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6월 17일 월요일 묵상구절 시편119:129-144

Jeehyun 2024. 6. 17. 23:42

맥체인성경읽기

신명기 22, 시편 110, 111, 이사야 49, 요한계시록 19

묵상구절

119:129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19:131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19:132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19:133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119:134 사람의 박해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119:135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119:136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119:137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19:138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119:139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119: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119:141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119:142 주의 공의는 영원한 공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119: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19: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매튜헨리/옥스퍼드

17연: 말씀을 지키는 자로서 올리는 훈육과 구원의 간구.


💡 129-131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시인의 찬탄과 사모의 열정을 소개함.


●놀라운 말씀(시편 119:129)


💡 119:129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여기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얼마나 감동되었는지를 보라.

1.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자체가 가장 빼어난 것이라고 감탄했다.

"주의 증거가 기이하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다른 세계에 대해 놀라운 발견을 주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놀라운 증거를 우리에게 준다. 문체의 장엄성과 내용의 순수성 그리고 각 부분의 조화는 모두 기이하다. 인간의 양심에 대한 그 효능은 확신에 있어서나 위로에 있어서나 모두 기이하다. 우리가 그것을 감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증거에 친숙하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가 된다.


 💡 ‘놀라우므로’

  •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외 눙력의 탁월함이나 당신의 백성둘을 인도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역사들의 초월성과 기이함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인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증거, 즉 하나님의 말씀에 연결시켜 사용하고 있다.
  • 이처럼 하나님의 증거가 기이하다는 시인의 고백에 대해 다양한 해설이 있어왔다.
    • 혹자는 그 안에 전혀 오류가 없고 그것이 사람의 영혼을 훈육하고 강건하게 하며 위로를 베풀며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Spurgeon).
    • 또 다른 이는 하나님 말씀이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 놀라운 기적을 이루기도 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 그 안에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확고한 구원과 보호, 자비로우심과 더불어 죄악과 악인에 대한 확고한 공외가 함축되어 있옴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설명한다(Eichrodt).
  • 이러한 설명들은 그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 완전무결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유일한 방편일 뿐 아니라 그들을 온전함과 구원에 이르게 한다.
  • 또 그 넓이와 깊이를 알 수 없는 만큼 풍성한 진리를 담지하고 있으므로 묵상하면 할수록 그 기이함에 대하여 경탄할 수밖에 없다.
  • 무엇보다 그 안에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악인에 대한 최후 심판과 의인의 최후 승리를 확신케 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 그리고 신•구약 성경 말씀의 주제이시며 계시의 절정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기묘자' 즉 본문의 ‘기이하시니'의 기본형 ‘펠레' 로 묘사된다(사 9:6). 그의 성육신, 우리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 그의 행하심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이 볼가능한 불가사의한 일이다.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인 본시 저자하나님 말씀이 가지는 이러한 신비로움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를 ‘기이하시니'로 묘사한 것이다.

특히 이 단어는 앞서 언급한 것처 럼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그 기묘함이 넘치도록 크다는 것을 강조적으로 전달한다.


2.그는 그것을 자기에게 끝까지 사용할 것을 신봉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내가 그것이 없이는 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보화로써 지키리이다." 우리의 영혼이 그것을 지키지 않는 한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 그들은 연약제에 증거표로서 거기에 맡겨져야 하며 그들은 가장 깊은 곳과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놀라운 것을 보는 자들은 가장 높이 그것을 존중할 것이며 주의 깊게 그것을 보존할 것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위대한 것들을 약속받고 있다.


💡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주의 증거를 지키는 주체 = ‘내 영혼’

→ 시인이 ‘나’라는 주체를 표현하지 않고, ‘내 영혼’ 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의도적이다.

  • ‘영혼’
    • 이는 인간의 지적 • 의지적 • 감정적 요소 모두를 포괄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따라서 이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되 전인격을 다해 철저히 지키겠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말씀의 효능(시편 119:130)


💡 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의도되는 커다란 유용성이 있다. 즉 이 세상을 통한 우리의 여행에서 우리에게 유익하게 될 빛을 주시고 이해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성화된 모든 자들의 이해를 밝게 깨우쳐 주시는 외적(外的)이며 평범한 수단인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그 위대성에 있어서 기이할 뿐만 아니라 어두운 곳에 비추이는 빛으로써 유용하기도 하다.

2. 이러한 목적에 대한 말씀의 효험. 그것은 훌륭하게 그 목적을 달성한다.

(1) "주의 말씀을 열므로 빛이 비추인다."

