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4월 3일 수요일 묵상구절 시편 51편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Jeehyun 2024. 4. 4. 00:26

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6, 시편 5, 6, 잠언 21, 골로새서 4

묵상구절

51: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51: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1: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51: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공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51: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51: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51: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죄악의 도말과 심령의 갱신 간구 및 세 가지 서원 -

(저자: 다윗, 분류: 참회시)

서론

💡본시의 표제에는 본시가 다윗의 저작이란 사실과 더불어 영장 즉 지휘자의 인도로 연주된 제의 음악이란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다윗이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지은 시라는 저작 배경이 소개되고 있다.

저작 배경

이러한 저작 배경을 나타내는 표현에서도 나타나듯이 본시는 다윗이 목동 시절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 후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합한 의로운 삶을 살았으나 그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범죄인 유부녀 밧세바와의 간음과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사지에 내몰아 죽인 파렴치하고 흉악한 범죄를(삼하 11장) 회개하며 지은 시이다.
따라서 본시는 참회시로 분류되며 ‘참회의 모본'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본시는 같은 참희시인 제6편 및 제32편과 그 저작 배경이 같다.
그러나 이 세 편의 시는 같은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강조점에서는 다옴과 같이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1. 제6편
    • 밧세바 사건으로 인한 하나님의 견책과 정계의 중함에 대한 호소와 사죄의 은총을 간구한 내용이 전편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면,
  2. 제32편
    • 범죄 자체에 대한 고백이나 사죄의 요청보다는 회개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은 자의 기쁨과 찬양 및 사죄의 과정에 대한 간증의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3. 본시
    •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범죄를 통해 깨닫게 된 부패한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 대한 다윗의 통찰력과
    • 죄가 필연적으로 야기시킨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에 대한 다윗의 영혼의 고통의 호소 및
    • 간절한 교제 회복 간구,
    • 그리고 선취적 신앙에 의해 사죄와 구원을 확신하는 찬양의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 편외 시 가운데 본시가 가장 먼저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다음으로 제6편, 맨 끝으로 제32편이 지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참회시

시편에는 7편의 참회시가 나오는데(6.32.38,39.51.130.143편) 본시는 그 가운데서도

  • 죄에 대한 슬픔과 철저한 뉘우침,
  • 회개의 은혜를 체험한 이후의 다짐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대표적인 참회시이다.

특징

하지만 본시는 일반 참회시들의 패턴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본시는 일반 회시의 양식에서 벗어나 참희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고 있는 것으로 평해진다.

이는 본시가 죄악의 중압감으로 인한 탄식과 참회라는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로만 일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 오히려 내용이 전개되고 진행될수록
    죄악을 씻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가 더욱 견고해짐을 발견할 수 있다.
  • 그리고 이러한 시인의 의지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겠다는 변화된 새 인격으로서의 찬미의 서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본시에는 청유형과 호격 표현이 거듭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 회개로 인해 회복된 여호와와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 이제 새로이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에 대한 시인의 간절한 심경을 반영해 보여준다.

내용

1-9절

다윗이 자신의 죄과를 시인함과 동시에 자신이 그러한 죄악을 범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으로서 부패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죄악을 도말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

10-12절

죄악된 본성을 타고난 자신의 심령을 성령을 통하여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정직하고 신실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며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간청하는 내용.

13-19절

회복의 은혜 체험을 전제로 하나님께 세 가지 서원 곧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처고, 주의 의를 찬양하며, 참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는 내용.


●다윗의 간구(시편 51:1-6)

이 시편의 표제는 다윗의 타락에 관한, 어떤 매우 슬픈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타락했을지라도 완전히 전멸 당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롭게도 그를 부축하시어 세우셨기 때문이다.

1. 그가 이 시편에서 탄식하고 있는 죄는, 자기가 이웃 사람의 아내에게 범한 어리석음과 사악함, 즉 혐오감 없이는 말하지나 생각할 수도 없는 죄였다.

그는 밧새바를 모욕했을 때 그 것에 따라 온갖 다른 죄들도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그것은 방축물이 새는 것과도 같았다.  다윗의 이 죄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경고로서 기록되어 있다.

2. 이 시편에는 그의 회개가 나타나 있다.

그가 아홉 달 이상이나(잘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죄에 대해 특별한 후회나 슬픔도 모르고 지냈을 때, 그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죄에 빠져 오랫동안 죄 속에 있도록 내버려두신다 할지라도, 어떠한 방범으로든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 그들 자신의 올바른 마음으로 돌아오도록 만드실 것이다.

대체로 말하면, 하나님은 말씀을 맡은 사역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꼭 그런 방식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못을 범한 자들은 성실한 책망을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친절로 여겨야 하며, 지혜로운 책망자를 가장 훌륭한 친구로 여겨야 한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내가 그것을 은혜로 여기리이다"(시 141:5).

3. 다윗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을 토로하면서, 긍휼과 은혜를 구하고 있다.

패역한 자들이-이전에 달아났었고, 또 오직 그만이 그들의 타락을 고쳐 줄 수 있는-자기들의 주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누구에게로 오겠는가?

4. 다윗은 거룩한 영감에 의해, 하나님께로 향한 자가 마음의 움직임을 이 시편 속에 담아 놓았다. 그래서 그것이 자주 반복하여 읽혀질 수 있도록, 그리고 오랜 후에도 다시 살펴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악장(chief musician)에게 위탁하여, 교회의 공중 예배 때에 불리울 수 있도록 했다.

(1) 그의 뉘우침을 자백으로 노래되게 했다.

그의 죄가 널리 알려져 악명이 유명해졌으므로, 그 상처의 면적에 따라 고약도 그만큼 넓게 바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는 자들은 그들의 회개를 시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결백함의 영예를 상실한 그들은 회개의 영예를 갈구할 것이다.

(2)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로서 노래되게 했다.

그것은 그의 본보기로서 그들을 회개로 이끌고 그들이 회개할 때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그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스스로 개심한 자는 나처럼 "그 형제를 굳게 하며"(눅 22:32), "그 까닭에 그는 긍휼을 입는다"(딤전 1:16).

이 귀절들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Ⅰ. 다윗의 겸손한 탄원(1,2절).

그의 기도는 우리 구주께서 회개한 세리에 대해 비유로 언급하신 말과 매우 같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다윗은 여러 면에서 훌륭한 공적을 지니니 지였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죄를 깨달았을 때, 그는 자기의 선한 행적을 내세워 자기의 악한행적을 청산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봉사가 그의 범죄를 보상할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로 달려가, 용서와 화평을 위해, 오직 그것에만 매달렸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정의에 부당함을 인정하고, 그의 긍휼에 자신을 맡기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선한 자들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지 않는다 면 멸망할 것임에 틀림없다.


 💡 51: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외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방범이 전혀 없음을 직시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본시의 서두에서부터 명령형 동사를 사용하여 자신을 긍휼히 여겨 달라는 간구를 올린다. </aside>

1. 그는 무엇을 들어서 이 긍휼을 탄원하고 있는가?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유다 지파의 방백의 혈통을 타고난 내 태생의 존엄대로 마시고, 이스라엘 투사로서의 내 공적 봉사나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내 공적 영예를 좇아 행하지 마소서."

그의 탄원은, "여호와여 다윗과 그의 모든 수고, 그리고 저가 여호와께 맹세한 것을 기억하소서"(132:1, 2)라는 것이 아니었다.  진실로 회개하는 자는 이러한 것을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탄원은 이러했다. 긍휼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서서. 내가 주께 탄원하는 것은 오직

(1) "주의 인자하심, 주의 온화하심, 그리고 비참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의 성품의 선하심에 따른 주의 긍휼의 관대함입니다."


