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1월 7일 화요일 묵상구절 사57:14-21 <인도하고 고치겠다고 하신 약속>

Jeehyun 2025. 1. 8. 00:32

맥체인성경읽기

창세기 7, 마태복음 7, 에스라 7, 사도행전 7

묵상구절

57:14 <인도하고 고치겠다고 하신 약속> 그가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57:16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57:17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57:18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57:19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57:20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옥스퍼드 주석


📖서론


우상의 허무성 (이사야 57:13-16)

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우상들과 피조물들이 예배자와 신뢰자를 구원하고 도와주기에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보여 준다(13절).

"네가 고통과 고뇌 중에 부르짖으며 너의 비참함을 슬퍼하고 도움을 구할 때 네 동무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네가 동무로 모은 우상들과 네가 크게 신뢰한 동맹군들로 할 수 있는 데까지 너를 구원하게 해보라. 그들이 주는 구원 이외에 달리는 기대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환난 중에 그에게 부르짖었을 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삿 10:14). 그러나 그것들에게서 바라는 구원은 헛되다. 그것은 다 바람에 떠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바람이다. 그 입의 기운은 악인을 살륙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겨와 같이 만들었다. 그러므로 바람은 물론 그들을 급히 불려가게 할 것이다. 그들은 헛된 존재이다. 그들은 "헛 것" (한글 개역:기운)에 불려갈 것이다. 그들은 헛 것으로 환원될 것이며 공허는 그들의 보상이 될 것이다. 우상과 우상을 섬기는 자는 모두가 무로 돌아갈 것이다.

Ⅳ.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신뢰하고 구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고 구원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당신께 있었음을 설명하신다.

다른 조력자에게서 위로를 구하던 자들의 희망이 좌절되고 하나님께 의뢰하던 자들의 희망은 결실을 맺음으로 하여 그들의 안전과 만족은 더욱 그 농도가 짙다. "나만 오직 나만을 의뢰하는 자는 영육간에 행복할 것이며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도 행복할 것이다."

1. 일반적 의미에서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세속적 이익을 획득하는 데 가장 좋은 길을 취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13절). 그들은 선하신 손길로부터 그것을 얻을 것이며 선한권리로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들은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시 37:3).

(2)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자들은 신성한 이익을 획득하는 데 가장 좋은 길을 취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13절). 그들은 세상에서 교회의 특권을 누릴 것이며 마침내는 천국의 즐거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떤 바람에도 불려가지 않을 것이다.

2. 보다 구체적 의미에서 관찰해 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을 신뢰하는 포로들은 해방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즉 그 말씀의 사자들과 그 섭리의 모든 사역자들은 그 큰 사건에서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돋우고 돋우어 길을 예비하라(한글 개역:수축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 이를때에는 길이 평탄해지고 장애물은 제거되며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어려움들도 쉽사리 극복될 것이며 만사가 그들의 귀환을 가속화하고 용이하게 하도록 되어질 것이다(40:3, 4 참조).

이것은 복음과 복음의 은혜를 암시한다. 복음의 은혜는 우리가 이 세상을 통과하여 보다 나은 세계로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기 때문이다. 경건한 신앙의 길은 이제 돋우어져 있다. 그것은 대로이다. 목사들의 업무는 사람들을 그 큰 길로 인도하고 그들이 당면하는 좌절을 극복하도록 도와 주는 일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 어떤 것에도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57:14 <인도하고 고치겠다고 하신 약속> 그가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2) "하나님을 신뢰하는 통회자는 소생할 것이다" (15절).

우상들과 피조물들을 신뢰하여 도움을 구하던 자들은 "기름과 향품" 을 가지고 갔다(9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자기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자는 세상의 환락물과 감각적 쾌락물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 스스로 그런 것과 멀리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다음에서 밝히 드러난다.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1] 그의 위대함과 위엄 속에서 나타난다. "그 분은 지존무상하시며 영원히 거하시는 분이시다" (15절). 이로써 우리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아주 높고 명예스럽게 고취시키도록 하자.