만일 우리가 처음에 시작하여 주의 말씀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면 우리는 성서의 처음 구절들의 말씀이 없다면 세상은 완전히 암혹 가운데에 있다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발견으로 우리에게 놀라움과 만족을 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열리자마자 우리에게 주어지자마자 우리를 깨닫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연구하기 시작할 때 보기 시작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신탁(神託)의 최초의 원칙 즉 가장 평범한 진리와 초보적인 것이 영혼에 빛을 가져다 주며, 영혼이 말씀에서 발견되어지는 장엄한 신비에 의해 더욱 조명받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의 말씀에 대한 강해나 설명은 빛을 준다. 그러므로 그것은 목사들이 "그 뜻을 해석하는 데서"(느 8:8) 저희의 사 담당할 때 가장 적합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구약을 열고 닫으며, 생명과 불후성에 관한 빛을 주는 신약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2) 그것은 "우둔한 자에게" 심지어는 가장 능력이 약한 자에게도 "깨닫게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늘에 이르는 길을 쉽게 열어 보여 주기 때문에 "나그네들은 어리석은 자일지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 ‘우둔한 사람들’

의미

  1. 일차적: 유혹에 빠지기 쉬운 미련하고 단순하며 어리석은 자.
    • 이렇게 보면 하나님 말씀의 빛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다 강조하는 의미가 된다.
    • 하나님께서 말씀의 빛을 비추면 흑암에 휩싸여 있는 자들, 어리석음과 무지함에 메어 있는 자들도 지혜를 얻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의미를 반영하여 공동 번역과 표준 새번역은 본절을 각각 “당신 말씀 밝히시어 빛을 내시니 우둔한 자들이 손쉽게 깨닫습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거기에서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도 깨닫게 합니다"로 번역하였다.
  2. 시인 자신을 비롯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지혜로우신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자로서, 또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자로서 자신을 낮추어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

●주의 말씀을 사모함(시편 119:131)

  1. 여기에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했던 간구가 있다.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였나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쩔 수 없이 떠났을 때 그는 다시 거기에 돌아가기를 사모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했을 때 '마치 새로 태어난 아기가 젖을 사모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빨았다. 그리스도께서 영혼에 형상을 이루실 때 거기에는 은혜로운 동경과 그 일에 문외한인 자에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로운 동경이 있게 된다.
  2. 그 표현에 나타나 있는 갈망의 정도를 보자.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뜨거운 열로 녹아 떨어지거나 거의 질식되어 신성한 공기를 마시고자 헐떡거리는 자 같이 되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과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이와 같이 강하고 이와같이 진실되게 열심이어야 할 것이다(42:1, 2; 눅 12:50).

💡 율법에 대한 찬탄과 간절한 사모의 열정을 다루는 본단락 말미에서 시인은 간곡하고도 강렬한 표현을 사용하여 말씀에 대한 열의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먼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표현은 사냥꾼의 추격으로 지철대로 지친 점승어 임을 열고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죽 시인은 달리다 지쳐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공기를 들이키는 짐승의 헐떡임에 자신의 갈급함을 빗대면서 말씀을 갈구하는 자신의 간절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다른 어떤 것에도 비할 바 없는 말씀에 대한 간절하고 강렬한 열망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미완료형’ 동사로 사용

  • 이 갈망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된 것임을 나타냄.

‘연장형’

  • 타율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하나님 말씀을 구한 것이 아니라,
  • 간절히 구하되 자발적으로 구한 것임을 나타낸다.
  • 이는 이처럼 하나님 말씀에 같급해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본절 하반절의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라는 표현을 통해 확인된다. 

 💡 132-134절: 하나님을 향하여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구원 실행을 호소하는 내용


●하나님의 공의로운 은총(시편 119:132)

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다윗의 요청이 나와 있다.

은혜로이 "내게 돌이키사 나로 주의 미소를 가지게 하시며, 주의 얼굴의 광채를 보게 하소서. 나와 나의 사정을 인식하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로 하여금 주의 자비의 달콤함을 맛보게 하시며 주의 자비는 은사를 받게 하소서. "그의 간구가 얼마나 겸손한지를 보라. 그는 하나님의 손의 활동을 간구하지 않고 단지 그의 얼굴의 미소만을 간구하고 있다. 선한 모습이 충분히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공적을 말하지 않고 단지 자비를 간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그의 모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셨나이다."

(1) 자비를 위한 간구가 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주를 사랑하며 주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주는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 중의 다른 사람들보다 내게 더 나쁘게 대하시렵니까?"

