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3월 1일 금요일 묵상구절 시편 16편 <다윗의 믹담>

Jeehyun 2024. 3. 1. 07:07

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12:22-51, 누가복음 15, 욥기 30, 고린도전서16

묵상구절

16: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16: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16: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16: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16: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16: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16: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여호와 유일 신앙을 가진 자의 영원한 복락-

(저자: 다윗, 분류: 메시야 예언시)

 💡제16편은 시편에 나오는 일곱 편의 메시야 예언시의 하나.

이러한 본시는 여호와 유일 신앙을 가진 자의 복락을 노래하고 있는데,

  1. 이는 일차적으로는 축복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여 죽음의 위협조차 두려워하지 않은 다윗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만세대 중에 택한 성도의 죄를 대신 지고 그들의 구속을 위하여 심지어 하나님에게서조차 버림받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고통 및 공포를 감당하심은 물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여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메시야 에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한 것입니다.

본시의 저작 배경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다만 1절과 8절 이하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다윗이 죽음조차 각오해야 하는 어떤 위기 상황에 처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절박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기쁨과 소망에 대하여 노래하였다는 것은 그의 높은 신앙의 경지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1-4절

다윗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주와 복의 근원으로 삼아 섬기겠다는 여호와 유일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

5-8절

다윗이 여호와 유일 신앙을 가진 자의 현재적 복락에 대하여 노래하는 내용.

9-11절

여호와 유일 신앙을 가진 자의 영원한 종말론적 복락에 대하여 노래하는 내용.

특히 여기서 10절은 오순절 성령 강럼 때에 베드로가 무리들을 향하여 설교하는 과정에서 에수 그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면서 인용한 내용으로(행 2:31)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이 다윗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실 것임을 확신적으로 노래한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종말론적 부활 및 영생 구원을 예언한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와 그에 대한 확신 (시편 16:1-7)

이 시편에는 "믹담"(Michtam)이라는  표제가 붙어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황금"의 시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가치 있고 금보다도, 정금보다도 더 귀중한 시로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의 영역에서 감추어져 있는 참된 보물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에 대해 매우 명백히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4절 : 여호와를 의지하는 여호와 유일 신앙의 고백

💡 총11절로 이루어진 본시에서 1-4절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여호와 유일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 이러한 다윗의 신앙은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는 첫문장에서부터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당시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할 만큼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그가 당시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역사서의 기록을 통해 볼 때 다윗은 인생 전반을 통해 언간의 힘으로는 감당키 험든 무수한 어려움을 당하였다. 본시는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어느 한 시기에 다윗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한때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볼레셋 이방의 힘에 기대기도 하였다(삼상 27장). 그러나 이와 같은 한두 번의 실수를 제외하고는 일생 동안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틀 굳게 의지하는 삶을 중단하지 않았다. 본문도 바로 이와 같은 다윗의 신앙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Ⅰ. 다윗은 여기에서 믿음이 있는 확신을 가지고 나쁘게 하나님의 보호로 뛰어들고 있다(1절).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는 죽음으로부터 특히 죄로부터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오직 주께만 피하나이다."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거룩한 돌보심에 의탁하고, 스스로 거룩한 인도에 복종하는 자들은 그 두가지의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은 "아버지여 나를 이 시간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구하실 것을 믿으신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있다.


💡 16: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나를 보호사소서’ (’솨메레니’)

  • 원형 ‘솨마르’
    • 곡식이 자라고 있는 농장, 흑은 양떼가 먹고 있는 초장 둘레를 가시 울타리로 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
    • 즉 고대 팔레스틴의 농경과 유목 사회의 배경하에서 나온 단어이다. 들짐승들로부터 곡식과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 울타리를 친 데에서 바로 이 단어 ‘솨마르'가 유래된 것이다.
  • 어려서부터 양들을 돌보았던 목동 출신 다윗은 누구보다도 ‘솨마르'가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인식하에서 다윗은 지금 자신에 대한 그와 같은 보호를 여호와 하나님께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 즉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포악한 들짐승과 같은 원수들의 위협 상황에서 자신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23편)께 ‘솨메레니'라고 애절하게 부르짖었던 것이다.

