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5, 시편 3, 4, 잠언 20, 골로새서 3
묵상구절
50:1 <아삽의 시>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50:2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50:3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50:4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50:5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50:6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
50: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50: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50: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50: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50: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50: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50: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16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50:17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50:18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50:19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50:20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50:21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50: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매튜헨리/옥스퍼드
- 감사와 행위의 참 제사를 촉구하시는 심판자 여호와의 선포 -
(저자: 아삽. 분류: 지혜시)
서론
💡 아삽의 시
시편 가운데 총101편이 저자를 밝히고 있고 그 가운데 12편이 아삽의 시이다. 본시를 제외한 아삼의 다른 시들은 시편 제3권에 해당하는 제73-89편에 모여져 있다.
아삽은 시편 전체 150편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73편을 지은 다윗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시를 지은 자이다. 이처럼 아삽이 많은 시를 짓고 이것들이 시편에 수록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탁월한 시인이었으며 음악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두어 쌓는 자' 란 이름 뜻을 지니는 레위인 아삽은
- 다윗 시대 세 명의 악사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다윗과 솔로몬 처하에서 성전 찬양단의 책임자로 활약하였다(대상 15:16-19; 대하 5:6, 12).
- 그는 선견자로 불려질 만큼 탁월한 영성을 지닌 인물이었다(대하29: 30).
- 또한 그는 자신이 성전 찬양단으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그의 자손들도 찬송하는 자들이 되었으며(대상 25:1-9),
-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여호와 전의 지대를 놓을 때에도 찬송을 도맡아 하였다(스 3:10).
한편 아삽의 저작 가운데 제73.78.82편과 더불어 지혜시로 분류되는 본시에는 참된 제사는 짐승의 피로 드리는 형식적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삶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삶이라는 아삽의 성숙한 신앙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상이 배어난 시어와 운율에 잘 융해되어 있다는 것은 그의 탁월한 예술적 소양을 잘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시에는 형식적 에배에 대한 질타와 외식적 삶에 대한 경계가 많이 나오는 데 반해 아삼이 주로 활동하던 시대는 바른 신앙이 뿌리를 내렸던 시기란 점에서 본시의 저자가 다윗 시대의 아삽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이 었다.
히브리인들이 자신의 시를 조상이나 존경하는 인물에게 헌정하고 그 어름을 저자처럼 제시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편 표제의 저자 표시는 많은 경우 직접적인 저자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아삽을 저자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사실 본시의 내용과 관련해 다윗 시대나 솔로몬 시대에도 형식적 에배와 외식적 삶을 살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아삽은 이를 경계하고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바른 예배 자세를 교훈하기 위하여 본시틀 지었을 것이다.
●메시야의 존엄 (시편 50:1-6)
💡 본시의 전반부 1~6 절에서 시인은 당신이 택하신 자들로부터 제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면모를 노래하며 이러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제사로 언약한 자를 심판할 증인으로 불러모으심을 선포한다.
아삽이 이 시편의 연주를 맡았던 악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저자였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히스기야시대에 그들이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대하 29:30).
여기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신하들은 왕 중 왕의 이름으로 부름받고 있다(1절).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 엘, 엘로힘, 여호와, 무한하신 능력과 공의와 긍휼의 하나님,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께서 부르셨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고, 성령은 바로 심판의 영이시다. 온 세상은 참여하도록 부름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그들의 사곡함과 배은망덕함에 가졌던 쟁론이 판단력을 가진 누구에게나 잘 보이도록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이스라엘 사람들로 "하나님과 그의 포도원 사이를 판단하게"하라, 사 5:3), 사람의 모든 자녀들이 관심을 갖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방법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메시야 왕국이 세워질 때 모든 사람들이 복음적 예배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거기에 참예하도록 초청받아야 하기 때문이며(말 1:11; 행 10:34, 35 참조), 또 한 마지막 심판의 날에 모든 나라 백성들이 함께 모여 멸망당하고 또 각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 자신에 대해 낱낱이 심문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50:1 <아삽의 시>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본절에서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호칭을 세 가지나 반복해서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여기서는 일단 하나님의 광대하신 면모에 회중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전능하신 자' (’엘')
- ‘신들 중에 가장 높으신 신(God of gods)' 이라는 뜻. ‘전능하신 하나님 (The Mighty One) '의 능력을 강조하는 호칭.
- ‘엘로힘'
- 천지 만물을 친히 창조하신 분으로서 삼라 만상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나타내기 위한 호칭.
- 그러나 본시에서 하나님의 심관자로서의 면모가 부각된다는 점에서 본다면 본절에서는 피조물에 대한 심판자(The Judge)의 자격과 능력을 구비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한 호청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여호와'
- 즉, ‘예흐와'는 특히 본시의 일차 독자이며 시인이 일차적으로 교훈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면모를 강조하는 호칭.
- 이처럼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여러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전능하신 창조주로서 하나님이 가지신 공의로우신 재판장의 모습과 당신의 백성을 택하시고 보호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말씀하사’, ‘부르셨도다’
- 부르셨도다 (’와이크라’)
- 본시 전체의 흐름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
- 원형 ‘카라’ : ‘큰 소리로 부르다’, ‘선포하다’, ‘소환하다’
-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부르신 대상 = ‘세상’
- 세상 =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전체를 포괄하나, 여기서는 이러한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특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과 구별되는 세상 거민을 염두에 둔 표현.
- 하나님께서 이들을 부르시는 목적은?
- 일차적 목적은
: 하나님이 그 백성,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판단하시는 데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그러고 더 나아가서는 이돌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 일차적 의미에 더하여
: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을 예시하는 의미도 지닌다고 추정할 수 있다. - 실제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세상의 마지막에 모든 인류를 자신 앞에 불러모아 심판하신다. 자신의 명령에 순종한 성도들에게는 상을 주실 것이고 불순중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틀 자신 앞에 부르시어 재판하실 때 하늘과 땅도 부르신다. 하나님은 불법을 자행한 백성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이들이 행한 바들에 대해 결코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늘과 땅을 그 증인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 일차적 목적은
하나님이 부르신 세상의 범위
-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 이는 빛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영역이 제한이 없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Ⅱ. 심판대는 마련되었고 심판관은 좌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율법을 주셨을 때,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 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신 33:2)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곡함을 책망하시기 위해, 그리고 율법적인 제도를 폐하고 그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오실 때 그것을 언급하여 여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 시내 산에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2절).