💡 주의 “인자”를 따라

  • 원형 : ‘헤쎄드’
  • ‘변함없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언약적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즉 이는 언약에 기초하여 끝까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를 시인하며 회개하는 죄인에 대해서는 긍휼히 여기신다.
    — 이를 다윗은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었었다. 그로 인혜 그는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인자, 즉 언약적 사랑에 근거한 긍휼을 호소하고 있다.
  •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할 때 자신의 범죄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근거할 때, 또 그분의 언약적 사랑에 기초하여 용서를 구할 때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음을 다윗은 알았기에 이처럼 본시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인자에 근거하여 자신을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이다.
  • 실로 의인은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아니라 죄를 깨달은 즉시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하여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회개하는 자이다.

(2) "주의 긍휼의 충만함입니다.  주님께는 인자하심과 온유한 긍휼이 있을 뿐 아니라, 풍성히 있습니다.  우리의 범죄가 많아질수록 용서 또한 더 커질 것이며, 많은 죄인들, 많은 죄를 용서하기 위한 온유한 긍휼이 풍성히 있기 때문이옵니다."


💡히브리인들은 자궁 안에 있는 태아를 향한 산모의 깊고 따뜻한 사랑을 자비의 원형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궁'을 나타내는 단어를 깊은 ‘자비'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다윗은 자궁 속의 태아가 산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듯이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외에는 자신의 죄를 사함받을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잘 알았다.

→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표현하면서 의도적으로 ‘많은'이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 즉 자비에 풍성하신 하나님과 심각한 죄를 지은 자신을 대조하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하심으로 자신을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2. 그가 구하고 있는 구체적 긍휼은 ‘죄의 용서’이다.

채무자가 빚을 갚거나 채권자가 그것을 경감해 주었을 때는, 장부에서 그 빚을 지워버리거나 없애버리는 것처럼,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죄과를 닦아내소서. 그리하여 그것이 나타나 나를 대적하여 심판을 요구하거나 내 얼굴을 노려보아 나로 부끄럽고 두렵게 만들지 못하게 하소서."

죄과를 도말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즉 정결케 하고 화평을 회복시키기 위해 양심 위에 뿌려질 피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요, 그것은 우리를 화해로 이끈다(1절).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소서.  주위 긍휼과 은혜로써 범죄와 내 죄의 얼룩에서 나의 영혼을 씻기소서. 왜냐하면 성별의 물은 단지 의식상(儀式上)의 더러움에서만 나를 깨끗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더 씻기소서. 더러운 물이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 속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쉬게 빠져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씻기소서. 말갛게 씻기소서.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죄는 우리를 더럽혀 거룩하신 하나님 보시기 불쾌하도록 만들고,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편치 못하도록 만든다.  죄는 우리로 은혜나 영광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합당치 않도록 만든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는, 우리에게서 죄를 제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용납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며, 우리 자신도 편한 가운데 그에게 접근할 자유를 얻게 된다.

나단은 다윗이 회개를 처음으로 고백했을 때, 그의 죄가 사함 받았음을 확실히 말해주었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 아니하리이다"(삼하 12:13). 그러나 그는 "내 죄과를 도말하시고 씻기시며 제하소서"하고 기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도 우리는 요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를 사함받은 자들은 그 용서가 더욱 더 가지들을 깨끗케 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용서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용서가 얼마나 귀한가를 알고 있는 자답게 이처럼 끈질기게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 1절,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죄과’

  • 모든 의미의 죄를 포괄하는 단어이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반역죄, 즉 주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하나님의 명을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 특히 본절에서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 이러한 죄가 많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 그런데 여기서 시인이 ‘페좌으'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이 범한 간음죄나 살인죄 등이 인간에 대한 범죄이기에 앞서 하나님께 대한 범죄란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러한 죄과들을 해결할 분도 하나님밖에 없음을 알았다.

‘지워주소서’

  • 여기서 다윗은 이 단어의 명령형을 사용하여 자신의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지워 없애주실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본절은 죄의 문제는 죄사함의 권세를 지니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 죄를 없애 주심으로만 해결 가능함을 보여준다.
  • 그리고 죄사함의 참다운 출발이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신 성품, 그리고 언약적 사랑에 근거해 죄 용서를 간구하는 것이다.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 죄악 = 원형 ‘아온’
    • 본래의 상태에서 벗어나 왜곡된 상태.
    •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를 향한 경향성, 즉 원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마음의 상태. → 이 마음의 ‘죄악’으로 인하여 인간은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 ‘씻으시며’
    • ***‘더러운 것을 제거하다’, ‘의복을 빨다'***라는 뜻.
    • → 레위기에서 정결 의식과 관련하여 많이 사용된 표현.
    • 레위기에 보면 부정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의 의복을 빨아 부정함을 제거했다.
    • 여기서는 2인칭 단수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시인의 신앙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 ‘말갛게’ =‘완전히’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 ‘나의 죄’ = 원형 ‘핫타아’
    • ‘과녁에서 벗어나다, 길을 잃고 헤매다’ 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하여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모든 불순종을 가리키는 단어.
    • 이는 하나님의 기준인 율법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죄를 포괄적으로 지적할 때 사용되는 단어.
  • 그런데 시인은 1절과 본절 상반절에서도 죄와 관련된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 먼저 1절에 언급된 ‘죄과(KJV, transgressions)’ 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정치적 반역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는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극악한 죄로 인식되는 것어었으며 성경에서는 율법이 명백하는 어떤 조항을 어긴 구체적인 범죄 행위를 가리킨다.
    • 그런데 시인은 이를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통처와 인도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 본절 상반절에 나온 ‘죄악(KJV, iniquity) '으로 번역된 ‘아온’은
    • 죄를 향한 부정적인 인간의 마음과 경향성을 가리킨다. → 이 단어는 원죄(original sin)로 인한 사람의 부패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 이러한 죄와 관련된 표현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되, 시인은 모두 거기에 1인칭 단수 접미어를 결합시키고 있다.
      ⇒ 이는 자신이
      구체적으로 죄를 범하였고, 죄된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도무지 하나님이 정한 거룩한 삶의 기준인 율법에 미치지 못하는 완악한 죄인임을 강조한다.
  • 이처럼 시인은 죄와 관련된 서로 다른, 그러나 긴밀한 연관이 있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자신이 본성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실제 삶에 있어서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죄인임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스스로의 상태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께 죄용서를 구한다.

  • ‘깨끗이 제하소서’
    • 원형 ‘타헤르’ : 제사장이 문둥병 환자의 병을 진찰한 뒤 그의 병이 깨끗해졌옴을 선포할 때 사용되는 단어.
    • 다윗은 마치 문둥병으로 격리되어 비참한 지경에 처한 환자가 완치되어 깨끗함을 입게 되었다는 제사장의 선포를 간절하게 바라듯이,
      자신이 죄로부터 깨끗하여졌다는 하나님의 선포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 시인은 1절과 2절에서 ‘인자, 긍휼, 자비’라는 단어와 - ‘죄과, 죄악, 죄’라는 단어, ‘도말하소서, 말갛게 씻기시며, 깨끗이 하소서’ 란 유사한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한 죄용서와 회복, 성결함을 간절한 마음으로 염원하였던 것이다.


Ⅱ. 다윗의 회개에 찬 고백(3,5절)을 보자.

 💡 앞선 1,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죄를 씻어주시기를 거듭 간구하였다.

이에 이어지는 3-6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죄에 대해 철저히 깨닫고 시인한다.


1. 그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솔직하게 죄를 시인했다.

"내가 내 죄과를 아나이다."

그는 이것이 그의 양심을 편케 하는 유일한 길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32:4, 5). 나달은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했다.  다윗은 "내가 죄를 범하였노라"고 말하고 있다.