배경

  • 본시가 다윗의 시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언제 어떤 배경하에서 저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하는 1절의 내용으로 보아 다윗이 죽음조차 각오해야 하는 극심한 위기 상황에 처하였거나 혹은 극심한 고난을 겪고 난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혹자는 본시에서 다윗이 하나님이 자신외 분깃임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들어 그 배경을 사울 왕에게 쫓기는 상황과 연관시킨다. 삼상 26:19에서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을 때 사람들이 다른 신을 섬기라고 하며 다윗으로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하였던 사실로 볼 때 다윗이 이러한 조롱을 강하게 거부하면서 본시를 지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추정일 뿐 그 고난이 구체적으로 어떤 고난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다윗의 믿음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 환난의 때에, 위기의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기 때문에 - 여호와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셔야 한다고 다윗은 말하고 있다.
  • 이를 보면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주제넘은 태도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자신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여긴 데서 연유한 것도 아니다.
  • 다윗이 위급한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은
    ⇒ 그와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에 근거한 것
    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사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언제나 그를 떠나지 않고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셨었다(삼하 7:8-17).
  • 다윗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언약을 의심치 않고 굳게 믿었기에,
    환난의 때에 하나님께 피하며,
    그의 도우심을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그 기대는 = 허망한 것이 아니라, 반석보다도 더 안전한 것이었다.

‘피하나이다’ = 완료시제

  • 이는 다윗이 ‘주님 내가 당신을 신뢰하며 당신께 피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기 전에 어미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 고백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완전히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Ⅱ. 그는 그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그 자신이 엄숙히 헌신될 것을 인식하고 있다(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여호와이시오니 나는 담대히 주를 의지할 수 있다 하였나이다."

 💡 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1.주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 복종시켜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의무이며 권리이다. 아도냐"는 "나의 옹호자," 내 마음의 힘을 의미한다.

💡 다윗의 고백 :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 1절에서 ‘하나님’, 2a절에서 ‘여호와라 부른 것과 비교된다.
    • 1절에서 : 다윗은 자신을 해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는 대적들보다 하나님이 훨씬 강한 분임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전능자 하나님을 나타내는 신명 ‘엘’을 사용하였다.
    • 그리고 본절 상반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어 자신을 보호하여 주실 것이라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여호와'란 신명을 사용하였다.
    • 그런 반면 본문에서는 : 하나님을 '주' 라 부르고 었는 것이다

‘주’ (아도나이)

  • ‘아돈’이란 단어에서 유래.
  • 의미 :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한 가운데 다스린다는 의미.→ 즉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계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도나이' 에는 ‘주권자(sovereign)' 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 특히 당시 그가 처하여 있는 환난과 위기의 상황에서는 - 이러한 ‘아도나이’ 되신 하나님이 더욱더 절실히 느껴졌을 것이다.
  • 다윗이 확신한 바
    • 다윗은 자신의 생살여탈권이
      • 자신을 해하려는 원수들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 자신을 택하사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그 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해주시겠다고 언약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였기에 여호와께 피하여 그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
  • 사단이 왕 노릇하는 이 세상에서 항상 위기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성도들 역시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이 요청된다.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 ‘나의 복(토브)’
  • 사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에게는 좋은 것, 그를 기쁘게 해주는 선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점점 강성헤져 가는 그의 왕국과 왕위, 아름답게 자라가는 그의 자녀들, 그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 등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이 다윗에게는 부지기수로 많았다.
  • 하지만 그의 즐거움은 그것들에 있지 않았다.
    더욱이 극심한 환난의 때에 그런것들은 다윗에게 기쁨이 되어주지도 못했다.
  • 즐거울 때나 슬플 때를 막론하고 다윗에게 참된 기쁨, 참된 선이 되는 것은 오직 그의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었으며,
    지금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 다윗이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는 이유
    • 이는 여호와께서 그가 요구하는 것들을 들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 그의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2.이것은 우리 영혼으로써 행해져야 한다.

"내 영혼아, 네가 그것을 말했도다"(우리 성경과 다름: 역주). 하나님과의 언약은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되어야 한다. 우리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일에 전념하고 그것으로써 속박되어야 한다.

3.주님을 그들의 주님으로서 공언하는 자들은 자주 그들 자신에게 그들의 행한 것을 상기시켜야 한다.

"너는 주는 나의 주시오니라고 주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다시 말하고, 그것을 주장하며, 그것을 지키라. 그리고 결코 그것을 말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너는 그것을 말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즐거움을 취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라. 그는 너의 주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하라. 그리고 네 눈은 항상 그를 향하라."

Ⅲ. 그는 성도들을 섬김으로써 그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있다(2,3절).

"나의 선함이 당신께는 이르지 못하나 성도들에게는 이르나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주시하라.

1.주님을 자기들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그와 같이 선하면서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선함이 없이는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

2.어떤 선함이 우리에게 있든지, 또는 우리에 의해 행해지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까지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선한 행동에 의해 공적을 쌓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봉사가 필요치 않으시다. 그는 그것에 의해 유익을 얻지도 아니하시며, 그것도 또한 그의 무한하신 완전함과 축복에 더 보탬이 될 수도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가장 선하며 가장 유용한 자들도 하나님께 유익할 수는 없다(욥 22:2; 35:7).