시온에 그의 궤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 진노를 일으키는 백성들에 대한 그의 심판이 선포되었고, 그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이 발포되었다(욜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 사람의 양심을 깨닫게 하고 그의 교회를 개혁하며 정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때로 그의 말씀과 그의 법령으로 또 그것에 의해 보통 때 이상으로 그의 임재와 권능을 나타내신다. 그 때에 항상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시온에서 빛을 발하셨다"고 일컬어질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영적 예배를 이룰 복음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었고(사 2:3; 미 4:2), 또 그 가르침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될"(눅 24:47)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시온에서 빛을 발하셨다"고 일컬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챤들은 그 가르침을 받기 위해 시온 산에 이른다고 일컬어질 수 있다(히 12:22, 28). 시온이 여기에서 "온전히 아름다운 곳"이라 불리우고 있는데 그것은 시온의 거룩한 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거룩함은 아름다움의 완성인 것이다.
💡 50:2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 시인은 심판자로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회집하였음을 묘사하였다. 이제 본절에서 시언은 그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틀를 밝힘과 동시에 빛으로서의 하나님의 면모를 노래한다.
‘온전히’
- ‘완벽한’, ‘완성된’
- 시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이 더할 나위 없 이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완벽한 곳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
- ‘시온’ 은 예루살렘 도성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시인이 이곳을 아름답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이 언약을 두셨으며 당신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
- 한걸음 더 나아가 본절에서 언급된 시온은 이 땅의 시온 뿐만 아니라 천상의 시온인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하나님이 거하시고 후에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이 극히 아름다움을 예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 이처럼 빛과 하나님을 연관시키는 이유
-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특성을 상징하는 가장 적절한 표헌 중 하나이기 때문.
-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빛의 옷을 입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104:2),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거하신다고 묘사하기도 하며(딤후 6:16) 심지어 빛들의 아버지(약 1:17)라고도 묘사한다.
- 하나님의 임재
- 이러한 표현들과 마찬가지로 본절은 하나님이 당신과 언약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판단하시기 위해서 모든 세상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시온에 나타나신 것을 → 시온에서 빛을 발하시는 것으로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상징
- 어두운 곳을 비추어 실상을 드러내는 빛처럼 선악간에 행한 숨겨진 인간의 모든 일을 밝히 드러내시어 상과 벌을 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을 상징.
- 어둠 가운데 숨겨진 것들이 빛 아래 드러나듯이 하나님의 밝은 빛이 인간에게 비월 때 인간의 모든 숨겨졌던 선행과 죄악이 드러나게 된다는 점에서 이 견해도 설득력이 있다.
2. 그가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리로다."(3절)
이전처럼 사람의 죄를 간과하시는 듯하지 않으시고(21절). 그들에 대한 그의 불쾌함을 보이실 것이다. 그리고 또한 오랫동안 "감추어졌던"비밀과 "이방인들이 후사가 되리라"는 것(엡 3:5, 6), 그리고 의식적인 율법의 간막이가 없어지리라는 것이 그의 거룩한 시도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더 이상 감추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저 위대한 날에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고," 그의 율법에 귀를 기울이여 하지 않았던 자들로 그의 심판을 듣도록 만드실 것이다.
💡 50:3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 ‘잠잠하다’ : 불의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침묵
- 이는 그들을 향한 어떠한 형벌도 내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침묵이 심판 시에는 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을 증인으로 소환하시고 사람을 심판하실 때에는 잠잠치 않으신다. 마치 재판장이 재판날에 의인의 선함을 드러내며 죄인의 죄상을 밝히듯이 하나님께서도 심판날에 각 사람의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낱낱이 밝히시고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과 형벌을 내리신다.
3. 그의 나타나심은 매우 장엄하고 두려울 것임에 틀림 없다.
"그 앞에는 불이 삼키리로다." 사곡한 유대 민족을 깨우치기 위해 삼키는 불을 무서워하는 시몬의 죄인들로(사 33:14) 그들의 죄에 놀라게 할 수 있도록 그의 심판의 불이 그의 책망과 말씀에 길을 마련해 줄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의 왕국이 세워지기로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눅 12:49). 성령은 매우 격렬하고 강한 바람에 밀리는 광폭한 불의 갈라지는 혀같이 임했다(행 2:2, 3).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 그리스도는 불꽃 중에 나타나실 것이다(살후 1:8; 단 7:9; 히 10:27 참조).
💡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 하나님의 임재의 장면의 묘사
‘불’
-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현현에 동반되는 가장 대표적인 현상.
- 예)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나(출 3:2)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불과 연기와 큰 진동 가운데 하나님은 임재하셨다(출19:18).
-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근거로 시인은 하나님이 권능 가운데 임하시는 장면을 마처 불어 주변의 모든 것을 태우는 듯한 이미지로 묘사하였다.
‘광풍이 불리로다’
-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가공할 만한 것인지?
4. 시내 산에서 그가 "일만 성도"와 함께 강림하신 것과 같이 그는 이제 "윗 하늘에 반포하시어," 모세가 흔히 이스라엘에 대해 "천지를 불러 증거로 삼고(신 4:26; 31:28; 32:1)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로 증거를 삼으셨듯이"(사 1:2; 미 6:2), 이 엄숙한 과정을 주시하실 것이다.
저 위대한 날에 있을 심판의 공의는 천지에 의해, 성도들과 천사들에 의해, 심지어는 무수한 거룩한 것들에 의해 입증되고 성원될 것이다.
💡 50:4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 원문에 충실하게 다시 번역하면,
- ‘그는 그의 백성을 판단하시기 위하여 위로부터 하늘에게 그러고 땅에게 외치신다(ASV, He calleth to the heavens above. And to the earth, that he may judge his people)’
‘판단하시려고’ = 선과 악을 가리는 행위
- 본절에 나타난 판단의 목적
- 엄정한 재판을 통해 죄인에게 형벌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훈계와 권고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Mowinckel).
⇒ 5절의 표현에서도 위 사실이 잘 드러남.
- 엄정한 재판을 통해 죄인에게 형벌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훈계와 권고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Mowinckel).
하늘과 아래 땅
- 1절에 나오는 바 세상, 즉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 특히세상 거민을 증인으로 소환하신 데 어어 하늘과 땅이 증인으로 소환되었다.
