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6, 마태복음 6, 에스라 6, 사도행전 6
묵상구절
57:1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57:2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
57:3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아 너희는 가까이 오라
57:4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이 아니냐
57:5 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57:6 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들 중에 네 몫이 있으니 그것들이 곧 네가 제비 뽑아 얻은 것이라 또한 네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
57:7 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을 베풀었고 네가 또 거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
57:8 네가 또 네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네가 나를 떠나 벗고 올라가서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또 네가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여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으며
57:9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 네가 또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
57:10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쇠약하여지지 아니함이라
57:11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
57:12 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
57:13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의인의 죽음 (이사야 57:1,2)
바로 전 장 끝에서 선지자는 그들의 무지와 술주정 때문에 파수군들을 비난했다. 여기서 그는 자기 백성들의 전반적인 어리석음과 무감각함을 보여 주고 있다. 백성을 일깨워야 할 파수군들이 그러할 때 백성들이 무사려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을 주시할 수 있다.
📖57:1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Ⅰ. 하나님의 섭리는 선한 사람들을 이 세상 밖으로 속히 옮기신다.
이 세상에서 "의인" 은 "망한다" ("죽는다"). 그들은 사라지고, 그들의 처소도 이 이상 더 그들을 알지 못한다. 경건하다 해서 죽음을 면할 자는 아무도 없다. 아니, 가장 의로운 자가 박해 시대에는 가장 해를 입기 쉽다. 첫번째로 죽은 자는 무죄한 아벨이었다. 의는 사망의 쏘는 것에서는 구원받으나 사망의 치는 것으로부터는 구함을 입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완전히 옮겨가기 때문에 "망한다" (한글 개역:" 죽는다")고 표현되고 있다. 의인이 죽으면 이 세상이 큰 손실을 입는다고들 한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 자신의 파멸이 아니라 그들이 쓸모있게 살던 그 장소의 피해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자비한 자들조차 취해감을 입는다." 자비한 자는 의인과 구별되는 선한 자들이다. 선인을 위해서는 "용감히 죽는 자가 가끔 있다" (롬 5:7). 그러나 살려둘래야 살려둘 수 없는 자들이 데려감을 당하는 경우는 드물다. 즉 열매 많은 나무는 죽음으로 절단되고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여전히 남아서 땅을 방해한다는 말이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왕왕 악인의 손으로 취해감을 입는다. 자비로운 사람은 선행을 많이 쌓는다. 그러나 그런 선행 때문에 그들은 돌에 맞아 죽는다. 아마도 바벨론 포로 이전에는 선한 자들의 죽음이 항용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선한 사람들이라고는 거의 남지 않았다(렘 5:1).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시 12:1).
Ⅱ. 무관심한 세상은 이런 신의 섭리를 경시하며 눈여겨 보지 않는다.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깨닫는 자도 없도다." 그것을 공공의 손실로 애통해 하거나 대중에게 대한 경고로 주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선한 사람의 죽음은 보통 사람의 죽음보다 더 골똘히 생각하고 심사숙고해야 할 재료이다. 이 경우 우리는 진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우리와 다투시는가? 그런 섭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선한 교훈은 무엇인가? 사라진 자들의 공백을 채우고 그 틈을 메꾸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런 사건을 마음에 두지 않으며 채찍의 소리를 듣지 못하며 징계의 의도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노하시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하물며 땅에 거하는 자들이 두 증인이 살해를 기뻐하였듯이(계 11:10), 이런 일을 기뻐할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겠는가? 선인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훌륭한 축복 중 하나이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이런 축복과 헤어진다는 것은 실로 그 축복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무사려함에 대한 증거이다. 작은 아이들은 자기 부모가 죽어도 슬퍼할줄 모른다. 이는 부모를 여의는 것이 어떤 손실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Ⅲ. 옮겨감을 당하는 의인의 행복.
📖57:2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
1.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는다."
재앙이 도래하기 전 아니, 재앙이 오고 있을 때 의인이 취해감을 입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다.
(1)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심.
