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출애굽기 35, 요한복음 14, 잠언 11, 에베소서 4
묵상구절
22:13 <여호야김 왕에 대하여 말하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22: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22:15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22: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2:17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22:1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22:19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매튜헨리/옥스퍼드
Ⅱ. 여기에는 여호아하스를 계승한 여호야김의 운명이 예고된다.
우리는 그가 왕관을 쓸 자격이 살룸보다 나은 자였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그는 자기 앞 임금 즉 살룸보다 형이었지만 요시야의 아들 중에는 그보다 나이 많은 자 곧 요하난이란 이름의 형이 있었던 것 같다(대상 3:15). 그러나 우리는 이 여호야김의 통치 역시 별반 나을 것이 없었으며 그 마지막 운명도 불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선지자는 여호야김의 죄를 신실하게 책망한다. 어느 개인이 왕에게 "그대는 악하다" 고 말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일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자이니만치 만일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면 그 일이 아무리 달갑쟎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소임을 배반하는 셈이다. 여호야김이 여기서 책망을 듣게 되는 성은 우상 숭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아마 이때까지는 그가 아직 우리야 선지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26:22, 23 에는 그가 우리야를 살해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만일 그가 우리야를 이미 살해했더라면 여기서 그 일을 힐문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가 책망받는 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교만심 및 사치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
그는 크게 보이는 것이 왕이 하는 일의 전부이기라도 한양 선행에는 눈꼽만치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으리으리한 궁궐 즉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직접 건축했음에 틀림없다(14절). 그는 요즘 우리가 내리닫이 창을 달듯 극히 새로운 유행을 따라 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의 집은 성전처럼 좋은 지붕으로 덮여 있고 벽도 같은 널판지로 입혔을 것에 틀림없다(왕상 6:15, 16). 그렇지 않으면 그는 흡족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이 집은 성전보다 빼어났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의 집은 연단(鉛丹) 또는 진사(辰砂)로 도색되었던 때문이다. 이들은 붉은 염료이다. 또 흑자는 그의 집이 청람으로 칠해졌다고도 읽는데 청람은 푸른 물감이다. 방백이나 권세자들이 자기 지위에 어울리는 집을짓고 단장시키며 가장집물을 갖추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호야김이 교만심에서 이렇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는 합법적인 일이 교만심 때문에 심히 죄스러운 일로 되는 것이다. 호화롭게 만드는 자들은 그 일을 하는 자기의 마음 상태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으며 허영심의 작용을 애써 징계해야 한다.
그러나 여호야김의 경우에 있어서 특별히 잘못된 것나왔그가 하나님이 말씀이나 섭리를 통해 심판이 자기에게 임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때 이런 일을 벌였다는 점이다. 그는 처음 삼년간을 애굽 왕의 허락과 용인하에 왕노릇했고 나머지 기간은 바벨론 왕의 용인아래 통치하였다. 그럼에도 유대 지방의 태수라도 해도 좋을 그가 건축 역사와 기구 설치로 극히 강대한 군주들과 경쟁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은 합당치 못한 일이었다. 그의 결심이 얼마나 단호한 것인지 살펴보자. "내가 나를 위하여 광대한 집을 지으리라. 누가 반대하든지간에 나는 짓겠노라." 겉치레만 과시하려고 탐내는 것은 그 처지가 몰락해가는 자들에게 공통된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그 처지가 몰락해가는 자들에게 공통된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겸손을 요구하는섭리 가운데서도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는 자는 부지기수이며 하나님이 몰락시키시려 할 때 극히 거만하게 보이는 자들도 많다. 이런 행동은 우리를 지으신 이와 다투는 짓임을 명심하자.
(2) 세상적 안보 사상과 자기 재산에 대한 신뢰.
그는 마치 자기 산이 견고하여 결코 요동하지 않기라도 하는듯이 자기 번영이 계속되리라고 믿었고 거기에 의존하였다. 그는 자신이 백향목에 둘러 쌓여 있다고 해서 방해나 중단이 없는 통치하게 되는 것으로 믿었다(15절). 그는 백향목이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에 공격을 받지 않고 너무나 강하여 꺾어지지 않을 것처럼 생각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셔서 그토록 장엄한 저책을 불타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성전의 파괴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그 건물에 얼마나 장엄한지를 나타내 보이려고 그에게로 나아왔던 것이다(마 23:38; 24:1). 백향목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자신의 현재적 번영이 지속적인 안전보장이라고 믿으며 집권의 꿈을 계속 갖는 자들은 자신을 기만하는 불행한 자들이다. 부자의 재물이 그이 견고한 성이란(잠 10:15) 것은 그의 공상에 불과하다.
