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24, 마태복음 23, 느헤미야 13, 사도행전 23
묵상구절
[8:1-7 욥의 고난에 대한 인과응보론적 해석과 회개에 따른 회복 강조]
8: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8: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8: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8: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8: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8: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8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8: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8: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8:11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8:12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8: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8:14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8:15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8:16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8:17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8:18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8:19 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8: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8: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8: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스페셜포인트
8-10장은 욥과 친구들 간의 제일차 논쟁을 다루는 제4-14장의 연속 부분어다. 여기서는 엘리바스의 제일차 변론과 그에 대한 욥의 반론을 다루는 제4-7장에 이어 수아 사람 빌닷의 제일차 변론과 그에 대한 욥의 변론을 다룬다.
개관
1. 8장의 두 문단
빌닷의 제일차 변론을 보도.
빌닷의 제일차 변론의 요지
-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당하게 대우하신다고 한 데 대하여 욥의 고난의 원인이 그 자신의 죄이든 자녀들의 죄이든 죄의 결과이며, 욥이 잘못을 회개하기만 하면 의롭게 되고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엘리바스의 변론과의 비교
- 특히 변론의 첫번째 주자였던 엘리바스가 경험적 지식에 바탕을 둔 철학적 논조로 인과응보를 강조하는 변론을 하였다면,
↔ 빌닷은 전통에 입각한 단정적인 논조로 인과응보를 강조하는 변론을 하였다. - 그리고 엘리바스의 첫번째 변론이 비교적 정중하고 부드럽다면
↔ 빌닷의 첫번째 변론은 처음부터 아주 거칠고 잔인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1) 8:1-7절
먼저 빌닷은 욥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당하게 대우하신다고 원망한 데 대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인정하지 않는 무엄하고 신성 모독적인 발언으로 규정하며 책망하고,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우신 바 읍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그들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임을 단정적으로 말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2) 8:8-22절
이어 전통적 교훈과 자연에 근거한 악인의 인과응보론적 패망을 주장함으로써 욥의 패망이 그와 자녀들의 죄에 대한 보응임을 시사하였다.
특별히 그는 악인의 인과응보론적 패망을 물이 말라버려 벨 때가 되기도 전에 말라 죽는 왕골과 갈대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 이러한 사람들이 믿는 것은 마치 거미줄을 의지하는 것과 같고 무너질 집에서 안심하고 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 여기에는 번성하였던 욥이 급작스럽게 재앙을 만난 것이 그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 데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빌닷의 변론 중
1.하나님께서 절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내용이나 그러한 하나님의 공의가 인과응보적으로 실현된다고 하는 내용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 하나님의 공의는 종말론적으로 보면 인과응보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이 분명한 진리이지만 현세에서도 반드시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도식적으로 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2.또한 모든 고난이 죄의 결과로 임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 하나님은 현세에서는 악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심판하시기도 하지만 당신의 원대한 계획에 따라 악에 대한 심판을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나 종말의 때까지 유보하시기도 하고, 어떤 특정한 죄와 상관없이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한다.
하지만 빌닷은 이 사실을 간과하고
- 오직 전통과 자연 현상을 통하여 얻은 교훈에 바탕을 둔 인과응보 논리를 욥에게 무리하게 적용함으로써,
- 궁극적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 물론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빌닷의 제일차 변론을 통하여,
-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 현상 등을 통하여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와 성품과 속성을 보여주는 일반 계시 (general revelation)의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삼라만상 가운데는 하나님의 장대한 섭리와 위대한 속성이 보여지며(시 19:1.2),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진행되는 역사 속의 여러 사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보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소위 일반 계시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 계시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의 저하 와 자연의 오염 등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진리에 대하여 층분히 드러내주지 못한다.
그러한 이유로 인간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 가운데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계시로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하여 아얘알지 못하거나 안다고 해도 부분적으로만 알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진리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 계시 (special revelation) 를 주셨으니 그러한 특벌 계시의 완성어 바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서만 하나님과 진리를 온전하게 알 수 있으며, 그러한 특별 계시를 통해서만 일반 계시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즉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그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늘 성경을 묵상해야 할 것이다.
2. 9:1-10:1
다음으로 제9, 10장의 네 문단은 빌닷의 제일차 변론에 대한 욥의 반론을 보도한다.
그러나 욥의 반론은 빌닷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알 수 없는 고난에 처하신 하나님께 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 9:1-14절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할 수 없는 불공정한 상황에 대하여 탄식하였다.
2) 9:15-24절
무차별적으로 심판하시는 것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토로하였다.
즉 욥은 죄 없는 자에게도 갑작스런 재앙이 닥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무차별적으로 심판하시는 분 , 의인의 고난 당함을 보시면서 오히려 비웃으시는 분, 세상어 행악자들의 손에 넘어갈 때 재판관으로 하여금 그릇된 판단을 내리도록 섭리하시는 분이라고 항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욥은 지금 세상의 불합리한 일, 공의가 상실된 듯한 모든 일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이는 욥이 자신에게 임한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상태로까지 그의 신앙이 추락하였음을 보여주고 었다.
3) 9:25-10:1절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좌절감을 직설적으로 토로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변론 의지를 거듭 천명하였다.
특히 욥은 여기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중재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판단해 줄 재판관이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크게 탄식하고 있는데(33절), 이것은 욥이 좌절감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욥은 지금 자신이 큰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까닭 없어 재앙을 내리셨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3. 10:2-22
이렇게 좌절감을 토로하며 하나님과의 변론 의지를 천명한 욥은 이제 끝으로 10:2-22에서 무차별적으로 심관하는 것으로 여겨진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호소한다.
