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0월 22일 화요일 묵상구절 사17:1-11 <여호와께서 에브라임과 다메섹을 멸하시리라>

Jeehyun 2024. 10. 22. 09:19

맥체인성경읽기

열왕기하 3, 데살로니가후서 3, 다니엘 7, 시편 114, 115

묵상구절

북이스라엘과 동맹국이었던 아람의 수도 다메섹의 멸망 예언

(병행문단, 렘49:23-27)

17:1 <여호와께서 에브라임과 다메섹을 멸하시리라>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17:2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17:3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북이스라엘의 패망과 은혜로 남겨진 소수의 남은 자에 대한 예언

(병행문단, 사9:8-10:4; 28:1-6; 대조문단, 왕하17:1-41)

17:4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17:5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의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17:6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7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17:8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17:9 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17:10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도다

17:11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서론1 : 1~3절

📖  서론2 : 4-11절


아람과 이스라엘의 운명 (이사야 17:1-5)

여기에는 다메섹에 관한 경고가 있다. 갈대아 의역본은 "다메섹이 마셔야 할 저주의 잔에 관한 경고"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동맹을 맺고 있는 이스라엘 왕국은 다가오는 이 공포의 잔을 다메섹도 마시게 될 것을 예상해야 한다.

1.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 자체가 멸망되어야 한다.

그 집들이 타버릴 것이며, 적어도 그 벽 문들이 그렇게 타버릴 것이다. 그리고 요새가 훼파되고 거민이 포로로 잡혀 갈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당분간 "성읍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촌락으로 뿐만 아니라 "무너진 무더기로" 화할 것이다(1절). 죄는 성읍들을 이처럼 황폐케 한다.

💡17:1 <여호와께서 에브라임과 다메섹을 멸하시리라>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2. 촌락들은 침입자들로 인해 놀라거나 강제로 쫓겨난 그 거민들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아로엘의 성읍들(아람의 시골은 그렇게 불리운다) 이 "버림을 당한다" (2절). 정복당한 자들은 감히 그 땅에 거하려 하지 않으며, 정복자들은 그 성읍들이 필요하지 않으나, 성읍들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변덕심으로 인해서 그것들을 빼앗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살아야 할 장소는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방해하거나 쫓아내는 자가 없을 것이다. 위엄 있는 집들이 양우리로 바뀐다. 그 큰 정복자들은 그들 자신이 인류의 공동적이 되는 것에서 긍지를 갖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불의할지라도, 하나님은 죄악으로써 스스로를 타락시킨 그 거민들을 그들의 성읍에서 쫓아내시는 일에서도 의로우시다. 하나님과 선을 공공연하게 대적하는 자들이 잠복해 있는 것보다는 "양이 거기에 눕는 것" 이 더 낫다.


💡17:2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3. 열지파 왕국, 이스라엘의 요새들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

"에브라임의 요새가 멸절하며" (3절), 사마리아에 있는 요새와 그 밖의 모든 요새들도 멸절하리라. 그들은 매우 부당하게도 아람과 연합하여 유다를 쳤다. 그리고 이제 죄의 동지였던 자들은 마땅히 멸망의 동지가 되어야 했다. "에브라임의 요새가 멸절하여" 이스라엘이 약해질 때, 다메섹도 멸절될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아람은 멸망할 것이다.

아람 사람들이 유대를 치려고 공무한 주동자였으므로, 제일 첫번째로, 그리고 가장 쓰라리게 처벌받는다.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과 제휴한 것을 자랑했었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이 연약해지자 그들은 그 자랑한 것에 대해 책망당한다. "아람의 남은 백성이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같이 되리라. 즉 남게 된 소수의 아람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처럼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상태가 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영광은 그들에게 위로나 덕망이 되지 못할 것이다.

죄악된 동맹은, 동맹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그들에게 힘이나 지주가 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야곱과 다투시면, 야곱의 영광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자. 또한 아람이 야곱의 영광을 닮아간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자.


