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39, 요한복음 18, 잠언 15, 빌립보서 2
묵상구절
44:1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44:2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44:3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44: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44: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44: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44:7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44:8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44:9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44:10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44:11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44: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44:13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44:14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44:15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44:16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44: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44:18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44:19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44: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44:21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44: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44: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44: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44:25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44:2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매튜헨리/옥스퍼드
-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 선민의 구원을 호소하는 민족 애가 -
(저자: 고라 자손, 분류: 민족 애가)
서론
💡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표제가 붙은 제44편은 시편에 나오는 총 여섯 편의 민족 애가(44,60,74,47,80.90편) 중의 하나입니다.
형식
민족 애가
- 그 형식에 있어서는 비탄시와 유사하나 비탄의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라는 점에서 개인 비탄시와 구별됩니다.
배경
본시의 배경이 되는 민족의 위기가 과연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시의 배경에 대해서는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과 포로, 모압과 암몬의 군사적 위협으로 인한 여호사밧 시대의 위기(대하 20:4-13) 등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본시의 내용이 히스기야 시대의 국가적 위기 곧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공으로 말머암아 온 유다 땅이 초토화되고 예루살렘마저 함락의 위기에 놓였던 때(왕하18:13-19:37)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과 시편 제2권의 편집 시기가 B.C. 970-610년경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볼 때 B.C. 701-699년경의 산헤립의 남유다 침공 사건을 그 배경으로 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편 성경 시편에 나오는 민족 애가는 대부분 그 비탄의 원인이 민족의 범죄에 있습니다. 그러나 본시와 제60편만은 그 원인이 민족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 단순한 이방의 침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본시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시인의 절대적인 신앙과 자기 민족에 대한 뜨거운 민족애가 구구절절이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진솔하고도 절박한 표현을 통해 강하게 표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본시는 이스라엘의 열조와 맺은 언약에 따라 선민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과 주의 도를 버리지 아니하겠다는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선민 자체외 순종을 근거로 하는 구원의 호소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저자
본시 저자에 대해서는 표제에 언급된 대로 고라 자손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히스기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본시는 앗수르 산헤립의 침략에 당면한 허스기야의 대응이 기록된 왕하 제 18.19장과 상황적으로 충분히 연결되기 때문에 허스기야가 저자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표제에 나오는 ‘고라 자손'은 이 노래를 지은 자가 아니라 부른 자가 된다. 그러나 이런 견해보다는 성전 찬양단으로 음악적•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히스기야 당시 고라 자손이 본시를 지은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할 듯하다.
즉 히스기야 시대의 고라 자손들이 민족 멸절의 위기에 당면하여 히스기야가 나타낸 면모를 보고 히스기야의 관점에서 만든 노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시의 배경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산헤립의 일차 침입보다는 이차 침입 당시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왜냐하면 본시에는 민족의 멸절 위기에 직면하여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신앙을 잃지 않았음이 언급되어지는데, 제1 차 앗수르 침략 당시에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은 이러한 신앙적 면모를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앗수르의 제1 차 침략은 북이스라엘 멸망을 목격한 히스기야 왕이 애굽을 의지하여 앗수르를 견제하려 한 데 대한 앗수르의 보복 전쟁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사실 이는 궁국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는 남유다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한편 앗수르의 제1 차 침략에서 뼈저린 패배를 맛본 히스기야는 그 이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회복하여 앗수르의 제2차 침략 때에는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그분께 문제의 해결을 간구하였다.
본시에는 절박했던 상황을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해결하려는 이러한 히스기야의 신앙적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개요
본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 1-8절
-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베푸신 온혜 곧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신 은혜를 회상하며 오직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 선민을 압제하는 자들을 대적하여 승리를 거두겠다는 신앙 고백.
- 9-16절
- 하나님께서 선민을 유기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방 민족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현실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내용.
- 17-26절
- 하나님의 법에 대한 선민의 순종의 사실에 근거하여 신속하게 선민을 고난과 압제당함으로부터 구속하여 주시기틀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본시는 왕의 독창(solo)과 백성들의 합창(chorus)이 화답 형식으로 구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주어가 ‘나'인 곳(4-6,15,16절)은 왕이 노래하였던 부분이고, 주어가 ‘우리'인 곳(1-3.7-14,17-23절)은 백성들이 노래를 불렀던 부분이며, 마지막 부분(24-27절)은 왕과 백성들이 함께 노래틀 불렀던 부분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옛날의 자비를 감사함 (시편 44:1-8)
"마스길" 즉 "교훈의 시"라고 표제가 붙은 거개의 시편은 슬픈시라고 보는 자들이 있다. 그 이유는 고난이 교훈을 주며 심령의 슬픔은 훈계에 대한 귀를 열어 주기 때문이다. "주께서 시련을 내려서 가르쳐 주시는 자는 복된 자이다."
이 구절에서 교회는 비록 현재 유린당하고는 있으나 그 승리의 날들을, 즉 하나님 안에서 누렸던 개선의 시절과 교회의 대적에게 거두었던 승리의 시절을 상기하고 있다. 이것은 본문에서 광범위하게 언급하고 있다.
- 현재의 불행을 더 뼈저리게 하는 일로서, 승리의 월계관을 줄곧 써 왔던 자들의 목에 걸린 굴종의 멍에는 그들을 더욱 무겁게 내리누르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불쾌를 표시해 주는 증거는 그의 은총을 나타내는 표상에 오래도록 익숙해 왔던 자들에게는 더욱 비탄스런 일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렇지만 하나님은 다시금 저희의 포로됨을 돌리키시고 자비로써 저희에게 돌아오시리라는 것을 희망으로 삼도록 하라는 격려이다. 따라서 그는 기도와 안락한 기대를 이전의 긍휼하심에 대한 자기 기록과 뒤섞고 있다.
다음 사실에 대해 살펴보기도 하자.
Ⅰ.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해 이전에 베푸셨던 큰 일에 대한 저들의 기념.
💡 44: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하나님이여’(엘로힘)
- 본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신명인 ‘엘로힘’, 즉 ‘하나님이여’ 란 부르짖음으로 시작된다. 이는 지금까지 당신의 백성을 전능하신 능력으로 지켜주신 하나님의 행사를 회상하면서 그러한 능력을 통해 다시금 지금 고통 중에 처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바라는 시인의 애끓는 마음이 담겨진 외침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호칭에 이어 시인은 과거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행하신 일을 회상한다.