이는 의인들이 재앙을 눈으로 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왕하 22:20). 즉 재앙을 휩쓸리거나 재앙으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대홍수가 닥아올 때 그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오도록 부름을 받으며 하늘 아래 도피처가 없을 때는 천국에서 피난처와 안식처를 얻게 된다.
(2) 세상에 대한 진노하심에서.
세상은 의인과 자비로운 자에게 온갖 피해를 입혔다. 의인이 취해감을 입는 것은 이들을 벌하기 위해서이다. 의인과 선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기 위해 그 틈바구니를 막고 있었다. 이런 자들이 치워지면 홍수밖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자기 사자들을 보내 오히려 국으로 소환하실 때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표시이다.
2. 의인과 자비로운 자는 재앙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빠져나가 평안을 누린다.
"의인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정로로 행하는 자" 이다. 그는 죽으면 "평안에 들어가 자기 침상에서 편히 쉰다."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정직한 중에 행하다가 죽을 때 히스기야처럼 "내가 행한것을 기억하옵소서" (왕하 20:3)라고 호소할 수 있는 자에게는 죽음이 이익이며 안식이며 축복이다.
(2) 정직을 바탕으로 사는 사람과 끝까지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죽어도 아무 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영혼은 평안으로 들어가며 평화의 세계에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평화가 완전해지고 아무 고통도 없는 세계이다. "너는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마 25:21). 그들의 몸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쉰다. 무덤은 모든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안식의 침상이 된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들은 거기서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된다(계 14:13). 그리고 그들이 피곤하면 할수록 그 안식은 그들에게 더욱 즐거울 것이 될 것이다(욥 3:17). 이 침상은 흑암 중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이 침상은 더욱 고요하다. 그 침상은 부활의 아침에 상쾌하게 일어날 침대이다.
●백성에게 대한 질책 (이사야 57:3-12)
Ⅰ. 여기에는 그들의 일반적 특징, 또는 명칭과 칭호가 규탄되고 있다(3절).
그들은 가까이 와서 고소 내용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은 법정에 회부되어 거기서 무녀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씨라고 기소당한다. 즉 그들은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고 그런 인간이 될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도 그랬다. 간음과 무속(무속)은 죄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악마와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순종의 자식들" 이었다. "오라, 이리로 가까이 오라. 그러면 나는 네게 네 파멸을 알려 주겠다. 즉 의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평안과 안식을 가져오지만 너희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겠다. 너희는 패역의 자식이며 궤휼의 종류다(4절). 너희는 천성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뒷걸음질치며 너희 본성안에는 하나님께 대한 배반심이 들어 있다(사 48:8)" 고 선지자는 말한다.
📖57:3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아 너희는 가까이 오라
Ⅱ. 힐난받은 그들의 구체적 범죄.
1.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조소.
그들은 조롱하는 세대였다.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4절) 너희는 너희 조롱이 불쌍한 선지자들에 대한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그들을 멸시하며 짓밟는다. 그러나 너희는 실제로는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언을 대신 전하는 자들인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들을 조롱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죄의 양을 채우는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행한 것을 곧 자기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 때문에 책망받고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았을 때 극히 무례하고 꼴사나운 몸짓이나 경멸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조소했다. 그들은 마땅히 진지해지고 겸손해져야 할 말씀을 희롱의 대상으로 삼고 낄낄대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예언자들 앞에서 입을 삐죽거렸고 모든 선한 훈육의 법을 반대하여 혀를 낼름거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반집 하인이 심부름을 와도 이 보다는 더 융숭하게 맞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자들은 그토록 무례한 행동이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마땅했다.
📖57:4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이 아니냐
2. 우상 숭배.
이것은 유대 민족이 포로 전에 범한 가장 악명높은 죄였다. 그러나 그들의 우상 숭배는 바벨론 포로라는 환난으로 인해 치유되었다. 이사야 시대에는 우상 숭배가 만연했다. 아하스(혹자는 여기서 언급하는 것이 바로 아하스의 죄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와 므낫세의 가증스런 우상 숭배가 그 증거이다.
