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민수기 22, 시편 62, 63, 이사야 11, 12, 야고보서 5
묵상구절
92:1-3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92:4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92:5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92:6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92:7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92:8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92:9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92:10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92:11 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92:1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92:13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92:14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92:15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매튜헨리/옥스퍼드
서론
💡본시는 저자와 연대 미상의 시로, ‘안식일 찬송시'라는 표제가 시사하는 것처럼 바벨론 포로기 이후 성전 예배 때에 사용된 감사 예배시입니다.
이러한 본시에서 시인은 인자와 성실하심, 권능과 공의로우심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을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부인하며 경건한 자들을 핍박하고 자기 본위대로 사는 악인들은 그 결국이 하나님의 중말론적 심판에 따른 멸망일 뿐이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선하고 바른 삶을 힘쓰는 의인들은 종말론적 구원과 축복을 얻게 될 것임을 신앙 고백적으로 노래합니다.
따라서 본시는 근본 감사 예배시이면서도 내용상으로는 지혜시적 성격이 강한 시로서 제 1,73편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시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4절
인자와 성실로 자기 백성을 기쁘게 하신 하나님의 행사에 대하여 감사하며 찬양히는 내용입니다.
5-11절
하나님의 행사의 위대함을 찬양하며 악인들을 패망케 하시고 의인들을 높이시는 공의로우신 보응에 대하여 감사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12-15절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주실 복락에 대하여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본시는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고 다만 일반 은총적 수준에서 기본적인 질서만 유지되는 현세상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공의 실현과 심관이 유보됨으로써 당장 눈앞의 사물에만 집착하기 쉬운 유한한 인간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인본주의적 또는 무신론적 착각과 유혹에 대하여 강력한 경고를 전하여 주며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행사를 찬송함 (시편 92:1-6)
이 시는 안식일에 성소에서, 적어도 통폐적으로 노래하도록 정해졌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사업과 그 사업으로부터의 휴식, 그리고 섭리 가운데 계속하시는 하나님의 사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된 휴식의 날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라." 그러므로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 안식일은 거룩한 휴식의 날일 뿐 아니라, 거룩한 일을 하는 날이 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휴식은 일하기 위한 것이다.
- 안식일에 적합한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매 안식일은 감사의 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날의 다른 일들은 이것을 위하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결코 이것을 모퉁이로 밀어내서는 안 된다.
유대인의 학자 중 한사람은 이것을 메시야 왕국에다 연결시킨다. 그래서 "장차 올 시대에 관한 시' 혹은 "노래"라고 부른다. 그 시대는 모든 날이 안식일이 될 것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는 안식일"을 즐긴다(히 4:9)(이 날은 영원한 안식일의 시작인 것이다.)
💡 <안식일의 찬송서>
한글 개역 성경의 표제는 독립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1절로 되어 있다. 따라서 원문에는 본시가 한글개역 성경보다 1절 더 많은 16절로 되어 있다. 한편 시편 표제에는 일반적으로 저자, 저작 배경이나 시기, 연주 방법이나 사용 악기 등이 제시된다. 그러나 본시는 이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고 단지 안식일에 부른 찬송시란 사실만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본시가 안식일 성전 예배 때 부른 찬송임을 암시한다.
구약 시대의 안식일은 매우 엄격하게 지켜겼다. 그 날은 단순히 일을 그치고 쉬는 날만이 아니었다.
‘안식일’ 의 원형
- ‘휴식하다'라는 의미로, 계속해서 해오던 일을 그치고 쉬면서 여호와의 행사를 경축한다는 의미까지 내포하는 단어이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에서도 암시되듯이 안식일은 모든 일상적인 일로부터 해방되어 성회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어었다(레 23:3). 그래서 안식일에 모여서 함께 부를 찬송도 필요했다.
이러한 면에서 본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부터 돌아와 안식일에 사용하기 위해 편집된 찬양시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볼구하고 본시의 내용을 보면 안식일과 관계되는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본시는 그의 택한 백성을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악인의 궁극적 멸망 및 의인의 궁극적 형통함에 대해 노래하는 시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헤서 본시의 표제가 잘못 붙여진 것은 아니다. 안식일에 창조주이시자 구원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의로우신 하나님의 존재로 인한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흥왕을 기대하는 것 역시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시는 주일 성수를 무거운 짐으로 여기는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일깨워 줌과 동시에 그 옛날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도래케 하실 영광스러운 날들을 바라보면서 기뻐했음을 본받게 하는 지혜시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반부 (1-4절) : 주를 찬양할 수 있는 기쁨을 토로함
Ⅰ.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청되어지고, 고무되어진다(1-3절).
“여호와께 감사함이 좋으니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좋은 것이며, 우리에게도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요, 채무요, 바쳐야 할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께 지불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만일 지불하지 않고 있으면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용납된다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에게 열납되리라는 희망을 갖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찬양은 즐겁고 유익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보상이 되는 좋은 일이다. 그것은 천사들의 일이며, 하늘의 일이다. 우리가 받는 자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유익하다. 이는 더 많은 자비를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모든 축복과 찬양 위에 뛰어난 지존자의 이름을 노래하는 것은 적합하다. 여기서 관찰해 볼 것이 있다.
