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7:73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
8: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8: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8: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8: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8: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8: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8: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8: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8: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8:13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8:14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8:15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
8:16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8:17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8:18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본문의 배경
제3 차 포로 귀환으로부터 B.C. 400년경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 곧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과 개혁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재건 과정을 다루는 느헤미야서는 크게 제1-7장과 제8-13장의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 제1부 1-7장은 : 느헤미야의 귀환과 에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하여 다룬다.
- 제2부 8-13장은 : 이스라엘의 언약 갱신과 개혁에 대하여 다룬다.
[제2부 8-13장은 다시 세 부분으로 세분]
- 전반부 제8-10장 : 철월 절기 준수 및 에스라와 느헤머야 주도의 언약 갱신에 대하여,
- 중반부 제11,12장 : 백성들의 예루살렘 이주 정책 시행과 인구 분산 및 성벽 낙성식과 성전 제사 제도의 확립에 대하여,
- 후반부제 13장 : 느헤미야의 일련의 개혁 조치에 대하여 다룸.
[이 가운데 전반부 제8-10장 개관]
먼저 8:1-18의 두 문단 : 이스라엘의 철월 절기 준수에 대하여 다룸.
이스라엘 자손들은 7월이 되자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이는 7월 절기를 준수하기 위함이었다.
- 유대 종교력으로 7 월 1일은 민간력으로는 1월 1일로서 나팔절로 불리는 신년절이다. 그리고 7월 15일부터 22일은 초막절이다.
- 7월 1일이 되자 백성들은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를 청하여 아침부터 정오까지 율법 을 듣고 회개하였다(1-12절).
-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백성의 지도자들은 초막절을 규례대로 준수하기 위하여 에스라에게로 가서 율법을 연구하였고, 그 결과 율법의 규례대로 초막절을 준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상의 본문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철월 절기 준수가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열심으로 이루어졌음이 매우 강조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이는 철월 절기 준수에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언약 갱신이 백성들이 내적으로 충분히 준비된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또 칠월 절기가 외형적 측면에서의 이스라엘의 온전한 재건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을 나타내는 언약 갱신이 이뤄진 사이에 준수된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주지하다시피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된 것은 B.C. 444년 종교력으로 6월 25일이다. 이로 보건대 이스라엘 자손들은 성벽 재건을 완공하고 불과 5일 후에 나팔절을 준수한 것이 된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이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것을 알리는 나팔절 직전에 완료되고, 이후 백성들이 나팔절을 준수하게 된 것은
→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되어 감으로 써 마처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이스라엘이 백성들의 전3차에 걸친 포로 귀환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계기로 외형적 측면에서 온전히 재건되고 회복되어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특히 그러한 새로운 시작이 - 율법의 낭독과 백성들의 통곡과 회개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 선민 공동체가 내적으로도 온전한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한 초막절의 의미는,
-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40년 간 광야에서 장막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
이제 포로 귀환 시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루 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이 초막절을 준수함으로써
- — 70여년의 포로 생활과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이 이루어지기까지의 불안정한 생활 가운데서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다시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기로 다짐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자손이 7월 절기를 준수하고 7월 24일에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서론
💡 B.C. 537년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제1차 포로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 그리고 B.C. 458 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제2차 포로 귀환과 신앙 개혁 운동을 기록한 에스라서에 이어지는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을 중심으로 한 선민 이스라엘 공동 체의 회복 과정을 보도한다.
본서 저자 느헤미야는 앞선 에스라서의 내용에 어어지는 포로 귀환 시대에 일어난 일련의 역사를 기술함으로써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과 선민 역사의 영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본서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전다.
- 전반부 제1-7장
- B.C. 444년 이루어진 느헤미야의 귀환과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벅을 재건하는 과정을 기록함으로써 이제 포로 귀환 공동체가 대적들의 침략으로부터 선민 공동체를 보호하 수 있는 방어막을 가지게 되었음을 보도한다.
- 그러나 이러한 가시적 증거만으로 이스라엘 선민 공동체의 회복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었다.
→ 왜냐하면 보다 중요한 것은 외면적 회복이 아니라 내면적 회복이었기 때문이다.
- 후반부 제8-13장은
- 에스라와 느헤미야 주도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언약 갱신과 개혁을 다룸으로써 → 바로 이러한 본질적 회복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 이러한 내면적 회복의 과정을 거쳐 포로 귀환 공동체는 선민 신앙 공동체로서의 정체성과 구속사의 주역의 위치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율법의 해설(느헤미야 8:1-8)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고 교회를 교화시키기 위해, 거룩한 종교적 모임을 열어 선한 일을 행한 사건에 대해 읽을 수 있다.
💡 본장의 내용과 앞장의 내용의 밀접한 연관성
- 1-7장 : 선민 공동체의 기틀을 마련한 외형적 사건
-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사건(3-7장), 느헤미야의 귀환(1-2장)
- 8-13장 : 언약 갱신과 신앙 개혁은 선민 공동체의 내면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사건
- 본절 이후에 나오는 칠월 절기 준수 및 에스라와 느헤미야 주도의 언약 갱신 사건과 별개의 사건이 아니며 밀접한 연관을 지님.
- 성벽을 재건하지 못했다면
— 대적들의 방해로 이러한 언약 갱신과 신앙 개혁이 이루어지기 어려웠고, - 반대로 언약 갱신과 신앙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 성벽 재건과 같은 대역사가 서민 공동체의 회복에 있어서 본질을 상실한 외형적 상징물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있어서 ‘칠월’의 중요성
- 민족적, 종교적 절기인 나팔절과 초막절, 그리고 대속죄일이 있는 매우 중요한 달이었다.
- 본서 저자는 이 중요한 시기에 매우 특별한 일이 발생하였음을 강조한다.
- 본문의 ‘칠월'은 종교력으로 표기한 것.
(종교력 7월은 민간력 1월이며 태양력으로는 9,10월에 해당한다.)
성벽 재건 공사는 착수한 지 53일 만인 엘룰월, 즉 종교력 6월 25일에 완공되었다(6:15).
그렇다면 본장에 나오는 칠월 절기 준수를 위하여 에루살렘성의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시점은 성벅 재건 공사 완료일로부터 5일이 지난 B.C. 444년 7월 1일이 된다.
Ⅰ. 이것을 행한 때는 "제7월 1일" 이었다(2절).
그 날은 "안식일" 이라고 불리우는 "나팔절" 이었으며, "성회" 가 열리는 날이었다(레 23:24; 민 24:1).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것은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후에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리기 시작한 날로서, 그 당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감사히 기억하는 뜻에서 다른 절기보다도 더욱 성대하게 이 날을 지켰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새로이 하나님의 은총이 기억나면-우리는 직접 그러한 은총의 증인들이다-우리는 새삼스레 큰 감동을 받게 된다.
