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26, 요한복음 5, 잠언 2, 갈라디아서 1
묵상구절
- 슬픔을 춤이 되게 하신 여호와의 은총에 대한 감사 찬양
(저자: 다윗, 분류: 찬양시)
30:1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30: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0: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30: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30: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30: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30: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30: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30: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30: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30: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서론
💡 제30편 :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며 쓴 찬양시.
아마도 본시는 시의 전체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중한 질병에 걸렸던 다윗이 고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지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본시의 내용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한 후에 하나님께 감사 찬양한 노래(사 38:9-20)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가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어느 시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본시에는 ‘성전 낙성가'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본시가 성전 낙성식에 사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다윗 시대에는 성전어 건축된 일이 없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기를 소원하였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본시는 성전 낙성식을 염두에 두고 지어진 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실 본시는 그 내용에 있어서도 성전 건축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시가 ‘성전 낙성가'라는 표제를 갖게 된 것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 재건된 성전 봉헌식 때(B.C. 516년) 나 신구약 중간 시대에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에 의해 유린당한 성전을 마카비가 중수하여 재봉헌한 때(B.C. 164년)에 성전을 봉헌하는 유대인들의 심정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여겨진 본시를 감사 찬양시로 선택하여 낭독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1-3절
중한 질병에 걸려 거의 무덤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던 시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은 것을 회상하며 부르는 감사의 노래.
4,5절
시인이 회중을 향하여 하나님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영원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찬양하는 일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
6-12절
시인이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노염을 사서 중한 질병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처하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기쁨을 회복하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소개하며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 찬양을 드릴 것을 다짐하는 내용입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미 (시편 30:1-5)
경건한 유대인들이 새 집을 건축했을 때 하나님께 "낙성식"을 올린 것은(신 20:5) 매우 칭찬할 만한 행실이었으며, 비록 특별히 지시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허용되었고 용납되었다. 다윗도 그의 집을 건축되었을 때 그렇게 하고 나서 집을 소유했다(삼하 5:11). 왜냐하면 궁궐은 일반적인 집들 못지 않게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하며 또한 그의 봉사를 행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하는 집도 물론 제일 먼저 작은 성소로서 하나님께 봉헌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가사를 엄숙히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에 맡겨야 한다. 그의 임재와 축복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을 그의 영광에 바쳐야 한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한 것과 우리와 우리 집이 가정 예배의 의무를 행하고 모든 면에서 복음에 순종함으로써 주님을 섬길 것을 결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편이 다윗이 근친 성교로써 그 집을 더럽혔던 압살롬에 의해 그 곳에서 축출당한 후 다시 그 집에서 낙성식을 행할 때 불리워졌던 것이며, 그것은 그 위험한 반란을 진압시킨 데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 1-3절 : 자신의 영혼을 음부에서 건져주심에 대해 다윗이 감사와 찬양을 드림
Ⅰ.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역사해 주신 위대한 구원에 대해 감사 드리고 있다(1절).
💡 30:1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 이러한 본시는 *‘내가 당신을 높이리이다 여호와여'*로 직역되는 ‘아로미므카 예흐와'로 시작한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본시의 주제가 무엇이며, 또 그 초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 다윗은 본시의 마지막 부분인 12절에서도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라는 고백을 올림으로 찬양으로 연 본서를 찬양으로 닫는다.
사실 다윗은 찬양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쁨의 때, 평탄할 때 뿐만 아니라 슬픔과 환난의 때에도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한마디로 말해 다윗의 삶 전체가 여호와를 향해 드려지는 찬양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찬양으로 시작해서 찬양으로 마무리되는 본서는 다윗의 인생 그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이옵니다. 주의 이름을 높일 것이며, 높으시고 들리워지신 자로 주를 찬미할 것입니다. 인간들 가운데 있는 주의 나라의 세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할 것입니다. 나는 주를 격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빠져들어 가는 함정으로부터 나를 들어 올리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보좌까지 들어 올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를 티끌에서 일으키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올리시기 위해 그의 십리와 은혜로 행하신 위대한 일을 깊이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보잘 것 없을지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온 힘을 기울여 그의 이름을 격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세 가지 사실이 다윗의 구원을 빛내주고 있다.
1. 그의 대적들이 격파되었다.
