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3월 25일 월요일 묵상구절 시편 41편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Jeehyun 2024. 3. 26. 09:55

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36, 요한복음 15, 잠언 12, 에베소서 5

묵상구절

41: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41:2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41:3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41: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41: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41: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41: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41:8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41: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41:11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41:12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41: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매튜헨리/옥스퍼드

- 빈약한 지경에 처하게 된 왕의 의인 권면과 악인 고발 -

(저자; 다윗 . 분류: 지혜시)

💡제41편은 전5권 150편으로 구성된 시편 가운데 제1권의 마지막 시로서 비탄시적 성격이 강한 지혜시업니다.

즉 본시는 다윗이 와병 중에 맛본 인간적인 배신에 대한 탄식과 그러한 패역한 인간들과는 달리 병상 중에서 드린 자신의 간구에 응답하여 치유의 은총을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 가운데 고백함을 통하여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의 복됨을 깨닫게 하는 지혜시입니다.

그런데 본시의 저작 배경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용적으로 볼 때 시인의 질병과 관련이 있으므로 제6,38.39편과 그 저작 배경이 일치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시는 다윗이 밧세바 간음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와병 중에 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룻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던서 인용하시기도 하였던 9절 내용은(요 13:18) 다윗의 모사이자 신하였으며 또한 친구로서 다윗이 매우 신뢰하였던 아히도벨의 배신을 연상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본시가 다윗의 와병을 기회로 일으켰을 것으로 추정되는 압살롬의 반역 사건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시는 원문으로 볼 때 제1편과 마찬가지로 ‘복 있는'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쉬레'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편 제1권은 그 처음 시와 마지막 시가 다같이 ‘복 있는 자'에 대하여 말하는 지혜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 시의 차이점이라면 제 1편이 복 있는 자의 조건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고 있다면, 본시는 대인 관계에서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시편 제1권의 처음 시와 마지막 시가 ‘복 있는 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은 걸국 시편 제1권의 시들은 다양한 주제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러한 시들은 궁극적으로는 누가 ‘복 있는 자' 인가를 말해 주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시편 최종 편집자의 의도적인 배치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본시는 전체 13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래는 12절로 되어 있었으나 후대에 최종 편집자가 13절을 추가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는 시편 전5권 가운데 제 2,3,4권의 마지막 시들 역시 본시의 13절과 유사한 표현으로 마무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즉 시편 제 1-4권의 마지막 시들의 마지막 절은 모두 각 권을 종결하는 송영으로서 부기된 것입니다.

특별히 제 1, 2, 3권 송영들의 마지막은 ‘아멘 아멘'으로 되어 있는데, 이 두 번의 ‘아멘'은 그 송영들이 그 해당 시의 결론인 동시에 시편 각 권의 결론인 것을 시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1-3절

병상에 누워 있는 다윗 자신과 같이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복 있는 자가 될 것임을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4절

이어 4절은 다윗 자신이 질병을 얻어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인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치유를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5-12절

와병 중에 있는 다윗 자신에 대하여 악담하는 것은 물론 거짓과 간악함으로 자기를 해하려 하는 악한 자들과 그러한 와중에 자기를 위로하고 격려하기는커녕 도러어 자기를 배신하고 대적한 신의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 고발하며 자신의 구원과 공의의 보응을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으로 13절

최종 편집자의 부기로서 시편 제1권을 끝맺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입니다.


●빈약한 자를 돌보는 자의 복 (시편 41:1-4)

이 구절 속에서 우리가 대하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빈한한 자를 돌보는 자에게는 구조와 위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 41: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복이 있음이여’ - ‘아쉬레’

시편의 문을 여는 제1권의 서두인 제1 편 1절을 시작하면서도 사용된 표현.

이를 통해 시편 제1 권인 제1편에서 제41편까지는 ‘아쉬레'로 시작하여 ‘ 아쉬레’로 끝맺어짐을 알 수 있다.

편집자의 의도는?

  • 이처럼 시편 편집자가 제1 권의 시작과 끝을 이같은 표현이 담긴 시로 정리한 것은 분명 제1 권 전체를 하나의 주제로 묶어주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 1) 누가 복 있는 자이며
    2) 어떻게 하는 것이 복된 삶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한 의도하에 제1권을 편집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

1편 1절과 본절의 차이점은? ⇒ 그 조건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 제1편에서 제시한 복 있는 자의 조건
    •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 위에 서서 좌우로 치우처지 않고 살아가는 자인 반면,
    •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복 있는 자의 조건을 찾은 것
  • 본시에서 제시한 복 있는 자의 조건
    • ‘빈약한 자' 즉 사회적 약자를 권고하고 돕는 자인 것.
    • ⇒ 대인 관계에서 그 조건을 찾은 것.

📌그러나 이 양자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자는 →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바 약자를 돕는 일에도 열심을 보일 것이기 때문어다


1. 우리는 다윗이 이런 말씀을 다음 두 가지에 적용시키기 위해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1) 그가 고난에 처하게 된 때에도 자기에게 친절하였으며 자기의 입장에 매우 동정적이었던 그의 친구들, "빈한한" 다윗을 "권고해 주는 자들에게 복을"빈 것이다.

