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민수기 5, 시편 39, 아가서 3, 히브리서 3
묵상구절
77:1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77:2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77: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77:4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77:5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77:6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77:7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77:8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77:9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77: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77:11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77:12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77:13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77:14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77:15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
77:16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77:17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77:18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77: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77:20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압도적인 우울(시편 77:1-10)
여기에서는 끔찍스러운 함정과 진흙으로 된 수렁에 빠져 버렸으나 그곳에서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즉 압도적이 우울 가운데 있는 선한 사람에 대한 생생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슬픈 심령을 가진, 풀이 죽은 성도들은 여기에서 거울을 대하는 것처럼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편 기자가 그의 슬픔과 두려움으로 인해 가졌던 갈등은, 그가 그것에 대해 이러한 기록을 했을 때 끝나 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 시리로다."하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1절). 투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그가 나중에 가졌던 그런 안도감을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환난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해 그것을 그의 이야기 처음에 삽입해 놓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들으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Ⅰ. 그의 우울한 기도.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는 기도했고(약 5:13), 번민 속에 있기 때문에 그는 더욱 간곡히 기도했다(1절).
"내 음성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내가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리로다." 그는 원망이, 큰 원망이 가득했으나, 그것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다. 그것을 모두 기도로, 소리내서 하는 매우 간절하고 끈질긴 기도로 바꾸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위안을 얻기 위해 올바른 길을 택했다 (2절).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나이다." 환난의 날,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처럼 보이는 내적 환난의 날은 기도의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자. 우리는 그를 찾아야 하며, 그를 발견 할 때까지 찾아야 한다. 그의 환난 날에 그는 그의 고통을 떨쳐 버리기 위해 기분전환 하는 일이나 오락을 찾지 않고, 하나님과 그의 은총과 은혜를 찾았다. 마음이 고통가운데 있는 자들은 그것을 술로 잊어버리거나 일소에 붙여 버리려 해서는 안되며, 그것을 기도로 떨어버려야 한다. "내가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다." 하몬드 박사(Dr Ha-mm on d)는 그 다음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그것은 그의 기도가 그칠 줄 모르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143:5, 6 과 비교).
Ⅱ. 그의 우울한 근심. 근심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정말 우울이라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1.그것이 잠시도 중단되지 않을 때, 그의 근심이 그러했다. "내 아픔," 또는 상처가 "밤에도 계속되어," 내적으로 피를 흘렸도다. 그리고 그것은 휴식과 잠을 위해 보내야 할 시간에도 거두어지지 않았다.
2.그것이 어떤 위안도 허락치 않을 때. 그의 경우가 또한 그러했다.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그는 그를 위로하는 자들에게 청종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지 않았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이다"(잠 25:20). 뿐만 아니라 그는 그에게 위로가 될 만한 일들을 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슬픔 속에 아주 빠진 자처럼, 그러한 것들을 멀리 했다. 어느 면에서 보면, 슬픔 속에 있는 자들이, 위로 받기를 거절한다면 그들 자신을 상하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Ⅲ. 그의 우울한 명상. 그는 그 환란이 사적인 것이었는지 공적인 것이었는지 매우 골똘히 생각했기 때문에,
1.그를 위로해야 할 방법들이 그의 근심을 불어나게 할 뿐이었다(3절).
(1)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그를 위로했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나 그렇지 않았다. "내가" 불쌍한 욥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였도다." 즉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두려워하는구나"(욥 23:15). 그가 하나님을 생각했을 때, 그의 생각은 오직 그의 의와 진로 그리고 두려움 위엄에만 고정되었으므로, 하나님 자신도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2) 어떤 사람은 그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은 것이 그의 마음을 편케 했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나, 그렇지 않았다. 그가 "근심하니," 그러할지라도 "그의 심령이 상했고" 그 짐 아래 쓰러졌다,
2. 그는 자기의 당면한 근심을 위로해 줄 온갖 방편을 거부했다 (4절). 그는 잠을 즐길 수 없었다. 만일 우리가 평온하고 신선한 잠을 잘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슬픔과 걱정을 잊게 해준다. "주께서 두려움을 주시며, 나의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도다," 그는 생각이 혼돈 되었고 정신이 산란 했으며, 마음으로 당황했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음이 뜨거워" 있는 동안은 "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즉 그의 "가슴은 가죽부대가 터지게 됨 같았다"(욥 32:19). 그는 이처럼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말할 수가 없었고 활기를 되찾을 수가 없었다. 심령이 질식할 정도로 감금되어 있을 때처럼 근심이 그 마음을 그렇게 크게 침식하는 적은 결코 없다.