(2) 그가 갈망하였던 은총과 자비에 대한 서술이 있다. "주께서는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것을 주께서 택하신 자에게도 베푸신다"(106:4, 5). 그는 이웃의 요금보다 더 많은 것을, 더 좋은 것을 갈구하지 않으며 더 적게 하는 것을 찬성하지도 않으려 한다. 평범한 모양과 평범한 자비를 섬겨지지 않을지 모르나 그것은 그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보존되어 있으며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고전 2:9)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을 대하시는 것은 마치 한 인간이 어떤 다른 자보다 더 잘대해 주기를 갈망하지 않는 것과 같이 공평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에게 진실로 영원히 행복하게 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대로 우리를 대하시는 한 우리는 불평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전 10:13).


 💡 119:132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 시인은 하나님이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긍훌을 베푸시는 분임을 회상한다.

주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표현의 의미

  • 단지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를 넘어서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 이는 고대 근동에서 이름이 갖는 특별한 의미 때문이다.
    • 고대 근동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불라는 대상의 존재 자체와 성품, 인격, 사역 등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주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것은

  •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성품과 행사, 뜻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 즉 하나님의 뜻과 말씀, 행사에 대해 적극적이고도 포괄적인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베푸시던 대로’

  • 직역하면: ‘규례대로’ ‘궁의처럼’ - ‘일상적인 법칙에 따라’ ‘평범한 관습에 따라’
  •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전에 하시던 대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구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간구를 올리는 것은
    • 만일 자기가 바라는 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일이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행하시던 바와 달리 지속적으로 수치와 멸시, 고통 가운데 있게 된다면 그 스스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긍휼과 무관한 자,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자라고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그야말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인은 처럼 ~해주십시오'라고 절박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마음을 쏟아주시기를 바라는 시인의 간곡한 요청.
  • 이처럼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긍휼을 베푼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 시인은 이에 이어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에 해당하는 ‘웨한네니’ 란 표현을 덧붙이는데 이를 감안하면 본문은
      →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란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 이처럼 본문은 유사한 의미의 간구를 반복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서도 시인의 절박함을 읽어낼 수 있다.
  • ‘은혜를’ 베푸소서
    •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주권적인 은혜
    • 이를 감안할 데 시인은 물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 스스로의 공로나 노력에 있어서, 자신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 그는 자신이 구하는 바 자비와 긍휼히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풍성한 궁홀에 근거한 것임을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의 축복(시편 119:133)

여기에서 다윗은 두 가지의 커다란 영적인 축복을 간구하고 있다. 앞 절에서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열심히 간구한 것같이 여기는 하나님의 선한 행실을 열심히 간구하고 있다.

1.그는 의무의 길의 방향을 위해 기도한다.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소서. 나로 하여금 올바르니 길로 인도되게 하시며, 내가 그 길을 걷는 모든 행보가 주의 은총의 안내 아래에 있게 하소서." 우리는 규칙에 의해서 걸어야 한다. 영혼의 모든 움직임을 말씀에 의해서 규정된 한계를 지켜야 하며, 그 한계를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또한 말씀에 의해서 지시된 길을 걸어야 하며 그 길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신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행보를 적절하게 명령해 주실 것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2.그는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출을 위해 기도한다.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그 죄악에 승낙하지 말게 하시며 그로 인해 잡힌 바 되지 않게 하소서." 죄의 지배는 우리 모든 사람에 의해서 두려워하며 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그것에 대해 기도한다면 우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 약속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라" (롬 6:14)


💡 119:133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 앞선 13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 이제 본절에서는 그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행보를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실 것과 죄악이 자신을 주장치 못하게 하기를 기도한다.
    즉 앞서 위기의 상황에서 구원의 손길과 긍휼하신 은혜를 간구한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자신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해주실 것을 간구한다.

‘나의 발걸음’

  • 그의 인생 여정을 나타내는 표현.
  • (복수형) 으로 - 시인의 삶의 구체적인 순간 순간, 그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모든 것들을 함축함.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 ‘세우다’ ‘고정하다’ ‘확실하게 하다’
  • (사역형)
    • 이처럼 시인이 사역형을 사용한 것은
      • 그 삶의 과정을 바르고 확고하게 세우는 것은 자신 스스로는 불가능하며,
      •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에 의헤서만 가능한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 시인은 이를 명령형 동사로 표기함으로써 -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확고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시인외 열망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죄악이 자신을 주장하는 일이 없기를 간구함.
  • 이러한 간구는 앞선 상반절의 간구와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
    • 이처럼 불행한 사태, 즉 죄악이 자신을 주장하고 지배하는 일은
      → 시인 스스로 그 행보를 견고히 세우고자 하고 하나님 말씀이 그 삶의 기초가 되지 않을 경우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일이다.
  • 하나님 백성들의 삶은
    •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 죄악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
  • 이를 명약관화하게 인식했던 시인은,
    • 그 삶의 과정이나 결정 하나하나까지도 하나님 말씀에 기초해 세워지고 실행되게 헤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압박으로부터의 구원(시편 119:134)

1. 여기에서 다윗은 그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겠다고 기도하고 있으며, 괴롭히려고 노력하는 자들에 의해서 괴로워하거나 불안하지 않게 될 것을 간구한다.