이는 욥이 세 친구들과 제일차 논쟁을 하던 중에 드린 두번째 중간 기도이기도 하다.
즉 욥은 친구들과의 제일차 논쟁 중에 각 친구들의 변론에 대한 답변을 마무리하면서 한결같이 하나님께 원망과 항변투의 기도를 드리는데 본문이 그 두번째인 것.
1) 10:2-17절
욥은 죄의 유무와 관계없어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부당성에 대하여 항변하였다(2-17절).
특별히 여기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시는 것을 일종의 섬술로 이해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자기가 죄를 범하면 죄를 범한 대로 의로우면 의로운 대로 눌 자신을 공격할 계획만 세우고 계시다는 것이다.결국 욥이 볼 때 자기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었다.
유일한 소망이라면 자기가 죽기까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자기를 간섭하지 말고 버려두심으로써 더 이상의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2) 10:18-22절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집행 유예를 애원하였다(18-22절).
결론
이상에서 보듯이 욥은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성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왜곡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는 것은 비단 욥만이 아니다.
소위 하나님을 믿고 의뢰한다고 하는 성도들 중 많은 사람이 종종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하기 일수이다.
특히 성도들은 자신이 욥과 같이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게 될 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하여 회의를 품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인간의 지혜로는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다 이해할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사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왜 사단을 완전히 멸하지 않고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나마 그 활동을 허용하시어 이 세상에 부조리한 일들이 발생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최대 의 질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책인 성경이 말해 주고 있지 않으며 또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이 범죄한 즉시 멸하지 않고 살려두시어 인류가 지금까지 존속하게 하신 사실이 보여주듯이
-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선하다는 사실이다.
- 또 그 모든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간 취할 합당한 태도
그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다 알 수 없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는
- 하나님의 역사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절대 순복하는 것이다.
-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는 비록 현세에서는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는다고 헤도 때가 어르면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인간의 합당한 태도이다.
💡 8:1-7
빌닷의 제일차 번론의 요지는 욥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당하게 대우하신다고 한 데 대하여 읍의 고난의 원인이 그 자신의 죄어든 자녀들의 죄어든 죄의 결과어며, 욥이 잘못을 회개하기만 하면 의롭게 되고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업니다. 특히 변론의 첫번째 주자였던 엘리바스의 번론어 경험적 지식에 바탕을 둔 철학적 논조를 띠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면 빌닷의 번론은 전통에 입각한 단정적인 논조를 띤다는 특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하의 본문은 빌닷의 변론 전반부로서 여기서 빌닷은 욥의 고난에 대하여 인과응보론적으로 해석하고 회개에 따른 회복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빌닷은
- 우선 욥이 엘리바스의 충고를 듣고 자기의 죄틀 인정하며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친구들을 무정하다고 책망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당하게 대우하신다고 원망한 데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인정하지 않는 무엄하고 신성 모독적인 발언으로 규정하고 어떻게 그런 말을 감님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지를 책망하였습니다(1.2절).
- 그리고는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우신 바 욥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그들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였습니다(3.4절).
- 이어 욥의 당면한 고난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가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회복시켜 줄 것어라고 말함으로써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5-7절).
우리가 이러한 빌닷의 주장을 대할 때 알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 불의한 분이 아니라는 그의 기본적인 신념은 옳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절대 공의로우심의 실현을 종말론적이 아닌 현세적이고 기계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절대 공의를 강조하기 위해 모든 고난의 원인을 죄에 결부시키고 인간의 제한적 사고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섬러를 인간의 단순 논리로 제한, 도식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함부로 욥을 단죄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 욥을 판단함으로써 인간의 행위에 대한 유일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의 한 부분만을 알거나 강조하는 것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잘 경고하여 준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빌닷의 변론은 욥에게 아무런 호소력도 지니지를 못하고 욥의 거센 반발만을 부르고 말았습니다.
사실 빌닷의 주장은 하나님의 절대 공의를 주장한다는 것 외에는 모든 고난이 인간의 죄에서 비롯된다는 엘리바스의 주장에서 한치도 발전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 8:8-22
8절 이하에서 빌닷온 전통에 입각하여, 그리고 일반 계시 즉 자연 원리에 근거한 논리로 악인의 인과응보론적 패망을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를 근거로 빌닷은 욥의 패망이 그와 자녀들의 죄에 대한 보응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빌닷의 변론의 문제점 두 가지
- 첫째는 인과응보, 즉 악인이 벌을 당하고 의인이 축복을 얻는 원리가 현세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한 것.
물론 인과응보의 원리는 결코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현세에서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원리는 개인적으로는 내세에, 그리고 전인류 역사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종말에 가셔야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현세에는 도리어 인과응보와 정반대되는 일들, 즉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재난을 당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즉 하나님은
-
- 현세에서는 악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심판하시기도 하지만 당신의 원대한 계획에 따라 악에 대한 심판을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나 중말의 때까지 유보하시기도 하고,
- 어떤 특정한 죄와 상관없이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한다.
- 그런 의미에서 욥이 고난 당하는 헌실만 보고 그것이 그와 그 자녀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말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 둘째로, 그의 논법에 사용된 자연 원리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설명 역시 부분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에는 자연 원리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 자연 원리 역시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일반 계시에 포함되어 하나님의 뜻과 섭리, 역사하심을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분명하게 알고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 만약 그러하다면 하나님은 자연 원리에 예속되는 분이며 그분의 뜻도 인과응보나 자연 원리에 귀속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 분명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은 자연원리를 통해서도 일부 이해할 수 있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을 초월한 것임을 빌닷은 간과하였다.