 💡 51: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아오니’ (야다으)

  • 원형 ‘야다으’는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 본질을 파악하는 것을 나타낸다.
  • 시인은 다른 사람은 물라도 자신만큼은 자신의 죄과를 철저히 인식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안다는 이러한 고백은 일면 진부하고 평범한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왜냐하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범죄 사실에 대한 시인과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은 = 전정한 회개의 출발점이 된다.
  • 그러므로 시인도 1, 2절에서 먼저 죄사함의 근거가 되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간절히 호소한 이후 곧바로 본절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는 그것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슬프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끊임없이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죄에 대한 뉘우침은 갑자기 가볍게 일어난 감정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는 근심이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리하여 그것이나를 모욕하고 나를 괴롭히며, 항상 나로 하여금 얼굴을 붉히고 떨게 만듭니다.  그것이 항상 나를 대적하옵니다."(어떤 사람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내 대적처럼 내 앞에서 나를 저주하고 위협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매사에 자기의 죄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또 그는 겸손해지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자 했다.  그는 그 지붕위를 거닐 적마다 밧세바를 보았던 그 불행한 산책에 대해 후회에 찬 반성을 했다.  그는 자리에 누울 때마다 불결한 침상에 대한 슬픈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고기를 먹을 때, 그의 종을 심부름시킬 때 또는 집필할 때, 그것은 그로 하여금 우리를 술 취하게 하고 그 하인 편에 반역적인 전갈을 보내며 그를 처형하라는 치명적인 명을 내리고 서명한 일에 대해 생각지 않을 수 없어 써다.  회개의 행위, 심지어 같은 죄에 대해서라도 회개의 행위는 자주 반복되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항상 우리 앞에 있기 하여, 지나간 죄를 기억함으로써 우리를 겸손케 하며, 시험에 대비하여 무장하도록 하고, 의무를 부지런히 행하도록 하고, 고난 가운데에서 인내를 겉돌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내 앞에’ = ‘바로 내 앞에’
    ⇒ 여기서 이 표현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죄의 유흑이 자신의 앞에 도사러고 있다는 뉘앙스를 전달해 준다.

(1) 그는 자기의 사실적인 범죄를 자백하고 있다(4절).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다윗은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잘못을 행하였을 때, 회개자의 규율에 복종하고 있으며, 자기의 왕권이 그런 복종을 면제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도 이 점에는 모두 동일함.  그들 모두에게 회개의 한가지 법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자리도 곧 심판 받아야 하므로 지금 자신들을 심판해야 한다.

[1] 그의 자백은 상세하다.

"내가 악을 행하였나이다.  지금 내가 책망 받고 있는 악, 그리고 내 양심이 꾸짖고 있는 이 악을 행하였나이다."

죄에 대한 자백을 상세하게 하여, 용서를 위한 기도를 자세히 할 수 있고, 따라서 더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연약함으로 인해 범하게 된 우리의 죄악의 구체적 죄목과 우리의 잡다한 죄악의 상세한 상황을 숙고해 보아야 한다.

[2] 그는 자기가 자백하고 있는 죄, 그것 때문에 그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그 죄를 한결 무겁게 말하고 있다.

"주께 대하여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나이다.  우리 구주가 말한 돌아온 탕아의 자백은 여기에서 인용된 것 같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나이다"(눅 15:18).


 💡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만 범죄하여’

  • ‘오직 당신만을 대적하여'라는 매우 강조적 의미.
  • 이로 인해 혹자는 본시의 저자가 다윗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왜냐하면 다윗은 우리아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도 명백하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본절은 다윗이 결코 다른 사람돌에게 범죄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절은 범죄에 대한 슬픔과 후회의 표현으로, 범죄에 대한 다윗의 의식을 잘 보여준다.

  • 비록 범죄의 일차적 대상은 사람일지 몰라도,
  • 범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는 다윗의 인식과,
  • 하나님 중심적 신앙이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 사실 근본적 의미에서 모든 범죄는 선악의 기준이신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 하나님을 떠나 죄악된 본성을 따라 살기 때문에 →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 따라서 궁극적 측면에서 하나님만이 우리 범죄의 심판자시요 판단자이시다.
    ⇒ 다윗은 바로 이와 같은 심판자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범죄를 슬퍼하며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삼하 12:13).

사실 모든 범죄가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아는 자만이 인간에 대해서도 죄를 짓지 않는 바른 삶을 살 수 있다.

  • 높은 윤리적 기준을 지녔던 요셉도 자신을 유흑하는 보디발의 처에게 간음은 큰 악이며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임을 밝힌 바 있다(창 39:9).
  • 즉 요셉이나 다윗은 사람에게 죄를 범하는 것은
    = 근본적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어웃에 대한 사랑을 명하신 하나님을 향한 범죄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 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갖게 될 때 성도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받게 된다. 

다윗은 그가 죄에서 두 가지 사실을 탄식하고 있다.

  1. 첫째, 그것은 하나님께 범한 죄라는 점이다.
    1. 하나님께 모욕이 가해졌고, 또 해를 당한 상대자가 하나님이었다.
      우리는 고의적인 죄로서 바로 그의 진리를 부정했고, 우리가 경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이며, 우리가 불복종하는 것은 바로 그의 명령이며, 우리가 불신하는 것은 바로 그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만적이고도 교묘하게 행하는 것은 곧 그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요셉은 죄를 물리칠 만한 중대한 이유를 이끌어 내었으며(창 39:9), 다윗은 여기에서 죄의 중함을 이끌어 내고 있다.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그가 왕으로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문책 당하지 않는다는 면류관의 특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현재 심경으로 보아, 그것은 죄에 대한 그의 마음의 깊은 회오를 표하는 것이며 그것이 옳은 조건에서 나온 회오라고 추정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는 밧세바와 우리에게 대해, 그의 영혼과 육신과 가문에 대해, 것들은 모두 합세하여 그를 겸손해지게 했다.  그러나 이 어느 죄도 하나님께 대한 죄처럼 그 누구에게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에 가장 슬픈 액센트를 주고 있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였나이다."
  2.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범해진 죄였다.
    1. "그래서 그것은 나를 문책할 뿐 아니라, 그 죄가 심히 중한 죄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에 대한 불신과 그의 공의에 대한 멸시를 입증해 주는 우리의 모든 죄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매우 겸손케 되어야 한다.

[3] 그는 자기에게 언도된 선고-"칼이 그의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 12:10)에서의-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시인하고 그것을 중대시하는 일에 매우 신속했다.  그것은 그가 그 죄에 대한 용서를 얻기 위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백에 의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1. 첫째,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달에 의해 말씀하신 그 경고 속에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한 것이다.
    "여호와여, 나는 그 선고의 반대하는 이의를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마땅히 그 경고를 받을 만하며, 천 번이라도, 하고 말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고에 순종했다(삼상 3:18).  그리고 히스기야 왕도 이렇게 말했다(왕하 20:19).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2. 둘째,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즉 이 경고를 실행하실 때 하나님은, 순전하심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자백했음을 알렸다.  그래서 이후에 그가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이 그에게 잘못을 했다는 말은 아무도 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의롭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참으로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정제함으로서 하나님을 이롭게 할 것이다.  "주께서는 내게 행하신 모든 일이 옳소이다."

💡 3절, …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의로우시다 하고’,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 두 단어는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 그것은 하나님의 행사가 전적으로 의롭고 정당하다는 것이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어떠한 말씀을 하시거나 판단을 내리시더라도 자신은 하나님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동의적 대구법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한편 이러한 다윗의 고백은 자신이 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던 어떠한 심판도 감수하겠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즉 사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옴과 우리아의 살해로 하나님으로부터 세 가지 혹독한 형벌을 선고받았다. 칼이 그의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않을 것과(삼하 12:10) 다른 사람이 백주에 그의 처들과 동침할 것과(삼하 12:11)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태어날 아들이 죽을 것을(삼하12:14) 선고받았던 것이다.
  •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엄정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았을 때는 물론 그 심판이 이루어졌을 때에도 →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정당하심을 인정하였으며 조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 이러한 다윗의 성숙한 신앙적 태도가 본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2) 그는 자기의 근원적인 타락을 자백하고 있다(5절).

