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구절

4월 9일 수요일 묵상구절 렘31:15-22 <라헬의 애곡과 여호와의 위로>

Jeehyun 2025. 4. 9. 06:06

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13, 시편 15, 16, 잠언 27, 데살로니가후서 1

묵상구절

(관련 문단, 시107:1-43; 대조 문단, 마2:17-18)

31:15 <라헬의 애곡과 여호와의 위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31: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17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18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31:19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1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31: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

매튜헨리/옥스퍼드

옥스퍼드 주석

5. 특별히 자녀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감으로써 그들을 잃은 슬픔을 당한 사람들은 자녀들이 돌아옴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리라고 예언된다(15-17절).

본문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1) 자녀들을 잃은 어머니들의 슬픈 통곡(15절).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 한다. 당시는 포로로 사로잡혀 가는 때이다. 그러니 슬픔과 통곡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예레미야 40장 1절에 보면 느브사라단이 포로들을 옮기다가 라마에서 그가 예레미야를 석방하는 내용을 본다. 본문에 또한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슬퍼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라헬의 묘는 라마와 베들레헴 사이에 있었다. 베냐민과 에브라임은 라헬의 후손들이다. 그녀는 두 아들을 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중 맏아들은 그의 부친이 슬픔으로 위로받기를 거절한 아들이었고(창 37:35) 다른 아들도 "나의 슬픔의 아들" 이란 뜻에서 "베노니" 라고 그의 어머니가 이름을 지었다(창 35:18). 라헬이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통곡한 것과 마찬가지로 라마에 사는 그의 후손들이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이" 사로잡혀 가므로 슬퍼한다(삼상 30:6).

이러한 통곡소리가 라헬이 그녀의 무덤에서 일어나 그들과 함께 통곡하는 것이라고 시적으로 묘사된다. 착한 부모들은 "자식들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한다." 그들의 자녀들은 이제 그들을 떠나 원수들의 수중에 사로잡힌 것이다. 부모들은 이제 결코 자식들을 볼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기사를 베들레헴에서 헤롯이 어린 자녀들을 학살함으로 일어난 통곡의 사건에 인용한다(마 2:17, 18). 그리고 이 말씀이 그 때에 성취되었다고 하였다. 그들에게는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었으며 그리하여 자녀들을 위해 울었고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 자녀들이 없어졌으니 무엇이라 위로할 수 있겠는가. 자녀를 잃은 슬픔이야말로 가장 큰 슬픔인 것을 기억하자.

(2) 적절한 위로의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진다(16,17절).

그들은 슬픔을 억누르고 자제하라는 충고를 받는다. 본문에 의하면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고 한다. 이러한 슬픔을 당하여 울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본능적인 감정은 폭발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맛보는 기쁨이 방해되고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저지될 정도로 극한적인 슬픔에 잠겨서는 안 된다. 슬퍼하더라도 슬픔 때문에 불평은 하지 말자. 또 야곱처럼 내가 슬픔으로 죽게 되리라고 마음먹어서도 안 된다. 무절제하게 슬퍼하지 않으려면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어야 한다." 모든 고통이 언제인가 끝나리라는 소망, 결국 모든 일은 행복하게 끝나고 평화를 누릴 것이라는 소망을 지녀야 한다. 고통 중에라도 우리에게는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고 하였다(잠 14:32). 의인의 슬픔은 오히려 축복의 시기이며 기쁨으로 가는 복된 길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은 "의인은 죽은 후에 그 후손에게 소망이 있다" 로 해석한다. 우리가 당대에는 영광스러운 날들을 누리지 못한다고 하여도 우리의 후손들은 소망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한 세대는 광야에서 죽었지만 그 다음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간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두 가지 소망으로 인하여 위로받으리라고 한다.