하나님은 우리보다 무한히 위에 계시며 우리 없이도 행복하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선행을 하든 그것은 모두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에게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지 그가 우리에게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윗도 이것을 인정하여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고 말하고 있다.

3. 하나님이 우리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를 위해 우리의 선함을 그의 것인 자들, 즉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르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그의 수납인으로 세우신 그는 그들에게 베풀어진 것을 그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여겨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 16: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땅에 있는 성도’

  • 성도 = ‘거룩하게 구별된 자’
  • 이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 아닌 이 땅에 있는 자들이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자들이다. 땅에 살지만, 땅이 아닌 위를 바라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존귀한 자'로 칭할 수 있는 것이다.

(1) 땅에는 성도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땅위에서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늘에서 성도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서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전념하는 자들은 땅에 있는 성도들이다.

(2) 땅에 있는 성도들은 뛰어난 자들이며, 위대하고 위력하며 존귀한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이 세상에서 너무 궁핍해서 다윗의 선함이 그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신 은혜로써 그들을 뛰어나게 만드신다. "의로운 자는 이웃들 중에서 뛰어나리라."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탁월한 자로 여긴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고 영예롭다. 그들은 그의 보석, 그의 독특한 보물이다. 그들이 하나님은 그들이 형상이며, 그들에 대해 아름다운 왕관이시다.


💡 ‘존귀한(’앗디르’) 자’

  • ‘탁월한 자들’(KJV), ‘귀인들’(NRSV), ‘장업한 자들’(NASB)
  • ‘앗디르' 가 가지는 다양한 용례로 볼 때 이러한 모든 번역들은 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세상적 기준의 평가라기보다는 신앙적 관점의 평가로 이해하여야 한다

(3) 주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은 그의 성도들을 뛰어난 자들로서 여겨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기 때문이며, 그는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왕이었을지라도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의." 심지어 가장 비천한 자의 "동무"(119:63)였는데 이것은 그의 기쁨이 그들 가운데 있었다는 표시였다.


💡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나의 즐거움’

  • ‘헤프치’ : 본래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유래, 관심과 마음이 어떤 대상을 향해 쏠린다는 의미.

→ 본문은 다윗의 관심이 거룩한 백성에게 있다는 의미가 되며,

⇒ 이는 자신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성도들과 더불어 자신 역시 존귀한 자의 하나로 살고 싶다는 소원을 피력한 것.


(4) 우리는 성도들을 기뻐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의 선함이 그들에게 이르도록 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친절을 그들에게 베풀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주며, 그들에게 풍성한 사랑의 수고를 보여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적용 될 수 있다. 즉 그가 우리를 위해 역사하신 구원은 하나님께 아무런 소득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멸망이 그에게는 조금의 손실도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의 선함과 유익은 우리 인간에게 미친다. 그는 인자들을 기뻐하시며(잠 8:31),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라고 말씀하신다(요 17:19). 땅 위에 있는 성도들의 연약함과 여러 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그 성도들을 기뻐하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기뻐해야 하는 좋은 이유가 된다.

Ⅳ. 그는 그릇된 신들을 숭배하는 것과, 그것을 숭배하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을 모두 거절하고 있다(4절).


💡 16: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

  • 원형 ‘마하르’ 는 본래 물이 빨리 흘러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 어떤 일을 급히 하는 것(창 18:6)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 단어는 예물을 드린다는 의미보다는 다른 신들의 뒤를 제빨리 쫓아간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평소 가장 의지하는 대상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 다윗은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환난의 때에
    • 절대 주권자되신 하나님께로 달려가 그를 의지하지 않고,
    •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헛된 우상들에게로 달려가 그것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본문과 같이 표현하였던 것이다. 

1. 그는 우상 숭배자들의 파멸을 깨닫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에 미쳐서 다른 신을 좇기에 바쁘며, 마치 그 우상들로부터 벗어날까봐 두려워하는 자처럼 열심히 그것들을 따라간다. 그러나 "그들의 괴로움이 더할 것이다."

그 괴로움은 그들이 버린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내려온 심판에 의한 것이며, 그들이 받아들이는 그릇된 신들에게서 느끼는 실망에 의한 것이다. 신들의 수를 늘리는 자들은 스스로에게 괴로움을 더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이신 하나님은 부족하게 여기는 자는 두 개의 신이 너무 많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며, 수 백 개의 신들도 충족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우상 숭배자에게 괴로움이 증가하되, 끝없이 계속적으로 중가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환난의 때에 환난을 면키 위해 우상들에게로 급히 달려가는 자들은

  • 그 우상을 통해서 환난을 경감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큰 환난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 그들의 고통은 사람의 영혼에 참된 만족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 계속해서 가중될 것이다. 

