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5월 6일 월요일 묵상구절 시편 84편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Jeehyun 2024. 5. 6. 21:50

맥체인성경읽기

민수기 14, 시편 50, 이사야 3, 4, 히브리서 11

묵상구절

84:1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84: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84: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84: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4: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84: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시온을 떠나 쫓기는 자의 시온의 성소를 사모하는 노래

(저자: 고라 자손, 분류: 찬양시)

●공중 예배의 즐거움(시편 84:1-7)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공중 의식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강제로 제지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그러한 예배의 가치를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Ⅰ. 거룩한 제도 속에서 그가 본 놀라운 아름다움(1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천사들이 임재하는 것으로 인해, 여기에서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장막에는 세키나(하나님의 엄위)가 뒤따랐고, (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그 그룹들로써 상징되었던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그 장막은 그의 것이다.  그 장막에는 백성들이 모이는 여러 뜰이 있었고, 장막 자체가 한 개의 성소와 한 개의 지성소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개의 장막(원문은"당신의 장막들")으로서 언급되어 있다.  이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진실로 성별된 모든 사람이 보기에 그것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은혜로운 영혼은 훌륭한 것, 이루 말할 수 없는 것, 거룩함 속에 있는 그리고 거룩한 역사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본다.  장막은 초라한 거처였지만, 외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거룩한 법령을 덜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영적인 것이었고 그것의 영광은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 84:1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시인의 하나님의 성소에 대한 강렬한 애착과 열정

시인은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문두에 사용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대한 시인 자신의 강렬한 애착과 열정을 표현하고 있다.

  • ‘어찌 그리’ 와 같은 감탄사,
  • ‘사랑스러운지요’ : 원래 ‘가장 사랑하는, 참으로 사랑받는’ (연인간의 열정적 사랑을 의미하는 동사에서 유래)

‘주의 장막’

  • 본시의 배경이 다윗 당시, 보다 구체적으로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로 본다면 이는 예루살렘의 언약궤를 안치한 성소를 지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소를 복수형으로 사용한 것은 성소가 여러 개 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장엄 복수 (pluralis maiestatis)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
    • 성소에 대한 시인의 애정과
    • 그곳에 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풀이된다.

시인의 찬양의 대상 = ‘만군의 여호와’

  1. ‘만군의 여호와’ = ‘예흐와 체바오트’
    • 예흐와 :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시며 자존자되시는 하나님의 면모를 강조하는 신명.
    • 체바오트 : 주로 ‘전쟁 ' 과 관련하여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면모를 강조하거나(24:8; 삼상 17:26.45-47), 천상의 모든 천사들 가운데 보좌에 우뚝 서서 좌정해 계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
  2. ‘예흐와 체바오트’와 “하나님의 언약궤”와의 관련성
    • 천사들, 즉 그룹은 천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언약궤에도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만군의 여호와'란 바로 언약궤의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삼상4:4)였다. 그리고 언약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삼하 6:2)으로 불려진다.
    • 이를 감안할 때 본문의 ‘예흐와 체바오트'란 표현 가운데는 천상의 모든 그룹들에게 높이 들리신 여호와께서 이 땅에서는 비록 임시 처소이긴 하나 예루살렘 희막에 안치된 언약궤의 그룹 사이에 임재헤 계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시인이 앞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랑스럽다고 표현한 것도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좌정하시며 임재하신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토록 사모하는 성소에 나아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그의 형편은 그가 사모하고 사랑스럽게 여기는 성소에 대한 열정과 사랑, 간절함을 더욱 증폭시켰을 것이다.

Ⅱ. 공중 규례 또는 오히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을 다시 즐기기를 바라는 열망(2절).

그것은 간절한 열망이었다. 육과 혼과 영이 그것에 동의했다.  그는 그 반대의 생각이 하나라도 일어나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격렬한 열망이었다.  그것은 야망에 또는 탐욕에 또는 방탕에 젖어있는 자의 열망과도 같았다.  그는 하나님의 뜰에 다시 그의 자리를 얻게 되기를 사모했고, 부르짖었으며, 그가 쇠약해질 정도로 끈질기게 졸라대었고, 지연되는 것을 거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몹시 바라면서 기도로써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여호와의 뜰 자체가 아니었다. "내가 주를 알고 다시 주와 교제를 나눌 수 있다면!"(요일 1:3) 만일 우리가 규례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규례는 헛된 것이다.


 💡 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 앞선 1절에서 시인은 시의 시작과 함께 주의 장막을 향한 자신의 열의와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의미가 담긴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심경을 표출하였다.
  • 이처럼 시의 도입 단계에서부터 강렬한 의미를 지닌 표현을 사용했던 시인은 이에 이어지는 본절에서 보다 강조적인 표현을 나열하고 있다.

먼저 시인은 자신이 여호와의 궁정을 쇠약할 정도로 사모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특별히 시인은 앞선 1절에서 예루살렘 성소에 대해 ‘주의 장막'이라 표현하였는데 본절에서는 ‘여호와의 궁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 이는 비록 그곳이 사람이 볼 때에는 초라한 천막에 불과하지만 시인은 그곳을 여호와가 임재하신 곳, 곧 만왕의 왕이 임재하신 곳으로 인식하였음을 반영한다.

성소에 대한 표현은 본시 안에서 여러 가지가 사용된다.

  • ‘주의 장막' (1절), ‘여호와의 궁정' (2절), ‘주의 제단' (3절), ‘주의 집' (4절), ‘주의 궁정’ (10절) 등이 그것이다.