만일 그가 이러한 아픔으로 인해 죽거나 이 환난 속에서 멸망했다면, 그들은 그들이 행했던 것처럼 (비록 야만스런 일이긴 하지만) 그를 이기기 위해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41:11 참조).
💡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들이 더 이상 자신을 조롱하거나 위협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대적은 누구?
- 아마도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이 자신 개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해악을 끼치는 자임을 함축적으로 전달.
- 이는 분사 형태로 되어있으며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즉 이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대적하였으며, 복수형이란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한 개인이 아니라 다수였다.
이는 다윗이 당하는 어려움이 여러 대적들로부터 온 것임과 동시에 다윗의 처한 상황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힘겨운 것임을 암묵적으로 전달한다.
2.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2절).
"내가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 느끼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상달되어야 하며 모든 부르짖음은 그를 향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 우리의 슬픔은 고통스러운 영혼을 편하게 할 것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며, 내 부르짖음을 들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고치셨나이다. 병든 몸을 고치셨고, 불안하며 평정을 잃은 마음은 고치셨고, 나라의 잘못되고 혼돈된 일들을 고치셨습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나타내신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임이니라"(출 15:26).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그 영광을 돌려야 한다.
💡 30: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다윗이 여호와를 높인 근본적 이유
단지 여호와께서 자신의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건져주셨거나 자신으로 인하여 대적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다윗은 이 짧은 시에서 ‘여호와'라는 말을 10회,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2회, ‘당신'이라는 말로 여호와를 13회나 표시하였다는 사실은
→ 그의 감사와 찬송의 근본적인 이유가
- 여호와께서 저를 ‘끌어내시고 ', ‘살려', ‘음부에 내려가지 않게 하고', ‘은혜로 굳게 세우신다' 등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 자체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본시에 나타난 다윗의 감사와 찬송은 이같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호와’를 10회나 반복함
‘여호와'라는 신명은 하나님' ‘엘로힘’ 이라는 명칭과는 구분되는 특정한 뉘앙스를 지닌다.
- ‘엘로힘’ 이라는 명칭이
- 하나님의 권능과 전능하심, 그리고 창조주되심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신명으로 사용되었다면,
- ‘여호와'는 :
- 하나님의 자존성을 강조하거나
-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해 그분이 구속주이심을 나타내는 신명으로 사용된다.
- 특히 이는 언약적인 측면과 관련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성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주로 사용되었다(출 3:13,14).
본시 전반을 통해 다윗은 거의 각 절마다 ‘여호와'라는 신명을 사용함으로
- 구원의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행사와
- 그분과 자신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다.
3. 그의 생명이 구원되었다. 즉 그는 음부로 들어갈 정도로 극한 상황에 다다랐고 "무덤으로 내려 갈" 지경이었으나, 구조되어 살게 되었다(3절).
💡 30: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앞선 2절에서 ‘나를 고치셨나이다'라고 진술했던 다윗은 본절에서 그 당시 자신을 위협하던 그 위험이 얼마나 강력하고 두려운 것이었는지를 나타내는 두 단어.
- 음부
- 무덤
- 두 단어의 의미는 동일.
‘다윗의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냈다', ‘나를 살리사’
- 이는 다윗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는 다윗이 무덤 속에 들어가 누워 있는 것과 같이 죽음 직전의 상태까지 갔었음을 말한 것.
- ‘나를 살리사’ → ‘거의 죽어가던 사람을 살리다’, ‘어떤 것이 생명을 유지하게 하다’
- 여호와께서 다윗을 무덤에 내려가지 않도록 하셨다는 의미로 쓰인 것.
- 이는 질병으로 인하여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던 다윗이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어 소생하였음을 나타낸다.
-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
- ‘나를 끌어내사’ (1절)
- ‘나를 고치셨나이다’ (2절)
- ‘내 영혼을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3절)
- 자신을 향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얼마나 생생하고 분명한 것인지를 나타내는 의미와 더불어,
- 이에 감격해 하는 그 자신의 심정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위험이 급박할수록 - 우리의 구원은 더욱 귀하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더욱 큰 위로가 되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은 더욱 현저하게 증명한다. 사망에서 건져진 생명은 우리 생명의 하나님을 높이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 4-5 절 :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향하여 감사와 찬양을 돌릴 것을 촉구함
Ⅱ. 그는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사하신 특별한 은총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에 대한 그의 선하신 의지의 일반적 표징에 대해서 그와 함께 찬미하도록 권고하고 있다(4절).