(3) 흑자는 그가 자신의 집을 미화시키고 단장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전을 약탈했기 때문에 여기서 독신 죄의 책망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흑자는 그가 "자신을 위하여 내 창을 짤랐다" (이렇게 되어 있는 사본도 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흑자는 마치 그가 성전의 창문을 떼어다가 자신의 궁전에 달로 그 위에 붉은 빛으로 칠하여 그 사실이 발각되지 않게 하며 그 창이 자기 건물의 일부로 보이게 하려 했다고 해석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에서 도둑질하여 부유해지려고 생각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이며 그들은 결국 자멸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이 아무리 그 사실을 은폐시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발견하신다.
(4) 그는 착취와 압제와 학대와 불의에 대해 책망받는다.
그는 "불의로 그 집을 세웠다." 그는 부당하게 취득한 돈과 정직하게 입도원을 획득한 것처럼 부당하게 취득한 대지 위에 자기 집을 건립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분수에 맞지 무리한 건축을 했으므로 인부들의 임금을 편취했을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의 귀에 울리는 죄 중 하나이다(약 5:4). 하나님께서는 극히 강대한 자들이 그들의 불쌍한 종들과 일군들에게 저지르는 만행을 눈여겨 보시고 그들에게 그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자기들이 부리는 자들에게 그대로 갚지 않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 그대로 되갚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강대한 자라도 극히 미천한 자를 자기 이웃으로 간주해야 하며 따라서 그에게 공정하게 대우해야 하고 그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여호야김은 자기 궁궐에 건축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에 있어서도 포학무도하였다. 그는 정의를 행하지 않았고 자기의 야심과 탐욕과 복수를 위해서는 무죄한 자의 피도 서슴치 않고 흘렸다. 그는 오로지 압박과 강포를 행하려 하였다. 그는 이런일을 자행하겠다고 협박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려 들었다. 그는 기어코 그 일을 그 일을 관철하려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밑바닥에는 탐욕이 깔려 있었다.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에 대한 사랑(딤전 6:10)이 그런 행위의 동기였다. "네 눈과 마음은 탐남을 행하려 할 뿐이라." 그의 눈과 마음은 오로지 탐욕만 향하고 있었다. 탐욕에 있어서는 마음이 눈을 따라 행하므로 견물생심(견물생심)이란 것을 주목하자. 그러기에 그것은 안목의 정욕이란 별칭도 얻는다(요 2:16; 욥 31:7). 그것은 허무한(존재하지 않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잠 23:5). 목적과 애착이 전적으로 이 세상 재물에만 쏠려 있을 때는 눈과 마음이 탐욕을 향하고 있으며 이럴 대 그 유혹은 살인과 압제를 온갖 종류의 폭력과 악행을 유발할 만큼 강하다.
(5) 그의 모든 죄를 가중시킨 것은 그가 선한 아비의 자식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아버지 요시야는 그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였다. 만일 그가 자기 아버지의 본을 따라가려고만 했던들 그는 좋은 본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15,16절).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야김이 자기 궁궐을 넓히고 휘황찬란하게 밝혔을 때 그는 자기 부친이 그토록 초라하고 불편하고 절대적인 군주의 위임에 미흡한 거소를 만족해 여겼다 하여 경멸하는 말투로 얘기했을 법도 하다. 그는 아마 자기 부친을 꿈이 없고 호방하지 못한 자라고 조소했을 것이다. 그는 자기 부친이 유행을 좋아하지 않고 유행을 좇아 투자할 생각이 없다고 하여 얕보았을 것이다. 여호야김은 자기 부친이 만족하던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부친이 비록 건축할 마음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마음의 소유자였으며 그보다 더 선한 자였고 그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 보다 선한 일을 했다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자기 부모의 구식을 경멸하는 자녀들은 흔히 참으로 훌륭한 점은 결여되어 있다.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는 내용을 살펴보자.
[1] 여호야김은 자기 부친의 행위에서 자기의 의무 이행에 대한 교시를 받았다.
"그는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요시야는 어느 백성에게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그들을 압제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을 궁지로 몰아 놓지도 않았다. 그는 그들의 정당한 권리와 재산을 보호하는 데 주력하였다. 아니, 그는 권력을 남용하여 그릇된 것을 응효하지 않았으며 옳은 것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였다." 그는 극히 보잘 것 없는 백성의 사연이라도 기꺼이 귀를 기울이려 했으며 그들에게 즐겨 공평한 태도를 취하려 했다. 행정관들은 자기 위엄을 유지하거나 안일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위정자들은 선을 행하는데 심해야 한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학대받고 있는 자들을 응호해 주기도 해야 한다.
[2] 여호야김은 부친의 형통을 보고 용기를 얻어 자기 의무를 이행했어야 했다.