"사람의 압박에서 나를 구속하소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며, 인간의 권세는 제한되어 있다. 저희로 하여금 저희가 "인생뿐인 줄(9:20) 알게 하소서. 나를 불합당한 사람들의 손으로부터 구출하소서."


 💡 ‘사람의 압박’에서..

  • 압박 : ‘손해, 사기, 강탈, 압제’
  • 이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은
    • 현재 시인 자신이 대적들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당하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 따라서 본문의 표현온 하나님의 개입이 없을 경우 자신은 대적들의 공격과 위협에 노출되어 결국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 이처럼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직접적으로 ‘나를 구속하소서'라고 부르짖는다.

‘구속하소서’

  • 원형 ‘파다’ : 노예나 포로 등을 ‘몸값을 받고 석방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 이 단어는 대개 죽음에 방불한 혹독한 고통이나 죽음 그 자체로부터의 구원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다.
    ⇒ 이러한 표현 역시도 시인이 얼마나 혹독한 고난 중에 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그는 따라서 "매우 경건하고 성실한 중에" 살아가기를 약속하고 있다.

"나를 나의 적대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소서. 그리하여 두려움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나가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그가 비록 계속 압박 아래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를 더욱 지키며 더욱 마음을 열고 헤이해진 나의 의무를 결속하여 지키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입장에서 이와 같이 갈구할 때 일상적인 축복을 기대할 수 있으며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게 될 것이다.


💡 지금까지의 내용을 감안하면 시인은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지속적으로 주의 말씀에 주의하여 왔으며 고난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앞세우는 인물이었다.

이를 감안할 때 본문의 표현 역시

  • 조건적 서원이 아니라,
  • 어떤 형편에서든 말씀을 더 충실히 지키려는 시인의 간곡한 심정을 반영한 신앙 고백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의 종의 찬가(시편 119:135)


💡 135,136절

  • 앞선 132-13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구원이 자신에게 임하기를 간구하였다.
  • 이제 본절과 136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주의 율례로 훈육하실 것을 간청하고 사람들이 말씀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의분을 토로한다.
  • 그 가운데 주의 얼굴을 자신에게 버추어 달라는 본절 상반절은 민 6:24-26에 나오는 제사장의 축복 기도의 한 부분을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 

다윗은 여기에서 다른 곳에서 자주 쓴 것과 같이 그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비록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영광으로 여겼다. 이제 여기에서 그는 하나의 선한 종이 되었다.

1.그는 그의 행복과 지고선(至高善)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그의 주인의 은총에 대해서 매우 열망하였다.

그는 곡식과 술을 구하지 않고 또한 은이나 금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주의 얼굴로 주의 종에게 비추소서"하고 간구하였다. "내가 주께 용납되게 하시며, 나로 하여금 내가 용납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구름끼고 어두운 모 날에 주의 얼굴의 빛으로 나를 위로하소서. 세상이 나에게 찌프려도 주는 미소를 지어 주소서."


 💡 ‘주의 얼굴’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 본래 순수한 영으로, 인간과 같은 신체를 가진 분이 아니다.
    • 이처럼 순수한 영이신 하나님을 인간처럼 신체를 지니신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이라고 하며 이는 하나님이 지니신 성품, 사역 등을 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인식하게 하기 위한 표현 기법이다.

‘얼굴’

  •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 혹은 은혜를 함축.

‘얼굴을 감춘다’

  •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거나 감추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어상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는 것, 즉 그를 붙들거나 이끌지 않으시며 구원을 베풀지 않으신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 이 경우 사람은 죽음의 길, 절망의 길을 가다 패망할 수밖에 없다.

반면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비추신다’

  • 그 얼굴이 비취는 대상에게 생명과 구원, 축복을 베푸신다는 의미를 함축한다(Keil, Baumgarten).
  • 이는 시편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인데 여기서도 고통 중에 있는 시인이 하나님께 구원과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가 구체적으로 구한 은혜

  • ‘주의 율례로 자신을 가르쳐 달라’는 것.
    • 그는 고통 중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육적 생명이 건짐을 받거나 원수들이 파멸을 당하거나 본래 있던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구하는 것보다,
    •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은혜를 구한 것이다.
    • 이는 결코 현실 도피적인 간구라 할 수 없다.