  • 첫째, 그들의 행위에 대한 보상의 소망이다.
    • 이렇게 말씀된다. "너희 고통당하던 일이 갚음을 받을 것이다. 석방을 통해 얻는 위로로 사로잡힐 때의 슬픔은 씻은 듯이 사라지리라" 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한 날의 수만큼 기쁨을 더하신다." 노력과 그에 대한 보상이 비례되듯이 슬픔과 기쁨도 정비례된다. 성도들이 최후의 날에 바라는 "계시된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 (롬 8:18).
  • 둘째, 그들의 자녀들이 석방되리라는 소망이다.
    • "그들이 그 대적의 말에서 돌아오리라" (16절) 하셨고 "너희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17절) 하신다. 멀리 사로잡혀간 자녀가 귀향하리란 소망이다. 야곱이 요셉을 다시는 못 볼 줄 알고 낙담하였으나 후에 그는 아들을 큰 기쁨 속에서 만났던 것과 같은 것이라 한다. 죽음을 맛본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경내로 돌아오리라" 는 소망이 주어진다. 그것은 부활로 주어지는 행운이다. 그것은 하늘의 가나안 땅으로의 귀향이요 하나님의 성소에로 들어감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죽었더라도 슬픔을 참을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의해 취하여졌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영생으로 부활하리라는 소망 때문이다. 그들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앞서 간 것뿐이다.

●에브라임의 회개와 그가 누릴 혜택 (예레미야 31:18-26)

Ⅰ. 에브라임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옴.

유다뿐만 아니라 북왕국 에브라임도 회복될 것이며 이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며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하시리라고 한다(호 14: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라 한다. 에브라임이 본문에서 단수로 취급되는데 이는 그들의 뜻의 일치를 의미한다. 그들은 한 사람이 회개하듯 마음을 합하여 회개할 것이며 일심으로 단합하여 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실상 회개자들에 대한 친숙성을 나타낸다.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그들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데 있다. 이제 에브라임은 죄를 인하여 울며 돌아온다. 그들이 에브라임이란 명칭을 따온 조상 에브라임은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여러 날을 울었다" (대상 7:21, 22). 이제 자녀를 잃은 슬픔은 독자를 잃은 슬픔에 비교된다. 회개자들은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다.

1. 자신과 현재 자신이 처한 비참함을 탄식하며 돌아온다. 참된 회개자들은 이렇게 스스로 탄식한다.

2. 자기를 고발하며 자기를 큰 죄인으로 정죄하며 돌아온다. 그의 양심이 그에게 죄를 고한다. 그는 지금 더욱 죄책감을 느껴 자신을 고발한다. 징계를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내가 멍에 아래 있고 또 그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내가 송아지처럼 징벌을 받았나이다. 송아지가 멍에를 메지 않으려고 항거하지 않았다면 결코 매를 맞지 않았을 터인데......한데 우리도 송아지처럼 항거하므로 매를 맞았나이다" 라고 말한다. 참된 회개자들은 그들에게 가해진 형벌을 부친의 사랑의 채찍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내가 형벌을 받았나이다. 내게 징벌이 내릴 것은 잘된 일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계속 행악하였으리이다. 채찍은 내게 양약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나를 위한 것이었으나 내가 그것을 참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또는 이 말씀은 그가 채찍을 맞으면서도 깨닫지 못하였음을 후회하는 의미도 된다. 이런 뜻으로 해석할 때 본문은 다음과 같이 진행될 것이다.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그러나 그것뿐 나는 징벌을 받고도 일어나지 못하였고 각성하지도 않았나이다. 나는 징벌의 숨은 뜻을 몰랐습니다. 나는 멍에에 익숙지 못하여 제멋대로 걷어차는 망아지처럼 또는 그물에 걸린 양처럼(사 51:20)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그가 깨닫지 못한 죄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의 이전의 죄까지 기억한다. 그는 그의 젊은 시절에 지은 죄까지 기억한다(19절). 한 가지의 죄를 깨닫게 되면 다른 죄도 발견이 된다. 이제 그는 "어렸을 때의 치욕" 을 기억한다. 민족으로서의 에브라임은 그들이 처음 민족으로 형성되기 시작할 때 그들의 조상들이 지은 죄까지 기억한다. 죄는 이렇게 구체적인 성격을 띤다. 우리가 어릴 때 지은 죄는 어릴 때의 치욕이 됨을 기억하자. 우리는 괴롭더라도 자주 어린 때의 죄를 기억하고 통회하는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3.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에 대하여 분노를 품고 돌아온다. 자기의 죄와 어리석음에 대한 거룩한 분노이다.

