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4월 30일 화요일 묵상구절 시편 79편 <아삽의 시>

Jeehyun 2024. 4. 30. 23:26

맥체인성경읽기

민수기 7, 시편 42, 43, 아가서 5, 히브리서 5

묵상구절

79:1 <아삽의 시>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79:2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79:3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79:4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79: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79:6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79:7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79:8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79: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79:10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79:11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79:12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79:13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예루살렘 페허에서 을리는 선민의 사죄와 피의 보수를 구하는 애가 -

(저자: 아삽, 분류: 민족 애가)

서론

💡 본시는 시편에 수록된 총 6편의 민족 애가(44, 60, 74, 79, 80, 90편) 중 네번째 것업니다.

저작 배경

이러한 본시는 B.C. 586년에 있었던 바벨론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인한 남유다 왕국의 멸망을 그 저작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시의 저자로 나오는 아삽은 다윗 시대의 아삽이 아니라 그 자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한편 본시는 저자와 저작 배경이 같다는 점에서와 예루살렘의 멸망 사건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민족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 74편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74편이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선민의 회복을 호소하는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면, 본시는 민족의 비극적 참상에 대하여 애통해 하며 하나님께 선민의 원수들에게 복수를 탄원하는 내용어 주조를 이루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민의 멸망의 비참함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제74편이 성전 파괴를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면, 본시에서는 이방 민족의 살륙으로 인한 선민이 겪는 참상을 보다 부각시키고 있다는 차이점도 있습니다.

본시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

1-4절

이민족의 침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성전어 파괴되고 하나님의 선민이 처참하게 도륙을 당하고 그 시신이 능욕을 당함으로써 다른 민족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탄식조로 토로하는 내용.

5-9 절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민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여 주실 것을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10-13절

하나님을 향하여 선민의 원수들에 대하여 보수하여 주실 것을 간곡하게 탄원하는 내용입니다.

<아삽의 시>

본시의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1절에서부터 성전이 더럽혀지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었다는 사설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본시는 바벨론의 제3차 침입으로 성전이 파괴된 B.C. 586년 직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본시 저자로 제시되는 ‘아삽’ 은 다윗 시대 활동했던 악장 아삽이 아니라 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

본시 저자 역시 성전에서 음악으로 봉사하는 자였으나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선민의 사죄와 피의 보수를 구하는 민족 애가인 본시를 지었을 것이다.


●슬픈 호소(시편 79:1-5)

여기에서는 하늘의 법정에 제시된 슬픈 호소를 볼 수 있다.  세상은 호소로 가득 차 있으며, 교회도 역시 그러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과 함께, 또 세상으로부터 가시 중에 있는 백합처럼 고난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호소를 받고 계신다.  자손들이 그들의 걱정거리를 가지고 그들의 아버지, 유능하며 그들을 기꺼이 돕고자 하는 아버지에게로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가겠는가? 이방 나라들이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국가와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그 숙적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그를 시인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쇠사슬에 걸고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매우 적절한 때에 그들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왕으로서, 그들을 지배하시고 열방을 판단하시며, 성도들의 왕으로서 성도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Ⅰ. 그들은 여기에서 대적들의 노와 압제자들의 포학한 격분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 79:1 <아삽의 시>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 전반부인 1-4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안타까운 현실을 목격한 시인이 열방의 만행과 주의 중둘의 수욕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이여

  • 이러한 내용은 ‘하나님'을 부르면서 시작된다. 즉 시인은 그 어떤 말보다 앞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 이는 지금 자신들이 당면한 현실적 문제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고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시인의 신앙 인식을 반영한다.
  • 특히 시인이 여기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면모를 강조하는 ‘엘로힘'이란 신명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만행을 저지른 열방을 징계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시인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1. 그것은 지역에 대한 분노였다(1절).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온갖 죄악을

(1) 그 거룩한 땅에게 행했다.

그들은 거룩한 땅을 침입했고 그 속으로 잠식해 들어왔다.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그곳을 노략하고 황폐케 만듭니다.  가나안은, 그 땅이 이스라엘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기업이었으므로 그 경건한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귀했다.  가나안 땅이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오랫동안 소유한 땅이기 때문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그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의 이름을 크게 드러내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욱 귀했다.  신앙에 가해진 손상은 일반적인 권리에, 아니 우리 자신의 권리에 행해진 것들보다 더 우리를 상심하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보다도 우리의 기업이 황폐케 되는 것을 더 잘 참아야 한다.  시편 기자는 앞 시편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 예로서, 열방을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78:55)사실을 지적했었다.  그러나 죄가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를 보자.  이제 열방들이 그들 위에 쏟아져 들어오도록 허용받고 있다.


 💡 시인은 본절에서 열방과 주의 기업을 대조시킨다.