💡 나팔절
- 유대 종교력으로 칠월 초하루는 — 나팔을 불어 특별한 성회로 모이는 나팔절.
- 이 날은 수송아지 하나와 숫양 하나와 일년되고 흠없는 숫양 일곱으로 번제를 드리고 이에 대응되는 소제를 드릴 뿐 아니라, 숫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ㅣ는 매우 특별한 날(레 23:24.25 ;민 29:1-6).
- 모든 노동을 금하였을 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하는 거국적인 절기(수 6:21 ;삼상22:19 ;대상 16:3).
- 유대 종교력으로 7월은 유대 민간력으로 1월이다. 따라서 7월1일은 새해가 시작하는 첫날.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한해 전체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기를 다짐하였던 것이다.
1절에 이어 2절에서 다시 시기를 언급하는 이유
- 1절에서 이미 ‘칠월에 이르러는’ 이란 시점을 나타내는 표현을 한 데 이어, 본절에서 ‘칠월 일일에’ 란 명시적 표현을 함.
⇒ 이 해 7월1일에 다른 해의 나팔절과는 다른 획기적인 일이 일어났음을 암시하기 위해서.
이 해 7월 1일, 즉 성벽 재건이 완료된 B.C. 444년의 나팔절의 특별함
1.외형적으로 보자면
포로 귀환 공동체가 이제 대적의 군사적 침략에서 벗어나 선민 공동 체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옴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
- 따라서 본성에 거하였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날을 기하여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대대적인 나팔절 행사를 거행하였던것.
2.그 해 7월 1일은 율법을 낭독하는 행사를 가졌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
이 행사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삶을 살고자 하는 내적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실로 B.C. 444년의 나팔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대적들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는 성벽을 재건한 후 처음으로 맞는 신년절로서,
이제
- 외형적으로는
- 선민 공동체가 외형적 재건을 통 해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음을 나타냄
- 내면적으로는,
- 율법 낭독을 통하여 선민 공동체로서 내면적 자질을 다시 회복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Ⅱ. 그것은 "수문 앞 광장에서" 행해졌다.
그곳은 넓은 공터로서, 성전 뜰에서는 모일 수 없을 만한 많은 무리들을 유치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 지은 성전은 솔로몬 시대의 성전과 같이 그렇게 대규모의 성전이 아니었던 것같기 때문이다. 제물은 성전 문에서만 드리도록 되어 있었지만 기도와 찬미와 말씀 선포 등의 종교적 행사는 다른 곳에서도 행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 절기 행사나 종교 집회는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집회를 수문 앞 광장에서 거행한 것은
→ 참석자들이 너무나 많아 성전 뜰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문
- 3:26의 강해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루살렘 동쪽 성벽에 있던 성문.
-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장소가 있었다.
Ⅲ. 그곳에 모인 자들은 백성 전체였다.
그들은 그곳에 오도록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일제히 동의하여 자발적으로 그곳에 모인 것이다. 그리하여 남자들 뿐만 아니라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자들이면 여자고 어린아이고 모두 모인 것이다.
집안의 가장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에 가족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 여자와 아이들도 구원받아야 할 자들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친숙해지고 하나님의 지식과 은혜를 받는 방편이 되는 일에 참예하도록 하는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지적인 훈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훈련도 받아야 한다.
💡 1절, ‘모든 백성이 일제히’
-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던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유다 땅 전역에 흩어져 거하던 백성들이 너나할것없이 한 마음으로 모여들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어떻게 이와 같이 모일 수 있었을까?
- 이러한 일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고양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적 연대 의식이 더욱 커겼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 이제 내면적 신앙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것이다.
💡 2절, ‘남자 여자 .. 알아들을 만한 회중’
본문의 ‘알아들 만한'이란 말은
= ‘들어서 이해할 만한’ 이란 뜻.
- 듣다
- ‘이해’, ‘통찰력’ 을 표현하는 단어.
- 단순한 지식적 앎이 아니라 분별력과 판단력을 지닌 통찰의 능력
- 단순히 하나님의 율법을 듣고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만한 능력을 지닌 대상을 가리키기보다는 율법의 의미를 분별하여 깨달을 수 있을 만한 능력을 지닌 대상
‘듣다’는 단어는 본장에서 중요한 단어.(8,9절)
그것은 이 단어가 율법을 백성들에게 낭독하는 궁극적 목적을 잘 보여주기 때문.
즉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득하는 궁극적 목적은?
- 그들로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게 하고,
- 그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 자신의 실상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Ⅳ. 이 모임의 우두머리는 제사장 에스라였다.
즉 그가 이 의식을 주관했다. 하나님의 율법에 박식한 자보다도 더 설교하여 해설하는 데에 적합한 자는 없다.
💡 ‘학사 에스라’
고대 근동 각국에는 서기관 제도가 있었는데 특허 바벨론은 기록술이 매우 일찍 부터 발달하여 서기관 학교까지 설립될 정도였다.
이 서기관 학교에서는 문필 작업과 관련한 엄격한 교육을 행하였으며 그곳에서 배출된 자들을 중용하여 주요 기록물을 작성하고 보관하는 일은 물론 정치와 행정 일선에까지 일하게 하였다.
이스라엘에서도 오래 전부터 서기관이 활동하였다.
- 그들은 주로 율법을 필사하고 해석하는 일을 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정사까지 돌보았다.
- 그리하여 서기관 가운데는 정부 고위 관료로서 왕의 총애를 받는 자들도 있었다(삼하 8:17 ;20:25 ; 왕상 4:3 ;왕하 12:10, 11 ;22:3-7 ;사 36:3 ;렘 32:12-15). 심지어 궁정의 특별한 방에 배치 되기도 하였다(왕하 18:18 ;렘 36:12).
그러므로 많은 서기관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서기관은 ‘바룩(예레미야의 서기관)’, ‘셉나(히스기야의 서기관)’, ’사반(요시야 왕의 서기관들의 수석)'과 본문의 에스라. - 에스라는 특히 종교적 업무와 관계된 서기관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한글 개역 성경은 에스라를 다른 서기관과 구별되게 ‘학사’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벽을 재건하였던 느헤미야 귀환 초기에는 에스라가 에루살렘에 없었다.
아마 에스라는 에스라 제9.10장에 나오는 개혁 운동을 마무리한 후 B.C. 458년경부터 B.C. 444년경까지는 그 어떤 이유로 바벨론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성벽이 완공된 시기에 포로 귀환 공동체에 합류하여 느헤미야와 함께 이스라엘의 언약 갱신과 개혁을 이끌었던 것으로 볼 수 었다
1. 그 의식에 대한 그의 소명은 매우 확실했다. 왜냐하면 그가 제사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고 율법학자의 자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백성이 그에게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였고", 그것을 그들에 읽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1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셨고, 백성들은 그에게 기회를 주어 청탁을 했다. 지식은 그것을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요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영적인 자선금이다.
