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 성경읽기
출애굽기 16, 누가복음 19, 욥기 34, 고린도후서 4
묵상구절
11:4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들이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울면서 말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는가?
11:5 이집트에서 값없이 먹던 생선과 오이와 멜론과 부추와 양파와 마늘이 생각나는데,
11:6 지금 우리의 기력이 약해졌으나 우리 앞에 이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11:7 만나는 고수 씨와 같았으며 모양이 ㄱ)브델리엄과 같았다.
11:8 백성이 돌아다니며 만나를 모아,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어서 냄비에 삶아 과자를 만들었는데, 그 맛은 기름에 튀긴 과자 맛과 같았다.
11:9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 만나도 그 위에 내렸다.
11:10 모든 백성의 가족들이 각각 자기의 장막 문에서 우는 소리를 모세가 들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셨고 모세가 보기에도 불쾌하였다.
11:11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드렸다. "주께서 왜 주님의 종을 괴롭게 하시며, 왜 주님 앞에 은혜를 입게 아니 하시고 이 모든 백성의 짐을 제게 지우십니까?
11:12 제가 이 모든 백성을 잉태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았습니까? 왜 주께서 저에게 유모가 젖먹이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셨던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까?
11:13 제가 어디서 고기를 구하여 이 모든 백성에게 주겠습니까? 그들이 저에게 울며 말하기를,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고 합니다.
11:14 저는 이 모든 백성을 혼자 감당할 수 없으니, 이 짐이 제게 너무 무겁습니다.
11:15 만일 주께서 제게 이같이 행하시려면 제발 저를 죽이셔서 주님의 눈앞에서 제가 은혜를 입어 이 악을 보지 않게 하여 주소서."
11: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장로들 중에서 네가 백성의 장로와 감독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 칠십 명을 모으고, 그들을 회막으로 데려와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여라.
11:17 내가 내려가 거기서 너와 함께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 위에도 임하게 하겠으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질 것이며 네가 혼자 지지 않을 것이다.
11:18 너는 백성에게 말하여라. 내일 너희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라. 너희가 고기를 먹게 될 것이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서 들으시도록 울면서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까? 이집트에서는 우리가 행복하지 않았던가.' 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고기를 주셔서 너희가 먹게 될 것이다.
11:19 너희가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 일만 먹을 뿐 아니라,
11:20 냄새가 너희의 코에 넘쳐서 싫어할 때까지 한 달 동안 먹을 것이니, 이는 너희 가운데 계신 여호와를 너희가 거부하고 주 앞에서 울며 '왜 이같이 우리가 이집트에서 나왔던가.'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11:21 모세가 말하였다. "저와 함께 있는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인데, 주께서 그들에게 고기를 주어 한 달 동안이나 먹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1:22 하지만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그들에게 충분하겠으며, 그들을 위하여 바다의 모든 고기들을 모은들 그들이 만족하겠습니까?"
11: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이제 내 말이 네게 이루어지는지 아닌지 네가 보게 될 것이다." 하셨다.
매튜헨리/옥스퍼드
● 만나와 메추라기(민수기 11:4-15)
본문은 불행하게 혼란된 사회와 이스라엘의 무질서, 즉 백성과 방백들이 다같이 불안하게 되었던 사건을 말해 주고 있다.
💡 10:11-12:16에서는 시내산에서 가데스까지의 행군 여정과 그 어간에 발생한 각종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하에 본장은 1-3절에서는 시내산 출발 후 첫 원망 사건인 다베라 원망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35절에서는 두번째 원망 사건으로 음식으로 인한 원망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두번째 원망 사건의 개시 부분으로 음식으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둘이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무리들'의 영향을 받아 출애굽 이후 그둘의 양식으로 먹어 오면 만나에 싫증을 내어 하나님께 원망 섞인 불평을 늘어놓게 된 것업니다. 이스라엘 백성둘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악행으로 인하여 어머 다베라에서 하나님의 정계를 받았다가 모세의 중보기도로 간신히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난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중하며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또다시 탐욕에 이끌려 불평을 늘어놓는 악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오늘날 구원 받아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현세적인 안락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우리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Ⅰ. 백성들은 안달하며, 하나님께 도전했다(시 78:19 참조).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영광스런 현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범죄자들은 누구인가?
(1) "이스라엘 중에 썩여 살던 무리" 가 시작을 했다. 그들은 "탐욕을 품었다" 고 했다(4절).
💡 옥스퍼드: 이스라엘 백성과 혈통이 다른 사람만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기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함께 모여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시키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었던 일부 불만 세력들도 포함되는 것.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떠나 왔던 그 오합지졸은 오직 그 약속의 땅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자들이며, 그 곳에 가는 도중의 시련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자들이었다.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그들은 식객들이었고, 자기들의 고향에서 편히 사는 방도를 모르고 있었던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과 동행하려 했던 자들이요, 그래서 (말하자면) 그들은 외국에 나아가서 자기들의 행운을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양떼들에게 감염시키는 전염병을 지니고 있는 양들이요, 온 덩이를 부풀게하는 누룩이었다. 몇몇 불순하고 불만스러워하고 성질이 나쁜 자들은, 그들을 옹호하지 않으려는 큰 관심이 배려되지 아니하는 한, 능히 최상의 사회에까지 거대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이런 자들이야말로 "패역한 세대들" 이며, "우리 스스로를 그들에서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행 2:40).
(2) "이스라엘의 자녀들" 까지도 거기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4절).