그래서 자연 원리에 맞추어서 설명할 수 없는 욥의 상황, 즉 자연 원리를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이 사건을 자연 원리에 귀속시켜 규정하려 한 것은 명백한 오류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감안할 때 빌닷이 전통과 자연 현상을 통하여 얻은 교훈과 거기에 바탕을 둔 인과응보 논리를 고집하고 이를 욥에게 적용하려 한 것은
- 무리한 것이었으며
-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섭리, 또 완전한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빌닷의 말과 태도는
- 그 자신의 신분, 즉 고통 당하는 욥의 친구이며 위로자로서의 자세를 망각한 것이었으며
- 욥에게 위로가 아닌 괴로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빌닷의 결론 (20-22절)
욥이 회개할 경우를 가정한 후 욥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망하게 된다는 본문의 내용은 그만큼 하나님의 보호가 완전하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이같은 내용의 본절 역시 빌닷의 인과응보론적 사고를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즉 의인이나 회개한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번영하며 안전한 가운데 거하지만 악인은 패망한다는 도식적인 인과응보 사상이 내포된 것이다.
이처럼 욥이 회개할 경우 그 곧 순전한 자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은 공의로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부끄러움의 옷을 입게 되며,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의 거처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현세적 인과응보론적 사고를 갖고 있는 빌닷이 욥에게 해준 결론적인 말이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악인들이 세상 가운데서 멸망하며 의인은 형통하게 된다는 현세적이며 도식적인 인과응보 사상이 응측되어 있다.
결론
💡이상 빌닷의 첫번째 변론을 통하여 우리는 빌닷의 사고의 특정 및 그의 한계에 대하여 잘 알 수있다.
1. 우선 빌닷은 전통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직된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즉 그는 전통에서 얻은 사고로서 의인은 축복을 받고 악인은 징계를 받는다는 흑백 논러를 읍에게 철저하게 적용시키고 여기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축복과 징계를 단지 눈에 보어는 물질적 차원에 국한시킴으로써 욥으로 하여금 회개를 통해 잃었던 자녀와 재산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는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영적 측면에서의 축복, 죽 하나님과의 교류에서 오는 영적 평안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이었다.
사실 욥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이었는가?
- 자녀와 재산의 상실도 큰 괴로움이었지만,
- 자신에게 이같은 혹독한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답답함과 자신과 하나님 간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더 큰 괴로움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욥의 고뇌를 바로 알지 못하였던 빌닷은 욥에게 적절한 충고를 해주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2. 또 하나의 빌닷의 결정적인 과오는 욥에게 위로자로서 따뜻한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니라 냉혹한 판단자요 정죄자로 다가갔다는 것이다.
그는 욥을 악인으로 일방적으로 매도함으로써 읍의 마옴에 큰 상처를 주었고 읍으로 하여금 자신을 조용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한 것이 아니라 그릇된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을 더욱 강화시키게 하였다.
이후 공허한 논쟁이 계속된 큰 원인 가운데 하나는
→ 바로 친구들의 이러한 그릇된 자세 때문이었다.
3. 또한 본장을 통하여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전통이나 교훈, 그리고 자연 현상을 통하여 습득한 지식이 인간에게 큰 유익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남용하여 절대 진리인 양 함부로 사용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로 이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경험에 종속시키는 그룻된 태도이다.
진리의 최중적 관별의 근거는 일반 계시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 계시임을 분명히 인정하고 신앙의 근거틀 성경에 두어야 할 것이다.
●빌닷의 연설(1)(욥기 8:1-7)
Ⅰ. 빌닷은 욥이 말한 것을(2절) 책망하면서 그의 감정을 저지시키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빌닷의 태도는(매우 흔한 일로서) 퍽 흥분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욥이 선한 말을 매우 많이 했고, 또 목적에 매우 적합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편이 옳다고 주장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빌닷은 매우 노한 논쟁자처럼 그것에 대해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느냐"고 말하면서, 엘리바스가 그를 침묵시키기에 충분한 말을 했으므로 욥의 말은 모두 무례하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책망은(카라일의 견해대로) 그릇된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의 생각이 올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들은 마치 악을 행한 사람들처럼 엄하게 책망당한다. 빌닷은 욥의 말을 "광풍"에 비교하고 있다. 욥은 그의 말이 단지 "바람"과 같으므로(6:26), 그들이 그 말을 가지고 이처럼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 자신을 변명하고 있다.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소란스럽고 위협을 주며, 시끄럽고 위험스런 광풍과도 같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막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라고 빌닷은 말했다).
💡 빌닷이 ‘광풍'에 비유하여 비난한 욥의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고난에 대한 탈출구로서 죽음을 희구한 6:8,9과 친구들의 무정함을 신랄하게 질책한 6:14-30, 그리고 감정이 격화된 나머지 자신의 의를 지나치게 주장한 6:29의 말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욥의 이러한 말온 분명히 정도에 지나친 면이 있다.
그러나 빌닷은 욥의 친구로서 욥을 정죄하고 질책하기 이전에 당시 욥이 처한 극한 고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를 위로하고 조언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빌닷은 입을 열면서부터 비난의 말만을 퍼붓고 있다.