그는 세리가 가슴을 쳤듯이 "그의 볼기를 친다." 그는 자신의 모습에 그리고 자기의 완고함과 어리석음에 놀라기까지 한다. 그는 "부끄럽고 욕됨을" 느낀다. 그는 편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못하며 자신에 대한 아무런 긍지도 느끼지 못한다.

4. 그는 자기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에 의탁하고 돌아온다.

그는 하나님과 등지고 있는 자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음도 안다. 그는 한 때 반역하였으나 이제 돌아오기를 원하여 간구한다.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하고 기도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돌이키지 않으시는 한 그는 결코 돌이킬 수 없고 끝없이 방황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회개하게 하시는 은혜를 매우 갈망한다. 그리고 그 은혜에 의존하며 그 은혜로서 충분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그 은혜가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에 부딪치는 온갖 고난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는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라고 한다(17:14). 하나님은 능력으로 일하신다. 그는 마지못해 하는 자를 기꺼이 일하도록 만드신다. 그가 한 영혼을 회개시키고자 작정하시면 그 영혼은 회개하고야 한다.

5.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돌아온다.

그는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다" 고 고백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려는 모든 경건한 역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있는 역사의 결과임을 기억하자. 그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다" 고 했는데 이 말은 진리로 세상을 심판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그의 뜻을 하나님께서 돌이켰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회개시켜 그에게로 돌아오도록 하시는 방법으로 그들의 이해의 눈을 열어 주심을 기억하자. 이로써 모든 아름다운 일들이 뒤이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가르침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다" 고 고백한다. 죄인들이 의로운 지식을 얻으려면 바른 길로 돌아와야 한다. 에브라임이 징벌을 받았을때는 바람직한 결과라고는 생기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교훈이 그의 섭리의 징벌을 뒤따라 주어지자 회개의 역사는 완성되었고 그러므로 그는 "그의 볼기를 쳤다." 즉 죄를 너무나 부끄러이 여기므로 그것과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고자 하였다.

Ⅱ.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과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에브라임의 깨달음(20절).

1. 하나님은 에브라임이 불충실한 자녀요 탕자에 불과하였지만 그를 자녀로 삼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라고 선포하신다. 따라서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할 때 하나님도 그를 위하여 탄식하신다. 어머니가 자식을 꾸짖더라도 자식은 어머니의 위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다(사 66:13). 고로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고 반문하신다. 영혼까지 슬픔에 가득차 그토록 탄식하는 것이 나의 아들이 아닌가 라고 물으신다. 사울의 경우도 이러하였다(삼상 26:17). 그는 다윗에게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고 묻는다. 이제 에브라임은 회개하고 그에게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불충하고 몹쓸 자녀라해도 그들이 진지하게 돌아서 회개하면 아무리 그들이 몽둥이로 맞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에게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자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에브라임은 자신으로 인하여 벌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고치신다. 에브라임은 스스로를 인하여 치욕을 당했으나 하나님은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신다. 돌아온 탕자는 "아들이라 불리워질"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제일 좋은 옷" 을 입히고 "그의 손에는 반지를 끼워 주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관대히 대하시고 대단히 부드러운 연민으로 그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위협적인 말로 "그를 책망해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고 본문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평강으로 대하신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고통을 가하셔도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을 그들의 거처에서 내어쫓으셨으나 그의 시야 밖으로 보내시지도 않았고 마음에서 잊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견책하실지라도 그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고 만사에 우리가 잘 되도록 계획하신다. 설혹 우리가 하나님을 잊는다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신다" 는 사실이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그를 아직도 깊이 생각하며 그러므로 내 마음이 측은하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요셉이 겉으로는 거칠게 그의 형들에게 말하면서도 속 마음은 애타게 그들을 사모하던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스라엘이 고통으로 인하여 회개하며 복종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비참함으로 마음이 아프시다(사 10:16). 왜냐하면 그는 때리시되 부드러운 마음을 걷우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연민이 에브라임에 대한 형벌을 감하신다. 그러므로 호세아 11:8,9절에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섰다" 고 하셨다. 이제 이와 같은 연민이 에브라임의 회개를 용납하신다. 에브라임은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당신께 돌아오며 당신의 자비와 은혜로 의지하나이다" (18절)라고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이 호소를 좋게 여기시고 들으신다. 왜냐하면 에브라임은 당신이 하나님이시며 인간이 아니고 바로 에브라임의 하나님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에브라임에게 선을 베푸실 것을 결심하신다.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그에게 간구하고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풍부하고 적절하며 확고한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을수록 우리를 위한 긍휼의 위로도 더욱 잘 준비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Ⅲ.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귀향을 준비하라는 약속과 격려의 말씀이 주어진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려워 떨며 넋 빠진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하신다. 또 서로 말다툼이나 하면서 시간을 소일하지 말라신다. 그리고 단단히 결심하고 전념하여 귀향을 준비하라고 하신다(21,22절).