그 거룩한 자손들은 자기들을 스스로 이 가증한 백성들과 연합시켰다. 혼합된 무리들은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자녀의 수효에 함께 계수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도 중시 여기지 않는 제쳐진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녀들은 자기들의 특성과 품위를 망각하고 그들과 한 패가 되었고, 그들 진영의 불량배들이 자기들의 추밀 고문관이라도 되는 듯이 그들의 말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친근하고 많은 특권을 누리는 백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을 자행하고 말았도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알려 주시사 당신을 찬양 하도록 하게끔 했던 그 백성들조차 하나님께 치욕을 돌리니,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받고 있는 영광이란 과연 몇 푼어치나 되랴!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들의 외적 신앙 고백과 신앙인의 특권이 죄에 대한 사탄의 유혹이나 죄 때문에 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주는 방파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고전 10:1, 2, 12 참조).
- 그 범죄 내용은 무엇인가?
그들은 탐욕에 빠져 원망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바로 얼마전에 같은 죄로 인한 징계를 받았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 죽었지만, 그들은 다시금 같은 죄를 짓게 되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징벌하시어, 그 불길이 채 그들에게서 사라지기도 전에 또 다시 죄악으로 돌아간 적이다(잠 27:22 참조).
💡 그들의 지나친 육체적 소욕이 결국은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신앙을 자극했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육체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갈망이 있다. 하지만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기 마련이다(갈5:17).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체의 소욕을 이기기 위해 오직 성령을 좋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갈5:1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울면서 말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는가?
- ‘다시' : 언약 공동체가 죄악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거나 역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켜 배교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하나님께로부터 돌이켜 옛 행실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 본문은 원망하고 불신앙하는 옛 행실로 ‘다시 돌이켜서' 결국은 애굽의 옛 죄의 노예 상태로 ‘돌아가려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배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 불만 세력의 무리들’(아싸프무프)'이 애굽에서 먹었던 옴식을 갈망하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그것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고,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주위 환경에 얼마나 쉽게 영향을 받는가 여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의 첫 장을 이렇게 시작하였는가 보다.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틀 좋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1, 2).
-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축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고기를 달라고 통곡하였다. 아마도 이 가축들은 하나님을 위한 제사용으로 준비되었기 때문에 먹지 않았던 것 같다(출5:3; 10:24-26). 그렇다고 이들은 기근 속에 있지도 않았다. 매일 그들이 덕을 수 있을 만큼의 만나가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제공되있다.이러한 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세 역시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13절)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마찬가지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 백성이나 모세나. 모두 1년 전 신 광야에서의 메추라기 사건을 별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으로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 첫째는 신 광야에서의 메추라기 사건이 단회적이었다는 점이다. 만나에 관한 기사는 계속적으로 언급되었지만(출 16:14-34) 메추라기에 관한 기사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였다'는 내용의 짧은 언급으로 끝난 것으로 보아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그 고기를 한 달 간을 물리도록 먹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20절).
- 둘째는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서의 메추라기 사건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봄철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홍해를 건너 이동하는 메추라기가 운좋게 자연적으로 이스라엘 진영에 떨어진 것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출 16:13 설명 참조). 이러한 점을 반영이라도 하듯 31절에서는 메추라기 사건을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로 묘사한 것과는 달리 출 16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부분을(출 16:12) 제외하면 메추라기 사건을 하나님의 강력한 초자연적 역사로 묘사하는 내용을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
- 셋째는 시간적인 요인이다. 본장에 기록된 메추라기 사건의 시기는 시내산을 떠난 시기가 출애굽 이 년 이월 어십일(10:1)이므로 그 이후가 분명하다. 따라서 신 광야에서의 첫 메추라기 사건(출애굽 일년 십오일, 출 16:1)이 있은 지 약 1년이 더 지난 시점에서 그때의 사건을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믿는 믿음은 많이 시들었을 것이다.
-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 그러나 그들은 불평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식욕을 다양한 먹거리로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불평과 원망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에 의해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짐에도 더 좋고 더 풍요로운 것을 누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미 1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추라기를 보내어 고기를 먹게 하신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출16:1, 13). 정확히 애굽에서 나온 지 1개월 후 그리고 홍해를 건너 엘림을 지나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그둘은 고기를 먹게 해 달라고 원망했고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어 진을 덮게 하셨다. 그럼에도 지금 이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간구하기보다는 ‘누가 고기를 먹게 할꼬' 라고 슬퍼하고 있다.
11장은 이전까지 진술되어 오던 민수기 내용의 전환점 역할을 하고 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출애굽 제 1세대의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이 11장 서두에 특히 1절과 본절에 깔려 있다.
(1) 그들은 자기들이 애굽에서 누리던 풍요한 진수성찬을 찬미했다(5절).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기서 끌어내 온 것이 엄청난 잘못이라도 되는 듯이 행했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노역의 짐이 무거워 한숨을 지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활은 무거운 노예살이 때문에 점점 고통스러워 가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거기서 모두 방백들처럼 지냈다는 듯이 말하면서, 이것이 저들의 현재에 대한 불만의 구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애굽에서 맘껏 고기를 먹었다고 말할 낯이 있는가? 그들은 거기서 중노동으로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있지 않았던가. 그들은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기억했다" (과연 좋은 음식이로다!). 그러나 그들은 벽돌 굽던 일과 공사 감독관, 압제자의 음성과 채찍의 아픔은 기억하지 못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이 백성들은 그 모든 것을 잊었다.