→ 그는 욥의 말을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 악인의 사악한 주장으로 일단 매도한 후 과격하게 욥을 비난하기에만 열중하였던 것이다.
Ⅱ. 빌닷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속에서 하나님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는 지금 이 내용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왜냐하면 욥은 빌닷이 추측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는 적어도 여기에서처럼 욥의 자녀들은 비난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빌닷은 그 형제를 정죄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지지할 수 없었을까?
1. 그의 의견은 일반적으로 옳았다.
즉, "하나님이 심판을 굽게 하시지 않으며," 또한 공의의 고정된 법칙을 그 어느 것도 어긋나게 하지 않으신다(3절)는 것은 옳았다.
하나님은 그러한 일과는 거리가 멀고 우리도 하나님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결코 무죄한 자를 학대하지 않으시며, 그들의 죄의 값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심판자이시다. 세상을 심관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냐?(창 18:25) 만일 하나님께 불의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롬 3:5, 6) 그는 "전능하시고 모든 것이 충만하시다." 사람들은 때로 다른 사람들의 권력을 두려워하고(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공의를 굽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충만하시므로, 어떤 것의 호의로 인해 이득을 얻을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흔히 불의한 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력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불의하실 수 없는 것은 그의 전능하심 때문이다.
2. 그러나 빌닷은 적용되는 면에 있어서 정당하지 못했고, 솔직하지 못했다.
그는 욥의 자녀들,(그들의 죽음은 욥을 매우 괴롭게 한 것 중에 하나였는데) 그들은 유명한 악행을 저질렀으며, 그들이 죽게된 불행한 사태는 그들의 동방의 모든 자녀들 가운데 뛰어난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4절).
욥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굽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인정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자녀들이 어떤 큰 범죄로 인해 버림을 당하거나 죽게 되었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범했다는 것은 사실이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행하신 모든 일 속에서 그의 의로우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특별한 고통은 언제나 특별한 죄에 따르는 심판은 아니며, 때로 그것은 특별한 은혜를 시험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경우를 판단할 때(그 반대의 경우가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구주께서 말씀하신 대로(눅 13:2-4) 좀더 호의적인 면을 택해야 한다. 여기에서 빌닷은 그 점을 빠뜨려 놓고 있다.
💡욥은 6:4에서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고난에 사단이 개업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무죄함만을 주장하였다(6:10.29).
이러한 욥의 주장은 빌닷에게 스스로 행한 범죄는 인정치 않은 채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을 악용하여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불평하는 것으로밖에 이해되지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빌닷은 이러한 욥의 말을 하나님의 심관과 공의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에 대해 반문하며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빌닷의 변론은 형식 논리에 있어서는 합당하다.
하지만 빌닷은 본절에서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중대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욥은 그의 변론에서 ‘왜 순전한 자가 고난에 처하는가?’ 라는 문제 제기를 한 후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이러한 욥의 행동에는 어미 하나님의 공의가 전제되어 있다.
→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빌닷의 말은 욥의 말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빌닷은 욥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단지 전통적인 인과응보론적 도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절대 공의만을 반복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는 사태 해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하나님의 공의가 인과응보론적으로 나타난다는 빌닷의 견해는 일면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빌닷의 문제는
- 앞선 엘리바스와 마찬가지로 이를 현세적이고 도식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제한시켜서 이해하였다는 데에 있다.
- 즉 하나님의 공의는 현세에서도 부분적으로 실현되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의 완전한 실현은 개인적으로는 내세, 그리고 인간 존재 전체에 대해서는 세상 역사가 마무리되고 완결되는 최후 종말의 시점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이를 도식적으로 욥에게 적용하여 욥이 당하는 재난이 그의 범죄로 말미암을 것이라고 단정하며 욥을 정죄하는 빌닷의 논리는
- 합당하지도•온전하지도 못한 것이며
- 이를 듣는 욥의 상황과도 맞지 않는 불합리한 주장일 뿐이었다.
💡 4절, 그 자녀들에 대한 기억, 그것도 그들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빌닷의 이 말은..
- 그토록 비참한 고통 중에 처한 욥의 마음에 대못을 박아대는 잔흑스런 언행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자신의 자녀들이 설혹 알지 못하는 죄를 짓지나 않았을까 하여 정기적으로 그들을 성결케 하는 제사까지 드린(1:5) 욥에게 있어 이 말은 결코 수긍할 수 없는 일방적인 말일 수밖에 없었다. - 또 한편 이러한 빌닷의 말은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와 그 무한한 역사를 감안할 때 부적절하고 교만한 단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섭리에는 유한한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이론만으로 감허 측량할 수 없는 영역이 무한허 많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처 하나님의 섬리를 다 알고 있는 듯이 말한 것은 — 그의 교만함을 스스로 드러낸 것밖에 되지 않는다. - 이는 하나님의 섭리만 아니라 인간 존재와 삶의 다양성을 감안할 때도 그렇다.
즉 인간의 삶 역시도 복잡다단하며 처한 조건이나 상황이 다른데, 그것을 도식화시켜서 자기의 견해에 따라 타인의 상황을 마음대로 규정, 재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독단적인 것어란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다.
Ⅲ. 빌닷은 만일 욥이 자기의 말대로 정직했다면, 그의 현재의 고통에 대한 좋은 결말을 앞으로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욥에게 전하였다.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그들은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해 죽었다), 만일 네 자신이 청결하고 정직했고 또 그 증거로서 네가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그에게 복종한다면 모든 것은 잘되어 갈 것이다"(5-7절).