‘행하신 일’
- ‘일’ (’포알’) : 행동 업적.
-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이 인생들 각자의 삶에 개입하시고 섭리하시고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과 관련해 ‘구원'과 ‘섭리', ‘심판' 등의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과 관련되어 사용되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행하신 구원 역사를 가리키고 있다.
시인이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이러한 행적을 기억하는 이유
- 지금 언약 백성이 강대한 이방 세력에 의하여 큰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 외에 도울 자가 전혀 없었으므로 파거와 같이 능력을 베푸사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길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이러한 급박한 위기 상황은 9절부터 16절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대적들 앞에서 패하여 돌아오고 많은 전리품들을 탈취당했다(9, 10절).
그리고 백성들은 포로로 사로잡혀가고(11, 12절), 이웃 나라들로부터 수치와 조소와 조롱을 당하였다(13-16절). 이것은 대체적으로 히스기야 왕 제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취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왕하18장; 대하 32장; 사 36장).
1. 일반적으로(1절).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었나이다."
(1) 섭리의 많은 작업이 여기에서는 단 한 가지 일로 표현되어 있다.
"즉 "그들은 당신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에게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 안에는 놀라우신 조화와 통일성이 있기 때문이며, 많은 바퀴가 단 하나의 바퀴를 이루고(겔 10:13) 많은 일들이 한 가지 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경이로운 업적을 기록하며, 그 기적들에 대한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은 각 시대가 후손들에게 지우는 부채이다.
우리 앞에 살았던 자들은 저희 시대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우리에게 말했고, 우리는 우리 시대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우리 뒤에 나는 자들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또 그들은 그들을 계승하는 자들에게 그와 같은 공평한 일을 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대대로 주의 행사를 칭송"하고(145:4) "아비가 그 자녀에게 그의 신실을 알게 해야"할 것이다(사 38:19).
💡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그들이’ = 직역하면, ‘우리들의 아버지들’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신 구원의 사건을 구전을 통해서 교육했고 전달 보존해 왔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들려주는 것은 가장으로서 아버지가 해야 할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였다. - 하나님은 이러한 부모의 사명을 여러 번 강조해서 명령하셨다(출 10:2; 신6:20-24; 수 4:6, 7).
- 이 명령에 따라 히브리인들은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자녀들에게 들려줌으로써
-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했으며,
-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견고히 하도록 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가르침은
- 이스라엘이 수많은 역사적 시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여호와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천인 동시에,
- 낙심치 않고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에 자신의 부모로부터 이러한 신앙 교육을 받은 본시의 시인도 자신과 민족이 당한 위기 앞에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시대에 행하신 일을 언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날들보다 오래 전인 옛적에 행하셨던 일들도 주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성서 내에서 예언서의 말씀이 확실한 만큼 역사서의 말씀도 확실한 것이다.
(4) 자녀들은 부모들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적에 관하여 일러 주는 것을 부지런히 경청해야 하며, 그것을 자기들에게 큰 쓸모가 있도록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5) 하나님의 권능과 인자하심에 대한 이전 경험은 현재의 재난을 위해 드리는 기도의 믿음과 강력한 탄원에 대한 강한 지주가 된다. 기드온이 그것을 어떻게 주장했는지 살펴 보라(삿 6:13).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말한 이런 그의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2. 세무적으로 저희 열조가 그들에게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얼마나 놀라웁게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심으셨는가?(2,3절)
그는 이스라엘에게 자리를 제공하시기 위하여 원주민을 축출하셨고 그들을 괴롭히셨으며 추방하셨다. 또 그들을 저희 조상의 칼날 아래 초개와 같이 내어 주셨으며 저희 조상의 활 앞에 추풍낙엽처럼 되게 하셨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하에 가나안인들에게서 두었던 많은 완전한 승리는 저들 자신에게 돌아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들은 그 전승의 영광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1] 그것들은 저들 자신의 공적에 힘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무한한 은혜의 덕분이었다.
그것은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신 일이니,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고 네 마음의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며"(신 9:5, 6),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셨기" 때문이다(신 7:8). 이 일이 우리에게 대한 칭찬을 적게 허용하면 할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더 많은 위로를 주도록 이바지하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성공과 발전이 하나님의 은총과 그 얼굴의 빛으로부터 나옴을 알 수 있도록 한다.
💡 44:3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 가나안 민족들의 축출과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및 번영이 인간의 힘이 아니라 전적으로 택하신 백성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 시인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이 모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은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빛 : 주로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상징하는 단어.
기뻐하다 : ‘매우 기뻐하다’, ‘큰 은혜로 받아들이다’
-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한 구원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의 백성을 너무 사랑헤서 베푸신 은혜의 사역임을 보여준다.
-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당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한 구원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한 구원이었다.
[2] 그러한 일들은 저들 자신의 힘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을 위해 행사된 하나님 능력의 덕분이었으며, 만약 그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저희의 모든 노력과 시도는 아무 성과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저들에게 비록 강력한자들이 많이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저들이 그 땅을 소유하게 된 것은 저들 자신의 칼 덕분이 아니었다. 또 저들이 가나안인에게 격퇴되거나 수치를 겪는 일이 없도록 저희를 구해 준 것도 저들의 팔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오른손"과 "팔"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신해 싸워 주셨으니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저들이 싸움은 허사로 끝났을 것이었다. 저들이 용감하게 싸워 승리하도록 해 주신 것도 하나님이셨다. 농부가 용의주도하게 나무를 심듯 이스라엘을 그 좋은 땅에 심으신분도 하나님이셨으며, 그는 그 열매를 즐겨 시대하시는 것이다(80:8 참조).
이것은 복음의 선포에 의해 그리스도 교회가 세상에 심겨진 사실과 부합된다. 이교 신앙은 가나안인들처럼 갑자기 일시에 축출된 게 아니라 조금씩 놀라웁게도 추방되었고, 어떤 인간의 책략이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연약한 것이나 미련한 것으로써 그 일을 행하시려고 택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의하여 말살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영에 의하여 말살되어 갔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영에 의하여 정복하러 오셨으며 정복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기억은 반기독교적 독재의 멍에 아래서 신음하는 자들에게는 큰지주와 위로가 되며, 혹자는 (특히 학식 높은 아미랄두스는) 이 시편의 후반부에 나오는 호소가 신약의 바벨론 권세하에 놓인 교회의 사정과 매우 잘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권세와 인자하심으로 자신을 위해 이 세상에 교회를 심으신 그는 동일한 권세와 인자하심에 의해 반드시 그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 44:2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 구원 역사
- ‘주의 손’,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
- 이스라엘 열조에게 승리와 영광을 안겨준 주체는 = ‘주의 손’이다.