→ 이처럼 다양한 표현들이 내포하는 시인의 심경

  1. 성소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2. 그곳에 머물고자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로 인한 담답한 심경이 어우러진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쇠약함이여’ (칼레타)

  • 기본형 ‘칼라’ : ‘소모하다, 기진하다, 소비하다’ 등의 의미.
    • 문맥상 이는 시인이 하나님의 성소를 사모함으로 인하여 그 모든 생명이 소멸될 지경에 이르렀음을 나타낸다.
  • 한글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표현 - ‘칼레타’ + ‘웨감’
    • ‘웨감’ : ‘까지도, 게다가, 참으로, 역시’ - 강조적 의미.
    •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강조적인 의미를 지닌 표현에 부사적 표현인 ‘깜'을 연계시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본문의 표현둘 각각을 통해 성소에 대한 자신의 애절한 사랑과 감정을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 ‘내 마음과 육체’ (’립비 우베사리’)는 상반절의 ‘ 내 영혼’의 ‘나프쉬’를 설명하는 기능.
  • ‘나프쉬'의 원형 ‘네페쉬’ 는 한글 개역 성경이 번역하듯 ‘영혼’ 으로 간단히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생명을 포함하는 전인격'을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반절에서 시인의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다는 표현은 그의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는 전언격적인 의머가 내포된 사모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여 드러내는 것이 ‘립비우베사리' 이다.

마음 (‘립비’)

  • ‘립비’의 원형 ‘레브’ :
    • 문자적으로는 인간 생명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심장'을 가러키는 단어이다. 그러나 히브러인들에게 ‘레브' 는 단순히 육체적 생명, 즉 인체에 피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을 지칭하는 의미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각과 계획, 판단이나 욕구, 열망 등이 일어나는 좌소로 여겨졌다 (4:4; 10:6). 여기에서도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육체가’(’우베사리’)

  • 원형 ‘빠사르’ : ‘살, 몸’
    • 본문에서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의 ‘육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

⇒ ‘마음과 육체가’

  • 본문에서 시인은 이처럼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마음과 쉽게 드러나는 육체란 상반된 표현을 사용하여 인간의 ‘전존재'를 나타낸다.
    즉 시인은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되 자신의 마음과 심령, 그의 전인격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는 육신까지도 사모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전존재가 하나님만을 향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부르짖나이다’

  • 본시의 시인은 당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 ,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성소에 나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이는 기쁨의 표현이라기보다 슬픔과 비탄의 의미가 담긴 부르짖음이라고 볼 수 있다.

부르짖음의 대상: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엘 하이)

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생명이 없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실상 죽은 목석에 불과한 이방의 신들과 달리 영원토록 살아 계시며 구원과 은혜를 베푸시는 측면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문맥을 감안할 때 이러한 표현은 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1. 먼저 시인이 고대하고 사모하는 바 성소와 관련시켜 볼 때 ‘엘 하이'는 1절에서 성소를 ‘하나님의 거주지'로 묘사한 사실과 관련해 → ‘성소에 임재하고 거기 거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는 ‘생존하시는'으로 번역된 ‘하이'가 '생활하다'(레 25:35), ‘거주하다'(신 31:13)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2. 아울러 본문의 ‘엘 하이'는 시인이 처한 상황이
    →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다윗과 더불어 도피하여 하나님의 성소에서 예배하던 축복의 삶으로부터 멀어진 현실 가운데 있었다고 본다면 더욱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 된다.
    1. 당시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시인,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있는 다윗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을 통해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자신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었을 것이다.
    2. 이는 본문의 ‘하나님'에 해당하는 ‘엘'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지청하는 신명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엘로힘’의 축약형이라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 즉 시인은 현재 살아 계실 뿐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그분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그분이 현재 자신들이 처한 위기 상황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Ⅲ. 하나님의 제단에 인접해 있는 건물 안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작은 새들의 행복에 대한 그의 질투(3절).

이것은 하나님의 제단에 대한 그의 사모하는 마음을 훌륭하고 놀랍게 나타낸 표현이다.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이 작은 새들은 본능과 자연적인 지시에 의해 스스로 집에 거처를 마련하며, 마찬가지로 다른 새들도 안식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린 새끼를 두기 위해서 나무 안에 기른다.  다윗은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전 뜰 주위에 있는 건물 안에 있다고 추측하고 있으며, 그 자신도 그들과 함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궁전에서 살기 보다는 오히려 그 제단 가까이에 있는 새 둥우리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는 때로 "날아가서 광야에 거할 비둘기 날개"를 원했다.(55:6).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궁정으로 날아가 숨기 위해 참새의 날개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같이 밤을 새운다" 는 것은 매우 우울한 형편과 심령에 대한 묘사일지라도(102:7), 다윗은 하나님의 제단 가까이에 있기 위해 기꺼이 그것을 그의 몫으로 취하려 했다.  많은 군중과 함께 죄를 섬기는 것보다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낫다.  참새라는 말은 어떤 작은 새를 의미하고 있는데(나의 추측으로는) 다윗 시대에 음악이 즉 성악과 기악이 그 신성한 봉사에 매우 많이 소개되었을 때, 하모니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성전 뜰 주위에 새장을 매달아 놓아 새가 노래하게 했던 것 같다.(왜냐하면 우리는 새가 소리를 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주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4:12).  그리고 다윗은 이들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있으며, 기꺼이 그들과 자리를 바꾸려 하고 있다.

