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헨리/옥스퍼드
- 악인의 형통 문제에 대한 깨달음과 새 신앙 고백 -
(저자: 아삽. 분류: 지혜시)
서론 📖
전5권 총 150편으로 구성된 시편 가운데제73-89편은 제3권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시편은 신명의 사용에 따라 소위 ‘여호와 시 편'과 ‘엘로힘 시편'으로 구분되는데, 이에 따라 시편을 분류하여 보면, 제 1-41 편은 ‘제1 여호와 시편', 제42-83편은 ‘엘로힘 시편' , 제 84-150편은 ‘제2 여호와 시편'으로 분류됩니다.
이 가운데 ‘제1 여호와 시편' 은 제1권에, ‘엘로힘 시편'은 제2권과 제3권의 전반부에 헤당함니다. 그리고 ‘제2 여호와 시편'은 제 3권 후반부에서 부터 제 5권 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볼 때 제3권은 ‘엘로힘 시편'의 일부와 * 제2여호와 시편'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3권에서 ‘엘로힘 시편'에 해당하는 제73-83편은 전부 아삽의 시이며, ‘여호와 시편' 제84-89편은 다윗이 지은 제86편을 제외하고는 전부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제89편은 에단의 시로 나오지만 에단 역시 고라 자손에 속합니다. 이렇게 볼 때 제3권은 신명의 사용에서와 저자군에서 크게 두 군집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3권에서 고라 자손의 시 는 제2권 41-49편에 이은 두번째 고라 자손의 시 군집입니다.
한편 제3권에서 아삽의 시로 나오는 제 73-83편의 시들은 다윗 시대에 3대 악장 가운데 하나였던 아삼어나 그의 후손들이 성전 예배용으로 지었거나 편집하여 모은 시들로서 그 역사적 배경도 다윗 시대로부터 포로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본시는 이러한 아삽의 시들 중 첫번째로 나오는 시로서 악인이 형통하는 모순된 현실과 관련한 시인의 깨달음에 대하여 고백 • 교훈하는 지혜시로서 대개의 지혜시돌어 그러하듯어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현세상 가운데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신정론 문제를 구속사상에 근거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시는 같은 지혜시인 제37편과 그 주제가 같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제37편은
- 의인이 고통 당하고 도리어 악인이 형통하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공의의 섭리는 계속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그 행위에 따른 공의의 심판을 반드시 시행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악인의 형통과 번영으로 인하여 불평하지 말고 인내로써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기다리는 신앙의 자세를 가지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반면 본시는
- 악인의 형통함을 목도한 시인이 한때 빠졌던 신앙적 갈등과 그러한 갈등 속에서 마침내 깨닫게 된 바 하나님의 역사와 우주적 주권 및 세상 끝날에 행하실 공의로운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신뢰와 확신만이 그러한 신앙적 갈등을 극복할 수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본시의 내용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3절
시인이 한때 악인의 형통함을 목도하고 거의 실족할 지경에까지 처했던 심경을 고백의 형식으로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4-12절
현세에서 득세하여 번성하고 있는 악인들의 형통과 교만에 대하며 묘사하는 내용입니다.
13-17절
악인의 행동을 두고 보아야만 했던 자로서 시인 자신의 극심한 회의와 고뇌 중에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악인들의 결국에 대하여 깨달았옴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18-28절
하나님의 궁극적 공의의 실현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시편 73:1-14)
이 시편은 약간 갑작스럽게 시작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시도다(난외에는 그렇게 되어 왔다)." 그는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 생각해 왔었다. 그가 타오른 불꽃을 이처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마침내 자기의 이제까지의 생각을 뒤엎고 말을 시작했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도다." 비록 악한 사람들이 그의 섭리의 이스라엘에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은총을 그에게서 받았다. 시편 기자는 그가 강하게 기습당했던 시험, 즉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것, 많은 성도들의 은혜를 시험해온 일반적인 유혹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이 이야기 속에서,
Ⅰ. 그는 제일 첫 번째로, 그가 이 시험과 담판하는 동안 꼭 붙잡고 놓지 않기로 결심한 그 중대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1절).
욥은 이러한 시험 중에 들어왔을 때, 자기의 원칙을 하나님의 전지 하심에 주었었다.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다(욥 24:1)." 예레미야의 원칙은 하나님의 의해 기초했다. "하나님이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렘 12:1). 하박국의 원칙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보지 못하시나이다(합 1:13). 시편 기자의 원칙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이러한 것들은 흔들릴 수 없고, 우리가 이에 의해 살기로 결심해야 하는 진리들이다. 비록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시여를 그 원칙과 조화시킬 능력이 없을 지라도, 우리는 그것들이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선한 생각은 사탄의 많은 시험에 대해 우리를 강하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선하시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많은 생각들을 그의 마음속에 갖고 있었으나, 드디어 이 말이 그를 안정시켰다.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은 선을 행하신다.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 다음을 명심하자.
-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되고, 죄의 더러움에서 깨끗해지고, 완전히 하나님의 영광에 바쳐진 정결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정결함은 내면에 있는 진실인 것이다.
- 모두에게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옛 이스라엘에게 그러하셨던 것과 같이 특별히 그의 교회와 백성들에게 선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속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와의 언약 속에 들어오게 하시며, 그들에게 그의 율법과 법령을 주신 일 속에서, 그리고 그들에게 관련된 여러 가지 섭리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셨다. 그는, 마찬가지로 마음이 정결한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신다.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달리 생각해서는 안 된다.
📖 73:1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1-3절에서 시인은 악인이 형통함으로 인하여 자신이 한때 실족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회상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참으로 선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본시의 주제틀 나타내는 시인의 결론적 깨달옴을 선포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었다.
‘참으로’ (아크)
- 시인은 서론 부분에서 결론적인 내용을 서술하면서 '참으로', ‘진실로’, ‘확실히’ 등의 의미를 지닌 부사 ‘아크'를 사용하고 있다.
-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시인의 의도는 분명하다.
- 즉 그는 서론에서부터 본시의 핵심 사항을 강조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를 구현하고자 이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 물른 이후 시인은 자신이 혼들리는 현실, 악인이 온갖 죄악을 도모하면서도 형통함을 구가하는 모순된 현실을 토로한다.
그러나 그런 현실로 인해 하나님의 선하시다는 사실이 변하거나 흔들릴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본시 서두부터 어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한편 ‘아크' 라는 단어는 본절에서만 아니라 13.18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 13절의 경우 앞선 2-12절까지 악인이 형통하고 번영하고 강건한 헌실, 마치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속에서 자신이 느끼는 절망감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 그러나 18절의 경우는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깊이 목상하고 이를 궁구한 뒤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 곧 악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분명히 깨닫고 그들이 당할 궁극적인 운명과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 이를 감안할 때 본절과 13.18절에 사용된 부사 ‘아크’는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바 본시의 핵심 주제를 함축적으로 강조하는 중요한 문학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었다.
현실적인 정황과 관련해 악인의 형통과 번영을 보고 시인 자신은 실로 깊은 영적 흔돈에 빠져들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운 가르침으로 인하여 거기서 헤어나올수 있었고 악언의 궁극적인 파멸을 확신하였으며(18절) 본절에서와 같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행사를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이다(1 절).
‘선을 행하시나’
‘토브'.
- 따라서 ‘하나님이 선을 행하시나’ 는 하나님은 선하시나 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선하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토브' 즉 ‘선'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및 의로우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도덕적 측면을 대표하는 속성이다.
- 이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선이실(막 10:18)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선으로 대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145:9, 15, 16).
- 특히 본절에서 소개되는 이스라엘 중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선을 베푸신다는 것은
⇒ 악인이 득세하는 것 같은 부조리한 삶의 현실 속에서도 의인이 그들의 악에 동화되지 말아야 할 이유라 할 수 있다. - 이는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 가운데서도 참고 선을 행하며 의를 지키는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구원과 축복을 베푸시는 것으로 표면화된다.
본시에 언급되는 신명 :
- ‘하나님’(엘로힘; 3회 1,26,28절)
- ‘주’(아도나이; 2회 20,28절)
- ‘여호와’(예흐와; 1회(28절)
본시에는 다양한 하나님의 이름이 골고루 나오고 있다.
이 가운데 본서 서두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하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강조하는 ‘엘로힘'이란 신명을 동시에 사용한 것은
-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하심을 나타내시는 역사가 ⇒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해 보장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 즉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창조를 이루신 것처럼 그 능력으로 — 당신의 백성들, 특히 마음이 정결한 자들,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선하신 은총을 부으시며 당신의 선하심을 확고히 신뢰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선을 행하시는 대상 =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정결하다’
- 원형 ‘빠르’ : ‘순수한’ ‘깨끗한’ ‘빈’
- 즉 이는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불결한 죄에서 분리되어 있으며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나타낸다.
