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 성경읽기
출애굽기 13, 누가복음 16, 욥기 31, 고린도후서 1
묵상 구절
10:11 제 이년 이월 이십일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 위로 떠올랐으므로,
10:12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여정을 따라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였고, 그 구름이 바란 광야에 머물렀으며
10:13 그들이 모세를 통해 주신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첫 번째로 출발하였다.
10:14 선두로 유다 자손 진영이 기를 앞세우고 부대별로 출발하였으니,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 그의 부대를 통솔하였고,
10:15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 잇사갈 자손 지파의 부대를 통솔하였으며,
10:16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 스불론 자손 지파의 부대를 통솔하였다.
10:17 이에 성막을 걷고,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그 성막을 메고 출발하였고,
10:18 다음으로 르우벤 진영이 기를 앞세우고 부대별로 출발하였으니,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 그의 부대를 통솔하였고,
10:19 수리삿대의 아들 슬루미엘이 시므온 자손 지파의 부대를 통솔하였으며,
10:20 드우엘의 아들 엘리아삽이 갓 자손 지파의 부대를 통솔하였다.
10:21 그핫 자손이 성물을 메고 출발하였고, 그들이 이르기 전에 성막을 세웠으며,
10:22 다음으로 에브라임 자손 진영이 기를 앞세우고 부대별로 출발하였으니,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가 그의 부대를 통솔하였고,
10:23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이 므낫세 자손 지파의 부대를 통솔하였으며,
10:24 기드오니의 아들 아비단이 베냐민 자손 지파의 부대를 통솔하였다.
10:25 다음으로 모든 진영들의 뒤에 있는 단 자손 진영이 기를 앞세우고 부대별로 출발하였으니, 암미삿대의 아들 아히에셀이 그의 부대를 통솔하였고,
10:26 오그란의 아들 바기엘이 아셀 자손 지파의 부대를 통솔하였으며,
10:27 에난의 아들 아히라가 납달리 자손 지파의 부대를 통솔하였다.
10:28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은 순서에 따라 그 부대별로 출발하였다.
10:29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땅으로 우리가 진행하니, 우리와 동행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우리가 선대하겠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10:30 호밥이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가지 않고, 내 땅 내 친척에게 가겠네." 라고 하므로,
10:31 모세가 말하였다. "부디 저희를 떠나지 마십시오. 당신은 광야에서 우리가 어디에다 진을 쳐야 할지 아시니, 우리의 눈이 될 것입니다.
10:32 당신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을 선대할 것입니다."
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부터 사흘 길을 진행할 때, 여호와의 언약궤가 삼일 길 동안 그들 앞에서 진행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쉴 곳을 찾았고,
10:34 그들이 진으로부터 진행할 때,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들 위에 있었다.
10:35 궤가 출발할 때는 모세가 말하기를 "여호와시여, 일어나시어 주님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주님 앞에서 도망하게 해 주소서." 하였고,
10:36 그것이 쉴 때에는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시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 돌아와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매튜 헨리/옥스퍼드스페셜포인트
- 이것은 전날 이스라엘이 B.C. 1446년 3월 초순경 시내산에 도착한 이래 근 1년 만의 일이었다. 전날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제 막 애굽을 탈출한 이래 애굽 군대의 추격에 쫓기어 일단은 그저 도주에 급급한 초라한 탈출 노에 민족 집단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그들이 갓 빠져나온 애굽과 그둘이 장차 진군해 들어가야 할 가나안 땅 모두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이 시나이 반도 남단의 시내산(Sinai Mountain) 일대라는 완충지대에 1년 정도 머물면서 새롭게 하나님의 선민이요 하나님의 군대로서 당당한 정복자 집단으로 변모하였 다.이같은 배경에서 이스라엘이 마침내 시내산을 떠나게 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하는 10:11-36절 사이의 세 문단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을 떠나 바란 광야에 일시 기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중심으로 이와 관련된 몇몇 특기 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 11-28절: 일단 11, 12절에서 이스라엘이 시내산을 떠나 바란 광야까지 행군한 사실이 약술된 뒤에, 다시 13-28절에 걸쳐 이 행군 과정이 전적으로 전날 하나님이 주신 행군 순서에 의해서 진행되었음을 그 세부 장면의 상세한 묘사를 곁둘여 강조하고 있다.
- 9-32절: 모세가 미디안 출신의 자신의 처남으로서 광야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호밥(the Hobab)에게 거듭하여 겸손하게 동행 내 지 길 안내를 요청한 사실을,
- 33-36절: 이스라엘이 행군할 때 언약궤(the Ark)가 가장 앞서 선도했던 사실이 다시 한번 재강조되고 있다.