- 여기서 하늘과 땅을 다른 피조물과 구분하여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 천지는 역사의 산 증인이며 모든 인간 역사의 흥망 성쇠를 다 목격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이 섭리하신 모든 역사를 지켜본 하늘과 땅을 증안으로 채택하여 사람들을 당신의 법정에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Ⅲ. 회합이 소집된다(5절).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실제로 성도들에 대한 것.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모이게 하라. 소수의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만 모이게 하라. 왜냐하면 다음에 올 진노의 위협이 그들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곡한 자에 대한 견책을 정직한 자들이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외적 행사에 머무르고 제물만을 바친 자들의 예배는 거절하시나, 제사를 통해서 "그와 계약을 맺고," 그 제사 목적에 상응하는 자들의 예배는 은혜로이 받으실 것이다.
복음을 가르치고 그리스도 왕국을 세우는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요 11:52).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의 모든 성도들은 "그 앞에 모여"(살후 2:1) 그와 함께 입회인으로서 판단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6:2). 성도들이 제사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음이 그들의 특성이라고 했다.
(1)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성도들로서, 그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서 그의 백성이 되며, 이처럼 여호와께 참예한 성도들만이 하나님께로 모이게 될 것이다.
(2) 우리 불쌍한 죄인들이 하나님께 용납되도록 하기 위해 그와 계약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제물에 의해서, 저 위대한 제물인 그리스도에(그로부터 모든 형식적인 제사가 귀중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의해서이다. 우리가 다시 계약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 전에 첫 계약이 깨어진 것에 대한 속죄가 있어야 한다.
💡 50:5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나의 성도 =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
-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제사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창 15장). 제물을 둘로 쪼개고 그 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가게 하심으로써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던 것이다.
- 여기서 ‘언약' 이란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어 ‘뻬리트’
- ‘ 자르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
- 이 단어는 고대 사람들이 언약 체결시 짐승을 둘로 쪼개어 태우는 의식을 수행한 데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의식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쪼개어진 짐승처럼 처절한 최후를 맞을 것임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두 계약자는 이러한 계약적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약속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했다.
-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러한 계약 행위를 하나님과 더불어 수행하였다. 이 언약을 체결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제사와 예배를 요구하셨고 하나님은 그와 그 후손들에게 기업을 약속하셨다. 이러한 아브라함과의 제사 언약은 모세에 의헤서 보다 구체화되었다.
- 모세는 시내산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제사에 대한 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명령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은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한 자라는 명에로운 이름을 갖게 된 것이며 하나님 앞에 마옴과 성품과 뜻을 다해 제사해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라는 표현은
- 이스라엘 백성들의 뿌리와 역사, 그 정체성을 밝혀주는 것임과 동시 에,
-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를 취헤야 할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또한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백하는 성도들에 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거룩한 백성"이라 불리우고 있다(출 19:6). 그들은 나라로서 하나님과의 계약, 즉 특별한 계약 속으로 들어왔으며, 그것은 "제사로" 매우 엄숙하게 행해졌다(출 24:8). "그들이 와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하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보내시는 책망을 받게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합당한 때에 그의 아들을 통해 그들에게 보내시는, 의식적인 율법대신 들어서게 될 복음을 받게 하라. 만일 이러한 것들이 무시된다면, 그들은 이와는 다른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듣고, 또 그들이 복종하지 아니하려는 그 말씀으로 심판받을 것을 예기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Ⅳ. 이 엄숙한 재판의 결과가 예고되어 있다(6절).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라."
부름을 받아 그 재판의 증인이 될 하늘이 그것을 반포하리라(4절). "하늘의 무리가 가로되, 할렐루야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도다"(계 19:1, 2).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의 모든 책망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는, 그가 세우신 복음(그것은 "영원한 의를 가져오고" 그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속에 있는, 그리고 특히 저 위대한 날의 심판 속에 있는 그의 의는 하늘이 선포하게 될 것이다.
💡 50:6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 악과 조금도 관련이 없으시며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
- 본절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를 하늘이 증언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 이는 일차적으로 앞서 증인으로 채택된 하늘(4절)이 증인으로서 성설하게 발언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도 이해된다. 일반적으로 법정에서 증인들이 자신의 진술을 하기 이전에 정직하게 증언할 것을 선서하듯이 본절에서 시인은 그러한 선서에 따라 증인으로 참석한 하늘이 공정하게 자신이 본 것을 거짓없어 증언하는 듯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
- 하나님이 심판장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를 선포한다.
- 하나님만이 참되고 유일한 심판장이시다.
인간이 하나님의 판단을 절대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까닭은 이처럼 하나님만이 바른 판단을 내리시는 궁극적인 공의의 심판장이시기 때문이다.
1. 즉 그것은 보편적으로 알려질 것이며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이다.
"하늘이" 하나님 창조주의 "영광을," 그리고 그 지혜와 권능을 "선포하듯이"(19:1), 그것은 또한 적지 않게 "심판장"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와 의로우심을 적나라하게 선포할 것이다. 영광과 공의를 외치는 소리가 너무 크므로, 10편 3절 이하와 같이,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온 땅에 통한다."
2. 그것은 명백히 시인되고 증명될 것이다.
하늘이 선포하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죄인들의 양심까지도 그것에 동의 할 것이며 하늘뿐만 아니라 음부도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 그가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다.
(1) 따라서 그는 공정하실 것이다.
그가 그의 피조물에게 어떤 해를 끼치신다는 것은 불가은한 일이며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위해 판단한다면 불공평하게 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신이 재판장이실 때는 어떤 불의도 행해질 리가 없다.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사도 바울은 이 이유 때문에 이러한 생각에 대해 놀라고 있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롬 3:5, 6) 이러한 결론들은 완전히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해서 어떤 예외도 없을 것이며 어떤 상소거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의로움을 얻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공의를 수행하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것을 인정하도록 명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판단하실 때의 순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51:4).
●형식적인 제사의 무능함 (시편 50:7-15)
하나님은, 여기에서 의식적인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써 자기들의 믿음을 대신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다루고 계신다.