이것은 다음 두 가지 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1.욥의 환난이 크다는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계속되는 사실로써 욥이 사곡하고 악한 자임을 증명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네가 황폐케 되고 너의 자녀들이 죽음을 당했을 때, 만일 네가 청결하고 정직했다면, 그리고 그 시련 속에서 네 자신이 그렇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면, 하나님은 벌써 네게 긍휼을 다시 베푸셨을 것이며, 네가 환난 당한 때를 따라 너를 위로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네 주장대로 네가 청결하고 정직한 자가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다. 네가 예전의 환난 가운데에서 스스로 잘 처신하였다면 또 다른 환난을 당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빌닷은 옳지 않았다. 선한 사람도 연단을 위해 매우 극심할 뿐만 아니라, 매우 오랫동안의 고난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생명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영원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순간과 관련시켜서 보았다.
그러나 빌닷이 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와 함께 이 문제에 끼어들기를 좋아하셨고 빌닷 자신의 이론에 의해 욥이 정직한 자임을 증명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곧 욥의 초년보다도 더욱 풍성하게 그의 말년을 축복해 주셨기 때문이다.
2.욥을 격려하고 권면하여 그가 이처럼 절망에 빠지지 않고, 지나간 모든 것을 단념하도록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만일 그가 올바른 태도를 취한다면 아직도 희망이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빌닷이 여기에서 죄를 정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를 권면하고 위로하려는 것이라고 간주되기를 바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1) 빌닷은 욥에게 훌륭한 충고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엘리바스와 마찬가지로(5:8) 욥이 돌아와 회개하는 일에 게으르고 어리석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을 부지런히"(즉, 신속하고 신실하게) "구하라"는 충고를 욥이 받아들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욥에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겸손과 믿음으로 "전능하신 이에게 빌라"고 충고하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에 신실함(그것은 아직까지 욥에게 부족하다고 빌닷이 생각한 것인데)이 있는가 살펴보고("너는 청결하고 정직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집에 의로움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충고하였다. "그것은 의로운 집이어야 하며 그릇된 방법으로 획득한 재물로써 가득 차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너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다"(시 66:18). 정직한 자의 기도만이 여호와께서 받아 주시며 기뻐하신다(잠 15:8).
(2) 그는 욥이 아직도 좋은 날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밝은 전망을 그에게 들려 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욥이 그 날들을 볼 권한이 있는지를 몰래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만일 욥이 일찍 하나님을 구하였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위로를 주셨을 것이며, 비록 지금 하나님이 그를 잊으시고 버리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를 기억하시고 돌아오실 것이라는, 다시 말해서 만일 그의 집이 의로우면 그것이 형통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왜냐하면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고, 내적인 경전은 외적인 형통을 가져다 주는 확실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무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돌아올 때,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로 돌아오셔서 긍휼을 베푸시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욥이 이 세상을 다시 시작해 나갈 수 있도록 그에게 남겨져 있는 것은 거의 없으므로 그가 이전처럼 형통하리라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욥이 반박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다. "비록 너의 초년이, 그릇에는 조금밖에 음식이 없고, 기름이 병에 조금 담겨 있을 정도로 궁핍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그것이 크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은혜와 위로로써 그의 백성들의 영혼을 풍요케 하는 방법이다. 즉 그것은 "한꺼번에"(Per saltum) 오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씩"(Per gradum) 오는 것이다. 시작은 초라하나 그 과정은 완전으로 행한다. 여명의 빛이 정오를 가져오며,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가 된다. 그러므로 보잘 것 없는 날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큰 날에 대한 소망을 지니도록 하자.
💡 빌닷은 ‘욥의 회개’ 와 이에 따른 대신•대인 관계 회복’ 을 ‘물질적 축복’ 과 연계시키고 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빌닷이 얼마나 신앙의 문제나 선악의 문제를 물질적인 면에 유착시키고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다.
빌닷은
- 욥이 겪는 고난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가 처한 외적인 상황만을 보고 그를 악하다고 단정지었다.
-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빌닷은 욥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및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할 경우 있게 될 결과를 물질적인 것과 연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빌닷의 현세적 축복관은
→ 물질 문제를 영적인 것과 항상 연계시킨다는 점에서 저급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당시 욥에게 있어서도 잃어버린 물질 등이 그를 몹시 괴롭게 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자신이 왜 고난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혹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혹이 그를 더 괴롭게 하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빌닷이 내세우는 이러한 말들은
- 그 자체가 욥의 상황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 그가 내세우는 결론 역시도 욥이 진정으로 고민하는 바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국가를 크게 성장시키는 것처럼 욥의 재산을 크게 성장시킬 것이라는 빌닷의 확신이 담겨져 있다.
한편 본절은 욥의 미래가 무조건 창대하여질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본절은 앞선 5,6절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즉 본문은 욥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도덕적으로 완전해지는 조건이 충족될 때 나타나는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재앙을 돌이키시고 그를 형통하게 하실 것이며 그의 자녀와 재산을 크게 번영하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의
- ‘미약하였으나'는 현재 욥의 상태를 반영한 말이며,
- ‘창대하리라'는 욥이 회개할 때 받을 미래의 축복을 언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빌닷의 말에 대한 평가
비판적 측면
- 욥이 죄인이란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였을 뿐 아니라,
- 보다 중요한 영적 회복보다는 물질적 희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 그리고 여전히 현세적 인과응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층분히 있다.
적절한 측면
- 그러나 잘못을 범한 자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경우 전인격적인 변화와 성숙, 삶의 변화를 체험한다는 본절의 내용은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적실성을 지닌다.