💡 92:1-3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한글 개역 성경은 1-3절을 하나의 문장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원문으로 보면 이는 세 개의 마침표를 가진 세 개의 문장이다.
원문에 준하여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1절, ‘지존자여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좋으니이다(NASB, It is good to give thanks to the Lord, And to sing praises to Thy name, O Most High)'
- 2절,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과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선언하는 것이(좋으니이다) (NASB, To declare Thy lovingkindness in the morning. And Thy faithfulness by night)’
- 3절, ‘십헌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결한 소리로(나타내는 것이 좋으니이다) (NASB, With the ten-stringed lute, and with the harp; With resounding music upon the lyre)
‘좋으니이다’
- ‘토브’
- 이 단어는 좋고, 아름답고, 선하고, 친절하고, 기쁜 것 등과 관련된 모든 긍정적 의미를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 본문에서 이 단어는 그 어떤 단어보다 시인의 감사와 기쁜 마음을 강조적으로 표현해 줄 뿐 아니라,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성설하심이 매우 선하다는 사실 또한 암시하고 있다.
‘지존자여’ (엘르욘)
- 이러한 내용을 서술하면서 시인은 그 하나님 여호와를 ‘지존자’ 라고 부른다.
- 이에 해당하는 ‘엘르욘'은 ‘높다’ 라는 의미의 단어에서 유래하여 ‘지극히 높으신 분(the Most High)'이라는 의미이며,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 외 그 어느 것을 지칭할 때도 사용되지 않는다.
- 이는 ‘엘르욘’ 으로 청해지는 하나님만이 인간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이며, 그 어느 누구도 그 보좌를 넘볼 수 없는 주권자이심을 보여준다.
Ⅱ.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인가?
1. 우리는 그의 "인자와 신실을 나타냄으로써" 찬양하여야 한다.
그의 영광스러운 속성과 완전하심을 확신하여 우리 자신이 그것들에게 크게 감화된 사람으로서, 또한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들을 감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으로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크게 찬양하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장엄하심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뿐만 아니라 그의 인자와 신실을 또한 나타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선하심은 그의 영광이요"(출 33:18, 19). 이것으로써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자비와 진실은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크게 부지하고, 우리의 사랑과 순종을 크게 고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이것들을 간절히 원함을, 또한 우리가 기뻐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은 당시에 노래로 뿐만 아니라, "십현금"이라는 악기를 동반해서 찬양되어졌다(3절). 그러나, 그것은 소란하고 정신을 흐트러뜨리게 하는 소리가 아니고, 진지하고 정신을 고정시키는 "정숙한 소리"로 찬양되게 되어 있었다.
💡 시인은 여호와를 찬양하되, 단순히 목소리로만 찬양한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표적인 악기들을 들어 그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사 43:21)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아름답게 찬양해야 함을 보여준다(150:3-5).
2. 우리는 어느 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나?
"아침에 그리고 밤마다"해야 한다. 안식일 뿐만 아니라 매일이다. 그것은 매일 요구되는 의무이다. 우리는 공중 집회에서 뿐만 아니라 사실(私室)에서 그리고 우리 가족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을 우리 자신에게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내면서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한다. 우리는 매일을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시작하고, 끝마쳐야 한다. 우리는 신선하고, 그 날의 일을 시작하기 전 매일 아침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고, 우리가 다시 정돈하고 자리에 들 때 그리고,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매일 밤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매일 아침에 밤에 베푸신 자비를 감사해야 한다. 나가며, 들어오며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Ⅲ. 우리는 시인 자신 안에서 이 일을 행하도록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를 지시하는 우리 앞에 놓인 하나의 실례를 가진다(4절).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나를 기쁘게 하였나이다." 유의할 것이 있다.
1. 찬양의 즐거움을 경험한 사람들이 찬양할 의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잘 추천할 수 있다.
"하나님의 행사는 찬양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여러 번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나는 그것을 좋게 생각하고 찬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일로써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다면 → 그것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셨는가? 그러면, 그의 찬양을 영광스럽게 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그의 섭리의 행사를 통하여 우리를 기쁘게 하셨으며,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의 은혜를 통하여 위대한 구속 사업을 이루셨는가?
(1)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믿음과 희망에 대한 격려를 받자.
시인은 그와 같이 한다. "주의 손의 행사로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기쁜 기억으로부터 우리는 장차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실 것에 대한 즐거운 기대를 증대시킬 수 있다. 그리고 확신 가운데 기뻐하며 그것에 대한 보증을 모든 반대자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다(살후 2:13, 14).
💡 92:4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 시인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의미하며, 이러한 도옴으로 인해 시인은 기뻐하였고 이러한 기쁨이 여호와를 찬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 그리고 시인이 당신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히 지키심을 부각시키는 ‘여호와' 란 신명을 ‘주의 행사' 란 표현과 함께 사용한 것은 시인이 경험한 주의 행사가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이루는 것과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 행하신 일(마아세카) =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지칭.