2.그는 그들뿐만 아니라 그 혹암의 무익한 일과도 관계를 갖지 않으려는 자기 결심을 선포하고 있다.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로다. 그것은 그들이 제시하는 신은 거짓될 뿐만 아니라 그 제물조차도 야비하기 때문이다."

💡 ‘피의 전제’

  • 본문에서는 복수 명사로 쓰여 당시 사람들이 피를 부어 드리는 제사, 즉 전제를 자주 시행하였음을 보여준다.

사실 고대 근동의 이교도들의 제사에서는

  • 동물이나 사람의 피를 제단에 쏟아 붓거나 사람의 심장을 꺼내 불에 태우는 등 소름끼치는 사악한 일들이 신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주 자행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제사 행위는 피와 신의 관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미신적 관념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 당시 사람들은 진노한 신이 피를 요구한다고 믿었으며,
  • 붉은 피는 신의 진노를 달램과 동시에 자신들의 허물을 덮어 가린다고 믿었던 것이다. 

피는 속죄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단에서 피를 마시는 일은 매우 엄격히 금지되었고, 제주는 포도주를 썼다. 그러나 마귀는 그의 숭배자들에게 제물의 피를 마시는 잔인성을 배우도록 그들에게 지시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나는 피비린내 나는 신들과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겠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내 입에 올릴 때 그들에 대한 어떤 기쁨이나 존경심도 품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완전한 증오로써 우상과 우상 숭배를 미워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또한 그리스도와 그이 사업에 적용시키면서 그가 제시한 제물의 특수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율법에 따라 바쳤던 것은 소와 염소의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결코 열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그것은 그 자신의 피였다), 또한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의 슬픔이 더해가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유대인들은 다른 왕, 가이사를 좇기에  바빴었고, 여전히 다른 메시야를 좇기에 바쁘나 그들의 찾음은 헛된 일인 것이다.


5-8절 : 여호와 유일 신앙을 가진 자가 누리는 현재적 복락

Ⅴ. 그는 그의 소득과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엄숙히 택하였음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으며(5절), 그 선택으로 인한 즐거움을 취하고 (6절)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7절).

이것은 헌신적이고 경건한 영혼이 그 은혜로운 경험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1. 그의 소득과 행복을 위해 여호와를 택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주된 유익을 위해 세상을 취하며, 그들의 지복을 그 즐거움 속에 둡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는 내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라고 말하겠습니다.  곧 내가 선택한 소득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내 상태가 초라해지더라도 나는 기쁘게 그것을 따르겠습니다. 내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부어 주시고 내가 그에게 용납되게 하소서. 내게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즐거움을 주시고 그의 은혜와 즐거움을 얻는 만족을 주소서. 내게 그의 약속 가운데 있는 유익을 주시고, 약속으로써 영원한 생명과 미래의 행복을 누릴 자격을 주소서. 그러면 나는 충분할 것이며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내 지복을 이루기 위해 더 이상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 16: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소득’

  • 원형 ‘헬레크’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배해 주신 기업(inheritance)으로서, 조상으로부터 내려와 후손에게로 전해지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절대 앙도할 수 없는 것.
  •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았던 지파는
    ⇒ 레위 지파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다 지파인 다윗이 이같은 고백을 하는 것은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공급해 주시는 것만을 소망하면서 살 수밖에 없듯이,

-그 역시도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기를 염원하는 바람이 함축된 것이라 찰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훌륭하고 지혜롭게 행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 산업과 잔의 소득으로 여겨야 한다.

(1) 그는 저 세상에서 우리 산업의 소득이 되신다.

천국은 산업이다. 거기서 하나님 자신이 성도들의 산업이시며 성도들의 영원한 축복은 그러한 그를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산업, 우리의 가정, 우리의 휴식, 우리의 영속하는, 영원한 선으로 여겨야 하며, 이 세상을 우리가 여행할 때 지나가는 나라 이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2)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양육되고, 활기를 회복하며 기절하지 않도록 해 주는 우리 잔의 소득으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것에 순응하지도 않고, 이 현재의 모든 괴로움을 상쇄시키고 환난의 가장 쓴 잔을 달게 해 주기에 충분한 것으로서 여기지 않는다.