특히 여기에 ‘마음이' 란 표현이 첨가된 것은
-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시고 내면적 요소를 중시하신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그런데 이 단어와 더불어 사용된 ‘이스라엘 중'이라는 표현은
- 이 의미를 한정한다.
- 즉 본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선택하여 구별한 민족인 이스라엘 중에서도 ‘분리된 사람' 즉 정결한 자를 대상으로 선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갖고 있었던 선민 의식에 대한 도전이다.
-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 중 많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언약은 소홀히 여기면서도 자신들이 택함 은 민족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축복하실 것을 맹신하였다.
- 이러한 그릇된 축복관을 가진 이들을 향해 시인은 그들이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란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선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선포는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에 의해 다시금 확증된 바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회개에 할당한 열매룰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들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8,9).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사실을 넘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는 세례 요한의 증거는 바로 이스라엘 중 정결한 자들에게 당신의 선하심을 나타내신다는 본문의 말씀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를 대상으로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신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형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마음의 청결함을 유지하는 의로운 삶을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Ⅱ. 그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다른 백성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고,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그들에게 더 친절하시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강한 시험에 의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두드러진 선하심에 대해 갖고 있는 그의 믿음이 받았던 충격을 이제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
- 그는 이 시험에 완전히 패배 당하여 정복되지 않은 것을 매우 아슬아슬한 탈출로서 말하고 있다(2절)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매우 만족하였을 지라도,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유혹자가 거의 발꿈치를 걸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나는 거의 내 신앙을 포기하고 그 혜택에 대한 내 모든 기대를 단념할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 73: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하나님의 선하심과 대조되는 자신의 상황과 현실
‘나는’
- 역접 접속사(와우)와 결합된 단어. →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였지만 전혀 다른 국면에 접어든 시인 자신의 상태를 나타낸다.
- 영역본은 ‘그러나 나에 관해서는’ 란 의미로 번역.
여기서 시인이 실족하여 미끄러진다는 것은
- 앞선 1절과 관련해 볼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인들, 정결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악인들의 패역한 행사에 동조하고 그들의 걷는 길을 따라 걷는다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 즉 시인은 불의를 저지르는 악인들이 횡행하는 세상, 그들이 형통하고 도무지 아무런 징게도 없는 불의한 현실들을 눈으로 목격하고 점차 그가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미끄러져 점차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자리, 악인들과 더불어 죄악을 도모하는 자리로 그의 삶이 미끄러져가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2.아무리 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이 때로 몹시 흔들려 곧 그들을 쓰러지게 만들 수도 있다. 가장 견고한 을 시험하려는 폭풍이 있다.
3.결코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을 자들도 때로는 완전히 멸망에 매우 가까이 다가가며, 또한 파멸한 자처럼 느끼게 된다.
영원히 살게 될, 많은 귀한 영혼은 그 생애 동안 한 번은 매우 급박한 전환기를 꺾었다. 즉 거의 파멸할 뻔하고 파멸에 매우 근접했었으며 그것과 치명적인 변절 사이에는 단지 한 발자국의 간격만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에 타기 직전에 꺼내어진 나무토막처럼 간신히 구출되었다. 이러한 일은 구원받은 자의 민족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은혜의 풍요함을 영원히 찬미할 것이다. 이제,
4.우리는 시편 기자가 시험당한 과정, 즉 그가 시험당하고 또 하려 했던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는 어리석고 악한 사람들이 때로 외적인 형통함에 대해 매우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악인의 형통함을" 슬프게 "보았다"(3절). 악한 사람들은 정말로 어리석은 자로서 이성과 그들의 참된 유익을 거슬러서 행한다. 그러나 구경군들마다 그들의 형통함을 본다.
📖 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본절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시인이 실족할 뻔했던 이유는
- 악인들의 삶이 번창하는 모습을 보고 질시하였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시인은 악인들, 오만한 자돌이 물질적 풍요와 건강, 삶의 번창을 누리는 것을 목도하고 깊은 시험에 들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 비록 시인이 악인들의 사악함, 오만한 자들의 방자함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누리는 형통과 번영은 시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악인’
- 외적 행위와 관련된 죄 뿐 아니라 마음의 그릇된 생각까지 포괄하는 용어.
- 1절의 ‘마음이 정결한 자’와 대조, 본절의 ‘오만한 자’와 병행
- —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자.
- 특별히 복수형으로 쓰여 → 시인 주위에 이러한 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형통함’
- 악인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육적 강건과 물질적 형통에 기초해 그 내면까지도 무사안일함을 누리는 것을 나타낸다.
- 특히 이는 4절의 육체적 강건함과 7절의 경제적 풍족함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보고’
- 건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그 무엇이나 본질을 알기 위하여 심사숙고하여 관찰하며 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본절에서 시인은 미완료형을 사용하여 지속적으로 악인들의 형통함을 지켜보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 이처럼 악을 행하는 자들, 오만한 자들이 지속적으로 형통을 누리는 것을 목도하고 그것을 주시하게 됨으로
- — 시인은 그가 가진 굳건한 믿음,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믿음이 흔들리고 그들을 부러워할 뿐 아니라 심지어 실족하고 미끄러져 스스로 그들의 악에 동조할 뻔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오만한 자’
-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높이고 자랑하는 사람들.
- 여기서 시인이 언급하는 ‘오만한 자' 란 외적 형통으로 인해 그 마음이 지극히 높아지고 교만해져서 자신의 그릇된 일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정당화하고 오히려 과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 특히 여기서 정관사가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은 당시 시인의 주위에 이러한 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오만한 자의 이러한 태도는 의롭게 살고자 하는 이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 왜냐하면 그들은 고난 중에서도 의롭게 사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악하다고 하는 우리들의 삶은 이토록 형통한데 의롭다는 너희들은 왜 그토록 고난 중에 사느냐"***라며 조롱을 일삼기 때문이다.
- 본시의 저자도 이와 같은 오만한 자의 형통과 그돌의 뻔뻔한 말을 무수히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을 확신하는 시인에게 있어 이러한 오만한 자들의 태도와 말은 그가 겪는 고난 그 자체보다도 더 큰 어려움을 주었음에 분명하다.
- 그로 인해 시인은 실족할 뻔 하였고 심지어 그들을 질투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1] 그들은 이 인생의 고난과 재난을 거의 당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5절).
"저희는 타인과 같은," 심지어 지혜롭고 선한 자와 같은 "고난도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오직 어떤 특권에 의해 슬픔의 공동적인 삶을 면제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어떤 작은 고난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죄를 적게 범하고서도 더 큰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 73: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 ‘고난’ : 인생이 짊어져야 할 지속적인 어려움, 고난.
- ‘재앙’ : 인생 가운데 닥치는 천재지변이나 전쟁, 질병과 같은 혹독한 재난.
‘사람들’
- 앞의 ‘사람들’ : ‘에노쉬’
-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인간의 연약함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
- 하반절의 ‘사람들’ : ‘아담’
- 인류의 시조인 아담을 지칭하기도 하며 그의 후손으로 ‘보편적 인류'의 일원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표현
- ‘에노쉬'와 ‘아담'의 범주에 포함되는 모든 사람들은 연약함과 죄악에 둘러싸여 각각 인생의 질고를 지고 가며 재난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부지불식간에 혹독한 고난을 겪기도 한다.
- 그러나 시인이 목격하는 바 그의 주변에 있는 악인들은
- 인생에 보편적으로 주어진 수고와 고역도, 인생 여정에 불시에 닥처는 질병어나 기근 흑은 재난도 빗겨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 이는 곧 순전히 죄악으로 일관하여 살아가는 그들이 마치 무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된 자들처럼 살아가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 물론 이러한 무사태평한 삶은 이느 누구에게도 있을 수 없다. 사실 본시의 시인어 지적하는 악인들도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과장법을 사용하여 악인들이 의인과 비교할 때 너무도 태평하며 강건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2] 그들은 이 인생의 즐거움의 가장 큰 몫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편하게 살아가며 즐거움으로 목욕하다. 그러므로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난다"(7절).