💡 30: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라!"
하나님께서 자기 것으로 인정한 모든 사람들은 진실한 성도들이다. 이 세상에는 이러한 남은 자들이 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 기대되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이름과 찬미를 위한 자들이 될 수 있도록 창조되고 성별케 되었으며 성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그를 찬송하는데 하물며 땅에 있는 자들이 어찌 그들과 협력하여 온힘을 기울여 그를 찬송하지 않겠는가?
💡 ‘주의 성도들아’ (’하씨다이우’)
- 원형 ‘하씨드’ 는
-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자비’를 나타내는 명사 ‘헤쎄드 '에서 파생되었으며,
- ‘변함 없는 사랑' 을 의미하는 일종의 언약적 용어.
- 일반적으로 ‘자비한 자’ (삼하 22:26), ‘거룩한 자'(삼상2:9), ‘경건한 자'(신 33:8) 등으로 번역되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는 자’ 를 가리킨다.
- 이와 같이 여호와의 성도들은
- 여호와의 자비(헤쎄드)를 구하며
- 그에 대한 응답으로 그 거룩한 성품과 능력을 -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체험한 자들이다.
- 그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헤쎄드’ 를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약속받은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들로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여호와’라는 명칭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실 때 사용한 신명이다(출 6:2-8).
- 이것은 단순히 호칭이 목적어 아니라 그 이름을 통해 당신이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계시하시고 대대로 그 거룩한 이름 가운데 함축된 당신의 성품과 행사를 기억하게 하도록 주어진 이름인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여호와’ 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 애굽에서 노예로 압제당하던 자신들을 출애굽시켜 언약을 맺으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여호와의 구원 사역을 기억하였어야 했다.
-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들의 신앙과 경건은
- 바로 이러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경외하며 ,
- 그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사역과 은혜를 기억하는 것에 그 초석이 놓여 있었다.
- 그러므로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잊고 우상 숭배에 빠질 때마다 선지자들이 외쳤던 메시지는 바로 ‘기억하라' 는 것이었다(사 44:21; 46:9; 말 4:4).
1. 그들은 그가 흠없고 청결한 하나님이시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자.
"그들로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게 하라.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미케 하라. 거룩함은 대대로 그의 기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그의 거룩함은 그의 영광이다. 그것이 거룩한 천사들이 찬미할 때 매우 중시하는 그의 특성이다(사 6:3; 4:3).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자주 언급하고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성도들을 기쁘게 한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도 거룩하게, 더욱 거룩하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완전하심보다 더 큰 두려움을 주는 것이 없으며, 경건한 자들에게는 그의 거룩하심보다 더욱 위로가 되는 것이 없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것을 기억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감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그의 거룩함이 참여자라는 좋은 표시가 된다.
2. 그들은 그가 은혜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체험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라.
💡30: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1) 우리의 그의 언짢으신 표정이 매우 짧은 동안으로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 하나님의 분노는 사람들의 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 여호와의 분노는
- 죄에 대한 의로운 반응이며,
-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를 이끌어 내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으로 하여금 잘못된 길을 버리고 의로운 길을 걷도록 도와주시려는 ‘은총'의 또 다른 표현이다.
- 그렇기 때문에 그 ‘진노'는 순간이다.
‘잠깐’
- 의미 : ‘눈꺼풀을 깜빡거리다’
즉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던 그것은 눈을 깜빡거리는 정도로 찰나임을 나타낸 것이다. - 이러한 표현은 이어지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란 표현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즉 다윗이 ‘그 노염은 잠간이나'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도리어 정반대의 내용을 표현하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에 더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이루는 것이다.
- 궁극적으로 다윗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여호와의 사랑과 인자하심의 깊이를 보다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 ‘노염' 이 그의 백성의 죄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를 가리킨다면
- ‘은총'은 죄를 회개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여호와의 용서와 자비를 나타낸다.
- 노염 ↔ 은총 ; ‘잠간이요’ ↔ ‘평생이로다’
→ 서로 대조를 이루며 궁극적으로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총성한 은혜를 강조한다.