💡 5절, 이집트에서 값없이 먹던 생선과 오이와 멜론과 부추와 양파와 마늘이 생각나는데,
- 본절에 기록된 음식들은 노에 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둘도 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고 ‘파'와 ‘마늘' 같은 것은 강제 노역에 동원된 일꾼들의 식사로 제공되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둘들 그 옴식들을 값없이 먹었다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노예 생활의 강제 노역에서 그들은 참으로 힘들게 수고하였기 때문에 이 정도의 음식들은 지극히 당연한 대가였고 오히려 너무나 부족한 대가라 할 수 있다.왜냐하면 이 말은 ‘애굽의 종으로 있었을 때도 이러한 음식들을 값없이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제 자유로운 언약 백성이 된 우리에게 겨우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이 만나뿐인가?' 라고 한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결국 이 말은 배부른 노예 생활이 배고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유로운 생활보다 낫다는 불신앙의 극치를 나타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굳이 ‘표현이'란 표현을 써서 말한 것은 모세를 향한, 더 나아가 하나님을 향한 강한 불만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6절, 지금 우리의 기력이 약해졌으나 우리 앞에 이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 본문은 단순히 식욕의 저하나 영혼의 갈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곤고함으로 인해 삶의 의욕까지도 상실 하고 죽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토로하는 것이다.
- 기력이 약해졌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만 먹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명이 시들고 있다'고, 즉 ‘만나만 먹고는 못살겠다'고 불평과 투정 섞인 원망을 하는 것이다.
- 사실 인간의 식욕을 만족시키기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광야에서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을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함이라기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이 베플어 주시던 맛난 음식에 신물이 났다(6절).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떡 곧 천사들의 음식이었다. 저들의 원망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그 음식에 대한 기록이 여기에 삽입된 것이다(7-9절).
그것은 음식으로도 좋았고, 보기에도 즐거웠으니 그 모양은 마치 동양의 진주와 같았다. 그것은 건강에도 좋은 영양가 있는 음식이었다. 그것은 "마른 빵" 이라고 불리우지 않았다. 그 맛이 신선한 기름 같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지혜서 16:20) 모든 사람 각자의 입맛에 맞았다고 하며, 자기들이 원하는 맛이 났다고 한다. 그것은 같은 종류였지만, 요리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함으로써 다양한 음식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돈을 내지 않았다. 애쓰지도 않았다. 그것은 한밤중에, 그들이 자고 있을 때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것을 모아들이는 수고란 말할 만한 노동이 못된다. 그들은 마음껏 먹고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는 값싸게 먹었고. 고기를 맘껏 먹었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만나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일반 섭리의 산물이 아니라 그들에게 대한 특별 호의로서, 직접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에서 나오는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만나는 저들이 먹고살던 음식과는 달리 매일 아침 새로운 것이 주어졌고.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었다. 그들이 만나를 먹고사는 동안은, 죄가 그들에게 초래했던 저주, 즉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리라" 고 했던 그 저주에서 면제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만나란 것은 돼지들이 먹기에도 부적합한 좋지 않은 음식이라는 듯이 말했다. "우리 영혼(개역:정력)이 쇠하여졌도다" 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좋은 음식을 공급해 주시지 않음으로써 자기들을 고생시킨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만나를 보고 경탄했었다(출 16:15). "이게 무엇이냐?" 즉 "이 무슨 진귀한 것인고!" 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우습게 생각했다. 불평투성이의 불만 자들은 자기들에게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지나치게 좋을 정도의 형편에서도 잘못된 것을 찾아내려 한다는 것을 명심해 두자.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여 그 일반적 자비에 대하여 "그러나" 라고 덧붙이는 것은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이다. 만나를 주었다. "그러나" 만나 외에 뭐가 있다는 것인가 하는 식이다. 매우 행복할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자들도 때로는 불만 때문에 스스로를 아주 비참하게 만들어 버리는 수가 있다.
💡 8절, 만나는 과자로 만든 만나의 맛이 기름 섞은 향기롭고 신선한 과자 맛과 같았고, 만나를 요리하지 않고 날로 먹으면 ‘꿀 섞은 과자'(출16:31) 같았다. 즉 만나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는 최고의 양식이었다.