과도한 즐거움이 어떠한가를 보라. 즐거움을 절제있게 사용하면 눈을 빛나게 하나, 관능적인 즐거움에 지나치게 빠져버린 자들의 눈은 곧 머리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된다. 향락주의자들은 본능을 만족시키는 척하는 도안에도, 본능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사실상 그들 자신을 고문하는 자들이다.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는" 자들, 즉 그들이 평소에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많이 갖지만, 그들 자신이 원하는 것만큼 갖지는 못한다. 자기 손에 이 세사에 대한 것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 마음에 저 세상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경건치 못하며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경배함이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번영하며 부유할 뿐만 아니라 "재물을 더한다"(12절). 그들은 성공하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다른 사라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키기에 급급할 동안, 그들의 영예, 권세, 즐거움은 재물이 더함에 따라 더욱 더 불어난다. "그들은 그 세대의 형통하는 자이다"(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 73: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본문은 악인이 눈두덩이가 튀어나와 보일 정도로 심하게 살이 쪘다는 표현으로 그들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음을 묘사한 것.
대개 사람이 그 마음으로 기대한 결과만 얻어도 성공과 형통을 어루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악인들이 그 마음에 품고 기대한 것 이상의 것을 얻었음을 나타냄으로 → 그들 스스로도 바랄 것이 없을 만큼 풍요와 번영, 형통을 누리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3] 그들의 마지막은 평온한 듯이 보인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이상적인 일로서 제일 처음에 언급되어 있다. 왜냐하면 평온하게 죽는 것이 일반적으로 경건한 자의 고유한 특권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37:37). 그러나 겉모양만을 보아서는, 조용히 죽는 것이 흔히 경건치 못한 자의 분깃이 되고 있다(4절).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다." 그들은 급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리석으나, 어리석은 자들이 죽는 것처럼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희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며 저희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삼하 3:33, 34).
그들은 익기 전에 나무에서 떨어지는 과일처럼 때맞지 않은 죽음에 의해 사라지지 않고, 늙어서 자연스럽게 떨어질 때까지 매달려 있다. 그들은 심하고 고통스러운 병으로 죽지 않는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번민이 "없고" 마지막까지 "그 힘이 건강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이 죽는 것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평강하고 안일한" 자들 중에 속하고, "죽도록 마음에 고통하고 복을 맛보지 못하는"자들 중에는 속하지 않는다(욥 21:23, 25). 아니, 그들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양심의 두려움을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회고하거나, 자기들의 비참함을 내다 봄으로써 오는 두려움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죽는다. 우리는 죽는 모습이나 죽어가는 그 영혼의 상태에 의해 죽음 저편에 있는 사람의 상태를 판단할 수 없다. 사람들은 양들처럼 죽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자리를 염소들과 함께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 73: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 그들(악인들)은 고통이 없을 뿐 아니라 타인보다 강건하여 힘 있게 살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이처럼 고통 없는 삶, 강건한 삶은 하나님의 축복의 외적 징표로 여겨겼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명백하게 악인이라, 오만한 자라 할 수 있는 자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 죄를 범하고도 일생 동안 이처럼 태평무사한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공의로우심을 신뢰하고 현세적 인과응보율의 적용을 기대하는 자들에게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가 아닐 수 없다.
- 더욱이 이들의 이러한 형통과 강건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도 고통과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해 여부를 떠나 심각한 내적 고통과 신앙적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 그는 그들이 자기들의 외적 형통함을 매우 악용했으며, 그것으로 인해 더욱 사악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은 시편 기자로 하여금 안달을 느끼게 할 뻔했다. 만일 그들의 물질적 번영이 그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다면, 만일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덜 격노케 하거나 사람들을 덜 압제하게 했다면, 그것은 결코 시편 기자를 화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1] 그것은 그들을 매우 교만하고 무례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편안하게 살기 때문에, "강포가 저희의 입는것이" 된다(6절).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의 장신구를 보이듯이, 자기들의 형통함으로 우쭐댄다. 즉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된다"(호 5:5; 사 3:9). "강포가 저희의 사슬," 곧 목걸이를 "묶는다"(하몬드 박사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사슬이나 목걸이를 하는 것은 해롭지 않다. 그러나 강포가 그것을 묶을 때. 그것이 허탈한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채워졌을 때, 그것은 장신구의 역할을 벗어나게 된다. 옷이나 외양은(비록 우리가 그것에 대한 규율을 갖고 있긴 한지만,딤전 2:9)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원칙이나 그것에 입혀져 있는 정신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그리고 죄인들의 교만이 그 옷에 나타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에도 나타나 있다. "저희는 거만히 말한다"(8절). 그들은 그들 자신을 자랑하고,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허탈한 말을 토하기를 좋아한다(벧후 2:18). " 그들은 마음속에 많은 교만이 들어있기 때문에 과장되게 말한다.
📖 73: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 고대로부터 장신구는 사람의 외모를 더 빛나게 하는 도구인 동시에 사회적 지위 즉 그의 신분과 부를 측정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였다.
- 다시 말해 교만이 저희 목걸이 라는 표현은 교만이 바로 악인과 그의 삶의 중요한 특징임을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아마 이는 악인들이 자신에게 재난이 미치지 않으므로 도리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처럼 거들먹거리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73: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 시인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롱할 뿐 아니라 살아계시며 공의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그 자체를 부언하고 비웃는 불경스런 죄를 범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 거만하게 말함 = 자신은 높은 사람인 양 행세하고 상대는 비천한 존재인 것처럼 얄잡아보며 말하는 것.
[2]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불쌍한 이웃들을 강포하게 대하도록 만들었다(6절).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다." 그들은 속임수와 압제로써 얻은 것을 그와 같은 악한 방법에 의해 지키고 불어나게 하며, 그들이 다른 사람을 해한 것이나 강포를 사용한 것에는 개의치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직 그들 자신을 부유케 하고 학대시킬 수 있도록 한다. "저희는, 강포가 땅에 충만했을" 때, 옛 세상의 죄인들, 장대한 자들처럼(창 6:11; 13) "능욕한다," 그들은 악 자체를 위해서나 그들의 이득을 위해서 죄악을 행하기를 개의치 않는다. "저의는 악하게 압제하여 말한다." 즉 그들은 압제하며 그런 일을 행하는 자신들을 정당화한다. 조리를 좋게 이야기하는 자들은, 그것에 대해 악하게 말한다, "저희는 능욕하다." 즉, 사치스러운(일부의 견해처럼) 즐거움에 빠져들어, 그 다음 그들은 비웃고 앙심적으로 말한다. 그들은 그것이 비방의 독이 묻은 창으로써 그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기를 개의치 않는다. 즉 높는 데서 저희는 압제를 말한다.
[3]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그들의 행실을 매우 무례하게 만들었다(9절).
"저희 입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존엄을 경멸하고 그에 대해 그리고 그의 능력과 의해 도전하면서, "하늘에 둔다." 그들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입으로 하늘을 대적함으로써 그들의 악의를 나타낸다. "저희 혀는" 또한 "땅에 두루 다니며," 저희는 저희 길을 방해하는 모든 사람들을 욕할 자유를 갖는다. 사람이 지위가 높거나 선량하다 하여, 그것이 독살스러운 혀의 채찍에서 그를 안전케 할 수 없다. 그들은 모든 인류를 조롱하는 일에서 긍지와 즐거움을 취한다. 그들은 그 나라의 독충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 73:9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 시인은 악인들이 자신들의 교만한 입과 혀를 통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악을 행할 것임을 나타낸다.
[4] 이 모든 일에서 그들은 매우 무신론적이며 불경스럽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 지식이 있으랴"(11절)하고 말하는 것을 배우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이 이처럼 사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익한 것들을 주셨고, 또 사용법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온갖 사악함을 다 알고 계시며, 그들을 문책하려 하신다는 것은 기꺼이 믿으려하지 않는다. 마치 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이므로, 그가 그들을 볼 수 없거나 보려하시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욥 22:12; 13). 그러나 오히려 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이므로, 그는 모든 인생들과 그들이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인지하실 수 있으며, 또 하시고자 한다.
모든 지식이 나오는 무한한 지식의 하나님께, "그에게 지식이 있으랴?"하고 묻는 것은 얼마나 모욕적인 일인가? 그는 당연히,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12절)고 말씀하실 수 있을 것이다.
📖 73: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 ‘하나님이’ (’엘’): 하나님의 신성과 전능하심을 강조.
- ‘지존자에게’(’엘리욘’):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강조.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엘'이란 신명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어찌 알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모두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고 주관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엘리온'이란 신명을 사용하여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라고 표현하는 것은
-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높으신 분이므로 이 땅의 일들에는 간여하지 않으신다는 악인들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 즉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완전한 섭리로 통치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을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비하하는 극악한 신성 모독적인 발언이라 할 수 있다.
📖 73: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이 세상에서 득세하며 번성하고 있는 악인듈의 형통과 교만에 대하여 고발하는 4-12절의 마지막 절인 본절은 이러한 암울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탄식이다.