- 첫째, 하나님은 요시야를 열납하셨다.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는 이로써 자기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공경했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올바로 인식되고 인정받은 것이다. 하나님을 올바로 안다는 것은 우리의 이무 이행, 특히 세상 저위와 신분상의 의무가 되는 일을 이행하는 데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 둘째, 요시야는 그 위안을 누렸다. "네 아비가 근실하고 즐겁게 먹으며 마시지 않았느냐?" 그는 취하려 함이 아니라 기력을 보하려고 마땅한 때에 먹으며(전 10:17) 자기 업무에 알맞을 만큼 마셨다. 그는 먹고 마시면서 공평을 행하였다. 그는 (여호야김과 그의 대신들 같지 않게)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간곤한 자에게 공의를 굽게 하진 않았다(잠 31:5). 그는 먹고 마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크게 풍요로운 것으로 그를 축복하셨고 그는 안락하게 그 즐거움을 누렸으며 자기 친구들에게도 즐거운 연회를 베풀었다. 여호야김은 자랑이었으나 요시야가 선한 집을 간직했다는 것은 그의 진정한 천미였다.그는 자기 부친을 통하여 의무의 길이 곧 안락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여호야김은 자기 부친의 선례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우리의 경건한 부모들이 독실한 신앙을 계속 간직한 결과 그 혜택을 경험하고 우리에게 신앙을 권면할 때 우리는 그런 신앙을 보유해야 한다는데 유의하자. 그들은 자기들이 발견한 경건 생활의 약속을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즉 경건한 생활을 그들에게 유익한 삶을 약속했고 신앙과 경건은 외면적 번영과 상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부모는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선한 길에서 돌이키고 외면한다면 번영할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 사치와 허세를 극히 사랑하는 자들이 관대한 마음을 추호도 갖지 않는 경우는 비일비재이다. 왜냐하면 그 엄청난 비용을 부담하자니 관대한 마음은 자연히 위축되게 마련이며 가난한 자에게 대한 후한 마음과 정의감까지도 꼬리를 감추게 되는 까닭이다. 여호야김처럼 빚을 갗지 않고 으리으리한 집에 사느니보다 요시야처럼 구식가옥에 살 망정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더 낫다. 요시야는 공평과 의리를 행하였고 그러자 그는 형통하였다(15절). 이 말은 16절에도 반복되고 있다. 요시야는 매우 안락하게 살았다. 그의 객성과 모든 이웃은 그를 존경했고 그가 손대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잘 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 일이 형통할 것으로 기대해도 좋다. 여호야김은 이것을 알았다.
2. 우리는 여기서 여호야김의 운명을 읽게 된다(18,19).
우리는 예레미야가 목숨울걸고 여호야김의 수치스런 죽음을 예언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도 이같이 말하는 것이다.
(1) 그는 죽어도 애통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압제와 포학으로 너무나 증오의 대상이 되어 그 주위의 있는 자가 다 그와 이별하는 것을 즐거워할 것이며 그를 위해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는 자가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해 공평과 의리를 행했던 그의 부친은 만인에게 애도를 받았다. 시드기야는 평안히 죽을것과 사람들에게 애도를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는다(34:5). 이는 그가 여호야김보다는 낫게 행동한 때문이다. 그의 친척들도 그를 슬프다하며 통곡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미천한 자의 장례식이라도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는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장례식에서는 그런 흔한 애도의 표현조차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백성들이나 신하들도 그를 위해 애곡하지 않을 것이다. 죽어도 이별을 아쉬워하며 가슴 아파할 자가 없도록 살아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2) 그는 매장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애통하는 자가 없는 것보다 더 나쁘다. 망자의 영결식을 눈물로 장식해 주지 않는 자들이라 해도 자기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파묻어 주는 일은 기꺼이 행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게 될 것이다. 즉 그는 전혀 매장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그의 시체는 하수구나 쓰레기 더미에 버려질 것이다. 그의 시체는 치욕적으로 질질 끌려서 예루살렘 문 밖에 던지울 것이다. 여호야김에 대한 기사는 느부갓네살이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갔으며(대하 36:6) 그가 항쇄족쇄에 채여 바벨론 왕에게 이르렀다(겔 19:9)고 말해준다. 그러나 그는 포로로 끌려가다가 바벨론에 이르기 전에 죽은 듯하다.
아마 그는 슬픔과 근심 때문에 죽었거나 아니면 교만심 때문에 자신의 명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정중한 매장을 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살자들에게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회사가 요세퍼스는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을 주살하여 예루살렘 성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열왕기에는 그가 자기 열조와 함께 잤다고 되어있다(왕하 24:6). 그가 장엄한 저택을 축조했을 때 자신의 능묘 또한 어마어마하게 조성하려고 계획했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얼마나 빗나간 것인지 살펴보자. 큰 교만심을 갖고 의기양양해 하는 자들에게는 살아서든 죽어서든 커다란 수치가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