Ⅰ. 그는 그와 이스라엘 사이의 최초의 계약을 제시하고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그가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그리고 그들은 그의 백성임을 승인했으므로 이 쌍방은 동의했던 것이다(7절).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든 간에 그가 말씀하실 때 그의 백성들이 청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편한 마음으로 기대할 것이다. 그가 그의 말씀과 섭리의 책망과 위협으로 우리에게 불리한 것을 증거하실 때에도 우리는 그가 말씀하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매와 그것을 정하신 자"를 들어야 한다.
Ⅱ. 그는 형식적인 제사를 경멸하신다(8절 이하).
1. 이것은 율법 아래에서 제사를 행하는 것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과 쟁론하셨다. 그러나 그 쟁론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들의 의식적인 제도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것을 준행하는데 부족함이 없었고, 꾸준히 하나님 앞에 바쳤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음녀처럼 그들이 바친 것으로 인해 그들의 욕정이 채워지기를 바랐다(잠 7:14). 그들이 꾸준히 바치는 제물은 그들이 무시하는 율법의 더 중한 것을 보상해 주고 용서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들이 이러한 제도를 약간 소홀히 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투시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부도덕한 이야기에 비해 극히 작은 범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그들의 헌물 없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장들의 많은 가족들을 부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의 제단에 가져온 그 많은 제물들로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히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으로 인해 그를 그들의 큰 채무자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 주고계시다.
💡 50: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 본문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책무와 그릇됨을 거듭헤서 자세하게 훈계하겠다는 것.
여기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은 ⇒ 제사와 관련된 것이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제사로 언약한 자들로서 특별한 제사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것을 알고 지키려고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들의 노력이 너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 제사의 참된 의미와 정신은 사라지고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제사로 변질된 것이다.
- 제사에 참여할 때 느끼는 기쁨과 환희는 사라지고 의무와 책임만이 강조되는 종교적인 의식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간과하실 수 없으셨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지닌 문제를 지적하실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여러 가지 호칭이 나온다.
- ‘내 백성아'
- 이러한 호칭에는 그들어 왕이신 하나님에게 소속된 백성이란 사실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 ‘이스라엘아’
- 여기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구별된 자들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 이는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인격적이고 언약적인 관계가 성립되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표현
⇒ 이러한 표현을 통해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고 계시는지를 보다 확연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을 전제한 뒤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언급하고 있다.
-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시기 어전에, 또 어떠한 행동을 명하시기 이전에 먼저 당신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관계틀 분명하게 정립하신다.
- 본절에서도 하나님은 이 관계를 분명하게 밝히신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것을 정립하는 것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수행하는 것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요소임을 나타내준다.
= 달리 말해 이는- 바른 성도의 삶은 올바른 신앙 고백 위에서만 가능하며,
- ‘어떤 존재가 되느냐(Being) '가 ‘
무슨 일을 하느냐(Doing)'보다 더 중요함을 분명하게 나타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 즉 그는 그들의 제사가 필요치 않으셨다.
"삼림의" 모든"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을 가지시고(9,10절) 그들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그가, 그들 모두를 항상 그의 시야와 영영 안에 두고 계시며 그가 원하실 때는 그 어느 것이나 사용할 수 있는 그가 무엇 때문에 그들의 수소와 수염소가 필요하겠는가?
그러한 것이 모두 그를 섬기는데 그가 그것들을 그의 뜻대로 할 수 없겠는가?(104:27-29) 모든 산새와 들짐승들이 있는 그의 곳간인 그 곳에 우리가 어떠한 것을 더할수 있겠는가?(11,12절)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족함은 그에게 어떤것도 더할 수 없는 우리의 절대적인 부족함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 50: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50: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50: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50: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제물을 인하여는 절대로 책망을 받지 않는다는 본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 제물로 인하여 그들을 책망치 아니하겠다는 것은 그들이 제물에 있어서 만큼은 소홀함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 그러나 이는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완전 무결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는 제물에는 문제가 없지만 그들의 제사에는 문제가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제사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계시는가?
- 먼저는 감사와 행위의 참 제사를 촉구하는 본단락의 도입부인 7절에 언급된 표현을 통해 무엇이 이들의 잘못인지를 감지해 낼 수 있다.
- 앞선 7절에서도 다루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백성', ‘이스라엘아',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 이처럼 반복된 모든 표현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을 이같은 언약적 관계를 상기시켜 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이처럼 소중한 언약적 관계를 망각한 채 눈에 보이는 제물만을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앞선 7절에서도 다루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백성', ‘이스라엘아',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 아울러 본절 후반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제물에 대해 책 망처 않겠다는 이유로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 이러한 본문의 표현 가운데는 항상 번제만 놓여 있을 뿐 그들의 삶과 진심은 거기서 멀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 물론 그들은 모세가 지시한 대로 제사 의식만큼은 철저히 준수하였고 매일 엄청난 양의 제물을 도살하여 바쳤다. 따라서 외형적으로만 볼 때 그들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제사는 결코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들은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너무나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 이에 대하여는 이어지는 16-21 절 사이에서 여러 가지로 지적되고 있다.
⇒ 이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통해서 — 하나님만을 경배하면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해서 소와 염소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을 위한 것어라는 착각을 할 때가 많이 있다.
제사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된 인간을 위한 것이다.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
-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에서 매우 귀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생각하면서 이러한 제사 행위에 대해 스스로 만족해하며 자랑하는 경우가 있다.
- 그러나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제사 드리는 자의 합당한 정신
- 자신이 하나님의 부족과 필요를 채운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 다만 부족한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의 소유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며 자신의 속죄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축복에 감사 의 표현을 했다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 아울러 그것은 모두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란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11, 12절).
하나님은 모든 생물들에 대해 확고 부동하게 알고 계시고,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다 알 수 없는 새들의 종류와 그들의 거처까지 모두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아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기르시는 풍성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기근이나 어려움에 처하여 누군가에게 도움을 부탁하는 일은 전능자이신 하나님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삼림의 모든 짐승과 천산의 생축이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 하나님은 인간이 소유한 제물에 어떠한 욕심도 없으시다.
오로지 하나님의 관심은 :
- 제물을 바치는 자의 정성과 진실된 마음에 있다.
(2) 그는 그들의 제사로 유익함을 입을 수 없었다.