이러한 본절는 ‘볼지어다'로 번역된 ‘힌네' 로 시작된다. 이는 악인이 득세하는 현실에 대한 시인의 충격이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
사실 공의로운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불의한 악인이 득세하는 부조리한 헌실온 큰 층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시인의 충격은 17절에 가서는 해결된다.
→ 즉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같 때에야 저희 결국을 깨달았나이다'라는 17절의 표현은 악인의 형통함을 주목하며 이에 대하여 층격을 받았던 시인이 결국 이러한 현실적 부조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였음을 보여준다.
- 눈으로 보이는 현실만을 주목하면 현실의 부조리와 여러 가지 난제로 우리 역시 갈등할 수밖에 없다.
-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함 받고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된다.
(3) 그는 사악한 자가 이처럼 불경함 속에서 형통하며 그 형통함에 의해 더 불경스럽게 되는 반면에 선한 사람들은 큰 환란에 처하는 것을, 그리고 특히 그 자신도 섭리와 싸우는 매우 강한 시험 가운데 있는 것을 주목했다.
[1] 그는 외부로 눈을 돌렸고 하나님의 많은 백성들이 크게 당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10절).
"악인이 매우 대담합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오나이다. 그들은 내가 처해있는 것과 똑같은 주저함 속에, 똑같은 몰입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말할 줄을 모르는데 그것은 오히려 저희가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통의 쓴잔을 깊은 그 불쾌한 몫의 한 방울도 흘리지 못하도록 감시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잔의 찌꺼기를 먹도록 그들에게 물을 억지로 짜서 줍니다. 그들은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불경스럽다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많은 눈물을 쏟습니다." 다윗도 그러했다(119:136).이 눈물은 그들에게 억지로 짜낸 물이다.
📖 73: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전에 악인들의 악행으로부터 멀리 있던 많은 사람들이 악인들의 번영과 형통, 득세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악인들을 추종하는 데로 왔다는 의미를 암시한다.
즉 이 무리들은 악인의 말에 현혹되었으며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본래 있어야 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를 멀리 떠나 지금 악인이 있는 그 자리까지 오게 되었을 것이다.
본절 상반절에서 시인은 악인에게 미혹된 많은 무리들이 먼 길을 걸어 악인에게로 나아오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면,
하반절에서는 마치 심한 갈증으로 목마른 여행객이 목어 말라 많은 물을 벌컥벌컥 삼키는 이미지를 통하여 그들이 악에 목말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물을 마시듯 악한 자의 가르침을 비판 없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넘칠 정도로 많은 악을 행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그는 내부로 눈을 돌렸고, 악인들이 섭리의 미소 속에 있음을 느꼈다(14절).
"나에 관해서는 " 그는 말하고 있다. "나는 어떤 고통으로 인해 종일 재앙을 당하여, 아침이 오는 것처럼 일정하게 아침마다 정책을 보았도다. "그의 고통은 컸다- 그는 재앙을 당하고 징책받았다. 그것은 아침과 더불어 "아침마다" 일정하게 돌아왔고 휴식기간도 없이 "종일" 계속되었다. 하나님을 모독한 자들이 형통하는 반면에, 하나님을 섬기는 그가 이처럼 큰 환란 아래 있다는 생각은 그를 몹시 괴롭혔다. 그는 그 자신의 환란에 대해 말했을 때 매우 절실하게 말했다. 믿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지각에 대항할 수 없다.
(4) 이 모든 것 때문에 시편 기자에게는 믿음을 버리려는 강한 유혹이 일어났다.
[1] 악인의 형통함을 관찰하고, 특히 그것을 의인의 환란과 비교해본 사람들은 섭리를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땅을 버리셨다고 생각하고픈 시험을 당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러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11절). 하나님을 고백하는 백성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이 어찌 알랴 ! 분명히 모든 일들은 눈먼 행복의 여신에게 맡겨져 있으며,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에 의해 처리되고 있지는 않다"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어떤 이교들은 이러한 의견에 대해 "신이 있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라고 물었다.
[2] 비록 시편 기자의 발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의심할 정도에까지 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믿음의 유익을 의심하고, "내가 내 마음을 정히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절) 아무 소용 없도다라고 말하고픈 유혹을 받았다. 신앙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여기에서 보라. 그것은 회개와 개심으로써 먼저 우리 마음을 정히한 다음, 우리 생활의 전반적인 면에 우리 손을 씻어 무죄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헛되지 않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은 때로 "그것은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을 그들이 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일이 현재에는 어떻게 나타날지라도 마음이 청결한 자, 그 복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보게 될 때에(마 5:8),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정히한 것이 헛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 73: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본절 이하 17절에서 시인은 이러한 악인의 행동을 두고 바라보아야만 했던 자신이 극심한 회의와 고뇌 가운데 있었으나 고뇌하는 중에 섬광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한글 개혁 성경에서는 본문이 본절 말미에 나오나 원문에서는 서두에 나와 악인들과 구별된 정결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던 자신의 노력이 실로 헛되었다는 시인의 깊은 상실감을 강조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실로(’아크’) 헛되도다’
- ‘실로’ : ‘참으로’란 뜻이지만, 동시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접속사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 본문에서는 물론 부사적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앞선 12절의 내용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볼 때 접속사적 의머도 다소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12절에서 시인은 악인이 항상 평안하고 재물이 더하는 현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실로 볼 때 정결한 삶만을 추구하여 온 자신의 삶은 그들의 삶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공허하기 그지 없다는 의미로 ‘아크' 란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73: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 앞선 13절에서 밝혔던 바와 같이 시인은 마음을 정하게 하고 손을 씻어 죄악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날마다 고난 가운데 처해 있음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 자신이 재앙을 당하고 있음을 한탄함.
- 재앙: ‘만지다, 처벌하다, 세게 치다, 역병에 걸리다’
- 시인은 지속적으로 맞으며,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상태.
- → 이러한 표현을 통해 시인은 자신이 바라지 않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자괴감을 보다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 자신이 징책을 받고 있음을 토로함.
- 징책: 잘못에 뒤따르는 ‘징계, ‘책벌’
- 이러한 표현을 통해 시인은 불의한 죄인들, 정계를 당해야 할 악인들은 평안한 반면 의를 지키며 하나님의 축복 속에 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자신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듯한 모순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
‘종일’, ‘아침마다’
- 시인은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을 거듭 사용하고 있는데
— 이는 시인이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온갖 어려움과 고통, 재앙과 정책이 꼬리를 물고 그를 괴롭게 하는 듯한 뉘앙스를 던진다. - 이는 앞서 지적한 바 악인들이 현실에서 항상 평안하고 재물까지 더하는 상황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12절).
- 이러한 현실의 모순된 상황이 — 그로 하여금 실족할 뻔하게, 미끄러질 뻔하게 하였고(2절) 경건과 거룩, 의로운 삶을 위한 노력이 무익한 것이라고 한탄하는 지경(13절)에 이르게 한 것이다.
●악인의 종말(시편 73:15-20)
우리는 시편 기자가 불경한 자들의 번영을 질투하고픈 유혹을 얼마나 강하게 받았는가를 보았다. 이제 여기에서는 그가 어떻게 그의 입장을 지속하며 승리를 얻었는가를 읽을 수 있다.
Ⅰ.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존경을 지켰으며 그것으로써 그는 그가 잘못 생각했던 것은 말하지 않도록 그 자신을 통제했다(15절).
그는 점차로 승리했으며, 이것은 그가 얻은 첫 번째 요점이있다. 그는 ***"내가 내 마음을 정히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곧 말하려 했고, 그렇게 말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생각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다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반항하고 신앙을 저버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체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 보라.
1.그는 비록 잘못 생각했었지만, 그가 품은 그 악한 생각을 발설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한 생각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생각을 허용하는 것이며 그것을 승락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도 물들도록 퍼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억압하고 그 실수를 우리 자신에게만 국한시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마음의 악한 생각을 후회한다는 좋은 표시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악한 생각을 할만큼 어리석었다면, "당신 손으로 입을 막고"(잠 30:32), 그것이 더 퍼지지 않도록 지혜로우라.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른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그의 부패한 마음이 악인의 형통함으로부터 이러한 추론을 해냈다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입 밖에 내는 것이 합당한가 아닌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기 전에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생각해 보기 위해 서며, 또한 두 번째의 생각이 첫 번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2.그가 그것을 말하려 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인정하신 자들에 대해 궤휼을 행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다.
(1)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시대에 속한 사람, 즉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그 말씀을 듣는 일련의 사람들이 있다.