  • 다윗이 제단 위를 날아다니면서 단지 하나님의 궁정을 잠깐 보는 새들의 행복이 아니라,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보금자리를  만든 새들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다윗은 "하루 밤 지내기 위해 들어오는 나그네처럼," 하나님의 집에 묵는 것으로 충분히 여기려 하지 않았다.  이것을 그는 그의 보금자리, 그의 집으로 삼으려 했다. 즉 여기에서 거하고자 했다.
  • 그리고 그는 이 새들이 거기에서 그들 자신을 위해 둥우리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그 새끼들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뜰 안에 자리잡고 있는 자들은 자기 자녀들도 역시 하나님의 집에 그의 성곽 안에 자리와 이름을 잡기를 바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새끼를 먹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주여, 주께서는 주의 섭리로써 새들에게 그들의 천성에 합당하게 보금자리와 안식처를 마련해 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보금자리이며, 나의 안식처인, 떠돌이 새가 그 둥지를 그리워하는 것만큼 내가 원하는 주의 제단에, 나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주여, 주의 아기들을 위해서 보다도 더 나은 것을 주의 새들을 위해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 "보금자리를 떠도는 새와 같이," 나는 하나님의 제단을 떠나 유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잠 27:8). "나는 다시 내 장소로 돌아오기 전에는 결코 편치 못할 것입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 안에 편히 있어 휴식하고 있는 자들은 그의 규례 가까이에 정주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성막에는 두 개의 제단이 있었는데, 하나는 제물을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분향을 위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주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속죄와 증보를 주시해야 한다.

끝으로, 어떻게 그가 이러한 청원에서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는 가를 관찰하자. "주는 만군의 여호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가난하며 고통당하는 신하가 그의 왕에게서가 아니고 어디에서 보호를 구하겠는가? 더욱이 "백성이 저희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하겠는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그와 그의 제단을 지키면서 살고 죽도록 하자.


💡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 앞선 1.2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성소에서 멀리 떨어져 도피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성소를 향한 그러움과 간절함을 반복적으로 표현하였다.
  • 이에 이어지는 본절 역시도 하나님의 성소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다.
    → 특히 본절에서 시인은 성소에 등지를 틀고 그곳을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 ‘참새', ‘제비'를 들어 자신의 성소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피력하고 있다.

시인이 이처럼 부러워하는 대상으로 언급하는 : ‘참새'나 ‘제비'는

  • 가장 가치없고 흔한 새들로 여겨졌다.
  • 그리고 이들이 자는 집이나 보금자리는 극히 약하고 부스러지기 쉬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본절에서 시인은 참새나 제비와 같은 미물이 등지를 짓는 것을 부러운 듯이 노래하고 있다. 이는 그것이 주의 성소에 마음 놓고 둥지를 틀며 하나님의 성소에 자유롭게 머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시인은 이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성소를 갈망하고 있는지를 피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본절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신의 심경을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목마른 사슴'에 빗대어 표현한 42:1을 연상케 한다.

  •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갈급함을 표현한 대표적인 구절로 인식되는 내용이다.
  • 이러한 본절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갈급함을 표현하는 제42편의 표현보다는 간접적이지만 미약한 것을 대표하는 ‘참새’, ‘제비' 그리고 그것들이 짓는 보잘 것 없는 집, 새끼들 보금자리’를 들어 자신의 부러움을 표현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42:1의 내용을 능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시인의 갈망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란 표현을 통해서도 강조된다.

  • 이는 그가 성소를 사모하는 직접적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밝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가까이하기를 염원하는 성소가 하나님과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 시인이 이처럼 자신이 사모하는 바 하나님을 부름에 있어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이를 삼중으로 표현함으로써
    • 자신이 소망하는 바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간절함을 더해 주고 그분을 향한 경외심과 친밀감을 동시에 전달해 준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과 달리 원문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부분이 본절 말미에 나올 뿐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란 표현이 먼저 나오고 이어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 란 표현이 나온다.
    • 전쟁에 능하시며 천군 천사 위에 군림하시는 높고 영광스러우시고 위엄 있으신 하나님의 면모와 언약궤 위 시은좌의 그룹들 사이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면모를 강조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 그리고 이에 이어 사용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은 하나님 이 바로 자신의 왕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문상 시인이 가장 먼저 사용한 ‘만군의 여호와'는
    → 이러한 원문의 어순은 시인이 처한 상황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
    • 즉 시인이
      1. 주로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권능과 위엄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만군의 여호와'란 호칭을 사용한 다음
      2.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복임을 강조하고 하나님과의 이러한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란 호칭을 사용한 것은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친밀한 백성인 자신들을 크신 권능으로 보호해 주실 것을 구하는 의미를 지닌다.

시인은 이처럼 의미 심장한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 도움과 구원하심을 통해 전과 같이 성소에 돌아가 친밀하게 다시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라는 자신의 심경을 피력하는 것이다.

‘주의 제단’

  • 직역하면 ‘당신의 제단들(RSV, thy alters)'.
  • 이처럼 하나님의 제단을 복수형으로 사용한 것은 → 제단이 여러 개 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장엄의 복수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도
시인이 하나님의 성소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또 그곳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지,
그분을 섬기는 자리인 성소에 다시 들어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Ⅳ. 하나님의 제단에서 수종들 자유를 갖고 있는 사역자들과 백성들의 행복에 대한 찬사를 보라. "저희가 복이 있나이다.  언제 내가 그 축복의 기쁨으로 돌아가겠습니까?"

1. 장막 주위에 거주하면서 자기의 반차대로 그 봉사에 종사하는 사역자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복이 있다(4절).

"주의 집에 거하는," 즉 거기에서 편히 쉬고 거기에서 일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그는 그들이 항상 봉사하도록 감금당하고 있으며 영구적으로 따분한 일을 맡아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하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이 세상의 가장 큰 방벽보다도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탐욕하는 자를 축복하는 자들이 있으나 그는 신앙적인 자를 축복하고 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그것은 그들이 좋은 임금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즉 그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각 제물의 일부를 받아 그들의 식탁을 항상 훌륭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선한 사업을 하기 때문이었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그리고 지상 위에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끊임없이 찬송하는 일 가운데 있다.  이것을 위에 있는 그의 집에 적용시켜 보라.  거기에 거하는 자들 곧 천사들과 영화롭게 된 성도들에게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밤이나 낮이나 그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우리가 즐거운 영원을 그 안에서 보내기를 바라고 있는 그 복된 일에 우리의 많은 시간을 사용하도록 하자.