2. 이 소득을 그가 안전케 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주께서 나의 것이 되심을 약속으로 밝히신 주님은 은혜롭게도 약속하신 것을 잘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행복을 빼앗기도록 나 홀로 남겨 두시지는 않을 것이며, 도적질해 가도록 그것을 나의 대적들의 세력 안에 내버려 두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아무 것도 나를 당신으로부터 탈취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나를 주의 사랑에서, 다윗의 그 확실한 긍휼에서 떼어 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성도들과 그들의 복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 문자적 번역 : ‘당신은 내 몫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 한글 개역 성경은 ‘당신’을 의미하는 2인청 단수 대명사 ‘앗타'를 번역하지 않았는데, - 원문에서는 바로 어 단어가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 즉 다윗은 자신의 몫, 또는 분깃을 떠받치고 있는 자는 자신의 신하들도 아니요 자신의 아들들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지구를 떠받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욥 26:7) 그 능하신 손으로 다윗의 분깃을 떠받치고 있다면, 그것보다 더 확실한 보장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이 단어는 본문에서 분사로 쓰여 그러한 상태가 다윗의 생애 동안 계속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3. 이 소득을 기뻐하며 그 속에서 만족을 얻고 있다(6절).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도다."

 💡 16: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다윗이 말하는 ‘기업'은?

  • 표면적으로
    • 그의 거주지인 예루살렘, 또는 그가 통치하는 하나님께사 거룩한 나라로 택하신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그러나 본시 전체 내용을 감안할 때 궁극적으로
    • 이는 자신의 삶을 돌보시며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 표면적으로는 예루살렘, 또는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것이지만,
  • 궁극적으로는 다윗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이 마치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소개된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신 것처럼 복되고 아룸다운 것이라 감탄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하나님을 자기 소다운 산업을 가진 자들이다. 그보다 더 나은 것을 그들이 어떻게 가질 수 있겠는가? 그들이 어떤 것을 더 원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영혼이여, 너의 안식처로 돌아오라." 그리고 더 이상 바라지 말라.

은혜로운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더욱 열망할지라도 하나님 이외의 것은 결코 열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자비하심이 확인될 때 그들은 그 자비를  아주 만족스럽게 여기고, 세속적인 환락과 관능적인 즐거움과 기쁨을 결코 부러워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 속에서 자신을 진실로 행복하게 여기며, 그들이 바라는 것 속에서 온전히 행복해질 것을 전혀 의심치 않는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알려지고 숭배되어지는 빛의 땅에, 소망의 계곡에 자기의 분깃을 정한 자들은  그러한 면에서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도다"라고 말할 만하다. 수단뿐만 아니라 그 목적도 갖고 있는 자들, 즉 임마누엘의 땅 뿐만아니라 임마누엘의 사랑을 갖고 있는 자들은 더욱 그럴 만한 것이다.

4. 그것에 대해 그리고 이 지혜롭고 행복한 선택을 하도록 만든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7절).

"그는 내 소득과 행복으로 택하도록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우리가 우리들 자신에게 맡겨지고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눈을 쫓게 된다면, 우리는 매우 무지하고 어리석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망상을 택할 것이며 거짓되고 헛된 것을 위해 우리 자신의 긍휼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으 소득으로 취하고, 감각적이며 일시적인 것들보다도 영적이고 영원한 축복을 더 좋아한다면,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지시하시고 능력을 주신 거룩한 은혜의 능력과 선하심을 감사하게 인정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께 그것에 대한 찬미를 드리도록 하자.


 💡 16: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훈계’

  •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 깨달음.
  • 다윗은 영적으로 민감하게 깨어 있어 하나님의 내적 조명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

5. 그것을 선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를 훈계하셨을 때 그 자신의 "심장"(그 자신의 생각)도 또한 밤중에 그를 그르쳤다.


 💡 다윗이 여호와를 송축하는 이유

  • 여호와께서 자신을 훈계하시기 때문일 뿐 아니라,
  • 더 나아가 자신의 심장을 통하여 밤마다 자신을 교훈하게 하시기 때문.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훈계를 - 마음으로 받아들여, 그것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삶을 살았다.

‘내 심장’

  • 원형 ‘킬르야’ : 본래 사람의 신체 기관 중 ‘콩팥'을 나타내는 단어어지만(출 29:13), 포괄적으로 사람의 내장, 혹은 사람의 중심이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욥 19:27; 잠 23:16).
  • 다윗은 하나님의 훈계를 머리로 이해하고 머리로 자기 자신을 교훈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여 마음으로 교훈하였던 것이다.