(2) 우리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할 수 있는(마 18:6) 특히 그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거나 그들의 손을 약하게 하거나 그들의 유익을 흔들리게 하는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3) 우리가 우리 마음을 정히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욱 하나님의 아들들을 일반적으로 실족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처럼 비방 당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 더욱 그들의 보편적인 감정과 경험을 거역하는 것은 없으며, 그보다 더 그들을 상심케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4) 악인의 상태를 동경하는 자들은 실상 하나님의 아들들의 장막을 떠나가는 것이다.
📖 73: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부조리하게 보이는 현실에 대한 시인의 깊은 회의와 고뇌
당시 시인은 악인은 득세하며 의를 추구하는 자신은 고난을 당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하여 큰 회의를 가졌으며 이러한 부당한 결과에 대한 불만이 가슴에 가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시인이 존귀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직접 불만을 말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시인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는 뜻이 붙명확한 부사를 사용하여 이러한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 본문은 상반절에서 말한 바 있는 가정이 현실화되었을 때를 전제하고 그 결과를 예상하는 내용이다.
- 다시 말해 시인이 악인이 형통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자신의 불만과 하나님의 부당함을 말로 표현하였다면, 그 결과는 궤휼을 행한 것이 되었으리라는 표현이다.
Ⅱ. 그는 악인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다.
그는 앞에서 그 유혹을 어는 정도 저지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유혹을 물리쳤다, 그는 궤휼을 행할까봐 생각한 것을 감히 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의 그러한 생각이 타당한가를 깊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16절).
"나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그것은 내게 심히 곤란하였다. 나는 내 자신의 추리력으로써 그것을 정복할 수 없었다."
이것은 자연의 단순한 빛에 의해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이후에 또 다른 생이 없다면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을 하나님의 의에 완전히 조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다"(17절). 즉 그는 예배에 전념하였으며, 하나님의 특성을 묵상했는데 그때에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한 일들이 드러났다." 그는 성경에 의논했고 성소에서 시종들고 있는 제사장들의 입술에 의논했다. 그는 이 문제를 그에게 분명하게 밝혀 주시고 그로 하여금 이 어려움을 극복할 구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악인의 비참한 결국을 깨달았다. 즉 그는 그들의 형통함이 절정에 달했을지라도, 그들은 멸망하기 위해 무르익는 것에 불과 하므로, 그들을 부러워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예견했다. 알려질 필요가 배우 많지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고는, 말씀과 기도에 의하지 아니하고서는 알려지지 않을 것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성소는 시험 당하는 자들의 휴식처임에 틀림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거룩한 계시의 빛에 드러난 것대로 사람과 일들을 판단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의로운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특히 우리는 종말에 의해 판단해야 한다. 좋게 끝나는 것, 영원히 좋게 끝나는 것이 모두 좋은 것이다. 그러나 나쁘게 끝나는 것은 영원히 나쁘게 끝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좋지 않다. 의로운 자의 고통은 평화롭게 끝나므로 그는 행복하나. 악인의 즐거움은 멸망으로 끝나므로 비참하다.
📖 73: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73: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본절은 본시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이루는 부분.
본절 어전에 본시의 주를 이루었던 한탄, 절망, 비애 등의 분위기가 본절을 기점으로 반전되고 었다. 그 반전의 시점은 바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같 때이다.
여기서는 ‘성소'를 의미하는 ‘미크떼쉐' 라는 명사가 복수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 성소를 복수로 사용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는 예가 아니다.
- 전자의 견해를 취하면 시인이 성소 그 자체에 대하여 얼마나 마음이 각별했는지를 나타내는 의미가 되고,
- 후자의 견해를 취하면 시인이 성전의 여러 장소를 방문하였음을 말함으로써 성전에 대한 시인의 관심을 강조하는 의미가 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성소를 이례적으로 복수형으로 표현한 것은 성소의 거룩함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는 성전과 그 주위의 모든 지경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 어떤 의미로 보든 시인이 성전에 대해 특벌한 애착을 지니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한편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서 기도의 장소이며 말씀의 장소이다.
따라서 성소에 들어간다는 시인의 표현은
- 실제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율법의 말씀을 깨닫기 위하여 성소에 들어갔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고, 악인의 형통이라는 현실에 집착하는 자신의 태도를 돌이켜 하나님의 거룩함에 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하는 시인의 전적인 마음의 변화를 보여주는 표현일 수도 있다.
- 그러나 어떤 의미를 취하여도 시인이 자신의 시선을 하나님께 돌렸음을 나타낸다는 점은 동일하다. 세상을 향하던 눈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현실의 부조리함에 대한 시인의 고뇌가 해결의 국면으로 전환된 것이다.
1.악인의 형통함은 짧고 불확실하다. 섭리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높은 자리는 "미끄러운 곳"이다(18절). 따라서 그들은 그곳에 오래 발붙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더 높이 오르려고 꾀할 때 바로 그 시도는 그들이 미끌어져 떨어지는 계기가 도리 것이다. 그들의 형통함은 견고한 바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나 그의 약속 위에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견고한 바닥 있다는 느낌이나 만족감을 갖지 못한다.
📖 73: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2.그들의 파멸은 확실하고 갑작스러우며 매우 크다. 이것은 어떤 일시적인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생을 풍족함으로 보낸다"고 생각되어지며, 그들의 죽음 자체가 그것을 제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희가 졸지에 음부로 내려간다." 따라서 그것조차도 저희의 파멸이라고는 거의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음 저편에 있는 영원한 멸망-지옥과 멸망을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얼마 동안 융성하나 영원히 파멸한다.
(1) 그들의 멸망은 확실하며 불가피하다. 그는 그것을 이미 행해진 일로서 말하고 있다-"저희는 파멸에 던져졌다." 왜냐하면 그들의 파멸은 이미 이행된 일처럼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행하심으로써, 그러므로 그것에 항거할 수 없는 것으로써 말하고 있다. "주께서 저희를 파멸에 던지셨다." 그것은 "전능자에게로서 이른"(욜 1:15) "그의 힘의 영광에서" 나온(살후 1:9) 멸망이다. 하나님께서 던지시려는, 하나님께 그 위에 짐을 지우시려는 자들을 누가 부축할 수 있겠는가?
(2) 그것은 빠르며 갑작스럽다. 그들의 저주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19절)
그것은 쉽게 이루어지고 그들 자신과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할 것이다.
(3) 그것은 냉혹하며 매우 무섭다. 그것의 전체적이고 최종적인 파멸이다.
"저희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그들의 원수로 만들었던 전능자의 두려움이 가책을 느끼는 양심 위에 머무르는 것이 저주받은 자에게 내리는 비참함이다. 그 양심은 그들을 그 두려움에서 안전케 해 주거나 그 아래에 있는 그들을 강하게 해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축복은 그것에 의해 완전히 전멸될 소밖에 없다. 아무런 위로나 소망도 그들에게 남아있지 않다. 그들이 그 형통함 속에서 높이 들리 울수록 그들이 "파멸"에 던져 갑자기 "황폐케 "되었을 때 그들의 몰락은 더욱 극심할 것이다.
3.그러므로 그들의 형통함은 전혀 부러워할 만한 것이 못되며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야 하는데, 그것은 "설정되어야 할 요지였다"(20절).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또는(어떤 사람들의 해석처럼) 그들이 깬 후에 "저의 영상," 곧 저희 그림자를 "멸시하시리이다.."그리고 그것을 격파하시리이다. "큰 심판의 날에"(갈대아 해설판은 그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그들이 음부에서 깨어날 때 주께서 진로로 그 영상을 멸시하실 것이다. 즉 "그들은 수치와 영원한 멸시를 당하게 도리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현재의 그들의 형통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상에 불과하다. 헛된 모양, 사라지 세상의 모습에 불과하다. 그것은 실재가 아닌 허구이며, 그것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부패한 상상력일 뿐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닌 단순한 그림자이다. 그것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 사신에게 약속했던 것이 아님이 증명도리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잠들었을 동안 우리를 잠시 즐겁게 할 수도 있으나 심지어 그때에도 우리의 휴식을 방해하는 꿈과도 같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즐겁게 할지라도 그것은 속임수, 모두 거짓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깨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발견한다. "주린 작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빈다."(사 29:8). 사람은 자기가 꿈꾸는 것보다 결코 더 부유하거나 존귀하지 않다. 그러므로 누가 어떤 사람이 꿈꾸는 즐거움을 부러워하겠는가?
(2)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깨시어 심판하실 것이다. 그 자신과 그의 백성들의 해를 당한 사정을 변호해 주실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현세적인 방심의 잠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며 그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실 것이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경멸스러운 것인가를 온 세상에 드러내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의인이 그들을 비웃을 것이다.(52:6, 7).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얼마나 그의 상상을 멸시하신 것인가! (눅 12:19, 20)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심판은 진리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멸시하고 계시며 도 멸시하실 것을 경탄하거나 부러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조만간에 그는 온 세상이 그의 마음과 같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이다.