 💡 84: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 ‘집’ : ‘성막, 성전’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 단어.
    • 본절에서는 ‘성소’를 사리킨다.
  • ‘사는 자들’
    • ‘지속적으로 거주하는 자’, ‘원주민’, ‘토박이’
    • 본절의 의미
      : 그곳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는 자들, 안식일이나 절기 때, 그리고 더 나아가 원할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예배할 수 있는 자들.
      → 즉 시인은 비록 그들이 어떤 위치에 있든, 또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든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배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큰 축복임을 묘사한 것이다.
  • 이러한 본문은 본시를 시작하는 1절에서 시인이 선언한 바 ‘주의 장막이 어찌 그러 사랑스러운지요' 와도 깊은 관련을 지닌다.
    • 즉 시인은 하나님의 장막, 즉 성소의 아름다움과 복됨을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 그곳에 거하는 자들이 복됨을 노래하는 내용으로 본단락을 일단락짓는 것이다.
  • ‘복이 있나니’ (아쉬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 ‘항상’ : ‘다시, 반복하여, 되풀이해서, 계속적으로’
  • ‘주를 찬송하리이다’: 강의형으로 사용, ‘찬양하다’, ‘자랑하다’ 란 의미.
    → 이들의 찬양이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주의 집에 거하므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는 자들이 보이는 자연스런 반응이라 할 수 있다. 

2. 그 백성들, 그 나라의 거민들에게 복이 있다. 비록 그들은 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의 집에 항상 거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의 절기 즉 세 번의 큰 절기로 정해진 때에는 그것에 접근할 자유를 얻는다.

그 절기 때에, 모든 남자들은 거기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신 16:16).  다윗은 이것을 부담으로 생각지 않았고 그들에게 고역을 치르게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처럼 참석할 수 있는 자들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있다(5-7절).  그가 복된 자로 표명한 자들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다.

(1) 그들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에게 헌신하는 그 뿌리깊은 원리로부터 나온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이다.

"주께 힘을 얻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주를 자기 힘으로 삼고 강하게 주를 의지하는 자는, 주의 이름을 자기의 견고한 망대로 삼고 그리로 달려가 안전함을 얻는(잠 18:10) 자는 복이 있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0:4; 146:5).  믿음의 행위를 자기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자기의 힘으로 한다면 그 일은 분명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힘으로 해나가는 자들은 진실로 행복하다. 우리의 모든 풍족함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장막으로 돌아가 여호와 그의 하나님께 힘을 얻어 봉사를 하고 고난을 견딜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2) 그들은 거룩한 의식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는 자들이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

즉," 자기의 목적으로서 하나님 안에 자기의 행복을 둔 자는 주께로 인도하는 모든 길을, 그들의 은혜를 강하게 하고 주와의 교제는 지속시켜 주는 그 모든 방법들을 기뻐”한다.  그들은 이러한 길로 행할 뿐만 아니라 그들 마음 속에 그것을 둔다.  그들 마음 곁에 그것을 둔다.  이것보다도 더 가깝게 그의 마음에 두는 걱정이나 관심, 즐거움이나 기쁨은 없다.  새 예루살렘을 자기의 눈안에 두는 자들은 그것으로 이르는 길을 마음 속에 두어야 하며, 그것을 지켜야 한다.  그들의 눈은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하며, 그 길을 숙고해야 하고 그것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리고 좌우로 빗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힘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규율로 삼고 그것을 따라 행해야 한다.


 💡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복이 있나이다’

  • 4절에서 사용한 ‘아쉬레'는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는 자들, 즉 안식일이나 절기 때는 물론 자신이 원하는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예배할 수 있는 자들을 그 목적어로 받는다.
  • 반면 본절의 경우는 지금 현재 성소에 나아갈 수 없다 해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힘을 얻으며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들, 즉 성소가 있는 시온을 사모하고 그 길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지닌 자들을 포괄한다.
    → 이는 시인 자신, 그리고 그와 함께한 무리들을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복 있는 자로 언급되는 대상

  1. 주께 힘을 얻는 사람
    1. 앞선 2절 상반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소를 그리워하다가 힘이 쇠진헤지고 병이 든 상황임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인의 상황은 본단락에서 전환을 이룬다. 그러한 전환은 바로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2. 원문은 한글 성경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전달한다.
      → 원문의 표현은 : 마치 하나님을 사모하는 그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긴밀하게 밀착되었으며 완전히 합일이 된 듯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3. 시인이 복이 있다고 묘사하는 대상은 다름아닌 하나님과 연합한 자들,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힘을 얻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2.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들
    1. ‘시온의 대로’
      : 직역하면, ‘그들의 마음에 길들’
      • 한글 개역 성경에 원문과 달리 ‘시온의'란 표현어 추가된 것은 적절한 의역이라 할 수 있다.
      • 이는 시인이 앞선 단락에서 애타게 시온에 있는 주의 장막을 사모하였으며 본단락 마지막절인 7절에서 ‘시온'이란 표헌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2. 여기서 시인이 ‘그 마음에'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 그 자신, 그러고 그와 더불어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들,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지만 시온의 성소에 나아갈 수 없는 형편과 상황에 처한 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그들은 비록 시온을 향해 순례할 수 없지만 순례에 대한 소망이 너무나 간절한 자들이다.
    시인은 이러한 자들까지도 복되다고 선언한다.
    → 이는 그들의 힘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 비록 그들이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갈 수 없다 해도
    영원한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과 연합하여 있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힘을 발견할 수 있는 한 그들은 결코 핍절하거나 낙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들은 때로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며 눈물 골짜기를 지나기도 하지만,
    거기서도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 길을 통과하고(6절)
    하나님이 베푸시는 힘을 얻고 더 얻어 그들이 소망하는 바 시온의 성소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7절).
    1.  