💡17:3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 야곱의 영광은 폐병 걸린 사람처럼 쇠약해진다(4절).

"야곱의 영광은" 그들의 수효가 바다의 모래처럼 무수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소수만이 남을 때, 이 영광은 "쇠할"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을 교만하고 든든하게 만들었던 그 살찐 몸이 "파리할" 것이며, 그 백성의 몸은 가죽과 뼈밖에 없는 완전한 해골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고질병으로 죽었다. 열지파 왕국은 서서히 쇠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좀과 같았다" (호 5:12). 이 세상 영화는 모두 그러하다. 그것은 곧 시들고 쇠한다.

그러나 이러한 쇠퇴에 지배되지 않는 야곱의 영적 후손들을 위해서 지극히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이 - 결코 "파리해" 지지 않을 하나님의 집의 풍요함이 마련되어 있다.


💡17:4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2) 농부가 밭에서 곡식을 운반하듯이, 앗수르 군대가 그 영광을 모두 모아서 운반해 갈 것이다(5절).

곡식은 밭의 영광이다(시 65:13). 그러나 그것이 익자마자 사라진다면, 그 영광은 어디에 있는가? 그 백성은 그들의 죄로 인해 그들 스스로의 멸망을 무르익게 했고, 그들의 영광은, 곡식이 농부에 의해 밭에서 옮겨지듯이 빨리, 쉽사리, 당연히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없어졌다. 하나님의 심판은 "곡식이 익었을 때, 낫을 휘두르는" 것과 비교되고 있다(계 14:15). 그리고 그 승리한 군대는 정성스러운 농부가 훌륭한 곡식이 자라나는 르바임 골짜기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될 수 있는 한 이삭 하나도 남겨두지 않으려 할 것이며, 그들의 수중에 있는 것은 하나도 잃어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17:5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의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멸망 속의 긍휼 (이사야 17:6-8)

여기에서 열 지파 왕국에 내리는 일반적 멸망을 피하게 될 남은 자들을 위해, 심판의 예언 한 가운데 삽입구처럼 긍휼이 보유되어 있다. 비록 앗수르 사람들이 아무도 그 그물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온갖 주의를 기울인다 하더라도, 땅의 온유한 자들은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감추어지고, 그들이 유다 땅으로 은거하여 거기에서 하나님의 전 뜰에 들어갈 자유를 얻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보존케 했고 또 마음 편케 했다.

1. 그들은 지극히 소수의 남은 자들, 보존되도록 정해진 극소수의 사람들이 될 것이다(6절).

"주울 것이 남으리라" 고 했다. 백성들의 대다수가 포로로 잡혀갔으나, 여기 저기에 한 사람씩, 아마도 자리에 누워 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할 때 다른 한 사람이 남아있었다(눅 17:34).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심판이라 할지라도 저 마지막 심판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 심판은 우주적이요, 피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가장 타락한 시대에도 자기의 순결을 지키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큰 재앙의 때에도 일부의 사람들은 안전케 보존된다. 그러나 피신한 자들이 소수라는 것은 대다수가 포로가 될 것을 의미한다. 남아있는 자들이란, 주인이 감람나무를 정성스럽게 흔들 때 거기에 남아 있는 빈약한 실과와 같을 뿐이다. 만일 "가장 높은 꼭대기(그것을 흔드는 자가 도달할 수 없는)에 실과 이 삼개" 가 남았다면, 그것이 전부이다. "은총의 정하심에 따라 남은 자들" 도 역시 그러하다. 즉 넓은 길로 가는 다수의 무리에 비해 극소수이다.


💡17:6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 그들은 성별된 남은 자가 될 것이다(7, 8절).

보존된 이 소수의 사람들은 심판이 다가오는 것을 예기하여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들의 삶을 바로 잡은 그런 자들이요, 또한 피신하여 이방 나라의 망명자가 되었으므로, 일부는 그들이 구원된 그 뛰어난 긍휼을 깨달음으로써, 그리고 일부는 그들이 아직도 처해 있는 그 환란에 의해서 각성하고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이다.