그는 그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동정하고 염려해 주며, 자기에 대한 좋은 생각을 그대로 지니고 존중해 주는 자들을 여기 저기서 만났던 것이다. 그 반면에 그의 원수들은 그에게 너무나 무례하였고 그를 매우 학대하였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기에게 베풀었던 모든 친절에 대해, 특히 그들 역시 고난에 처하게 될 때에 보상해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서, 그들에게 축복을 하였던 것이다. 그의 대적돌이 자기에게 행한 도발은 그 친구들을 그에게 더욱 더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을 뿐이었다.


 💡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 가난한 자 = 단지 경제적 궁핍만이 아니라 가난과 질병, 실패와 절망, 가진 자들의 횡포와 억압 등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는 자', ‘고통을 겪고 있는 자' 를 가리킨다.
  • 다윗은 이렇듯 사회적으로 비천한 상태에 처하여 있는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한다.

‘보살피는 자’

  • 동사 ‘사칼’에서 유래한 단어
    • ‘신중하게 행동하다, 사려 깊게 분별하다’
    • ‘지헤와 관련된 단어.
  • 그런데 본절에서는 이 표현이 사희 윤리적인 것과 결부되어 약하고 가난한 자에 대하여 깊은 관심으로 바라보고 그를 동정하며 돕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 원래 구약 선민 이스라엘은
    • 율법의 가르침을 통해 빈약한 자를 돌보고 구제하는 사회 윤리적 책임과 의무를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았다.
    • 그리고 이같은 명령에 순종하여 약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고 구제하는 사람은 의인 내지는 유력한 자(룻 2:1)로 청하여졌다.
    •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참된 의인, 참으로 유력한 자는 이웃에게 자비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자라는 것이다.
  • 그런데 본절에서는 이를 ‘지혜'와 걸부시킨다. 즉 시인은 이처럼 자비를 행하고 약한 자를 돕는 자가 진정한 지혜자 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2) 혹은 그 자신에게 그는 자기가 불쌍한 자를 돌보았으며, 궁정에서 명예와 권세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을 때 빈궁한 자들의 궁핍과 불행을 인식하고서 저희에게 원조를 제공하였다는 자기를 위한 양심의 증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에 따라 병 중에 있는 그를 강건케 하시며 위로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다.


💡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 시인이 이들 빈약한 자를 돕는 것을 지혜와 관련시키는 이유.

  • 시인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보장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려운 형편에 처한 이들, 약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돌아봄으로써 재앙의 날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잠 19:17에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고 선언한다. 본문의 내용 역시도 이러한 잠언의 교훈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우리는 이 말씀들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여 더욱 일반적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그 약속에 대한 논평이 나온다. "자비로운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을 얻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우리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어떤 긍휼인가?

그것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나 그 신분 상태에 있어서, 곤궁하거나 고통당하는 자를 고려해 주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알뜰하고도 상냥하게 생각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쓰라림을 주목하고 그들의 처지를 탐색하여,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에 대한 관대한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불쌍한 자들을 지혜롭게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우리는 타인들의 빈궁과 고생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본문에서 사용된 말은 우리에게 "마스길"이 되어야 한다.

(2)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이 긍휼을 베푼다면 우리에게 약속되는 자비는 어떤 것인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는(설사 그가 불쌍한 자들을 구원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저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대해 동정적인 관심을 가지며, 그들을 구제함에 있어 신중하고도 분별심있게 행동한다.)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권고 받을 것이다. 그는 정직한 자들의 부활에서 보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이 경건의 가지는 어느 무엇에 못지 아니하게 생명의 약속을 많이 받으며, 그 생명은 지금 누리고 있는 생명이고 또한 현세적 축복으로 보상되고 있는 생명이다. 빈자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은 번성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확실하고도 안전한 길이다. 그와 같은 행위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의 효과적이고도 때 맞춘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을 확고히 믿을 수 있다.

[1] 모든 환난에서.

그는"재앙의 날에 저들을 건지실" 것이니 최악의 시기에도 그들은 무사할 것이며 타인들이 휩쓸려 들어가는 재난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의 진노하심의 날에 숨기우는 자가 있다면 바로"저들"일 것이다.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이와 같이 구별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도 가혹한 취급을 당할 자들과는 구별하여 대우하실 것이다. 그들이 위험 가운데에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어 살려두실 것이다. 만일 가장 훌륭한 자와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생명을 일천 번이나 몰수당한 자들은 "자기들의 생명을 약탈물 대신으로 받게 된다면"그것이야말로 큰 은총으로서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저희가 보다 더 애호되리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사망의 화살이 저들 주위에 빗발치듯 날아 들 때도 저들은 보호되어 살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들의 원수가 그들을 위협하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저들을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않으실 것이다. 우리의 가장 유력한 원수라도 위로부터 받은 힘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의는 인간이나 마귀들을 막론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것들의 악의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시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불쌍한 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구제하고 구조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그러한 선의 중의 한 몫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41:2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그를 지키사’

  • 이는 어려움에서 구조한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전 영역을 감찰하시고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 삶을 지켜보고 보존하고 채워주심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 즉 사회적으로 빈약한 자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는 자는 →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충족한 공급을 받고 살 것이란 의미를 전달한다.