9절, 본문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먼저 본문이 물리적 자연 헌상을 기록한 관찰일지가 아니라 문학적 표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본문은 본서 기자가 그의 눈에 비친 현상들을 마음에 떠오른 이미지 곧 심상으로 재현한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상 이슬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야간에 지면의 온도가 낮아져서 공기 중의 수증기가 그 지면에 응결되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본문의 표현 자체가 물리학적 현상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본서 저자는 해가 뜨기 전인 이른 아첨에 광야의 대지 위에 이슬이 맺히고 그리고 그 이슬이 사라지면서 그 위에 만나가 생기는 모습을 마치 이슬이 내리고 또 그 위에 만나가 내리는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출 16:13, 14는 동일한 사건을 보다 자연 현상에 가깝게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본문은 보다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3) 그들은 자기들이 고기를 먹기 전까지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노라고 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많은 양과 소떼를 끌고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탐욕이 많아서 자기들의 우양을 잡아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의 가축이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그들은 떡을 먹을 때처럼 공짜로 고기를 먹어야 속이 시원했다. 그렇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했던 자들이다). 아니면 성미가 너무 까다로와서 소고기나 양고기로는 만족을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애굽에서 먹던 고기처럼, 뭐 좀 맛있고 진귀한 고기를 꼭 먹고 싶어했던 것이다. 음식을 원한 것이 아니라 향연을 베풀기를 원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화목 제사를 드리고는, 그 제물 중에서 얼마를 자기들이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식탁은 변변치 않아서 그들은 제물보다 더 맛있는 진수성찬을 찾았음에 틀림없다. 쾌락의 절정에서야 느낄 수 있는 모든 기쁨과 만족을 누리려고 애쓰는 것은, 육적인 정신의 노예가 된 것이다. "진수성찬을 탐하지 말라" (시 23: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식에 대한 악속을 주셨다면, 우리가 기름진 것을 먹고 달콤한 것을 마시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4)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식량을 대줄 능력과 자비심이 없다고 불신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줄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릴 수 없다는 것을 당연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정죄받고 있다(시 78:19, 20). "그는 고기까지도 주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런 고기를 떡과 함께 주셨던 적이 있었으므로, 자기들이 궁핍해지자(출 16:13) 그런 요구를 다시 한번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원망대신에 기도를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신앙보다는 욕망이 앞서는 것은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5) 저들은 욕심에 뜨거웠다. 그들은 "탐욕을 탐했다" (문자적 의미는 그렇다). 저들은 얼마나 탐욕스럽게 욕심을 내었던지, 마침내는 성화가 나게까지 되었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그렇게 유치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싶은 것을 다 갖지 못했다고 해서 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욕심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자에게 신세를 져서 해결하려 했다.
우리가 어떤 욕심에 빠져서, 기도를 드릴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의 탐심을 위해서 음식을 구할 때는" 기도를 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다(시 78:18). 이 죄 때문에, "여호와의 불이 크게 붙어" 그들을 쳤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경고를 주어.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이" 우리가 악을 쫓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록되어 있다(고전 10:6).
(6) 고기는 좋은 음식이다. 많은 고기가 율법으로 허용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악을 따라 욕심을 부렸다고 씌어 있다. 그 자체로는 합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데도, 우리의 욕망을 따라 추구하면 나쁜 것이 되고 만다.
Ⅱ. 모세는 지극히 온유하고 착한 사람이었지만 이런 사실을 보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모세는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고 했다.
💡 10절, 모든 백성의 가족들이 각각 자기의 장막 문에서 우는 소리를 모세가 들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셨고 모세가 보기에도 불쾌하였다.
- 곧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울었고 또 각기 그 족속들에 따라 울었으며 또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의 장막 문 앞에서 울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과거 애굽 생활을 회상하며 고기를 먹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이처럼 모든 백성이 장막 문 앞에 나와 우는 것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얼마나 철저히 불신앙에 빠져 있는가를 잘 보여 준다.
-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이 더욱 심각해졌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또한 그에 따른 여호와의 심판이 가중될 것임을 암시한다(33절). 1절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곧바로 이스라엘 진영을 불로 심판하신다. 하지만 본절에서는 ‘모세가 듣고서' 그 상황으로 인한 어려움을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마음에 생겨난 매우 미세한 갈등을 엿보게 된다.
- 모세의 마음처옴 소명을 받아 바로 앞에 나설 때(출 3-5장) 이외에는 결코 한번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백성둘을 강하게 이끌어 오던 모세가 이 단락에서 처옴으로 지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의 종국에 대한(20:12; 신34:5) 암시를 주는 것일지 모른다.
- 모세는 지금 여호와의 진노하심과 같은 공의로운 마옴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의 탄식과 원망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지치고 괴곤한 마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이후에도 어찌하여 당신의 종을 ‘괴롭게 하느냐'고(11절), 그리고 즉시 자기를 죽여서 자기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해달라고(15절) 하나님께 탄식의 기도를 한 것이다.
11절,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드렸다. "주께서 왜 주님의 종을 괴롭게 하시며, 왜 주님 앞에 은혜를 입게 아니 하시고 이 모든 백성의 짐을 제게 지우십니까?
- 모세의 이러한 표현은 모세가 탁월한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큰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민족의 지도자로서, 또한 하나님의 종이며 그의 백성의 중보자로서 겪게 되는 모세의 고통을 잘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지도자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또한 쉬울 수도 없는 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을 참고 극복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사역자의 길을 걷지 못할 것이다.
-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
- 하나님의 눈은 사방에 있으며, 선과 악을 감찰하시고(잠15:3),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사 의인들을 지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대하16:9). 그러나 당시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눈을 발견치 못했다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 본문은 단순히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여 하는 말인가?본절 역시 이러한 문형을 취하여 모세는 자기가 괴롭게 된 상황보다도 여호와의 은혜를 입지 못한 데 대해 더욱 원망의 목소리를 무겁게 실었다. ‘주의 목전에 은혜를 없게 아니했다' 란 이 말은 이전에 있었던 구체적인 어떤 상황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로 출33, 34장에 나타난 내용이다.그러므로 지금 모세는 그때 상황을 회상하던서 ‘왜 그때 은혜를 입게 하시겠다고,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이제 와서 이 모든 백성의 짐을 내게만 지우십니까' 라고 절규하는 것이다.즉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의지하여 모세는 지금이라도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하읍소서, 또한 그 증거를 보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 이처럼 비록 모세가 힘들고 지쳐서 원망하는 목소리로 하나님께 말했지만 그 근본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굳센 믿음 때문이다.