  • 열방
    • 본절에서는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을 가리킴.
    • 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그들의 강한 힘과 위세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뿐만 아니라 이는 바벨론의 많은 군인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 주의 기업
    • ‘열방'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이스라엘을 ‘주의 기업'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상당히 의미 있는 표현이다.
    • ‘주의 기업에’ : 이는 예루살렘과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므로 그 땅은 결국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 시인이 의도적으로 ‘엘로힘'이란 신명을 서두에서 사용하여 하나님을 부른 다음 2인칭 남성 단수 어미가 결합된 ‘주의 기업'이라는 표현으로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중한 소유라는 의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시인은 주의 소유가 열방에 유린당하는 현실을 지적함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이 침해당함을 상기시키며 이러한 암울한 현실을 타개해 주실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2) 그 거룩한 집에게 행했다.

높은 궁처럼 지어놓고 땅처럼 견고하리라 생각하던 그 성소는 이제 하나님께서 땅처럼 평평하게 하여 버렸다.  저희가 "주의 "성전을 침입하여, 그것을 황폐케 함으로써 다시 "더럽혔나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죄로써 그것을 더럽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가 그 오만함으로써 그것을 더럽히는 것을 묵인해 주셨던 것이다.


💡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 시인은 ‘당신의 기업'이 란 표현에 이어 ‘당신의 거룩한 성전' 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다시금 바벨론 군대의 침략 행위로 인해 이루어진 비참한 참상을 하나님과 관련지어 묘사하고 있다.

본문에서 시인이 ‘더럽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 성전이 원래 거룩한 곳이었옴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 성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서 이방언이나 부정한 자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특히 지성소는 성별된 대제사장어라 하더라도 특별히 거룩하게 하는 의식을 거쳐 일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야 둘어같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할례를 받지 않아 의식적으로 더러운 자들인 바벨론 군인들이 성전에 들어와 그곳의 거룩함을 훼손시켰을 뿐 아니라 성전의 기물을 탈취하고(렘 27:19 ; 52:17-20) 성전을 파괴하고 불살랐다(렘 52:13; 애 2:7).
  • 시인은 성전에 대한 이러한 대적들의 악행을 단 한마디로 ‘더럽혔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3) 거룩한 성에게 행했다.

저희가 "예루살렘으로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쓰레기 무더기(일부의 견해대로) 무덤 위에 쌓여진 그러한 무더기가 되게 하였다.  거민들은 쓰러지는 집 속에 묻혔고, 그들의 거처는 그들의 지하묘, 그들의 역사 깊은 집이 되었다.


💡앞서 성전이 더럽혀짐에 대하여 탄식했던 시인이 이제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전체로 시선을 돌린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임과 동시에 아름다운 곳으로 묘사된다{아 6:4). 그런데 이곳이 돌무더기가 되어버렸다.

시인이 여기서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은 간접적으로 예루살렘이 징계를 받았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어다.

  • 즉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그들이 안전할 것으로 믿었던 예루살렘조차 폐허가 될 것을 에언하였는데(렘 9-11; 26:18) 시인이 본문에서 이를 연상시키는 표현을 함으로써 예레미야가 전한 바가 성취되었음을 도러내고 었는 것이다. 

2.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분노였다.

(1)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피를 아끼지 않았고, 조그마한 동정도 없이 그들을 죽였다.  그들의 눈은 용서하지 않았고 관대함을 베풀지도 않았다(3절).  그 원수들이 그들을 만나는 곳에는 어디서든, 곧 "예루살렘 사면, 그 성읍의 모든 거리에 "물같이 그들의 피를 흘렸었나이다.  즉 "나오거나 들어가는" 자마다 "칼이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많은 인간의 피가 흘려져 하수가 피같이 흘려졌다.  그리고 그들이 매우 많은 피를 흘릴 수 있다면, 그 한 방울마다 "하나님께서 피에 대해 심문하실"때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생각지 않고서 조금도 주저하거나 후회함이 없이 피를 흘릴 것이다.


💡 79:2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 앞선 1절에서 이스라엘 땅과 성전과 예루살렘에 대한 대적듈의 죄악상을 다룬 시인은 본절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의 백성에 대한 그들의 죄악상을 다루고 있다.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 ‘주의 종들을 죽였다'라는 표현보다 그들의 행위가 더 흉악했음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이다.
  • 이러한 본문은 잔혹한 살륙의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병거 바퀴와 함성 소리가 휩쓸고 지나간 이후 남아 있는 것은 도처에 널브러진 시체들뿐이다. 더구나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시체가 많아서인지 혹은 그들을 매장할 살아 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살륙의 정도가 커서언지 그 시체들은 장사되지도 못한 채 새들의 밥이 되고 있었다.
  • 고대 근동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영예롭게 장사지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시체가 장사되지 않고 그냥 방치된다는 것은 고대 근동 문화에서는 엄청난 저주와 수치, 불행으로 여겨졌다.
  • 따라서 참혹한 유린의 현장을 목격하는 자들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임을 깨닫지 못할 자가 없었을 것이며 참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적들에게 살륙당해 매장되지 못한 자들을 ‘주의 종들'이라고 표현.