시인이 이같은 간구를 올린 이유

  • 본연 안에서도 그 층분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애절하게 갈망하였는데(131 절)
      →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만 자신이 바르게 세워질 수 있음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133a절).
    •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 굳게 세워질 때
      → 죄악이 자신을 주장치 못할 것임을 확신하였다(134절).

‘주의 종’ = 시인 자신.

  • 시인은 자신을 ‘주의 종'으로 칭한다.
    •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함축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이러한 의지 표명은
    • 일면 앞서 다룬 ‘나를 가르치소서' 란 표현과도 일맥상통한다.
    • 이를 연결시켜 보면,
      • 지금 하나님께서 가르침만 주시면,
      • 자신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의미가 도출된다. 

 


2.그는 그의 사업과 주요 관심사를 생각하면서, 그의 주인의 행사에 관해서 매우 염려하였다.

그는 이러한 것을 가르침 받기를 원했으며 그것을 행함으로써 용납되기 위하여 그는 그것을 행하려 했고 보다 더 잘 행하려 했다.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우리는 위로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만큼 은총에 대해서도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숨기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의 율례를 지키는 데에 있어서 부주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은총의 보답으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행할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눈물의 원인(시편 119:136)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이 슬픔 가운데에 있는 것을 본다.

1.그것은 그가 "시냇물 같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큰 슬픔이다.

대개 은혜로운 마음이 있는 곳에는 눈물을 흘리는 눈이 있다. 그것은 슬픔사람이며 비통에 차있던 그리스도와 일치된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위로를 간구하였고(135절) 여기에서는 그 위로를 부여받을 처지에 있고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시온에서 통곡하는 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위로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사 61:3)

2.그것은 거룩한 슬픔이다. 그는 비록 문제가 많았지만 자기 괴로움 때문에 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행한 불명예 때문에 울었다.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또 어떤 사람은 "내 눈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그리하였다(139절). 죄인들의 죄는 성도들의 슬픔인 것을 주목하자. 우리는 우리가 고칠 수 없는 것을 통곡해야 한다.


💡 119:136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여기에는 비유법과 과장법이 사용되었다.

  • 즉 이는 많은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인데(애 3:48) 오늘날에도 근동에서는 이 과정적 표현이 큰 슬픔을 묘사하는 데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시인이 이처럼 큰 슬픔에 사로잡힌 이유는?

  • 상반절에 표현된다.
  • 그것은 자기가 고난을 당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였기 때문이었다.
  •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 그 자신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존중하고 지켜야 할 최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 그런데 그것이 악인들 가운데서 업신여김을 받았던 것이다.
    • 이로 인해 시인은 강물 같은 눈물이 눈에서 흐르고 있다고 표현함으로 자신의 처절한 슬픔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을 통해서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시인의 열정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알 수 있다.

  •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죄인들의 죄악은 성도들에게는 슬픔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 성도는
    •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와 모독의 대상이 되는 현실 앞에서
      — 처절한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고 패역을 행하는 자들의 암울한 내일을 보고
      — 가슴 절절한 슬픔을 느끼며,
    • 의롭고 진실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현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것은 시인 뿐 아니라 에수님도 그러하셨고(눅 19:41) 바울 사도 역시 그러했다(롬 9:1-3). 

18연: 말씀의 의에 대한 찬탄과 사모의 열정 토로


 💡 제16연과 제17연(121-136절)에서

  •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로서 을러는 말씀에 대한 훈육과 구원 간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제 제18연부터 제20연(137-160절)에서

  • 시인은 상황을 초극하는 하나님 말씀을 향한 열정을 토로하고 말씀에 의지한 소성을 간구한다.

18연의 특징

  • 여호와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열성적인 찬양과,
  • 여호와의 의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진실(시편 119:137,138)

1.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의 본성의 무한한 정직과 완전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현재와 같이 미래에도 변함이 없으시며 모든 일에서 그의 의도대로 행하신다. 하나님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고 실수하는 것이 없다. 그의 뜻은 공평의 영원한 규범이며 그는 의로우신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그의 뜻에 따라 행하시기 때문이다.


💡 119:137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여호와여’

  • 여기서 시인은 ‘여호와’ 란 신명을 사용한다.
  • 본시에서 시인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성호를 자주 쓰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특별히 언약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하는 ‘여호와' 란 이름을 부르고 있다(Spurgeon).
  • 이는 본절과 138절에 나오는 바 주의 의로우심과 주의 판단의 정직함과 증거의 의로움과 성실함은
    •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나 그 일원인 시인 자신을 향하여 주어지는언약에 근거한 축복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먼저 여호와는 의로우시다고 선언한다.