  • 첫째, 그의 존재와 온전하심은 이 모든 피조물 보다 무한히 높은 찬양의 대상이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소유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 품을 수 있는 상상 이상으로 높으시다. 그는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난 분이시다" (느 9:5). "그분은 지존무상한 분이시다" (15절). 피조물 중에 그 분과 같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 분과 견줄 만한 것도 전혀 없다.
  • 마찬가지로 이 표현은 만유에 대한 그의 절대적 지배권과 모든 것에게 명령과 심판을 내릴 수 있는 명백한 권리를 암시하고 있다. 그는 극히 높은자보다 더 높은 자이시며(전 5:8) 극히 높은 하늘보다 더 높은 자이시다(시 113:4).
  • 둘째, 그에게는 날이 시작도 없고 생명의 종식도 시간의 변화도 없다. 영원히 죽지 않는 분이시며 변치 않으시는 분이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딤전 6:16). 그는 스스로 불멸성을 지니신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불멸성을 영원히 지니신다. 그는 불명성으로 쭉 거하시며 불멸성을 박탈당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얼마동안 있다가 영원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속에서 사신다.
  • 셋째, 그의 본성에는 무한한 정직이 있으며 그는 자신과 정확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고 자신의 모든 행위 속에서 영광을 꾸준히 의도하신다. 이것은 그가 이제까지 자신을 계시하신 모든 것에서도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분의 이름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 분과 알기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분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 넷째, 그 분의 영광을 위한 특별한 장소와 표현은 빛과 축복의 저택 속에 있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산다(15절). 나는 이것을 모든 세상 사람에게 알게 하겠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하늘에 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관한 이런 위대한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을 경외하게 하며 그 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격려하고 그의 긍휼한 겸손을 찬양하게 한다. 비록 그는 이와 같이 높지만 비천한 자들도 존중하신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늘을 올라타고 계신 분이 "가난한 과부와 고아" 를 위하여 몸을 굽히신다(시 68:4, 5).

[2] 그는 은혜와 자비로써 비천하고 회개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모습을 똑 바로 주시하는 자들에게 동정심을 품으신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세상에서 비록 천하고 가난하며 사람들에게는 멸시받고 짓밟힘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는 간과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들의 마음의 특질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는 환난 중에서 자기들 스스로 환난에 순응하여 마음 밑바닥에서 고통을 느끼는 자들을 자비심으로 존중하실 것이다. 아무리 천하고, 아무리 슬프고 심하게 다쳤을지라도 참으로 죄를 통회하며 죄 때문에 남몰래 애통해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이런 죄로 하나님께 역겨운 존재가 되었다면서 그의 모든 책망에 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 첫째,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은혜스럽게 그들을 아문하실 것이며, 말씀과 영으로 그들과 친숙하게 교제하실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가족과 대화하듯이 하실 것이다. 그분은 항상 그들 가까이 계실 것이며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가장 높은 하늘에 사시는 분이 가장 낮은 마음 가운데 사시며 확실한 영원 속에 거하시듯 확실한 신실성 속에 거하실 것이다. 그는 이런 자들을 즐거워하신다.
  • 둘째, 그분은 그들의 마음과 영을 소생시킬 것이며, 그들에게 그점을 말해 주실 것이며 말씀과 은혜의 영으로 그들 속에 역사하실 것이다. 말씀과 은혜의 영은 기절해가고 있는 사람에게 강심제처럼 그들을 소생하게 할 것이다. 그분은 그들의 영혼에 상처를 준 모든 슬픔과 두려움을 매꾸기에 충분한 기쁨과 희망으로 소생시켜 줄 것이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거한다. 그의 임재는 소생시키는 현존이다.

(3) 그와 다투는 자들도 만약 그를 신뢰한다면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의 은총 속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분은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히 다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6절). 하나님의 다툼만큼 한 영혼을 많이 통회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논쟁을 그치시는 것보다 소생을 많이 시키는 것도 없다.