- 이렇게 요약해 볼 때 우리는 시내산 출발 이후의 최초의 행군 기사 죽 이스라엘이 시내산 기착 시기 이후 개시한 최초의 행군 기사인 10:11-36절 사이의 본문은 이스라엘이 상당한 시간과 거리를 행군하여 주파한 과정의 요약이라기보다는 일단 시내산을 떠났다는 사실 자체와 하나님 의 지시에 따른 행군의 세부 양상에 대한 기록에 보다 큰 관심을 쏟고 있음을 알 수 있다.너무도 많은 이들이 신 • 구약 성경 본문들을 읽으며 그 사실성과 현장감을 망각하고 추상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본문의 생동감과 진실성을 놓쳐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 현장에 직접 몰입해 들어가서 거기에 담긴 생생한 육성을 듣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호밥에 대한 모세의 동행 요청은 모세와 호밥의 두 사람의 입장에서 동시에 이해하여야 한다. 먼저 모세는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해 주실 것이지만 인간으로서도 최선의 준비를 다하기 위해 자신과 인척 관계에 있는 자로서 광야의 지리를 잘 알고 있기도 한 호밥에게 간곡하게 두번에 걸쳐서 동행을 요청하였다. 우리도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면서도 사람으로서의 최선도 다하여야 한다.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우러 성도 모두는 일단 응하여 이미 성도가 되었으며 또한 성도가 된 후에도 하나님의 사역에의 동참에 무엇보다 던저 응해야 할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호밤이 일단 모세의 청을 거절한 듯 보이나 사실은 수락하여 훗날 선민의 한 사람으로 가나안 땅에 함께 거하게 된 사실을 함께 기억할 때에(삿 1:16; 4:1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선한 요구에 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새삼 각성하게 된다.무릇 언약궤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영원한 언약 관계 의 걸정적 실체였다. 따라서 이러한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행군을 선도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과 맺은 당시의 언약에 근거하여 그 언약의 한쪽 당사자인 하나님께서 또 다른 당사자인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을 나타낸 것이다.
- 그러므로 언약궤의 선도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본문은 첫째,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행군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으며 둘째,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던 하나님온 언제나 우리들 선두에서 앞서 가시기를 원하시며 또한 언제나 우리의 행렬 앞에서 인도하고 계시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삶 앞에서 행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분의 인도에 따라 전진하는 것뿐이다.
- 끝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행군이 오직 여호와의 인도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결론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언급된 전 이스라엘 진영의 행렬 앞에서 행군을 선도한 언약궤에 대한 기사도 이중적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다음으로 호밥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에 여기 호밥의 입장은 먼저는 우리가 아직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동행 요구를 받게 되는 상황 또는 일단 성도가 된 후에라도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는 기회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반영한다.
- 여기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행군 장면에 대한 생생한 세부적 묘사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이 전날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그 근본 원리의 추측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나 자신이 그 옛날 시나이 반도의 한 구석을 행군하던 이스라엘 군중의 한가운데 있는 심정으로 본문을 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럴 때만이 본문에 대한 여러 측면에서의 명확한 분석은 물론 거기에 담긴 근본 원리 또한 더욱 생생하게 그야말로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먼저 우리는 이스라엘의 행군 장면의 묘사에서 다시 한번 출애굽 시대 모든 기사의 사실성 내지 현장감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해야 한다. 여기 본문에 기록된 바 이백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의 선도에 따라 각각 세 지파씩으로 구성된 총 4대의 진영을 중심으로 각급 부대 깃발(the Flag)을 앞세우고 거칠고 황량한 시나이 반도 광야길을 전진해 가는 광경은 그저 꾸며낸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는 황량한 광야의 능선과 골짜기 위에 작열하는 햇볕 사이로 자욱한 먼지가 이는 가운데 들리던 환호와 웅성거림, 거대한 군중들의 부산한 몸놀림, 짐승과 사람들의 거친 땀내음이 뒤범벅된 채 전진해 가던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실제 행군에 관한 기록이었다.
- 그것은 그 체류 기간 중에 있었던 시내산 선민 언약 체결(출 19-24장),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 건립(출 25-40장), 각종 제사 제도 및 기본 율법 수여(레 1-27장), 전 민족의 군사 편제화 및 행군 준비 완료(민 1:1-10:10) 등의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이제 하나님의 선민(the People of God) 이요 하나님의 군대(the Army of God)로 승화되었던 결과였다.