(1) 그들은 그들의 창조주를 쳐다 볼 것이며,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곧 이처럼 환난의 밤에, 노래하게 하시는 이가 어디계신가? 를 물을 것이다(욥 35:10, 11). 그들은 그들에 관한 이 모든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롭고 쓰라린 손을 깨달을 것이며, 그의 손에 복종할 것이다. 그들은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것이며 그의 섭리에 훌륭히 감동될 것이다. 그들은 그로부터 위로와 구조를 기대하고 그들을 도와주시도록 그를 의지할 것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바람같이" 그들의 "눈이" 그를 "바랄" 것이다(시 123:2). 하나님을 바라는 것, 우리를 지으신 자(우리의 존재를 부여하신 장본인이며 천지 만물의 하나님)로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우리와 언약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으로서의 그에게 항상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언제나 우리가 해야할 의무이다. 특히 우리는 환란 중에 있을 때, "우리의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우리의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하도록 해야 한다(시 25:15). 우리는 이것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의 섭리의 계획(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이기 때문이다)이며 그의 은혜의 역사(그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기 때문이다)이다.


💡17:7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2)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 곧 자기들의 공상이 만들어낸 창조물에서 시선을 뗄 것이다. 더 이상 그것을 숭배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에게 구하거나 그것으로부터의 위안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홀로 앙망함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 자신이 전혀 앙망함을 얻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신다.

자기를 지으신 자를 바라보는 자는 "자기 손으로 만든 단" 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은 부인하고 던져 버려야 한다.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것" 을 조금도 숭앙해서는 안 된다. 비록 자기가 만든 작품 곧 "숲과 상(像)" (한글개역:" 아세라와 태양상")은 산산히 깨뜨려야 한다. 그 말의 원어는 태양을 위해 만든 상을 의미하며 사람들은 그런 상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 태양 상을 섬기는 것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그럴듯한 우상숭배였던 것이다(신 4:19; 욥 31:26). 우리로 죄를 떠나게 만드는 고생은 행복한 고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 고생을 통해서 거대한 우상인 이 세상에서 헛됨을 실감하게 되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애착을 저하시키고, 거기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저하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17:8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이스라엘과 앗수르의 운명 (이사야 17:9-11)

여기에서 그 예언자는 앗수르 군대에 의해 이스라엘 땅에 임할 참상에 대해 다시 예고하고 있다.

1. 그 성읍들이 버림을 당한 것이다.

그 나라를 보호해야 할 요새까지도 자체를 방어할 능력이 없게 될 것이다. 이미 썩어들어가 나뭇잎이 떨어지고, 그 꼭대기만 뎅그랗게 메말라 죽은 채로 드러난 늙은 나무의 "버림받은 가지와 꼭대기 가지(한글 개역과는 다름 - 역주)가 될 것이다" 라고 했다(9절). 거민들이 떠나고, 승전한 적군이 짓밟아 버릴때, 그 견고하던 성읍들의 모습은 바로 그렇게 보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권능의 손으로 인도하시어, 그 좋은 땅과 그들이 건축하지 않은 성읍들을 소유하게 하셨을 때, 그 땅의 원주민 가나안 사람들이 버렸던 성읍처럼 그들의 견고한 성읍이 변화될 것이다(라고 보충할 수 있다). 그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했던 것처럼 이제 이스라엘은 앗수르 사람들 앞에서 도망할 것이다. 이로써, 이스라엘이 가나안인들과 똑같이 가증한 죄를 범하면, "그 땅이 그들의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그들을 토해낼" 것이며(레 18:28), 하나님께서 한편이 되시는 한은 "그들의 하나가 천 명을 쫓아 낼" 것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할 때는 "한 사람이 꾸짖은 즉 그들 천 사람이 도망치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 성읍은 율법 속에 있는 경고대로 폐허가 될 수밖에 없었다(레 26:31; 신 28:52).