- 열조들의 손과 팔이 아닌 하나님의 손과 팔이 열조들로 약속의 땅을 정복하게 하고 그곳에 정착하게 하며 번성하게 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 이것은
-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보호하심에 대한 신앙 고백임과 동시에,
- 현재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탈출구 역시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내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시인은 과거에 열조들과 함께하신 하나님, 그분과 이스라엘 사이의 인격적 • 언약적 관계, 그분이 베푸신 구원 사역을 기억하면서 지금 현재 자신들이 처한 고난의 현장에서 그분이 다시금 능하신 손을 펼치사 구원해 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 과거 하나님의 손의 역사는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는 것으로 나타났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신 사실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 시인은 나뭇가지가 뻗어 잎어 번성하는 것에 빗대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정착시킬 뿐 아니라 그들로 번성하도록 축복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하는 것이다.
육체가 없으시며 순수한 영이신 하나님을 ‘오른손', ’팔', ‘얼굴 빛 ' 등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을 거듭 사용하여 표현하는데,
— 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매우 생생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나타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돌아올 수 있었고 정착하여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민족적 위기 앞에서 과거 열조에게 나타내 보이셨던 하나님의 구체적인 구원의 역사가 다시 한번 반복되어지기를 소망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들도 본시의 시인과 같이 과거 믿옴의 선배들이 살아간 역사를 통해 그들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히 발견하고 이를 확신함으로 자기외 삶에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성도는 매일 자신에게 닥치는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하는 가장 근본적인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어다.
(2) 그 좋은 땅의 소유를 둘러싸고 저들을 교란시키려고 기도하던 저희 원수들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빈번히 물리쳐 주셨던가?(7절).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몇 번이고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패주하게 하셨으며 수치를 당케 하셨고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열방들에게 대한 심판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일에 증인 되셨다."
기독교회의 박해자들과 교회를 증오하는 자들은 진리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수 없이 수치를 당하여왔던 것이다(행 6:10).
💡44:7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Ⅱ. 이 기록을 그들이 선용했다. 저희가 이전에 하나님께서 저희의 옛 조상을 위해 베푸셨던 큰일들을 참작하고 활용했다. (4-8절)
1.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최고의 지고한 주 여호와로 받아들였으며, 그에게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고 그의 보호 하에 투신하였다(4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십니다." 라는 것을(74:12) 교회의 이름으로 고백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왕으로서 자기 교회의 평화와 선한 질서를 전제로 하여 자기 교회에게 법률을 제정해 주시고, 그것을 위해 판단해 주시며 그 송사를 변호해 주시고, 그 전투에서 싸워 주시어 교회를 보호하셨던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그의 나라이다, 교회는 그에게 복종하고 찬사를 그에게 공물로 바쳐야 마땅하다.
아니면 시편 기자는 여기서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왕이십니다. 내가 주께로 가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서 내 청원을 드리겠나이까? 내가 요구하는 은총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의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서 자기 개인의 이익을 하나님의 백성의 공공복리와 번영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즉 "내가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주의 백성을 인도하소서"라고 한 모세처럼(출 33:13) 말해야 하는 것이다.
💡 44: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주는 나의 왕이시니’(앗타 후 말르키)
- ‘당신 자신이야말로 나의 왕이십니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는 시인 자신에게 있어서 ‘왕' 이신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강조적 의미를 지닌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다.
- 이러한 고백 속에는 왕에 대한 시인의 믿음과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 왕은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다.
- 훌륭한 왕은 안으로는 정치와 경제와 민생의 문제를 조화로이 해결하며 밖으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대적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수행한다.
- 바로 여기에 시인이 하나님을 특별히 왕으로 부르는 이유가 있다. 즉 시인은 민족이 당한 위기 앞에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 당신의 백성을 보호해 주실 것을 아뢰고 있는 것이다.
2. 저들은 곤경에 처할 때는 언제든 구조를 기도로써 항상 하나님께 의뢰하였다.
"야곱에서 구원을 베푸소서."
💡 ‘베푸소서’ = ‘명령하다’, ‘지시하다’ 란 뜻
⇒ 시인의 믿음
- 시인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명령하시기만 하여도 구원이 실현된다는 하나님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가졌으므로 하나님께서 명령만 하여주실 것을 겸손하게 간구하였다.
-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만유의 주권자되신 하나님께 모든 승리와 구원이 있음을 믿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신앙 고백과 기도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야곱 =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
여기에서 다음 두 가지에 유하도록 하자.
(1) 저희 소원의 확대.
그들은 구원들을 바라서 기도하는데 이는 하나를 말함이 아니라 많은 구원을 의미한다. 즉 그들의 기도는 저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이 얼마나 많든지 간에 그 많은 요구에 대한 충분한 구원을 위한 것이었고, 일련의 구원과 모든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저희 믿음의 강도.
그들은 "구원을 행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구원을 베푸소서"라고 말하는데,
- 이는 구원을 행하는 일이 하나님께 얼마나 쉬운 일이며 즉각적인 것인지를 의미한다. 즉 "말씀하소서. 그리하면 이루어지리이다."(백부장의 믿음도 그러한 것이었다. 마 8:8 .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 그리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효과적으로 행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권세가진 자처럼 그 일을 명하소서. 그 명령은 이행될 것입니다." "왕의 말이 있는 곳에는 권세가 있다." 더구나 왕 중 왕의 말씀이 있는 곳에서는 더 더욱 그럴 것이다.
3.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며 그에게서 승리를 얻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구출한 게 저들 자신의 칼과 활이 아니었다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3절), 장래에도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저들 자신의 칼과 활에 의지하지 않겠다고 (6절) 고백하였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며 마치 그런 무기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더라도 내게 큰 도움이 되는 듯이 그 어떤 군비에도 의지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와는 달리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를 것입니다(5절). 우리는 당신의 힘이 안에서 그 일을 도모할 것이며 오직 당신의 힘만 의지할 것이고 우리 군대의 용사 수효에 의존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편에 계시매, 우리는 이 시도가 성사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우리에게 지시해 주시는 당신의 지혜와,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강하게 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당신의 권능과, 우리에게 성공을 확보해 주시는 당신의 약속에 의하여,)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짓밟게 될 것입니다."