- 그러나 이러한 모세의 말 속에는 분명 원망의 목소리가 섞여 있지만 결코 이것은 단순한 원망의 소리만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시겠다고 말한 그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간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과 그 백성을 중재하는 간구 속에서(14:16; 출32:13) 볼 수 있는데 모세는 항상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과 맹세에 의존하여 간구하였다.
- 시내 광야에서의 금송아지 사건으로(출 32장) 여호와는 친히 그 백성과 함께 가나안으로 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출 33:15, 16 설명 참조). 그때 모세는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함께하시고 함께 행하실 것을 간청하였다(출 34:9).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간청을 들어주셔서 언약을 세워 주셨다.
- 이 문장에서는 강조점이 뒷문장에 놓여 있어 처음부터 자신을 보내지 않았다면 이러한 모든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12절, 제가 이 모든 백성을 잉태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았습니까? 왜 주께서 저에게 유모가 젖먹이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셨던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까?
- 이는 모세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잉태하지도 않았으며 생산하지도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말이다. 즉 ‘여호와여, 당신께서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출4:22) 하지 않으셨습니까?’ 라고 모세는 반의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 따라서 그 백성의 짐은 모세 자신이 져야 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져야 한다고 은연중에 그 모든 일의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 **모세는 자신을 ‘양육하는 아비'**로, **이스라엘 백성을 ‘젖먹는 아이'**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데,
-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철이 없고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인지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애가 타도록 그들을 돌보아 왔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 사실 모세는 자신의 영원한 생명까지 걸고 그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돌보았으나(출 32:30-32), 그 백성은 끊임없이 원망하고(11:1; 출 15-24; 16:2; 17:3) 이제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고기를 먹게 해달라고 울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다.
-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셨던 ...
- 여기서 ‘주께서 맹세하셨던' 이란 표현은 → ‘맹세로 자기 자신을 묶는다'는 개념을 지닌다.
-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다윗에게 맹세하신 것을 성취하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의 절대적인 확실성과 불변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자신으로(창 22:16), 그의 거룩하심으로(시89:35), 그의 오른손으로(사 62:8) 그리고 그의 위대하신 어름으로(렘 44:26) 스스로 맹세하심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맹세는 그 말씀하심으로 천지가 완성된 것처럼 그 맹세 자체가 이미 성취와 완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13절, 제가 어디서 고기를 구하여 이 모든 백성에게 주겠습니까? 그들이 저에게 울며 말하기를,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고 합니다.
- 모세가 이와 같이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1년 전 하나님이 모세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고 메추라기를 보내 준 사건을 다른 백성들은 몰라도 모세는 기억했어야 했고 이번에도 여호와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어야만 했다(4절 설명 참조). 그러나 모세가 이러한 확신을 갖지 못한 것은 그가 지금 영육간에 매우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 ‘내가 어디에서 (고기를) 얻겠습니까?’란 이 말은 사실상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4절)란 백성들의 말과 다를 바 없는 불신앙의 말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축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었기에(출5:3)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이르도록 광야에서 고기를 먹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그들이 고기를 이와 같이 강력하게 요구함은 진정으로 고기를 먹기 위함이기보다 애굽에서외 생활을 그리워하며(14:3; 행7:37),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마땅히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감사하며 “내가 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졸도 알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빌 4:12, 13).
-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삶 속에서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그 환경을 평계삼아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불신앙을 고백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환경을 탓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염려한다면 우리의 모든 인생과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 된다.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우 강력하게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14절, 저는 이 모든 백성을 혼자 감당할 수 없으니, 이 짐이 제게 너무 무겁습니다.
-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계획이자 그분의 주권적인 역사였다. 그런데 본절의 말처럼 모세가 과도한 부담감을 나타낸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 이처럼 모세도 때론 우리와 같이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붙드셨기에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역자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 하나님은 이와 같이 연약함을 가진 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속 사역을 어끌어 가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며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기 때문이다(고후 12:7-10).
15절, 만일 주께서 제게 이같이 행하시려면 제발 저를 죽이셔서 주님의 눈앞에서 제가 은혜를 입어 이 악을 보지 않게 하여 주소서.”
- 모세는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 그 짐을 자기 혼자 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여기에서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께 요구하는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지금 백성들의 불신앙과 원망을 해결할 고기를,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간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짐을 덜어 줄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불려지는 모세조차도 이처럼 계속되는 역경과 시험 속에서 지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던 것이다.
- 이 호소에서 모세가 의도하는 바 핵심은 무엇인가?
- 제발 저를 죽이셔서...모세의 이와 같은 발언은 모세가 하나님을 의지하던 신앙에서 벗어나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영적 침체의 모습은 엘리야에게서도 볼 수 있다(왕상 19:4-21). 이처럼 신앙의 용장이라 할지라도 자칫하면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불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우리가 단 한순간도 영적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모세의 청은 자신을 완전히, 그리고 단번에 죽여 달라는 말인 것이다.
- 이 악을 보지 않게 하여 주소서..
- 모세가 처음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을 때는(출 33, 34장) 하나님의 동행을 구했다(11절 설명 참조). 하지만 이제 극도로 피곤하고 지친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의 ‘곤고함'을 보지 않도록 차라리 죽여 달라고 간청하는 침체된 영적 상태를 드러내었다.