💡17:9 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2. 그 나라는 황폐케 될 것이다(10, 11절).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영화로운 땅에 이처럼 큰 멸망을 내리도록 격동시킨 죄를 보자.

그 멸망은 "거기에 거한 자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그것은 네가 자기 구원의 하나님과 그가 너를 위해 역사하신 모든 큰 구원을 잊어버린 까닭이다. 너는 그를 의지해야 하며, 그에게 대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자기의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은 까닭이다. 그는 친히 강한 반석이 되실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네 능력이 되어 오셨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미 오래 전에 침몰하여 파괴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은 우리의 힘의 반석이시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우리가 그를 잊고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죄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에 우리의 길을 굽게 했고," 그렇게 하여 우리 자신을 망치게 된다.


 💡17:10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도다


(2) 그들이 자기들의 땅을 개량하여 더욱 쾌적하게 만들려고 애쓴 그 결과가 오히려 그 파멸을 더욱 가혹하게 했다.

[1] 파종기의 그 땅을 살펴보라.

그 땅은 한결같은 동산이요 포도원이었다. 그 아름다운 땅은 그 기뻐하는 식물로, 그 소산의 가장 좋은 것으로 가득찼었다. 아니, 그 거민들은 매우 까다롭고 호기심이 강해서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방의 가지를 얻기 위해 모든 이웃 나라에 사람을 보냈다. 그들에게는 비록 이웃 나라의 품종보다 못하지 않은 품종이 있었지만, 이웃 나라의 것은 특이하고 흔하지 않으며 멀리서 귀하게 자려왔기 때문에 더욱 귀중했다. 이것은 그들의 교만과 허영심, 그리고 감정이 "열방과 같다" 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이것이 멸망을 가져온 결정적 잘못이다). "넬과 꿀과 기름" 은 그들의 주요 상품이었다(겔 27:17).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 만족하지 않고서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이상한 이름을 가진 꽂과 식물들을 수입해야 했고, 온실을 만들어서 그 식물들이 자라도록 큰 관심과 수고를 기울여야 했다. 촉성 지배를 했고, 또 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로 덮어야 했다. 그리고 정원사는 그 씨가 그들 이웃의 것보다 빨리 발육하도록 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자연의 장식물들은 무엇이나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하지만 그것에 필요 이상의 시간과 비용과 정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들이 매우 부지런히 경작하고, 그에 따라서 그것에 대해 큰 기대를 가졌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식물이 자라 무성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2] 추수기의 그 땅을 설펴보라. 모두 광야와 같아서, 그 주인에게는 물론이요 보는 자들에까지도 암담하고 우울한 장소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모두 뒤범벅이 되어 "쓰레기 더미" 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추수기는 기쁨의 시기, 노래와 즐거운 소리의 시기가 되곤 했었다(16:10). 그러나 그 추수한 것을 주린자가 먹는다(욥 5:5). 따라서 그 날은 근심의 날이 된다. 그리고 그 식물이 훌륭하고 값진 것이었으며(10절), 그들의 기대도 그것에 비례하여 컸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슬픈 날이 된다. 농작물이 흉작이고 날씨가 불순했을 때는, 때로 추수기가 근심의 날이 되곤 했었다. 그럴지라도 그러한 경우에도 다음 해에는 나오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심한 슬픔의 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금년의 농산물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토질이 바꾸어지고, 그들의 정복자가 그 주인이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난 외에는 본문(11절)이 이렇게 있었다. 즉 "기업의 날(네가 그것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생각한 때)에 농작물이 (대적의 나라나 진영으로 신 28:33) 옮겨질 것이며, 치명적인 슬픔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처럼 빨리 약탈당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보물이라고 쌓아 두어서는 안되고, 우리는 결코 빼앗기지 않을 유익한 것들을 쌓아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17:11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