- 드디어 출발이다. B.C. 1445년 2월 20일 현재 이스라엘은 마침내 총 11개월여에 이르는 시내산 기착 시기를 마무리하고 시내산을 등진 채 가나안 땅을 향하여 본격적 정복 행군의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 진의 이동(민수기 10:11-28)
💡 영적교훈 리포트 서론부
10:11-12:16까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여 간 머물렀던 시내산을 출발하여 가데스에 이르기까지의 여정과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 개시 부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의 1년 동안이나 머물렀던 시내 광야를 마침내 출발하여 바란 광야에 도착한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어 시내산을 출발한 것은 출애굽 제 2년 2월 20일로 시내산에 도착한 지(출 19:1) 11개월여가 지난 때였습니다. 특별히 이 날을 출발일로 잡은 것은 아마도 정규 유월절(1월 14일) 미참자를 위한 한 달 후의 유월절 규정(9:11) 때문인 듯합니다.
아무튼 본격적인 가나안 행군이 시작됨으로써 비록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해 38년 간의 방랑기를 거치기는 했지만 가나안 정복의 서막은 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구름이 증거막 위에 떠오르면서 시작된 이들의 이동은 참으로 질서 정연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행군 순서와 맡겨진 직무에 충실함으로써 그 어떤 집단보다도 신속하고 안정되게 이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설은 오늘날 이 혼란한 세상에서 영원한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이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Ⅰ. 이스라엘 진이 시내 산을 출발한 전체적 이야기가 나와 있다. 근 일년간 그 산기슭예 있었고, 그러는 동안 많은 기념할 만한 일이 발생했다. 이 이동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전에 다소간 알려 주었던 것 같다(신 1:6, 7). "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약속의 땅쪽으로 나아가라."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내 산은 종을 낳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거기서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율법은 실로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끌어 가는 몽학 선생이니,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기쁨과 자유에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행복은 율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서 오기 때문이다.
1. 신호가 왔다(11절). "구름이 떠 올랐다."
아마 그들이 행진 준비를 하는 동안은 잠시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천막을 접고 소유물을 정리하고 하는 데는 많을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각 가정이 자기들 것만 하면 되고,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그리고 재 빨리 했을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후 시내 광야에 있는 시내 산에서 11개월을 넘게 머물렀다가(출19:1) 출애굽 제 2년 2월 20일에 마침내 가나안으로의 역사적인 행군을 시작하였다.
증거막 위로 떠오른 구름
—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도구. 전적으로 하나님 뜻에 의해서만 움직여졌다(9:17)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출발 신호인 구름이 증거막에서 떠오른 것을 보고 출발함으로써 결코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았다(수 2:3, 4). 그들은 자기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약 시대를 사는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행하고 허락하지 않는 것은 행하지 않는 것, 즉 결코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성도의 성숙한 삶인 것이다.
- 행군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좇아 행진했다." 곧 구름이 인도하는 대로 갔다(13절).
혹자는 "여호와의 명령" 이란 말이 위의 본문에나 앞장에서 그들의 모든 여정을 인도하고 지킨 것으로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주시한다. 즉 이것은 먼 후일 그들이 광야에서 길을 잃고 갈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토록 오랜 기간을 광야에 있었다는 중상과 비방을 일축해 버리는 것이다. 사실상 문제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매 단계, 매 발자국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도를 받았다. 그들 자신은 몰랐어도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길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자기를 맡긴 자들은 아무리 난처한 지경에서라도 여전히 갈 길을 알게 한다. 하나님과 그의 안내가 결코 자기들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길을 잃을까 하는 염려는 필요없다.
- 3일간 행진한 후에 그들은 다시 정지했다.
그들은 "시내 광야에서" 나왔다. 그리고 "바란 광야에서" 쉬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모든 이동은 광야에서 또 다른 광야로의 이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더 낳은 변화를 기대하지만 막상 그 결과는 그렇지 않는 수가 많다. 언제 어디로 가든, 우리가 각오할 것은 인간의 약한 본성에서 오는 공통적인 비극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 가서 모두가 편히 쉬기까지는, 도무지 평안과 쉼이 없을 것이다.
💡 12절,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여정을 따라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였고, 그 구름이 바란 광야에 머물렀으며
- ‘바란 광야'하지만 그들은 불행하게도 바란 광야 도착 이후 다베라에서의 원망 사건(11:1-3),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보여 준 탐욕스러움(11 :4-35) 그라고 하세롯에서의 미러암과 아론의 불평 사건(12:1-6) 및 결정적으로는 가데스에서의 백성들의 원망 사건(14:1-4) 등 연속되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광야에서 40여 년 동안 방랑 생활을 해야만 하는 징계를 받게 된다.
- 우리의 인생 속에도 시내 광야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곳도 많지만, 바란 광야와 같은 참으로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곳도 많다. 그러나 어떤 장소에 이르게 될지라도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묵묵히 걸어간다면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함 2:4).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고 두려운 광야'로 여겨졌는데(신1:19), 이 지역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구성된 낮고 험한 언덕이 가로지르고 있고, 메마른 모래 고원으로 되어 있으며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데스와 이웃한 바란 광야에 왔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어 광야 노정의 목적지요 종착점인 가나안 땅에 가까이 다다랐음을 의미한다.