💡 44: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주를 의지하여’
- ‘다윗은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과 싸울 때 칼과 창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나아갔다. 결국 그는 제대로 무장도 갖추지 않았지만 적진의 용장 골리앗을 일격에 무너뜨렸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었다.
따라서 이같은 표현을 함에 있어 본시의 시인이 과거 다윗이 거두었던 찬란한 승리를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 - 즉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승리한 것처럼 - 자신들 역시도 지금의 위기에서 하나님이 능히 건지시고 승리케 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이같은 표현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44: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 활과 칼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주요 무기이다. 고대 당시 국가간 전쟁의 승패는 대개 보유한 군사의 수효와 무기의 우열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따라서 활이나 칼과 같은 무기는 고대에서 전쟁의 승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였다.
-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무기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승패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 즉 시인은 전쟁이 오로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철저히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 44:7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앞선 6절에서 시인은 자신들이 앞으로 계속적으로 승리를 구가할 수 있는 이유가 물리적인 힘이나 그들이 소지한 병기에 있지 않음을 피력하였다.
그런데 본절부터 8절 상반절까지에는 시제가 바뀐다.
→ 즉 4절 이후 미완료형 동사를 사용하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완료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인이 앞선 1-3절에서처럼 시선을 과거로 돌렸음을 보여준다.
- 즉 주께서 자신들을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자신들을 미워하는 자로 승리케 하셔서 중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피력하던 시인이 이 부분에서 시선을 과거로 돌린 것은
- 이러한 영광스러운 미래가 - 과거에 하나님께서 보이신 구원의 은혜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깊이 자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본절에서는 주어가 다시 1인청 복수형으로 바뀐다.
- 이는 6절의 독창이 본절에서 다시 합창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 이 합창은 과거 자신들의 조상에게 임한 하나님의 구원을(1-3절) 자신들도 경험했음을 노래하는 부분이다. 즉 시인은 과거 조상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았듯이 자신들 역시도 구원을 체험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들은 하나님을 저희 기쁨과 찬양의 대상으로 삼았다(8절).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를 자랑하며, 또 자랑하겠나이다."
산헤립과 랍사게가 히스기야를 공격할 때 그러했듯 저희 대적들이 자기 힘과 성공을 뽐낼 때 그들은 하나님과의 저희 관계와 하나님 안에서 갖는 저희 이익 이외에는 그러한 원수들의 허세에 의하여 자랑할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자인하였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지지하신다면 그들은 온 세상이 덤빈다고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랑을 하고자 하는 자는 여호와를 자랑할 것이니" 그에게 대한 자랑은 다른 모든 자랑을 영원히 배제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그를 자랑할 것이니, 이는 저희가 신뢰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는 신뢰하는 자는 "종일 그를 자랑할지니"이는 그것이 결코 다해지지 않는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은 그 위에다 "그의 이름을 영영히 찬송"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 이름의 위로를 받는다면 그들은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이다.
💡 44:8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하나님을 자랑’
- ‘자랑하다’ = ‘자랑스러워하다, 찬양하다’
- ‘하나님 안에서’ 란 뜻.
- 시인이 자랑하는 내용이 하나님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숨기고 하나님만을 부각시키는 신본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시인의 신앙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하나님 안에서 종일 자랑한다는 표현을 통하여 자신과 민족이 경험한 구원에 대한 감격을 최고조로 묘사하고 있다.
- 이러한 극한 감격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함으로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현실로 인해 탄원하는 9절 이하와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므로 본시가 만약 8절에서 끝났다면 이 시는 찬양시이며 감사 에배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9절 이하부터 나오는 민족이 당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호소와 회복의 간구로 인하여 본시는 민족 애가로 분류되는 것이다.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 감사하리이다 (’노데’) = ‘경배하다’, ‘찬양하다’
⇒ 이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이다.
- 특히 여기서 ‘감사하리이다’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이고도 끊임없는 예배와 찬양을 올릴 것임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환난 (시편 44:9-16)
여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저희 원수들과 압제자들의 우월한 세력 하에서 당시 그들이 처한 비천하고도 괴로움을 당하는 처지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더 큰 비탄을 안겨 주었던 것은 전까지는 항상 저희 인방들과의 투쟁에서 승전고를 올리며, 수위에 있곤 하던 "그들이" 이제는 짓밟힘을 당하기 때문이었고 저들이 여러 번이나 승리를 거두며 속국으로 삼았던 자들이 이제는 저희의 압제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계속 보호해 주실 것이며 여전히 번영케 해 주시리란 확신을 가지고서 자기들의 하나님을 자랑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당하고 있던 고난과 수치를 더욱 치욕스럽게 느꼈다. 이제 그들의 호소가 무엇인지 알아 보기를 하자.
Ⅰ. 그들은 자기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그가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한 일상적 표징을 원하였다(9절).
"주께서 우리를 버리셨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물리치시고 우리의 주장을 버리신 것같이 보입니다. 우리에게 늘 베풀어 주시던 주의 배려와 관심을 버리심으로써 우리로 수치를 당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의 은총의 항구성과 영속성을 자랑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군대는 여늬 때와 같이 출진합니다만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지반을 확보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확보하였던 지반까지도 상실하오니 이는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진군하셨다면 우리가 어느 쪽을 향하든지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낙심하여 비관하게 될 때에는 자기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물리쳐지고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이다."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11:1).
💡 44:9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본 단락의 서두에는 ‘그러나 이제는' 으로 번역된 접속사 ‘아프'가 나온다.
- 이는 앞선 긍정적 내용 즉 과거 선조들의 영광스러운 경험의 회상과는 전혀 다른 부정적인 일들이 그 앞에 펼쳐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이러한 역접 접속사 ‘아프' 이후 시인은 자기 당대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묘사한다.
특히 본단락 즉 9-16절은 민족적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의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그 서두인 본절에서 시인은 국가적으로 지금 위기 상태에 놓여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 위기는 아마도 앗수르의 제2차 침입 시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 문턱까지 와 진을 치고 히스기야를 위협하던 상황을 가리킬 것이다(왕하 18:17). - 구약 선민 이스라엘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생각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고 믿었다.