또 이후 욥이 현재의 미약한 상태에서 벗어나 더욱 창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42:12) 이는 하나의 예언적 의미를 지닌 문구로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한편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입술을 통해서 많이 회자되는 표현이다.
대개 이 말씀은 사업장을 개업할 경우나 한 가정이 본래 살던 집에서 이사할 경우 축복의 문구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빌닷은 욥을 축복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욥이 죄인임을 전제하고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본 말씀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의 본래적인 의미는
신앙적 회복을 물질적인 축복과 직접적으로 연계시키는 데에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이는 함부로 적용하기 어려운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이 말씀이 오용되는 면이 있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빌닷의 연설(2)(욥기 8:8-19)
빌닷은 여기에서 사곡한 자와 악을 행한 자들의 슬픈 재앙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소망과 기쁨이 비극적으로 끝나버리는 것에 대해 매우 훌륭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엘리바스처럼 의로운 자가 이처럼 끊어짐이 없다고(4:7) 말할 정도로 대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의 방법으로, 경건하고 형통한 것처럼 보였던 악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게 하고, 파멸을 당하게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며, 그들의 형통함을 짧게 함으로써 그들의 경건함이 허위였음을 밝히는 것 역시 흔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이처럼 멸망하는 모든 자들은 사곡한 자였음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분명히 증명하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대해 말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것을 의심하고 있으며 그 이론을 쉽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Ⅰ. 빌닷은 옛날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모든 지혜롭고 선한 자들의 일치되는 생각과 관찰력에 호소함으로써, 사곡한 자들의 모든 소망과 기쁨이 분명히 끊어지는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저 세상에서 다시 말해서 이 인생에서가 아닌 장차 올 세상에서 사곡한 자들이 그들의 모든 신앙과 모든 승리를 박탈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로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을 틀림없는 사실이다. 빌닷이 이러한 의미에서 말한 것인지 안한 것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가 증명한 방법을 관찰해보자(8-10절).
1.그는 그 자신의 판단과 그의 동료들의 판단을 고집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다"(9절).
그는 욥이 그들의 능력에 관해 모르고 있으며, 그들이 거의 아무 것도 모르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빌닷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네가 그것을 정죄하였으나 우리의 무지함을 자백할 용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던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짧고 순간적이어서 그림자와 같이 빨리 사라지기 때문이다."
(1) "그러므로 우리는 옛날 시대처럼 거룩한 계시의 근원에 가까이 갈 수가 없다"(거룩한 계시는 잘은 모르지만, 그 당시에 말로 전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말한 것을 조사해 보고 그들의 생각에 대해 들어온 것을 다시 음미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글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옛 시대 사람에게 묻거나,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 필요가 없이, 직접 그 말씀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 비록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도,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롬 10:8).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예언의 말씀"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계율을 연구하고 지킨다면 우리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할" 것이다(시 119:99, 100).
(2) "우리는 옛세대의 사람들처럼 거룩한 섭리의 방법을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처럼 이 자연의 법칙에 있어서 유능한 판단자가 될 수 없다."
우리 생명의 짧음은 우리 지식의 진보를 방해하고 있으며, 우리 몸의 연약함과 결점도 역시 그러하다. vita brevis, ars longa-즉 인생은 짧고 예술의 진보는 무한하다.
2.빌닷은 옛날 사람들의 증언과 욥이 그들의 생각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너는 옛 사람들에게 물으며 그들의 의견을 들으라. 그리하여 이 문제를 네 자신이 판단해볼 뿐만 아니라, 열조의 판단도 또한 참조하라(8절). 그들이 네게 가르쳐, 그들의 시대에도 항상 하나님의 심판이 악인에게 따랐다는 것을 네게 알려 줄 것이다(10절). 그들은 그 마음에서 나는 이러한 말을 발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확고히 믿는 것과 그들이 크게 감동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감동을 주려고 하는 사실들을 말할 것이다."
(1) 거룩한 섭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어려운 점을 밝히기 위해 우리 세대의 사건들을 이전 세대의 관찰이나 경험과 비교해 보면 유익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 역사, 특히 가장 오래되고 절대적인 진리로서 우리로 하여금 배우도록 하기 위해 기록된 그 거룩한 역사를 참고하는 것은 더욱 유익한 일이다.
(2) 옛 세대로부터 지식을 얻으려는 자들은 부지런히 탐구하고 "터득한 일을 배우며" 탐구하기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3) 가르치는 자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들은 배우는 자들의 마음에 도달할 것이다. "그 마음에서 나는 말을 발하는 자들," 기계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이고 거룩한 일들에 대한 경험에서 나오는 말을 하는 자들이 "네게 가장 잘 가르칠 것이다."
학식이 풍부한 패트릭(Patrick) 주교는 빌닷이 그두라에게서 난 아브라함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수아의 혈통을 타고 난 수아 사람이기 때문에(창 25:2), 그가 여기에서 역사를 언급해 놓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충성스런 아브라함(그는 이제껏 그리고 후에도 오랫동안 그의 믿음을 계속 지녔다)의 자손들을 안전케 하였고, 욥의 이웃인 동방 사람들을(그들은 욥의 나라에 있는 곳에 정착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악함 때문에 멸절당하게 한 그 보응에 대해 그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시사했다. 여기에서 빌닷은 의인이 형통하며, 악인은 잠시 번영하더라도 결국 근절되어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방법이라는 이론을 끌어내고 있다.