●열렬한 확신(시편 73:21-28)
삼손의 수수께끼가 다시 풀린 것을 보라.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즉 우리는 여기에서 시편 기자가 공격당하여 거의 압도된 그 극심한 시험을 훌륭히 이용한 것을 읽을 수 있다. 비틀거리지만 넘어지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을 회복시킴으로써 훨씬 더 큰 발걸음을 앞으로 낸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는 그의 시험으로부터, 즉 그것과의 투쟁과 그것에 대한 승리로부터 좋은 교훈을 많이 배웠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은혜가 그의 백성들을 해로움에서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그들을 비극 자로 만들기에 충분치 않다면, 그들을 시험 당하도록 내버려두시지도 않을 것이다. 즉 이것도 선을 위해 역사될 것이다.
Ⅰ.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에 대해 매우 겸손히 생각하고 그 자신을 낮추며 고발하는 것을 배웠다(21, 22절).
그는 그가 처해있는 혼돈과 위험을, 그리고 그 유혹을 즐기고 그것과 타협함으로써 그 자신을 괴롭힌 것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반성하고 있다. "내마음이 산란하며," 심장부위를 예리한 돌에 찔려 괴로워하는 자로서,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어느 때, 악한 생각이 어떤 선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왔다면, 그는 그것을 달콤한 음식처럼 그의 혀아래 두고 굴리지 않으며 그것은 그에게 근심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시험은 바울에게 있어서 육체의 가시였다(고후 12:7). 이 특별한 시험, 즉 시기와 불만의 일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다. 그것이 끊임없이 있는 곳에는 "뼈가 썩게"된다(잠 14:30). 그것이 이따금씩 오기만 해도 심장을 찌른다. 불평은 그 자체가 징계가 되는 부패함이다.
이제 이것을 반성하는 가운데
- 그는 이처럼 그 자신을 괴롭힌 것은 그의 어리석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내가 이같이 우매하여 내 자신을 괴롭히는 자가 되었었습니다." 역정을 내는 백성들은 이처럼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자기의 불만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자. "까닭 없이 나 자신을 편치 못하게 하는 얼마나 우매한가?"
- 그는 이것에 대해 그 자신을 괴롭힌 것은 무지였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나는 내가 알 수도 있었던, 그리고 내가 그것을 올바로 알았더라면 나의 투덜거림을 충분히 잠잠케 했을 것에 대해 무지했다. 내가 주 앞에 짐승(behemoth-큰 짐승)이었나이다." 짐승은 오직 현재 일만을 생각하며 장차 올 것은 결코 내다보지 못합니다. 나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내가 큰 바보였다면, 나는 이처럼 나를 크게 이겨버릴 만한 지각없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형통한다는 이유 때에 악인을 부러워하다니 ! 내 자신이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그들과 상황을 바꾸려고까지 생각할 뻔했구나! "내가 이처럼 우매하나이다." 놀라운 유혹과 그 힘으로 인하여 선한 사람들이 어느 때에 잘못된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했다면,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볼 때, 슬픔과 부끄러움을 품고서 그것을 반성할 것이며 자기 혐오감을 갖고, 그것에 대해 그들 자신을 "우매자"라 부를 것이다. "나는 다름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잠 30:2; 욥 42:5; 6). 다윗도 그렇게 말했다(삼하 24:10).
Ⅱ.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가 의지하고 있으며 그것의 덕을 입고 있음을 인정할 기회를 잡고 있다(23절).
"내가" 우매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주와 함께하니," 그리고 주위 은총과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나이다."
1.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를 돌보신 것과 그에 친절을 베푸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14절).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그가 격렬히 불평한 것을 바로 잡고 있다. "비록 하나님이 나를 징책하셨을지라도, 나를 버리셨을지라도, 내 인생의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였도다. 나는 주의 임재를 얻었고 주께서는 내가 주께 요청하는 모든 일에서 내게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황할 망정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내게 대해 비통한 일들을 기록하셨을지라도, 주는 항상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그를 버리거나 그에게서 도망하지 않도록 나를 지키셨고 내가 내 집 밑에 쓰러져 기절하거나 내가 걸어가고 있는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해 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지켜왔다면, 우리의 의무를 철저히 지키고 우리의 순전함을 유지해 왔다면 우리는 우리의 보존에 대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움을 얻었으므로 내가 여태까지 사아왔도다." 그리고 많이 그가 이처럼 영적인 생명을, 영원한 생명의 증거를 지키셨다면 우리는 지금 현재 어떠한 재난을 당해도 불평해서는 안 된다. 또는,
2.그로 하여금 이 강한 시험을 껶은 후 정복자가 되게 하신 일어서, 거룩한 은혜의 노력을, 그가 최근에 경험한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우매무지하였으나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셨고 나를 가르치셨나이다(히 5:2). 그리고 나를 주위 보호 아래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무가치함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대해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시험에서 안전하고 그것을 이기는 것을 우리의 지혜의 덕분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매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은혜롭게 임재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우해 효과적으로 증보하시는 덕택으로 여겨야 한다. "내가 거의 실족할 뻔하였도다(2절). 그리고 내 발이 완전히 상하여 회복될 수 없는 것 같았도다. 그러나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시어 나를 쓰러지지 않도록 지켜 주셨도다."
📖73: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Ⅲ. 그는 사도 바울이 생가하고 있는 것처럼(딤후 4:18), 그들이 악한 일에서 건져내신 바로 그 하나님이 "그를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라는" 것을 바라도록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다.
"나는 지금 주의 부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여지껏 행하셨던 것같이 여기 어려운 걸음을 인도하시면서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리이다. 그리고 내가 이제 항상 주와 함께 하므로 주께서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이다"(24절). 이것은 성도들의 행복을 완전케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인들이 세상적인 형통함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한 모든 사람들은 그의 교훈으로, 가장 훌륭한 조언자인 그의 성령과 그의 말씀의 교훈으로 인도받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시험 가운데에서 자기 자신의 교훈을 따랐으므로, 몹시 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앞으로는 하나님의 권유를 받기로 결심하고 있다. 하나님의 권유는 그것을 따르려는 결심을 가지고 그것을 올바르게 구하는 자들에게 결코 부족됨이 없을 것이다.
2.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훈으로 인도받는 모든 사람들은 저 세상에서 그의 영광에 영접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뜻하는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는 그와 함께 있는 우리의 영광을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게 될 목적으로 만드실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결코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 자신의 축복으로 우리를 축복하도록 하자.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의무의 길로 우리를 지도하시고 우리가 곁길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신다면 그는 후에 우리의 시련과 준비가 끝났을 때 우리를 그의 나라와 영광으로, 지금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당황하게 만드는 모든 모호한 섭리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어떤 위협적인 시험에 의해 우리가 당해온 고통에서 우리를 편케 하리라는 그 믿음의 소망과 전망으로 영접하실 것이다.
📖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 본문의 이러한 표현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교훈을 주시며 자신의 삶을 안내하시고 통치하시며 모사와 같이 위기시마다 필요한 교훈을 주신다는 시인의 고백이 담겨 있다.
이러한 본문은 제23편을 상기시켜 준다.
-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률 지나는 것 같은 위험과 고통 가운데 있었다. 수많은 원수들, 대적들이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형통을 구가하고 평안을 누리는 현실은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 그러나 목자가 막대기와 지팡이로 양을 안위하듯이 시 인은 주의 말씀으로 인도함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모순적인 현실을 눈앞에 보고 있었지만 좌우로 처우처지 않고 의의 길을 같 수 있게 된 것이다.
- 즉 하나님의 말씀은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가 실족하거나 넘어지지 않고 정도를 걸을 수 있도록 그의 발의 등과 길의 빛이 되셨던 것이다(119:105).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 ‘후에는’ : 이는 육신의 죽음 이후 시점을 가리키는 종말론적 의미로 쓰였다.
- ‘영광으로’ : (카보드) 문맥상 현실에서 얻는 영광이라기보다는 죽음 이후 마지막 심판 때에 주어지는 영광으로 볼 수 있다.
- 나를 영접하시리니
- 이 단어는 과거 에녹을 하늘에 ‘데려가신' 사실을 언급할 때도 사용된 단어이며(창 5:24) 엘리야를 ‘취하여 가신'사실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 단어이다(왕하 2:3,5.9).