  • 시인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과 자신들이 주중 관계에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 고대 근동에서 중은 주인에 대하여 절대 복종하며 주인의 이익을 위하여 일할 의무가 있었다. 반면 주인은 종의 생활을 보장하고 생명의 안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 따라서 주의 종들의 시체가 유기되어 새들의 밥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의 안전을 지키시지 않았음을 항변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항변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지금이라도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고 안전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간구이기도 하다.

(2) 원수들은 그들의 시체를 능욕했다.

원수들은 그 백성들을 죽이도 나사는, 그 시체를 묻지 못하게 했다.  묻힌 자들, 심지어 "하나님의 종들의 시체,", "주의 성도들의 육체," 즉 그 이름과 추억에 대해 특별한 앙심을 품고 있는 자들을 다시 파내어, 그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땅 짐승에게 주었다."  또는 적어도, 그 원수들은 그들이 살해한 자들을 그렇게 되도록 방치해 두었다. 그들은 그 종들을 사슬에 매달아 놓았는데, 이것은 그 모습을 보는 유대인들을 특별히 상심케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것은 법으로서 엄격히 금하셨기 때문이다(신 21:23).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이러한 비인도적 처사를 당할 것이 예고되어 있다(계 11:9).  이리하여 시체들도 자기들이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증언해 주는 셈이었다.  이것은 핍박당하는 자의 비참함에 대한 일례로서가 아니라(왜냐하면 성도들은 새와 짐승들의 밥이 될지라도, 그 몸이 영광 중에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핍박하는 나의 악의에 대한 일례로서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해설이다("신국", Lib. i. Cap. 12).


 💡79:2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 시인은 본문에서 시체들이 유기된 채 도처에 널브러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그들 중에 목슴이 붙어 있는 자가 남아 있다 할지라도 구조와 치료를 받기는커녕 산 채로 들짐승에게 먹히도록 방치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이들 대적들이 얼마나 잔혹스러운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야말로 그들의 잔흑 행위가 극에 달하였음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징계를 당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 시인은 이처럼 상반절보다 더욱 심화된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의 사용으로 당시의 처절했던 상황을 마치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듯이 묘사하고 있다.

79:3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 본절에 언급된 피는 당시 이스라엘이 당한 상황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나타내준다. 남유다 멸망 당시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1년 6개월 동안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며(왕하 25:1, 2)
  • 이때 많은 사상자들이 생겨나 예루살렘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이들이 흘린 피로 인해 예루살렘을 둘러싼 계곡의 물들은 핏빛으로 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본문에서 피를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예루살렘의 참상을 보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 성경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자신도 피를 흘리게 된다고 말한다(창9:6; 합2:17). 또한 하나님은 무적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을 미워하신다고 말한다(잠 6:17).
    → 시인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피의 보수자가 되어 대적들에게 원수를 갚아주시기를 청원하기 위하여 피를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 이러한 비참한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대적들의 잔혹한 학살로 인해 예루살렘이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은 죽음의 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살아 남은 자들로는 도무지 죽은 자들을 매장할 수조차 없었다.
  • 2절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매장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독특하고도 정교한 매장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죽은 자들에게 결코 빼앗지 말아야 할 최종적인 조치요 영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장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당시 예루살렘이 얼마나 심각한 파괴를 당하였는지와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나타내준다.

3. 그들의 이름에 대한 분노였다(4절).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었나이다.  그들은 항상 우리를 욕되게 할 것을 궁리하고 있으며, 우리를 멸시로써 괴롭히나이다.  그리고 우리의 죄와 우리의 고난으로 인하여 우리를 비난하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와 우리의 기대를 거짓이라 말하며, 우리를 우스꽝스러운, 또는 추악한 존재로 말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만일 하나님을 고백하는 백성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 열조의 이전 상태에서 떠나 타락한 다면, 그들은 조롱거리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정당한 책망이 우리가 참되게 회개하는 것을 돕게 된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부당하게 책망 당하고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복음의 이스라엘의 운명이 되어 왔었다.  사도들 자신도 만물의 오물로 여김"을 받았다.


💡 79:4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 본절에서는 황폐화된 땅과 매장조차 당하지 못한 주검들, 그리고 전화로 부상을 당한 이들, 아울러 썩어가는 시체 속에서 살아가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당하는 헌실적 고통 외에 주변 나라들로부터 경멸과 조롱을 받는 상황을 보도한다.