‘밤마다'

  • 의미
    • 분주한 하루 일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다윗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음을 암시하는 표현.
    • 그러나 낮과 대조되는 밤은 인생의 고난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 고난의 때에도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 그러나 어떤 의미를 취한다 하더라도
    다윗이 낮 밤을 가리지 않고, 또한 삶이 순탄할 때나 괴로울 때를 가리지 않고,
    항상 앙심을 통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이러한 사실은 다음절에서 보다 더 잘 드러난다.

  • 그가 조용하고 한적했을 때, 그리고 세상에서 물러났을 때, 그 자신의 양심은 ("심장"이라 불리우고 있다. 렘 17:10) 그가 만든 선택에 대해 기쁜 마음으로 회고했을 뿐만아니라, 이 선택에서 야기되는 의무에 대해 그를 가르치거나 훈계했으며, 그에게 시험하여 물어 보았다.
  • 그리고 믿음에 의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향해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을 자신의 소득으로 택한 자로서 살아가도록 그를 격려했고, 또 촉구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여호와를 자기 소득으로 삼았고 그 소득을 기뻐했다. 그의 아버지의 영광을 그의 가장 높은 목적으로 삼았으며 그것을 구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을 그의 음식과 음료로 여겼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분깃을 지켜 주시고 그로 그 사업을 완성하도록 해 주실 것을 믿었으며, 그의 일을 수행하고 그 아버지의 훈계를 쫓기를 기뻐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다. 즉 이것을 노래로써 기록한 안심과 만족을 지니고 하나님을 우리의 것으로 선택한 사실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 (시편 16:8-11)

사도 베드로는 이 모든 구절들을 오순절에 성령이 부어진 후 그 첫 번째 설교에서 인용하고 있다(행 2:25-28).

그리고 그는 다윗이 그 속에서 그리스도에 관해, 그리고 특히 그의 부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일을 온전케 해 주시도록 그의 은혜에 의지하고, 복된 소망을 바라며 하나님의 즐거움 안에서 죽음 저편에 있는 행복한 상태를 바란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하나님께로 향한 다윗의 경건하고 헌신적인 애정에서 우러나온 일들로 간주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하늘을 향한 이 거룩한 들어올림 속에서 그는 그 스스로의 생각과 그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초월한 예언의 영을 통하여 이처럼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그리고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메시야의 영광을 예언하고 있다. 신약은 우리에게 이 구절들의 신비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 본시는 궁극적으로 온 세상의 죄를 지시고 대속을 위한 처절한 수난을 감당하시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의 길에서 흔들리지 않고 결국 부활의 승리를 쟁취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사역을 예언하는 것.


Ⅰ. 이 구절들은 당연히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신 영광을 미리 증거"했던 것처럼(벧전 1:11). 예언자 다윗도 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여기에서 이 예언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 (다윗 자신이 이 시편의 다른 예언 가운데에서 이것에 관해 분명히 보여 준것과 같이. 눅 24:44, 46) 예시되어 있다(고전 15:3, 4).

1.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을 것이다.

그가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8절)라고 말하는 구절에 이러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그의 영혼이 심히 괴로우셨을 때 번민하셨던 것과 같이, 괴롭힘을 당하시고 그에게 무서운 충격이 가해질 것을 짐작하셨고 그 잔이 그에게서 지나가기를 간구하셨다. 그가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다"라고 한 말에는 그가 육체를 떠나야 하므로 사망의 고통도 치러야 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그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된 상태가 되어야 하며 그처럼 남겨진 그의 몸은 썩는 것을 보게 될 절박한 위험에 놓이게 되리라는 것- 그가 죽어야 할 뿐만 아니라 묻혀서 잠시 동안 사망의 권세 아래 거해야 한다는 것이 또한 분명히 시사되어 있다.


2. 그는 고난을 당하고 죽어가는 속에서도 거룩한 능력에 의해 훌륭하게 견디어 나가실 것이다.

 💡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본절에는 다윗이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소개되고 있다.


(1) 그는 요동해서는 안 되신다.

그의 사업으로부터 축출당하거나 그 무게에 눌려 갈아 앉아서는 안 되신다. 즉 쇠하거나 낙담해서는 안 되며(사 42:4) "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때까지 그 일을 계속 진행시켜야 한다. 비록 그 봉사가 힘들고 투쟁이 심했더라도, 즉 홀로 포도즙 짜는 기구를 밟았더라도 그는 요동치 아니했으며 그 일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다.(사 50:7-9). "나는 여기 있으니 이들은 그들의 길을 가게 하라."

(2) 그의 마음은 기뻐해야 하셨고, 그의 영광은 기쁘게 받아들여져야 했다.