"나는 죄악 중에 출생하였도다."


 💡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신의 죄악된 상태에 대한 깊은 탄식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악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남을 보여준다.

  • 원죄의 전이 (Transmission) 교리와 관련해 — 왜 인간이 적를 지을 수밖에 없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

인간 안에 있는 죄를 향한 경향성, 즉 죄악된 본성은 = 육체의 부모로부터 전이된 것.

이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Original Sin)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어는 시언어 자신이 지은 죄의 책임을 어머니나 조상에게로 돌리는 것은 아니다.

다윗은

  1.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고백함과 동시에
  2. 이러한 죄악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 요청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요청하고 있다.  "내 영혼아, 이리 와서 내가 쪼개고 나온 반석을 살펴 보라, 그러면 너는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을 알 것이다.  내가 이전에 이것을 깊이 생각해보았다면, 나는 내가 유혹에 그토록 담대해져서는 안 되며 내 마음속의 부싯돌을 가지고 감히 불꽃 속에 뛰어 들 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 죄는 방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로 그 점을 고려하여 죄를 옹호하거나 변명하지 않게 하라-여호와여 내가 그렇게 하였나이다.  그러나 실상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었나이다.  내 마음이 나를 그리로 이끌었나이다"(왜냐하면 합당한 관심과 경계,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활용했더라면 그것을 막을 수도 있었으므로.  그러한 탄원은 그릇된 것일 뿐만 아니라 참된 회개 자들은 결코 제안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죄가 중함을 알게 하라.  여호와여, 나는 음행과 살인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음란하고 살인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자신을 증오합니다."

이밖에도 다윗은 자기의 몸의 놀라운 구주에 대해 말하고 있다(139:14, 15).  그의 몸을  "지으심이 신묘막측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자기의 몸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부모의 몸을 통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자기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여종이었다는 경건한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 어머니와의 인연을 호소하고 있다(116:16; 86:16). 그러나 여기에서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는 은혜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이었을지라도, 그녀는 날 때부터 이브의 딸이었고, 그 일반적인 성품에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래의 결백과 정직함을 잃은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서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슬프게 탄식해야 한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우리 몸에는 죄의 올무를.  영혼에는 죄의 씨앗을.  그리고 몸과 영혼 모두에게 죄의 오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원죄"라 부른다.  이유는 그 죄가 우리의 기원(祈願)처럼 오래된 것이고, 우리의 모든 실재적인 범죄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그 어리석음이며, 악으로 기울어지고 선에서 멀어지려는 경향이요, 즉-이러한 경향은 개심한 자들을 괴롭히게 한다-개심하지 않는 자들을 파멸케 만드는 그 원인이다.

이 죄악은 하나님으로부터 후퇴하려는 경향성이다.

 

Ⅲ.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6절),

  • 즉 우리에게로 향한 그의 선한 의지("주께서는 중심에 진실하심을 원하오니, 주께서는 우리가 모두 정직하고 성실하며 우리의 고백에 진실 되기를 원하십니다)와
  • 우리 안에서의 그의 선한 역사("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셨나이다.  또는 "하시리이다.")를 인정하고 있다.

 💡 51: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하나님께서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

‘중심이’ ⇒ 앞선 5절의 ‘죄’, ‘죄악’과 대립되는 개념.

  • ‘신실함, 성실함’
    = 생각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인 모습이 아닌 정직하고 진실한 모습, 거짓 없는 모습.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진실과 지혜는 사람 훌륭하게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명석한 두뇌와 건전한 마음(신중과 성실)은 하나님의 사람의 온 전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2.하나님은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친히 우리 안에서 이루신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사 우리로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정규적인 방식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나 이것의 결과는 어떠한가?

(1) 하나님은 이것에 의해 의롭게 되시며 순찰케(분명케) 되신다.

"여호와는 내 죄의 장본인이 아니었습니다.  주께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나 혼자 그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여러 차례 내게 성실하도록 훈계하셨고, 또 내가 그것을 중히 생각했다면 이러한 죄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음을 나로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활용했다면, 나는 내 결백을 지켰을 것입니다."

(2) 이것에 의해 죄는 한결 무겁게 되고 있다.

"여호와는 진실함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우리아를 속였을 때 어디에 진실이 있었겠읍니까?  주께서 내게 지혜를 알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아는 바대로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3) 이것에 의해, 그는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그를 용납해 주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회개하도록 격려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1]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결코 다시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겠다는 진지한 결심을 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셨나이다." 즉, 하나님은 돌아오는 죄인들에게서, "미음에 가시가 없는가"를(32:2) 주목하고 계신다.  다윗은 회개속에서 하나님께 향한 그의 정직한 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납해 주시리라는 것만큼은 의심치 않았다.

[2]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결심을 훌륭하게 할 능력을 주시리라는 것, 즉 "마음에 숨은 사람"(벧전 3:4)이라 불리우는 중심에, 새 사람에, 하나님께서 지혜를 알게 하사 어느 때든 유혹의 음모를 분별하여 피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기대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기도로서 읽고 있다.

"주여, 이 일에서는 내가 어리석게 행했습니다.  왜냐하면 앞날이 내게 지혜를 알게 했기 때문입니다."

  • 진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지혜를 주실 것이다.
  • 자기의 의무를 성실하게 행하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의 의무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 본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시며 그래서 자신 속에 지혜틀 알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내 속’

  • 원형 ‘싸탐’ 은 ‘비밀스러운 방'이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모두 닫혀져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과 같이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지고 닫혀진 시인의 마음을 가리킨다.

‘알게 하시리이다’

  • 원형 ‘야다으’ = 본질적, 체험적 앎.
  • ⇒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를 원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 배워서 알기 원하는 것 = ‘지혜'

  • 그 지혜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 성경은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이라 밝힌다(잠 9:10).

본문의 지혜는 무엇인가?

  • 죄를 미워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바른 앓과,
  •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기 위하여 자신이 취할 행동에 대한 깨달음.

이와 같은 지혜를 어떻게 얻는가?

  • 다윗은 이러한 지혜를 스스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표현, 여기서도 다윗의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 잘 도러난다. 

●회개의 탄원(1)(시편 51:7-13)

Ⅰ. 여기에서 다윗이 어떻게 간구하고 있는가를 보자.

그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의 뛰어난 탄원을 올리고 있는데, 만일 여기에 "그리스도를 인하여"란 말을 덧붙인다면, 그 기도는 다른 어느 기도 못지 않게 복음적인 것이 된다.


 💡 7-9절에서는 앞의 1,2절과 마찬가지로 다시 죄과를 씻어주시기를 간구한다.

이러한 거듭된 간구를 올리는 이유

  • 죄 문제의 해결이 다윗에게는 그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
  • 시인은 1절과 2절에서 사용했던 세 동사를 여기서 한 번 더 사용한다.
    1. ‘정결케 하소서' (7절),
    2. ‘씻기소서' (7절),
    3. ‘도말하소서’ (9절)

1.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와 그 죄에 의해서 물든 그 더러움에서 자기를 깨끗케 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7절).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나의 죄를 사하시고, 그것이 사함 받았다는 것을 나로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죄로 인해 박탈당하고 잃어버린 그 특권을 회복할 수 있게 하소서" 하는 뜻이다.


 💡 ‘우슬초’

  • 다윗이 자신의 더러워진 영적 상태를 문둥병과 관련시켜 언급하고 있는 것.

사실 문둥병은 죄의 증상과 매우 흡사하다.