(3) 그들은 거룩한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어렵게 하고 위축되게 하는 것들을 이겨내려는 자들이다(6절).

그들은 그 명정에 예배드리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 올 때, (일부의 견해대로) 메마르고 모래로 된 골짜기를 많이 지나야 하므로 거의 갈증으로 죽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을 막기 위해 그들은 작은 웅덩이를 파서 빗물을 받아 담아 두고 그것은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마련되어진다.  그들이 샘을 만들 때, 하늘의 비가 그곳을 채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은혜는 우리에게 부적하지 않을 것이며, 항상 우리에게 풍족한 것이다.  그들의 길은, Baca가 의미하듯이, 눈물 골짜기 가운데 놓여 있었다.  즉(다른 사람들의 해석처럼) 물기가 많은 골짜기 가운데 있었다.  그것은 습한 기후 지대에 있었으므로 "비로 은택을 입힐 때," 물이 고이거나 길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통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물을 빼내고, 도랑을 파냄으로써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자들이 편리하도록 거기에 길을 만들어 놓았다. 시장으로 이르는 길과 마찬가지로 교회로 이르는 길도 관심을 기울여 잘 수선해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1] 그들은 그 여행에 대해 선한 뜻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그 엄숙한 명정에 참석해야 했을 때, 그들은 불순한 날씨로 인해 또는 나쁜 길로 인해 되돌아가려 하지 않았고 또 그것을 집에 머무르는 구실로 삼으려 하지도 않았다.  의무의 길에 놓여진 어려움은 우리의 결심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풍세를 살핀자는 파종하지 않을 것이다."

[2] 그들은 시온으로 이르는 길을 가장 훌륭하게 만들었다.  나쁜 길을 고치기 위해 계획했고 수고했으며 제거될 수 없는 불편한 점은 될 수 있는 한 참았다.  우리가 하늘로 이르는 길은 바카 골짜기를 통과하게 되어 있으나 하나님께서 천성을 향해가는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그 위안물들을 우리가 잘 활용한다면, 그것은 샘의 곳이 될 수 있다


 💡 84: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 본절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 상반절
    •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기 위해서 거쳐가야 하는 눈물의 골짜기
  • 중반절과 하반절
    • 그때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소개한다.

상반절: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 ‘눈물 골짜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삶 속에서 겪게 되는 수없이 많은 고난과 난관을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Weiser, Alexander, VanGemeren).
  • 즉 이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난관을 예상해야 하며, 이러한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아무도 영광의 장소에 이를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중반절 :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 한갓 메마른 골짜기를 샘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
  •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상반절과 연결시켜 볼 때 특별한 의미가 도출된다.
    앞서 시인은
    • 성소를 사모하는 자들,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 안에 자신의 힘을 둔 자들이 거쳐야 할 과정에 대해 고난과 시련, 메마름과 척박함의 의미가 함축된 ‘눈물 골짜기'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 하나님이 그곳을 생명과 위로, 힘과 활력, 풍성함의 의미가 함축된 ‘많은 샘의 곳' 이 되게 하였다고 묘사한다.
  • 이를 감안할 때 앞선 상반절과 본문, 즉 중반절은
    • 의로운 삶으로 인해 고난 받는 성도들이 흘리는 눈물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들로 풍성한 생명과 위로, 축복을 누리게 하셨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반절: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 눈물의 골짜기를 통행할 떄에 임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와 도우심.
  • ‘이른 비’
    • 팔레스틴에서는 10.11월에 내러는 ‘가을비 (NIV, the autumn rains) '를 말한다.
    • 이 비는 여름 동안의 무더위를 종식시키고 데마른 농토를 적심으로 밭갈이를 부드럽게 해주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 특별히 고난으로부터 건지시며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신 11:14; 욜2:23).
    • 그리고 이러한 축복의 이미지를 지닌 이른 비 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 중반절에 나오는 은혜에 더하여지는 은혜의 완결성, 충족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에 따른 것이다.
  • ‘채워 주나이다’
    • 완전히 덮어 가리우는 것
      → 미완료형으로 : 이른 비로 아예 뒤덮어 버린다는 의미.
    • 즉 이는 하나님께서 눈물의 골짜기에 많은 샘들을 주실 뿐만 아니라 아얘 풍성한 이른 비로 골짜기를 가득하게 하여 의로운 삶을 사는 자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를 사모하여 주의 장막을 사모하는 자들로 하여금 결코 목마른 일이 없도록 하신다는 의미이다.
      즉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자들에게 넘처도록 풍성한 은혜가 임할 것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4) 그들은 드디어 여행의 목적지에 올 때까지 계속 전진하는, 그리고 갑자기 중단하지 않는 자들이다(7절).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가리이다."

그들이 각 마을을 지나 목적지에 접근할수록 그들의 무리는 점점 불어나 마침내 매우 많게 된다.  길을 앞선 자들은 뒤에 오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하고 말하면서(122:1, 2), 그들에게 요청할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상호적인 사랑의 표적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함께 갈 수 있게 했다.  또는, 그 특별한 사람들은, 여행의 지루함과 그들이 당한 역경으로 인해 피로해지기는 커녕, 예루살렘으로 올수록 그들은 더 생기있고 활발해졌고 따라서 "점점 힘을 얻으려" 나아갔다(욥 17:9).  이처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는"다고 약속되어 있다(사 40:31).  그들이 약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도 그들은 강하다.  그들은 (일부의 견해대로) "덕행에서 덕행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덕이 있는 여자에게 사용되는 것과 같은 단어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로를 밀고 나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은혜를 더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요 1:16).  그들은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후 3:18).  하나의 영광스런 은혜에서 또 하나의 은혜로 이르러, 마침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각 나타나" 그에게 영광을 드리고, 그로부터 축복을 받는다. 은혜 속에서 자라는 자들은 드디어 영광 속에서 완전해질 것이다.  갈대아 판에는 이렇게 해석되어 있다.  "그들은 지성소에서 교훈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율법에 대해 그들이 들인 수고는 그 위엄이 시온에 거하고 있는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의무에서 또 한 가지 의무로, 기도에서 말씀으로, 우리가 배운 것을 실행하는 것에서 더 배우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그 은택이 나타나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 자신에게는 영원한 위로가 될 것이다.