Ⅳ. 그의 우울한 반성(5,6절). "내가 옛날을 생각하였사오며, 그것을 현재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형통했던 것은 현재의 참상을 더욱 가중시킬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조상이 이야기해 주었던 가사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울한 사람들은 현재 상황의 불안과 불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옛날을 골똘히 생각하고, 그것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더 나은 지 아닌지를 실제로는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전 7:10). 우리가 잃은 즐거움을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남아있는 즐거움을 감사하게 여기지 않거나 우리의 고난을 참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특히, 그는 "밤에 한 그의 노래," 곧 이전에 그가 슬픔 속에 있었을 때 그에게 힘을 주었고 또 고독 속에 있었을 때 그를 즐겁게 했던 위안 거리들을 "기억했다." 이 노래들을 그는 기억했고, 그가 그것을 다시 부를 수 있는가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노래들을 잘 부를 수 없었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자기의 혼을 하나님에 쏟아붓는" 것에 불과했다(43:4; 욥 35:10 참조).
Ⅴ. 그의 우울한 불안과 염려. "내가 마음에 묵상하였다"(6절). 오라 내 영혼아, 이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으며, 그것이 결국 어떻게 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겠는가?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 나와 다투셨고, 그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였고, 내 환란의 이유를 "궁구하였다." 그리고 나는 "주께서" 현재에 행하시는 것처럼 "영원히 버리실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은혜를 베풀고 계시지 않는다. 그러면 그가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긍휼이" 이제 사라졌다. "그 인자하심의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이 이제 실패했다. 그러면 "그것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은 지금 은혜롭지 않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그의 긍휼은 지혜롭게 보류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7-9절)" 이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들에게도 흔한 경우로서(사 50:10), 암흑 가운데 행하여 빛을 얻지 못하는 서글프고 버림받은 한 영혼의 말이다.
여기에서 그는
1.심한 고통 아래에서 신음하고 잇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얼굴을 감추셨고, 일상적인 은총의 표적도 거두어 가셨다. 영적인 고통은 은혜로운 영혼에게 있어서는 모든 고통들 가운데 가장 비탄스러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 그의 은총을 의심하는 것과 그의 약속을 박탈당하는 것, 그것보다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것은 없다. 이것이 심령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누가 그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2.강한 시험과 싸우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잇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침울하고 어두운 날에 그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의 상태에 대해 절망적인 결론을 내릴 유혹을 받기 쉬우며, 이 두 가지에 대해 모두 좌절된 것으로서 포기하도록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고, 은혜의 언약이 우리를 실망시켰으며, 우리 하나님의 온화한 긍휼이 우리에게서 영원히 사라 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유혹을 받을 수 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암시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만일 두려움과 우울함이 이처럼 까다로운 질문을 한다면, 믿음으로 하여금 성경에서 그것을 대답하게 하자.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그럴 수 없다(롬 11:1).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리로다"(94:14). 주께서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베푸실 것이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애 3:32).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아니다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이른다." 그것이 "영원부터" 있는 것처럼 "영원까지" 있다 (103:17).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히 6:18).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있으셨는가?"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며, 그가 자비롭고 은혜로우심을" 반포하신(출 34:6) 그의 이름을 부인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아니다. 그것은 "아침마다 새롭다."(애 3:26), 따라서,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호 11:8, 9) 그는 이처럼 어둡고 우울한 불안을 계속 안고 있을 때 갑자기 "셀라"하고 말함으로써, 즉 "거기에서 멈추고 더 계속하지 말라. 우리는 불신으로 말미암은 이러한 추측은 더 이상 듣지 말자"라고 말함으로써 먼저 그 자신을 저지시켰고, 그 다음에는 그 자신을 꾸짖었다 (10절). "내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하였다. 그는 그 말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닫고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는가?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고통이라"(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이는 내 몫으로 떨어진 재앙이므로 나는 그것을 최대로 선용해야 한다. 각 사람은 육신 안에 자기의 괴로움, 자기의 환난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것. 내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이다. 또는 오히려 "이는 나의 죄라. 그것은 나의 불의, 내 마음에서 나온 재앙이다." 이러한 의심과 두려움은 믿음의 결여와 연약함에서, 그리고 평정을 잃은 마음의 부패함에서 나온다.