‘살게 하시리니’

  • 단순히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 이를 종합하면 시인은 약한 자를 돌보는 자가 복 있는 자이며 그는 충족하고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 ‘뜻에 맡겨진다’ = 원수의 생각과 의지에 의해 그의 행동이나 뜻, 삶 전체가 예속되는 암울하고 위축된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
  • 본문은 이러한 부정적인 상태가 전혀 없는 삶을 누리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앞선 본문의 긍정적인 의미의 축복된 삶을 향유하는 것에 더하여 완전 무결한 삶을 영위할 것임을 보다 강조

 

[2] 특히 질병에서(3절).

여호와께서 다윗이 오랫동안 아파 누워 있던 "쇠약한 병상에서" 심신 양면으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치셨다." -이것은 매우 겸손한 표현으로 병자를 간호하고 보살피는 자들의 시중을 암시하는데, 특히 아픈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고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병상을 저들에게 편안하도록 손질해 주는 것을 나타낸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병상이라면 반드시 잘 만들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저의 병상 전체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다 손질하셔서 어느 부분도 편하지 않는 부분이 없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병상을 "돌리실"것이니(그 단어는 그런 뜻이다)이는 그것을 흔들어서 아주 안락하게 고쳐 주기 위한 것이다. 혹은 그는 병상을 건강의 침상으로 바꿔 버리실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체적 고통과 질병하에 있는 저희를 강하게 하시고 편안하게 하실 것이라고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셨다. 그는 저를 이 결코 아프지 않으리라고는 약속하지 않으셨고, 그들이 쇠약한 채 오래도록 누워 있거나 병으로 죽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지도 않으셨다. 그가 약속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고통을 인내로써 견디게 하실 것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릴 수 있도록 해 주시리라는 것이었다.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몸이 고통 중에 누워 있을 때에도 영혼은 편안히 거하게 될 것이다.


💡 41:3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병상에서’

  • 어떤 질병으로 인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 뿐만 아니라 질병과 그것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고통과 슬픔으로 인하여 누워 있는 상태.

붙드시고’

  • 하나님께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 자는 어떤 질병이나 곤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원기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의미이다.

문맥상 본문의 표현의 의미

  • 앞선 측복된 상태, 즉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으로 완전 무결한 삶을 사는 자 역시도 때로 곤경이나 질병에 처하기도 하며 삶의 질고로 낙담할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한 것,
  • 그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건지시고 회복시키실 것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고쳐 주시나이다 (’고쳐 펴시나이다’)

  • 이는 아픔과 슬픔에 빠져 있는 병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기력이 완전히 희복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특히 슬픔과 아픔으로 누워 있는 그 자리까지 ‘고쳐 펴주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상하심과 친절하심을 강조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다.
  • 완료형
    • 본시의 저자 다윗이 지난날 이미 심한 질병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고침 받은 사실을 회고하면서 이와 같이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Ⅱ. 이들 약속에 의해 지시받고 고무된 다윗의 기도(4절).

"내가 말하기를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우리가 기도문을 기록해 주는 것은 유익한 일이니, 이는 우리가 우리 기도에서 말했던 것을 우리 행위에서 철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41: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 앞선 1-3절은 번약한 지경에 처하게 된 왕이 의인들에게 그들이 약한 자를 권고하고 돌아볼 때 주어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권면하는 내용을 다루었다.
  • 이제 본절은 왕이 초점을 자신에게 맞춰 현재 여러 가지 재앙과 슬픔, 그리고 질병의 고통을 당하는 자신의 형편을 토로하고 이것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고백하며 겸허하게 회개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1. 그의 겸손한 청원.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는 엄격한 공의의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 할 줄 아는 자로서 자비에 호소하고 있다. 빈한한 자들에게 긍휼을 보였던 가장 선한 성도들조차도 하나님을 그들의 채무자로 삼지 않았으며, 그의 자비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 매 아래 있을 때에는,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친절하신 긍휼에 위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호와여, 내 영혼을 고치소서." 죄는 영혼의 질환이며, 용서해 주시는 긍휼은 그것을 고쳐 주신다. 또한 새롭게 하는 건강보다도 이 영적인 치유를 더 열망해야 되는 것이다.


💡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 이처럼 일반적인 의미의 자비를 구하는 요청에 이어 시인은 자신의 범죄 사실을 고백하고 그로 인한 영혼의 치유를 간구한다.

먼저 시인은 자신의 범죄 사실을 고백한다. 이렇듯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이유는

  • 그가 현재 번약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 ‘자신의 범죄 때문임을 자각한 결과이다.
  • 특벌히 시인은 자신의 범죄 사실을 고하면서 ‘주께' 란 표현을 통해 자신이 범죄한 대상이 다름아닌 하나님이라고 고한다. 그러나 이는 그가 사람에게는 아무런 범죄를 짓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사람과 상관없어 하나님께만 범죄했다는 것도 아니다.
  • 이는 모든 범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지 않은 반역 행위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2. 그의 참회의 고백.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옵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은 치료를 필요로 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비참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며,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눅 18:16).

이것은 어떤 특정의 대범죄 행위와 관련을 갖는게 아니라 그의 많은 나약한 죄, 즉 그가 병으로 자기 앞에 나열하였던 나약함이 죄와, 그 결과 "내 영혼을 고치소서"하고 기도하게 만든 두려움과 전반적으로 관련된 것 같다.