(1) 그들은 주착없이 자기들의 우상을 좋아했으며 불법적이고 부자연스런 음욕으로 불타오르던 자들처럼(롬 1:27) 우상에 대해 음욕을 피웠다.
그들은 "우상에 미쳤다" (렘 50:38). 그들은 "단 주위에서 뛰놀며 그 몸을 스스로 상하던 바알의 선지들" 처럼 (왕상 18:26, 28) 우상 숭배에 대한 격정으로 몸이 불타 올랐던 것이다. 사악한 타락심은 만족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더 불타 오른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들은 "모든 푸른나무 아래에서," 야외에서, 그리고 그늘진 곳에서 자기들의 우상을 숭배했다. 그러나 그곳도 그들의 격렬한 욕망의 열기를 식혀 주지 못했고 도리어 푸른 나무의 아름다운 매력은 그들로 하여금 거기서 숭배하는 우상을 더 좋아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본성 속의 쾌락하는 마음은 그들을 자연의 하나님께로 이끌기는 커녕 도리어 그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끌어내었다. 거짓된 신들을 숭배하는 그들의 열정의 불꽃은 진실한 하나님을 숭배하는 우리의 냉냉함과 무관심을 부끄럽게 해 준다. 그들은 스스로를 불붙이기 위해 애를 썼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산란시키며 냉담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 숭배에 있어 야만스럽고 천륜에 어긋나며 잔인했다. 그들은 자식들을 죽여서 우상 앞에 희생 제물로 바쳤다.
그들은 기괴한 우상 숭배의 총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한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방한 다른 골짜기에서, 그리고 "바위 틈에서," 어두움의 일에 가장 어울리는 어둡고 외떨어진 곳에서 자녀를 죽였다.
📖57:5 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3) 그들의 우상 숭배는 풍성하였고 만족을 모를 정도였다.
그들은 아무리 많은 우상이 있어도 오히려 모자란다고 생각하며 우상에게 대한 봉사나 경비를 족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리아인들은 한 때 이스라엘의 신은 작은 산들의 신이지 "골짜기의 신" 은 아니라는 생각을 품은 적이 있었다(왕상 20:28). 그러나 이들 우상 숭배자들은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 산의 신이나 골짜기의 신을 다 섬겼다.
[1] 그들은 골짜기의 신을 가졌다. 그래서 물가의 낮은 장소에서 우상을 숭배했다. "골짜기 또는 시내 가운데 매끄러운 돌중에 너희의 소득이 있다" (6절).
만약 그들이 매끄럽게 새겨진 돌을 본다면 그것이 단지 이정표나 단순한 돌로 세워져 있을지라도 기꺼이 그것을 숭배하려고 했다. 그들은 돌 많은 골짜기에 자기들의 신들을 세우고 그것을 "자기들의 소득" (원의:몫, 분깃)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분깃과 제비뽑아 얻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돌 신들은 실제로 그들 가까이에 세워져 있는 시냇가의 "매끄러운 돌들" 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위해 보다 좋은 소득도 제비뽑아 얻은 것도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너희가 제비뽑아 얻은 것이다. 너희는 그것을 의뢰하며 기뻐한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가 제비뽑아 얻은 것으로 인해 그 소득을 잃게 될 것이며 너희 형편은 무참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예루살렘의 보석과 대제사장의 에봇을 분배받을 수 있을 때 시냇가의 매끄러운 돌을 취하는 죄인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그들은 이런 우상들을 자기들의 소득과 분깃으로 취한 뒤 어떤 비용도 아끼지 않고 그들을 섬긴다. "너희는 마치 그것들이 너희에게 먹고 마시는 것을 제공하기라도 한듯 전제와 소제를 그것들에게 드렸다." 그들은 우상들을 자기 자식들보다 더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상의 제단을 채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식탁마저 약탈했던 때문이다.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을 우리의 분깃으로 삼고 있는가? 그는 우리의 소득이요, 기업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처럼 먹고 마시는 것을 폐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말고 그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심으로써 그를 섬기자. 여기에는 그들의 이러한 사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하신 분노의 표현이 나온다. "내가 어찌 이를 용인하겠느냐?" "내가 어찌" 이런 백성에게서 "위로를 얻겠느냐?" (흠정역) 이와 같이 자신이 주신 선물로 바알을 경배하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이 즐거움을 얻으시며 그들의 헌물을 용납하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신실한 백성들에게서 위로를 받으신다. 그러나 세상의 우상 숭배를 쳐서 증거해야 마땅할 사람들 자신이 우상 숭배에 폭 빠져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어찌 위로를 받으시겠는가? 혹자는 "내가 어찌 이들을 긍휼히 여기겠느냐?" 고 해석하며 또 다른 이들은 '내가 이들에 대해 스스로 후회해야 하겠는가?" 고 해독하기도 한다. "그들이 이처럼 나를 격분시키면서 내가 그들을 살려 주며 징벌을 연기하거나 경감시킬 줄로 기대할 수 있는가?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느냐?" (렘 5:7, 9)
📖57:6 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들 중에 네 몫이 있으니 그것들이 곧 네가 제비 뽑아 얻은 것이라 또한 네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
[2] 그들은 산의 신들도 역시 가졌다(7절).