  • 문둥병에 걸린 자들이 무감각해지듯이,
  • 죄를 범한 심령은 죄의 무서움과 하나님의 징벌에 대해 무감각해지게 된다. 이런 의미로 다윗은 영적인 문둥병에 걸린 자신을 우슬초로 정결케 해달라는 기도를 드린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표현은

  • 의식적 율법의 구별, 즉 문둥이를 깨끗케 하는 경우나 부정한 자들의 몸에 물이나 피를 뿌려 우슬초를 얹어 놓음으로써,
  • 그들이 드디어 그들의 더러움으로 인한 제약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을 시사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로 하여금, 의식법상 부정한 자들이 우슬초로 씻음으로써 그들이 잃었던 특권을 다시 누리게 되듯이, 주의 은총과 주와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이 재허가된 것을 확신케 하소서."

즉 정결케 하는 물이 우슬초 다발로써 뿌려졌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이 생생한 믿음에 의해 내 영혼에게 역사하사 정결케 하소서. 율법에서는 시체를 만진 자는 하나님의 전 뜰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었다.

마찬가지로 사망의 일, 즉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교제를 끊어지게 하는 범죄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서 우리의 양심을 정결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이다(따라서 그것을 "뿌림의 피"라 부르고 있다.  히 12:24).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우리 죄에서 깨끗케 했다면, 그때 우리는 정말로 깨끗케 될 것이다(히 10:2).  이 열린 샘에서 우리를 씻는다면, 우리를 씻는다면, 우리는 눈보다 더 희게 되어 무죄로 방면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용납될 것이다.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사 1:18).


 💡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눈보다 희리이다’

  • ‘눈(snow)'
    • 진홍빛같이 붉은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 죄에 대한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표현이다(사 1:18).
    본절에서는 우슬초로 죄된 마음을 정결하게 한 뒤 다시 물로 깨끗하게 씻은 결과로 흰 눈보다 더 희게 된 정결한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 이 마음은 10절의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정한 마음’과 새롭게 하시는 ‘정직한 영'과 관련이 있다.
    • 더러워전 것이 단지 깨끗해진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정결함의 극치를 뜻하는 것이다.
    • 이는 전에 지었던 죄의 얼룩이나 때가 전혀 보이지 않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 팔레스틴에서 눈을 본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눈에 대하여 신비롭게 생각하였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것들 중 가장 희고 신비한 것이었던 눈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으로만 자신이 정결케 됨을 아주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2. 그는 자기 죄가 사하여지는 용서의 위로를 얻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슬픔의 쓴 뿌리인 죄가 제거된다면, 그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8절).  즉 나로 주께서 받으시고 주께서 말씀하신 확고한 평화를 얻게 하소서. 그리하여 유죄 판결과 경고로 인해 부러진 뼈가 즐거워하도록, 다시 세워지고 고통에서 벗어나 편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저히 위로 받고-선지자의 말대로-초목처럼 무성할 수 있도록 하소서."


 💡 51: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1. 첫째 간구: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 시인이 듣고 싶어하는 즐겁고 기쁜 소리는?
      • 문맥상 바로 죄사함에 대한 선포이다. 인간이 죄를 지을 때 찾아오는 죄책감은 천근만근의 무게로 인간의 마음을 짓누른다.
  2. 둘째 간구 :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죄로 인해 진정으로 상한 마음의 고통은 - 부러진 뼈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속박의 영이 때리고 상하게 하는 것과 양자(兩者)가 되게 하는 영이 고치고 싸매는 것은 똑같은 영에 의해 행해지는 일이다.


💡 ‘골절은 그것을 겪는 인간에게 헤아릴 수 없이 큰 고통을 가져다준다.

원문에 사용된 ‘뼈’ = 복수명사.

  • 이는 마치 그의 몸 구석구석 마디마디의 삐가 다 부러졌다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이렇게 자신의 뼈들이 짓눌려 부러겼다는 표헌은 죄로 인해 그가 얼마나 고통스워했는지를 너무나 생생하게 나타내준다.

다윗은 바로 이처럼 죄로 인해 징계받는 자신이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 이것은 곧 죄사함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다.
  •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우선 죄사함을 통해 죄책감으로 인한 심적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란 간구는 죄사함을 통해 죄로 인하여 임하였던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의미틀 지닌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 이러한 견해는 당시 다윗이 죄의 무게로 인하여 마옴이 괴로웠을 뿐 아니라 그의 육체조차 심하게 상해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 그리고 죄로 인해 그가 겪는 혹독한 육체적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죄용서와 연관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2) 회개한 죄인에게 주는 확고한 용서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와 기쁨은 - 가장 극심한 고통에서 풀려나는 것처럼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3) 그는 완전하고 충분한 용서를 간구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자기의 위로의 근거로서 매우 진지하게 원하고 있는 것이다(9절).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옵소서. 즉, 내 죄에 격노하여 나를 내 죄과대로 다루지 마소서. 내 모든 죄악을 주의 기록책에서 도말하소서.  햇빛에 의해 구름이 사라지고 흩어지듯이 그것을 도말하소서"(사 44:22).


💡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 보통은 은혜 베푸심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반대로 하나님의 진노 및 심판과 관련해 사용되었다. 시인은 보다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에 대한 심판을 거두어 달라는 간청을 올리고 있다. 

3. 그는 완전하고 충분한 용서를 간구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자기의 위로의 근거로서 매우 진지하게 원하고 있는 것이다(9절).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옵소서, 즉, 내 죄에 격노하여 나를 내 죄과대로 다루지 마소서, 그것이 내 앞에 있사오니, 그것을 주의 등뒤로 넘기소서, 내 모든 죄악을 주의 기록 책에서도 말하소서, 햇빛에 의해 구름이 사라지고 흩어지듯이 그것을 도말하소서"(사 44:22).


 💡 9절, …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 1절의 ‘도말하소서’와 동일한 표현.
  • 다윗이 거듭 동일한 간구를 올리는 것을 통해 당시 그를 짓누르는 죄책감의 무게가 얼마나 견디기 어렵고 힘든 것인지 

4. 그는 선별케 해 주는 은혜를 간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참된 회개마다 요서와 평화를 구할 때처럼 진지하다(10절).


 💡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

  1. ‘엘로힘’ 신명을 사용.
  2. 창세기 1:1에서 하나님어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나타낼 때 사용된 사용한 동사 ‘빠라'의 명령형을 사용.

이러한 표헌을 사용한 것은 앞선 1 절에서와 마찬가지로

  • 자신에게는 죄 용서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근거가 아무것도 없음을 나타낸다.
  • 즉 시인은 자신의 사죄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은 자신 안에서 발견될 수 없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 이는 그가 시인하였듯이 자신은 본성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러한 역사는 오로지 천지틀 창조하신 권능을 지니신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일이었다.
    → 그래서 그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권능을 강조하는 신명인 ‘엘로힘'과 하나님에게만 적용이 가눙한 동사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나타내는 ‘빠라' 동사를 사용한 것이다.

그는, "내가 범죄 하였을지라도 이 백성들 앞에서 나를 높이소서"라고 말한 사울처럼, "주여, 내 명성을 보존 해주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았다.  아니 그의 큰 관심은 자기의 타락한 성품이 변하는 것이었다.  그가 죄책을 느끼는 그 죄는

(1) 자기의 본성의 불결함의 증거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다.

그는 자기 마음이 더럽다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지금 뚜렷이 보았고, 그것을 슬프게 탄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고칠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하나님께서(그의 대권은 창조하는 것이다) 그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기를 간청한다.  마음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그 마음을 새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능력에는 그 어느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는 자연의 하나님으로써, 자기 권능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깨끗하게 되고"(요 15:3) "거룩하게 되는" 것은(요 17:17) 은혜의 하나님이신 그의 권능의 말씀에 의해서다.