  • 이는 ‘여호와'는 ‘의' 그 자체이시라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성품을 지니셨기에
    → 지금까지 의로써 역사하셨으며,
    → 앞으로도 의로써 역사하실 것이라는 … 시인의 굳은 신앙을 보여준다.

2. 그의 통치는 의롭다.

하나님은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서 그의 섭리에 의해서 세상을 다스리시며 그의 어떤 피조물에게도 악을 행하신 적이 없으며 행하실 리도 없다. "주의 판단은 정직하시니이다. 주의 약속과 경고 그리고 그것의 시행이 정직하시니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는 그 말씀에 진실하실 것이다. 그는 모든 죄과의 진가를 완전하게 아시며 그에 따라서 심판하실 것이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주의 판단'은

  • 단수로 번역되었으나 원문으로는 복수,
    ‘주의 판단들’ 로 번역되어야 한다.
  • 그러나 이를 서술하는 ‘정직하시니이다’ 에 해당하는 ‘야와르’ 는 단수이다.
    • 복수 형용사가 와야 하는데 단수로 받은 것은 문법적 오류가 아니다.
    • 이는 정직하지 않은 하나님의 판단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표현이다.
      즉 시인은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적으로 정직함을 단수와 복수를 혼용하여 강조하는 것.
    • 하나님의 속성으로 볼 때도 — 어떤 사고나 말이나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이 의로움이나 정직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시인은 본절에서 이러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증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3. 그가 우리에게 복종의 규범으로 주신 그의 명령도 의롭다.

"주의 명하신 증거는, 주의 통치의 권위로 돌려지며 주께서 우리의 복종을 요청하시는 주의 명령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도소이다. 그것은 의와 신실 그 자체입니다." 그가 자신과 같이 행한 바대로 그의 법은 우리가 우리 자신들과 같이 그리고 그와 같이 행할 것을 요청하며 우리가 대하는 모든자들과 우리 자신들에게 공의로우며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행하는 모든 참여에서 진실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가 실행하라고 명령받는 것은 의로운 일이다. 우리가 믿으라고 명령받는 것은 신실한 일이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확신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과 복종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 119:138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 율법은 - 전적으로 의롭고, 신뢰할 만하다.
  •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 만왕의 왕의 명령이며,
    • 그것의 특징은 그것을 선포하신 주님의 속성과 같다.
    • 그것은 의의 본질이요 진리의 정수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의롭고 신실한 말씀에 우리 자신의 삶과 미래를 내어맡길 수 있다.

앞선 137절과 관련시켜 볼 때,

— 본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 하나님께서 명하신 증거의 성격

  • 하나님의 성품과 부합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 달리 말해 하나님의 증거가 찬탄받을 만큼 의롭고 지극히 성실한 것은

  • 그것이 의롭고 성설한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열성으로 죄와 투쟁함(시편 119:139)


💡 119:139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내 열정’

  • 거룩한 열심, 정열

‘나를 삼켰나이다’

  • 의미: ‘자르다’ ‘파괴하다’ ‘소모하다’
    • 힘의 소모, 힘의 고갈.
  • 여기서 시인이 이처럼 강력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 주의 말씀을 원수들이 멸시하는 것을 볼 때에 - 그들의 무례함으로 인한 분노의 감정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 시인은
      • 말씀에 대한 악인들의 오만방자한 태도로 인해,
      • 분노의 감정으로 압도당했으며(Philips),
      • 심지어 자신의 힘이 고갈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토로한다.
    ⇒ 이 역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시인의 간절하고 뜨거운 열의를 엿볼 수 있게 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 여기에 사악한 자들이 종교에 대해 취했던 커다란 멸시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내 대적은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나이다."

그들은 자주 주의 말씀을 들었지만 거의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곧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무관심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그들의 마음에서 흘려 버릴 뿐만 아니라, 주의 말씀을 어떻게 그들의 등 뒤로 던져 버릴까하는 것을 강구하였다.

이것은 사악한 자의 모든 악한 성격의 근저(根)에 깔려 있는 것이며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악의와 적개심의 성격의 근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은 자들이며 저희의 죄된 행실을 점검해 줄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 버렸다.

2. 경건한 자들이 종교에 대해 보여 주는 커다란 관심이 있다.