💡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내 영혼을 고치소서’)

  • 고치소서 : 이는 본래 육신적 질병의 치료를 의미하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기본적인 의미에 더하여 죄에 대한 용서를 통한 치료와 회복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를 앞의 3절과 결부시켜 보면 사람의 육신적 질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 곧 인간의 죄를 용서하셔서 그 영혼까지도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라는 신앙 고백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악한 대적과 하나님의 위로 (시편 41:5-13)

다윗은 그가 아팠을 때에 자기를 향한 원수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종종 호소하고 있는데, 그들의 행실은 매우 야만적이어서 그에게 슬픔을 줄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가 먹고 마실 것에 독약을 넣거나 그에게 병들 만한 것을 주거나 하는 따위의 현대에나 볼 수 있는 정도의 악함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가 아플때에 저들은 그에게 무례한 짓을 가하였던 것이다.(5절). "나의 원수가 내게 악담하나이다." 그들은 이로써 그의 심령을 비통하게 하고 그의 명성을 무너뜨리며 그의 세력을 몰락시킬 심산이 었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찾아보자.

Ⅰ. 다윗에게 대한 그의 원수들의 행동은 어떠했는가?

1. 저들은 그의 죽음을 갈망하였다.

"저가 어느 때에나 죽을꼬," 그와 더불어 "그의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그가 누린 생활은 안락하지 못한 불편한 생활에 불과하였는데도 저들은 그것조차 못마땅하여 다윗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가 누린 생활은 비록 편하지는 못하였으나 유용한 생활이었다. 어떤 사연으로 보더라도 다윗은 자기 나라를 최대로 빛낸 보석이었으며 그 나라의 복이었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다윗을 메스꺼워한 자들이 다소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저런 자는 땅에서 없애 버려라"고 소리치면서 바울을 혐오했던 것과 같다.

우리는 어떤 자의 죽음도 원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쓸모 있는 자들이 유용하다고 해서 그들이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 자체에 옛 뱀의 독액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그가 획득한 이름과 명예를 시샘하였으며, 만약 그가 죽는다면 그런 명성과 명예가 그와 함께 티끌 속에 묻히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오산을 했는지 보라. 즉 그는 그의 세대에게 봉사를 한뒤에 죽었다(행 13:36). 그러나 그의 이름도 사라졌는가? 아니다. 그의 이름은  성문서 속에서 오늘 날까지 살아서 활약하며 시간의 끝까지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직한 자에게 대한 기억은 복되며" 축복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 41: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 다윗이 병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원수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더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도록 지속적으로 악하고 해로운 말, 다윗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쓰라린 저주와 악담을 일삼았던 것.

시인의 파멸을 고대하는 악인의 악한 마음의 상태.

  • 악인들의 집요함.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 ‘이름’ : 단순한 이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을 지닌 대상의 인격과 생명, 존재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
    • 따라서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 병으로 인해 빈약한 처지에 놓인 시인의 죽음을 고대하는 또 다른 형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름이 소멸한다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이름을 지닌 대상의 영향력이나 기억이 소멸한다는 의미 역시 함축한다.
    • 성경에서 이름이 소멸하여 기억됨이 없다는 것은 → 하나님의 완전한 저주와 징계의 결과로 인식되었으며 이는 그 당사자에게 있어 가장 수치스런 최후라 할 수 있다.

2. 그들은 그를 비방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다 주워 섬겼다(6절).

"저가 나를 보러 와서는(병자를 방문하는 것은 이웃사람이 갖는 일편의 친절심으로 언제나 간주되었으므로) 거짓을 말하나이다. 그는 우정을 가장하며, 그의 볼 일이 내 병을 슬퍼하고 나를 위로하는 것인 척합니다. 그는 그토록 대단히 불편한 나를 보게 되어 매우 안됐다고 말하며 내 건강을 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은 입에 발린 아첨이며 허위입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는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불평들을 하는데 그것은 또한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통해 보건데 옛날도 오늘날보다 더 나았던 것 같지도 않다. 다윗의 친구들은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그들의 심중에는 그에게 고백한 것과 같은 애정이라곤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그것 말고도 더 나쁜 것이 있었다. 즉 그들이 그를 보러 온 것은 해를 입히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들이 그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불쾌한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으며 또 그를 보기 싫은 인물로, 가소로운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자신들의 논평을 곁들여서 타인들에게 묘사하고자 함이었다. "그의 중심(마음)에 간악을 쌓으며"만사를 악의로만 해석한다. 그리고는 자기 동료들에게 가서 이 일을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말 할수 있도록 한다. "그들은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렘 20:10)하는 것이다.

저들은 만약 그가 자기의 병고에 대해 심하게 호소를 한다면 그의 겁약함을 들어 비난할 것이었고, 그가 전혀 불평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의 우둔함을 들어 비난할 것이었다. 만약 그가 기도하거나 좋은 권고를 한다면 저들은 그의 말을 우수개로 삼고 그것을 "공념불"이라고 할 것이었다. 또한 만일 악인들이 그의 앞에 있는데도 그가 선을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그들은 이제 그가 병들었으므로 자기 신앙을 잊었다고 말할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자기 악의로 불의를 모아들이는 자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 41: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거짓을 말하고'

  • 시인이 병중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도 없는 위로의 말(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쓸데없는 소리, 알맹이와 진정한 의미가 빠져버린 위선적 소리)을 전하는 악인들의 위선.