 💡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역사이 필요한 사람

⇒ 다윗만이 아니라 인류의 시조 아담의 죄성을 안고 죄악 중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 구약 선지자들은 이같은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였고(렘 31:33; 겔 36:25-27),
  •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성취된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을 운명에 처한 인류를 구속하실 구원의 반석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회개하고 그의 구원을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용서하시고 그들의 심령에 당신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사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신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된 본성을 죽이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려는 마음이 그를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정한 마음'으로 번역된 ‘레브 타호르' 는

  • 성령에 의헤 지배받기 시작한 깨끗한 마음을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그것은 자기 본성의 부조화였고, 자기 자신 안에 이루어진 선한 역사를 크게 말소시켰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주여,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죄가 그 원이 되었던 영적인 힘의 소멸을 치료하시고 나를 다시 올바른 상태로 세우소서.  내 안에(어떤 자의 풀이대로) 견실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그는 이 사건 속에서 그 자신의 변덕과 모순을 많이 발견했다.  그러므로 그는 "주여 앞으로 나를 고정시키시어, 내가 이처럼 주를 떠나는 일이 결코 없게 하소서"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여기서 다윗은 범죄함으로 파괴되었던 자신의 마음을 회복시켜 이제 더 이상 흔들림이 없게 해달라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정결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며 살기를 원하고 있다.

→ 이를 통해서 시인이 단순히 지금 당면한 범죄에 대한 징벌과 이로 인한 수치를 면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징벌은

  • 마치 뼈가 꺾이는 것처럼 처절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었고 그의 심령과 육체, 삶과 명성에 심대한 해악을 끼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인의 가장 본질적인 관심은

  •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서 새로운 삶,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다시 회복하고,
    거기서 흔들리지 않는 데 있었다.
  • 이러한 시인의 진솔한 심경은 본절만 아니라 이어지는 11,12절에서도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5. 그는 자기에게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 그리고 자기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그의 선하신 역사가 계속되기를 간구하고 있다(11절).

(1) 그가 결코 하나님의 은총에서 쫓겨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소서.  주께서 미워하시고, 심지어 관찰하기도 싫어하는 자처럼 쫓아내지 마소서."

그는 그가 하나님의 보호에서 축출되지 않기를 구했다.  그리고 그가 어디를 가든 거룩한 임자가 그와 함께 하여, 그 지혜로 인도되고 그 능력으로 보호받기를 구했다.  또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절당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다.  "나로 주의 전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항상, 기도로써 주께 접근할 자유를 갖게 하소서."

그는,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서 그에게 임하게 하리라 경고했던 현세적인 심판을 반박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리 이다.  그러나 주여, 주의 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소서.  내 집에 들어온 칼이 결코 그곳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면, 나로 하여금 한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면 모든 일은 잘될 것이다."


💡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는

  •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를 상징하며,
  • 그 구원을 고대하는 인간의 유일한 기쁨과 소망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로부터 내침을 당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절망이요 멸망이다.

그래서 시인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박탈당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는 죄로 인해 성령을 근심케 했고 격노케하여, 물러가도록 했음을 알았다.  다윗은 자기도 또한 육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자기의 영으로 하여금 더 이상 그(다윗)와 겨루거나 그에게 역사하지 않도록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창 6:3). 그는 다른 것보다 이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서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파멸한다.  여호와의 영이 떠났을 때, 그는 얼마나 죄악적 인간이 되고 심히 비참해졌던가!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간절하게 청하고 있다.  "주여, 주께서 내게서 무엇을 거두어 가시든, 내 자손, 내 면류관,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든, 주위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삼하 7:15  참조). "성령을 계속 나와 함께 있게 하시어, 내 회개의 일을 온전케 하시고, 내가 죄에 빠지는 것을 막으며, 왕으로서 그리고 시편 기자의 하나로서 내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하소서,"


 💡 11절,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주의 성신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 =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다는 의미를 함축.

구약 시대에 성령은 영구적으로 임하지 않으셨으며 머무시다가 떠나기도 하셨다.

  • 사울 왕은
    •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예언까지 했지만(삼상 10:10),
    • 그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성신을 거두시고 악신어 그를 지배했다(삼상 16:14).
  •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기도를 드러고 었는 것이다.

한편 구약 시대와 달러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그리스도께서 맹세하신 약속에 따라 성령은 영원토록 성도와 함께 더무신다(요 14:16).

  • 한번 내주한 성령은 결코 그 개인을 떠나지 않으신다.
  • 따라서 성도는 성령의 떠나심이 아니라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엡 4:30).
  • 보다 적극적으로 성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업기 위해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고 거룩한 일에 힘써야 한다.

따라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 본절의 ‘거두지 마소서'라는 기도 대신 성령이 층만함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어 없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리며,
  • 항상 성령의 층만함을 덧입기를 사모해야 할 것이다.

6. 그는 거룩한 위로가 회복되고 거룩한 은혜의 교제가 영원하기를 간구하고 있다(12절). 다윗은 자기의 죄로 인한 두 가지 나쁜 결과를 발견했다.

(1) 죄는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소서"하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 즉 하나님과 구주, 그리고 영생의 소망 안에 있는 기쁨, 즉 하나님과 구주, 그리고 영생의 소망 안에 있는 기쁨밖에는 참되고 견고한 기쁨을 모른다.  고집스러운 죄로 인해 우리는 이 기쁨을 박탈당하며 빼앗긴다.  우리의 증거는 모호하게 될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소망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 구원 속에 있는 우리의 유익에 대해 이처럼 많은 이유로 의심할 때라면, 어떻게 우리가 그 기쁨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할 때, 우리는 이 기쁨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바랄 수가 있을 것이다.  회개의 눈물 속에서 씨뿌리는 자들은 새로운 때가 올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 속에서 거둘 것이다.


💡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 이미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 8절에서도 간구했다. 그런데 자신의 심령의 갱신을 간구하면서 본절에서 다시금 그같은 기쁨의 회복을 청원하는 것.

사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 자신이 짓는 죄로 인하여 구원을 빼앗기지 않는다.
  • 단지 구원의 기쁨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구원의 기쁨을 빼앗긴 성도는 어떻게 되는가?

  •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고,
  • 능력 있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것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한, 하나님이 주시는 샘솟는 영적 기쁨을 맛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속에서는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없는 반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여 정결함을 받고 영이 새롭게 되면 → 구원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다.
  • 죄는 성도들에게 슬픔을 주나,
    회개를 통한 용서는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사실 밧세바 간음사건과 관련된 범죄를 짓기 이전까지만 해도

  •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그 누구보다 큰 영적 기쁨을 누렸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기쁨은 범죄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아가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하였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다윗은 하나님께 다시금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2) 죄는 그를 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자유하는 주의 영을 주소서. 나는 곧 죄에 또는 실의에 빠지려 합니다.  주여 나를 붙드소서. 내 자신의 심령은(비록 사람의 심령이 자기의 연약함을 지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지라도) 충족하지 않습니다.  나만 홀로 버려진다면, 나는 분명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으로 나를 붙드시고 그로 내 능력을 전멸시키려는 악한 영을 대적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자유하는 영, 자유롭게 역사하는 자유로운 대리인입니다"(그리고 그 영은 그가 역사하고 있는 자들을 자유롭게 만든다.  왜냐하면 주의 성령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기 때문이다).

"주의 독창적이며 광대한 영입니다."

다윗은 다기가 우리와의 일에서 매우 음흉스럽게 그리고 왕답지 않게 행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처신은 야비하고 천박했다.  "주여" 그는 말하고 있다.  "주의 성령으로 하여금 고귀하고 대범한 교훈으로 나의 영혼을 감화시키어, 내가 항상 나답게 행할 수 있게 하소서." 자유로운 영은 확고하고 견고한 심령으로서 우리를 붙들어 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여길수록 우리는 더욱 견실하게 그것을 행할 것이다.