그의 사업을 단호히 행할 뿐만 아니라 즐겁게,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감을 갖고 계속 행하셔야 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이다."(요 17:11)라는 말씀과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잔을 어찌 마시지 않으리요?"라는 말씀, 그리고 그 밖의 여러 말씀 가운데에서 목격할 수 있다.

사도행전 2장 26절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의 "입술"은 그의 영광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입술은 우리의 영광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쓰여졌을 때보다 더 영광스러울 때는 없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가 이처럼 기꺼이 참으시고 수행하셨던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였다.

[1] 그는 그의 아버지의 뜻에 경의를 품으셨고 그가 행하신 것에 영광을 돌리셨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십니다." 그는 제나 그의 아버지의 계명(요 10:18; 14:31)과 그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주목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영광과, 사람들 가운데 그의 나라의 권세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어떤 난관에도 요동치 않으시도록 해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그의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들을 하셨기 때문이다.


💡 다윗이 모든 일에 있어서 여호와의 임재를 의식하며 그의 뜻에 따르는 신본주의적인 삶을 살았다.


[2] 그는 고난 중에서도 그의 아버지가 자기 함께하실 것을 확인하셨다.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나를 즉시 도우시며, 필요한 때에 바로 옆에 계시도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신다"(사 50:8). 그가 내 우편에 계시어 나를 지시하고 견고히 하며 힘있게 하신다(89:21). 그가 번민중에 있었을 때 사자(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도왔다(눅 22:43).

십자가의 승리와 개가는 모두 이러한 은혜를 입은 것이었다. 그의 우편에서 "열왕을 쳐서"파하신 것은 바로 여호와이셨던 것이다(110:5; 사 42:1, 2).


💡 여호와를 향한 다윗의 깊은 신뢰

굳이 구별하자면,

  • 앞에 모신다는 표현이 : 가까이 친근하게 계심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다면,
  • 우편에 계신다는 표현은 : 여호와께서 다윗 자신에게 실질적인 힘이 되심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여호와를 향한 다윗의 깊은 신뢰는 이러한 표현과 더불어 ‘항상' 이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윗은

  • 조건과 상황에 따라 바뀌는 신앙이 아니라
  • 시종여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3] 그의 고난이 영광스런 결말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셨다.

"그가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함이었다(히 12:2).

그는 소망 속에서 거하였고, 그것은 그의 거한 곳을 영화롭게 만들었다(사 11:10).

그는 그의 부활에 의해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또한 곧 영광을 얻으시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요 13:31, 32  참조).


9-11절 : 여호와 유일 신앙을 가진 자가 누릴 영원한 종말론적 축복

3. 그는 그의 고난에서 구해지고 영광스런 부활에 의해 사망의 관세에서 벗어나실 것이다.

(1) 그의 영혼은 음부에 내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즉 그의 인간적인 영은 다른 사람들의 영처럼 오랫동안 육신과 분리된 상태에 있지 않고 곧 돌아와 다시 연합하여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 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다윗이 누린 평안의 근원

  •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결코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 본문을 다르게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즉 자신이 비록 죽을지라도 장차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피력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부활과 영생에 대한 계시가 미비하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도 있으나, 구약 시대에도 희미하게나마 부활 계시가 주어졌고 베드로의 말과 같이 다윗이 당시 선지자로서의 영감을 가지고 이같은 말을 했다면 자신의 부활과 더불어 성령의 조명으로 장차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예언하였다고 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다윗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것을 소망하며 본절의 말을 하였다고 볼 수도 있으나 ,
더 나아가 다윗이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그에 대한 확신을 피력하였다고 보는 입장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 그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며, 구원의 사업에 바쳐지고 죄에서 완전히 떠난 자이므로, 그는 그것이 부패하는 것을 보거나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무덤에서 일어나실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은 몸이 썩기 시작하기 전에 곧 일어나시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만일 그가 제3일에도 일어나시지 않았었다면 몸은 자연의 법칙대로 썩었을 것이다. 영혼이 매우 부패한 우리는 우리의 육신도 또한 부패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욥 24:19). 그러나 죄를 알지 못한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부패함을 보지 않았다뿐 계단에 바쳐진 굽지 않은 희생의 고기를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코 제3일까지 놓아 두지 말 것을 율법으로 엄격히 명했다 (레 7:15, 18). 이것은 그리스도가 부패함을 보지 않도록, 뿐만 아니라 그의 뼈도 조금도 상하지 않도록, 제3일에 일어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그는 하나님 앞에 있는 기쁨으로 그의 고난에 대한 보상을 풍성히 받을 것이다(11절).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매우 확신했다.

(1) 그는 자기의 영광을 볼 것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고 이 어두운 골짜기에서 나를 그 생명으로 인도하시리라."