그들이 베푸는 이러한 종류의 선함이 그에게 미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러한 일에서 의롭다면 그는 미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러한 일에서 의롭다면 그는 더 의로우셨다(13절).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겠느냐?" 그들의 제사가 그것 자체로,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어떤 본질적인 탁월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어떤 즐거움이나 찬미를 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무한하신 성령이 우리의 육신처럼 고기나 술에 의해 도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실상 이방인들이 숭배했던 마귀들은 "그들의 희생의 고기를 먹고 전제(奠祭)의 술을 마셨다"고 일컬어지고 있다(신 32:38). 그들은 참되신 하나님에게서 도적질해 간 충성심 속에서 스스로 크게 즐긴다. 그러나 위대하신 여호와는 이것으로 즐거워하실 것인가? 아니다. "모든 번제물보다 낫다."
더욱이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의 죄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한 그들의 제시가 그에게 용납되지 못할 뿐아니라 가증스러운 것임을 자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즐거워하시기는커녕 그것을 조롱거리로 간주하셨다. 따라서 그것은 그를 모욕하는 것이며 격분케 하는 것이었다(잠 15:8; 사 1:11이하; 66:3; 렘 6:20; 암 5:21 참조). 따라서 그들은 여기에서 이 모든 행사를 중지하도록, 그리고 다른 모든 일에서도 그들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그에게로 그들 자신을 향하게 하라고 경고받고 있다.
💡 50: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신에게 바친 제물이 신들의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얼마나 좋은 제물을 바치느냐에 따라 신들의 만족도가 다르다고 여겼다.
- 그들은 신들이 제물을 먹고 그 제물의 가치에 따라 제물을 바친 자들을 축복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방인돌은 제사에서 제물의 가치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이교적 제사 개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흘러 들어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치는 제물이 하나님의 음식과 음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자의 마음에 있다. 인간이 가진 소유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시 가장 가치 있는 제물로 여겨졌던 수소의 고기와 염소의 피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음을 분명히 한다.
2.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이러한 율법이 폐지될 것을 내다보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몬드 박사는 그것을 이처럼 풀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의 왕국을 세우실 때는 제사와 제물로써 예배하는 옛 방법을 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이 "항상 그 앞에"있도록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8절). 즉 그는 더 이상 그의 예배자들이 그의 제단에서 태울 수소나 수염소를 가져오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실 것이다(9절).
사실상 그는 결코 이것을 그가 필요하거나 즐거웁기 위해 지정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이미 그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삼림과 산에 있는 짐승들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울안에 갖고 있는 것 이외에 이러한 것들을 모를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소유권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들이 때가 충만한 때에 십자가에 바쳐져 죄를 대속하게 되는 그 위대한 제사를 예시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밖에 모든 영적 제사들을 기쁘게 인정해 주시리라는 것을 예시하기 위해 그것을 임명하셨다.
Ⅲ. 그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지시하고 있다.
율법 아래에서 그러한 제사는 모든 번제와 제물보다도 훌륭한 것이었으며 그 때에는 여기에 큰 역점을 두었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복음 아래에서 개혁의 시대 전까지 부과되었던 그 현세적인 의식의 자리에 대신 놓이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무엇이 훌륭한 것인가를 그리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과 제사가 소홀히 되고 찬탈되었을 때에 용납에 주실 것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14,15절).
1.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인정해야 한다.
"교회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라.”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읽고 있으며 죄를 자백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코 죄악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는" 제사이다(51:17). 죄를 버리지 않는다면 속죄물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2.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에 대해 감사드려야 한다.
매일, 날마다 자주, 그리고 특별한 때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라"("하루에 일복 번씩 내가 주를 찬미하리이다"). 만일 그것이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그에 대한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다."(69:30, 31).
💡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참 제사의 요건 = ‘감사’
-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나아오는 자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 특별한 제물, 특별한 준비, 특별한 형식을 요구하는 적이 아니라
그들이 너무나 쉽게 준비할 수 있지만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는 “감사”와 “거기서 비롯된 찬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3.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한 것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라." 네 죄를 버리고 네 의무를 더 잘 행하여, 네가 그러한 취지로 그와 엄숙히 약속한 것을 수행하라. 우리는 받은 어떤 긍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 긍휼을 얻고자 하여 그에게 한 서원을 틀림없이 갚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감사는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하몬드(Hammond) 박사는 이것을 성만찬이라는 위대한 복음적 규례에 적용시키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그 큰 사랑에 감사해야 하며,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의무의 서원을 갚아야 하고, 또 헌금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든 모형대신에 우리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 복된 기념물을 가지고 있다.
💡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인간의 의무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
앞서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준비할 수 있는 감사의 마음이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신 모습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자신이 마음으로 서약한 바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높으심 앞에 합당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절의 내용은 - 본시에서 지적하고 있는 제사와 관련해 당시 횡행했던 두 가지 잘못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 앞선 본문의 “감사로 제사 드리라”는 것은
- 제사에 대한 바른 정신과 의미를 알고 제사를 드리라는 권면이고,
- “서원을 갚으라”는 것은
- 하나님과 약속한 바를 지키는 바른 삶을 살 것에 대한 요구이다.
사람들은
- 제사를 드리면서도 감사보다는 제사 자체를 통해 자신의 정성과 희생 제물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과시하는 경향이 있다.
- 또 하나님 앞에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단과 더불어 무언가 새로운 일을 이루겠다는 서약을 하지만 다시 죄를 범하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바를 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제사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
- 곧 제사 드리는 자가 제물에 앞서 준비해야 할 감사의 마음을 가질 것과,
-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삶 속에서 온전히 실천할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4. 환난의 날에 우리는 신실하고 열렬한 기도로써 하나님께 우리 스스로를 아뢰어야 한다(15절).
"환난 날에" 다른 신들을 부르지 말고 "나를 부르라."
우리의 환난은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볼지라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이 되어야 하며, 그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그를 인정하고 그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에 의지해야 하며, 우리를 전적으로 그에게 의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은 화목제에 의한 것보다 더 값싸고 손쉽고 빨리, 그러나 더욱 만족스럽게 그의 은총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다.
💡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 가운데 인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 인간적인 방편을 동원해 스스로 위기를 타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 ‘부르라’ : 어떤 대상을 향해 크게 소리질러 부르는 것. 간절한 도움이나 구원을 요청하는 것.
- 위급하고 고통스런 상황에서 성도가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일은 간절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신다.