다윗은 그의 대적들이 종교에 대한 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였다. 그는 공격하고 방어하는 동맹에 개입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열성이 그를 소멸하였다." 그리고서 그는 저희의 불경건을 보았다. 그는 그의 영혼을 괴롭히는 저희의 사악성을 보고 의분을 품었고 심지어는 "저희를 삼키려고 하였다"(그리스도의 열심과 같이, 요 2:17). 모든 열등한 사고(思考)를 삼켜버리고 자기 자신도 잊으려 했다. "내 열심히 나를 억압하고 붙잡았다"(행 18:5). 하몬드 박사(Dr Hammond)도 그것을 그렇게 풀이한다. 죄에 대항하는 열심은 우리의 처지에서 죄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우리를 붙잡으며 우리 자신들이 더욱 경건하게 되도록 한다. 다른 사람들이 악하면 악할수록 우리는 더욱 선해져야 할 것이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시편 119:140)

1.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다윗의 커다란 애정이 나타나 있다.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하나님의 종인 모든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의 주인의 뜻을 알게 해 주며 그의 주인의 활동에로 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은총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따뜻한 애착이 있다.


💡 ‘사랑하나이다’ (아하브)

  •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경우(창 22:1), 부부간의 사랑(창 24:67; 삼상 18:20) 등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단어로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넘치는 사랑을 가러킨다.
  • 본절에서도 이 단어는
    • 자신을 ‘주의 종’ 이라 칭한 것과 더불어,
    • 주의 말씀을 위하여 어떤 희생도 치를 수 있다는 시인의 굳은 의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그러한 애정의 근거와 이유가 나타나 있다.

그는 그것이 "심히 정결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그 순수함 때문에 그것을 사랑할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함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그의 거룩함의 동참자로 우리를 삼으려고 계획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결을 명령하며 그것은 자체로서 모든 부패한 혼합물에서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칩가운데서 받고 사랑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찌꺼기와 육적인 심성(心性)으로부터 우리를 정화시켜 줄 것이다.


 💡 119: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순수하므로’

  • 이는 일차적으로 하나님 말씀에는 죄로 오염된 인간의 불순한 사상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은 정결할 뿐 아니라 정결케 하는 것이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 말씀이 정결하며 정결케 하는 것이기에 죄로 오염된 사람의 마음을 깨끗게 해준다는 의미까지 함축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Clarke).

시인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정미하기에 자신이 이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앞선 상반절과 관련해 볼 때 본문의 표현은 보다 생생하고 실제적이다.

마치 사람이 뜨거운 도가니에서 정제된 금이나 은을 보고 기뻐하며 소중히 여기듯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 이는 말씀의 순수성 자체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의 순수성 을 증거해 준다.


 

💡 141-144절

  • 앞선 139,140절에서 시인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자신의 벅찬 열정을 토로하였다.
  • 이제 본절 이하 144절에서는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말씀 사랑의 열정을 토로하고 말씀에 대한 깨달옴을 간구한다. 먼저 본절에서 시인은 대적이 말씀을 잊어버렸으나(139절) 자신은 말씀을 잊지 아니하였음을 밝힌다.
    → 시인이 비록 여러 가지 환난으로 고통을 당하며 지쳐 있었음에도 계속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다.
    → 그랬기에 그는 악인들에게 더 많은 멸시를 받았을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을 순전하고 신실하게 섬기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할지라도,
    •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한결같온 경외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 아니 오히려 그러한 멸시와 고난이 점점 더 거세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견고히 붙든다.
  • 이 땅에서의 보상을 바라지 않고,
    가난하든지 위태하든지 죽옴을 당하든지 비방을 당하든지,
    계속해서 피곤치 않은 걸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길을 굳건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멸시와 조롱 중의 간구(시편 119:141)

1. 다윗은 여기에서 경건하지만 미천한 자로 나타났다.

그는 영광받기를 기뻐하는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자신이 볼 때나 다른 사람들이 볼 때나 "미천하고 멸시를 당하는" 자였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자였다. 인간의 진정한 탁월성을 항상 멸시를 면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것은 때때로 다른 사람의 조롱에 노출되며 항상 저희의 눈에 멸시당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다.'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이 그의 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통속적인 것이 되어왔다.


💡 ‘미천하여’

  1. 첫째, 시인은 인생 경험을 많이 한 사람으로 성숙한 신앙 인격을 지니고 있으며 사람들 앞에서도 존경과 찬사를 받는 사람이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취해야 할 바 겸손한 자세를 나타내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둘째,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악인들의 공격을 처지에 떨어진 것을 나타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2.다윗이 미천했지만 경건했고 그의 강직하고 열심있는 경건성 때문에 "미천하게 멸시를 당하나" 그의 양심은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다"고 증언할 수 있다.