- 그들의 여정을 따라 : 그들에게 각자 맡겨진 임무와 순서에 맞게 진영을 정리해 광야길을 떠났다.
- 구름이 머물렀으며 : 애굽에서 430년 동안 정착 생활을 하였던(출 12:40)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에서 행군을 반복하고 천막 생활을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그 구름의 인도에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맡겼다. 이와 같이 언제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모든 삶을 맡기고 철저히 순종하는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인의 삶인 것이다(수 1:5-9; 시1편; 엡5:18-21).
Ⅱ. 저희들이 최근에 주어진 모형에 따라 행군한 그 대형이 자세히 나와 있다.
💡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하면서 그들은 무질서하게 대열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군대처럼 조직화하여 행군을 시작하였다. 장정만 60만이 넘는 무리를 이끌기 위해서는 명령 체계가 확실한 군대 조직이 반드시 필요했던 거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여야 할 ‘군대'로 간주하였다(출12:41).
이스라엘 백성들이 척박하고 황량한 광야를 지나 이방인둘이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그들에게는 수많은 어려움이 닥칠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군대처럼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는 조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렇게 볼 때 바로 교회야말로 어 땅의 수많은 영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함께 힘을 모아야 하는 조직이며,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적인 군사로 그 속에 속해야 한다(빌 2:25; 딤후2:3, 4).
우리를 대적하는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이 세상(벧전5:8)에서 주님의 백섬둘은 승리의 깃발을 높이 쳐든 에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그 뒤만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딤후2:3-4).
- 유다 편대가 먼저 행진했다(14-16절).
유다 지파와 함께 유숙하던 선발대의 깃발이 이제는 지휘권의 표시가 되었다. 다윗 시대에로 지휘권의 권한은 유다 지파에게 맡겨졌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대장에게 위임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에게로 모이리라" 는 것이 예언되어 있었다.
- 그리고는 레위 지파의 두 집안이 왔다. 그들은 회막 운반을 맡았다. 구름이 떠오르자 마자, 회막을 걷어서 이동할 채비를 갖추었던 것이다(17절). 그리고 회막을 나누어 실은 수레 6개가 왔다. 이 모든 행진 중에 회막은 종종 이동했다. 이것은 구약 율법 중 의식법의 유동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종종 바뀌어지던 의식법은 마침내 사라졌다(히 8:13).
💡 성소 안에 있는 성물들 곧 건설병상과 등대와 분향단 등의 성물들은 먼저 제사장들에 의해 포장된 후(4:4-15) 레위 지파 중 고핫 자손들에 의해 운반되었다(4:15; 10:21). 하지만 성막 외형을 만들고 성막 골격을 설치하는 데 쓰이는 구조물은 레위 지파 중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들이 운반해야 했다(4:21-33).
본문에 의하면 이들은 유다 진 기에 속한 자들과 르우벤 진 기에 속한 자들 사이에서 진행하였는데 보다 구체적으로는 유다 진영의 가장 말미에 있던 스불론 지파와(16절) 르우벤 진영의 선두에 있던 르우벤 지파 사이에 서야 했다.
성물을 다루던 고핫 자손은 성물을 손으로 운반했으나(4:15)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운반해야 했던 것은 부피가 크고 무거운 것이었으므로 어깨에 젊어지고 운반한 것이 아니라 각각 수레 2대와 소 4마리, 수레 4대와 소 8마리틀 분배받아 이것을 사용하여 운반하였던 것이다(7:6-9).
- 다음으로는 르우벤의 편대가 행진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서" 된 일이다(18-20절).
- 그 후에는 회막의 기구를 맡은 고핫 집안이 뒤따랐다. 그들은 가장 안정하고 또 영예로운 위치인 "진 한가운데서" 행진했다(21절). 그리고 그들(즉, 난외에 있는 바대로 게르손과 므라리 집안)은 "그들(고핫 족)이 이르기 전에 회막을 세웠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레위 집안들뿐만 아니라 제 1편대에 있던 이스라엘인들도 회막을 세우는 일에 협조했을 것이므로 이렇게 일반적인 말로 표현된 것 같다. 아마 자기들의 천막을 치기 전에 먼저 성막을 쳤을 것이다.
💡 성막을 세우는 일은 성막을 옮긴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에게 맡겨진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17절). 이들이 성막 세우는 일을 끝내야만 고핫 자손이 성물을 제대로 옮겨 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핫 자손들보다 미리 도착해 성막을 세워야 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참으로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이에 고탓 자손이 운반하는 성물이 지체 없이 질서 가운데 성소에 안치될 수 있도록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추해 볼 때 우리의 삶이 만약 무질서하며 혼란스럽다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는 덜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전14:40).