'내가 너를 건지리니'
- 성도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 하나님은 그를 대신하여 그의 대적들을 무찌르기 위해 무장하고 대신 싸우신다.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구원 역사를 체험한 사람의 합당한 반응 :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
- 이러한 본절의 마지막에 사용된 동사는 물론 사람이 행하는 동작을 나타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 그 자체를 찬양하는 것의 다름아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의 행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
이같은 본문의 내용은 자신들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경종을 울리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 당시도 그렇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드리는 예배나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지키는 것 등 자신이 무언가를 행하고 드림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 그러나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신실하심을 증거하면서 이러한 하나님께 사람이 부족한 부분을 채움으로써 영광 돌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을 분명히 한다.
즉 시인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당신의 백성들의 간구에 응답하시고 구원하시는 방편을 통해 스스로 영화롭게 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5. 그가 합당하게 생각하시는 때와 방법으로 행하시기를 약속하신 대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어 우리를 건지실 때, 우리는 그의 은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언급하고 그에 대한 찬미를 생생하게 함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 그가 우리를 괴롭히실 때 기도로 그를 만나고,
- 그가 우리를 건지실 때 찬미로 그를 만남으로써
—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 14-15절의 관계 : 성도들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삶, 바른 예배를 요구하는 것.
- 본절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인간의 행위가 필요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적어도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악인의 특성 (시편 50:16-23)
하나님은 시편 기자를 통해 그의 백성들에게 그를 경배하고 그와의 교제를 유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치신 후, 여기에서는 악인들과 사곡한 자들에게-그들이 유대교나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든 아니든-말씀하고 계신다. 다음을 살펴보자.
Ⅰ. 그들에 대한 책망.
1. 그들은 믿음의 존귀와 특권을 침해하고 빼앗는 것에 대해 책망받고 있다(16절).
"악인아,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느냐?"
이것은 실상은 불경스러우나 겉으로는 경건한 체하는 자들에 대한 도전으로서, 그들이 자신의 마음과 생명의 가증스러움과 불경건함을 덮고 감추기 위해 율례를 사용할 때, 그들이 믿음의 가면에 대해 어떤 권리를 가지며 어떤 권세로 그들이 그것을 입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만일 그들이 할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게 하라.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메시야 왕국과 앞 구절에서 언급되어진 복음적인 예배 방법이 세워지게 될 그 때에, 유대 교회의 선생이며 지도자였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예언적으로 지적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그 큰 변혁을 억압했고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모세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그들이 가진 모든 능력과 권세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복된 구세주와(마 23:)사도 바울이 그들에 관해 충고하신 말씀은(롬 2:21, 22) 여기에 있는 이 내용과 매우 잘 부합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기에 힘을 기울였으나 그리스도의 교훈은 미워했다. 따라서 복음을 거절한 그들이 무슨 율례를 설명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불의를 행하는 모든 자들, 심지어 경건을 고백하는 자들, 특히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적용된다. 악하고 경건치 못한 자들이 그의 율례를 전하며 그의 언약을 입에 두는 것은 그것 자체가 매우 무모하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큰 모욕이 된다. 하나님의 율례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자들이 그것에 불복종하면서 살고, 하나님의 언약을 그 입에, 아니, 그 마음에 두는 자들이 계속 죄와 사망과 언약을 맺은 것은 아주 가능한 일이며 또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은 찬탈하는 죄를 범하고 있으며, 권리도 없는 영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침입자들처럼 쫓겨나게 될 날이 오고 있다. "친구여 네가 어찌하여 이곳에 왔느냐?"
💡 50:16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악인이면서 그 입으로는 하나님의 율례와 언약을 주절대는 자들에 대한 책망.
악인의 특징
- 여기서 악인들은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며 하나님이 베푸신 언약을 입으로 증거하는 자들로 소개된다. 일견 모순되는 진술처럼 보이지만 이는 17,18절과 연결시켜 보면 그들이 어째서 악인으로 구분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 즉 그들은 하나님의 율례와 언약을 알고 또 가르칠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싫어하는 자들이었고
- 그것을 가볍게 여기며,
-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를 오용하는 자들이었다.
- 즉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거스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율례와 언약을 망령된 목적으로 사용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본절은 표면적으로 이러한 악인의 위선을 책망하는 내용이다.
-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들 중 하나님의 계명을 일상 생활에서 실천하지 않는 자들에게 던지는 책망이다.
이처럼 악인들과 이들의 죄악된 행실을 꾸짖고 책망하는 것은 이들 자체에 대한 책망의 의미만 지닌 것이 아니다.
더욱 근본적인 측면에서 이는
- 이들 악인들로부터 경건한 자들을 지키고,
- 그들로 하여금 경성케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악인들을 경계케 하고 악인들을 공동체에서 분리시키는 일은
→ 언약 공동체가 계속적으로 지켜야 할 하나의 의무였다.
그런 의미에서 본절온 악인들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위선자들의 악행을 본받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그들은 율법과 믿음의 계율을 범하고 어긴 것에 대해 책망 받는다.
(1)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담하게 경멸한 것에 대해 책망받고 있다(17절).
"네가 교훈을 미워하는도다."
그들은 교훈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해야할 것을 가르치기를 사랑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의 교만을 충족시켜 주며 그들을 위대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이러한 재주로 그들의 생계를 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교훈 받기를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을 저지시키고 그들을 굴욕스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너는 계율을, 말씀의 책망과 섭리의 비난을 미워하였다." 교화되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교화의 수단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네가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는도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 앞에 두는 것 같았고, 율법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자 했다(롬 2:19). 그러나 그들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말을 위로 던졌고, 그들이 복종하지 않기로 작정한 그 규례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것은 여호와의 계명을 경멸하는 것이다.
💡 50:17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악인의 두 가지 태도.
-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례를 입으로 말하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교훈을 미워하는 자들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 뒤로 던짐
= 하나님의 말씀을 공공연히 무시하거나 배척함(말씀을 적대시 하고 업신여기는 것)- 특히 ‘던지며’ 에 해당하는 원형 ‘솰라크’ 는 기본적으로 ‘버리다’, ‘쫓아내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성경에서는 주로 제사를 위해 짐승을 잡은 후 그 몸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정해진 장소에 버리는 것을 나타낼 때(레 1:16), 전쟁에서 패한 군사들이 도망하기 위해 불필요한 물품들을 버려두고 도주함을 나타낼 때(왕하 7:15), 극악한 범죄자들을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소제해 버러실 것임을 나타낼 때(렘 7:15)에 사용되었다.