- 전쟁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에서 비롯된 측복이요 상급으로 여겼던 반면에 전쟁에서의 패배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음에서 비롯된 심판이요 징벌로 여겼다.
- 이러한 신앙을 확고히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지금 경험하는 패배의 위기는 → 바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떠난 것을 의미하였다.
- 그러나 시인은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라고 고백할 뿐 대적이 자신들을 이겼다고 묘사하지는 않는다.
-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려 욕을 당케 하셨다는 표현은
- 실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리셨다는 의미로 보거나 자신들을 버리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표현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 이는 단지 현재의 위기와 시련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또한 이는 현재의 위기가 마치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린 것처럼 혹독하고 고통스런 것이란 사실을 함축하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를 ‘버려’
- ‘버려’ :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수 없음을 나타냄.
-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고통의 근본 원인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는 비방이 늘 따라 다녔다.
욕을 당하게 하시고
- 이는 마치 몸에 상처가 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주는 심한 모욕과 조롱을 당하였다는 의미로,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의 조롱이 얼마나 비열한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는 것인지를 함축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Ⅱ. 그들은 싸움터에서 그들의 대적에게 패배하였다(10절).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이는 그들이 아이성에서 격퇴를 당했을 때 여호수아가 불평한 대로였다(수 7:8).
"우리는 낙담하오며 이스라엘의 옛날 용기를 상실하였나이다. 우리는 늘 우리 앞에서 도주하며 넘어지곤 하던 자들 앞에서 도망하고 넘어지나이다. 그러자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은 우리 진영과 나라를 약탈하나이다. 저들은 저들 자신을 위해 전리품을 취하며 저희가 손댈 수 있는 것은 모두 저희 자신의 소유로 간주하나이다. 바벨론의 멍에를 떨쳐 버리려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사오며, 오히려 그 일로 인해 기반을 상실하였나이다."
💡 44:10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 시인은 자신들이 대적과의 싸움에서 페하고 도주하는 수치스런 장면을 그리면서 그것을 군사적인 능력의 유무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런 얼을 당하도록 허락하셨음을 그 이유로 밝히고 있다.
한편 이처럼 시인이 자신들의 당하는 패배와 수치스런 상황의 원인을 환경이나 사람에게서 찾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찾은 것은
- 결코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거나 불평을 내뱉기 위함이 아니다.
- 이는 보다 적극적으로 그 위기의 해결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있다는 의미까지 함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즉 그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현재 극심한 위기에 처하여 있지만,
- 하나님이 자신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신다면 그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 탈취하였나이다
- 앞선 본문에서 패주하는 군대의 이미지로 자신들이 처한 수치스런 상황을 묘사한 시인은 이제 승리한 군대가 패주하는 군대의 장막을 노략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 이처럼 전쟁에서 막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하는 것, 그러고 상대군의 막사에 있는 물품을 탈취하는 것은 노략당하는 쪽의 완전한 패배와 노략하는 자들의 완전한 승리를 함축한다. 이는 패전국의 수치를 더욱 가중시키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자기를 위하여’
- 이는 약탈의 정도가 심각했음을 나타내는 표현.
- 대적들의 약탈의 강도와 힘없는 언약 백성의 피해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 사실 B. C. 701년경에 있었던 산헤립의 제1차 침공시 수탈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이스라엘 성안의 물건을 마음껏 탈취하였을 뿐 아니라 성전 기물과 성전 기둥에 입혀졌던 금까지 모두 벗겨 그들에게 바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왕하 18:13-16; 대하 36:7).
- 물론 본시를 기록할 당시는 앗수르의 제2차 침입에 당면한 시기이지만 제1차 침입시 있었던 앗수르군의 수탈을 회상하면서 그보다 더 큰 위기에 직면한 지금의 현실이 얼마나 고통스런 것인가를 부각시킨다.
Ⅲ. 그들은 칼에 베여지고 포로로 될 운명에 놓여져 있었다(11절).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같이 하시나이다. 그들은 양을 잡듯 우리를 예사로 살해하고 도살자들처럼 그 일을 업으로 삼으며, 굶주린 자가 음식을 먹듯 우리를 죽이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양이 도살장에 끌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쉽사리 그리고 별반 저항없이 끌려갑니다. 많은 사람이 살육 을 당하였으며 남은 자들은 이방인들 중에 흩어져서 끊임없이 저희 악의로부터 모욕을 당하거나 불의에 전염되는 위험 속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사고 팔렸다고 간주하고 그 점을 하나님께 책임지워서 "주께서 주의 백성을 파셨나이다"라고 힐난하는데, 오히려 저들 자신의 죄한테 그 책임을 추궁했어야 마땅했다. "너희는 너희 죄악을 인하여 팔렸느니라"(사 50:1).
여태까지 저들이 자기들에게 환난이 된 그 도구 너머로 시선을 돌리고 하나님을 주목하였으며 더욱이 저이들 극악한 원수들이라고 하더라도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 이외에는" 저들을 칠 권세가 없는 줄로 알았던 것은 옳았다.
그들은 팔린 물건이 산 사람에게 넘기우듯 "자기들을 불경한 자의 수중으로 넘기신" 분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주께서는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시며, 저희 가격을 늘이지 않나이다"(이렇게 해독할 수도 있다). 즉 "당신께서는 공매에 의해 값을 제일 많이 부르는 자에게 우리를 처분하시는게 아니라 제일 먼저 값을 제일 많이 부르는 자에게 우리를 처분하시는게 아니라 제일 먼저 우리를 요구하는 자들에게 성급히 파시나이다. 원하는 자는 누구라도 우리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혹은 우리가 읽는 대로 "주께서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라고 해독할 수도 있다. 이것은 만약 그들의 수난에 의하여 하나님의 이익이 어떤 면에서 보장되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야 된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에는 그들이 이 고난을 흔쾌히 참을 수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정반대였다. 이스라엘의 치욕은 하나님의 불명예로 변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매매하심으로써 그의 영광을 얻으신 분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로 인해 큰 상실자가 되었던 것이다(사 52:5; 겔 36:20 참조).
💡 44:11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 앞선 10절보다 선민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더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먹힐 양처럼’
- 도살장에서 살륙을 앞두고 있거나, 이미 살륙당한 짐승처럼..