- 에브라임 편대는 법궤를 뒤따라갔다(22-24절).
시편 기자의 기도는 이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도 본다(시 80:2). 즉 그는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 앞에서" -이제 지파가 한 편대를 이루었다-" 주여 용기를 내사" (법궤를 용기라고 칭했다. 시 78:61) "우리를 구원하여 주소서."
- 단 편대가 제일 뒤에 갔다(25,27절).
이들은 "모든 군대의 후진" 이라 했다. 뒤에 남은 자들은 모두 여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나 어린 아이들(아마 이들은 각 집안의 우두머리들이 돌보았을 것이다)이 아니라 모든 부정한 자, 섞여 사는 무리들, 그리고 연약한 모든 자들은 뒤에서 행진해 갔다. 요셉을 양떼처럼 인도하시는 분은 제일 뒤에 있는 자들까지도 살피신다(겔 34:16).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자들도 보살피신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에게 보내 준 자들은 그가 잃지 아니할 것이다" (요 17:11).
💡 단순히 모든 진 가운데 맨 끝으로 진행하는 순서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마치 정찰 임무를 띠고 적의 진영에 들어가는 부대의 맨 뒤에서 후방을 경계하며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후군의 임무를 나타내는 말.
⇒ 이것만 보더라도 이스라엘 전체 진영이 하나의 체계화된 군대로서 각 지파의 진이 각각의 위치에서 세분화된 각자의 임무를 일사분란하고 조직적으로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 28절,
이스라엘 사람둘의 여정은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지도자 모세를 도와 이 대열을 실제적으로 이끌어간 것은 족장들이었다. 이것은 보다 효율적이고 안전하며 질서있는 행군을 위해서였다.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과 삶 가운데서의 모든 필요 역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채우신다(시107:9; 빌4:9).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거했지만 각자에게 맡겨진 일들을 하나님 뜻에 거스르지 않고 최선을 다해 행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맡겨진 일들을 최선을 다해 행해야만 한다.
● 호밥에 대한 모세의 요청(민수기 10:29-36)
💡 영적교훈 서론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출발하여 가데스에 이르는 여정 중에 있었던 사건으로 모세가 광야 지리에 밝았던 자신의 처남 호밥에게 길 안내를 부 탁하는 장면.
시내산을 떠나 이제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을 향해 험준하고도 생소한 광야길을 지나가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릴 때부터 광야에서 생활한 호밥은 그 누구보다도 좋은 안내자요 조언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름 기등과 불 기둥이 여전히 그들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호밥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는 모세의 행동은 일면 불신앙적 행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행위는 걸코 불신앙적 처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행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보다 효과적으로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한 노력의 발로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기를 바라시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을 무시하시지는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헤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미신적 맹신에 불과합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밥이 동행함으로 그로부터 그들이 처한 위치와 지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듣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신 이유를 깨달아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의 지형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용함으로서 보다 편안하고 안전하게 광야길을 같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라도 결코 세상적인 지식이나 재능, 그리고 경험을 무시해서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Ⅰ. 모세와 호밥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의 기록이다. 이스라엘의 진은 가나안을 향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혹자는, 호밥이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 자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출애굽기 18장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밥은 이드로 또는 르우엘이나 라구엘(출 2:18)이라고도 하는 이의 아들일 가망이 더 크다. 나이가 많았으므로 그 아버지는 고향에 갈 때(출 18:27). 그의 아들 호밥을 모세와 함께 남겼다. 바실래가 김함을 다윗과 남겨 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장인이란 단어는 처남이란 단어와 원어로는 같다. 이제 이 호밥은 이스라엘이 그의 고향 부근 시내 산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계속 같이 유숙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이동하고 있으므로, 호밥은 자기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 29절, 그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
- 모세와 호밥 사이의 관계는 다소 불확실하다. 본문에서 호밥은 모세의 장인의 아들로 나타났지만, 삿4:11에는 호밥이 모세의 장인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호밥을 모세의 처남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르우엘은 모세의 장인, 그는 시내 광야에서 모세를 방문하였다가 곧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출18:27). 그러나 호밥은 그 후로도 계속하여 이스라엘 백성둘과 동행하였으며, 나중에는 그둘과 더불어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삿1:16; 4:11).
- 모세는 자기들과 같이 가나안에 가자고 친절한 초대를 한다(29절).
모세는 그에게 약속하기를, 자기들이 필경 그를 선대할 것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을 주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말씀하셨느니라." 이것은 마치 다음과 같은 말이다. "오라. 우리 중에 함께 거하자. 우리가 잘 지내게 되듯 너도 잘 지내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잘 지내게 해 주시마고 약속하셨느니라" 는 것이다. 하늘의 가나안을 향해 가는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친구들에게 같이 가자고 행해야 한다. 남이 함께 간다고 하여 결코 우리의 보물이나 기쁨이 감소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라고 하셨으리라" 하는 이 말보다 더 힘있게 하나님의 백성을 우리 백성으로 삼게 하는 주장은 없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와 교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요일 1:3). 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와 같이 가는 것이 좋다(슥 8:23).