- 따라서 이 단어는 역겹거나 더러운 것, 무가치한 것, 거추장스러운 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버리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것이 본절에서와 같이 ‘네 뒤로' 라는 표현와 더불어 사용될 경우는 더욱 강조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 즉 이는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고 무가치하고 거추장스런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음을 지적하는 표현이다.
(2) 그들은 가장 나쁜 죄인들과 가깝게 연합한 것에 대해 책망받고 있다(18절).
"도적을 본즉,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는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처럼, 그를 꾸짖고 그를 대적하여 증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와 연합하여 그들의 행실을 찬성했다. 그리고 그와 동업자가 되어 그의 저주스런 일로써 얻은 이득을 나누고자 했다. 그리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어 그들이 행한 것처럼 행하고 그들이 악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을 격려하며 또한 그러한 일들을 행했고, 그 일을 행하는 자들 옳다 했다"(롬 1:32).
💡 50:18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악인의 심각한 위선과 가식에 찌든 모습
‘연합하고’
-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수용.
- 그들이 유혹이나 꾐에 빠져서라기보다는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그것을 향한 연모와 사랑이 있었음을 나타낸 것.
→ 이는 이들이 얼마나 죄악을 사랑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단어가 된다. - 이들은 겉으로 율법을 전하고 자신의 경건을 나타내기 위해 입으로는 율법을 되뇌이기도 하였지만, 죄악에 연루되었을 뿐 아니라 그 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악을 사랑하고 의를 미워했던 것이다. </aside>
(3) 그들은 계속 혀로써 가장 악한 죄를 지은 것에 대해 책망받고 있다(19절).
"네 입을 악에게 주어 네 자신에게 모든 모양의 악한 말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네 자신이 거기에 완전히 빠졌다."
[1] 거짓말.
"네 혀로 궤사를 짓는도다."
이것은 거짓말 할 의도와 계획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풀이대로 궤사를 "짜거나 잇는다." 거짓말은 또 거짓말을 낳고 한 가지 속임수는 그것을 덮고 또 하나의 속임수를 요구하는 것이다.
💡 50:19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 자신의 입을 악의 도구로 내어준 악인들.
[2] 비방(20절).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는도다. 즉 그 형제를 야비하게 모욕하고, 왜곡하여 말하고, 당당하게 그를 판단하고 힐책하며, 마치 네가 그에게 명을 내려야 할 그의 주인인 것처럼 그를 처형한다. 그러나 그는 네가 그러한 것처럼 네 형제이며 너와 동등하다. 왜냐하면 그는 네 어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네 가까운 친족으로서 네가 그를 사랑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를 모욕한다고 하더라도 너를 그를 옹호하고 편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잘못을 덮어 주고 그것을 잘 고쳐 주어야 할 네 자신이 그를 모욕했다. 그가 정말로 잘못했다 할지라도 너는 그가 알지도 못하는 것으로 그를 아주 그릇되고 부당하게 책망했다. 네가 석상에 있는 재판장처럼 권위 있게 앉아서 그와 같이 행했다. 너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 네가 존중하고 친절히 해야 할 자들을 비웃고 헐뜯었다."
스스로 악하게 행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나쁘게 말하기를 즐긴다.
💡 50:20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악인의 언행
- 앉아서
- 공박하며
- 비방함
자기의 혈육에게까지 거짓과 속임, 중상의 말을 내뱉는다는 것은 이들 악인들의 타락상을 보다 강조해 주고 있다.
Ⅱ. 이 책망에 대한 증거(21절).
"네가 이 일을 행하였다. 그 사실은 매우 분명하여 부인될 수 없으며 그 잘못은 극히 악하여 용서받을 수도 없다. 네가 이러한 것들을 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알고 계시며 네 마음도 스스로 알고 있다."
죄인들의 죄는 저 위대한 날의 심판에서 그들이 반박할 수 없도록 그들에게 증명될 것이다. "내가 너를 책망하거나 깨닫게 하여 너로 하여금 한 마디 변명도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이 영원히 입을 막고 잠잠케 될 날이 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그들의 목전에 차례로 제시하실 때 그들은 얼마나 당황하겠는가! 그들은 굴욕당하게 될 그들의 죄를 보지 않으려 할 것이며, 그것을 뒤로 던지고 감추며 그것을 잊으려고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생각으로 그들의 양심을 괴롭게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로 자신이 죄를 보게 하시어 그들이 영원한 수치와 두려움을 겪게 될 날이 오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원죄, 자죄, 율법에 대한 죄, 복음에 대한 죄, 첫째 법판에 대한 죄와 둘째 법판에 대한 죄, 그리고 유년, 청년, 장년, 노년기의 죄를 차례로 드러내실 것이다. 그는 증인이 차례로 세워져 차례로 범죄에 대해 말하도록 부름받아 그에 대적하는 증언을 하도록 요청받는 것처럼, 죄목을 차례로 열거하실 것이다.
💡 50:21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 본절에서는 온갖 죄악을 범하고 악한 말을 일삼으며 위선과 거짓을 반복하는 악인들의 오류와 착각, 그리고 그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질 것임을 선언한다.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 하나님은 때가 되면 개인이 지은 모든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나열하고 범죄한 자에게 명백한 죄상을 들며 유죄 판결을 내리실 것임을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
-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있는 죄가 하나도 없다.
-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 대해 인내하시며 충분한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죄에 대한 심관을 취소하시는 일은 없다.
-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 , 이들 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감히 실수조차 없는 죄악된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로 인하여 큰 수치틀 당할 것이다.
Ⅲ. 심판장의 인내 그리고 그 인내에 대한 죄인들의 모욕(21절).
"내가 잠잠하였다. 네 사악한 길을 방해하지 않고 너를 홀로 놔두어 네 방법대로 행하도록 하였다. 네 죄악에 대한 처형은 곧 집행되지 않고 연기되었다."
격노케 하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는 매우 크다. 그 는 그들의 죄를 보시고 그들을 미워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그에게 어려운 일이거나 해로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너그럽게 기다리시면서 그들에게 회개할 여유를 주신다. 그래도 그들의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용서받을 수 없게 만드신다.