1. 그들은 이제 쫓겨났던 조국으로 귀향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말아야 했다.

그러므로 "처녀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너의 하나님에게 다시 신부가 되도록 하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이 성읍들은 하나님이 네게 주신 것이 아니냐. 그러니 그곳으로 돌아오라" 고 선포된다. 그들은 자유로이 시온으로 귀환할 때까지 결코 바벨론을 만족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그들은 그들이 사로잡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예전의 슬픔을 다시 기억하여 각성하게 될 것이며 또는 그들의 부친들이 이 길을 지날 때 무슨 일이 있었다고 말해 줄 것이며 직접 그 장소들을 봄으로 기억이 생생하여져 더욱 그들의 해방에 대하여 감사하게 될 것이라 한다. 죄의 멍에를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사람들은 그들이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그 길로 돌아와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태만히 하였던 임무로 돌아와야 하며 이전에 그들이 하던 사명을 감수해야 한다.

3. 그들은 귀향에 온 정열과 마음을 쏟아 전념해야 한다.

그러므로 "길에 착념하라" 고 말씀되어 있다. 귀향에 신경을 써라. 네 임무와 너의 유익이 무엇이 될까 생각하라. 기쁨으로 이 일에 착수하라고 하신다. 바벨론에서 시온으로 가는 길! 죄의 속박을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얻는 길, 그것은 대로(大路)임을 기억하자. 그 길은 곧고 평탄하고 안전하다. 그 길은 잘 포장되어 있다(사 35:8). 그렇지만 그들이 "그 길에 마음을 착념하지 않는 한" 그 길을 걸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4. 그들은 또한 여행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갖추어야 했다.

그러므로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라. 길을 잃을 위험이 있는 곳마다 안내판을 붙이라. 사람들을 앞서 보내어 길에 익숙토록 하여 그들이 다른 사람의 길을 안내하게 하라" 고 하신다.

5. 그들은 여행을 위해야 마음을 정리해야 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고 반문하신다. 마음이 변덕스러워서는 안 된다. 또 귀향에 회의를 품어도 안된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염려와 두려움으로 곁길로 나아가면 안된다. 피조물에게 도움을 구해도 안되며 그들에게 교태를 부려서도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자주 하나님을 등졌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에게 자신들을 맡기고 마음을 하나님에게만 쏟아야 한다.

6. 그들은 힘을 내서 이 일을 행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기이하고 놀라운) "새 일을 세상에(이스라엘 땅) 창조하였는데 곧 여자가 남자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여자처럼 사건을 기피한다(사 54:6). 그렇지만 교회는 강한 남자(여기서는 세상을 말함:역자 주)를 대항하여 그들을 둘러싸 포위하고 승리하게 될 것이라 한다.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서도 교회는 여자에 비유된다. "저희 군대들이 성도들의 진을 두르나" (계 20:9) 이제는 오히려 성도들의 진지가 저들을 포위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땅에 돌려보내시려 새 일을 계획하셨고 이 일은 그들에게 앞으로 있을 징조를 뜻하기도 하였다. 많은 훌륭한 성서 주석가들에 의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난 "새로운 일" 은 그리스도의 화육으로 해석되었다(사 7:14; 9:6). 본문에 의하면 "여자" 곧 처녀 마리아의 태가 "전능하신 분" 에 의해 둘러싸인다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게베르(Geber)란 단어는 여자를 의미하는 동시에 기보르(Gibbor)는 "능하신 하나님" (32:18)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화육이 언급되는 기보르(사 9:6)는 그리스도를 뜻하기도 한다. 그는 엘-기보르 곧 "전능하신 하나님" 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결코 버리시지 않을 것을 그들은 확신해도 좋다. 왜냐하면 이 축복은 이미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사 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