악인들의 악행에의 적극성.

다윗의 원수들은 혹독한 질병과 죄책감으로 고통에 시달리며 무기력하게 병상에 누워 있는 다윗을 긍휼히 여기기는커녕 다윗 앞을 떠나서 다윗이 병들고 고난당하는 것에 대해 온갖 거짓된 말과 악독한 말을 유포하였다.

이들이 밖에 나가 광포한 것은 8절에 근거해 볼 때 아마도 다윗이 하나님의 심관을 받아 버림을 당하였으며 그로 인해 더 이상 국정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하였다는 유언비어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시인의 악인에 대한 고발은 1, 2절의 축복 선언문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

  • 본시를 시작하면서 시인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으며 재앙의 날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며 온갖 풍성한 측복을 누리도록 하나님이 그를 지키실 것임을 선언하였다.
  • 그런데 본절에 언급된 시인의 원수는 이와 정반대로 행하는 자였다.
    • 즉 그는 빈핍한 중에 처한 시인을 긍휼히 여기기보다 이를 기회로 삼아 상대를 완전히 파멸에 몰아넣으려는 궤계를 마옴에 채우고 온갖 거짓과 악독을 유포하는 자였다. 따라서 본절은 원수의 사악함을 고발하고,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멸에 던져질 것이란 의미를 함축한다.

3. 그들은 그가 이 병에서 절대로 회복하지 못할 것이고, 또 자기들이 그에게 씌운 악평도 결코 떨쳐버릴 수 없으리라고 기대하였다.


💡 41: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 본절에서 악인들의 행동을 묘사하면서 사용한 동사 표현은 모두 미완료형이다. 이는 악인들이 처참한 형편에 처한 시인을 끊임없어 모해하고자 도모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준다.

‘하나같이’

  • 병상에 누워 딱한 처지에 빠진 다윗이 어느 한 개인으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는 것.
  • 이런 사실은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본절 서두에 ‘함께’, ‘다같이'로 번역이 가능한 부사 ‘야하드'가 나온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 대적들은 자신이 빈약한 지경에 빠진 기회를 틈타 야합하였다. (모두 다)

"그들은" 서로의 귀에 대로 은밀히 말하면서 "다 그에 대하여 수군거렸으니," 이것은 그들이 드러내 놓고 말하면 창피하기 때문이었고, 또 그렇게 한다면 자기들이 논박당할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수군거리는 자비방하는 자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나쁜 자들로 간주된다(롬 1:29, 30). 그들은 그를 치려는 음모가 탄로되어 실패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수근거렸다. 그들의 수근거림에는 우리가 말하는 속삭임은 조금도 없고 거짓말이 있거나 아니면 진행되고 있는 모종의 위해가 있었다. 그들 수군거리는 자들은 다윗에게 해를 끼치려고 도모하였다. 저들은 그가 속히 죽을 것이라고 단정하고서 그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 놓은 모든 방편을 어떻게 하면 파괴할 수 있을까 궁리하며, 어떻게 하면 그가 만든 모든 법안의 실시를 막고 지금까지 해 왔던 그의 모든 일을 무효화시킬 수 있을까 하고 부심한다. 다윗은 이것을 "자기를 해하려고 꾀하는 것." 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목적을 획득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8절)

"저들이 이르기를 악한 병(벨리알의 병)이 저에게 들었다고 하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그의 이름에 덮어 씌운 비난이 그의 명성에 달라 붙어 그것과 함께 파멸하기를 소원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저들은 Fortiter calumniari, alquid adhaerebit-즉 많은  비방을 퍼부어라. 그러면 어느 것인가가 틀림 없이 꽂힐 것이다라는 근대의 격언을 적용한 셈이다.

"그가 현재 걸려 있는  병은 확실히 그를 끝장내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병은 모종의 크고도 흉악한 법죄에 대한 벌인데도 그는 자기 죄에 대해서 회개치 않을 것이고, 또 그것은 외양으로는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그가 벨리알의 자손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 병은 악한 자 곧 벨리알이라 불리우는 사탄(고후 6:15)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이들이 하는 애매한 담화 방식에 따르면) 악마적 질병이다.  그러므로 그 병은 그에게 있을 것이라. 이제 저가 눕고 그의 질환이 너무 진행하여 그가 병상을 떠나지 못할 만큼 기승을 부리게 된 이상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우리는 그를 제거하게 될 것이며 그의 애호물을 노획하여 분배할 것이다."


 💡 41:8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 시인이 당면한 고통스런 상황을 하나님의 저주와 버림으로 인한 저주스런 질병으로 규정한 악인들은 그로 인해 시인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 이러한 악인들의 무고하고도 파괴적인 말들은 시인인 다윗이 다스리는 이스라엘 백성듈의 마옴을 이반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 결국 이러한 헛된 풍문을 퍼뜨림으로 악인들은 시인을 더 큰 수렁에 빠뜨리고 인본주의적 욕심에서 기인한 자기들의 악한 목적을 성취하려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선량한 자들이 아플 때 그들이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그들의 죽음을 바라는 자들도 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그들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는 귀하게 여겨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계 11:10).