이스라엘을 경멸하는 주체인 ‘우리 이웃'과 '우리를 에운 자’

  • 곧 이스라엘 주위의 여러 나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고통과 신음에 빠진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손가락질하며 모욕했다.

‘비방거리' , 조소', ’ 조롱거리' 라는 3중 반복 표현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다.

본단락의 전반부인 1,2절에서 시인은 ‘주의 기업', ‘주의 성전', ‘주의 종, ‘주의 성도들’ 이라는 표현을 통해 동일한 이미지를 반복 강조한 바 있다. 이는 곧 대적들로부터 살륙을 당한 이 땅과 그곳 사람들이 ‘주의 것 ' 곧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 이러한 표현을 통해 시인은 궁국적으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소유를 이방 대적들이 처참하게 훼파하고 있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 이어 이제 본단락을 마무리하는 본절에서는 이웃들에게 멸시를 받는 하나님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처지를 호소한다.

결국 본단락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 주의 백성들이 원수들과 이방인들에게 능욕받는 이 모든 수치와 고난이 - 바로 하나님 당신을 향한 것이라는 점이다.
  • 시인은 단순히 자신들만 모욕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상황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이처럼 처절하게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게 만든 이유였던 것이다. 

Ⅱ.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더욱 놀라고 있다(5절).

그들은 그들 이웃의 진노 속에서 바로 이것을 식별하고 있으며, 이것을 매우 탄식하고 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계속되리이까?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과 화해하시는 것 이상, 즉, 그의 진노가 제거되고 그 다음에 사람의 남은 진노가 제지되는 것 이상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총을 생명보다 더 나은 것으로서 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고, 그 진노를 면케 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한다.


 💡 79: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 시인은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암울한 상황들을 묘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했으나 이제 본절부터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면서 시인은 하나님을 ‘여호와’ 로 부르고 있다.

‘여호와’

  •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과 관계된 신명이다.
  • 즉 시인은 ‘여호와'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사실, 그러고 그 언약 안에 포함된 보호와 돌보심, 인도하심 등의 익속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 원문에는 언약의 하나님 신명 ‘여호와’를 부르기 이전에 이 표현이 먼저 나온다.
  • 시인은 이러한 표헌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당하는 수치와 비극이 참으로 오랫동안 계속되어져 온 일이요 표면적으로는 그 결말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절망스런 상황에 있음을 나타낸다.
  •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함이라기보다는
    • 하나님의 징계에는 반드시 결말이 있다는 자신의 확신을 피력하고 하나님께서 하루속히 돌이키서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보다 강조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 앞서 언급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와 더불어 본문의 ‘영원히 노하시러어까'란 표헌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노하심은 끝이 있으며 영원히 노하시지는 않는다는 시인의 믿음을 역설적으로 나타낸 표현인 것.
  • 이러한 표현을 통해 시인은 당신의 백성을 향해 내리신 진노를 어제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는 심경을 토로하는 것이다.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 원문에 가깝게 본절을 해석한다면 ‘영원히 진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타오르듯 하시겠습니까'.
  • 다시 말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더 사랑한 것에 대한 질투의 결과란 의미를 전달한다.
  • 따라서 이러한 시인의 간구에는 하루속히 분노와 질투를 푸시고 자신들이 처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구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조와 위안을 구하는 탄원 (시편 79:6-13)

여기에서 하나님께 올려진 탄원은 교회가 당면했던 환란에 매우 절절하다.  그리고 그 탄원은 그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즉 그것과 함께 섞여 있고 대부분 하나님의 영예로부터 나온 논거를 가지고 있다.

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노를 거두어, 그것을 핍박하고 능욕한 자들 위로 돌리시기를 기도하고 있다(6절).


💡 79:6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소유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진노를 돌이키시어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하나님의 백한 백성을 핍박하는 이방 민족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부으시라고 간구하고 있다. 

"열방에 주의 노, 곧 주위 노가 가득 차 있는 병을 쏟아 부으셔서.  저희로 그 찌끼를 짜내어 마시게 하소서."  이 기도는 사실상,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는 예언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관찰하자.

1.그가 기도로 대적하고 있는 자들의 성격.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그의 이름을 찾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을 도울 능력이 계시며 또  돕고자 하시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무지함을 주장하며, 기도를 무시하는 자들은 경건치 못한 자들로서,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산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그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열국들이 있다.  그러나 그 무리와, 연합된 세력들은 그의 의로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2.그들의 죄.

"저희가 야곱을 삼켰나이다"(7절).  자기 백성을 건드리는 것은 곧 자기   눈동자를 건드리는 것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범죄로 여기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야곱을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집어삼켰다.  야곱의 거처 가나안 땅을 침입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약탈하고 그 주민의 없앰으로써 그 땅을 황폐케 했다.