"네가 (높고 거룩한 자와 직접경쟁하기라도 하려는듯이, 15절 참조)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 곧 네 우상 네 우상의 신전과 제단, 네 음란한 침상을 베풀었고 거기서 온갖 방종함으로 영적 간음을 하였으며 우상에 대한 사련으로 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직접 위반하였다. 그것은 산 위에 있었지만 너희는 아주 기꺼이 그리로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이것은 그들이 우상 숭배함에 있어서 도달한 뻔뻔스러움을 나타낸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들이 골짜기나 어두컴컴한 장소에서 우상들을 숭배할 때 약간의 수치감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런 느낌을 정복했고 우뚝솟은 산 위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힐 수도 없었다.
📖57:7 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을 베풀었고 네가 또 거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
[3] 그들은 이것들로 만족하지 않았는지 집안 신들, 즉 lares와 Penates(로마 신화에서 가정의 수호신:역주)도 두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비망록처럼 기록해 두어야 할 문과 문설주에 우상의 기념표를 세워두었다(8절).
이것은 자기들이 우상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기 보다(그들은 우상을 너무나 좋아하여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자기들이 그 우상들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남들에게 과시하고 자기 자식들로 하여금 그 우상들을 잊지 않게 하며 똥더미 신들에게 대한 존경심으로 이들을 소유하기 위해서였다.
📖57:8 네가 또 네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네가 나를 떠나 벗고 올라가서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또 네가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여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으며
[4] 그들은 우상 숭배에 지칠 줄을 모르고 만족을 몰랐듯이 우상으로부터 분리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악행으로 마음이 강팍해졌다.
그들은 우상 숭배의 죄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 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처럼 중인 환시리에 공공연하게 우상을 숭배했다. 그들은 과거 하나님의 전으로 갈 때처럼 공공연하게 그리고 큰 무리를 이루어 우상의 신전으로 향했다. 참 신앙을 외면하고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이 행위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자를 위하여 몸을 드러내는 뻔뻔스런 창기" 와 같았다. 그들은 우사에게 개종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스스로 높은 곳으로 올라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침상 즉 우상 신전을 넓히기까지 했다." "네가 네 스스로를 위해 그들의 것보다 더 크게 그것을 찍어 만들었느니라" (흠정역의 난 외주에는 그렇게 되어 있음). 그들은 아하스가 다메섹에서 단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듯이(왕하 16:10) 그들의 것에서 본따서 단을 만들었다. 그들은 이토록 우상 숭배에 홀딱 빠져 있었으므로 우상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에브라임음 맹약과 사랑으로 우상과 연합되어 있었다.
- 첫째, 그들은 우상과 맹약했다.
- "네가 그들과 언약하며 우상이나 우상 숭배자들과 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며 하나님께로부터의 배신을 계속 고수하겠다는 맹세요 결심이었다.