‘흩으셨나이다’
- 앞서 ‘먹힐 양’ 이란 표현에 이어 이처럼 하나님이 그들을 홀으셨다고 묘사한 것은 자신들이 처한 위기 상황을 보다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양떼돌이 목자의 인도로 함께 다니다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상황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뿔뿔이 흩어진 양은 맹수들에게 있어 너무나 손쉬운 먹이감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여타의 동물과 달리 양에게는 자신을 보호할 어떤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처럼 각기 흩어진 야으이 미래는 죽음과 멸망뿐이다. - 언제적 일을 상기하는 것인가?
- 이는 히스기야 시대 이전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가 적국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이나(대하 21:16; 욜 3:2; 4:2-8; dka1:6,9)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그 백성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진 사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시인은 선민 이스라엘이 당하였던 과거의 고난을 회상하며 현재에도 바로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있음을 탄원하는 것이다.
- 이는 히스기야 시대 이전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가 적국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이나(대하 21:16; 욜 3:2; 4:2-8; dka1:6,9)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그 백성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진 사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Ⅳ. 그들은 멸시를 받았고 가능한 모든 치욕스런 행위가 그들에게 가해졌다. 그들은 이 일에 있어서도 또한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다.
"주께서 우리로 욕을 당케 하십니다. 주께서 치욕을 수반하게 될 재난들을 우리 위에 내리시며 우리를 대적하는 독설을 저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들이 불평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그들은 조소와 희롱을 당하였고 태양 아래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백성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저들의 고난은 저희의 치욕으로 변하였고 그들이 당하는 고생으로 인하여 그들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 44: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 그들이 아무런 가치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노예들처럼 취급되었다는 의미.
본절의 내용을 통해 시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자신들의 형편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단순히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고 원망하는 것으로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보다 궁극적으로 시인은 자신들의 비참한 형편을 토로하며 역설적으로 자신들을 너무나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는 무가처하고 헐값에 팔리는 노예들의 모습에 자신들의 처지를 빗댐으로 본래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소중한 기업이며 하나님 자신이 소유한 백성임을 강조하고 속히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는 시인의 염원이 함측된 표현인 것이다.
2.저들이 멀리할 수 없는 이웃이, 주위에 있는 자들이 그들에게 가장 모욕적이었다는 것이다(13절).
💡 44:13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이웃’
- ‘주변국’ - 아모리, 에돔, 모압, 블레셋 족속.
- 과거 산헤립의 제1차 침공에 대패한 이스라엘은 주변국들의 비난과 비방으로 인하여 큰 수치를 당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당한 수처가 어떠한 것인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가진 신앙과 관련된 수치일 것이다.
- 여기서 ‘이웃’이 복수형+미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 많은 비난과 조롱드이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음을 나타낸다.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 ‘조소’ : ‘신성모독’ 이란 뜻.
- 이 단어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이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 또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의 신앙에 대한 비웃 음을 나타낼 것이다
- ‘조롱’ : 원형 ‘켈레쓰’
- 비꼬는 웃음으로 사람의 실수를 반복적으로 조롱할 때를 나타냄.
-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당한 위기에 대해 반복적으로 조롱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민족 전체의 존폐를 위협하는 위기 앞에 놓이게 되자 주번 대적들은 이 기회를 틈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비방과 조소를 마구 퍼부었던 것이다.
- 아마도 이들의 비방 내용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은 무력한 신이 아니냐?', '너희 하나님어 어디 있느냐?’가 주를 이뤘을 것이다.
- 아울러 이들의 비방과 조소에는 이스라엘이 지금 매우 강한 타국의 어떤 신적 존재에 의하여 응징 받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Delitzsch). 즉 이들 적대국들은 이스라엘을 저 주받은 나라의 전형으로 내세우고 그들이 곧 망할 것이라는 독한 말을 퍼부었을 것이다
3.이방인들, 즉 이스라엘 국민에게는 낯선 자가 되고 약속의 계약에는 이질적인 백성들이 되는 자들이 저들의 몰락에 으쓱거리며 그들을 말거리로 삼고 그들에게 머리를 흔들었다는 것이다(14절).
💡 44:14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 머리 흔듦을 당하는 것 = 아주 심한 조롱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
이처럼 사악한 대적들이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자신돌에 대한 악의와 적대감을 표현하고 눈앞에서 자신들의 당한 현실을 비아냥거리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4.그 비난은 항구적이었고 끊임없었다는 것이다(15절).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나이다." 전체적으로 교회가, 개인적으로는 시편 기자가 계속 놀림을 받았고 원수의 모욕으로 부단히 괴로움을 당했다. 내리막 길에서 계속 떨어지고 있는 자에게 대해서는 누구나가 "그를 타도하라"고 부르짖는 법이다.
💡 44:15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본절은 다시 한번 백성둘의 함창에서 왕이 부르는 득창으로 바뀌는 부분.
- 왕이 이 부분을 노래하기 전인 11-14절 단락에서 백성들은 자신둘이 먹힐 양같이 흩어졌고, 조소와 조롱과 욕을 당했으며,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고 머리 흔들을 당했다고 노래했다. 이에 이어 왕은 자신에게 이것만큼 수치스럽고 모욕스러운 일이 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죽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가 전쟁에서 페하고 자신이 통치하는 백성이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것만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은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 당시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매일 전해져 오는 전쟁의 결과에 대한 소식으로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그의 얼굴을 들 수 없도록 부끄럽게 만들었다 (16 절).
5.그것은 매우 비통하였고 어떤 의미에서도 그를 압도하였다는 것이다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나이다." 그는 죄를 인해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보다도 그는 하나님께 끼쳐드린 불명에 때문에 부끄러워하였으니, 그렇다면 그것은 성스러운 부끄러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6.그 일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치욕이 되었다는 것이다. 원수와 복수자가 그들에게 퍼부은 비난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노골적 모독이었다(16절; 왕하 19:3). 그러므로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나타나 주시리라는 것을 믿을 만한 강력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관대하고도 솔직한 마음에게는 비난과 중상보다 더 지독한 고통이 없듯이, 거룩하고도 은혜로운 영혼에게는 하나님께 가하는 모독과 불명예 보다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없다.
💡 44:16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간청 (시편 44:17-26)
크게 고난을 당하고 압제를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기에서 하나님께 의뢰하고 있다. 그가 아니라면 그들이 갈 수 있는 자가 또 누가 있겠는가?