- 즉 시인은 과거 불의한 세대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를 지킨 에녹을 영접하시고 그를 영광의 처소로 옮기신 것처럼, 우상을 섬기고 악을 자행하는 복이스라엘 가운데 당신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고 믿음의 싸움을 싸웠던 엘리야를 불수레와 불말로 영접하신 것처럼 자신 역시 영접하실 것임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 한편 본절에서 ‘라카흐' 동사는 미래를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이러한 일이 현재가 아닌 미래에 이루어질 일임을 분명히 한다.
- 사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성도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는 고난 가운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내세에는 이 모든 고난이 완전히 해소되고 영원히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 이러한 미래에 대한 확신은 —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의 고난을 이길 힘을 갖게 한다.
Ⅳ. 그는 이것에 의해 하나님께 더욱 철저히 매달리도록 자극받았고 극 하나님을 택한 일은 매우 확고했으며 그 속에서 위로를 받았다(25, 26).
여기에서 그의 생각은 이 세상에서 형통한 불경건한 자의 행복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의 행복 외에도 기쁨과 함께 머무르고 있다. 그는 극 창조주 안에서 얻고 잇는 즐거움이 얼마나 크며 좋은가, 얼마나 확실하고 달콤한가를, 그리고 이러한 면에서 그 자신을 축하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했을 때 저들이 창조물 가운데에서 얻고 있는 것에 대해 그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거의 없음을 알았다. 그는 그의 환란을 불평했었다. 그러나 이것의 그러한 것을 매우 가볍고 쉽게 만들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면 만사가 잘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로 향한 성별된 영혼의 호홉과 하나님안에서의 휴식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적인 사람의 형통함은 경건한 자에게 있어서는 기만과 허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시편 전체 중에서 하나님께 대한 한 영혼의 경건함과 믿음이 깊은 감정을 이 귀절보다 더 잘 표현한 귀절은 없다. 여기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향해 치솟고 있으며, 그를 열심히 뒤쫓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만족감과 평온함을 지니고 있다.
1. 하나님만이 사람의 지복이며 주요 선이라는 사실이 여기에 가정되어 있다. 그것을 하는 척할 수 있는 자는 하늘이나 땅에 아무도 없다.
2. 따라서 여기에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의 작용과 호흡이 표현돼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지복이시라면,
(1) 그때에 우리는 그를 섬겨야 하며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오?) 그를 택해야 하며, 글 통해서 영원한 언약과의 관계를 지킴으로써, 그를 우리의 것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가 영혼의 지복이시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2) 그때 우리의 소망은 그를 향해야 하며 우리의 기쁨은 그 안에 있어야 한다(이 단원은 이 두 가지를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기뻐해야 하며, 우리가 아직도 더 바라는 것을 간구해야 한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바쳐져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이외의 것은 원하지 않고 계속 그를 바라면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종결시켜야 한다.
"주여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줍소서" 라는 것은 모든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은 모든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영혼의 소망은 주의 이름에 있사옵니다."
(3) 우리는 그 무엇보다 그를 택해야 하며, 그를 원해야 한다.
[1]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오? 주 외에는 내가 구하거나 의지할 만한 이가 없으며, 사귀려고 애쓰거나 청할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는 궁창에서 어느 것보다 더욱 영화로우시도다(89:6)." 그리고 그는 우리가 보기에 무한히 바람직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하늘에는 뛰어나 자들이 있으나, 하나님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의 은총은 하늘 이슬의 신선함이나 하늘에 있는 별들의 온화한 감응력보다도, 또 하늘의 성도들의 우정이나 거기에 있는 천사들의 선한 직책보다도 더욱 무한하다.
[2]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먼 곳, 하늘에도 아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많은 친구들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현재의 관심과 흥미가 많이 놓여있는 땅에도 아무도 없는 것이다. "땅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소망으로 차지되어 버리지만, 땅 위에서는 주밖에 또는 주와 함께, 주와 비교되거나 경쟁될 만큼, 나의 사모할 사람이나 일이나 소유물이나 기쁨이 없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구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하나님 외에 다른 아무 것도 구하지 말아야 한다(nil praeter te misi protor te-주를 위해서가 아니고는 아무 것도 주 외에 다른 것의 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동역자가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우리에게 바랄 것이 없다.
📖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 시인은 하늘과 땅 어디에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자신이 의지할 만한 존재도 사모할 만한 존재도 없음을 수사 의문문과 대유법과 대구법을 통해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에 담긴 시인의 고백
-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는 유일하신 절대 주권자라는 것과 환경과 조건을 넘어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할 분이라는 시인의 분명한 신앙 고백이 담겨 있다.
- 앞서 시인은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으나 의인이 고난을 받고 악인이 형통하며 평안을 누리는 모순된 현실 속에서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그 걸음이 머끄러질 뻔하기까지 하였다(1.2절).그 결과 — 그는 조건이나 형편, 상황의 어려움이 어떠하든지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본절과 같이 그에 근거한 신앙 고백을 을릴 수 었게 된 것이다.
-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감으로 이처럼 현실적으로 형통한 악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으며 현재에도 그를 인도하시며 장래에는 영광으로 영접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4) 그때에 우리는 완전한 만족감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26절). 여기에서 다음을 관찰하자.
[1] 큰 환란과 고통이 예상되고 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진하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와 마음이 쇠잔하는 것을 경험했고, 우리도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육체는 병과 나이와 죽음에 의해 쇠잔할 것이다. 그리고 뼈와 육신을 건드리는 것은 우리가 애지중지하던 우리 자신의 일부분을 건드린다. 즉 육체가 쇠잔할 때, 마음도 역시 곧 쇠잔해진다. 그리고 거동과 용기와 위기도 쇠잔해진다.
[2] 이 환란 속에서도 최상의 위로가 나온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은혜로운 영혼들은, 큰 환란 속에서도 그들의 영적인 힘과 영원한 분깃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한다.
- 첫째, "주는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내 마음의 힘이시요, 내 무게를 지탱하고 그 밑에 깔리지 않게 할 견고한 토대이시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나는 그가 그러하심을 발견했다. 나는 그가 그러하심을 발견했다. 나는 지금도 발견하며 극 그러하시기를 항상 바란다." 앞으로 닥칠 환란 속에서 그는 육체와 마음이 쇠잔하는" 이중적인 낭패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위안 가운데에서 그는 유일한 토대를 굳게 붙들고 있다. 그는 육체를 무시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의 마음의 반석"이라는 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하고 있다. 그는 육신에는 무관심한자로소(그것은 쇠잔하게 버려두라. 아무대책이 없다) 영혼은 관심을 가진다. "속 사람을 강건케" 하려는 자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둘째, "주는 내 영원한 분깃이시라. 그는 내가 여기서 있는 동안 나를 부축해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죽을 때에도 나를 행복하게해 주실 것이다."성도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분깃으로 선택한다. 그들은 그를 분깃으로 삼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의 소득이 되시리라는 것, 불멸의 영혼이 지속되듯이 오래 지속될 소득이 되시리라는 것은 그들의 행복이다.
📖 73: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 상반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연약한 상태를 기술하고, 하반절에서는 자신의 연약함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면모를 소개함으로써
- — 자신이 진정으로 의지할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 이는 자신의 형편의 호불호에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것으로서 앞선 25절의 이면적 의미와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 쇠약하나 :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소모하여 탈진된 상태.
- ‘육체와 마음’ : 시인의 심신, 즉 존재 전체.
- 여기서도 시인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존재 전체가 탈진하였으므로 자신 스스로는 문제 해결 능력이 없음을 겸허하게 고백하고 있다.
- 자기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시인의 고백은 자연스레 그가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처럼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제대로 인식하고 고백하게 될 때
→ 자신에 대한 그릇된 신뢰를 버릴 수 있으며
→ 이를 기초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바른 신본주의적 태도로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 본절 전체는 시인이 자신의 육신과 마음 어느 것도 온전한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의지하는 자신에게 있어 하나님은 유일하고 영원한 분깃이며 소망임을 고백한 것이다.
- 시인이 고백하는 하나님.
- ‘반석’
- 18절의 ‘미끄러운 곳’ 과 대조를 이룸.
- 즉 시인은 앞선 18절과 관련해 의로운 자는 하나님이 반석이 되사 안전한 곳에 거하게 되지만 ↔ 악인은 미끄러운 곳에 처하게 됨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마음을 언제나 변함이 없으며 안전한 반석이신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 ‘영원한 분깃’
- 분깃: 구약의 ‘기업’ →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터전’
- 따라서 ‘하나님은 내 영원한 분깃'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야말로 성도에게 있어서 끊임없는 축복의 공급원이시며 그 공급이 결코 끊어지지 않게 하실 분이라는 의미의 고백이다.