- 그런고로 그 일의 죄악상은 지극히 큰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저들의 원망은 하나님께 큰 치욕을 돌리는 것이요, 모세는 이러한 치욕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또 모세에게까지도 크게 화를 내었다. 그들은 모세가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도 없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당하고 배은망덕한 백성들이 이렇게 계속 시끄럽고 귀찮게 굴게 되면, 결국 모세 자신도 화가 나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중시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가 화를 내었다 하여 그를 책망했다는 기록을 볼 수 없는 것이다.
2. 그러나 모세는 화가 나서 그릇된 길을 취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그들을 훈계해야 할 자기의 의무를 잊게 된 것이다.
(1)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과 은혜를 베푸시고. 그 특정한 민족의 구원과 인도에 그를 참여시킴으로써 큰 종으로 세우시고 영예를 주셨으며, 그 영예는 능히 그가 맡은 짐을 상쇄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영예를 경시했다.
(2) 모세는 너무도 많은 감정적인 원망을 늘어 놓았고, 작고 하찮은 소요에 대해서 과민하고 말았다. 그가 통치자의 수고-이것은 그저 보병들과 함께 달리는 것이다-를 감당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전쟁의 공포-이것은 마병과 싸우는 것이었다-를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는 마땅히 신중히 생각해 봄으로써 그들의 동요를 하찮게 여기고 묵과해 버릴 수도 있었다.
(3) 그는 자기의 행적을 찬미했다. 즉 "모든 백성의 짐이 내게 있나이다" 라고 했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멍에를 편하게 해 주셨었는데 말이다. 모세는 그들을 위해 숙소나 식량을 준비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 하셨다. 그리고 만일 어떤 고난이 생기더라도 조금도 모세가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는 그가 물을 수 있는 하나님의 신탁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처신을 가르쳐 주었고, 하나님의 권위가 그를 지원해 주고 있었고, 전능자의 권능 자체가 상벌을 내리고 있었던 때였기 때문이다.
(4) 그는 자기의 임무에 충실할 만큼 예민하지 못했다. 그 임무는 하나님의 위임과 명령으로 주어진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백성이 자기 자신이 낳은 자녀들이 아닌 고로 자기가 돌보아 주어야 할 의무가 없다고 제의했으며, 그들 기쁘게 부르시사 고용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그 백성에 대한 어버이 노릇을 하라고 직접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의무를 잊었다.
(5)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고기를 주오리까?" 라고 물은 것은 자신을 과대시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주부가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자신인 듯이 말한 것이다. "모세가 그들에게 떡을 준 것이 아니로다" (요 6:32). 또한 그는 자기가 단지 하나님의 한 도구가 되어서 그들에게 고기를 줄 수 있으리라는 것도 기대하지 못했다. 그가 말한 뜻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고기를 먹이시렵니까?" 한 것이라면, 그는 이스라옐의 거룩하신 분의 권능을 과소 평가한 것이다.
(6)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의 짐을 질 수 없다" (14절)고 말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불신한 말이다. 그 길이 훨씬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모세 자신의 힘으로는 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훨씬 더 큰 일이었더라도, 하나님께서 힘 주시면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7) 그가 당장에 자기의 생활에 다소의 불편이 있다고 하여, 죽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그것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죽기를 갈망한 것은 가장 나쁜 일이었다(15절). 이게 모세란 말인가? 이 사람이 이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란 말인가? 아무리 훌륭한 자라도 결함이 있으며, 때로는 자기들에게서 가장 탁월한 그 장점을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때의 모세의 걱정을 너그러히 봐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혹평하려고 애쓰지 말고 기도하자. "주여,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민수기 11:16-23)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나왔던 저들의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응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악함을 기회 삼아 그 자비의 광채를 더욱 빛나게 한다.
Ⅰ. 모세가 원망한 불평의 시정을 위한 처방이 나와 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통치자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저들의 불평에 지나치게 걱정을 품을 것이 아니라 평안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그가 당장에 통치자의 위치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 사실 그래야 마땅했겠지만 - 하나님께서 보조자들을 명령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고전 12:28)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었다" (즉 다스리는 일에 도움을 주는 자들이다). 그리하여 그의 명예가 깍기거나 실추된 것이 아니라 그의 일을 더욱 손쉽게 해 주었고, "그 백성의 짐을 질 수 있도록" 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방이야말로 모세의 마음에도 맞고 정말로 유익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모세는 그들을 지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16절).
그 백성들은 너무나 성급하고, 무분별하고 흥분되어 있어서, 선거를 시킬 수도 없었다. 모세 자신이 선출해야만 했다. 또 그래야 다시는 그가 불평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가 뽑을 인원수는 70이니, 애굽으로 내려갔던 사람의 수와 같다. 그는 장로가 될 자들, 곧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뽑아야 했다. 자기들이 "천부장 백부장" (출 18:25)처럼 우수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던 자들이 이제 이 훌륭한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정말로 장로들이 되리라고 네가 알고 있는 자들을 뽑으라. 이름만이 장로가 아니라 자기들의 직임을 다하는 인물을 뽑으라." 우리는 함께 시내 산에 간 장로들의 수효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출 24:1). 그러나 그들은 그 때만의 임시직이었다. 이들의 수효는 영적이다. 또한 이 입법에 따라서, 유대의 대의회 산헤드린-이것은 후대에 가서 예루살렘에서 열렸다. 또 그들의 대법원이었다-도 70명으로 구성되었다. 우리 구주께서도 열 두 사도들을 도와준 70인 제자를 뽑으신 것은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눅 10:).