💡 1절,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본절에서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였다.
→ 이로 보아 에스라는 당시 그 누구보다 율법의 전문가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스 7:6)였을 뿐 아니라 율법을 준행하는 자였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던 자였다(스 7:10).
에스라를 찾은 이유는?
- 백성들은 이러한 에스라의 열심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 에스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 이제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 신정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 무엇보다 앞서 신정 국가의 통치자되시는 여호와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기에 백성들은 율법에 능통한 학사 에스라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와 이를 낭독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던 것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
- 이것이 인간 모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적 기원을 갖는다는 점을 보다 분명히 한다.
에스라를 찾은 이들의 영적 상태
-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발적으로 모였을 뿐 아니 라 신앙 지도자 에스라에게 율법 낭득을 요청한 것은
- → 당시 이들이 예루살렘 성벽 중건 과정을 통하여 신앙적으로 매우 고양되어 있었옴을 잘 보여준다.
- → 그리고 이러한 신앙적 열정은 — 곧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옴과 감격, 그리고 통희의 결과를 가져온다.
2. 그의 자리는 매우 편했다. 그는 "말씀을 위해 만들어 놓은" (원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무강단 또는 대에 서서 "말씀을 가르쳤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높은 자리에 선 것은 그가 말한 것이 좀더 잘 들려 은혜롭게 전달되도록 하고, 듣는 자들이 모두 그를 주목하여 누가복음 4장 20절에서와 같이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4절,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여기서 말하는 ‘나무 강단’
- 평범한 일반 강단이 아니라 마치 ‘망대'처럼 매우 크고 높게 만들어진 강단.
- 그들은 많은 백성들이 모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높은 단을 준비했던 것이다.
- ⇒ 이 역시 당시 백성의 지도자들이 성희를 위하여 철저하게 준비하였음을 보여준다.
3. 그에게는 여러 명의 보조자가 있었다. 이들 중에 6명은 그의 오른편에, 그리고 7명은 그의 왼편에 서 있었다(4절).
이 강단은 특별석처럼 한 줄에 모두 그들이 자리잡도록 만들어졌거나[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거의 대(탑)라고는 부르기가 힘들다] 또는 한 단계 낮은 곳에 그들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놓았을 것이다. 그가 지쳤을 때는 이들에게 읽도록 명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이들을 보조자로 택하여 백성들 앞에 영예롭게 한 것은 적어도 다른 때 그들도 이와 똑같은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또 7절에 언급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은, 에스라의 가르침을 들으러 올 수 없었던 자들을 위해 그 근처에 있는 처소에 가서 율법을 읽어주고 해설해 주는 일을 동시에 맡았다.
이들 중에는 또한 입술에 지식을 지켜야 할(말 2:7) 제사장이 13명이 있었다. 이처럼 가르치기에 적합한 사역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보조자들을 지닌 에스라는 행복했고, 또 에스라와 같은 인도자를 지닌 그 백성도 행복했다.
💡 에스라의 좌우편에 섰던 13인
- 이들에 대해서는 본문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이들이 백성들의 지도자적 위치의 사람들이었음은 분명할 것.
중요한 것은
- 이들이 그 나팔절 성회를 준비한 사람들 중의 일원이었을 것이라는 사실,
-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구하기 위한 시간들을 준비하는 일에 특별히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하나님의 사람들’ 이었다는 사실.
본서 저자가 여기에 그 이름을 일일이 소개한 이유
- 그들의 헌신을 높이 삼으며,
-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열정과 헌신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이들의 이름
- 맛디댜 = ‘여호와의 선물’
- 스마 = ‘들음, 순종’
- 아나야 = ‘여호와가 응답한 자’’
- 우리야 = 여호와의 불꽃
- 힐기야 = 여호와의 분깃
- 마아세야 = 여호와의 사역
- 브다야 = 여호와께서 구속하셨다
- 미사엘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 말기야 = 여호와의 왕
- 하숨 = 부유한
- 하스밧다나 = 사려 깊은 판단.
- 스가랴 =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
- 므술람 = 보상된.
Ⅴ. 이 집회에서 행해진 종교 행사는 의식상의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요, 기도와 설교였다.
이 집회의 사회자인 에스라는
1. 하나님께 대해서는 백성들의 입이었고,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그에게 협력했다(6절).
- 그는 여호와를 광대하신 하나님이라고 송축했으며, 그의 완전하심을 찬미하고 그의 은총을 간구함으로써 그를 영예롭게 했다.
💡 에스라는 그 무엇도다도 먼저 하나님을 송축했다.
- 백성들 앞에선 에스라는 백성들을 향하여 그 무슨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이다.
- 여기서도 우리는 에스라의 하나님 중심적인 생활상을 볼 수 있다.
에스라가 찬양한 광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 ‘광대하다’ = 위대하다, 존귀하다
- 에스라는 당신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또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케 하시며,
이제 드디어 거룩한 성회로 모이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선민 공동체를 회복시키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찬양하였을 것.
- 백성들은 그 간구와 찬미에 그와 한 마음이라는 것을 표하기 위해, "아멘, 아멘" 하고 말했으며, "손을 들어"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소망과 모든 기대를 표했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댐" 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경의와 복종심을 나타냈다.
💡 본절에서 하나님을 향한 에스라의 송축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3단계로 나타나고 있다.
⇒ 하나님에 대한 에스라의 송축을 들은 모든 백성들이 마음이 뜨거워져 자연스럽게 이에 동참하는 행동을 취한 것.
첫째 반응 : ‘손을 드는’ 행위, ‘참으로 그렇습니다’ 란 뜻의 ‘아멘 아멘' 이란 말
- ‘광대하신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의지를 나타 낸다.
특히 본절에서는 ‘아멘’ 을 반복 사용
- 하나님에 대한 모든 백성들의 신뢰와 충성심이 한껏 고조되었음을 잘 드러낸다.
- (‘아멘’이란 표현이 접회 시 회중들의 응답으로 사용된 예)
- 다윗의 시대에서부터 발견되며(대상 16:36),
- 이러한 응답의 표현은 후에 회당 에서도 사용되었고
- 신약 시대의 교회에까지 전승되었다(고전 14:16).
둘째 반응 : 몸을 굽힘
- 복종의 표시로 머리를 숙이는 행동을 묘사할 때에만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어근.
- 용례
- 요셉의 형들이 베냐민과 함께 애굽에 다시 가서 자신들의 동생이자 애굽의 국무 총리인 요셉에게 절할 때.