💡 84: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 이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받아 모든 난관을 돌파함을 그리는 표현(사40:31; 요1:16)

‘각기 나타나리이다’

  • 여기서 수동형이 사용된 것은 스스로의 의지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에 의해 그들이 원하는 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자리에 설 수 있음을 묘사하기 위해서이다(42:2 ; 출 34;23 ; 신 16: 16).
  • 그러고 이것이 미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은 두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
    1. 먼저 이는 시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상황, 즉 성소를 간절히 사모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기를 고대하지만 그릴 수 없는 현실의 상황을 감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2. 그러나 이는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현실적인 측면에서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 능력을 지속적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자신의 확신을 피력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은혜가 지속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다는 기대로 인해 의로운 자들, 하나님과의 교제를 고대하는 자들은 지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도리어 본절 상반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힘을 얻고 더 얻어 날로 강해지게 되었다. 즉 주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기쁨 , 그에 대한 기대가 → 그들로 하여금 더욱 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처 아니하리로다"(사 40:31)라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즐거움을 주는 하나님의 규례 (시편 84:8-12)

Ⅰ.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해 주시도록 원했던 것을 별달리 언급하지 않고서,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시고 용납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비록 이제는 하나님의 율례에서 추방당하고 제지되었지만, 그 율례에 대해 사랑과 존경을 고백했을 때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던 때문이다.  그 고백 속에서 그의 모든 소망은 명백히 하나님께로부터 감취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를, 그의 상태를 보시고, 그의 선한 마음을 보시고 그의 얼굴을 살펴 보시기를, 즉, 그것이 어떠한 상황에 있으며, 얼마나 그의 안색이 하나님의 궁정으로 향한 그의 갈망을 나타내고 있는가를 보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을(많은 사람들의 견해대로) "하나님의 기름 부이신 자"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다윗은 주에 의해 기리고 주를 위해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탄원 속에서

1.그는 여러 가지 영광스러운 칭호 아래 있는 하나님을-모든 창조물을 지휘하시므로 하늘과 땅에 대한 모든 권세를 지니신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로서-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야곱의 기도하는 자손들에게 "너희가 나를 구함이 헛되도다"라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은 하나님, 즉,  "야곱의 하나님"으로서-그리고 그의 백성들을, 그들의 열조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의거하여, 그의 특별한 보호 아래 두시는,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으로서 주시하고 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이니라"(창 15:1).  다윗이 하나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숨을 수(시 27:5) 없었을 때에는,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가 되실 준비가 되어있음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2.그의 중보자를 주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윗의 그의 기름부음에 대해 언급했으므로(45:7), 나는 이 말을, "주의 메시야의, 주의 기름 부은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을 아뢸 때,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살펴 보시고 그를 위하여 우리를 용납하시며 그 안에서 우리를 기뻐하시기를 원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총은 눈으로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실 것이다.  주의 기름 부으신 자는, 우리가 그 없이 감히 우리의 얼굴을 보일 수 없을 때, 그의 얼굴을 보이신다.


💡 84: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 본절부터 시작되는 본시 후반부는 주의 장막을 사모하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간구와 신앙 고백을 다룬다.
  • 먼저 본절부터 10절까지에서는 주의 장막을 사모하는 주의 종의 간구를 다룬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본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반복적으로 부르며 자신의 간구를 들으실 것을 청원한다.

시인이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

  1.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만군의:
    • 여호와:
    • 각각 독특한 의미를 지닌 신명을 연속적으로 나열하여 사용하는 이유는 시인 자신이 처한 상황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
      • 당시 시인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 왕과 더불어 도피 중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어디서 대적둘의 공격을 받아 멸절할지 모를 급박한 위기 중에 처해 었었던 것이 된다. 당시 다윗 진영은 수도 예루살렘에서 피신하여 나온 상태로 압살롬 진영보다 군사적으로 절대 열세에 놓여 있었고 압살롬이 시시각각 포위망을 좁혀올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였으며,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시인은 인간적인 방편이나 해결책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연속적으로 열거된 신명들은 : 바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시인의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즉 시인은
        1.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지휘하시는 만군의 하나님,
        2. 천지를 창조하신 절대적인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
        3. 그리고 의로운 당신의 종들과의 언약을 지키사 보호하실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2. ‘야곱의 하나님’
    • 여기서 특별히 ‘야곱'이란 이름을 거명하는 것은 그가 선민 이스라엘의 실질적 조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곱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말이다.
    • 그런데 ‘이스라엘'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굳이 ‘야곱'이란 표현을 쓴 이유
      • 야곱이 이스라엘이 란 새 이름을 받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로서 성결한 삶을 살지 못하며 인간적 허물과 약함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돌보시고 지켜주셨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라는 본문의 표현은
      • 비록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죄와 허물이 있는 부족하고 초라한 자들이지만 당신의 언약과 신실하심을 따라 보호해 주시고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의미가 함측되어 있다.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을 부른 데 이어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개의 동사를 사용한다.