비록 우리는 영원히 그의 찌푸리심을 받을 만하고, 그는 우리를 사르실 때까지 우리에게 화를 내실 만하며, 또 결코 화해하시지 않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염도 잠간이다"(5절).
우리가 그를 불쾌하게 할 때 그는 노하신다. 그러나 그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쉽게 분노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노하셨을 때 우리가 회개하고 겸손케 된다면 그의 노는 곧 풀리고 기꺼이 우리와 화복 하고자 하신다. 그가 그의 자녀들로부터 얼굴을 숨기시고 그의 은총의 표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시더라도, 그것은 "적은 분노"이며 "잠간"동안뿐이다.
반면에 그는 "영원한 자비로 그들을 모으실"것이다(사 54:7, 8).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 그리고 것이 지겨운 밤일지라도 밤의 암흑 후에는 아침의 광명이 확실히 돌아오는 것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기쁨과 위로가 합당한 때에 곧 돌아올 것이다.
💡 밤이 지나면 태양이 빛나는 아침이 찾아오듯이 여호와께 회개하고 그 죄를 용서받은 자는 죄로 인해 받고 있는 모든 고통과 눈물은 잊어버리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평강과 기쁨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본절 후반부의 내용은 - 다윗의 경험에 근거한 감동적인 고백적 선포라 할 수 있다.
본절은 본시 뿐 아니라 시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다윗이 이같은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크고 영원한 것언지를 실제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은혜의 언약은 그 날의 언약처럼 확고한 것이다. 이 말씀은 때때로 문자 그대로 우리에게 실현되어 왔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했을지라도 슬픔은 곧 끝나고 한숨은 사라진다.
하나님의 노가 오랫동안 계속되는 한 성도들의 울음은 계속된다. 그러나 그것이 잠시에 불과하다면 그 고통도 잠시뿐일 것이며, 하나님의 안색이 회복될 때 환난은 순간적으로 쉽게 걷히고 빛이 선포될 것이다.
(2) 우리는 그이 미소가 매우 감미롭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즉 매우 훌륭하다. 고통 당하는 영혼에게 돌아오는 그의 은총은 죽음에서 벗어난 생명과도 같다. 그것보다 더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의 은총속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든지 간에, 그 은총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생명이고 영적인 생명이며, 영생의 전조이다.
●기도의 찬미 (시편 30:6-12)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다윗이 계속적으로 처해 있었던 세 가지 상황에 대해 알 수 있으며, 각각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로 향한 그의 마음은 어떻게 역사 되었는가. 즉 그가 무엇을 말하고 그리하여 했으며 그의 마음이 어떻게 감동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첫 번째 상태는 우리도 그렇게 되기 쉬운 것이며, 나머지 두 가지 상태는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Ⅰ. 그는 오랫동안 형통함을 누렸으므로 점점 방심하게 되었고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리라는 지나친 확신을 가졌었다(6,7절).
💡 6-7절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울dma이 기숙하게 된 자신의 과거 체험을 삼단계로 나누어 간증한다.
"내가 형통할 때에 내 몸이 건강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대적들로 부터 내게 휴식을 주셨을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나는 내 몸이 병들거나 나의 정부가 교란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그러한 위험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도다."
그는 그를 대적하던 자들에 대해 매우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그의 백성들의 매우 확고한 신뢰를 얻고 있었으며 매우 튼튼한 육신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형통함이 산처럼 견고하다고 생각했었다. (6절)
그러나 지금 그는 이것을 그 자신의 지혜나 꿋꿋함의 덕택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의 덕분으로 돌리고 있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도다"(7절). 그는 그것을(형통함을 지복으로 삼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그의 "천국"으로 간주하지 않고 단지 그의"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산은 평지보다 약간 높은 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이러한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가 초년 시절에 매우 많은 환난을 당했으므로 그 몫을 다 겪어 말년에는 아무런 환난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거나,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의 은총의 표징을 주셨으니 이제 결코 그에게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 같다.
- 우리는 일들이 잘 되어 갈 때 그 상황이 항상 그러할 것이며 결코 변하지는 않으리라는 공상을 갖기 쉽다.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 그것은 날씨가 일단 화창해지면 계속 청명하리라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날씨같이 변하기 쉬운 것도 없는 것이다.
