맥락에서 특별히 성전이 재건될 장소까지 지정되었음을 밝히는 이유는?
- 파괴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는 그 사실 자체도 의미 있는 것이지만 재건되는 장소가 갖는 신학적 의미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전이 재건되어야 할 본처로서의 그 장소는
-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이 죄악을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던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장소였으며,
-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 바탕하여 자신의 소중한 독자까지도 아낌없이 바쳤던 믿음의 유적지였다.
그러므로 유다로 돌아가 하나님의 전을 본처에 건축하라는 고레스의 명령이 상기시키는 바,
- 유다 귀환민들에게 있어 건물로서의 성전을 짓는 것에 그치지 말고
- 과거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잘못을 뉘우쳤던 아라우나 타작 마당의 회개의 마음과
- 과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견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겼던 신뢰의 마음을
— 다시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와 닿았을 것이다
(5) "우리는 돌아오자마자 이 명령대로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건축을 수행하지 않아서, 그 명령이 특혜를 박탈당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러나 우리는 방해를 받아 왔기 때문에, 그 일을 필역하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건축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시하라. 즉 그들은 이전 총독들의 악의와 거짓됨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불평하지 않았다(16절).
💡 5:16 이에 이 세스바살이 이르러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지대를 놓았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오나 아직도 마치지 못하였다 하였사오니
이것은 우리에게 쓰라림을 쓰라림으로 갚지 말며, 매우 부당한 것을 지당한 비난으로 갚지 말며, 만일 우리가 앞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게 여기어 이 전에 입은 손해에 대해 불쾌한 언급은 피하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변론하게 된 내용이었다. 그들은 무슨 권한으로 그들을 심문하는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저들의 우상 숭배나 미신이요 잡동사니의 종교라고 비방하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말하며" (벧전 3:15), 어떻게, 왜 하나님을 예배를 드리는지 그 이유를 배우도록 하자.
2. 사마리아 사람들은 왕에게 이것을 매우 공정하게 진술했다.
(1)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전" 이라고 불렀다(8절).
비록 사마리아 사람들이 많은 신들과 주(主)들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지극히 크신 하나님" 으로서 모든 신들 위에 계심을 인정한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전이므로, 우리는 당신의 명을 받지 않고는 감히 그것을 건축하는 일을 막을 수 없었나이다." 는 것이다.
💡 5:8 왕께 아뢰옵나이다 우리가 유다 도에 가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본즉 성전을 큰 돌로 세우며 벽에 나무를 얹고 부지런히 일하므로 공사가 그 손에서 형통하옵기에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
→ 이 표현에 담긴 의도는?
- 고대 중근동 당시 페르시아의 정책
: 그들이 지배하는 각 나라의 종교나 문화 등에 대해 무시하지 않고 인정하고 포용하는 정책을 폈다.
— 이런 역사적인 정황에서 페르시아 관리인 닷드내도 국가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 신에 대헤 존경심을 나타내는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 -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을 수식하는 표현일 가능성을 완전허 배제하기는 어렵다.
— 왜냐하면 재건되는 성전이 고대 근동의 여러 작은 신전들보다는 더 컸을 뿐 아니라 닷드내가 과장하여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유대인들이 행한 것을 사실대로 그에게 말했다. 그들은 유대인이 마치 싸움을 하기 위해 성읍을 요새화하고 있다고 말한 조상들과는 달리 거짓된 보고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단지 유대인이 하나님을 숭배할 목적으로 성전을 세우고 있다고 보고했을 뿐이다(8절).
(3) 그들은 유대인들의 해명을 상세히 왕에게 전하여 그들 스스로 해야할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소송이 올바로 판단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4) 그들은 고레스왕이 정말 그러한 조서를 선포했는가에 대해 왕이 서적을 찾아본 후, 왕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명을 내려주기를 원했다(17절).
만일 지금 다리오왕에게 진술된 것과 같이 공평한 보고서가 앞 장에서 아닥사스다에게 올려졌다면, 그가 그 공사를 중지시키는 명은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명을 얻지 않는 한 박해받을 수 없으며, 곰의 가죽을 뒤집어 쓰이지 않는 한, 덫에 걸릴 수가 없다. 하나님과 진리의 주장을 공평하게 전하고 듣기만 한다면 그것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 5:17 이제 왕께서 좋게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보물전각에서 조사하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
- 본절은 7절에서 시작된 닷드내 일행의 보고서 내용이 최종 마감되는 부분. 지금까지 보고한 것에 대한 왕의 조치를 구하는 내용.
‘왕께서 좋게 여기시거든’ = ‘왕이 판단하기에 옳다고 생각된다면’
‘…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결정하시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닷드내는 이처럼 피조사자들에 대하여 강압적으로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조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 자기 임의대로 조치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왕에게 알리고 결과가 오기를 기다린 매우 성실한 관리였다.
결론
💡앞선 제4장에서는 지극히 암울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 즉 어렵게 시작된 성전 재건 공사의 순수성을 훼손하기 위한 사마리아인의 간계와 성전 재건 방해, 그리고 훗날의 예루살렘 성벽 공사 중단에 대한 삽입 기사와 예루살렘 성전 공사 중단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본장에 이르러서 이러한 암울한 상황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본장을 통해 일종의 국면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로 중단된 성전 재건 공사가 재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총독 닷드내 일행의 진상 조사가 있었으나
→ 그가 취한 조치는 오히려 성전 재건을 앞당기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본서 저자가 본장에서 이러한 사실을 길게 기술하는 이유
- 닷드내의 보고문으로 인한 다리오 왕의 성전 재건 비준으로 → 제6장에서 성전 재건 공사가 완료되기 때문이다.
- 본서 저자는 이러한 당시 상황을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상술함으로써
—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결코 중단시킬 수 없음을 명백히 전달하려 하였다.
일차 독자들에게 주고자 한 교훈,
-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로 재건된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온전한 신앙 생활을 할 것과,
-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때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 결코 좌절하지 말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만을 굳게 신뢰하므로 난관을 극복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