📖57:16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1] 여기에는 은혜의 약속이 나오고 있다.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노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는 그를 노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그가 그들과 절대로 다투지 않으신다는 약속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징계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그가 그들과 절대로 다투지 않으신다는 약속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징계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그가 영원히는 다투지 않을 것이며 또한 항상 노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는 쉽사리 화내는 분이 아니듯이 그 화가 오래 가지 않는 분이시다. 그는 항상 꾸짖지만은 않으실 것이다. 비록 그분이 죄에 대한 자각을 위해 그들과 다투시지만 영원히 다투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굴종시키는 정신 대신 양자로 삼는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그가 찢으셨으나 징계가 항상 지속할 것은 아니며, 오래 계속되지도 않을 것이고 필요 이상으로 오래 계속하지도 않을 것이며(벧전 1:6)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계속되지도 않을 것이다. 징계 업무가 끝날 때까지만 계속될 것이다. 비록 그들의 전 생애가 비참할지라도 그들의 종말은 평안할 것이며 그들의 영원도 그러할 것이다.

[2] 매우 동정적인 고려가 나온다. 약속은 아주 동정적 정실 참작을 근거하고 있다. "만약 내가 영원히 다툰다면 비록 내가 그 영을 만들었을지라도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16절). 다음을 주의해 보자.

  • 첫째,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시다" (히 12:9). 그분이 항상 다투지는 않으시겠다는 사람들은 그분이 만든 영혼들이며 창조로써 그 존재를 부여하시고 갱생으로써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영혼들이다.
  • 둘째, 여호와께서는 몸을 위해주시기도하시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자기 백성의 영혼에 있으시다. 영혼이 곤비하지 않고 은혜와 위로 가운데 있도록 관심을 가지신다.
  • 셋째, 고통이 오랫동안 지속할 때 선한 사람들의 영혼조차 타락하기 쉽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혹한 분이라는 생각에 시달리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 헛된 것으로 생각하도록 유혹을 받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포기하기 쉽고 또한 구원을 절망하기 쉽다. 바로 그때 영혼은 곤비하게 된다.
  • 넷째, 하나님이 영원히 다투지 않으시는 것은 이 점을 고려하시고서이다. 그는 자기 손의 일을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며 그 아들의 피로 사신 것을 헛되이 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의 약함과 허약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체이며 육체는 약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다(시 78:39).

하나님의 크심과 겸손하심 (이사야 57:17-21)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서 특정 개인으로 지칭되고 있다(17,18절). 그러나 이것은 둘로 구분되어 서로 다르게 취급되고 있다. 한 경우는 평강이 약속되는 평강의 아들들로 언급되고(19절) 다른 경우는 평강과 관계없는 악인으로 언급된다(20,21절). 다음을 살펴보자.

Ⅰ. 이 백성이 죄때문에 당하는 정당한 질책.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다" (19절). 탐심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행해지는 죄였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자까지 다 탐나함이니라" (렘 6:13). 우상을 숭배하지 않던 자들도 영적 우상 숭배에 도취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것이 탐욕이다. 탐욕은 돈을 신으로 만든다(골 3:5). 이스라엘 파숫군들의 탐욕이 널리 알려진 때 백성의 탐심쯤이야 당연하지 않은가! (56:11) 그들은 비록 탐욕스러웠지만 우상을 섬기는 일에는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6절). 그러나 그들이 우상 숭배에 낭비한 것과 모든 것에 탐욕을 품었다는 것 중 어느 것이 하나님을 더 노엽게 한 것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다른 죄보다 이 불의 때문에 그들을 노여워하셨고 그들에게 이런저런 심판을 내리시다가 급기야는 갈데아인에 의한 멸망을 보내신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다.

하나님께서 대단히 분개하시고 좋지않게 생각하신 점은 자기에게 구별되고 바쳐진 백성이 완전히 세상에 빠져서 세상을 자기 분깃으로 택했다는 것이었다. 탐욕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매우 분노케 하는 죄악이다. 탐욕은 마음의 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신다. 그리고 그것을 미워하시며 질투로써 그것을 바라보신다. 왜냐하면 탐욕은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의 경쟁자를 옹립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탐심이라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를 축복하는" 죄이며(시 49:18) 그들의 이웃이 축하하는(시 10:3) 죄다(시 10: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혐오하신다.