그는 종교가 그로 하여금 경멸당하게 했지만 그의 종교를 버리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그의 지조를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할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법도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는 미천한 상황의 압력 하에서도 하나님의 법도가 우리를 도와 줄 것을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과 진리(시편 119:142)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관찰해 보자.

1. 하나님의 말씀은 "외롭다"는 사실과 그것은 "영원한 의"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의 규범이다. 그것은 영원부터 그의 뜻에 일치하며 영원까지 그의 판결에로 향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심판할 것이며 그것은 우리를 정의 가운데서 심판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되어질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의(義)요, 의의 표준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커다란 존경으로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상벌에 있어서 영원하다.

2. 하나님의 말씀은 법이며 그 법은 진리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하는 두 가지의 의무를 보자.

  • 우리는 이성을 가진 피조물이요 따라서 신민임으로 우리의 창조자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할 것이다. 그가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의 법으로서 복종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의무가 얼마나 왜곡되었으며 이러한 인간의 상태가 얼마나 뒤틀렸는지를 보자. 전인(全人)의 동작을 가르쳐 주고 가장 높은 데에서 진리는 깨우쳐진다.
  • 그러나 권위가 육체를 통해서 약해지지 않도록 그 뜻을 속박하는 법이 여기 있으며 그것을 복종에로 가져다 주는 법이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은 진리이다"(요 18:37). 확실히 우리는 그러한 말씀을 이렇게 따로 분리시킬 수 없다.

●고난 중의 즐거움(시편 119:143,144)


 💡 119: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 앞선 14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의의 견고함과 확고함을 노래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의 구원하심파 은혜로우심, 당신의 백성둘을 의로 이끄심이 걸코 변함이 없는 확고한 전리엄을 노래하였다. 이에 이어지는 본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처한 암울하고 고통스런 상황을 ‘환난과 우환'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한다.
  • 그러나 이는 자신의 형편을 탄식하고 원망하기 위해 내뱉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본문은 앞선 142절에서 말한 바를 시인 개인의 삶을 통해 더욱 실증적으로 확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구절은 앞에 나온 두 구절의 반복으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으나 좀 더 발전되어 있다.

1. 다윗은 그가 겪은 많은 곤경과 낙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그의 의무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을 다시 고백하고 있다.

그는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한다"고 말했지만 "나의 의무를 고수하겠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는 이 세상이 그를 그렇게 대하는 한 자신이 미천할 뿐만 아니라 가련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나이다" 환난이 없으면 우환이 닥쳤다. 그것들이 그를 놀라게 했고 그를 움켜쥐었고 그를 붙잡았다. 슬픔은 종종 많은 성도들이 고뇌에 쌓인 이 세상에서 당하는 일이다. 환난과 우환은 "많은 시험을 통한 무기력 속에"있다.

그는 앞에서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서 그의 불변성을 한층 더 높게 표현한다. "그러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이러한 모든 환난과 우환이 그의 입을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위로에 대한 경험에서 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현재당하는 모든 재난이 그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성도들이 환난과 우환 중에 있을 때 자주 가장 좋은 즐거움을 가졌던 즐거움과 많은 종류의 즐거움이 있다(고후 1:5)


💡 그가 하나님의 계명의 어떤 면모 때문에 이처럼 기뻐할 수 있었는가?

  • 그것은 그가 앞선 142절에서도 밝힌 것처럼 하나님의 의, 곧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의로운 자로 드러나게 하설 것이란 계획과 뜻이 너무나 확고하고 변함없으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 이러한 믿음
    • 대적들의 어떤 핍박과 공격, 자기 주번 상황의 모든 어려움을 초극케 하였을 것이다

2. 그는 앞에서와 같이(142절)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한 의를 곤다.

"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로우시니' 변경될 수 없다. 그것이 그 힘으로 영혼에게 받아들여진다면 거기에는 영구적인 규칙, 즉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공평성과 영원성을 많이 그리고 자주 명상해야 할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결론을 짓기 위하여 부언하고 있다.

(1) 은총에 대한 그의 기도가 있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자들은 더욱 더 알기를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더욱 더 알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더욱 더 계시를 주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내게 더욱 더 깨달음을 주소서"하고 말한다. 우리는 계시된 것을 깨닫기를 원해야 하며 우리가 아는 것을 더욱 더 잘 알기를 갈망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알기 위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2) 영광에 대한 그의 희망이 있다.

내게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을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살리이다." 내가 영원까지 살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리이다. 그리고 현재에 그것을 전망(展望)하면서 위로를 받을 것이니이다. "영생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 119: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만 깨달을 수 있다.
  •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이 전제되어야만 바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시인의 성숙한 신앙적 인식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