  • 이러한 반복적인 기도 응답을 위한 탄원은 시인의 절박하고 애절한 심경을 보다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이러한 시인의 심경은 원문으로 보면 더욱 간절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또한 여기서 사용된 두 동사는 모두 그 의머가 매우 강할 뿐만 아니라 뒤의 동사가 그 뜻이 더욱 강한 점층법도 사용되고 있다.
  1. 내 기도를 들으소서
    1. ‘들으소서’ : 단순히 듣는 것만 아니라 상대의 말하는 바를 경청하며 그 의미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동작을 취하는 것을 포함하는 의미.
  2. 귀를 기울이소서
    1.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으로 인간과 같은 신체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마치 시인의 기도를 듣기 위해 귀틀 기울이는 것 같은 뉘앙스를 전달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시인은 더욱 절박하게 하나님의 웅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시인의 이러한 간구는 단지 군사적인 도움으로 생명의 위협에서 건져달라는 의미, 그러고 그들로부터 승리케 해달라는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보다 궁국적으로 시인이 사모하고 구하는 바는 하나님의 성소에 다시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었다.
      즉 그가 이토록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교제를 이룰 수 었는 성소에 다시금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에 근거한 것이다.

💡 84: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주의 기름부으신 자'

  • 제사장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본시 전체의 정황상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을 대리하여 이스라엘을 통처하는 왕 , 보다 구체적으로 다윗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 이처럼 시인이 왕의 얼굴을 살펴달라고 기도한 것은
    • 왕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이 -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 대한 보살핌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 본시의 배경을 다윗어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기는 상황으로 본다면 다윗은 시인과 마찬가지로 성소에 나아가 하나님께 제사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 이러한 상황 가운데 있던 다윗이 그 얼굴을 들어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분명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다시금 서는 것이었을 것이다.
    • 이는 단지 다윗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 아니라,
    •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워 이전과 같이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도록 하는 의미도 함축한다. 

Ⅱ. 그는 하나님의 의문에 대한 그의 사랑을, 그리고 그가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1. 하나님의 궁정은 그가 택한 곳이었다(10절).

그는 거룩한 의문에 대해 매우 큰 존경심을 품었다.  그는 그것을 그 어느 것보다 귀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귀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1) 그 어느 시간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택함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세속적인 일들을 모두 떠나 신앙적인 봉사를 수행하면서 지내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사옵니다." 그것이 주의 궁정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사람들의 자손들의 모든 즐거움 가운데서 지낸다 할지라도 이 세상 다른 곳에서 지내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는 "날"이(days)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역:개역 한글판에는 날로 해석되어 있음). 천보다 낫다는 말을, 여러분은 임의대로 연수로, 또는 세대로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나, 다윗은 그것에 손을 대려하고 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 하루의 안식일, 하루의 명절이-비록 하루뿐일지라도-내게는 매우 반가울 것입니다."(유태인 율법 학자들의 일부는 그것을 그렇게 풀이하고 있다.). "아니, 내가 그것으로 인해 그 다음 날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 세상의 일과 즐거움 속에서 보낸 수 년보다 나을 것입니다.  이러한 즐거움이 있는 한 날은 "천날을 쫓을 것이요, 두 날은 불만을 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할 데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나이다."


💡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나님의 성소에 대한 시인의 간절함과 열의

  • 시인은 하나님의 궁정에서 머무는 시간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지내는 천 날, 더 나아가 그 평생과도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좋사오니’

  • 본문의 의미 : ‘기뻐하다, 선택하다’
    • 시인은 ‘악인의 장막에 거함'과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을 단순히 비교하여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낫다고 판정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이 그것을 좋아하고 기뻐하여서 적극적으로 선택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악인의 장막 ↔ 내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집에서 일하는 비천한 문지기가 되는 것이 악인의 장막에 편안하게 거함보다는 낫다는 의미.


(2) 다른 장소보다는 예배하는 장소를 택함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당당하게 주인으로써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가장 낮은 직책에서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옵니다."

그가 장막까지도 집이라 부르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  그 안의 하나님의 임재는 그 휘장을 궁전보다 더 위엄있게 만들며, 성보다 더 강하게 만든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의 집이다.  그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는 그가 수금으로 연주하기를 매우 사랑했던 달콤한 선율이었다.  좋은 근거 위에서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은, 그리고 그러한 자들만이 그의 궁정을 기뻐한다.  나는 악인이 거하는 그 장막의 왕보다는 차라리 하나님 집의 문지기가 되겠다.  차라리(단어 그대로) 문지방에 눕겠다.  그것은 거지가 있는 장소였다(행 3:2), "그래도 괜찮다"(다윗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 있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거기에라도 있는 것이 낫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매우 좋아했다.  거기에서 상좌를 차지하는 것을(마 23:6) 그들이 위대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거룩한 다윗은 그것을 갈망하지는 않고 있다.  그가 단지 문지방에 있도록 허락만 받는다면, 그는, "주인이시여,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하고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에 관한 율법을 시사하면서 그것을 이렇게 읽고 있다.  "나는 악인의 장막에서 자유롭게 사느니 보다는 차라리 내 하나님의 집 문설주에 매여 있겠다." 종들이 떠나가서 자유하지 않으려 할 때는, 그종들을 문설주 앞으로 가 그 귀를 뚫어야 했던 것이다(출 21:5, 6).  다윗은 그의 주인과 그의 일을 매우 사랑했으므로 영원히 이 봉사에 묶여 있기를, 더 자유롭게 그 일을 행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 죄에 대한 가장 큰 자유보다는 의무에 대한 속박을 매우 사랑하였기 때문에, 결코 거기에서 떠나 자유케 되기를 원치는 않았다.  이처럼 최상의 기쁨은 거룩한 의무에 전념하는 거룩한 마음을 소유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얻는 만족감과 비교될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2. 하나님은 그의 소망이요 기쁨이며, 모든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의 하나님의 집을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의 기대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었고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곤 했기 때문이었다(11절).  다음을 보자.