이에 대한 확신 속에서 그의 기운이 다했을 때 그는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또 기운이 다하기 조금 전에는 "아버지여,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 본문을 직역하면 ‘당신이 나에게 생명의 길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생명의 길' =. 음부에 버림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사는 것.

  • 다윗은 자신 스스로는 길을 알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만 가르치실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 여기에서도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며 하나님을 통하여 영적 진리를 알고자 하는 다윗의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2)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 영접되어 그의 우편에 앉게 되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오도록 허용된다는 것은 그의 봉사가 용납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를 그 우편에 앉히신 것은 그러한 봉사에 대한 보상이 될 것이다.

(3) 이처럼 그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 겪으신 슬픔에 대한 대가로서, 그는 "기쁨이 충만하고,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온 세상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또한 그의 자손과 그의 사업이 성공하고 흥하는 것을 보는 가운데에서 중재자로서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실 것이다(사 53:10, 11).


💡 종말론적 시점

  • 다윗은 - 장차 하나님 앞에 서서 기쁨을 맛보는 영광스런 그 날을 바라보던서 현재 자신이 당면하고 있던 고난을 이길 수 있음을 말한다.

즐거움

  • 이 세상에서는 맛보기 힘든 즐거움으로서 현재 당면하고 있는 고난을 능히 이기게 하고도 남을 소망이다.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말씀으로써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증거해 주고 있다(롬 8:18). 다윗은 참담한 위기 가운데 처하기도 하였지만 장차 맛볼 이러한 즐거움을 내다볼 수 있었기에 고난을 극복하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Ⅱ.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요,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이 구절들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활기를 되찾는 모든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들을 노래함에 있어서 우리가 제일 먼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때(우리의 영원한 즐거움으로써, 이 구절들의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그것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고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을 노래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 주님을 항상 우리 앞에 모시고, 그가 계속 우리의 우편에 있는가를 살피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를 우리의 주된 유익과 최고의 목적으로 우리의 주인, 통치자 그리고 재판장으로 여기고 우리의 자비하신 은인이며 확실한 안내자와 엄격한 감찰자로 여기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며 의무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처럼 행하는 한 우리는 우리의 의무나 위로로부터 요동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축복받는 바울은 주님을 그 앞에 두었으며,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렸을 때일지라도(행 20:24) "이러한 것들은 그 어느 것도 나를 요동시키지 못하리라"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다.

2. 우리 눈이 항상 하나님께로 향한다면 우리 마음과 입술도 항상 그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과실이다.

만일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한다면 그러한 풍성한 마음의 기쁨으로 우리의 입이 그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교화를 위한 말을 하도록 하자.

3. 죽어가는 그리스도인은 죽어가신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기쁜 부활을 믿으면서 기꺼이 육체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이다."

우리 육신은 이 세상에서는 거의 휴식을 취할 수 없으나 무덤에서는 자기의 침상에 있는 것과 편히 쉴 것이다(사 57:2). 우리는 이 생애에서 거의 소망을 가질 수 없지만 더 나은 생애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 가운데 육체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사망은 "사람의 소망을 끊으나(욥 14:19)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끊지 못한다(잠 14:32) 즉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죽음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살아 있는 소망을 갖는 것이다. 육체가 무덤 속에 영원히 남아 있지 않으며, 잠시동안 그것이 썩을지라도 마지막 때에는 불멸성을 지니고 일어날 것을 바란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그의 부활은 곧 우리 부활의 전조가 될 것이다.

4. 하나님을 주목하면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들은 천국을 보면서 편히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으나,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

여기에서의 우리의 모든 기쁨은 공허하고 불완전한 것이나, 하늘에는 기쁨이 충만하다.

또한 여기에서 덧없고 순간적인 우리의 즐거움은 오래 지속되기에 합당치 않은 성질을 지니고 있으나 하나님에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환상과 결실 가운데에서 불멸의 영혼에서 부여되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시는 다윗이 하나님께 피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에서 지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보호자되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이러한 신뢰에서 나오는 벅찬 기쁨이 잘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본시는 찬양의 시이면서 확신의 시로 불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본시의 보다 큰 가치는 메시야 에언시라는 점에 있다.

즉 본시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부활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부활과 영생을 미래의 그리스도의 부활로 확장시켰지만,

오늘날 성도는

  • 과거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후사인 자신의 부활과 영생에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윗 시대와 비교해 부활과 영생에 대한 계시가 훨씬 분명하게 주어진 시대에 사는 우리

  • 현실적 고난 가운데서도, 마침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부활의 기쁨과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며
  • 다윗보다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