- 우리의 기대가 잘못된 것임을 알았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의 다윗처럼 우리의 어리석은 방심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반성해야 마땅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또 다른 경우에 좀더 지혜롭게 대처하고 우리의 형통함을 즐거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기는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 30: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 다윗은 형통할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이 ‘영영히 요동치 않으리라'고 말하였음을 회상한다.
비록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은혜로 다윗의 산을 굳게 세우셨으나, 그가 교만해지자 당신의 얼굴을 다윗에게 가리우셨으며 그로 인해 다윗은 근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본절에서는 던저 다윗 자신이 여호와 앞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하여 간략하지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물론 다윗은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본절에서 다윗은 과거 자신이 과신에 빠져 스스로 요동치 않으리라고 믿었던 사실을 제시하고있을 뿐이다.
다윗이 범한 죄는 → 바로 자기 자신이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고 말한 데 있었다.
여기서 ‘영원히’ 는 → 자신이 얼마나 지나치게 자기 과신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회상하는 것.
- 이러한 자기 과신은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할 이스라엘 왕이 가장 경계해야 할 큰 죄악 중의 하나였다.
— 왜냐하면 자기 과신은 그가 누리는 개인적 • 공동체적 번영과 안정어 여호와의 선물로 주어진 것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인간적 성취의 결과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신 8:17, 18). - 과거 다윗은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형통함을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생각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라는 그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죄와 교만의 노예라는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 쓰게 되었다.
- 이에 대해 흑자는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만 (self~satisfaction) 에 빠져서 그에게 형통을 주신 분(giver)인 하나님이 아닌 선물(gifts)에만 매달리게 되었다고 묘사한다(Delitzsch).
다윗은 ‘내가’ 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여
→ 자기 자신을 강조. 과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 다윗이 언제 이와 같은 교만한 말을 했었는가?
구체적으로 그 인생에서 어떤 시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다윗이 승승장구하고 있던 어느 시점에서였을 것이다. 본절에서는 그것을 ‘형통할 때에'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영적 위기의 순간은
실패할 때가 아니라 성공할 때요,
가난할 때가 아니라 풍족한 삶을 누릴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30: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 본절은 다윗이 자신이 누리고 있던 번영과 형통이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은혜로 이루어졌던 것임을 깨달은 데서 나온 말이다.
- ‘형통할 때에는 내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이룩한 즐 알고 교만에 빠졌지만 실제 그러한 형통은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다' 라는 고백인 것.
‘나를 산 같이’
- 산 = ‘다윗의 왕국’
- 예루살렘은
- 다윗이 여호수아 이후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여부스 족속을 축출하고 건립한 이스라엘의 수도로 전락적 • 군사적으로 천혜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다.
- 따라서 이곳은 다윗의 승리와 번영, 형통과 영광 등을 상징하는 도시라 할 수 있다.
- 그런데 이러한 내 산 곧 산지였던 예루살렘에 건립된 다윗성과 이와 더볼어 지속된 다윗 자신의 번영은 →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Ⅱ. 갑자기 그는 환난에 빠졌고, 그때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위안과 구조를 간곡히 청하였다.
1. 그는 산은 흔들렸고 그도 그것과 함께 흔들렸다. 그가 점점 방심 상태에 들어갔을 때 그가 조금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마음과 육신 재물로 근심하였나이다."
그의 상황의 모든 변화 속에서도 그는 계속 하나님을 주목했다. 그이 형통함을 하나님의 은총의 덕택으로 돌렸던 것과 같이, 그는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이 곤경의 원인이 되는 사실을 곤경 속에서 관찰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우신다면 비록 다른 재앙이 내리지 않을지라도 선한 사람은 곤경이 처하게 된다. 해가 지면 분명 밤이 오며, 달과 뭇 별들은 결코 낮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 7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
‘주의 얼굴’
-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호의와 은혜의 상징.
특히 본문에서와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얼굴’ 을 가리우셨다
-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호의와 은혜를 중단하셨음을 의미한다.
- 이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그의 삶을 견고히 세웠음을 인식한 다윗에게는 견딜 수 없어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단지 다윗과만 관련된 표현이 아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절망스런 고통과 어려움이 찾아오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리우시기 때문이다.
