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37, 요한복음 16, 잠언 13, 에베소서 6
묵상구절
22:24 <여호와께서 고니야 왕을 심판하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22:25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22:26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22:27 그들이 그들의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22:28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하고 깨진 그릇이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의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22:29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22:3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매튜헨리/옥스퍼드
Ⅱ. 여기에는 왕의 수치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여고냐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고니야라고 호칭된다. 선지자는 그의 이름을 줄이거나 약칭하여 별명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아마 그의 폐위를 암시하며 그의 통치가 단축되고 그의 달 수가 도중에 단절될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에게 임할 두 가지 수모가 기록되고 있다.
1. 그는 포로로 끌려가서 평생을 속박 가운데서 끝내게 될 것이다.
그는 왕자로 태어나 왕관을 썼지만 그 왕관을 속히 그 머리 위에서 떨어질 것이며 그는 왕관을 쇠사슬과 맞바꾸어야 할 것이란 말이다. 이 심판의 여러 단계를 살펴보자.
(1)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실 것이다(24절).
진실무방하신 하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시고 맹세로 다짐하신다. "너 고니야가 내 오른 손 의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리라." 그의 전임자들은 하나님이 인장반지였었고 그도 잘만 처신했더라면 그랬을 터이나 그는 타락했으므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던 것이다. 유다의 경건한 왕들은 그들을 자랑으로 여기셨으며 군주가 인장반지나 친필을 이용하듯 그들을 자신의 통치 도구로 삼으셨다. 그러나 고니야는 스스로를 그런 존귀와 명외에 부적합한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므로 출생시에 받은 특권도 그에게는 아무런 보장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팽개침을 당할 것이다. 여고냐에 대한 이 경고와 화답이라도 하듯 학개에서는 스룹바벨에게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나온다. 유대 민족이 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할 때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을 자기 백성의 인도자로 삼으셨던 것이다. "내 종 스룹바벨아! 내가 너를 취하고 인(印)을 삼으리라" (학 2:23). 자신을 하나님이 오른 손의 인장반지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안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뽑혀서 버림을 당할까봐 두려워해야 한다.
(2)바벨론 왕이 그를 나포할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로부터 스스로 뛰쳐나가는 자들은 자기들이 어떤 대적과 재앙을 당하게 될지 모르고 있다(25절). 갈데아 인들은 고니야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그의 생명을 찾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의 생명을 찾음으로써 자기들의 분노를 달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두려워하던 자들이었고 이로 인해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다는 것은 그에게 한층 더 두려운 일이 되었다.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그들의 손에 내어 주시므로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들에게 건네 주신다면 누가 능히 그를 건져낼 수 있을 것인가?
(3) 그와 그의 가족은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다.
그들은 비참한 포로 생활로 지루한 세월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와 그의 어미(26절) 그와 그의 자손(28절) 즉 그와 모든 왕족(그가 포로되어 갈 때 그 자신의 소생은 없었으므로) 또는 그와 그 허리의 자손들은 모두 다른 나라로 추방될 것이다. 그들은 낯선 나라, 이방 나라, 그들이 태어나지 않은 다른 지방으로 쫓겨갈 것이다. 그곳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땅이며 그곳에는 그들이 친분을 나눌 자도, 친절을 기대할 자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구권을 행사하던 땅에서 복종을 강요당하는 곳으로 끌려갈 것이다. 그렇지만 고국을 다시 볼 희망은 있을 것이 아닌가? 아니다. "너희는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27절).
그들은 자기 땅에 있으면서 그릇되이 행동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 더 그 땅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호아하스는 남방 땅인 애굽으로 끌려갔고 여고냐는 북방 땅인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이 두 곳은 아주 멀리 있었고 정반대쪽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만나기를 기약할 수 없었고 어느 한 사람도 고국의 공기를 다시 들이마실 수가 없었다. 남들에게 대한 지배권을 남용하는 자들은 이와 같이 남들이 지배하에 들어가 마땅하다. 압베와 사치와 잔학으로 자기들의 죄스러운 욕망을 충족시키며 거기에 탐닉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고국 산천을 다시 보고 싶어하는 순진한 욕구초자 충족받지 못해 싸다. 우리는 이 경고 가운데서 매우 힘이 실린 부분을 주목하게 된다.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서 죽으리라."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듯이 날 장소와 죽을 장소도 있다. 우리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안다. 그러나 어디서 죽을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곳은 우리 하나님이 아시는 것으로 족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에만 관심을 갖자.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면 우리가 어디서 죽든지 상관 없다. 우리가 죽는 곳이 아무리 먼 나라라도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4) 그는 이 일로 모든 이웃 사람들의 눈에 아주 보잘것없고 경멸할 만한 존재로 될 것이다.