→ 여기서도 ‘전적인 복종의 의미’로 사용(창 43:28). - 사울이 사무엘의 환상을 보았을 때도 이 단어를 사용.
→ 사울이 그에 대해 전적인 복중과 경의를 표하였음(삼상28:14)
- 요셉의 형들이 베냐민과 함께 애굽에 다시 가서 자신들의 동생이자 애굽의 국무 총리인 요셉에게 절할 때.
- 따라서 본문에서도 단순히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하기 위한 예비 동작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 즉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함으로 광대하신 여호와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한 이후 → 이제 그 여호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는 표현으로 몸을 굽히고 있는 것.
- 그리고 이제 그들은 절대적 신뢰와 절대적 복종을 다짐한 이후 세번째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경배의 예를 갖춘다
셋째 반응 :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함
- ‘얼굴을 땅에 대는’ 것
- 자신을 극도로 낮추는 행위인 동시에,
- 상대를 또한 극도로 높이는 행위.
- 이러한 행위는 특히 본문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배할 때 취하는 행위이다(창 24:52 ;출 4:31 ;12:27 ;34:8 ;수 5:14).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자
→ 모든 백성은
- 그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 복종과
- 경배의 행위로서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제 선포될 하나님의 말씀에 대 한 온전한 청종의 자세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뜨거운 열정과 자세는 — 놀라운 영적 회복의 물결로 이어진다(8-12절).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선하심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으려 할 때는 — 우리도 이들처럼 하나님을 사모하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 말씀드려야 한다.
2.에스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었으며, 그들은 열심히 에스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이야 말로 그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 "에스라는 율법 책을 가지고 회중 앞에 이르렀다" (2절).
그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정확한 율법 사본을 가지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관리인처럼, 그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것을 이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놓았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율법 책은 율법 학자들의 연구를 위해서만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회중 앞에 들고 나와서 그들의 말로 읽어 주도록 되어 있는 책이다.
[2] 목회자들은 강단에 올라갈 때 성경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에스라가 바로 그러했다. 그리고 그 성경책으로부터 그들의 지식을 찾아내고 그 규례대로 말하며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역대하 17장 9절을 보라.
(2) 그는 "모든 백성의 목전에서" 매우 경건하고 엄숙하게 그 책을 폈다(5절).
그는 그 책을 그들에게 알릴 때 그는 그 책을 자기들에게 준 하나님의 위대한 자비를 생각하면서 읽었다. 그는 그 책을 읽도록 허락해 준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그 책을 폈다. 그 책은 막힌 샘물이나 밀폐된 분수대가 아니었다. 우리는 "책을 가지고 그 인봉을 뗄 때" 기쁨과 찬미로 가득 찬 축복을 발견한다(계 5:9). 우리는 엄숙한 휴식기간을 가진 후에 믿음의 일을 시작하기를 배워 성급히 행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책을 손에 들고 그것을 펼칠 때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고 또 우리의 무릎을 꿇어 기도할 때에도 그렇게 하도록 하자. 즉,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을 신중히 행하도록 하자(전 5:1).
(3) 그와 다른 사람들은 율법 책을 "새벽부터 오정까지" 읽어 주었고(3절) 또 그것을 "똑똑히" (한글 개혁에는 없음) 낭독했다(8절).
종교적 집회에서 성서를 읽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요, 그것으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며 그의 교회는 교화된다. 그리고 특별한 때를 맞이하여 우리는 기꺼이 많은 시간동안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에 거의 참여해야 한다. 여기에서 이들은 이처럼 여섯 시간 동안 이 집회에 참여했다. 말씀을 읽고 설교하는 자들은 그들이 말한 것을 깨닫고 그것으로 감동을 얻은 자들로써 그 말씀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을 배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 말씀을 깨닫고 기억하게 하며 또한 감동을 얻게 하도록 하자. "거룩한 것을 삼키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의 덫이 된다."
💡 3절, 새벽부터 오정까지
- 율법책을 낭독하는 에스라의 열정과,
- 그 말씀을 경청하는 백성들의 열심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을 사모하는 열심
새벽 = ‘그 빛으로부터’ 란 뜻.
- 이는 태양이 떠오르면서 ‘빛’ 이 비추어 에스라가 율법책에 써 있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시점을 표현하는 말.
- 이는 한편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율법에 얼마나 열심이었고 또 그것을 사모했는지 표현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새벽이 되기 전부터 올라와 어둠이 사라지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을 것.
그리고 새벽 미명과 함께 한 줄기 햇빛이 비치며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율법은 그들 가운데 울려퍼졌고,
그와 함께 그들 마음 속의 영적 어두움도 사라졌을 것.
이러한 감동과 열정은
- 그들을 그 자리에서 떠날 수 없게 만들었고,
- 그들로 ‘새벽부터 오정까지' 무려 여섯시간 정도의 긴 시간 동안 여호와의 율법의 말씀을 경청케 하였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 문자적으로는 — ‘그리고 그 모든 백성의 귀가 그 율법책 위에’ 란 뜻.
⇒ 율법에 몰입하는 백성들의 진지함을 어느 동사보다 휠씬 더 잘 드러내고 있다. - 원문에는 본문의 주어가 ‘뭇백성’이 아니라 그들의 ‘귀’로 되어 있다.
- 즉 본서 저자는 문장의 동사를 생략함과 동시에 듣는 것을 담당하는 신체 기관인 ־귀־를 부각시켜 마치 ‘모든 백성의 귀가 그 율법책에 달라붙어' 있었던 것처럼 당시 모든 백성이 얼마나 말씀을 경청했는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
- 다시 말해 말씀에 대한 백성들의 사랑과 열심이 얼마나 대단하였던지 그들의 신경은 온통 그 말씀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다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거나 흐트러짐 없이 6시간 이상을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4) 그들은 읽은 것을 해석해 주었으며 그 뜻과 의미를 알려 주었고 그것이 어떤 유익함이 있는지를 알려 주었다.
즉 그들은 다른 말로 그 의미를 알려 주어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했다" (7, 8절).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말씀을 읽는 자들이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공허한 말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마 24:15).
[2] 그러므로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은 — 말씀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여야 한다.
"너희는 읽는 것을 알겠는가?" 그리고 "너희는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는가?" 하는 질문은 듣는 자들에게 해야 할 좋은 말이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가르치는 자들에게 적합한 질문이다(행 8:30, 31). 읽는 것은 좋은 것이며, 가르치는 것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해석하는 것은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병합하며, 이것은 읽는 것을 더욱 이해하기 쉽게 하고 가르치는 것은 더욱 확신을 얻게 한다.
💡 7절, 레위인들이
—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깨닫게 하려고 지속적으로 동분서주하며 가르쳤음. 아마 모든 레위인들이 이번 성회에 참여하여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열심으로 도왔을 것이다.