이것을 명심하자.
(1)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즉 우리를 매우 쉽게 엄습하는 죄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2) 고통 아래서 심령이 낙담하는 것과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은 선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매우 흔한 연약함이며, 이러한 것들은 여기에서의 시편 기자에게와 같이 우리에게도 슬프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언제고 그것이 우리 안에 작용할 때, 우리는 그러한 것이 일어나는 것을 억압해야하며 악한 영이 말하도록 내버려 두어 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의 시편 기자처럼 불 신앙의 반란을 설복 시켜야 한다. "내가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를 기억하리"이다. 그는 "이전 해(年)"를 깊이 생각해 왔었다. 즉, 이전에 즐긴 축복을, 그의 슬픔에 가중시키기만 하는 것들을 생각해 왔었다 (5절). 그러나 이제 그는 그것을 "지존자의 오른 손의 해(年)"로서 생각했다. 왜냐하면, 옛 시대의 축복들은 신(神;Ancient of days)으로부터, "만유 위"에 계시며 "하나님께서 영원히 축복하신" 그의 오른 손의 능력과 통치권으로부터 왔고, 이것이 그를 만족케 하였던 것이다. 지존 자께서는 그의 오른 손으로써 변화시킨 것을 그가 기뻐 여기시지 않겠는가?
●거룩한 위엄에 대한 인정 (시편 77:11-20)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그가 빠졌던 큰 환란과 재난으로부터 그 자신을 회복시키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들을 위해 이전에 행해 주셨던 큰 일들을 생각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버리시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갈아 앉히고 있다. 그가 그 자신을 안정시키려는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지라도 (5, 6), 그는 다시 시도해 보았으며, 이 두 번째 시도는 헛되지 않았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합당한 방법을 찾아 끈질기게 밀고 나가는 것은, 비록 처음에는 그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을지라도, 좋은 일이다. "내가 하나님께서 그의 옛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에서 현재의 어두운 섭리에 대한 행복한 결과를 추론해 낼 수 있을 때까지, 그 일을 기억하여 진술하리이다"(11,12절).
다음을 명심하자.
- 주의 백성을 위한 주의 행적은 기사(奇事)였다.
-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기록되어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 우리는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혜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묵상 해야하며,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야 하고 그것에 관해 더 많은 것들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줄 수 있도록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 하나님의 행적을 올바로 기억하는 것은 그의 약속과 선하심에 대한 불신을 없애는 강력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시며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가 시작하신다면. 일을 끝마칠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일이 그를 매우 흡족케 했다.
Ⅰ. "하나님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다"는 것(13절). 하나님의 도는 (일부의 해석대로) "거룩함 가운데" 있다. 우리가 신의 섭리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난점을 해결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행하심이 거룩하시다 는 것, 그것이 모두 그에게 알맞으며 영원히 정결하고 곧은 그의 성품에 일치된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는 모든 행적에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그의 섭리의 각 처방 속에서 성별 되실 것이다. 그의 도는 그가 그의 거룩함으로 말씀 하셨고 또 그 성소에 알리신 그의 약속에 맞는다. 그가 행하신 것은 그가 말씀하신 것대로 이며, 그것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신 것으로부터, 우리는 그가 그의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하나님의 도는 성소를 위한 것이며, 그 이득을 위한 것이다.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은 그의 교화의 유익을 위해 의도되고 있다.
Ⅱ. 하나님의 "길이 바다에 있다"는 것. 비록 하나님이 그의 모든 행위에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실 지라도 우리는 그의 처방에 대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며 또한 그의 의도에 대한 어떤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주의 첩경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나이다"(19절). 하나님의 길은 그 깊이를 젤 수 없는 큰 바다와 같으며 (36:6) 추적될 수 없는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같다 (잠 30:18, 19). 하나님의 방식은 항상 복종되어야 하나 언제나 설명될 수는 없다. 그는 유대 교회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몇 가지 상세한 사실을 열거해 놓고 있으며,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하고 있다.
1.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비교될 만한 신은 없다 (13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큰 일들에 대한 영광을 먼저 하나님께 돌리도록 하고 그 속에서 그가 모든 비교 물보다 크심을 인정하도록 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가 행하신 것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고 그것으로 우리자신을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다.