2. 하나님께서는 그를 쳤고 선지자들을 통해 그의 탐심을 책망하셨으며 섭리로 그를 징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탐닉하고 갈구하고 탐하던 대상으로써 그들을 징벌하셨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노여워하시는 자들을 치신다. 탐욕은 특별히 사람들을 하나님의 분노의 표적 아래 두는 죄이다. 이 세상 재물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바로 재물에서 실망을 느낄 것이며 재물로 쓰라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길을 방해하거나 저주로 변할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러한 질책 아래에 처해 있을 때 그로부터 자신을 숨기셨다. 그러나 그에게 계속해서 노하셨다.

만약 우리가 채찍으로 징계를 받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낸다면 우리는 보다 잘 참을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치시고 우리로부터 자신을 숨기시며 선지자도 보내시지 않으시며 우리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씀도 주시기 않고 우리들에게 선을 위한 어떤 표시로 보여 주지 않으시며 "그분이 찢고 멀리 가버렸다면" (호 5:14) 우리는 아주 비참한 존재일 것이다.

Ⅱ. 이런 질책 하에서도 그들은 완고하며 징계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17절).

그는 자기의 악한 길로 갔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노여움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회초리의 아픔을 느꼈으나 그 회초리를 쥔 손은 전혀 주시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 것의 추구에서 장애를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 더 열렬히 세상 것을 원하였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보려고 하지 않거나 아니면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탐심은 그 마음의 길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원하는 것이었고 열중하는 것이었다. 그는 개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려 했다" (대하 28:22).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분노에도 불구하고 제길을 가려는 타락한 마음과 죄의 능력을 유의하라. 만약에 하나님의 은총조차 그들에게 역사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환난 역시 인간들을 개조시키기에는 여간 부족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하자.


📖57:17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Ⅲ.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자비로 그들에게 돌아오신다.

📖57:18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 그들 중 대다수는 계속 패역한 길로 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완고함을 애도하던 자들도 약간 있었다.

이 소수의 사람을 의식하셔서,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영원히 다투지는 않으실 것을 결심하신다. "사특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자신의 거스림을 보일 것이며" (시 18:26).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도 대항하실 것이다" (렘 26:24). 여기서 이 죄인이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어야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나는 그의 길을 보았다. 따라서 나는 그를 멸망시킬 것이며 포기할 것이며 영원히 더 이상 그와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자비와 은총은 너무나 풍부하여 심판을 이기고 이렇게 기뻐할 정도다.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람의 악함을 이용하여 그 인자를 더욱 혁혁히 드러내신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는 더욱 풍성하다. 하나님이 자비로와야 한다는 논리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우리에게서는 노엽게 하는 것밖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길들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를 고쳐 줄 것이다" (18절).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얼마나 악한가를 아셨지만 그들을 버리고자 하지 않으셨다. 그 방법을 관찰해 보자.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며 그 다음에는 평화를 주실 것이다. "나는 그의 길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스스로는 결코 나에게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돌아서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자비를 쌓아두신다. 이는 즉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능한 한 빨리 빠져나오려고 했던 그 자비를 예비하시고 그들로 그 자비를 받기에 합당하도록 만드신다.

(1) 하나님께서는 그의 타락과 사악한 성질을 치료할 것이다. 또한 비록 탐심이 가장 마음속 깊이 뿌리박히고 그의 마음은 욕심많은 행동을 너무나 오랫동안 해왔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탐심을 치료할 것이다. 전능하신 은혜가 정복하지 못할 영적 고질병은 없다.

(2)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악을 그만 두도록 하기 위해서 그에게 있는 것을 고칠 뿐만 아니라 건전한 것을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지시하신다.

그는 사울과 같이 패역한 길로 간다. 그는 위협과 살륙의 숨을 헐떡이며 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마음을 주셔서 더 좋은 길로 인도할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몰수되고 잃어버렸던 그러한 위로들도 그에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는 자기가 그토록 예비해 두었던 자비와 위로를 돌려주실 것이다. 바벨론 포로들에게는 놀랄 만한 개혁이 있었다. 또한 그들을 위해 이루어진 놀랄 만한 구원이 있었다. 그것은 애도자들 즉 그들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와 예루살렘 성전의 폐허에 대하여 울었던 자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런 애도자들에게는 자비가 가장 안락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성취하심에 있어 이들 애도자들을 의식하신 것이다.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위로는 그들에게 속하는 것이며 그들은 위안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갈 때 일부는 선한 무화과 극히 좋은 무화과였으나 다른 자들은 극히 악한 무화과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포로 생활은 그에 따라 자기의 유익이 되거나 해가 되었다(렘 24:8, 9 참조). 그들이 포로에서 풀려 나왔을 때 그들 중 약간은 선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악했다. 그러므로 구원(해방)도 그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유익이 되나 다른 이들에게는 해가 되었다.