💡 8절,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에스라가 이미 낭독한 율법 책을 레위인들이 다시 한번 반복하여 낭독한 것처럼 오해할 소지를 주고 있다.
⇒ 이는 ‘메포라쉬’ 에 대한 번역을 생략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 - 본문의 ‘메포라쉬’는
- 에스라에 의해 낭독된 율법책의 말씀을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레위인들이 통역하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설명하고 해석하였음을 묘사하는 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 에스라에 의해 낭독된 율법책의 말씀을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레위인들이 통역하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설명하고 해석하였음을 묘사하는 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뜻을 해석함’
- 본문의 표현은 오늘날의 상황으로 보면 ‘성경 공부’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성경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지식적인 앓을 통해 — 하나님 자체와 그분의 말씀, 계획, 섭리, 사랑 등을 진정으로 깨달아 가는 것처럼,
— 레위인들은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식적 이해를 돕고 있는 것(13절 참조). - 따라서 이는 ‘분별력을 지닌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5) 책을 펴고 말씀이 읽혀질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훌륭한 태도를 취했다.
[1] 매우 정중했다.
에스라가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고" (5절)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에스라와 그가 읽으려는 말씀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주인이 말할 때 종들은 일어서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주인에 대한 존경을 나타낼 수 있고 또 그들이 명령받는 것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 5절, ‘모든 백성이 일어나서’
‘모든 백성’
- 한글개역성경은 각각 ***‘모든백성׳, ‘저희׳, ‘모든백성׳***으로 번역하였으나,
- 원문상 이는 모두 ‘그 모든 (all the people)' 으로 번역될 수 있는 ‘콜 하암’.
본서 저자는 짧은 본문에 동일한 표현(’콜 하암’)을 3회나 사용하여
⇒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백성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말 씀을 사모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저자가 이러한 강조적 표현을 사용한 까닭은 →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본문의 이들을 눈여겨보고 본받을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이다.
‘일어서니라’ (기본형 ‘아마드’)
- 구약성경에서 ‘아마드’ 는 ‘일어서는 육체적 행위' 를 나타낼 때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동사.
- 하지만 이 동사가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 단순한 육체적 행위의 의미를 넘어서,
- 복종과 경외, 섬김의 자세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책이 펼쳐지는 순간 그 앞에서 일어섰다 고 하는 것
= 그들이 선포되는 율법의 말씀에 복종하고 또한 말씀에 따라 행할 것을 다짐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2] 그들은 매우 침착하고 확고한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다 그 처소에 섰다" (7절).
즉 여러 명의 사역자들이 서로 어느 정도 떨어져 읽고 해석했으며, 백성들은 각자 자기 위치를 지켜 이리 저리로 들으러 다니면서 그들의 말을 논평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각자의 처소에 서서 남에게 방해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방해를 받지 않도록 했다.
[3] 그들은 큰 관심을 가지고 전념했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으며" (3절) 거기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들은 쾌히 듣고 모든 말씀을 염두에 두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집중을 명하며 또 그렇게 할 만하다. 만일 부주의로 해서 우리가 듣는 것을 많이 놓쳐버리게 되면 듣고 난 후에 그것을 모두 잊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기쁨(1)(느헤미야 8:9-12)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백성들은 그들에게 읽혀진 율법의 말씀으로 어떻게 충격을 받았는가?
율법은 죽음을 초래하며 무서운 말을 하고 그들의 죄를 보여준다. 또한 죄로 인한 그들의 비참함과 위험을 알려주고 각자의 의무를 계속 행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을 들었을 때 그들은 다 울었다(9절).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율법의 말씀을 들었을 때의 요시야처럼 온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좋은 표준이었다.
그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율법을 범하면서 스스로 반항하였는가를 생각하고는 울었다. 즉 몇 사람이 울기 시작하자 모두 울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 “백성이 다 우는지라”
본문에서 분사형이 사용됨
- 백성들이 잠시 잠깐 운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느껴 울었음을 보여준다.
- 유다 귀환민들은 율범책에 기록된 말씀을 듣고 울지 않을 수 없었다.
- — 즉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하여 ⇒ 진정한 회개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Ⅱ. 그들은 그들에게 전해진 화평의 말씀으로 어떻게 고침을 받고 위로받았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매우 영향을 받고 감동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특히 이러한 때에 부당하게 슬픔에 빠져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날은 하나님의 성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엄숙한 잔치날이었으므로 그들의 의무는 기뻐하는 것이었다. 죄에 대한 슬픔까지도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기쁨을 방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하도록 해야 한다.
1. 이 집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평정시키고 격려해 주려고 애썼다.
이제 느헤미야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본 장에서는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는 백성들이 우는 것을 목격했다. 에스라는 백성들이 그 말씀에 깊이 감동된 것을 보고 좋아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날에는 그렇게 슬퍼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자기의 뜻을 에스라에게 전했으며, 에스라도 느헤미야의 생각에 수긍했다. 이 날은 성일이었으므로(그것을 "안식일" 이라 부른다. 레 23:24), 기쁨과 찬미로 송축하여야 하며, "그들의 영혼이 고통 당하는 날" 처럼 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 9절,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본문은 “오늘은 거룩한 날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바로 그분의 거룩한 날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
-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 여호와이시고
- 모든 것은 “그분을 중심으로”,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늘
- 새해 첫날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 그 밖의 모든 날도 하나님의 날임을 고백하고,
-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다짐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날이었다.
- 그러므로 ‘오늘' 나팔절은 —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기쁘고 즐거운 축제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레 23:24.25 ;민 29:1- 6 ;신 12:7.12).
(1) 그들은 백성들에게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명했다" (9절). "근심하지 말라" (10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11절).
만사는 때가 있는 법이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슬픔으로 부르실 때 우리가 기뻐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뻐할 때를 주셨을 때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 죄를 슬퍼할 때라도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기쁨이나 그의 일을 행하는 즐거움을 방해할 정도로 지나쳐서는 안 된다.
(2) 그들은 백성들에게 기쁨을 나타내고 "마음을 괴롭게 하는 대신 찬미하는 옷" 을 입도록 명했다.
💡 10절, 본문의 ‘살진 것’과 ‘단 것’
= 당시 준비할 수 있는 최상의 음식과 음료를 가리킴.
그들은 백성들의 기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스스로 잔치를 베풀어 다른 날보다 더 좋은 것을 보고 마시도록 하기 위해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도록"(10절)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1]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명했다.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그리하여 너희의 풍족함으로 그들의 부족함을 충당하게 하고 그들도 너희와 함께 즐거워하며 너희를 축복할 수 있도록 하라."