- 이 구절이 하나님의 창조와 피조물에 대한 오묘한 섭리에 관한 내용인 것은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사실이다.
-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본문에서 복수형으로 표기된 ‘주의 손의 행사'는 신인동형동성론을 사용하여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만물돌과 이러한 피조돌에 대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들을 염두에 둔 표현임이 분명하다.
-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소리 높여 찬양하겠다는 시인 자신의 강한 의지.
5-11절: 주의 행사의 위대함을 찬양, 주가 주실 은혜와 보응에 대해 감사함
(2) 거기로부터 거룩한 경배와 하나님께 대한 경탄이 나오게 하자(5절).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상상을 넘어선, 표현을 넘어선 크심(위대함), 위대한 능력과 지혜의 산물, 그 크신 중대함과 중요성, 사람의 행사는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의 위대함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서 존경과 두려운 경탄을 하고, 그것들의 장엄함에 놀라게 되기까지 한다. "사람의 행사는 작고 사소하나이다. 이는 그들의 생각이 얕기 때문이니이다. 그러나, 주의 행사는 크고 측량할 수 없나이다. 이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어서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니이다." 하나님이 행하심이 우리 능력의 결과를 능가하듯이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 지혜의 책략을 능가한다.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요!(롬 11:33)" 하나님의 행하심의 위대함과 그의 생각의 깊음을 생각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그 자신의 뜻은 모든 것을 행하시는 그의 행하심과 일치한다. 그의 생각의 범위가 얼마나 넓게 뻗으며, 그 생각이 도달하는 길이가 얼마인가!
💡 92:5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주의 행사’(마아세카)
- 위대하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오묘한 섭리에 대하여 감탄하고 있다.
‘어찌 그리 크신지요’ (마 까델루)
- ‘얼마나 위대하신지요’(how are great)란 의미의 감탄문.
- 크신지요 : 정상적인 것보다 훨씬 크고 높고 위대한 것을 나타냄.
- 본문에서는 인간의 머리로서는 여호와의 창조 사역과 섭리가 감히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게 판단된다는 사실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 ‘당신의 생각이 매우 심오합니다’, ‘당신의 고안이 매우 심원합니다’
- 이 역시 여호와의 창조와 섭리에 대해 감탄하는 표현.
- ‘주의 생각’ (마하솨바)
=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포함된 하나님의 오묘하신 계획과 목적.- 이 세상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우연히 존재하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 이러한 하나님의 ‘마하솨바'는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특히 죄로 인해 그 지각이 어두워진 자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사실 은 다음 6절이 잘 보여주고 있다.
- 그러나 시인이 이와 같이 거듭 감탄문을 연발하고 있는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마하솨바'를 도무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해되고 깨달아지지만, 그 참 본질을 깊어 생각해 볼 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그러한 생각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기 때문이다.
Ⅳ.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는 사람들의 성품을 따라 그렇게 하지 말라는 훈계를 받는다(6절).
이 사람들은 어리석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짐승 같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행사를 알려 하지 아니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아니한다.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함으로써(시 28:5) 그들 자신이 번영하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그것은 7절에도 나온다).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행복의 증거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파멸을 위한 준비이다. 섭리의 설계를 알지 못하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도 많다 할지라도 은혜를 통하여 그것을 알게 되는 사람, 또 그러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이유를 더 많이 가진다.
💡 92:6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어리석은 자도 .. 무지한 자도..
- 어리석은 자 (빠아르)
- ‘빠아르’ : 본래 짐승같이 사나운 것을 나타낼 때도 쓰이는 단어.
- 잠언에서는 징계를 싫어하는 자를 가리켜 짐승과 같다고 했는데, 여기서 짐승에 해당하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잠12:1)
- 73:22에서는 깨닫지 못하는 자를 짐승같이 우매하다고 표현하며 이 단어를 사용함.
-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본래 짐승들과는 비할 바 없는 존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49:20).
- 이와 같은 측면에서 시인은 우준한 자를 지칭하면서 짐승과 관련된 단어 ‘빠아르' 를 사용하여 짐승같이 우준한 자들은 하나님의 행사를 결코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 ‘빠아르’ : 본래 짐승같이 사나운 것을 나타낼 때도 쓰이는 단어.
- 무지한 자(’케씰’)
- 구약 성경에서 모두 69희 사용되었는데, 잠언과 전도서에서만 모두 66회 나 사용되어 솔로몬이 애용한 단어라 할 수 있다.
- 더욱이 이 단어는 지혜로움과 반대되는 의미의 어리석음을 의미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미워하는 것(잠 1:22), 자신의 장래를 멸망시키는 미련함(잠 1:32),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는 미련함(잠 13:19) 등을 의미한다.
- 결국 ‘케씰'로 표현되는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미련함으로 인해 자신의 생애를 망치고 말게 된다.
‘알지도 못하며 .. 깨닫지 못하나이다’
- 알지도 못하며 (야다)
- 시인은 어리석은 자들이 여호와의 행사가 위대하고 그분의 생각이 깊으신 것을 자신들의 삶을 통해 결코 생각해 보거나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 전혀 알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이러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 깨닫지 못하나이다
- 주의 행사와 주의 생각이 무엇인지 도무지 식별하지 못하는 영적 무지를 나타낸다.