- 둘째, 그들은 사랑으로 우상과 결합하였다.
- "너는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였다. 즉 너는 어디서 보든지간에 우상의 신전이라면 다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마음의 정욕에 몰두하는 것은 당연하다.
3. 그들이 책망받고 있는 또 다른 죄는 외국의 도움과 원조를 믿고 찾으며 이방의 강대국과 수교를 맺는다는 것이었다. "네가 왕에게 나아갔다" (9절).
혹자는 이것을 그들이 섬겼던 우상, 특히 '몰렉" 으로 이해한다. 몰렉이란 말은 '왕'을 의미한다. "너는 그 우상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슨 짓도 서슴치 않았고 그들의 제단에 향과 향기로운 기름을 받쳤다." 아니면 이것은 아하스가 자기 궁전으로 데려갔던 앗시리아 왕이나 히스기야 왕이 그의 사신을 달랬던 바벨론 왕을 의미할런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열방의 왕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열방의 우상 숭배에 감탄하고 그들의 우상 숭배를 배우고 모방하기가 소원이었다. 그래서 이를 위해 그 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왕래하여 수고하고 그들에 대한 지식을 증진시키고자 하였다. 그들은 열방의 동맹함으로써 그들과 같아지고 강대해지고자 하였다.
📖57:9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 네가 또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
(1) 그들이 이 웅대한 동맹을 형성하고 획득하는 데 얼마나 비용이 들었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기름과 향품을 가지고" 갔다. 그들은 자기들의 얼굴을 아름답게 꾸며서 극히 큰 왕의 우호를 살만큼 대단한 존재를 보이도록하려고 이 기름과 향품을 자신의 몸에 발랐거나 아니면 그들의 총애를 얻기 위해 선물로 바쳤을 것이다. 그들은 큰 왕의 은총을 탐했다. 선물은 인간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며 위인들 앞으로 인도해 준다. "처음으로 실시하는 값비싼 향품이 너무 약소하게 생각되었을 때 너는 향품을 더욱 더 하였도다." 이와 같이 결국 모든 사람의 판단이 하나님께로서 나온다는 것을 잊고 통치자의 은총을 구하는 자가 많다. 그들은 이방 군주들을 너무나 좋아하여 온갖 모양을 내고 인접국가의 왕들에게 직접 갔을 뿐만 아니라 아주 멀리있는 나라의 왕들에게는 사신을 보냈던 것이다(사 18:2).
(2) 그들은 이로써 스스로를 아주 비하시켰으며 자기 왕권과 국가의 명예를 티끌 속에 묻어버린 셈이다(9절). "네가 음부까지 스스로 낮추었도다." 그들은 우상 숭배로 자신을 비하시켰었다. 자기 공상의 피조물이요 자기 손의 산물인 우상을 신으로 경배하며 나무 둥걸에 절한다는 것은 이성을 부여받은 인간의 자녀로서 불명예스런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적 계시의 특권을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헛 것과 바꾸며 자비를 거짓된 허영과 바꾼다는 것은 더 더욱 수치스런 일이다. 그들은 자기들과 언약을 맺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방 여러 나라를 존중하고 의지함으로써 자신을 비하시켰다. 터진 웅덩이 때문에 생명의 샘을 버렸고 상한 갈대 때문에 만세 반석을 버린 자들의 수치는 최고로 높지 않을 수 없고 최저로 낮지 않을 수 없다. 죄인은 스스로를 욕되게 하고 낮추는 자임을 명심하자. 죄에 대한 봉사는 불명예스러운 노예 생활이다. 이렇게 음부까지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들은 응당 자기들의 몫을 거기서 받을 것이다.
Ⅱ. 그들의 죄를 가중시키는 것들.