💡 10절,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여기서 '예비치 못한 자’는
= 축제에 펄요한 음식물을 준비하지 못한 자.
- 아마 이들은 고아나 과부와 같이 경제적으로 빈궁한 사회적 약자이거나 객과 같이 여행 중에 있었기 때문에 옴식을 준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이들을 ‘단수’로 표현하여 — 이들 개개인이 구제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나누어 주라’ → 구제의 내용과 마음가짐을 교훈함
- 가난한 자들에게 ‘마나׳ 를 주라는 것은
= 그들에게 쓸모없는 것이나 저급한 것을 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치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음식을 주었던 것과 같이 좋은 것으로
- 그리고 마음을 담아서 주라는 것.
구제는 공동체의 의무이자, 진정한 하나됨의 기쁨
이러한 행위틀 통해
—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진정한 일체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사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음식은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몫' 이며 ‘분깃’이었다.
- 즉 가난 때문이든 어떠한 이유에서든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형제들에게 성일을 맞아 음식을 나누어주는 것은
⇒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한 의무.
이러한 의무를 기쁜 마옴으로 행할 때
⇒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잔치를 열 때 가난한 이웃들을 청할 것을 권하셨다(눅 14:13). "주린 자에게 심정을 동하는 것은" (사 58:7, 10) 종교적인 금식 때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잔치의 특별한 의무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관대하게 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실지라도 가난한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나누어 주지 않으며 또 부스러기도 주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들은 부유한 자에 대한 비유에 나오는(눅 16:19 이하) 그들의 심판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왜 그들에게 물질을 주셨는지 알지도 못하고 살피려 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우리는 손을 내미는 자들에게도 보내야 한다. "너그러운 자는 후히 대하기를 힘쓰며", 자선할 일들을 구한다.
[2] 믿음과 경건을 가지고 행하도록 명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그것이 세속적이고 관능적인 기쁨이 아니라 거룩하고 영적인 "여호와의 기쁨" 이 되도록 하라.
즉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그의 선하심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얻은 우리의 유익함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되게 하고 또한 그의 은총에 대한 표시가 되게 하라. 이 기쁨은 너희 힘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장려하라. 그것은
- 첫째, "잔치에 대한 다른 의무들을 이행하게 하는 너희의 힘이 될 것이다."
— 우리가 믿음의 일에 열심일수록 그에 대한 더 풍성한 일들을 가지게 된다. - 둘째, "그것은 너희에게 읽어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해야 하는 모든 일들을 위한 너희 힘이 될 것이다."
— 거룩한 기쁨은 순종이라는 차를 굴리는 기름이 될 것이다. - 셋째, "그것은 너희를 중상 모략하는 적들을 이기는 데 힘이 되어줄 것이다."
— 여호와의 기쁨은 우리 영혼의 적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우리를 무장시켜 줄 것이며 유혹하는 자들이 우리를 잡기 위해 미끼로 던져주는 달콤한 먹이를 입에 대지 않게 할 것이다.
💡 ‘너희의 힘’ = ‘너희의 피난처’
⇒ “근심하지 말라”란 명령에 대한 이유
원문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힘’
- “피난처, 보장, 산성” 이란 뜻도 있다.
- 느헤미야는 슬픔에 빠진 유다 귀환민들이 피할 피난처는 — 곧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이 되는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따라서 당신을 피난처로 여기고 찾아오는 자를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본문에서 에스라는 이를 인간의 편에서 달리 표현하여
— 여호와를 기뻐하는 그 마음이 = 그 사람의 피난처가 되므로
—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 궁극적으로 슬픔에 빠져 살지 않는다.
이를 통하여 진정한 성도는 낙관적일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 성숙한 성도는 - 비관적 인생관을 허용하지 않는다.
- 살아 계셔서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표현은 진정한 기쁨을 항상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회중은 그들에게 내려진 이 명령에 응했다.
- 울던 그들은 "정숙케" 되었고(11절),
💡 11절, 모든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했다
- 정숙케 하다 = 잠자코, 조용히 있다는 것.
- 즉 더 이상 슬픔이나 근심을 표하는 어떠한 말도 못하도록 백성들의 입을 단속하고, 그들의 마음까지 진정시켰음을 나타내는 것.
레위 사람들은
- 백성들 사이에 직접 파고 들어가 율법을 해석해 주는 것은(8절) 물론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일에 합당하게 행동하도록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도와 가르치고 권고하는 일에 앞장섬으로 자신들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던 것.
- 또 "크게 즐거워하였다" (12절).
💡 백성들은 레위인의 권고에 적극 순종했다.
- 원문은 그 백성들이 ‘먹기 위하여’, ‘마시기 위하여', ‘나누어 주기 위하여', ‘즐거워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처소로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유다 귀환민들이 느헤미야를 비롯한 지도자들의 말에 따라 그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들의 처소로 돌아갔던 것은
⇒ 그들의 권고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감정이 폭발했든지 간에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때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항상 모든 감정을 거두어 들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그들은 슬퍼한 후에 즐거워하였다.
거룩한 슬픔 후에는 거룩한 즐거움이 뒤따른다. "눈물로 씨뿌린 자들은 기쁨으로 거둘 것이다." 말씀을 깨닫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말씀이 주는 확신 속에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2)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매우 타당했다.
그들이 즐거워한 것은 그들이 살찐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많은 좋은 친구들과 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읽혀진 말을 밝히 안 때문이었다."
💡 ‘밝히 앓이니라’
- 기본형 ‘삔’ : 이미 앞에서 ‘알아듣다’(2.3절), ‘깨닫다’(8절)란 말로 번역된 동사. 다시 한번 본절에서 서용되어 본단락의 핵심 단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처음 그 백성이 율법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즉각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심정적 변화의 반응을 보였다(9절).
하지만 하나님의 성일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야 한다는 느헤미야와 에스라 및 레위인들의 훈계에 따라
— 그들은 깨달은 바 그 말씀에 의거하여 즉각적으로 그들의 슬폼의 자리를 걷어내고 곧 즐거움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처소로 돌아가는 행동적 변화의 반응을 보였다.
이렇듯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 심정적 변화와
→ 행동적 번화가
⇒ 항상 함께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1] 우리가 거룩한 성경을 가지게 되고 또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은 매우 큰 자비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매우 즐거워 해야 한다. 성경과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기쁨이다.
[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을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더 많은 위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이라는 어두움은 무지와 실수라는 어두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말씀이 처음 그들에게 읽혀졌을 때 그들은 울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회개하고 다시 돌아온 자들에게 준 귀한 언약이 있으므로 이스라엘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즐거워했다.
●백성들의 기쁨(2)(느헤미야 8:13-18)
Ⅰ. 백성들은 다시 말씀에 집중했다.