💡 79:7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 6절의 간구의 이유

  1. 야곱을 삼키고
    1. 야곱 = 성경에서는 종종 선민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야곱’으로 부를 때가 많다.
    2. 여기서는 6절의 ‘열방, 열국’과 대조되는 민족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1. ‘그’ = 야곱.
    2. 지금 시인은 대적들이 야곱으로 표현되는 바 선민들의 삶의 기반을 없앴음을 고발하고 있다.
    3. 그의 거처 =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야곱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
    이는 곧 대적들의 죄악이 하나님과 밀접하게 관계를 갖는 것임을 강조하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러한 본절은 앞선 6절과 더불어 렘 10:25과 그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 저작 연대를 살펴볼 때 , 본시의 저자가 예레미야의 저작을 참고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이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진 예레미야서를 인용하고 있는 것은
    •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이 에레미야 선지자가 밝힌 바와 같이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정계 때문이라는 사실과(렘 2:2, 3) 예레미야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회개함으로 지금의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렘 25:5) 암시를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3.그들의 유조의 판결.

"그들 위에 주의 조를 쏟으소서.  그들이 더 이상 죄악을 행하지 못하게 막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행한 죄악에 대해 보복하소서."

Ⅱ. 그들은 죄사함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들은 그 죄가 자기들의 모든 재난의 원인임을 인정하고 있다.  사람은 비록 불의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허용한 것은 의로우시다.

1. 그들은 하나님이 "저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저희에게 돌리지 마시기를" 기도하고 있다(8절).

그들이 이제 늙었을 때에, 그들이 젊었을 때에 범한 이전의 죄악 곧 그들 조상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들에게 돌리지 마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바벨론 포로 사건에서 이전의 죄악이 보응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렇게 행하시지 않을   것을 약속하시고 계시며(렘 31:29, 30), 그들도 이처럼 "우리의 첫 번째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기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금송아지에 대한  것으로 소급해 올라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출 32:34)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회개하고 개 심한 자녀들이 부모의 죄를 상속받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저희에게 돌리지" 마시기를 믿음으로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하시면, 그것을 도말 하시고 더 이상 기억치 아니하시는 법이다.


💡 79:8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본문은 부드러운 금지, 부정적 소원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구문이 사용되었다.

  • 앞선 6절에서 명령형 동사를 사용하여 대적들을 향하여 주의 노를 쏟아주시기를 강력하게 요청한 바 있었던 시인이 여기서 부드럽고 간곡한 어조를 사용하는 이유
    • 자신들이 징계를 당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제발 징계를 거두어 달라는 요청을 올리기 위해서이다.
  • 이러한 소원은 시인에게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

  • 죄악: 원형 ‘아온’ = ‘타락, 죄, 불법’을 의미함.
    •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 죄악이라는 것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왜곡된 상태임을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될 수 있는 말인데, 죄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키며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 시인이 여기서 자신들의 죄가 아닌 열조의 죄악을 거론하는 이유는?
    • 하나님의 징계가 열조들로부터 계속 되어온 죄 때문임을 인식한 것을 반영한 표현이다.
    • 아울러 이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나큰 고난과 수치 속에 있음을 강조함으로 속히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 긍휼 : 원형 ‘라함’
    • ‘태아를 품고 있는 자궁’ 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 히브리어에서 ‘긍휼’이라는 것은 어머니가 자신의 자궁 안에 있는 태아를 품고 있는 것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만일 하나님이 공의만을 가지고 사람의 죄를 징책하신다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끝까지 다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 즉 어머니가 태에 있는 아이를 보살피고 긍휼히 여기는 것과 같은 자비로우심, 자애로우심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에 근거해 구원하시며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이유 =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 단순히 신분이 낮아지거나 천한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만 아니라 심각하게 결핍된 상태(NIV, in desperate need), 철저하게 약화된 상태(NJB, utterly weakened)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 따라서 이는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민족의 침입으로 선민의 자궁심마저 잃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곤난으로 인해 핍절할 지경에 이르렀음을 나타내준다.
    • 이처럼 비천한 상태, 곤고한 상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심히'로 번역된 부사 ‘데오드'를 통해 한 번 더 강조된다. 즉 시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흑득한 고난의 상황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에 근거해 구원을 베푸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2. 그가 근래에 그들이 범한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과 양심은 그 죄로 인해 더럽혀졌던 것이다.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9절).  그들이 죄사함에 입각하여 죄에서 떠날 때, 환란에서 구원되는 것은 사랑으로 허락되어지는데, 그것은 정말 긍휼이라 일컬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는 기도보다는 우리의 죄를 제거하는 기도에 있어서 더욱 진지해야 한다.  그리고 죄사함은 우리 구원의 초석이며 즐거움이다.


💡 79: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을 강력하고 간곡하게 호소함.