4. 그가 아주 큰 신뢰를 하였던 자 중에서 그의 원수들에게 붙어 그의 원수 중 어느 누구에 못지 않게 그를 학대한 자가 특히 하나 있었다(9절).

"나의 가까운 친구."


💡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 시인의 배신감…

‘내 떡을 나눠 먹던’

  • 식탁 교제를 나누는 대상은 그만큼 허물어 없음을 나타낸다.
  • 그런데 그토록 친근하고, 그토록 신뢰했고, 그토록 허물없이 지냈던 그가 자신을 향하여 배반의 칼을 들었던 것이다. 이는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다윗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음이 분명하다.

아마 그는 자기와 흉금을 털어 놓던 친구이자 나라의 총리대신이었던 아히도벨을 지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윗은 그를 배반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에게 확고한 자라도 신뢰하였으며 자기 대적을 처리함에 있어 그의 의견에 많이 의존하였다. 또한 그는 "다윗의 떡을 먹었다." 즉 다윗은 그와 절친하였고 그와 식탁에 같이 앉아 먹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를 부양하였고 생계를 유지시켜 주어서 은혜에 있어서나 이익에 있어서 그로 하여금 자기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궁으로부터 생계를 꾸려 나가는"자들은 "왕의 수치당함을 참아보지 못하는"것으로 생각하였다(겔 4:14). 하물며 왕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일을 어찌 행하겠는가? 그럼에도 다윗의 이 비열하고도 배은망덕한 친우는 자기가 먹었던 모든 떡을 기억치 못하고 머리를 쳐들었던 다윗을 향해 "그의 발꿈치를 들었던"것이다. 그를 버리고 도주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모욕을 가했으며, 발로 차고 그를 밀쳐내고는 대신 자기가 들어 앉으려고 하였다. 자기들에게 베푼 호의나 자기들에게 둔 신뢰를 고맙게 여기지 않는 자들은 참으로 악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설령 그런 자들로부터 부당한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지 말자. 다윗도 그랬고 다윗의 자손도 그러했던 것이다. 다윗은 여기에서 영으로, 배신한 가룟유다에 대해 말하였다.

우리 구주께서도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한 조각의 떡을 유다에게 주셨으니, 이는 "내 떡을 먹던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한 성경(요 13:18, 26)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발꿈치를 들었다’ = ‘배신 행위’를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

예수께서는 제자 가룟 유다의 배반을 에언하면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18)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본절의 내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우리 자신은 이처럼 이기심을 품고서 솔직하지 못하게 하나님을 대하며 처신한 적은 없었던가? 우리는 매일 "그의 떡을 먹으면서도" "살찌매 발로 찬" 여수룬 같이(신 32:15), "하나님께 대하여 발꿈치를 들고 있다."

Ⅱ. 다윗은 자기를 향한 그 원수들의 무례하고도 심술궂은 행위를 어떻게 견디어냈는가?


💡 앞선 5-9절은 번약에 처해진 시인이 원수들의 적대 행위와 가까운 자돌조차 자신을 배신하는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이어지는 본절 이하 12절은 시인이 이들 원수들에 대해 복수할 기회를 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다. 당시 병상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다윗은 사람들에게서는 일말의 희망이나 위로는커녕 조롱과 멸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다윗은 사람들로부터 당한 오만가지 굴욕과 핍박과 멸시와 조롱을 뒤로한 채 공의의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아뢰기 시작한 것이다


1. 그는 저들의 기대가 허사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그는 저들에게 일언반구의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로 향하였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저희가 내게 자비를 베풀지 않읍니다."(10절).

다윗은 자기 죄와 관련하여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4절)란 기도를 드렸었는데 여기서 다시 그의 원수들의 모욕과 관련하여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적합한 기도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 자체에 모든  불평의 호소에 대한 시정책을 내포하고 있다. "저들은 나를 넘어뜨리려고 기도합니다만 당신께서는 이 쇠약의 병상으로부터, 저들이 내가 다시는 이 병상에서 일어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이 쇠약의 병상으로부터 나를 일으키사 나로 하여금 저희의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게 해 주소서(어떤 이는 그렇게 해석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다윗이 행동이었기 때문이다(시 7:4; 35:13). 선량한 사람은 자기에게 해로왔던 자들에 대해 자기가 아무런 원한도 품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기꺼이 좋은 일을 행하려고 한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원하기까지 한다. 혹은 "나를 일으키사 내가 임금으로서 저희를 나의 정당한 불쾌의 표시 아래 두고 조정에서 추방시키며 이후로는 내 상을 저희에게 금하도록 하소서." 이것은 타인에게 대한 경고를 위해 필요하고도 정당한 조치이다. 이 기도에는 그리스도의 올리우심에 대한 예언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일으키셔서 그와 그의 백성에게 행한 모든 잘못에 대해, 특히 유대인들에 의한 잘못에 대해 그로 하여금 공정한 복수를 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며, 그들은 오래지 않아 완전히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 41: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주 여호와여’