그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보냈으나, 그들은 그 날이 지나고 다음날 안식일이 될 때까지도 결코 지루하게 여기지 않았다. 비록 절기는 아니었지만 백성들의 족장은 다시 에스라의 해석을 듣기 위해 모였는데(13절) 그것은 그들이 어떤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이런 것들 보다 말씀에서 더 많은 즐거움과 유익함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더 많은 교제를 가질수록 우리가 그것을 옳게 깨닫고 감명을 받는다면 우리는 더욱 열심히 그 교제를 갈망할 것이며 "주의 말씀은 내 입에 얼마나 단지요!" 하고 말하면서 그 시간을 갖는 것을 더욱 늘여갈 것이다. 성경을 잘 깨닫는 자는 계속 더 잘 깨닫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이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뭇 백성의 족장들" 과 함께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혹은 난외에 있듯이 "율법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게 하기 위해" 해석자의 대가인 "에스라에게" 왔다. 즉 그들은 와서 그들 스스로 배운 후 남을 가르칠 능력을 얻고자 했다.
- 에스라가 겸손했으므로 첫날에는 그들이 그와 함께 가르치는 자로서 "그의 우편과 좌편에" 자리를 잡았지만(4, 7절), 이제 그들이 부족함과 그의 뛰어남을 깨달았으므로 둘째 날에는 그들은 배우는 자들로서의 겸손함을 가지고 에스라의 발 아래 자리를 잡았다.
-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는 자들은 그들 자신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먼저 배운 후에 가르쳐야 한다.
💡 13절, ‘밝히 알고자 하여’
- 원형 : ‘이해하다, 현명하다’ (’사칼’)
‘사칼’과 ‘삔’(2,3,8,12절)의 차이점.
- ‘삔’ = ‘식별하는 것’
- ‘사칼’ = ‘이성적인 지식’과 관련.
- ‘사칼’
- 복잡한 사유 과정을 통해서 진리를 찾으며,
- 이 진리를 지혜롭게 사용하는 의미까지 내포하는 말.
- 이러한 사실은 이 동사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 물론 통찰력과 이헤력을 지닌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지만(잠 1:3 ;렘 9:24),
- 생각하고 통찰하여 이를 생활에 옮긴다는 개념과 더불어,
- 가르친다는 개념도 지니고 있다(대상 28:19 ;단 9:22 ;암 5:13).
- 본문에서도 이러한 개념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족장, 제사장, 레위 사람들의 직무와 위치
→ 이들이 ‘그 이튿날' 바로 하나같이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들어 율법의 말씀을 깊이 있게 배우고자 한 이유는?
- 선민 이스라엘을 -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훈육하고 가르쳐야만 하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
- 따라서 그들은
- 말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은 물론,
- 그러한 말씀을 가르칠 만한 능력도 지니고 있어야만 했다.
- 그들은 전날 나팔절에 있었던 사건(2-12절)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지도층 인사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이튿날' 바로 하나같이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들어 율법의 말씀을 깊이 있게 배우고자 한 것이다. - 아마 이 때 지도층 인사들은 곧 다가올 초막절에 대한 율법의 규례가 어떠한지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율법에 능통한 에스라에게 찾아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Ⅱ. 백성들은 그 책에 적힌 그들의 의무를 깨닫자 또 특별한 한가지 일에서 그 말씀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칠월 이일에 율법의 가르침을 받고자 에스라에게 왔을 때 그는 "그의 손에 있는 그의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스 7:25) 그들에게는 그 달의 절기에 관한 율법을 읽어 주었을 것이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초막절에 관해 알려주었을 것이다(레 23:34; 신 16:13). 사역자들은 진실되고 선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 때의 그 날의 일을" 지시하여 때에 알맞는 일들을 가르쳐야 한다.
1. 초막절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재음미(14, 15절) 되었다.
즉 "그들은 초막절에 대한 명령을 율법책에서 보았다."
성서를 열심히 보는 자들은 그들이 잊고 있거나 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 씌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초막절은 광야에서 초막에 거했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 있는 초막에 우리가 머물러 있는 상태를 표하는 것으로써 복음의 교회가 지니는 거룩한 기쁨의 한 모형이다. 열국에 속한 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일이 초막절의 비유로 예고되었다(슥 14:16). 즉 그들은,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도성이 없으므로 "초막절을 지키러" 나오는 것이다.
이 절기는 그들의 모든 성읍에 선포되었다. 백성들은 자진하여 나뭇가지를 가져와(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은 감람나무 산에서 그것을 찍어 왔다) 그들이 거하고(기후가 허락하는 한), 절기 동안 즐거워할 수 있도록 초막 혹은 정자를 지었다.
💡 14절, ‘보았다’
- 이는 집요하게 살펴보아 그 무엇을 찾아낸다는 뉘앙스를 지닌 단어이다.
그들의 진지함
- 즉 백성의 지도자들은 기록된 율법을 면밀하게 조사하던 중, 초막절과 관계된 율법의 규례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시기를 … 하였고’
- ‘모세로’
- ‘손을 통해’ ⇒ 이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를 모세가 기록한 것이 바로 율법임을 보여주는 것.
- 본서 저자가 이런 표현까지 사용하여 모세를 부각시키는 이유
-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 의하여 전달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때 애굽의 압제 에서 벗어나 신정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 ↔ 포로 귀환 공동체 역시 이 율법에 순종할 때 신정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초막절
-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이후 40년 간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
- 유대 종교력 일곱번째 달 15얼부터 일주일 동안 거행되었다(출 23:16).
- 이 일주일 동안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함으로 광야 장막 생활을 기념했다(레 23:33-43 ;신 16:13).
그런데 이러한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율법의 규정에 따라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17절).
바벨론 포로기 동안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지도층 인사들은 눈앞에 닥친 초막절에 대한 율법의 세부적 규정을 알기 위하여 에스라를 찾아왔고 율법에 능통한 에스라는 초막절에 대한 규정을 율법에서 찾아 그들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2. 이 명령은 종교적으로 거룩하게 준행되었다(16, 17절).
우리가 기록된 대로 행할 때 그리고 오랫동안 소홀히 여겨왔었으나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깨달아 그것을 복귀시킬 때 우리는 말씀을 기꺼이 그리고 유익하게 읽고 들은 것이 된다.
(1) 그들은 의식을 준수했다.
그들은 초막 안에 거했다. 그런데 이것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성전 뜰 안에 세워 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 소유의 집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지붕 위에나 뜰 안에 초막을 지었으며 그렇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 초막을 지었다.
이 절기는 보통 지켜져 왔으나(역하 5:3; 스 3:4) 여호수아 시대 이후로 이때처럼 엄숙히 거행된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나안 땅에 처음으로 정착했듯이 이제 그들이 다시 정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규례나 섭리에 순응하여, 잠시라도 자기의 집을 떠나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집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다.