Ⅱ. 빌닷은 비유를 들어 이 사실을 예증하고 있다.
1.사곡한 자의 소망과 기쁨은 여기에서 왕골이나 갈대로 비유되고 있다(11-13절).
(1) 그것은 진펄과 물 가운데에서 자라난다. 사곡한 자는 악하고 썩은 발판이 없이는 그의 소망을 얻을 수 없으며,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그밖의 것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더욱이 왕골은 진펄없이 자랄 수 없는 것과 같이, 그것은 자기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터전 없이는 소망을 얻을 수 없다. 그는 그의 세상적인 형통함과 그럴듯한 신앙 고백과 그의 이웃에 대한 선한 생각,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자부심에다 그의 터전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그가 확신을 세울만큼 견고한 터전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진펄과 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자라나는 소망은 왕골과 갈대에 불과하다.
(2) 그것은 잠시동안 푸르고 생생하게 보일지도 모른다(왕골은 다른 풀보다 빨리 자란다). 그러나 그것은 곧 시들고 하찮게 되어 아무런 쓸모가 없어져 버린다. 그것은 보기에는 푸르르나 아무 소용이 없다.
(3) 그것은 "다른 풀보다 일찍이" 시들어 버린다(12절).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그것은 말라 버리고, 곧 죽어버린다. 사특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들은 전성기에 이르자 마자 시들어 버린다. 심지어 그것이 푸르를 때에도 그것은 쇠해간다. 풀은 "벤바 되어 마른다"(시 90:6). 그러나 왕골은 "베이지 않으나, 자라기 전에 마른다"(시 129:6). 그것은 소용없을 뿐만 아니라, 지속되지도 못한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다"(13절).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그것은 그들이 왕골과 같은 길을 밟기 때문이다.
[1] 하나님에 대한 망각은 인간의 사곡함의 근저에 깔려있고, 또 그들의 사곡함 속에서 그들 스스로에게 속살거리고 기만하는 그 허탄한 소망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사람들이 만일 그들과 관련을 재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그 속에 있는 진실을 살피신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또 하나님은 영이시며 우리의 영들을 보살피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사곡한 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사곡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면 공연한 소망은 가지지 않았을 것이며, 찢김을 당하고 절뚝발이가 되는 조롱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2] 사곡한 자들의 소망은 그들 자신을 크게 속인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잠시동안 흥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침내 분명히 소멸될 것이고, 그것과 함께 그들도 파멸할 것이다.
2.그것들은 여기에서 "거미줄" 또는(난외에 있는 것과 같이) "거미집"에 비유되어 있다(14, 15절).
(1) 사곡한 자의 소망은 그 자신의 내장 속에서 만들어진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의 공상에서 나온 조작물이며 자기 자신의 자만과 능력에 대한 망상에서 나온다. 꿀벌이 하는 일과 거미가 하는 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근면한 그리스도인은 부지런한 꿀벌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이슬로부터 그의 모든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사곡한 자는 교활한 거미처럼, 하나님을 마치 그 자신과 동류인 것으로 여기는 그릇된 가설로부터 자기의 위로를 짜아낸다.
(2) 그는 거미가 거미줄을 좋아하는 것처럼 그것을 매우 좋아한다. 즉 그것으로써 그 스스로를 즐기고 그것으로 그의 몸을 감싼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집이라 부르면서 "그 집을 의지하고 굳게 잡는다." 거미는 "손에 잡힐만 하여도 왕궁에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잠 30:28). 이처럼 그의 충족하고 확고한 외적인 형통 속에서 세상적인 정욕들이 그를 포옹한다. 그는 그 집이 그의 왕궁인 것처럼 교만을 떨며, 그의 성곽인 것처럼 그 속에서 방어하고, 거미가 거미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그가 먹이로 삼고자 노리는 자들을 유혹하는 데에 그것을 사용한다. 형식적인 고백 또한 그러하다. 즉 그는 그 자신의 눈을 스스로 속이고, 그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고, 하늘에 대해 확신하며, 그의 헛된 신념으로 이 세상을 속인다.
(3) 하나님이 그의 집을 쓸어 버리실 때가 올 때, 그것은 거미의 분비물로 만들어진 거미줄처럼 쉽게 그리고 틀림 없이 쓸어버림을 당할 것이다. 세상적인 형통을 누리는 자들은 그들이 그 속에서 안전과 행복을 얻으리라고 기대할 때, 실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재산을 굳게 잡으려고 노력하나, 하나님은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으신다. 그러면 그들이 모은 이 모든 것들은 누구의 소유가 되겠는가? 또 그것들이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곡한 자의 확신은 무너질 것이다.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말하리라." 모래 위에 세운 집은 폭풍우가 몰아칠 때, 다시 말해서 집이 매우 필요하게 되고 그 자신에게 그 도움을 보리라고 기대했던 때에 넘어질 것이다. "사악한 자가 죽을 때 그의 소망은 끊어진다." 그가 소망을 둔 근거는 거짓된 것임이 증명될 것이다. 그가 바라던 것은 그를 실망시킬 것이며, 그 스스로를 들뜨게 했던 그의 어리석은 소망은 끝없는 절망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그의 소망은 끊어지고, 그가 은신처로 삼았던 그의 거미집은 쓸어버림을 당하며, 그는 그 속에서 짓이겨질 것이다.