●하나님과 동거하는 자의 안전 (시편 92:7-15)
시인은 하나님의 행사로부터 높이 찬양할 것이 있다고 말하였다(4절). 여기에서도 그는 그와 같이 한다.
Ⅰ. 그는 하나님의 적들에 대하여 개가를 부른다(7,9,11절).
같은 동포가 재난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의롭고, 거룩한 영광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들의 파멸을 예견하여 개가를 부른다. 그는 죄인들의 파멸을 높이 찬양한다.
1.그들은 흥왕한다. 그러나 "악인은" 봄에 일어나는 "풀과 같이 생장하고"(그렇게 많이, 그렇게 두텁게, 그렇게 푸르고, 그렇게 빨리 자라고)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화려하고 힘있게 흥왕한다(7절).
모든 외부적 번영의 실례들은 그들의 사업의 성공을 약속한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고 그리고, 그것은 선(善)이나 또는 더 좋은 어떤 것의 진정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어리석은 자의 번영은 자기를 죽이며"(잠 13:2), 죽이기로 작정한 양은 가장 기름진 목초를 먹이는 법이다.
💡 92:7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풀 같이 자라고.. 흥왕할지라도
-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기세 등등하게 그들의 세력을 펼쳐 나갈 뿐 아니라 꽃까지 피우며 영광스러움을 뽐낸다.
- 악인의 번영 기간이 결코 길지 않을 것이다.악인들이 비록 방해자의 제지를 받지 않고 급속도로 번영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의 번영은 풀과 같이 금세 시들어 버리는 한시적인 번영으로 그들은 오래지 않아 멸절해 버리고 말 것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인의 행위대로 보응하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악인이 비록 형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된다.
- 풀은 급속히 자라나고 퍼져 나가지만, 가을의 찬 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면 완전히 시들어 버리고 만다.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 이는 ‘풀같이’ 란 표현이 나타내는 일시성과 대조된다.
- 이 영원성은 악인들이 한 번 죽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멸절해 버리고 만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멸망의 지속성, 즉 꺼지지 않는 불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의미이다(마 25:26; 막 9:43).
- 악인의 시작은 좋아 보이지만 그 결과는 결코 좋을 수 없다.
💡 92:8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 본시의 중추를 이루는 구절.
지존하시니이다
- 여기에서 ‘지존하시니이다'로 번역된 ‘마롬'은 문자적으로 ‘높이' 혹은 ‘높은 곳'이라는 의미.
- 이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보좌가 높은 곳 하늘에 있다는 상징적인 사실을 나타낸다. 히브리인들은 이곳에서부터 그의 백성에 대한 보호와 악인들에 대한 심판이 흘러 나오는 것으로 여겼다.
- 그러나 그 의미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어떤 다른 존재와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높으신 위치를 점하고 계시는 초월적이시며 절대 숭고하시고 탁월하신 지존무상의 존재라는 사실까지 포함한다.
그의 지존무상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속된다. 그 어느 누구도 그 자리를 넘볼 수 없다.
영원토록
- ‘영원토록'에 해당하는 ‘레올람'은 인간이나 피조물둘의 존재 방식인 시간적 개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된 표현이다.
- 이 영원함은 창조 이전부터 시작되어 종말 이후까지 계속되는 영원성이다.
→ 이는 하나님 보좌의 안정성과 영원히 존귀하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안정성과 영원성은 어떤 다른 존재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스스로의 권위에 의해 형성된 것이므로 가능하다. 즉 이는 그 어느 세력도 폐할 수 없다.
2.그들은 대담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적이다(9절). 그들 스스로가 그러한 것을 쉽게 인정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반대자요, 하나님과 싸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에 대하여 반역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멸망하리라고 예견하는 것은 쉽다.
"누가 하나님께 대하여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서 번영할 것인가?" 불의를 행하고, 회개치 않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와 같이 그들은 멸망하고 흩어질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지금 서로 밀접히 연결되고 하나님과 종교에 대항하기 위해 결합하여 제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흩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에 대항하여 서로 협력하는 것이 불가능 할 것이다. 장차 오는 세상에서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시 1:5).
💡 92:9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 두 번이나 반복해서 쓰인 단어 ‘오에베카'는 번역 그대로 ‘당신의 원수들’ 이라는 의미이다.
- 이는 마귀와 사단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거보다 하나님에 의해 피조되었으나 그에게 합당한 경외를 드리지 않고,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 이들은 의로운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원수가 되는 자들로서 7절의 ‘악인'과 동일하다. 그들은 잠시 잠깐 흥왕하는 듯하나 결국에는 패망하고 말 것이다.
패망하리니
- 구약 성경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나타낼 때나 보다 강한 자의 세력에 의해 패망한다는 것을 표현할 때도(출 10:7) 사용되었다.