💡 16절, 백성들이 초막을 지은 장소들을 언급
일부 사람들은 지붕 위에 초막을 지음
- 여기서 말하는 ‘지붕 위에׳ 초막을 지은 자는 예루살렘 안에 살던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자신의 집 ‘뜰 안에’ 초막을 세운 사람들.
- 이는 자신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타지역에서 온 백성들에게 광장이나 성전 뜰을 양보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에브라임 문 광장
- 초막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온 타지역 백성들이 운접하여 초막을 세운 장소.
💡 17절,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절이 사상 유례없이 의미 있게 거행되었음.
‘사로잡혔다가’
- ‘쉐비’ : 포로된 상태.
- ‘쉐비’ 는 일반적인 전쟁의 포로에 대해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구약 성경에서는 특히 이스라엘의 회복, 나아가서는 인류의 회복과 관련을 지닌 말이기도 하다.
- B.C. 722년 북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흩어짐을 당했고, B.C. 605, 597, 586년에도 남왕국의 거민들이 바벨론의 계속되는 침략에 의해 흩어졌다**. 이러한 정황 가운데서 선지자 에레미야는 시온의 딸의 자녀들이 ‘포로로 붙잠혀'** 갔음을 몸시 슬퍼하였다**.** 그러나 눈물의 선지자 에레미야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였다(렘 30:10).
- 이러한 예레미야의 예언은 바벨론에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 ‘회중’에 의해 가시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사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들은 모세에 의한 출애굽에 이은 제2의 출애굽의 당사자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동안 제2의 출애굽의 주역들로서, 그리고 앞으로 있을 궁극적이고도 완전한 구원 역사의 예표자들로서 합당한 삶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 성벽이 재건되고 모세의 율법책이 낭독되며 그 말씀을 깨닫고 또한 초막절을 온전히 지키기 전까지는 그랬다.
- 그들은
- 주변의 약탈자들을 두려워 했고,
- 경제적 고통과 선민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말씀을 통한 에스라의 개혁을 통해
⇒ 그들은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자들로서의 삶의 바른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 첫걸음으로서 지금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정한 초막절을 온전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 초막절은
- 출애굽 후 광야 생활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념하는 절기이다**.**
- 그러므로 제2의 출애굽의 당사자들인 이 ‘회중이’
—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자신들을 지켜 보호하시고, 마침내 고국으로 무사 귀환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초막절을 성대하게 지킨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 그리고 이들은 이와 함께 다시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기로 다짐하였을 것이다.
→ 그리하여 결국 언약 갱신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에서 이 ‘회중'을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사실 포로 귀환 첫해에도 초막절은 지켜졌다(스 3:4).
단지 본문은 이스라엘 전역사를 통하여
- 이토록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 이 참여하여 이 절기의 의미를 되새기며,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벅찬 감격으로 초막절을 지킨 적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초막절의 의미를 실제 삶 속에서 절실하게 체험한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 백성들에게
—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역사가 얼마나 감격적으로 다가왔겠는가!
— 그래서 그들은 크게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크게 즐거워하며’ — 벅찬 영적 감격을 느낌
크게
- 원문은 ‘심히’ 라는 부사까지 보태 그들의 벅차오르는 감격을 보다 생생하게 표현.
이들의 기쁨의 성격
- 아마 그들은 외형적으로 초막절이 화려하게 치러졌기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라,
- 초막절이 가지는 참 의미를 마음 속 깊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영적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것.
-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생활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지켜주시고 마 침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음을 기넘하는 초막절 행사는
- 암울했던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에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을 짓고 외적들로부터 안전하게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성벽을 재건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게 하였고
- 이로 인하여 그들은 벅찬 감격을 누렸을 것이다.
(2) 그들은 내용에 관심을 기울였다.
의식이 아무리 성대하더라도 내용이 없으면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1] 모든 절기가 그러했지만 특히 이 초막절은 기쁨으로 즐겨야 했다.
그 기쁨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그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을 격려하는 것이었다.
[2] 그들은 이 절기 동안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해석했다(18절).
그들은 그들의 여가를 이렇게 훌륭한 일로 선용했다. 시간을 절약하는 것은 성경을 연구하고 그 말씀과 교제하면서 보내는 것보다 더 나을 수가 없다. 이 초막절에, 하나님은 7년마다 한 번씩 율법을 읽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 때가 그 의식을 행해야 하는 면제년이었는지는(신 31:10, 11)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절기의 모든 날들을 선한 일을 위해 보냈고 제 팔일에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성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 달 이십이일에 의식이 끝났으나 곧 헤어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 절기 이십사일에는 금식과 기도를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건한 슬픔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기쁨을 배척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기쁨이 경건한 슬픔을 배제하도록 만들어서도 안 된다.
💡 18절, 날마다 … 칠 일 동안
에스라는 초막절을 지키는 칠일 동안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율법을 낭독하였고, 백성들은 또한 칠일 동안 절기를 지켰다.
당시 포로 귀환민들이 절기를 선용하며 지킨 모습
- 율법의 규례에 따라 초막절을 지켰다 는 사실 뿐만 아니라,
- 초막절을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익히는 기희로 선하게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
- 그리고 본절에는 구체적인 언급어 없으나 이 초막절에 유다 귀환민들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노동을 금하며 가난한 자들과 음식을 나누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을 것이다(레 23:35.36.39).
- 초막절 제8일의 성일은
- 첫날 성회와 마찬가지로 성대한 종교적 집희가 열렸을 뿐 아니라 노동을 중단하였다(레 23:34-36 ;민 29:12).
- 그리고 앞선 칠일 동안은
- 각각의 번제와 그에 따른 소제와 전제를 드러며 매일 숫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렸으나(민 29:12-34)
- 여덟째 날에는
- 수송아지 하나와 숫양 하나와 일년되고 흠없는 숫양 일곱으로 번제를 드리고 이에 따른 소제와 전제를 드리는(민 15:4-10) 등 앞선 칠일보다 더욱 큰 규모의 제사를 드렸다
결론
💡 이상의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먼저 유다인들의 칠월 절기 준수나 언약 갱신이 철저히 율법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 즉 당시 유다인들은 에스라의 율법 낭독을 시작으로 나팔절을 지키며 회개하였고, 율법을 연구하여 초막절을 준수하였으며, 초막절 기간 내내 에스라가 들려주는 율법을 들었다.
- 그리고 언약을 갱신할 때에도 자신과 조상들의 죄를 자복하기에 앞서 세시간 동안 율법을 들었다.
→ 이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삶의 지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오늘 우리들에게 —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이야말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지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떠나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른 삶을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