(1)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 대해 무엇이 되고 계시며, 또 되실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우리는 여기에서 흑암 속에 있으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 빛을 비추시고 활기를 부어 주는, 우리를 안내하고 지도하는 해가 되실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위험 가운데 있으나 그는 우리에게 빈번히 날아오는 맹렬한 창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해 주는 방패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사, 그의 은혜로 우리의 방패가 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의 빛에 행하고" 결코 우리 자신을 그의 보호 밖으로 내어 던지지 말자.  그러면,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모두 공급해 주는 해이며 모든 악에서 우리를 막아 주는 방패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해’와 ‘방패’

  • 시인이 하나님을 ‘해와 방패'라고 묘사한 것은 태양이 만물에게 골고루 빛과 열을 공급하여 활기를 주듯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과 그분이 의인들, 경건한 자들을 친히 보호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가리켜 ‘태양' 이라고 묘사한 곳은 없을지라도 은유적으로 태양에 비유한 곳은 많이 발견된다(19:4~6’; 말 3:20). 더욱이 고대 근동에서 왕을 태양에 비유하는 것은 일반적이었다(Kraus).
    아울러 이는 이어지는 표현 즉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라는 표헌 ,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란 표현과도 나름의 연관성을 지닌다.
    즉 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에 활기를 주는 것으로 인식되며 해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이 비추는 곳에는 어둠과 죄악, 거짓과 불의가 일소되고 정직과 건설이 더욱 든든허 세워지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2) 그는 그들에게 무엇을 수여하고 계시며, 또 하실 것인가.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리이다."

  • 은혜는 우리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의미한다.
  • 영화는, 그가 우리를 양자로 하시어 우리에게 부여하신 존귀와 그가 아들의 기업으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을 의미한다.
  •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영광의 준비로서 은혜를 그들에게 주실 것이며, 저
  • 세상에서 은혜의 완성으로서 영광을 주실 것이다.
  • 그리고 한편,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곳마다 영화를 주실 것이며(왜냐하면 은혜는 영화의 시작이며 그 전조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지금 은혜를 주시지 않는 또는 그가 주시는 은혜를 헛되게 하는 자에게는 이 후에 영화를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양쪽 세상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협력하는 두 가지 큰 것인 은혜와 영화를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우리는, 그가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정직히 행하는 것,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그리고 이세상에서 고지식함과 경건한 성실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선한 백성들의 특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즉,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데에 필요 불가결한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은혜와 영화를 확고히 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더할 것이다." 이것은 포괄적인 약속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도들이 받는 현재의 위로에 대한 보증이므로, 그들은 그들이 원하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한하신 지혜자께서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않은가를 살펴 보시거나 무한하신 자비자께서 그것을 합당한 때에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정직히 행하도록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자.  그리고서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리라는 것을 믿도록 하자.


 💡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

  • ‘은혜
    • ‘헨’ : ‘호의’, ‘자비’ ; 강한 자가 약한 잘르 대하여 나타내는 선한 뜻과 행실.
    • 왕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백성들, 특히 당신의 성소를 사모하며 교제하기틀 원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그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받아주신다.
  • ‘영화’
    • 원형 ‘카보드’ : ‘무거움’ ‘위엄’ ‘장엄’
    • 가볍게 대하지 않고 고귀하게 대하신다.
  • ‘주시며’
    • 시인이 비록 곤고한 가운데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고 있다는 것 ,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자신과 같이 의로운 고난을 감내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사모하는 자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란 신념을 지니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 시인은 하나님께서 정직히 행하는 자들 곧 당신의 의로운 백성들에게 좋은 것, 선한 것을 결코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것 , 보다 적극적으로는 주체할 수 없이 선하고 좋은 것을 한량없이 베푸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 여기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좋은 것’ = 앞선 ‘은혜와 영화’

좋은 것을 베푸시는 대상 = ‘정직하게 행하는 자’

  • ‘정직히’ : 이에 해당하는 ‘빼타밈’의 원형 ‘타밈’은 ‘정직히’보다는 완전한’이란 의미의 형용사.
  • 이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에 따른 결과로서 완전한 삶'(창 6:9), ‘하나님 앞에 살아감으로 완전한 삶 ' (창 17:1)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 본문에서도 ‘타밈’ 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면전에 두고(Coram Deo) 하나님과 연함함으로 이륙하는 완전한 삶을 지칭하는 표현.
  • 특히 이 표현은 ‘분사형’
    • 그러한 하나님과의 연합, 하나님과의 동행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것임을 전달함. 

끝으로, 그는 앞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이 복받을 것을 언명하고 있다(12절).  규례에 대한 자유와 하나님의 집에 대한 특권을 가진 자는 복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에 대해 방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축복 받는 일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우리가 주님의 전에 갈 수 없다면, 우리는 믿음으로써 그 전에 계신 주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편안케 될 수 있을 것이다.


💡 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 하나님의 축복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반드시 임할 것임을 강조

당시 시인은 그가 그토록 사모하는 바 성소에 나아갈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예배조차 드릴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본시의 배경을 압살롬의 반역으로 본다면 반역을 일으킨 압살룸 일당은 더욱 강성해져 갔으며 그들의 악한 도모는 거의 성취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현설적 정황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설하심,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과 하나님이 베푸시는 풍성한 은혜, 그러고 그 은혜를 받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로 인해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정직한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전한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이란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끊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 이상에서 다룬 본시는 시편 가운데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많은 이돌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시로 꼽힌다. 본시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영흔이 쇠약해질 정도로 주의 장막을 사모하는 시인의 애절한 심정이 하나님과 선한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즉 ‘주의 장막', ‘주의 궁정’, '주의 집' 등으로 표현되는 성소에 나아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시인의 열망은

  •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삶의 평화를 경험하고자 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할 뿐 아니라
  •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영생 복락의 저 천국을 향한 순례자의 길을 걷는 성도들의 삶을 표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순례길을 쉬임없이 가고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서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란 겸허한 고백이다.

이런 자만이 영원한 복락이 있는 주의 집에 거하는 영광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