- 이 단어가 본문에서 나타내는 의미는 악인들이 지존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하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 여호와의 원수들이 왜 패망하고 말 것인가? (논리적 근거를 제공)
- 그들이 패망하게 되는 근본 이유는 그들이 죄악을 행하며 거기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
- ‘죄악'에 해당하는 ‘아첸’
- ‘쓸데 없음', ‘헛됨', ‘악함' 등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우상의 헛됨이나 우상 숭배, 그 외의 하나님을 거스르는 허탄한 모든 죄악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쫓으며 죄악을 범하는 자들은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심판에 처해질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 흩어지리이다
- 이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시 의인과 악인의 분리를 연상케 한다.
-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올라 결국 사라지게 되는 것을 표현한 것.
- 잠시 잠깐 번영하던 악인들은 결국 그들 스스로의 죄로 인해 파멸을 피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강조.
- 이러한 본문은 - ‘모두 다' , ‘전부'를 의미하는 ‘콜'이 사용되어 죄악을 행하는 일부 몇 명의 악인만이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멸망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3.그들은 시인에 대하여 특별한 악의를 가지고 있으며 (갈대아판은 그러하다), 그 때문에 그가 그들을 두려워할 시험에 빠질 수 있기는 하지만, 그는 그들에게 대하여 개가를 높이 부른다(11절).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나는 그들이 아무런 심한 해악도 나에게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나에게 행한 해악으로 인하여 그들이 헤아림을 받는 것을 볼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내 눈이 내 원수를 볼 것이요, 내 귀가 악한 자에 대하여 들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가 볼 것 또는 들을 것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러므로, 그가 만족하여질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리스도를 가리킬 것이다. 사탄과 죽음, 음부, 그리고 그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 그리고, 그의 복음을 반대하고 최후의 날에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최후의 멸망에 대하여 언급한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일어나는 사람들은 그 앞에 엎드려지고, 그의 발등상이 될 것이다.
💡 92:11 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의인의 눈이 자기 목숨을 해하려는 원수를 기쁘게 주시한다는 표현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는
- 의인이 악인의 결국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내포하며, 의인이 그 악인으로 인해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위협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 나아가 이는 의인이 자기 자신의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본문의 주어를 자신의 ‘눈(eye)'으로 삼았다.
내 눈으로 보며
- 시인은 자신을 주어로 하지 않고 자신의 눈을 주어로 했다.
이는 시인이 악인을 바라본다는 그 자체를 훨씬 더 강조하기 위함이다. - 여기에서 미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 하나님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래에 반드시 시인으로 하여금 악인의 멸망을 묵도하게 할 것이라는 시인 자신의 선취적 신앙에 근거한 표현이다.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 그들의 음모나 그들의 패망 등에 관해 듣는다는 것으로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즉 문맥상 이는 그들이 의인을 치기 위해 일어났다가 패망하여 혼비백산하며 도주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Ⅱ.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높이 찬양한다.
1.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8절),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우리를 대항하여 싸우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한때 높여질는지 모른다. 그리고, 높은 손으로 그를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빼앗으리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호와는 높으시고,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그들의 높음은 낮아지고, 꺾여질 것이나, 당신은 영원하시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교만과 권세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무력한 협박으로 인하여 낙담하지도 말자. 왜냐하면, 좀이 옷과 같이 그들을 먹을 것이지마는, "하나님의 의는 영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사 11:7, 8).
2. 하나님의 애정과 그 열매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10절).
(1) 그 자신에 대하여(10절).
"스스로 지존하신 여호와여 내 뿔을 높이소서." 위대하신 하나님은 명예의 샘이시다. 영원히 높으신 그 자신이 자기 백성을 영원히 높이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모든 성도의 찬양이시기 때문이다(시 148:14). 행악자들은 "뿔을 높이는 것"이 금지된다(시 75:4, 5). 그러나 하나님은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의 명예와 권세의 중요성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그리고,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그 명예와 능력을 지키고 높이고 사용하며 처리하도록 위탁하는 사람들은 그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까지 "그들의 뿔을 들소뿔처럼" 높이실 것이라고 희망 할수 있다. "주의 적들이 패망할 때에" 주께서 내 뿔을 높이실 것이다. "악인들이 수치와" 영원한 모욕을 받도록 심판을 받을 그 때 "의인들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추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어셨나이다." 그것은 그가 그의 직무를 위하여 기름 부음받은 성례식을 의미한다. 또는 그가 좋아하는 대로 자주 그 신선한 기름을 가질 수 있을 만큼 풍성함을 의미하고 또는 그의 영혼이 시들어질 때 그를 소생시키기 위하여 새롭게 하는 풍성한 위로를 의미한다. 여기에 있는 경우와 같이 필요 한때에 돕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으로부터 이것이 주어질 때 그때 우리는 신선한 기름으로 부음을 받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읽는다. '내가 늙었을 때에 주께서 신선한 기름으로 나에게 부으시리이다. 주께서 나의' 늙은 나이를 풍부한 자비로 높이시겠나이다. 70인 역 성경에는 그와 같이 되어 있다(14절과 비교하라). "결실하며" 하나님의 영의 위로와 그의 구원의 기쁨이 의의 길에서 발견되는 백발의 머리에 신선한 기름부음이 될 것이다.