💡 29절, “ ...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땅으로 우리가 진행하니, 우리와 동행해 주십시오.
- 원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이 우리와 함께 가야만 한다’***란 뜻으로 강력한 권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강한 어조로 호밥의 동행을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호밥이 곡 필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우리가 선대하겠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 본문은 모세가 호밥에게 단순히 물질적인 유익을 준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보다는 여호와 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즉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방인인 호밥과 그 일행에게도 행하리라는 보증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삿 1:16; 4:11).
- 하나님의 복은 온 세상을 향하여 열려져 있다. 그러나 그 복의 문에 들어가려면 그의 부르심 앞에 순종해야만 한다(계 3:20). 한편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우리 주변의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을 함께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창12:1-3).
- 호밥의 현재의 생각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었다(30절).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잘 볼 수 있는 자들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표적을 아는 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동행을 청해야 한다. 그러나 호밥이 거부하는 것은 자기의 본토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계약의 축복의 진가를 믿게 되면, 그것은 생각보다는 크게 작용하지 않게 된다. 그는 사실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다(미디안 사람은 그두라의 후손이므로 아브라함의 혈통에 관계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신앙을 상속 받지는 못한 자들이다(히 11:8). 그렇지 않고서는 호밥이 모세에게 이런 답변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보이는 세계의 사물들은 보이지 않는 저 세계의 일 추구를 크게 방해한다. 이 세상의 거대한 장점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매력을 능가한다.
💡 30절, 본문은 단순히 호밥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친족들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즉 자기 고향 외에는 다른 어떤 곳으로도 가지 않겠다는 말이며, 다른 어떤 좋은 것도 필요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표현으로 보아 아마도 호밥은 심한 향수병에 걸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아버지 르우엘도 고향으로 돌아간 상황에서(출 18:27) 낯선 사람들 속에서 생활하는 광야 생활에 더욱 지쳐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자기 고향과 친척들에 대한 그리움은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본문의 답변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모세의 간청에(31.32절) 그는 결국 편안한 고향집으로 향하는 길 대신 꿈과 소망이 있는 모험의 길, 여호와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으로 향하는 그 길을 선택하게 된다.
- 이는 한편으로 그 백성을 위해 호밥이라는 훌륭한 길 안내자를 예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드러나는 장면이며,
-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체험한 이방인이 마치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창 12:1-4) 자신의 고향과 친척을 버리고 언약 백성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놀라운 구원 역사가 실현되는 장면이다.
- 모세는 지극히 간절히 청하여 그의 의사를 바꾸었다(31,32절). 모세의 주장은 이렇다.
(1) 호밥이 자기들에게 쓸모있는 자라는 것.
"우리는 광야에다 진을 쳐야 하리이다" (그 땅은 호밥이 잘 알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의 눈이 되소서. 우리가 진 칠 곳을 안내하거나 행진할 곳을 말하라는 뜻은 아니옵니다" (이것은 구름이 했다). "단지 우리가 지나가거나 진칠 곳의 편익과 불편을 미리 말해 주소서. 우리가 편리한 점은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불편한 점을 위해서는 최대한의 방비를 하리이다."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뢰와 잘 어울릴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하자. 기적으로 인도함 받는 자들이라도 일상적인 지도 방편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모세가 이것을 제의한 것은 그의 정보에서 많은 유익을 얻으려 해서가 아니라 그가 다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여 기뻐할 수 있도록 하며 고무해 준 것이라고 본다.
칼빈은 이와는 매우 다른 견해를 피력했는데, 그것이 원의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나로서는 별로 중대한 뜻을 찾지 않겠다. "우리는 떠나지 마소서. 함께 와서 약속의 땅에 참여하소서. 당신은 광야에서 우리가 어떻게 진 칠 것을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소서. 또 우리는 고생에 동참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가나안에 가지 않더라도 많은 좋은 일을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분명히 이것 때문에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기 시작하였으니, 계속 함께 하소서."
💡 31절, "부디 저희를 떠나지 마십시오. 당신은 광야에서 우리가 어디에다 진을 쳐야 할지 아시니, 우리의 눈이 될 것입니다.
- 호밥은 미디안 사람. 주로 유목 생활을 하였기에 시내 반도와 가나안 주변의 지형, 정세, 그리고 광야에서의 생활 방식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모세는 호밥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였다.호밥은 이스라엘 광야 생활에 구체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을 것이다. 우물과 샘이 있는 곳을 알았을 것이고 땔감이 있는 곳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13장),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며(20장), 미디안 족속과 싸움을 벌이는 일 등에 있어서 호밥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 물론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시고 인간의 재능을 활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행9:15).