  • ‘예흐와'는 하나님외 신명 가운데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설성을 강조할 때 주로 사용되는 명칭.
  • 다윗이 이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언 약 관계를 상기하며 고통의 상황 속에서 구원을 요청하기 위함이다.
  • 그러나 이같은 신명을 사용한 것은 앞서 자신이 그토록 친근히 대하고 신뢰하며 허물없어 지내던 자들조차 자신을 배반하는 상황을 감안한 것이기도 하다. 즉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호칭에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어 자신을 대적하고 배신하는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신실하게 자신을 대하실 것이란 기대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1. 회복의 소망을 피력.
  2. 악인들에 대한 보수의 기도를 올림.
    1. 회복의 소망을 피력한 데 이어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라고 간구한다.
    2. 시인이 지금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에 매여있는 것인가?
      1. 아니다.
        본시의 저자 다윗이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굳게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르고 온전하게 세우는 직임을 감당하는 차원에서 풀이해야 한다.
      2. 즉 이들 악인들은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자신을 참소하고 백성들의 민심을 이반시켜 자신들의 악한 인본주의적 욕망을 성취하려 하였다.
        이런 자들을 공의로 심판하지 않는다면 선민 공동체의 정체성, 그리고 선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의 직임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3. 이로 인하여 시인은 하나님 앞에 악인들에 대한 보수의 기도를 올린 것이다.
    3. ‘보복하게 하다’ - 원형은 ‘솰렘’(완성하다, 회복하다, 보복하다)
      1. 여기서 사용된 ‘솰렘’ 은
        1. 단순히 완전한 보복을 감행하고 대적들을 멸절시킨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2. 선민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완전을 하나님 앞에 구현한다는 의미도 지닌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2.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비록 다윗이 병상에서 투병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솰롬’ 즉 완전함 가운데 세우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해야 할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3. 그래서 그는 자신의 회복과 더불어 이들 원수들의 악행을 근절시킬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는 저희의 기대가 무너질 것을 확신하였다(11절).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와 내 이익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니이다."

저희는 그의 사망을 염원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자비를 통하여 회복되고 있음을 발견하였고, 이것은 그가 회복되는 위안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1) 그것은 자기 대적에게 실망을 주는 것이 된다. 그들은 벼슬 떨어진 닭같이 풀이 죽을 것이며 비참할 정도로 수치스럽게 될 것이므로 저희의 실망에 대해서 그들을 나무랄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 일을 가지고 스스로 불평할 것이다. 비록 우리 원수의 타락을 기뻐해서는 안 되나, 우리를  해하려는 저희 계획의 좌절은 기뻐할 수 있다.

(2) 그것은 다윗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표상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에게 은총을 주셨고 앞으로도 계속 은총을 베푸시리라는 데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된다.

우리가 개인적이든 공적이든 어떤 자비로운 일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식별하게 되는 때에, 그 은총은 배가되고  더 감미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 41:11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 본절은 하나님께서 시인의 기도에 응답하사 원수들에게 더 이상 굴욕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기뻐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라는 고백이다.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 본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원수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며 승리케 하실 것임을 선취적 신앙으로 고백함과 동시에 자신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감사의 고백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 자신에 대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에 대한 확신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 체험에 기초한 것이다.
     ‘내가 알았나이다’(야다으’)
    • 단순히 머리로 깨우치는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경험에 근거한 체험적 지식,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지식을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시인은 이같은 표현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실 사랑이 너무나 분명한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3. 그는 하나님께 의존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악한일에서 그를 이와 같이 건져내셨고 복받은 바울처럼 "천국에 들어가도록 그를 구원해"주셨던 것이다.(딤후 4:18).

"주의 은총의 열매로 나를 총애해 주시며 내게 대한 그 은총이 계속되도록 나를 유자격자로 만들어 주시므로, 주께서 나의 완전함 중에 나를 붙드시기 위해 주의 얼굴 앞에 나를 세우시며, 주의 눈이 영원히 내 위에 있나이다."

혹은 "주께서 주의 은혜로써 나의 완전함 중에 나를 붙드시는 고로 나는 주께서 주의 영광으로 그 얼굴 앞에 나를 영원히 세우실 것을 아나이다."


 💡 41:12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나를 온전한 중에’

  • 온전한 중에 = 삶에 있어서 모든 축복의 조건이 다 갖추어진 상태.
  •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현재 처한 비참한 상태, 번약하고 곤궁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확신하는 표현이다.

붙드시고

  • ‘손으로 잡다, 견고히 붙잡다, 지속하다’
  • ‘타마크’ 동사 : 앞선 2절에서 자신을 보호하사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말라는 기도가 응답될 것임을 확신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또한 시인이 확신하는 바 하나님이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고(10절) 기뻐하신(11 절) 결과라 할 수 있다.

영원히 주 앞에

  • 이에 더하여 시인은 이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를드실 뿐 아니라 영영허 하나님 앞에 세우실 것임을 찬양한다
  •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도록 자신을 붙잡아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의 고백.
  • ‘주 앞에’ (’얼굴’)
    • 마처 시인이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는 것 같은. 한 개인이 다른 어와 더불어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은 인격적인 만남의 의미를 함축한다.
    • 이러한 표현을 통해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밝힘으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대적들의 비난과 비방의 말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영허 당신의 면전에 세우실 것을 노래한다.