1. 그들은 사악한 길에 있는 동안 실망하여 피곤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하도다(10절). 너는 무익하고 거짓된 것에서 진실한 만족과 행복을 찾아내려는 터무니 없는 일에 착수했다. 예배 대상으로 하나님대신 우상을 세우며 희망과 신뢰의 대상으로 하나님 대신 군주를 세우고도 보다 나아지고 편안해질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아주 먼 길로 돌아가며 결국 목적지까지 이르지 못할 자들이다. "네가 길이 많아서 피곤하도다" (혹자는 그렇게 해독하기도 한다). 유일한 정도를 버리는 자들은 수천 개의 갈래 길에서 무한히 방황하며 자기들이 찾아낸 여러 가지 발견들 속에서 스스로를 상실한다. 그들은 새로운 추구와 맹렬한 추적으로 스스로 지친다. 그들은 "문을 찾느라고 곤비했다" (창 19:11). 소돔 사람들처럼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죄로 인한 즐거움은 곧 포만하여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죄스런 쾌락의 추구에 쉽사리 피로를 느낄지언정 그 쾌락의 향유 속에서 안식을 느낄 수는 없다. 그들은 이것을 경험으로써 발견했다. 그들이 자주 섬겼던 우상들은 그들에게 결코 어떤 친절도 베풀지 않았다. 그들이 환심을 사고자 했던 왕들이 그들을 돕기는 커녕 괴롭혔다.
그럼에도 그들은 비참하리만치 얼이 빠져서 "헛되다" (원의:" 소망이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가 이토록 자주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으니 피조물에게 대한 신뢰와 죄에 대한 봉사로부터 만족을 이 이상 기대한다는 것은 헛되다" 고 말하지 못했다. 피조물에게서 행복 얻기를 체념하고 죄에 대한 봉사로 만족 얻기를 단념하는 일은 올바른 행복과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첫 단계이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행복을 얻으려고 희망하며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계속하려고 결심하게 된다. 그것은 기초가 확실한 행복이요 만족이다. 피조물의 헛됨에 대하여 민감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창조주께로부터가 아니면 행복을 바랄 수 없다" 고 말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57:10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쇠약하여지지 아니함이라
2. 그들은 자기들의 길이 죄의 길임을 깨달았으나 그로써 감각의 쾌락과 세상적 이익을 다소 얻었으므로 스스로 그 길에 대해 섭섭히 여길 마음이 없었다.
"너는 네 손의 생명을(네 손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도다." 너는 행운이 네게 미소짓는다고 자랑한다. 그러므로 너는 에브라임이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도다(호 12:8)라고 하던 것처럼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도다." 죄중의 번영은 회개를 막는 큰 방해물이라는 데 주목하자. 죄많은 쾌락 중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며 죄많은 기획으로 재산을 불려나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은총을 베푸신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회개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혹자는 이것을 반어적으로 또는 의문 형식으로 해독한다. "네 힘은 조성되었고 너는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발견하였겠지?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쇠약하기는 커녕 네 악한 길로 스스로를 축복한다. 그러나 너의 소득을 한 번 더 음미하여 이익과 손해를 견주어 본 다음에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라. "너는 무슨 열매를 얻는가? 이들은 너희가 부끄러워하고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일임이니라" (롬 6:21 참조).
3.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써 하나님을 무가치하게 취급했었다.
📖57:11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
(1) 그들은 하나님께서 너무 엄위로우신 분이었으므로 하나님을 떠났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들은 보다 자유롭고 흉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신들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인해 놀랐기에 거짓을 행하는가?(11절) 너는 어째서 나를 거짓과 불충으로 다루었으며 나와 맺은 계약과 내게 하는 기도 가운데서조차 네 본심을 속였느냐? 내가 너를 놀라게 하여 쫓을 만한 일을 여지껏 행한 적이 있느냐? 네가 나를 거의 생각치 않고 보다 친절한 주인을 찾으러 갔는데 내가 그럴 만한 일을 네게 행한 적이 있는가?"