💡 92:10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 앞선 5-9절에서 시인은 주의 행사의 위대함을 찬양하였다.
- 이제 본절과 11절에서는 주가 주실 은총과 보응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 그중 여호와께서 의인을 높여주신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본절은 악인의 패망을 선언하는 9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뿔'
- ‘카르니'의 원형 ‘케렌’ 은 소의 뿔이나 상아 등을 의미.
- 고대 근동에서 뿔은 권력이나 힘 흑은 성공이나 승리를 상징하였다. 본문에서는 그것이 마치 ‘들소의 뿔'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 누구도 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권력이나 힘 등을 의미한다.
- NIV 난하주에서도 이 단어가 ‘힘(strength) '을 상징한다고 설명.
들소는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힘센 동물로서 특히 그 뿔의 힘은 대단하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시인의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다는 사실은 그에게 강력한 힘과 능력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 NIV 난하주에서도 이 단어가 ‘힘(strength) '을 상징한다고 설명.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 신선한 기름
- 여기에서 ‘신선한'으로 번역된 ‘라아난'은 ‘푸릇푸릇한' 이라는 의미인데(14절 ; 왕하16:4), 본문에서는 ‘푸른 빛을 띤' 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 이 감람나무 기름이 푸른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은 기름이 매우 진하고 향기가 강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보통 기름보다 훨씬 더 비싼 값에 팔린다. 고대 근동에서는 잔치 자리에서 존경하는 손님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사람들 앞에서 그를 높이곤 하였다.
- 본문에서도 시인은 여호와께서 멸망당하는 원수들이 보는 가운데 의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그것도 매우 진하고 향기가 진동타는 값비싼 기름으로 부으시는 것이다.
- 결국 이를 통해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극진히 대접하사 영화롭게 하시고 존귀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 결국 이를 통해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 혹자는 본문의 표현을 왕 • 제사장 • 선지자의 임직식 때 행하여진 기름을 붓는 의식과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 이때 기름을 붓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나 능력 주심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본문 역시도 하나님께서 시언에게 축복을 베푸시고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2) 모든 성도들에 대하여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의로운 나무"로써 묘사된다(사 6:3)
[1] 그들이 심겨진 좋은 장소.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13절)
의로운 나무는 그들 스스로 자라지 않는다. 그들은 심겨졌다. 보통 땅에도 아니고 낙원에, "여호와의 집"에 심겨졌다. 나무는 일반적으로 집에 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과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집에 심겨졌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집에 심겨졌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영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살게 하고 결실하게 하는 진액과 힘을 수여받았다.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에 그들 자신을 고정시키고, 그 속에 뿌리박고, 그 곁에 머무르며, 하나님의 보호 아래 그들 자신을 두며,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결실한다.
💡 92:13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 본문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여호와의 집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 옮겨 놓으신다는 의미이다. → 이는 의인의 적극적 행동이 아닌 하나님의 적극적 행동을 암시한다.
- 이러한 본문의 의미
- 일차적으로 의인이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의인의 번영과 형통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낸다. 즉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탐스럽고 맛있는 과실을 맺음같이 여호와의 전에 심기운 자는 그 뿌리가 견고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 즉 그의 도우심을 인하여 그 행사가 다 형통하여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 의인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의 보호하심을 받고 번영해 가는 존재이다.
- ‘하나님의 뜰’
- 하나님께서 둘러싸 보호하시는 곳.
- 하나님의 집에 있는 뜰.
- 상반절에서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볼 때, 후자의 의미를 취하는 것이 무난하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의 집에 있는 뜰 역시 하나님의 보호가 있는 곳이므로 이 두 가지 의미는 별개가 아니다.
여기서 시인이 이러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당시 제사장 외에는 그 누구도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백성들은 다만 성전 뜰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 표현 역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를 상징하는 것으로 ‘궁정’ 이라는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 이처럼 의인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의 보호하심을 받고 번영해 가는 존재이다.
- ‘번성하리로다’
- 의인들은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속적인 번영을 누릴 것이다. 악인은 멸절하나 의인은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로 계속 흥왕하는 것이다.
[2] 그들이 보호를 받는 좋은 계약, 다음 것이 여기에 약속되어 있다.
첫째, 그들이 장성할 것이라는 점이다(12절).
- 하나님께서 참된 은혜를 주시는 곳에 더욱 은혜를 주시어서 하나님의 나무는 레바논에 있는 키 큰 백향목과 같이 높이 자랄 것이다. 그들은 하늘에 가까지 자랄 것이며, 거룩한 야망을 품고 위에 있는 세상을 갈아할 것이다. 그들은 백향목과 같이 더 강하게 자라고, 사용하기에 더 적합하게 될 것이다. "손을 깨끗이 하는 사람은 더욱 더 강하게 될 것이다.'
💡 92:1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의인
- 의로우신 하나님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 그는 복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에 풍성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막힌 것이 없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과 은혜를 공급받는 삶을 살게 되며 그 결과 그의 삶은 형통할 수밖에 없다(1:3).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 본문에서 이러한 의인은 팔레스틴의 대표적인 과수인 종려나무에 비유되고 있다.