 💡 12절,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본문은 ‘자원하는 심령’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마음 속에 머물 수 었도록 도와 달라는 간구이다.

  • 시인은 자신이 자원하는 부드러운 심령을 유지하는 것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 타락한 인간은
    • 본질적으로 죄를 사랑하며,
    •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 없이는 언제 어느 순간 범죄에 빠져들고, 은혜에서 떠나게 될 지 알 수 없는 존재임을 다윗은 분명히 알았으므로 이러한 간구를 드렸던 것이다.

Ⅱ. 다윗이 여기에서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지를 보라(13절).

 💡 후반부 13-19절

: 다윗이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 체험을 전제하고 세가지 서원을 드리는 내용.


1. 어떤 훌륭한 일을 그는 약속하고 있는가?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이다."

다윗은 그 자신이 범죄자였으므로, 경험에 의해 범죄자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회개의 길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발견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려고 결심하고 있다.  즉 그가 가르치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우리가 회개에 의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그는 죄를 범한 다른 사람에게 그와 같은 과정을 밟도록, 자신들을 낮추고, 그들의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도록 가르치려 하고 있다.

(2) 용서의 긍휼로 우리에게로 향하시는 하나님의 도이다.

하나님은 그에게로 돌아오는 자들을 영접하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  그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지도하기 위해 그 자신의 실례로써 전자의 것을 가르쳤고,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 자신의 경험으로써 후자의 것을 가르쳤다.  이 시편에 의해 그는 이 세상 끝까지 범죄자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것을 그들에게 말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회개자들은  전도자들이 되어야 한다.  솔로몬이 그러했고 복된 바울도 그러했다.


 💡 서원1

51: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가르치리니’

  • 시인은 죄에 대한 용서와 정결한 마음의 창조를 간절히 바라는 간구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 즉 시인은 자신이 체험한 바 놀라운 구원과 회복의 은혜를 인하여 자신 스스로 죄인들을 향한 교육자가 되어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서원을 올리고 있는 것.

사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다. 죄에 대한 고백 또한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공동체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 바른 신앙을 가진 자는
    : 자신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힘쓰게 마련이다.
  • 다윗은 용서함 받고 정결하게 된 뒤 자신이 새로운 삶을 영위할 것만을 생각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은혜를 받은 이후 자신이 공동체 내에서 무엇을 헤야 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변개치 않기 위해 하나님 앞에 맹세 곧 서원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 본절에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간증 삼아 자신과 동일한 상황에 처한 자둘을 향해 용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겠다고 서원하고 있다.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 = ‘하나님의 도'

  • 구약 성경 내에서 ‘하나님의 도'는 주로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 본절에서는 이러한 의미와 더불어 다윗이 처한 상황과 관련해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다시금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즉 이는
    1. 율법이란 의미와 더불어,
    2. 죄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의 용서를 통헤서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 

2. 그는 그가 이것을 행함으로 인한 어떤 훌륭한 결과를 그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는가?

"죄인들이 주께 돌아 오리이다.  그리고 주를 떠나 그들이 계속 유리하려 한다거나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길에서 긍휼을 발견치 못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범죄자들을 가르치는 큰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요 목표인 행복이며, 그 일에 기여하는 도구로 쓰이는 자들도 행복하다(시 5:20).


 💡 13절, ‘…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 회개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표현.

회개는 = 바로 인간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는 것.

  • 즉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되돌아오는 것이 회개이다.
  • 이 단어는 지나간 시절의 잘못됨을 청산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포함하고 있다.
  • 즉 다윗은 신정 왕국의 정치적•영적 지도자로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깊은 자각을 가지고,
    • 범죄자들로 하여금 단지 죄를 뉘우치는 정도가 아니라,
    •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지키며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의 탄원(2)(시편 51:14-19)

Ⅰ. 다윗은 죄책을 지니지 않게 될 것과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러한 탄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데서 온 간구했고,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사한 마음으로 선포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1. 그는 죄책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하고 있으며, 그 때에는 하나님을 찬미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14절).

그가 기도하고 있는 구체적 죄는, 피를 흘린 죄, 즉 암몬 자손들의 칼로써 우리아를 살해하여 지금 죄책을 지고 있는 그 죄였다.  아마도 그는 여지껏 그 자신이 우리아를 죽이지는 않았다는 어리석은 변명으로써 양심의 입을 막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가 살인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피가 하나님께 복수를 외치는 것을 듣고, 그는 하나님께 긍휼을 부르짖어 구하고 있다.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나로 하여금 내가 빠졌던 이러한 종류의 죄책 아래 있게 하지 마시고, 그것을 사함받게 하소서. 그리고 나로 다시는 이러한 죄책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우리 모두는 피흘리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이 기도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자들을 죄에서 건지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이렇게 탄원할 수 있다.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죄의 지배에서 건지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신다면, "자기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하나님은 용서의 긍휼과 죄를 방지하는 은혜에 대한 영광을 모두 취하셔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그의 은혜를 위해 작용하며 창의와 성화라는 대 과제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이 사실로 그는 자신을 위로하기를 원하고 있고, 따라서 그것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자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의를 "높이 노래" 하려 했다.  하나님의 의의 혜택을 얻은 자들은 모두 그렇게 행해야 하며, 그들의 모든 것을 그 은혜의 덕분으로 여겨야 한다.


 💡 서원2

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공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다윗의 회복의 은혜에 대한 확신


2.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도하고 있으며, 그 은혜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15절).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그리하여 내가 죄인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가장 훌륭한 설교자도,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그리고 박학한 혀를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거의 이것을 행할 수 없다)

"내 입이 주를 찬송하며 전파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 51: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범죄함이 그의 입술을 닫았고 기도의 입을 거의 막아 버렸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수치와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존전에 갈 수 없었고, 더욱이 그에게 말씀드릴 수도 없었다.  즉 그의 마음이 그를 정죄하였으므로, 그는 하나님께 대해 거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특히 그의 찬송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가 구원의 기쁨을 잃었을 때, 그의 수금은 버드나무에 걸려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마음에 다시 찬미의 곡조를 넣어 주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다.

죄책으로 인해 혀가 굳어진 자들에게는 죄가 사함 받았다는 확신이야말로, 에바다-"열리다"라고 실제적으로 말해 준다.  입이 열릴 때, 그들은 어찌 사가랴처럼(눅 1:64)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겠는가?

Ⅱ. 다윗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그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 그는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16절).

"주는 제사를 즐기지 아니하시나니('그렇지 않으면 내가" 용서와 평화를 얻기 위해 진심으로 "드렸을 것이다)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여기에서 다윗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얼마나 기쁘게 수천 마리의 수양을 바치고자 했는가를 보라.  죄로 인한 자기의 비참함과 위험을 철저히 깨달은 자들은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어떤 비용도 아끼려하지 않는다(미 6:6, 7).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제사 따위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시는가 보라.  사실상 하나님은 복종을 시험해보는 것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써 제물을 바치기를 요구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제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유의 가치나 의의 때문에 그것을 기뻐하시지는 않았다.  "주는 제사와 제물을 즐겨 아니하시리라." 그것이 죄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것을 바치는 것이 그에 대한 사랑과 의무의 표시일 때 이외에는 그것에서 만족을 취하실 수 없다.


 💡 51: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인이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제사를 줄겨 아니하시나니',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 제사가 전적으로 무용지물이라는 표현이 아니다.

→ 이는 정성과 겸허한 마옴, 정직함, 감사가 결여된 제물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구약의 제사에 대한 부정적 표현들은(삼상 15:22; 사 40:6; 암 5:21; 미 6:6) 모두 하나님어 세우신 제사 제도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사를

  • 목적 그 자체로 보지 않고,
  • 자신들의 축복의 수단으로 보거나 범죄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하는 것을 지적한 것.