- 이는 현세적인 의미도 있지만 종말론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즉 시인은 현재에만 아니라 장래에 자신을 영광으로 영접하사 자신에게 영원한 분깃을 허락하실 하나님을 소망하고 신뢰하며 이와 같은 고백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 ‘반석’
Ⅴ. 그는 모든 악인의 비참한 상태를 충분히 깨달았다. 그는 이러한 경우에 성소에서 이것을 배웠고 결코 그것을 잊으려 하지 않았다(27절).
"대저, 소외와 분리 속에서 주를 멀리하는 자, 즉 전능자가 자기에게서 떠나기를 운하는 자는 반드시 망하리라. 그들의 운명은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하기를 택하고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질 것이다. 음녀같이 주를 떠난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즉 하나님과 약혼한 것을 고백하였으나, 그를 버리고 그에 대한 의무와 교제를 버리고, 이방인의 품으로 간 모든 변절자들을 주께서 다 멸하셨다." 그 운명은 가혹하게 망하고 파멸 당할 것이다. 그 운명은 보편적이다. "그들은 예외 없이 파멸 당할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다. "주께서 멸하셨나이다. 그것은 이미 행해진 일처럼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불경건한 자들의 멸망은 모두에 대한 파멸의 전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수행하시며 그의 손에 떨어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주는 비복 무한히 선하시지만 주의 손상당한 영예와 모욕당한 인내를 계산에 넣으실 것이며 음녀같이 주를 떠난자를 멸하실 것입니다."
📖 73: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시인이 관심을 환기시키는 내용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한다는 것이다.
‘주를 멀리하는 자’
- 여기서 주를 멀리한다는 것은 일단 의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떠난다는 것이며 보다 구체적으로 신앙적 타락이나 삶 가운데 악을 고집하는 것 모두를 함축하는 표현이다.
-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은 누구인가?
- 이들은 다름아닌 본시 초반부에서 악을 행하면서도 형통한 자들(4-9절), 자신만 아니라 타인까지 타락의 수렁에 빠뜨리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10~12절)을 의미한다.
- 시인은 본시의 시작 부분에서 어처럼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이 헌실적으로 누리는 번영과 형통만을 보고 그로 인해 실족할 뻔하며 그 스스로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헛된 것으로 여기기까지 하였다(2.13절).
그러나 시인은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 이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 의인과 악의 최후의 운명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그를 악인에 대한 질시나 동경에서 벗어나게 하고 이들에 대한 명백한 파멸의 선언을 하는 데까지 이르게 한다.
‘망하리니’
- ‘아바드’ : ‘길을 잃다’, ‘결핍되다’, ‘소멸하다’ 란 뜻.
- 이는 목자를 떠난 양이 길을 잃어 결핍되고 파멸에 이르는 상태를 연상시킨다. 사실 길을 잃은 앙은 스스로 목초지를 찾을 수 없으므로 핍절하거나 잘못된 길에 접어들어 낭떠러지에 떨어지거나 맹수의 밤이 될 수밖에 없다.
- 이처럼 인생의 중심이신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면
→ 길을 잃게 되고 망하게 되는 것이다.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 주를 멀리하는 자가 망하게 되는 이유.
- ‘멸하셨나이다’ = 완료형
- 이는 심판이 현재 진행 중이거나 혹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과거에 멸하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악인이 인간의 눈에는 홍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 안목으로 볼 때 악인의 최후는 이미 그 결론이 나 있는 것이다.
- 사단이 지금 이 세상의 왕으로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이미 십자가 사건으로 패배한 것과 마찬가지로 악인 또한 이미 멸망의 길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
- ‘조네'는 단순한 성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저버리는 변절과 타락을 의미하는 표현으로도 자주 사용된다.
- 본절에서도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생각을 기준으로 삶을 영위하는 넓은 의미의 우상 숭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Ⅵ. 그는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를 신뢰하도록 크게 격려 받았다(28절).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가 망한다면,"
1. 이것으로써 우리를 통제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살도록 하자. 만일 그를 멀리 떠나 사는 사람들이 실패를 한다면 그것은 복, 훌륭한 복이다.
이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곧 지복으로 여겨 이것을 가장 열심히 추구하고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는 하나님께 가까이하고 또 하나님이 내 가까이에 오시도록 하는 것이 최상의 복이다. 원어는 이 두 가지로다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나는 그것을 그렇게 읽고 싶다) 하나님께서 접근하시는 것이 내게 복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는 것에서 생기며, 그것은 복을 만드는 행복한 만남이다. 여기에,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복이라는 큰 진리가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진리의 생명은 "그것이 내게 복이라"는 해석 속에 있다. 자기에게 복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들은 지혜로운 자들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그리고 선한 사람마다 이러한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것은 내 의무이며 내 관심이다."
2.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항상 의지하면서 살도록 하자.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고 음녀같이 주를 떠나 어떤 피조물을 결코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악인이 온갖 형통함에도 불구하고 망하고 파멸할 것이라면, 우리는 주 하나님을, 그들이 아니라(149:3-5 참조), 그리고 우리의 세상적인 형통함이 아니라, 그를 의지하도록 하자 그들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그들의 것보다도 더 나은 분깃을 이해 우리는 그를 의지 하도록 하자.
3.우리가 그렇게 행하는 동안, 우리는 그의 이름을 찬미할 기회를 가지리라는 것만큼은 의심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가 주위 모든 행사를 전파할 수 있도록 주를 의지하도록 하자.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결코 그에게 감사 들릴 소재가 부족하지는 않은 것이다.
📖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인의 신앙고백, 결단
본문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악인의 형통함(3절), 고난 없음(5절), 재물의 부요함(12절) 등 그들의 현실적인 복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심정을 토로해왔던 시인이,
→ 본절에 이르러서 복에 관하여 완전히 전환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엘로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이러한 시인의 선포에는
- 악인의 운명과 그들이 누리는 현실적인 복이 —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와 영원한 복,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자각한 시인의 확고부동한 신념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설령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헌재 악인이 누리는 물질적 복이나 형통,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심지어 그 자신이 앞선 14절에서 토로했던 것처럼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정책을 보게 된다 할지라도
-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을 것이며,
- 더욱 더 가까이하겠다는 결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 ‘여호와’
- 본절 상반절에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강조하는 ‘엘로힘'이라는 신명이 사용되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언약에 었어서 신실성을 강조하는 ‘예흐와’ 신명이 사용된다.
- 여기서 시인이 특벌히 ‘여호와’ 란 신명을 사용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고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당신의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끝내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분명하게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 ‘주’ (‘아도나이’)
-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신명.
→ 시인의 하나님 중심적 신앙
- 이처럼 본절에서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신명 세 가지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1)하나님에 대한 시언의 확고한 신앙과 2)그 신앙에 근거한 자신의 결단을 더욱 강조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나의 피난처로 삼아
- 시인이 주 여호와를 자신의 피난처로 삼겠다는 고백은 상반절에 나오는 바 하나님을 가까이하겠다는 신앙 고백의 또 다른 표현이다.
- 세상 사람들은
-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신의 힘이나 재물을 의지하는 반면,
- 시인은
- 하나님을 통하여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다.
- 여기서도 하나님 중심적인 시인의 신앙이 잘 드러나고 있다.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 악인들의 형통과 그것의 실체, 그들이 당하는 귀결, 그리고 진정한 축복이 하나님을 가까이함에 있음을 깨달은 시인은 본절에서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본문에서 자신의 결단과 삶의 방향을 천명한다. — 그것은 바로 주의 모든 행사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 학자들은 대체로 여기에서 시인이 말하는 바 ‘주의 행사'를’ → ’하나님의 천지 만물에 대한 주재'를 의미한다고 본다.
- 본시의 전반부에서 시인은 악인의 형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간섬이 없음을 거듭한탄했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분명 이 세상을 지배하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선포하고자 한다.
- 전파 대상은 누구인가?
- 그런데 본문에는 선포의 대상이 제시되지 않는다. 이는 시인이 선포의 대상을 일부 사람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시인의 변화된 자세
‘전파하리이다’
- ‘입으로 무언가를 ‘선포하다’, 공포하다’ ; ‘기록하다’
- 이러한 표헌은 시인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행사를 더욱 널러 전하겠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즉 입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선포함은 물론 글로써 후대 사람들에게도 전파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본시가 바로 후자의 의지를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본시 전반부에서 시인이 악인의 형통으로 인하여 실족할 지경에 처하였으며 그들을 직시하고 부러워하고 심지어 그로 인한 자신의 심경을 직접 피력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말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궤휼을 행할까 우려하는 태도를 가겼던 것(15절)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즉 시인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고
→ 이러한 모든 그릇된 생각이나 자세를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모든 이들, 모든 세대에게 담대히 선포하겠다는 당당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