- ‘종려나무' 를 뜻하는 ‘타마르’ 는 본래 ‘똑바로 세우다’ 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유래하였다. 키가 20-30m까지 자라며 풍성한 열매를 맺어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 종려나무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번영을 상징하였다.
- 본절의 이 종려나무는 7절의 ‘풀’ 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 풀은 비가 내리면 금방 무성해지지만 찬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면 곧 말라버러며, 뜨거운 태양열에도 곧 시들어버리고 만다. 더욱이 풀은 열매도 맺지 못하며 한 해가 지나기 전에 스러지고 만다.
- 이에 비해 종려나무는 겨울에 찬바람이 불어도 그 생명이 유지되며, 뜨거운 태양열에도 시들지 않을 뿐 아니라 시절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는 다년생 식물이며, 해가 갈수록 그 줄기와 가지가 굵어진다.
- 즉 시인은 종려나무가 지닌 이러한 특성을 통해, 악인이 금방 시들고 사라지는 풀처럼 멸망하는 것과 달리 의인은 오랜 세월 풍성한 결실을 맺는 종려나무 같이 융성하고 번창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 백향목 : 그 뿌리가 단단히 박힌 것과 관련해 ‘확고하다’란 의미를 지닌 ‘아라즈’에서 유래한 단어.
- 이러한 사실은 백향목이 본래 뿌리가 견고한 나무인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백향목은 견고하고 길게 뻗은 뿌리로 인해 그 키가 30m 이상 자라는 나무이다. 이 나무는 기록에 따르면 1.000년 이상 살 수 있으며, 곤층과 병충해에도 저항력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이 나무는 굽지 않는 특성 때문에 건축용 자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다윗은 백향목으로 건측한 궁전에 살았으며(삼하 7:2), 솔로든이 성전을 건축할 때에도 백향목으로 들보를 삼았다(왕상 6:10).
- 시인이 본문에서 의인이 마치 백향목같이 발육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 빠르게 성장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견고하고 높이 번창해 나간다는 의미이며,
- 더 나아가 어떤 환경에서도 강인하게 버털 수 있음을 의미한다.
둘째, 그들은 직업에 있어서의 신용과 그들 자신의 영혼의 의로와 기쁨에 있어서 번성할 것이다.
- 그들은 자신의 기분이 좋아지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당당한 몸과 큰 가지를 가진 종려 나무와 같이 번성'할 것이다(아 7:7; 레 23:40; 삿 4:5). 그 열매는 대단히 달다. 특별히 여기서는 그것은 항상 푸르러 있는 것으로 암시되어 있다. 악인은 번성하나 곧 시들어 버리는 풀과 같고(7절), 의인은 오래 살며 겨울에도 변치 않는 종려나무와 같다. 종려나무에 관한 말이 있으니, sub pondere crescit - 즉 종려나무는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자란다. 그와 같이 의인은 압박을 받으면서도 번성한다. 그들은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번성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겨졌기 때문에"(뿌리가 그 곳에 있음) 그들은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한다. 거기에서 그들의 나뭇가지가 퍼진다.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졌다." 그러나 그들의 빛이 또한 사람들 앞에 비친다. 선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뛰어난 목표를 가지게 하라. 그것은 그들이 탁월하여지고 번성하는 하나님의 궁정을 장식한 번성한 나무같이 우리의 구주, 하나님의 교회를 장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번성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번성하는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라. 그것은 이 약속 때문이다. 그들은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할 것'이다. 그들의 외양의 청청함은 속의 진액이 풍족하기 때문이다. 뿌리로부터 감람나무의 진액이 풍족하기 때문이다(롬 11:17). 심령에 살아 있는 은혜는 정신이 없으면 하는 일이 오래 번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집에 심긴 나무는 또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할 것이다'(시 1:3). 여호와의 나무가 풍족함이여!(시 104:16; 호 14:5, 6 을 보라)
셋째, 그들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점이다.
- 잎 이외에 아무 것도 없으면 그들은 어떤 가치있는 나무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실하며" 성화의 결실들과 모든 생기 있는 헌신의 실례들과 유용한 대화와 선한 사업들은 그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다른 사람들로 교화를 받는다. 이것들이 의로움의 열매들이며, 그 의로움 속에는 의인들을 풍성하게 하는 의무만큼의 특전이 있다. 그 열매들의 풍성은 계명의 소재요 약속의 소재이다. 그들은 늙어서도 열매 맺을 것이다. 약속되어 있다. 다른 나무들은 늙었을 때 열매 맺는 것을 멈추지만, 하나님의 나무에는 은혜의 힘이 자연의 힘과 함께 떨어지지는 않는다. 성도들의 마지막은 때때로 그들에게 가장 좋은 날이며, 그들의 마지막 일은 그들의 가장 좋은 일이다. 이것은 실로 그들이 정직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내는 성실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여호와는 정직하시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다. 그는 그의 약속에 대하여 참되시며 그의 하신 모든 말씀에 대하여 신실하시다. 그는 그가 시작하신 것을 변치않고 계속하여 일하신다. 약속으로 말미암아 믿는자들이 처음에 신성(神性)에 참여하는 것같이 또한 약속으로 말미암아 신성이 보존되고 지켜진다. 그러므로, 그 약속이 발휘하는 힘은 "여호와께서 정직하시다"는 증거이며, 그러므로 그는 정직한 사람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시 18:25). 시인은 이것을 소리 높여 외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 나는 그를 나의 반석으로 선택하였다. 그 위에 집을 짓고, 그 틈 속에 피난하며, 그 꼭대기에 나의 발을 놓는다. 나는 그가 강하다"(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안전한 것과 같이 말하게 하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으시다." 그의 맘씀이 그 자신을 그러한 상태로 말한 것과 같이 현재도 그러하시며, 미래도 그러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항상 신뢰한 모든 사람들은 그가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분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로서 그 소망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92:14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인간이 늙으면 모든 것이 쇠퇴하여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데 본절은 늙어서도 여전히 결실하며 푸르고 혈기 왕성한 나무에 빗대어 의인의 상태를 묘사한다.