Ⅰ. 저들의 완전성에 대한 호소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오류가 없는 재판관이시며, 정녕코 그들이 완전함에 대한 보상자가 되실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다음 두 가지 일에 대한 증인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1. 비록 저들이 이런 혹독한 일을 당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 저희 임무에 밀착하였다는 사실(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니 그것은 아마 최대로 악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 하였으며 주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지 않았고 주에 대한 경배를 유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는 우매하게 행하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당신을 물리치고 다른 신을 받아들일 만큼 주의 언약을 어기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상 숭배자들이 우리의 정복자였으나 그 까닭으로 해서 우리가 저들의 우상과 우상 숭배를 더 낫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비록 우리를 버리시고 우리에게서 발뺌하신 것같이 보이셨지만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잊지는 않았습니다."
💡 44: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 시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그토록 혹독한 비방과 감당조차 할 수 없는 수모를 견디면서도 결코 주를 잊지 아니하였으며 신앙을 지키며 일심으로 주의 계명을 따라 주님을 섬기며 살아왔다는 신앙 고백을 올린다.
이는 보다 구체적으로 앗수르외 제2차 침입 당시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들이 보였던 신앙적 행위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사실 앗수르의 제1차 침입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애굽을 의지하였던 히스기야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고, 이 때 히스기야가 보인 태도 역시 비신앙적이었다. 죽 히스기야는 성전과 왕궁 곳간의 금은 등을 포함하여 엄청난 배상금을 바치는 등 인간적 방법으로 위기에서 모면하려 하였던 것이다(왕하 18:13-17).
- 그러나 2차 침공은 그 대처 방법이 달랐다. 1차 침공 이후 허스기야는 과거 애굽을 의지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던 것이다(왕하 19:1-37).
-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나라의 운명은 경각간에 놓여 있었다.
-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시인이 올리는 신앙 고백은 이제 더 이상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신들을 비방과 모욕의 자리에서 건져 속히 구원해 달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언약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 시인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언약 준행의 의무를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지켰음을 시사한다.
- 이것은 자신들의 완전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보다는 자신들이 당한 시련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을 회복한 우러 민족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 기도는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교만한 기도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몸부럼치는 자신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속히 구원해 달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본절에 등장하는 ‘언약'이라는 단어는 본시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 시인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함으로 시를 시작했고(1 절)
-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인 인자하심에 의지하는 것으로 시를 끝낸다(26절).
- 한마디로 본시의 핵심 단어는 바로 언약인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 닥친 이해하기 힘든 고난의 문제를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헤결하려고 몸부럼쳤다. 비록 현재의 고난에 대한 원인을 알 수 없다 해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인도하실 최종적 결론을 확실히 알았기에 이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오래도록 당하였던 고통은 매우 큰 것이었다.
"우리는 시랑(豺狼)의 처소에서, 승냥이와 이리처럼 사납고 광포하며 잔인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심하게 상했나이다. 우리는 사망의 그늘로 덮였사옵니다. 즉 죽음에 못지 않는 깊은 우울증과 염려 아래에 있나이다. 우리는 애매모호한 중에 싸여져 있으며 산 채로 매장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이와 같이 우리를 상하게 하시고 덮으셨습니다. (19절).
그렇지만 우리는 당신께 대한 어떤 야속한 생각도 품지 않았으며 당신께 대한 봉사로부터 회피할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비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살해하셨지만 우리는 계속하여 당신을 의지 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애착심을 주께로부터 은밀히 회수해 들이지 않았으며, 우리의 경건한 예배나 일상 행위에 있어서도 당신께서 우리에게 걸으라고 지정해 주신 길, 곧 주의 길을 떠나지 않았읍니다.(18절)."
마음이 퇴축하면 발걸음은 곧 퇴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불신앙의 악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환난 중에도 우리의 온전함을 계속하여 굳게 보존한다면 그 어려움이 아무리 긴박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괴로움을 더 잘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로부터 우리를 쫓아내지 못하는 동안에는 하나님 안에서 얻는 우리의 위로도 내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한 그도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 44:18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위축되지 아니하고’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이 요구될 때 외부적 환경이나 심경의 변화로 인하여 순종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는 것을 뜻한다. → 침륜의 의미.
- 이는 산헤립의 공격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큰 곤경에 빠졌으나 이로 인하여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위축되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즉 앗수르의 제1차 공격시 성전과 왕궁의 보물까지 내어줄 정도로 위축되었던 히스기야가,
- 제2차 공격시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을 향한 내적 자세 뿐 아니라 외적 행위에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 신실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언뜻 보기에는 마치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보인다(눅 18:9-14).
그러나 이는 사실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신둘에게 속히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룰 바라는 간접적인 기원의 의미틀 지닌다고 할 수 있다.
44:19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 ‘승냥이의 처소’
- 성경에서 ‘시랑의 처소'는 하나님의 진노로 황폐해진 땅을 가리킨다.
- 본시의 전체적인 배경을 살펴볼 때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참혹한 패배를 당한 전쟁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 그들이 당한 고난과 고통이 너무 깊어 빠져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방의 침공으로 인하여 민족의 멸절 위기가 찾아왔다.
- 이러한 이스라엘의 극심한 위기를 22절에서는 ‘도살할 양’이란 표현으로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본문의 ‘사망의 그늘'이란 표현은 23:4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란 표현을 떠오르게 한다.
- 여호와를 목자로 모신 앙들에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할 때가 반드시 있다. 문제는 이러한 위기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주의 지광어와 막대기의 안위와 보호를 믿느냐 믿지 못하느나에 달려 있다.
그들의 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증인으로 삼는데,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위선자에게는 큰 공포가 되나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는 그에 못지 않게 큰위로가 된다(20,21절).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다는 구실 하에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불행 중 우리를 더 도와 줄 법한 자로 보여서 이방 신에게 우리 손을 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그는 우리가 최대의 주의력과 최대의 열성으로 탐색해내어 알고 있는 것보다 그것을 더 완전하고 명백하게 아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그 일을 판단하시고 그것에 대한 책임 추궁을 위해 우리를 호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망각함은 마음의 죄이며 이방 신에게 손을 펼침은 흔히 은밀한 죄악 이었다(겔 8:12). 그러나 마음의 죄와 은밀한 죄악도 하나님께는 알려진 죄이며 반드시 계산될 것임에 틀림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의 비밀도 아시는 분"이시며 따라서 말과 행실에 대해 절대 무오한 재판관이시기 때문이다.