- 모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업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항상 인식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기꺼이 요구하며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독불장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을 함께 세워나가고자 하는 지체 의식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고전 12:12-31).
(2) 자기들이 그에게 친절을 베풀겠다고 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께 행하리이다" (32절).
💡 당신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을 선대할 것입니다.”
- 복을 내리시는대로 .. :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의해 받게 될 바로 그 복을 또한 그대로 호밥에게도 베풀 것임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상 호밥 역시 언약 백성의 공동체 안에 포함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한편 호밥이 내린 최종적인 결정이 무엇인지는 본문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호밥이 더 이상 모세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고 즉시 이스라엘 자손의 출발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는 필시 모세의 요청에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모세의 장인의 자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울의 시대까지 그 백성 중에 거하였다고 기록된 것(삼상15:6; 27:10; 30:29)으로 보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해 두자.
[1] 우리가 받은 것만 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힘 주신 것 이상으로 자선을 베풀 수는 없다. 우리가 감히 약속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게 하여 선행을 베풀었다는 것이 그 전부이다.
[2] 고생과 수고로 하나님의 백성에 동참한 자들은 그들의 위로와 영예에도 동참하게 된다. 광야에서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려한 자는 가나안에서 그들과 같이 운명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고난 당하며 그들과 더불어 다스리리라" (딤후 2:12; 눅 22:28, 29).
호밥이 어떤 대답을 모세에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침묵이 동의를 뜻하고, 결국 그들을 떠나지 않았기를 희망한다. 그는 자기가 유용한 일을 하리라는 것을 깨닫고서 자기 자신의 생각을 만족케 하기보다는 모세의 뜻을 따랐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남겼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가족이 그것 때문에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삿 1:16; 삼상 15:6).
Ⅱ. 이 행진 동안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나눈 교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그들은 "여호와의 산을" 떠났다(33절).
곧 그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고 그의 음성을 들었고, 그와 계약을 맺었던 바로 그 시내 산이다(그들은 그곳에서 축복으로 받아 왔던 그러한 현상을 줄곧 받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그 자랑스러운 산을 떠났다. 성서에서는 과거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곳이 아니고는 다시는 그 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제 시내 산을 작별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이것은 영원한 나의 안식처니라" 고 말씀하신(시 132:14) 그 산이다. 시내 산도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의 산을" 떠날 때에 "여호와의 계약의 궤" 를 가지고 갔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계속 친교를 나누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성인 남자만 약 60만 명, 그리고 여자들, 아이들, 가측들, 이 모두가 광야에서 삼일 길을 걷는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dl 아니다. 그러나 그들 뒤에는 여호와의 산이 그들을 배웅하고, 그들 앞에는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들의 쉴 곳을 찾고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들을 인도했다. 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장면인가!
1.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길을 지시했다."
계약의 궤가 그들 앞서서 갔다. 어떤 자들은 이동의 장소를, 또 어떤 자는 단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궤는 이스라엘 진의 한 가운데서 움직이고 있었으나, 여전히 그 위를 덮고 있던 구름이 그들의 모든 동작을 지시했던 것이다. 궤(곧 궤의 하나님)는 그들을 위해서 "쉴 곳을 찾았다" 고 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나 자식은 탐색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현명한 자가 그들 앞서 가면서 갈 곳과 진 칠 곳을 찾듯이, 그들이 인도된 모든 곳은 그들에게 그러한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정탐해 내하신" 땅이라고 일컬어졌다(겔 20:6).
💡 증거궤
- 성물 중 가장 중요한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지의 땅을 향하여 나아갈 때 제사장이 멘 언약궤가 선두에서 앞서 나아간다는 것은 -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줌.
증거궤는 그들의 쉴 곳을 찾았다
- 언약궤로 상징되어진 하나님은 이스라에 백성이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를 찾고자 미리 앞서가셔서 광야의 여러 지형과 상황 등을 자세히 살피셨다. 이처럼 때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지 못해 고민할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앞서 가셔서 우리의 나아갈 길을 찾고 계신다.
- 쉴 곳
- 본문에서는 일시적인 안식처를 의미하지만 영구적인 장소(신12:9; 왕상8:56; 시132:14)와 영원한 구원의 안식처, 즉 하늘 나라(시95:11; 히3,4장)를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
-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찾은 안식처가 비록 잠시밖에 쉴 수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으로 인도하시고 그들과 함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곳이 곧 진정한 안식처가 아니겠는가(눅 17:20-21)?