  1. 3개의 명령형 동사
  2. ‘구원의 하나님’ (엘로힘)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 ‘엘로힘’
    •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당시 고대 근동의 최강국으로 군림하는 바벨론이라 할지라도 능히 물리치시고 그들이 몰아넣은 수치와 고통으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란 신앙 고백이 함축되어 었다고 할 수 있다.
  • ‘우리 구원의 하나님’
    • 이로써 시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민임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 즉 시인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반드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란 신념을 가지고 이러한 호칭을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설명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이유

1.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2.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에 근거한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이다.

본시에 거듭 나타나는 시인의 탄식의 이유

  • 전쟁으로 인한 생존의 위혐이나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 혹은 소유의 상실로 인한 개인적인 불편 흑은 정처적 주권의 상실로 인한 민족적 수치 등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시인은 무엇보다도 이방인들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유린당한 것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 볼 때 본시의 첫단락인 1-4절에 언급된 바 원수들이 하나님의 기업을 짓밟고 모독하는 바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내용 역시도 단순히 그들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과 적개심의 발로에서 나온 것으로만 볼 수 없다.
    여기에도 본절에서 표현되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으로 인해 느끼는 의분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본절에 제시된 3개의 명령형 동사.

  1. 도우시며
    1. 기본적으로 ‘돕다'란 의미를 지니며 전투시 방어적 차원에서의 ‘둘러싸다', ‘보호하다'라는 뜻도 포함하는 표현이다.
      → 따라서 이에는 이방 민족의 침입과 괴롭힘을 하나님께서 막아달라는 요청이 포함되어 있다.
    2. 당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 대부분이 비참하게 살륙당하여 매장조차 되지 못하며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도성 예루살렘과 성전이 훼파되는 비참한 상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는 시인의 간구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의 침략과 훼방, 멸시를 당치 않도록 해달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2. 건지시며
    1. 시인은 이방 민족에게 고통 받고 었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구출하여 회복시켜 달라는 간구를 올리고 있다.
  3. 죄를 사하소서
    1.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속죄와 관련해 사용되는 대표적인 표현.

이처럼 본절에 연속된 시인의 간구의 내용은 논러적인 순서상 약간 어색함이 있다. 보통 죄사함을 먼저 요청하고 보호와 구원을 호소해야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시인은 던저 보호와 구원을 하나님께 요청한 후 마지막으로 죄사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인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어 처한 상황이 그만큼 비참하고 암담한 것에 따른 결과로 풀이할 수 있다.

즉 시인은 지금 당장 도우심과 보호하심, 구원의 은혜가 시급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한 다급하고 고통스런 상황을 암시하기 위해 이같은 순서로 문장을 배열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본문은 하나님의 죄사함이 모든 현실적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열쇠임을 인지한 시인의 성숙한 신앙적 인식을 반영한 것.


Ⅲ.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구원을 역사 하시기를, 그리고 그들의 환난이 유익하게 그리고 곧 끝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8절).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 이외에서는 소망을 걸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정이 매우 비참했으므로,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동정의 대상을 간주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이 곧 개입하여 절망적인 상태에 있음을 알았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끈질기게 요청하도록 자극하고 있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주여 우리를 건지소서. 환난 아래 있는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가 잘 참을 수 있게 하소서.  우리를 죄에서, 함몰에서 건지소서."  그들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1.그들이 겪게 된 큰 환란.

"우리를 돕지 않으시면, 우리는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천하게 될수록, 우리는 하늘로부터의 도움이 더욱 필요하며, 우리를 일으키는 속에서 그 거룩한 능력은 더욱 존귀케 될 것이다.

2.그들이 그를 의지함.

"주는 우리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주만이 도우실 수 있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며 우리는 여호와께 도움을 기대합니다.  여호와께만 주의 백성의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구원의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은 그가 참으로 그러하심을 발견할 것이다.

3.그들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예에 대한 관심.

그들은 자기들의 의를 진술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어떤 공로도 가장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 죄를 사하소서"라고 했다.  기도에 대한 가장 큰 격려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들이며, 그것으로써 그가 그 자신을 나타내신 것들이다.  이 탄원 속에는 다음 두 가지 사살이 암시되어 있다.

(1) 하나님의 이름과 영예는, 만일 그가 그들을 건지시지 않는다면, 크게 손상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조롱하는 자들은 마치 하나님이 연약해서 그들을 도우실 수 없거나 물러나시어 그들을 도우려 하시지 않는 것처럼 그를 모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10절).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그가 저희를 버리셨고 잊으셨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가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을 숭배한 결과이다 라고 말하게 하리이까?"(그들은 구름과 하늘 이외에 다른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들의 찬송이었던 것이, 마치 그들이 아무 곳에도 없는 하나님을 섬겼던 것처럼, 이제는 그들의 비방과 또 그의 비방이 되었다.  "주여" 그들은 말하고 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행하셨던 것을 나타내시옵소서.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우리가 질문당할 때, 그는 우리가 요청하는 도든 일에서 우리 가까이에 계시며 너희도 그가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일로써 그가 그러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게 하소서."