💡 44: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우상숭배, 배도)
44:21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인간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 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시고 그의 마음속에 있는 선하고 악한 생각 모두를 아신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 드러나지 않고 숨겨질 수 있는 죄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죄를 간과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 시인은 이렇듯 인간의 마음을 살펴 아시는 하나님의 면모를 강조함으로 그러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결백을 더 잘 아시지 않느나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들이 이런 가혹한 일들을 겪게 된 것은 저희가 하나님과 저희 의무에 밀착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22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니, 이는 우리가 당신과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머물고 있으며,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다른 신들을 경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영은 이점과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 죽음조차 불사하던 자들을 관련을 지으셨으며, 그것은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다(롬 8:36).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좀체 사라지지 않는 사망에게 잡혀서 하루 종일 죽음을 당하는 중에 있었다. 이 일은 너무나 보편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사람이 크리스챤으로 될 때에는 스스로를 "도살할 양같이"여겼던 것이다.
💡 44: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를 위하여’
- 직역하면, ‘당신 때문에’
- 이러한 의미를 따라 본문을 다시 보면 시인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이 자신들을 압박하는 앗수르 군대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언해 비롯된 것임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물론 이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어투로 들려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에게 닥친 이러한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아래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 아울러 이는 자신들을 고난의 현실에서 속히 건져주시기를 바라는 시인의 간곡한 구원 요청이 함축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 순한 양이 무자비하게 도살되듯이 이스라엘이 대적에 의해 무자비하게 도륙될 위기에 몰렸음을 시적으로 묘사.
- 이러한 본절의 표현은
-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 뿐만 아니라
-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당한 고난과 죽음을 연상시킴과 동시에
- 불의한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와 진실을 지킴으로 당하는 고난의 현실을 예표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롬 8:36).
Ⅱ. 저희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곤경에 관한 청원을 통하여. 그 청원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이 정하신 때에 자기들을 위해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1. 저희 요구는 매우 간절하였다.
"깨소서! 일어나소서!(23절)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구속하소서!(26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속히 그리고 강력하게 오소서. 주의 용력을 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80:2)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팔았다고 불평하였는데(12절), 여기에서는(26절) 자기들을 구속해 주시도록 기도드리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호소를 드리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호소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신다면 우리를 구속할 분도 그분밖에게 안계신 것이다. 찢은 바로 그 손이 고치지 않으면 안 되며, 쳤던 바로 그 손이 싸매지 않으면 안 된다(호 6:1).
그들은 "주께서 우리를 버리셨나이다"고(9절) 불평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23절). "우리가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 44: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 본문은 침묵하시지 말고 자신들을 위해서 움직이시고 활동해 달라는 애절한 호소이다.
- 하나님이 주무신다는 표현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아무런 구원의 행위를 베풀지 않으시고 잠잠히 계신 모습에 대한 비유이다. 마치 잠에 빠진 부모가 자신의 아이의 위험을 알지 못하고 잠을 계속 자듯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고난과 압제에 침묵하시는 것을 주무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특히 ‘우르' 가 군대 용어로 쓰일 때는 전쟁을 위해 무장을 하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시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속한 개입을 요청하고 있다.
⇒ 여기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끝까지 신뢰하며 일어나 자신들을 도우시기룰 간절히 호소하는 시인의 굳건한 믿음을 엿볼 수 있다.
2. 그 간언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주께서는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23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그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즉시 나타나지 않으시는 때에는 저들이 그가 주무신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이 표현은 비유적이다(78:65 같이,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다가 깬 자 같으셨다")그러나 그것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께 적용할 만하였다(마 8:24). 그의 제자들이 폭풍우 속에 있었을 때 그는 주무시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그를 깨우며 말하기를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어찌하여 우리가 당신과 당신의 얼굴의 빛을 볼 수 없도록,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나이까?" 혹은 "당신께서 우리와 우리의 고통을 보지 않으시려고 주의 얼굴을 가리우십니까? 주께서는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이 일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열려진 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44: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3. 그 탄원은 매우 온당하였다.
비록 그들이 저희 온전함에 대해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는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자신의 공적과 의로움을 주장한게 아니라 불쌍한 죄인의 탄원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1) 저들 자신의 참상, 이것은 하나님으로 저들을 불쌍히 여기에 하였다(25절).
"우리의 영혼은 우세한 비탄과 공포 아래에서 진토에 구푸렸나이다. 우리는 가장 비천한 동물, 즉 기어 다니는 것이 되었나이다. 우리 몸에 땅에 붙었나이다. 우리는 스스로 일어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수그러진 영혼을 소생시키지도 못하고 우리의 낮고 슬픈 상태에서 스스로 회복하지도 못하며, 노출당한 채로 누워있다가 모든 모욕적인 원수에게 짓밟힘을 당합니다."
💡 44:25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진토 속에 파묻히고’
- 민족이 처한 위기로 인하여 시인과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이 매우 낮아졌음을 나타낸다.
‘땅에 붙었나이다’
- 원형 ‘타바크’ : ‘접착하다’, ‘달라붙다’란 뜻.
- 본문에서는 영혼이 겸허히 낮아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몸도 땅에 완전히 밀착될 정도로 달라붙어 있다는 뜻.
-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스스로를 낮추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로 히스기야는 항복을 종용하는 앗수르 왕의 편지를 받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스스로를 낮추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곡히 요청하는 기도를 올렸다(왕하 19:8-19).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 군대를 하룻밤 사이에 18만 5천 명을 죽게 하는 초자연적 재앙으로 치사 그들을 퇴각하게 하셨다(왕하 19: 35-37)
(2) 하나님의 자비.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우리는 당신의 성품의 선하심에 의존하는데 이는 주의 이름의 영광입니다(출 34:6). 또 우리는 언약에 의하여 다윗의 모든 영적 자손들에게 전달되는 그의 그러한 확실한 자비들에 의존합니다."
💡44:2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 시인은 23절에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침묵을 잠을 주무시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깨소서 (wake up) '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본절에서는 ‘일어나소서(KJV, rise up)’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점층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다 강력하게 구하고 었다.
- 그라고 시인은 마지막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근거로 자신들을 구속하여 주실 것을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