💡 16절, 70인의 장로
-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전통적인 조직인 것 같은, 이스라엘의 장로 되었던 자 70인을 모세와 함께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불러 세우셨다. 이들이 어떤 기원에서 어떻게 선출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 장로들은 한 지파의 장로로 불리지 않았고 그 백성 전체를 관리하고 다스릴 만한 유사요 장로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애굽에 있을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한 일종의 원로들이었을 것이다(출4:29).
- 하나님은 그 70인에게 자격을 갖추어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들이 그 일에 적합하지 못할 때에는, 그들이 모세에게 더 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자질이 갖추어져야 된다(17절).
모세는 하나님께 지나치게 뻔뻔하게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그와의 교통을 단절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중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끼리도 서로를 귀중히 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려가 너와 이야기하리라" 고 하셨다. 그러면 그도 더욱 진정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네게 주었던 바로 그 영" 곧 지혜와 사랑과 용기의 영을 "그들에게도 부으리라" 고 하셨다. 모세가 그들에 비해 더 못한 영을 가진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그들이 모세와 동등해지지도 않았다. 여전히 모세를 필적할 자는 없었다(신 34:10).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맡은 지위에 맞는 다스리는 영으로 옷 입혀졌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입증할 수 있는 예언의 영을 받았다. 이리하여 하나와 신정이 수립되었다.
💡 17절, 내가 내려가 거기서 너와 함께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 위에도 임하게 하겠으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질 것이며 네가 혼자 지지 않을 것이다.
- 여호와께서 강림하여 모세와 함께 말씀을 나누시겠다는 것은 그 모인 장로들과는 구별되는 권위가 모세에게만 있음을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입증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 장로 70인 역시 처음에는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며 하나님께 원망을 한 것으로 보인다(10절).
-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신을 받은 후 그들은 모세의 동역자로 세움 받았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어 땅에 건설하기 위해서는 한마음으로 동역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서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로 모아져 동역자로 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영으로만 가능하다. 그러할 때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님을 중심으로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마음으로 함께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행 2:4)
- ‘네가 혼자 지지 않을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노' 곧 모세를 집중적으로 강조하여 지적하면서 ‘너 혼자' 그 백성의 짐을 결코 지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나 혼자는'(14절) 질 수 없다고 말한 모세의 원망 섞인 말에 대한 강한 질책이 담겨진 응답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러 쓰실 때에는, 자질도 주신다. 다소 자질이 부족한 자들을 자기들도 당당히 부름 받았다고 자부하지 말라.
(2) 모든 자격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모든 "완전한 은사는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
Ⅱ. 불미스럽던 사람들의 기분까지라도 만족스럽게 되어, 마침내는 아무 소리도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너희 몸을 거룩히 하라" (18절)는 명령을 받았다. 즉 하나님의 자비와 심판의 표시로 주어질 하나님의 권능의 증거를 받을 자세를 갖추라는 것이다. "오, 이스라엘이여, 네 하나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 (암 4:12).
- 하나님은 약속하셨다-차라리 경고하신 것이라 함이 좋을 것이다. 즉 그들은 고기를 실컷 먹게 되리라. 한 달간 계속 나날의 만나 외에, 고기를 먹는 정도가 아니라 고기 잔치를 갖게 될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처럼 저들의 식욕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고기에 신물이 나게 되리라(19,20절). "너희는 네 코에서 냄새가 나서 싫증이 날 때까지 먹게 되리라."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보자.
💡 19절,
-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진노와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20절, 냄새가 너희의 코에 넘쳐서 싫어할 때까지 한 달 동안 먹을 것이니, 이는 너희 가운데 계신 여호와를 너희가 거부하고 주 앞에서 울며 '왜 이같이 우리가 이집트에서 나왔던가.'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의도 : 넘쳐서, 싫어할 떄까지.
-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그 이상으로 그들에게 고기를 제공하여 질리도록(’한 달 동안', ‘넘치기까지') 먹게 하시겠다.
- 진노하신 하나님의 뜻을 보이고자 하심.
- 코: ‘진노'라고도 번역되는 단어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코에서 고기를 토해 낼 정도로 질리도록 먹게 하겠다고 하신다.
- 그들 자신의 탐욕이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 이스라엘의 죄 : ‘너희 가운데 계신 여호와를 너희가 거부하며, 주 앞에서 울며...’
- 이스라엘의 멸시의 대상이 누구였는가?
-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계신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서 계심에도 백성들이 그분께 간구하기 전에 고기를 찾아 불평한 것은 그들이 ‘그들 가운데 계신' 그 여호와를 멸시한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는 과연 자신들이 원망했던 여호와께서 ‘자기들 가운데' 계신 분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본문은 11절에서 원망의 목소리를 발한 모세에게도 그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것.
- 광야 길 가운데서 고기도 먹지 못하고 광야에 버려진 것 같은 자신들의 처지를 따져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에게는 전혀 관심없고 자기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그래서 멀리 계시는 여호와로 여기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늘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실상 그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고통하는 상황 가운데 계시면서 이제까지 인도해 오셨다는 사실이다.
- 이스라엘의 불평의 근원우리가 우리의 상황에 대해 사소하게라도 불평과 원망을 할 때 그것은 그 상황과 사건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본문은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는 탐식이 단순히 육체적 소욕으로 인한 갈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에굽에서 탈출한 사실 그 자체를 탄식하며 불평하는 것이었음을 보여 주고 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 불평은 또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출애굽 자체를 가능하게 했던 여호와에 대한 경멸로 받아들여졌다. 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
(1) 온갖 감각적 쾌락의 허무함.