2. 그 살이 혼들렸을 때 그는 눈을 들어 그 산 너머를 바라보았다. 기도는 모든 상처를 위한 약이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사용했다.
"환난당하는 자가 있는가?" 괴로워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로 기도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얼굴을 가리우셨을지라도 그는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공의 가운데 우리로부터 돌아섰다 하실지라도 우리가 그로부터 돌아서는 것은 가장 큰 어리석음이며 상상 할 수 없을 만한 불의가 될 것이다.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도 기도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8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하나님의 물러가심은 그의 기도를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가 계속 중요시 여기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내용을 읽을 수 있다.
💡 30: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1)부르짖고, 2)간구하기를
- 과거 회상 중이지만 ‘미완료형'
⇒ 다윗의 기도는 일시적이거나 단회적인 것이 아닌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기도였다.
⇒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지켜야 할 자세임을 나타낸다.
다윗의 간구하는 기도의 대상 : ‘여호와여’ ‘주께’
- 다윗이 교만으로 인해 잠시 잊고 있었던 여호와를 시련과 고통을 통해 다시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서 어느새 여호와께로 향해 있음을 잘 보여준다.
- 죽음의 문턱까지 와 있는 다윗은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기도를 들어주시는 유일한 대상이신 여호와께 혼신의 힘을 다해 메달렸던 것이다.
- 이처럼 그의 신앙이 회복되자 → 하나님께서는 그를 긍휼히 여기사 당신의 자비의 지극히 크심을 드러내심으로 그의 육신을 회복시킨 것이다.
(1) 그의 탄원(9절).
💡 30: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 하나님은 그의 사망으로 얻는 것이 없으실 것이라는 사실.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것은 그가 죽음으로써 하나님이다. 그의 나라에 진실로 봉사할 수 있다면 기꺼이 죽겠으나(빌 2:17), 영예의 침상에서 죽는 것과는 달리 병상에서 죽어가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시어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려 하시나이까?(44:12)"라고 말하고 있다.
💡 ‘나의 피’ → ‘피’가 생명의 상징이 아닌 오히려 죽음, 죽음으로 드리워진 생명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됨.
[2] 더구나 그의 영예를 고려해 볼 때 하나님은 그의 죽음에 의해 손실자가 되는 것처럼 보이실 것이라는 사실.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리이까?”
하나님께로 돌아와 성별케 된 영은 그를 찬미할 것이며, 항상 찬미할 것이다. 그러나 흙으로 돌아가는 진토는 그를 찬미하거나 그의 진리를 선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전의 봉사가 티끌에 의해 행해질 수는 없다. 즉 그것은 그를 찬미할 수 없는 것이다. 음부는 침묵의 땅이기 때문에 그 곳에는 계획이나 일함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은 진토에게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다윗은 "여호와여, 만일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내게 대한 약속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가 그 진리를 선포하리이까?"라고 말하고 있다.
기도 속에 있는 가장 훌륭한 탄원은 하나님의 영예로 부터 발췌된 것들이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갖을 때 우리는 살아서 그를 찬미할 수 있도록 생명을 올바르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 본문을 통해 다윗은 생명을 잃은 죽은 몸은 여호와를 찬송할 수도 없고 진리를 선포할 수도 없으니,
여호와를 찬송하고 진리를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는 간구를 올리고 있다.
다윗의 동기
이것은 자신의 병고침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 자신의 생명 연장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의 간구와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인다.
다윗에게 있어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는 간구는
-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 자신의 본래 존재 목적민 여호와를 찬송하고 여호와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즉 그가 하나님께 생명을 구해 달라는 간구를 올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동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다윗에게 있어서 정말로 그를 두렵게 했던 것은
- 그 육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질병이나 그로 인한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 그가 그토록 사모하고 소망하는 여호와를 더 이상 찬양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음을 알 수 었다.
(2) 그의 간구(10절).
그를 용서하시는 긍휼과("나를 긍휼히 여기소서")곤궁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간구하고 있다. 이 두가지 일을 위해 우리는 또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히 4:16).
💡 30: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 본절은 앞선 9절의 내용에 근거해 자신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구하는 내용.