3.사곡한 자는 여기에서 무성하고 튼튼히 뿌리박은 나무에 비교되어 있다. 비록 그것 자체는 시들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쉽사리 잘리울 것이고, 그 자리는 더 이상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안전한 상태에서 형통하는 죄인은 그 자신이 왕골과 갈대에 배교되는 것이 그릇된 비유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가 보다 튼튼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빌닷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의 착상을 허용할 것이며, 그가 원하는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 그러나 그는 곧 잘리울 것이다." 사곡한 자가 느브갓네살의 꿈속에서와 같이(단 4:10) 여기에서 큰 나무로 표현되어 있다.
(1) 이 나무가 푸르르고 무성한 것을 보라(16절).
그것은 일광을 받고 푸르러서 햇볕에 마르지 않고 항상 그 푸르름을 지키는 "본토에 선 푸른 나무"와 같다(시 37:35). 그리고 그것은 동산 울타리에 의해 보호되고 그 토양의 양분을 마음껏 흡수하며 그 가지가 뻗어간다. 그것이 견고한 자세로 서 있고 "그 뿌리가" 깊게 박히며, "돌 가운데로 들어 갔으므로" 폭풍우에도 결코 뽑힐 것 같지 않은 모습을 보라(17절). 그것은 왕골처럼 진펄과 물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견고한 땅에서 자라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인이 이 세상에서 형통할 때에는 그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재물은 "그 자신의 망상 속에 있는 높은 벽"이 되고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가 "그 곳에서 뽑히어"(18절),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을 보라.
그것은 완전히 근절되기 때문에 그것이 자라난 흔적이나 표적이 그곳에 남아있지 않게 된다. 바로 그 장소도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옆에 서있던 것들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시 37:36). 그는 한때 거드름을 피우고 큰 소란을 피웠으나 곧 사라져 버려,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않는다"(말 4:1). "그 길의 희락은 이와 같다"(19절). 이것이 그 결국이며, 그의 모든 희락은 이렇게 끝난다.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그의 소망의 결과는 기쁨으로 나타나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 결과이며 그 희락이다.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사 17:11). 이것이 그 최선의 상태이다. 그렇다면 그 최악의 상태는 어떠한 것이겠는가? 그는 그가 가진 것을 그의 가족들이 즐길 수 있도록 남겨둘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그 후에 다른 것이" 즉 그와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자가, 그의 뿌리에서가 아니라 "흙에서 나와," 그의 장소를 채울 것이며, 그가 수고하여 얻은 것을 다스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즉, 같은 기질과 성품을 지닌 다른 자들이) 그의 처소에서 자라고, 그의 몰락을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고서, 그와 마찬가지로 방심한 상태를 누릴 것이다. 속인들의 방법은 어리석으나 같은 부류에 속하는 자들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한다"(시 49:13).
●빌닷의 연설(3)(욥기 8:20-22)
빌닷은 여기에서 그의 연설을 끝내면서, 그가 말해야 할 것을 몇 마디 말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욥에게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제시하면서, 그가 예전처럼 잘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1.한편, 만일 그가 온전하고 정직한 자였다면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20절).
비록 지금 그가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돌아오시사 점차로 "그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실 것이며(시 30:11), 그에게 위로가 흘러넘쳐 그의 "입이 웃음으로 채워질" 것이다(21절). 행복한 변화는 이처럼 매우 감격스럽다(시 126:2). 그를 사랑한 자들은 그와 더불어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그를 미워하고 그의 실패를 기뻐한 자들은 그들이 그가 이전의 형통함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들의 무례함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버리지 아니하시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잠시 버림을 당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버림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저 세상에서 하나님이 의로운 자의 "입에 웃음으로 채우시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비록 그들의 해가 구름 속에 가리워져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시 맑게 떠오를 것이며 결코 더 이상 구름 속에 싸이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슬퍼하며 무덤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기쁨으로 들어가는 길을 방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거룩한 자들의 적들은 거룩한 자들이 영예의 화관을 쓰는 것을 볼 때,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 틀림 없다. 그러나 욥이 이전의 형통함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는 순전한 자로서의 성품을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다.
2.또 한편으로, 만일 그가 사악한 자이며, 악을 행하는 자라면 하나님은 그를 도우시지 않고, 그의 현재의 재앙 가운데에서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실 것이며(20절), 그의 "장막은 없어질" 것이다(22절).
여기에서 하나님이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리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벗어나게 되고, 그의 은혜를 박탈당할 것이다. 하나님은(난외에 있는 것처럼) "그 손으로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실 것이며," 그들과 교제를 나누거나, 교통하시지 않을 것이다. "광명과 흑암 사이에 무슨 교통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이 그들 자신을 던져버린 그 영원한 재앙으로부터 그들을 끌어 올리기 위해 그의 손을 빌려 주시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때에 그들이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려 그들의 손을 뻗칠지라도 그것은 이미 늦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손으로 붙들어 주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 큰 심연이 놓여 있다."
"악인의 장막은 조만간에 없어지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을 그들의 거처로 삼"는 자들만이 영원히 안전하다(시 90:1; 91:1). 다른 것들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는 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죄는 본인과 그 가족들에게 멸망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욥의 가족들이 몰락하고 그 자신도 현재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가 분명 불경하고 악한 자라는 이론을 내세우는 것은 그의 사악함과 불경건함에 대한 다른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한, 정당하지도 못하고 또한 너그럽지도 못한 일이다. "때가 이르기 전에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자. 그리고 모든 마음의 비밀이 명백히 드러나기까지 기다리자. 그리하면 "하나님의 비밀이 필역될 때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난점들이 영원한 만족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