그들은 거침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28절). "이 사람 고니야는 경멸받는 부서진 우상이냐? 그렇고 말고, 그는 이전보다 훨씬 천하게 되어 있다."
[1] 그때는 고니야가 위엄을 떨치고 있던 때였다. 아니, 그는 거의 신격화되고 있기까지 했다. 얼마 전 그의 부왕이 폐위되는 것을 목격한 백성들은 그가 등극하자 즉시 그를 숭상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경멸받는 부서진 우상" (흠정역 성서에는 그러게 되어있다. 역주)이다. 우상이 성할 때는 경배를 받으나 부패하고 깨어질 때는 버려져서 천대를 받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것이 우상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는 이도 없다. 우상화되는 것은 조만간에 천대받고 깨뜨려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부당하게 공경받는 것은 정당하게 멸시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경쟁자가 되는 것은 인간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상화시키는 것이 무엇이든지 거기에 실망하게 될 것이며 결국 그것을 천시하게 될 것이다.
[2] 그 때는 그가 기뻐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 되어있다. 그는 그 안에 즐거움이 없는 그릇이다. 그는 유행이 지나거나 금이 가거나 더럽기 때문에 쓸모가 없어져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릇이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자들은 이제나 저제나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을 정도로 굴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 그는 자기 명예를 물려 줄 후손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이 예언은 엄숙한 머릿말로 시작되고 있다(29절).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세상의 모든 거민은 하나님께 그토록 친근하던 민족과 집에 대한 이 심판을 주목하고 하나님은 정의의 행사에 공평무사한 분이시라는 것을 미루어 헤아리라는 말씀이다. 또는 이 말씀은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사 1:2)는 말씀처럼 땅에 거하는 자들이 너무나 귀머거리이고 부주의하기 때문에 그들이 딛고 있는 땅 자체에게 호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등한히 하더라도 들릴 것이다.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불탈 때에는(벧후 3:10) 땅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이것은 땅의 것만 생각하고 세속적인 것에 삼킨 바 되며 터무니없이 땅의 것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대한 외침일 것이다. 그런 자들은 재삼재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촉구받을 필요가 있다. 또는 이것은 인간에게 대한 부름일 수도 있다.
인간은 땅에서 나서 재빨리 그곳으로 돌아가는 숙명적 존재로 간주된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존재들이다. 우리는 흙이고 티끌이다. 이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존중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흙이면서도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자들 중에 들게 된다. 이제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고냐가 무자한 자로 기록된다는 점이다(30절). 즉 그 다음에 나오는 대로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을 자가 다시는 없으리라" 는 말씀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다윗 가계는 여고냐에게서 왕손을 내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흑자는 그의 자손이 쫓겨 날 것이라고 언급되므로(28절) 그가 바벨론에서 자녀를 낳았으나 그보다 먼저 죽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역대기의 족보 기사(대상 3:17)에서 여고냐 아시르(Jeconiah Assir, 즉 사로 잡혀간 자, 여고냐)의 일곱 아들에 대해서 읽게 되는데 그 중 첫째는 스알디엘이다.
혹자는 이들이 양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1:12) 할 때도 스알디엘은 나단 가에 속한 네리의 아들로 호칭되고 있기 때문에(눅 3:27, 31) 이것은 여고냐가 통치에 관한 권리 주장을 스알디엘에게 물려 준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자녀를 낳았거나 양자만 두고 있었거나 관계없이 그의 자손은 아무도 유다에서 왕노릇하지 못하였다. 그는 유다 왕국의 아우구스툴루스(Jugustulus)였다. 그의 나라는 그에게서 종결된 셈이다. 자녀가 없는 사람이 누구든지간에 무자할 자라고 기록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선행에 애쓰지 않는 자는 평생 형통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