(2) 하나님의 이름과 영예는-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건지신다면-크게 높여질 것이다.  그의 긍휼은 매우 비참하고 도울자 없는 자들을 건지시는 가운데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의 영원한 팔을 드러내시어 그들의 편이 되심으로써 그는 그의 이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은 저 위대한 구원의 모형과 상징이 될 것이다.  때가 차면 메시야 왕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그 구원을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 79:10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 고대 근동에서 나라들간의 전쟁은 곧 각 나라가 섬기는 신들간의 전쟁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전쟁의 승패는 그 나라가 섬기는 신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하여 한 나라의 승리는 곧 그 나라의 신의 승리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패배는 하나님이 이방 신들보다 무능력하거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 그리고 실제로 당시 이방 민족들이 이러한 평가를 하였음을 시인은 여기서 직접 화법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시인은 이방 나라들이 자신들만 아니라 하나님을 훼방하고 조롱하고 있음을 들어 이처럼 참담한 상황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힘주어 강조하며 하나님을 향해 속히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당한 비참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보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간구한다.
  • 시인이 이처럼 공개적인 보수를 요청하는 것은
    자신들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만방에 입증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 특히 시인은 여기서 ‘주의(당신의) 종들'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주인으로서 자신들을 구원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Ⅳ.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적들에 복수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즉

1.그것은 그 적들의 잔인함과 야비함에 대한 복수였다(10절).

"우리의 피흘림 당한 복수를(고대의 율법에 따라, 창 9:6) 열방 중에 알리소서.  그들에게 임한 심판은 그들이 우리를 해한 것에 대한 형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이 일을 우리 목전에서 행하소서.  그리고 이러한 방법에 의해,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94:1), 그리고 주의 백성들의 피에 취한 자들은 "피를 마시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럴 만하기 때문이다.

2.그들의 오만과 조소에 대한 복수였다(12절).  "그 훼방을 저희에게 갚으소서.  그들이 말과 행동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백성들과 그의 이름에 가한 모욕을 덤을 붙여서 그들에게 도로 갚으소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만의 비방했을 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복수하시든 아니하시든 간에, 하나님께 맡겨야 하고, 그가 그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자신을 모독하는 비방을 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저희 품에 7배나 갚으시어 그들의 마음을 칠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들을 겸손케 하여 회개로 이끌 수 있도록, 믿음으로써 기도해야 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죄인이 주께 거슬러 향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의를 정죄하실 것이며(유15), 그것을 생각나게 하여, 저희 가슴에 영원한 두려움이 돌아오게 하리라는 사실에 대한 예언으로서, 애녹의 기도와 똑같은 취지를 지니고 있다.

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불쌍한 포로들, 특히 유죄 판결을 받은 포로들을 구조하기 위한 길을 내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11절).


 💡 79:11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원수의 손에 떨어진 그들 형제의 상대는 매우 슬펐다.  그들은 포로들을 철저히 지켰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스스로 탄식하는 것을 감히 알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근심은 깊고 조용한 한숨을 발했다.  그들의 도살당할 양처럼 죽을 운명에 놓여 있었으며 그들 자신 안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비참한 사정을 시편 기자는

1.신의 긍휼에 위탁하고 있다.  "저희 탄식으로 주위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주께서는 저희의 한탄을 인지하시기를 즐거워하소서."

2.신의 능력에 위탁하고 있다.  "죽이기로 정한 자의 죽을 운명에 처한 자를 어떤 피조물도 겨룰 수 없는 주의 크신 능을 따라 보존하소서."  사람이 궁지에 몰렸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나타나실 기회가 된다(고후 1:8-10  참조). 끝으로, 그들은 기도의 응답에 찬미로 보답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1절).  "그리하면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리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어떻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관계를 스스로 즐기고 있는가? "우리가 압제 당하여 비천하게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주님이 기르시는 양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주로부터 부인되며 버림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것이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2) 어떻게 그들은 그들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찬미드릴 기회를 그들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는가?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원했고 또 환영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감사의 소재를 공급해 줄것이고 또 그들의 마음이 그 뛰어난 역사, 하늘의 역사와 조화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었다.

(3) 그들은 현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뿐만 아니라,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는 "자들이 될" 것을 원하고 있다.  즉,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신 것을 영원히 기념하며, 그들의 후손으로 그 찬미의 일을 계속 지키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는 의무를 지겠다고 하고 있다.