- 우리는 물론 결국 종말에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해야 한다. 현재 이 땅에서도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 그것을 통하여 그들은 "저들의 모든 길이서 하나님께" 고백하고, 법궤를 하나님의 임제의 표증으로 삼았다.
궤가 움직이거나 쉬거나, 그들은 줄곧 하나님을 앙모하고 있었다. 회중의 입을 대신한 모세는 법궤가 움직이거나 서거나 간에 기도를 드렸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들어오거나 나가서나 기도로써 스스로를 성별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기도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
(1) 법궤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드린 기도가 여기에 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을 흩으소서!" (35절) 당시의 그들은 황량한 곳에 있었으나, 적국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길 안내와 광야에서 식량 조달뿐만 아니라 전쟁의 성패를 하나님께 맡기고 있었던 깃이다. 다윗도 오랜 후에 이 기도문을 이용했다(시 68:1). 그도 역시 여호와의 전쟁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 35절, 궤가 출발할 때는 모세가 말하기를 "여호와시여, 일어나시어(쿠마) 주님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주님 앞에서 도망하게 해 주소서." 하였고,
- 일어나시어(쿠마) : 이는 결연한 모습으로 일어나 대적들을 물리쳐 달라고 여호와께 부르짖는 모세의 간곡한 기도의 외침이라 할 수 있다.
- ↔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이러한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지 못했다. 그 단적인 예로 가나안 정탐에 나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패할 것이라고 고백함으로 자신들의 믿음의 연약함을 드러내 보였었다(13장).
- 흩으시고 :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들의 대적자들의 대적자가 되어서 그들을 철저히 물리쳐 주실 것을 간청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 우리를 위협하는 수많은 적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일어나셔야만 무찌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일어나시면 그 일은 순식간에 끝나기 때문이다(시 76:8.9).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세상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원수들도 있다. 공공연한 적도 있고 은폐된 적도 있다. 그의 진리와 법과 규례와 백성을 해치는 원수들이다.
[2] 하나님의 적을 흩고 무찌르는 것은 주의 모든 백성들이 간절히 바라고 믿고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이 기도는 하나의 예언이었다. 하나님을 계속 대적하는 자들은 자기의 멸망을 재촉할 뿐이다.
[3] 하나님의 적을 흩고 무찌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일어서지 않고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일어나시면" 순식간에 그 일은 끝난다(시 76:8, 9). "주여, 태양이 일어나 밤의 그림자들을 흩어 버리듯이, 일어나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일어나사 그의 적을 흩으셨다(시 68:18).
(2) 법궤가 쉴 때도 기도했다(36절).
[1] 하나님의 백성을 쉬게 해달라고, 어떤 자들은 본문을 이렇게 읽는다. "오,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천만인을 돌이키소서. 이 곤경이 지난 뒤에는 그들을 돌이키사 다시 안식하게 하소서." 그래서 이런 말도 있다(사 63:14). "여호와의 영이 그를 쉬게 하셨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와 성공을 더하게 하시사, 평화의 아침에 느끼는 평온을 누리게 해 달라고 했다.
[2]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안식하시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읽었다. "이스라엘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다음과 같은 점을 명심해 두자.
첫째, 하나님의 교회는 큰 집합체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는 수 천만인이 속해 있다.
둘째, 우리는 기도 중에서 이 집합체와 우리를 관련시켜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복리와 행복은 하나님께서 계속 함께 계셔 주는 데에만 있다. 그들의 안전은 그들의 수효가 수 천만이라 해도 그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또 그들에게 다시 돌아가 그들과 함께 계시는 그의 임재에서 기인된다. 이 수천명이란 하나의 암호이며, 그가 표상이시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 너 이스라엘은 행복하도다! 어느 민족이 너와 같은고!" 라고 할 수 있다.
💡 34절, 그들이 진으로부터 진행할 때,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들 위에 있었다.
- 본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한 그 ‘구름’을 ‘여호와의 구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이 이글거리는 사막의 열기와 작열하는 태양 빛 속에서 구름이 만드는 그늘의 덕을 얼마나 크게 보았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표현으로 그 그늘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억 속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전능하신 자의 그늘' (시 91:1)이나 ‘폭양을 피하는 그늘' (사 25:4,5)***과 같은 표현으로 이어졌다.
- 즉 지금 본서 저자는 그 그늘이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이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초자연적 구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 36절, 그것이 쉴 때에는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시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 돌아와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 돌아오소서 : 모세의 간절한 마음이 내포된 표현.이 땅의 모든 죄악과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승리의 나팔 소리와 함께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주님, 그 날을 기대하며 오늘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 예수여 오시읍소서"(계 22:20)!
- 이스라엘 행군 대열보다 앞서 나가셔서 대적들을 물리치신(35절) 여호와께서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그들에게 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것. 그리고 이 말씀은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를 계22:20으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