📖57:19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1) 선한 자들에게는 포로 후의 귀환이 평강이었다. 그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실 평강의 예표요 증거였다. "나는 입술의 열매를 지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19절).


📖57:19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1] 하나님께서는 찬미와 감사의 제목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입술의 열매이기 때문이다(히 13:15). 또한 그것은" 입술로 대신한 수송아지다" (호 14:2). "나는 입술의 열매를 창조했다(원의:창조하다)." 창조란 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는 자를 위해 찬송거리를 만들어 주시는 것은 실로 무(무)보다 더 못한 것에서 창조하시는 셈이다.

[2] 이것을 위해 평화가 반포될 것이다.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19절).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말한다. 그는 비록 그들과 다투었을지라도 화해를 하실 것이며 논쟁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또 양심의 평화를 말해 준다. 포로 생활 중에 받던 여러 가지 양심의 가책과 정신적 동요 대신 경건한 안전감과 마음의 평정이 올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입술의 열매와 새로이 감사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주신다. 그 분이 우리들에게 평화를 말할 때 우리는 그 분에 대한 찬양을 말해야 한다. 이 평화는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 것이다. 오직 그 분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평강은 그 입술을 열매다. 그 분이 그것을 명한다. 평강은 목사들의 입의 열매이다. 그 분은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사 40:1). 그것은 설교하고 기도하는 입술의 열매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입술의 열매다. 그의 입술은 벌집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는 먼 데 있는 자에게 오사 평안을 전하셨다(엡 2:17). 그는 가까이 있는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그 당시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먼 훗날, 시간적으로 멀리 있는 자들에게도 그 당시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먼 훗날, 시간적으로 멀리 있는 자들에게도 평안을 전하셨다.

(2) 사악한 자들은 나머지 사람과 함께 돌아올지 모르나 그들에게는 평강이 없을 것이다(20절).


 📖57:20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악인은 바벨론에 있든지 예루살렘에 있든지 어디 있든지간에 자기 자신의 불안을 안고 다닌다. 그는 마치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평강을 선포하신 자들을 고치셨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19절).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될 것이며 바로 놓일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으려고 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의 위로의 고침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폭풍 속에 있는 바다와 같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극복되지 않는 부패심을 갖고 다닌다. 그들의 부패한 마음은 치료되지 않고 정복되지 않았다.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정욕과 욕망은 그들을 요동하는 바다처럼 만든다. 그들의 마음은 안정을 얻지 못하며 주위의 모든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도 불안하고 시끄럽고 위험하다. 영혼의 매서운 열기가 무례하고 욕하는 언어를 토설할 때 거친바다는 오욕과 오점을 솟구쳐낸다.

[2] 그들은 평화롭지 못한 양심을 지니고 다닌다. 그들은 죄와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즐길 수 없다. 그들이 안정된 것처럼 보일 때도 실상은 불안 속에 있다. 그들이 즐거운 것처럼 보일 때도 실상은 우울에 쌓여 있다. 그들은 마치 '가인'처럼 항상 요동하는 땅에서 살고 있다. 양심의 공포는 그들의 모든 즐거움을 교란시키며 스스로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구쳐낸다. 설사 현재 이런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선지자는 전에도 말했던(48:22) 것을 여기서 반복하고 있다(21절).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악인에게는 하나님과의 화해가 없으며(범죄를 계속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사이가 나쁘기에) 마음속에 평정도 만족도, 어떤 진정한 이익도 없고 사망시에는 평안도 없다. 이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하나님의 말씀" 이었다. 죄를 허용하는 자에게 평강이 없다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온 세상 사람들이라도 이 말을 취소할 수는 없다. 악인은 평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