(4) 어떻게 그들은 이것을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가? "주여 우리를 위해 나타나시어 우리 원수들을 치소서.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주를 모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2절).  그러나 우리를 건지시면, 우리는 주를 찬미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는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기 위해 주께서 주 자신을 위해 만드신 주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잘려져 나가면, 어디에서 그 소작료가.  공물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의 찬미에 완전히 헌신하는 삶을 사는 자들은 틀림없는 그의 보호를 받는다.


💡 79:12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히브리 문화에서 7’ 은 완전수를 의미함.

  • 따라서 ‘칠 배나 갚으소서'라는 시인의 호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핍박한 그들에게 완전한 심판, 완전한 복수를 해달라는 간절한 애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 ‘주를 비방한’
    • 원형 ‘하라프’ : ‘노출하다’, ‘벗다’
    • 원래 이 단어는 신체가 발가벗겨짐으로 인해 느꺼는 ‘치욕', ‘모욕'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방 백성들이 주를 훼방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치욕스럽게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부정하는 행위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존재와 능력을 부정하는 그들에게 완전한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 79:13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주의 백성’, ‘주의 목장의 양’

시인은 자신들을 ‘주의 백성'과 ‘주의 기르시는 양'으로 규정한다.

능욕받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울분과 더불어 자신들이 특별히 ‘주의 백성' 이라는 시인의 인식은 본시를 관통하는 주요한 주제를 형성한다. 시인은 1, 2절과 10절에서도 줄곧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주의 기업', ‘주의 성전’, ‘주의 종’, ‘주의 성도'라고 표현한 데 이어 본절에 이르러서는 ‘주의 백성', ‘주의 기르시는 양’으로 표현한다.

⇒ 시인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의 보호와 돌봄의 대상임을 보다 분명하게 표명하는 것이다.

시인의 믿음

5절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시인은 이미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참상을 하나님의 진노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그 진노에 대한 어떤 항변이나 반론도 제기하지 않는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로 여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시인은 이처럼 거듭되는 표현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과 결코 뗄래야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임을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다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양’

  • 본문에 언급된 ‘양'의 어미지는 ‘전쟁'의 이미지와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양이 목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은 평화와 안식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즉 시인은 성전과 가옥은 폐허가 되었으며, 도처에 시체들은 매장되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고 온 성 가득 피비린내와 악취가 진동하는 참혹한 폐허의 현장에서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하나님은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양이 되어 평화로이 거하게 될 그 날을 꿈을 꾸듯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본절에 언급된 이러한 표현은
    • 절망 한가운데서 ‘어느 때까지니어까'라고 부르짖으면서도,
    • 여전히 하나님께서 베푸실 회복의 날을 확고히 신뢰하고 있었고,
    • 그 날의 전경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소망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전쟁의 상흔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참혹한 절망의 현장에서 본시를 시작한 시인은 이제 본시 마지막에 이르러 주께 감사하며 주를 찬양하겠다고 고백한다.

  •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전쟁의 고통과 포로들의 신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신뢰하는 시인의 눈에는 양들이 선하시고 능하신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회복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 주의 소유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끝날 것이며, 오히려 그들을 괴롭히던 대적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섬멸될 것이다.
  • 더구나 이제 하나님은 그들의 목자가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양이 되어 기꺼이 하나님을 따르며 헌신하는 관계가 회복될 것이다.
  • 이제 전쟁은 사라지고 ‘영원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을 그러며 확신 가운데 찬양을 서원하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은
    • 현실이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 문제를 초월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결론

💡 이상에서 살펴본 본시는 아삽의 자손이 지은 민족 애가이다. 시편 전체에서 민족 애가는 모두 여섯 편이 나오는데(40,60.74,79.80,90편) 그 가운데 절반이 (74.79,80편) 아삼 자손의 시란 사실은 아삼 자손들이 신정 왕국의 붕괴를 얼마나 슬퍼하였는지틀 잘 보여준다. 특히 본시는 동일한 시대적 정황에서 아삼 자손이 지은 민족 애가인 제74편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 제74편이 성전 붕괴에 초점을 맞춘 반면
    본시는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에 포로가 된 암울한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그리고 제74편이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선민의 회복을 기원하는 시라면
    본시는 자신들이 수난 당하는 현실을 탄식하고 대적들의 만행을 고발하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피의 보수와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원하는 시이다.

그런 점에서 본시는 자신들의 상태를 탄식하는 비탄시외 성격과 대적의 멸망을 호소하는 저주시적 성격을 지닌 민족 애가라 할 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시 전반에는

  • 하나님과 자신들의 친밀한 관계가 강조되어 있고
  • 회개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죄에 대한 확신이 시 전편에 짙게 깔려 있다.

그런 점에서 본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 이를 근거로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신앙시로서의 성격 역시 매우 잘 드러나는 시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