특히 본절은 → 일반적인 모든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자들이 하나님께 잘못된 마음으로 드렸던 제사에 국한된다.

  • 일부 히브리인들은 속죄 제사를 드리는 그 행위 자체로 자신이 지은 죄가 마술처럼 모두 사라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도덕적 • 윤리적 • 언격적 범죄가 이러한 형식적 제사 행위 하나로 모두 해결되겠는가?
  • 그들은 제사 제도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지하기보다는 제사 의식 자체를 더 신뢰하고 의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허탄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죄인의 자세가 아니다.

지금 다윗은 제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자세를 지적하며 자신은 여기서 벗어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요구
    • 제사란 형식이 아니라 그 제사 속에 담긴 바른 마음을 요구하신다.
  • 그러므로 헌제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처럼 온전한 자기 부인어 있어야 한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의례적 행위가 아니라 그러한 의식을 통한 헌제자들의 자기 부인과 죄된 과거 행실과의 단절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세가 전제될 때,

  • 하나님은 긍훌과 자비를 베푸사 헌제자의 제사를 받으심과 동시에,
  • 그의 죄를 사하시며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2. 그는 참된 회개가 얼마나 하나님께 잘 상달되는가를 또한 알고 있었다(17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조건

  1. 연약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심령 깊숙한 자각과,
    그로 인하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
  2. 이러한 자신을 결코 업신여기거나 멸시치 않으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풍성한 자비에 대한 자각과 확신을 가지는 것. 

(1) 모든 참된 회개자들 안에 역사되고 있는 훌륭한 것은 상한 심령, 즉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로 보시는 것이다.  모든 믿음의 행위에서 특히 회개의 행위에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거기에서 역사되는 것은 마음을 꺾는 것보다 적지 아니한 예리한 일이다.  그것은 스스로 상하고, 또 죄로부터 상한(단절된) 마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유순하며, 하나님의 징계 아래에서 인내하는 마음, 이끌림을 받아 복종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요시야의 마음처럼 부드러우며,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마음이다.  우리에게 그러한 마음이 있다면!

(2) 하나님은 얼마나 은혜롭게 이것을 받으시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요," 한 번만이 아니고 여러 차례 구하시는 제사이다.

그것은 모든 번제의 제사를 대신한다.  죄를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 상하심이 유일한 속죄의 제사이다.  왜냐하면 그것 이외에는 어떤 제사도 죄를 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제사요, 인정의 제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쳐지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요구하시며(그는 번제를 위해 이 양을 마련하신다), 그것을 용납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은 짐승을 사육하고 그것을 많게 한 건이 아니라 그것을 죽이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용납해 주시는 것은 우리 육신의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제물은 묶여져, 피를 흘리고, 불태워졌다.  마찬가지로 회개하는 마음은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묶여지고, 통회 가운데 피흘린 다음, 죄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거룩한 열심으로 불살라진다.  그리고 제물은 예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제단 위에 바쳐졌다.  마찬가지로 상한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상달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는 참된 회개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업신여기지 않으시는 제사이다.  사람들은 상한 것을 업신여기나 하나님은 그러치 않으실 것이다.  그는 찢어지고 상한 짐승의 제사는 멸시하셨지만, 찢겨지고 상한 마음의 제사는 멸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상한 마음을 소홀히 보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거절하거나 거부하시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해롭게 한 것을 보상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멸시하시지 않는다.  교만한 바리새인은 마음이 상한 세리를 멸시했고, 그는 그 자신을 매우 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멸시하지 않으셨다.  표현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통회하는 심령"을 은총으로써 살피시기 위해 천지를 훑어 보신다(사 66:12; 57:15).


 💡 본시의 내용은 앞선 제50편과 연결이 된다.

  • 앞선 제50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감사의 제사라고 노래했다(50:14.15).
  • 그러나 본시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한다.

이 두 시편이 참되고 온전한 제사에 관해 지적하는 바를 연결시켜 보면, 참된 제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어요 또한 자신의 죄악된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보면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Ⅲ. 다윗은 하나님의 영화를 주시하면서 시온과 예루살렘을 위하여 중재하고 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1. 하나님 교회의 유익에 대한 것이었다(18절).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소서." 즉

(1) "시온에서 경배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의 이름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모두에게 선을 행하소서.  그들이 나와 같이 이렇게 상처를 입히고 연약하게 만드는 이러한 죄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을 옹호하시고 구하소서."

영적인 고통 가운데 있었던 자들은 자기와 비슷하게 고통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방법을 스스로 알고 있다.  또는

(2) "이스라엘의 공적 유익을 위해 선을 행하소서."

다윗은 자기의 죄로 인해 유다와 예루살렘이 해를 입은 것을 깨달았다.  즉 그것이 얼마나 선한 백성들의 손을 약하게 하고, 마음을 슬프게 했고, 또 그들의 대적 자들의 입을 열게 했는가를 깨달았다.  그는 또한, 자기가 공적인 인물이었으므로, 자기의 죄가 그 성과 나라에 심판을 초래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손상시키고 위태하게 만든 그 공적 유익을 안전케 하고 증진시켜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그는 자기 죄과로 인해 나라가 심판받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아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는 자기 죄가, 지연시키고 중지시키려고 위협했던 그 축복을 지속시켜 주시고, 그 선한 사업을 수행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가 다른 곳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그의 섭리로 시온에 선을 행하실 뿐만 아니라 주의 "은택"으로 즉,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을 택하시어 그의 이름을 두셨을 때에 그 장소에 대해 지니고 계셨던 그 특별한 은총으로써, 그것을 행하시어-아마도 지금 건축 중에 있는-그 성이 세워지고 그 선한 사업이 필역될 수 있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다음 사실을 명심해 두자.

[1] 우리가 매우 중요한 우리 자신의 일로 인하여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니, 우리 주님은, "주의 이름을 거룩히 하옵시며" 하는 기도로써 시작하도록 가르치셨다.

[2] 우리의 죄로써 우리가 공적 유익을 해친 것을 생각하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특히 기도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봉사에 전념해야 한다.


 💡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2.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에 대한 것이었다.(19절).


 💡 51: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기도한 것처럼, 다윗과 그의 백성들에게 화해하셨음을 보여 주셨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전의 공적 봉사를

(1) 즐겁게 수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번제물-순전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의도를 갖고 있었던 온전한 제물-을 가지고 그의 장막에 올 것이며, 어린양과 수양뿐만 아니라, 수소와 가장 비싼 제물도 제단에 바칠 것이다.


 💡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서원.

즉 다윗은 이스라엘 선민 공동체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서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앞선 16절의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니'라는 표현과 모순되는 표현이 아니다.

  • 앞서도 언급했지만 16절의 ‘제사’는 참된 회개와 헌제자의 진실이 결여된 형식적언 제사를 언급한 것이다.
  • 그러나 본절에 언급되는 제사는 마음과 정성이 깃든 제사이며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이 전제된 제사이다.

‘수소'

  •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 제물들 가운데 가장 크고 가치 있는 제물.

시인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장 좋은 제물을 정성껏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의미로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2) 하나님께 용납되도록 수행해야 한다.

"주께서 그것들을 기뻐하시리라.  즉, 주의 용납하심을 방해하려고 위협했던 죄가 제거되었음을 우리가 깨달을 때는 주께서도 기뻐하시려고 바랄 수 있을 것이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적 집회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 하나님이 그들의 겸손한 봉사에 의해 얼마나 영화롭게 되고, 그들은 하나님이 그것을 은혜롭게 용납하심으로써 얼마나 행복하게 되는가를 생각하면 모든 선한 사람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