세우시나이다

  • 이러한 표현은 - 대적들이 시인을 향해 내뱉었던 비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라리로다(8절)’란 비난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 시인은 이같은 표현을 통해 이들 악인들의 비난이 근거 없는 거짓말임을 하나님께서 입중해 주실 것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 시인은 이에 ‘영영히'라는 표현을 추가하여 대적들의 중상 모략이 전적으로 그릇된 것임을 보다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이 노래하며 간구하는 바 그의 구원과 대적들의 위협으로부터의 승리,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는 은혜는 과거 다윗 개인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절실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하나님의 세우심을 힘입어 영영히 살아가야할 우리 성도둘에게도 절실히 요구되는 삶이기도 하다.


(1) 평판이 높은 중에 우리가 고난을 당하게 되는 때라도 언제든지 주요 관심은 우리의 완전성에 있어야 된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우리 명성의 보존이란 문제를 하나님께 즐거운 마음으로 맡길 수 있게 된다. 다윗은 만약 자신의 순전성을 굽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 자기 원수들이 승리를 거둘까봐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2)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완전성 안에 붙잡아 주시는 동안만 자기 완전을 유지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그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들 자신에게 맡겨져 방치된다면 우리는 넘어질 뿐만 아니라 사라져 없어지고 말 것이다.

(3) 우리가 아무리 약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완전함 중에 붙드실 수 있으시며, 만약 우리가 우리 순수성의 보전을 하나님께 위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된다.

(4)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항상 돌보아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완전성을 붙들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눈은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그로부터 떨어져나가 방황하게 될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지금 저희의 완전한 중에 붙들고 계신 자들을 자기 얼굴 앞에 영영 세워두실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대면하고 그를 향유하게 하여 행복하도록 만드실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4. 본 시편은 엄숙한 찬가로, 즉"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하나님께 대한 찬미로 끝맺는다(13절).


 💡 41: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이 구절이 본 41편에 특별히 귀속하는지(만약 그렇다면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쳐 준다. 즉 우리가 은혜를 통하여 영광에 이르도록 보존해 주시리라는 신앙적 소망은  아무리 큰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며 우리 입을 영원한 찬양으로 가득 차게 하는 데에 모자람이 없으리라는 것이다)아니면 이 42편에서 끝나는 것으로 사려되는 시편 제 1권의 결론부에 부착되는지는(시편 72편, 89편, 106편에 추가되어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우리가 알파이신 하나님을 오메가로 삼을 것과 모든 선한 사업의 시작이신 그를 그 끝으로 삼을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받는 교훈은 아래와 같다.

(1) "여호와, 이스라엘이 하나님."

즉 자기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신으로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위대하고 인자한 일들을 행해 오셨고 더 많고 더 좋은 것들을 예비해 두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 여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이 단순히 사적인 선물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모두가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고 있는 축복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본절에는 지금까지 말한 모든 교훈의 내용들이 어느 한 개인을 향한 교훈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모두를 향한 교훈이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본문은 이러한 하나님을 향하여 다윗과 온 이스라엘이 하여야 할 일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2) 영원한 하나님이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

즉 "영원부터 영원까지" 자기 존재와 축복을 가지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 여기서 사용된 ‘영원’

→ 오늘날 우리의 개념에서 이해하고 있는 ‘영원’ 이 아니다.

히브리어에서 ‘올람’은

  • 시간의 영속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 시간의 ‘반복이나 지속'의 개념도 지닌다. 본절에서는 전자의 의미와 함께 후자의 의미도 지닌다.

따라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라는 말은

  1. 하나님이 영원히 찬양받으설 분임을 선포하는 것임과 동시에
  2. 매일의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승리를 영위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의 의미도 함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아멘, 아멘"하고 두 번이나 되풀이 하면서 끝을 맺는 일에서 시사해 주는 대로 깊은 애착심과 심령의 열성으로써 이 일을 행하라는 것. 현재에 그렇게 될뿐더러 영원무궁토록 그러하리라. 우리가 그 일에 "아멘"을 말하니,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아멘"을 말하게 하소서!


💡 ‘아멘’

  • ‘아만’에서 유래 (믿다, 진실하다, 확실하다)
  • 언급된 내용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더불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기원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문에 반복적으로 사용된 ‘아멘' 은

  •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하는 일은
    • 어떤 경우에도 계속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었다.

결론

 💡 이상에서 살피본 본시는 다윗이 병상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이처럼 번약한 중에 처하였을 때 악인들과 세상 사람들의 행태를 지적하며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할지 백성들을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지혜시이다.

이러한 본시 가운데는

  1. 세상에서 횡행하는 악인들의 사악함 및 인간의 배신과 이와 대조되어 더욱 빛을 발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2. 뿐만 아니라 의인이 받게 될 축복과 악인이 당할 보복에 대한 시인의 신념도 기원의 형태로 잘 표현되고 있다.

→ 즉 본시는 인간 세상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내용임과 동시에 이러한 모순된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희망을 둔 성숙한 신앙인의 자기 고백인 것이다.

이러한 본시가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곡된 현실을 적시하면서도 그 현실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시인의 육성이 시인과 동일하게 모순되고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 험겹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나아같 길을 보여주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