(2)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존중하지 않고 그를 진지하게 주시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인해 놀랐던가?(11절)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네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나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하나님께 자기 본심을 속이는 사람들은 그 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들이다. "너는 나를 생각지 않았다. 너는 내가 말한 것, 행한 것, 약속한 것, 위협한 것, 또 약속이나 경고의 성취 중 어느 것도 기억하지 않았다. 너는 네 마음 가운데 그것들을 두지 않았다. 만약에 네가 나를 두려워했다면 마땅히 이런 것을 마음에 두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의 마음속에 그분의 섭리를 간직하지 않는 사람들은 꼭 자기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로써 나타내는 셈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잊어버리고, 부주의함으로 파멸된 자는 부지기수이다. 그들은 두려워해야 옳을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선한 의도가 담긴 일을 기억하지 않고 마음에 두지도 않는다.
(3)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을 기화로 죄 가운데서 그들은 강팍해졌다. "나는 오랫동안 잠잠하지 않았느냐? 네가 이런 일을 행했지만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므로(여기에 나오듯)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치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앞으로도 결코 처벌하시지 않을 것처럼 그들은 말한다(전 8:11). 왜냐하면 그분이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죄인은 그를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고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Ⅲ. 하나님께서는 비록 오랫동안 참으셨지만 여기서 그들을 회개자리로 부르시겠다고 결심하신다.
"내가 너를 책망하겠다" (시 50:21)는 말씀처럼 "내가 너의 의를 보이리라" (12절). 너는 네 의를 자랑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네 의를 과시한다. 그러나 내가 네 자신도 당황하도록 네 의가 거짓이요, 사기요, 사이비라는 것을 보이리라. 의란 그와 같이 무엇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의가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이 의가 아닌 불의였으며 너의 모든 주장 속에는 성실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탄로될 것이다. 내가 "네 소위'를 보이리라. 네가 한 일이 무엇이며 그 일로 얻는 네 소득이 무엇인지 보이겠다. 결국 "네 소위가 네게" 아무런 유익도 줄 수 없으며 "무익하다" 는 것이 나타날 것이다. 죄스런 일을 흑암의 일이며 그 안에 의가 없는 일이듯 열매와 소득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유의하자. 지금은 어떻게 보이더라도 저 다른 날에는 그 본색이 드러날 것이다. 죄는 유익이 없다. 아니 그것은 파멸이요 파괴다.
📖57:12 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
●우상의 허무성 (이사야 57:13)
📖57:13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우상들과 피조물들이 예배자와 신뢰자를 구원하고 도와주기에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보여 준다(13절).
"네가 고통과 고뇌 중에 부르짖으며 너의 비참함을 슬퍼하고 도움을 구할 때 네 동무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네가 동무로 모은 우상들과 네가 크게 신뢰한 동맹군들로 할 수 있는 데까지 너를 구원하게 해보라. 그들이 주는 구원 이외에 달리는 기대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환난 중에 그에게 부르짖었을 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삿 10:14). 그러나 그것들에게서 바라는 구원은 헛되다. 그것은 다 바람에 떠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바람이다. 그 입의 기운은 악인을 살륙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겨와 같이 만들었다. 그러므로 바람은 물론 그들을 급히 불려가게 할 것이다. 그들은 헛된 존재이다. 그들은 "헛 것" (한글 개역:기운)에 불려갈 것이다. 그들은 헛 것으로 환원될 것이며 공허는 그들의 보상이 될 것이다. 우상과 우상을 섬기는 자는 모두가 무로 돌아갈 것이다.
Ⅳ.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신뢰하고 구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고 구원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당신께 있었음을 설명하신다. 다른 조력자에게서 위로를 구하던 자들의 희망이 좌절되고 하나님께 의뢰하던 자들의 희망은 결실을 맺음으로 하여 그들의 안전과 만족은 더욱 그 농도가 짙다. "나만 오직 나만을 의뢰하는 자는 영육간에 행복할 것이며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도 행복할 것이다."
1. 일반적 의미에서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세속적 이익을 획득하는 데 가장 좋은 길을 취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13절). 그들은 선하신 손길로부터 그것을 얻을 것이며 선한권리로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들은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시 37:3).
(2)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자들은 신성한 이익을 획득하는 데 가장 좋은 길을 취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13절). 그들은 세상에서 교회의 특권을 누릴 것이며 마침내는 천국의 즐거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떤 바람에도 불려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