그의 인내는 죄인이 그것을 이처럼 악용하므로 더욱 훌륭하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네 자신처럼 연약하고 잊기 쉬운 자로, 네 자신처럼 거짓말하는 자로, 더욱이 네 자신처럼 죄에 친구인 자로 생각하였도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허락으로 그의 인내를 묵인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래 연기 받을수록 그들의 마음은 더욱 굳어진다. 그러나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때가 이미 늦은 그들의 잘못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두려우시며, 그들과 같이 그러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입을 빌어 죄에 침잠한 자들이 범하는 전형적인 오해를 지적한다.
- 그들은 어리석게도 악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을 죄의 묵인이나 용서로 착각한다.
- 즉 위선적인 중교인들은 자신들이 죄를 지었옴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심판이 임하지 않는 것을
→ 자신들이 행하는 종교적 행위를 하나님이 보시고 자신들의 작은 실수들을 용서하시고 묵인하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 심지어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이 승인하는 것으로 보고 하나님을 마치 자신들을 지지해 주는 악의 동류로까지 인식하기도 한다.
- 그러나 이는 그들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인내의 결과이지,
결코 용서와 둑인의 결과가 아니다. ⇒ 이러한 악인의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Ⅳ. 사곡한 자의 무서운 멸망에 대한 정당한 경고(22절).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죄를 알고 계시며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그가 그것으로 인해 너희를 부르시리라는 것을, 그 모욕당한 인내가 더 큰 진노로 변하리라는 것을, 잊었을지라도 그는 너희가 그에 대한 너희 반역을 잊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생각하라. 그것이 너무 늦기 전에 이를 생각하라. 이것을 생각하고, 이에 대한 생각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엄히 때림"을 당하는 것이(마 24:51) 사곡한 자의 파멸이다.
💡 50: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이 내려질 때에는 어디에도 구원을 위한 비상구는 없다.
다만 심판이 임하기 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감사와 행위의 참 제사를 드리는 것만이 이러한 엄정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1. 하나님에 대한 망각이 - 악인의 모든 악행의 근저가 된다.
하나님을 알지라도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분명 그를 잊은 것이다.
2. 하나님을 잊은 자들은 = 그들 자신을 잊은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깊이 생각하여 그들 자신을 되찾을 때까지 그들은 결코 올바르지 못할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개종으로 향한 첫단계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경고를 깊이 생각지 않으려는 자들은 그의 진노의 형벌에 의해 필연코 찢김을 당할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오셔서 죄인들을 찢으실 때 그의 손에서 그들을 건질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들 스스로도 건질 수 없으며, 이 세상에 있는 그들의 어떤 친구도 그들을 건질 수 없다.
Ⅴ. 어떻게 이 두려운 파멸을 방지하는가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주는 충분한 교훈, 우리는 여기서 전체 내용의 결론에 귀를 기울여 보자.
우리는 그것을 23절에서 들을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주요한 목적을 획득하기 위해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지시하고 있다.
💡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와 행위의 참 제사를 촉구하는 본시 전체의 주제요 결론
1. 사람의 주요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그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그 영적 제사는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미해야 하며, 찬미로 제사하고, 모든 제사가 그러한 것처럼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또한 제단이기도 하신 우리 주 예수, 그 제사장의 손에 그것을 드려야 한다. 그것이 불, 신성한 불에 의해, 거룩하고 열렬한 마음의 불꽃으로 불붙여지는 것을 보라.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면서 영적으로 열렬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 주님은 이것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서 해석하고 무한히 기뻐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겸양이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며 사람 가운데 있는 그의 나라의 권세를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 1. 먼저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을 밝힌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옴 받은 인간의 가장 큰 삶의 목적이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바로 그 방법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 여기서 ‘감사로' 란 표현이 사용된 이유
- 제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포함된 감사의 마음이 중요함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2. 이것과 관련된 사람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가 그의 구원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 2.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구원이 임함.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 = ‘길을 준비하는 자’
⇒ 즉,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길을 걸어가는 자.
-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는 다름아닌 구원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고 그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이다.
당시 종교인들은
-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사람들에게 율법을 전하기까지 했지만(16절) 그들의 행위가 악했기에 구원의 길과는 멀었다. 마치 앉은뱅이와 같이 그들의 몸은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과 무관하였다.
하나님은 이들에 대해 구원이 아닌 당신의 철저한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시면서,
당신의 말씀을 진실하게 행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준비된다고 선언하신다.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바(약 2:14) 행위로써 믿음을 온전하게 함으로 구원의 길을 준비하는 자들이 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1) 우리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우리는 또한 우리 행위를 옳게 해야 한다. 감사하는 것은 훌륭하다. 그러나 감사하는 생활은 더욱 훌륭한 것이다.
(2) 행위를 옳게 하려는 자들은 그것에 관심과 수고를 기울여야 하며, 법도대로 그것을 처리하도록, 그들의 길을 깨닫고 그것을 지도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3) 행위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들은 그들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의 구원을 보이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알려지게 될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로 그것을 보고 그것을 즐기도록, 그것을 보고 그들 자신이 그 속에서 영원히 행복하리라는 것을 알도록 만드실 것이다. 이와 같이 행위를 옳게 하는 것은 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또 확실한 길이다.
결론
💡 이상에서 살펴본 본시는 하나님을 향한 바른 삶을 - 감사와 행위의 참 제사란 관점에서 규명하는 지혜시이다.
아삽이 이러한 시를 짓게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성전과 밀착된 삶을 살았던 그의 눈에 그릇된 제사가 횡행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음악적 문학적 재능을 사용하여 이에 대한 교훈적 노래를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시의 내용은 단순히 아삽의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외식적 종교 행위와 위선적 삶은 모든 성도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너무나 위험스런 함정이다.
- 결국 그 함정에 빠지게 되면
- 종교 행위만 살아 남고,
-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그것을 이행하는 성실과 정직은 사라지고 만다.
이처럼 껍데기뿐인 신앙을 지닌 사람은
- 하나님 보시기에 잘라버려야 할 나무와 같이
-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감사로 제사를 드리며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는
- 하나님의 구원을 간직하고,
- 매일 구원의 노래를 부르며,
-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인생의 목적에 충실하고, 감사와 행위의 참 제사를 드리는 것은
= 신앙 생활의 요체로서, 결코 간과되거나 잊혀질 수 없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감사와 올바른 삶을 촉구하는 본시는 너무나 평이하고 단순하게 보여절지 모르나 구원의 길을 가려는 자에게 용기를 복돋워 주며 시대를 초월하여 큰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