9절에서 여호와께 제시한 논리를 근거로 하여 자신의 기도를 마무리짓고 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의 잘못과 죄악이 얼마나 악한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여호와의 진노가 그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 다윗은 여호와께서 주신 아픔을 통해 겸손을 회복하고
- 본절과 같이 여호와께 긍휼을 간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 속에서
- 과거 자기 과신에 사로잠혔던 다윗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 그는 여호와의 긍휼과 은혜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맡기고 있다.
인간의 기도 그 자체는 응답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
- 만일 여호와께서 그 기도를 들으신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긍휼하심이요 그분의 자비로움 때문이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깨닫고 있었기에 다른 어떤 것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긍휼신 성품에 근거하여 도우심을 간구하였던 것이다.
Ⅲ. 하나님께서 합당한 때에 그를 환난에서 건지시고 그의 예전의 형통함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그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었다"(11절).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렀던 것은 잠시뿐이었고 다윗의 울음은 단지 하룻밤 동안이었다. 그가 거룩한 섭리에 겸손히 복종하여 입었던 베옷은 벗겨졌다. 그의 슬픔은 평정되었고, 두려움은 진압되었으며, 그의 위로는 되돌아 왔다. 또한 그는 기쁨으로 둘러싸였다. 기쁨이 그의 장식물이 되었고 힘이 되었으며, 끈이 사람의 허리에 매이듯, 그에게 꼭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다윗이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때에 번영의 절정에서 환난으로 떨어진 사실이 환난이 얼마나 우리 가까이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기뻐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번명의 상태가 갑자기 회복된 것은 우리에게 울지 않는 것처럼 울도록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얼마나 빨리 폭풍우가 잔잔해지고 엄청난 강풍이 부드러운 미풍으로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의 형편이 이처럼 행복하게 바뀌었을 때 그의 마음 상태는 어떠했는가? 그는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하고 있다(12절).
1. 그의 원망은 찬미로 변하였다.
그는 그것을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삼하 23:1) 그의 "영광으로 하나님을 찬송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기쁨으로 끝까지 띠 띠우신 것으로 간주했다. 즉 그의 하나(우리의 혀는 우리의 영광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에 사용될 때는 더욱 그러하기 때문이다) 영혼(그것은 모든 짐승들보다 뛰어난 우리의 영광으로서, 주를 찬송하는 데 사용되어져야 하고, 그것으로써 우리는 시편에 곡을 넣어 그를 노래해야 하기 때문이다)이 그를 찬송해야 한다. 침묵을 지켜야 하는 무덤에 있지 않는 자들은 산 자의 땅에서 침묵을 지키지 말고 열렬하고 꾸준하며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 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나의 슬픔’을
- 원형의 의미 : ‘머리를 쥐어뜯으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 란 의미의 동사 ‘싸파드’에서 유래.
→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극도의 슬픔을 표현함.- ‘싸파드’ 란 동사가 사용된 대부분의 구절이 사람이 죽었을 때에 거행하는 애도 의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볼 때(창 23:2; 50:10; 삼상 25:1; 삼하 1:12), 다윗이 앓고 있던 질병이 그를 임종 직전의 절박한 상황까지 몰아갔음을 알 수 있.
-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하반절의 ‘내 베옷' 이라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 다윗이 경험했던 ‘슬픔'이 절망의 절정을 표현한 것이었다면
↔ 본문에 나타나는 ‘춤’ 은 기쁨의 절정을 표현함. -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묘사하되 단순히 추상적으로 ‘마음의 기쁨' 이라 하지 않고 마치 그 기쁨이 그의 몸 전체 즉 손과 발 , 팔과 다리까지 퍼진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다윗이 체험한 기쁨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반영함과 동시에,
그가 자신의 기도에 대해 확실한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 즉 그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사실 또한 함축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 당신의 백성의 간절하면서도 겸손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며.
- 전적으로 당신을 신뢰함으로 매달리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의 자리로, 슬픔의 자리에서 기쁨의 자리로 옮겨주신다.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 상반절의 ‘나의 슬픔을' 이 사람의 죽음과 관련된 에도 의식을 암시하는 표현이었듯이, 본문의 나의 베옷을 또한 애도 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는 표현.
- 창 37:34에서 야곱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들짐승에게 먹혀 죽었다고 생각하여 베옷 차림으로 그의 아들을 위해 애통하였다.