2.그는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14절). "주는 모든 창조물들의 능력을 초월하여 홀로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눈으로 볼 수 있게 그리고 반박할 수 없도록, 주의 능력을 알리셨나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위해 행하신 것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지속적으로 선포 해왔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그는 그의 영원하신 팔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다 (15절). 이것은 그들에 대한 긍휼의 시작이었고, 유월절에 그들 가운데서 해마다 기념되어졌다. "주의 팔로 이처럼 많은 기적을 행하시어, 애굽 사람 손에서 주의 백성을 구속(속량)하셨나이다." 비록 그들이 능력으로써 건지웠을지라도, 그들은 마치 돈에 팔렸던 것과 같이, 속량되었다고 일컬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가 찾을 때, 부상을 치르고 권능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었던 그 위대한 속량의 모형이었기 때문이다. 속량 되었던 자들은 여기에서, 그에게 약속이 주어졌던 "야곱의 자손"이라고 불리우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약속이 이행되리라는 것을 매우 확고하게 생생하게 믿고 있었던 "요셉의" 자손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왜냐하면 요셉은 임종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떠날 것을 언급했고, 자기의 유공에 관해 명했기 때문이다.
(2) 그는 그들 앞에서 홍해를 가르셨다(16절). "물들이" 물러가고, 곧 그 사이에 길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마치도 그것들이 이스라엘 군의 선두에 있는 하나님 자신을 보고서 두려워하여 물러간 것과도 같았다. 물들의 표면뿐만 아니라 "그 깊음도 진동하였고," 그의 명령의 말씀에 복종하여 좌우로 물러섰다.
(3) 그는 애굽 사람들을 멸하셨다 (17절). "구름이" 애굽 사람들 위에 "물을 쏟았다." 이스라엘 진영 위에는 우산과 같은 불기둥이 있어, 그것을 소나기로부터 보호해 주었으나, 창공 위에 있는 물들은 창공 밑에 있는 물들과 협력하여 그 반역자들을 멸하기 위해 홍수 때와 같이 그들 위에 폭우를 쏟았던 것이다. 그때에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나갔는데,"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있다 (18절). 회오리 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그것은 궁창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번개가 세계를 비취었다 (그것은 밖으로 나아간 화살이었고 그것에 의해 애굽의 군대가 격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두려운 것이었으므로, 그 인접한 해안의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길이 그의 원수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다에 있었다. 그러나 물들이 그들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에는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다"(19절). 거기에는 후에 요단 에서 있었던 (수 4:9) 것과 같은 그러한 표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갈 때, 우리와 번호, 그리고 지진이 있었던 것을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때에 거룩한 공포에 대한 이러한 표시가 있었을지도 모르며 여호수아도 그러한 것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이 주어질 때 시내 산에서 있었던 우레, 번개, 그리고 지진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그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그의 인도와 보호 아래 두셨다 (20절). 주의 백성을 무리 양같이 인도 하셨나이다. 그들은 연약하며 도와 줄 자 없고 양떼같이 방황하는 경향이 있으며 먹이를 노리는 짐승들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목자로서의 온갖 배려와 자상함을 기울이면서 그들을 앞장서서 가셨다. 구름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것은 주목되지 않고 모세와 아론이 중개 역할이 주목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이들의 손에 의해 이스라엘을 인도 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그것을 할 수 없었으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에 위해 그것을 행하셨다. 모세는 그들의 우두머리였고, 아론은 그들의 대제사장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안내자이며 감독자였고, 또 다스리는 자였으며 하나님은 그들에 의해 이스라엘을 인도 하셨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목회를 하는 것. 이 두 가지 큰 면에서 올바르고 행복한 경영이 어떤 백성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비록 그다지 큰 경이는 아닐지라도,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구름과 불기둥이 그러했었던 것처럼, 그 백성에 게 큰 긍휼이 된다. 이 시편은 돌연스럽게 결론을 맺고 있으며. 우리가 기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옛날의 사례들을 교회의 현재 환난에 적용시키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선한 자는, 이러한 일들을 묵상하기 시작하자마자, 그가 그의 취지를 이루었음을 알았다. 그가 이 문제에 들어서자, 그것은 "그에게" 빛과 기쁨을 "비취어" 주었던 것이다 (119:130). 그의 두려움은 갑자기 그리고 이상스럽게 사라졌으므로, 그는 더 이상 계속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한 나처럼 그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삼상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