그 일례로 모세나 갈렙 등의 삶을 들 수 있다. 모세의 경우 하나님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감당한 시점은 그의 인생에 있어 말년에 헤당하는 80세 이후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생이 막바지에 이른 그 시점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역사상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그의 사역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뇌리에 영원히 기억될 만한 풍성한 축복을 가져다주었다.
갈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왔다. 그는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는 대 과업을 이루면서 이미 은퇴할 시점이라고 생각되는 85세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이 남겨져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누구도 을라가려 하지 않는 헤브론 산지에서 아낙 자손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하였고 그 일을 필경 완수했던 것이다(수 14:10-15).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의 삶, 그리고 본문의 내용과 관련해 이사야 선지자는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0, 31) 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이 가능케 하심을 확인시켜 준다.
즉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육간에 풍성한 삶, 의미 있는 결실을 맺는 삶을 살수 있음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 92:15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여호와의 ‘정직하심’
- ‘야솨르’
- 원래 ‘곧다', ‘반듯하다’ ‘공정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며 하나님의 성품이나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의 성격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 여기서도 의인의 형통함과 관련하여 각인이 행한 바에 대해 바른 처결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면모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실로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공정하신 분이기 때문에 악인의 흥왕함을 오랫동안 좌시하지 않으시고 그 악행대로 반드시 보응하시며 의인의 의로운 행동으로 인하여 번영케 하신다.
시인은 이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본문과 같이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바위 되심
- 시인은 긍정문과 부정문을 통해 의인에게 기쁨과 복락을 주시는 하나님의 면모를 이중으로 강조하고 있다.
- 시인은 정직하심을 나타내는 여호와가 자신의 바위라고 선언하고 있다 (’나의’ 1인칭 소유격 접미어)
- 바위는 웅장함, 확고함, 견고성으로 인해 안전한 요새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형지물로 인식되었는데 이를 통해 시인은 하나님어 자신의 확고한 안전과 보장이 되심을 표현한 것어다.
여호와께서는 위기의 상황에서 그의 피난처가 되시어 불안한 때에 견고하고 안전한 보장이 되신다. - 특히 여기서 시인이 ‘나의'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 이는 시인 자신만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 그를 의지하는 모든 의인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즉 시인은 하나님께서 의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보호자가 되심을 확신 가운데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신앙 고백적인 표현은 인생의 여러 가지 굴곡과 어려움 중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윗에게서도 발견되는 바이다.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은 그의 성숙한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 ‘나의 바위' (삼하 22:47)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 돌보심이 확고하고 구체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 ‘없음이’ 라는 부정어 형식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널리 천명한다. 여기에는 부정어 ‘로’를 사용해 → 강한 부정을 표현하는 단어를 통해 불의가 전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 이러한 강조는 당시 시인의 주위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하여 의심을 품은 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몸소 체험한 것에서 나온 확신을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널리 천명한다.
결론
💡 이상 지존자의 크신 행사를 찬양하는 기쁨과 주가 의인에게 주는 복락을 선언하는 본시는 감사 예배시로 분류된다.
이는 본시의 표제에서부터 암시되는 바이며 이어지는 내용 가운데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4.10,11절).
이러한 본시 전반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찬양시로서의 면모와(5.8.9절) 악인의 쇠퇴와 의인의 홍왕을 교훈하는 지혜시로서의 면모도(6, 7, 12-15절) 발견된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동일 주제의 지혜시인 제 1, 73편과 본시를 자주 비교한다.
- 즉 본시는 악인의 궁극적 소멸과 의인의 영원한 복락을 교훈한다는 점에서 제73편과 강한 유사성을 지닌다.
- 그러나 제73편에서는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시인의 격분과 의기소침 등 감정의 기복이 심하게 나타나는 반면
↔ 본시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확고한 신앙이 보다 더 잘 드러난다.
→ 이런 점에서 본시는 시편의 대표적인 지혜시라 할 수 있는 제1편과 상당히 유사하다. - 그러나 본시가 단지 이를 사람들에게 교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으로 승화시켜 시인 자신의 기쁨과 확신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본시는 더욱 완성도 높은 감사 예배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