- 또한 베옷은 회개하는 자가 자신의 통회하는 마음을 표시하고자 입었던 옷이기도 하다(욘 3:5-8).
여호와에 의해서 슬픔과 희개의 상징 ‘베옷’ 이 벗겨지고, ↔ 기쁨의 측제에 참여하기 위한 ‘기쁨의 옷'이 입혀진 것이다. - 이처럼 그의 의복이 바뀐 이유
-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에 더 이상 애도와 애곡을 위래 사용되는 ‘베옷'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 아울러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 여기서 띠를 띠는 것은 의복을 입는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행동으로 이는 마치 다윗이 기쁨이 넘치는 연회장에 나가기 위해 필요한 준비를 완결하는 듯한 뉘앙스를 지닌다.
- 이처럼 옷과 관련된 표현은
-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에 대해 얼마나 분명하게, 또 얼마나 풍성하게 응답해 주셨는지를 부각시켜 준다.
- 이를 통해 다윗은 그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슬폼이 하나님의 응답으로 사라지고 그의 마음과 심령, 몸과 삶이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게 채워졌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2. 이 찬미는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을 끝까지 지키리라는 은혜로운 결의를 나타내고, 찬미할 새로운 소재가 결코 부족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가 이러한 것이 영원한 업이 될 곳으로 곧 가게 되리라는 은혜로운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는 복되도다. 저희는 항상 그를 찬송하리라." 이처럼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섭리에, 즉 궁핍함과 풍부함, 긍휼과 심판에 대해 노래해야 하며 이 두 가지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 30: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슬픔을 번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고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셨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인헤 눈물과 탄식, 애곡의 장소인 장례식장에서 나와 기쁨과 환희, 춤이 있는 연회장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 다윗의 입슬을 통해서 나올 것은 여호와에 대한 감사와 찬송뿐이었다.
이러한 본시를 마무리하는 본절에는 세 개의 동사가 나온다. 즉
- ‘잠잠치 아니하고'
-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다윗이 앞선 두 동사의 주체를 자기 자신이 아닌 ‘내 영광'으로 진술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 이는 아마도 자신이 느끼는 기쁨과 감사, 그리고 찬양이 그저 외적인 것이나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온 진실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 또 다른 측면에서 본문의 ‘내 영광'이란 표현은 문맥상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로 희복된 다윗의 상태틀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 본문은 다윗이 찬양하고 하나님을 향해 기쁨과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근거가
그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를 희복시키시고 다시금 영광스럽게 하신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낸다.
잠잠하지 아니하고
-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내 영혼이 영원토록, 결코 잠잠하지 아니할 것이다'
- 이는 다윗에게 있어서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건져주신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를 찬양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확연히 느끼게 해준다.
결론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시는 노년에 이른 다윗이 지나온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에게 베풀어 주셨던 여호와의 은혜를 노래한 찬양시이다.
특별히 다윗은 본시를 통해 여호와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또 그 은혜가 얼마나 자신을 성숙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근거해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인생의 번영과 형통은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이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인간들이 여호와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지 아니하고 자기 과신의 교만에 빠지게 될 때
-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그로부터 거두실 것이다.
- 그것은 곧 그 사람에게 있어 엄청난 불행과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 여호와께서는 사랑과 자버가 풍성하신 분이기에 자기 백성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또다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 그러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그분의 노염과 비교할 때 너무나 극진하고 놀라운 것이다(5 절).
이처럼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진솔하게 고백하며 그 은혜를 베푸신 여호와를 소리 높여 찬양한 본시를 통해 모든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 주시는 여호와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찬양을 드려야 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혹시라도 연약함으로 인해 여호와 앞에 범죄하거나 잠시 잠깐 교만하여졌을 때, 고통을 가중시키는 죄의 자리, 교만의 자리에서 빠겨나와,
여호와의 긍휼하심과 은혜로우심을 의지하여
다시 한번 여호와와의 관계를 회복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인생의 목적이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고 평생토록 그분만을 즐거워하는 것임을 깨닫고
평생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역시 다윗처럼 짧은 순간 고통을 겪을지는 모르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베웃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 띠우시는 - 여호와의 은총을 경험하고 - 감사의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