그들은 넌덜이나게 먹을 것이다. 그러나 만족을 모를 것이다. 영적 쾌락은 그와 반대이다. 이 세상이 사라지듯이, 이 세상의 탐욕도 또한 사라진다(요일 2:17). 점차적으로 탐욕이 지나면 머지 않아 싫증을 느끼게 된다.
(2) 탐식은 얼마나 잔인한 죄악인가.
그들은 본성에 폭력을 가했다. 건강해야 될 자기들의 육체를 병들게 했다. 그들의 죄 자체가 그들의 징벌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최악의 사태가 오지는 않았다.
(3) 그들이 무절제하게 추구하던 것이 그들에게 싫증이 나게 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처사는 얼마나 의로우신가! 그들이 만나를 천시하듯이 하나님은 그들이 고기를 천시하도록 만들 수 있으시다.
- 모세는 그 말씀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했다(21,22절).
이것은 제자들이 제기한 반대 의견과 같다. 즉 제자들은 "어디서 이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겠읍니까?" 라고 했던 것이다(막 8:4). 어떤 사람은 여기서의 모세의 말은, 단지 어떤 방식으로 그만한 고기가 조달될 수 있겠는지를 겸손하게 물은 것뿐이라고 변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나타내고 있는 고로 결코 변명 될 수 없는 일이다. 모세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떡을 제공해 주신 그분이, 이제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 무한한 권능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다시 고기를 제공할 수 없다는 듯이 그들의 수효가 너무 많다고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실 고기가 짐승이나 물고기였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동물의 등치가 가장 크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 고기가 조류의 고기였으리라고 감히 생각도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식으로 보시지 않는다. 그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보다 위에 있다. 모세는 백성들의 탐욕 때문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것은 "족하겠나이까?" 하는 말 속에서 읽어낼 수 있다. 대로는 진실로 위대한 신앙인들도 이 세상의 어떤 불리한 조건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어려워지고, "바랄 수 없는 중에 소망으로 믿는" 믿음을 지니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을 주의하자. 모세 자신도 감히 "하나님께서 광야에다 식탁을 베푸실 수 있겠습니까?" 하는 말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누구나 부르짖는 외침이다. 분명 이것은 모세의 연약함 때문이었다.
💡 21절, 모세가 말하였다. "저와 함께 있는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인데, 주께서 그들에게 고기를 주어 한 달 동안이나 먹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20절의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과 대조되는데,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다고 했는데 모세는 오히려 자기 자신이 ‘그 백성 가운데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모세는 지극히 계산적이었던 제자 빌립과 같이(요 6:5-7) 지금 이 상황을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고 계산하였던 것이다. 그 백성 가운데 역사하시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보다 그 백성들의 지도자로 있는 보이는 자기 자신을 더 의식하고 있는 불신앙에 무능력과 연약함까지 드러내었던 것이다.
-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있을 때조차도 하나님께서 하실 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신뢰하지 못하고 위기와 급박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에만 눈이 고정되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행하러니 누가 막으리요'(사 43:13)라고 말씀하신 분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계산 방법이 다르게 될 때 우리는 즉시 돌이켜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생각과 모든 상황들을 맡겨야 한다.
- 이 표현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모세는 지금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본절, 22절).
- 백성의 보행자 : 싸움에 나갈 만한 남자 장정들 60만. 아이와 여자를 포함하면 훨씬 많은 수효였을 것이며 2백만 명도 넘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2절, 하지만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그들에게 충분하겠으며, 그들을 위하여 바다의 모든 고기들을 모은들 그들이 만족하겠습니까?"
- 이런 거듭된 ‘그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란 표현은 모세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 백성의 많은 숫자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 “~한들" : 본문은 그 무엇으로도 그들의 식욕을 채울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3. 하나님은 즉시 만족한 응답을 주셨다. "여호와의 팔이 짧아 졌느냐?" (23절)
💡 여호와의 손(야드)
- ‘야드'(손) :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책임,돌봄, 지배를 포함하는 권위의 의미(창39:3~8)
- 승리, 구원의 의미(창49:8; 수6:2)
- 능력, 힘을 상징(대상20:12)
- ‘손 안에' 라는 표현은: ‘소유'를 의미(창39:)
- 공경(쑤8:19)과 갈망(시143:6)를 묘사하는 데 사용.
-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손'은 바로 애굽을 치심으로 출애굽을 가능하게 했던(출6:1; 7:4; 9:!5; 13:9) 손이며, 홍해를 가르시고(출14장)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신(출16:13)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말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쳤느냐?
- 여호와의 능력에 대한 의심을 질책하는 하나님. 지금 하나님은 ‘과거 보여 주었던 나의 능력을 이제 네가 의심하느냐?’ 라는 말로써 모세의 약해진 믿음을 꾸짖고 계신 것이다.
- 한편 우리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뿐만 아니라 가나안 정착과 사사 시대, 왕국 시대와 포로 시대, 더 나아가 신약 시대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항상 듣게 되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라고 하는 책망임을 기억해야 한다.
- 손이 짧아져서 단지 우리 인간보다 조금 더 큰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아예 손이 없어서 초자연적 능력은 행하실 수 없고 심리적으로만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단지 관념적인 하나님인가? 아니면 정말로 천지를 지으시고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그 손의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인가?
- 이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는 질문이다.
네가 이제 보리라
- ‘이제' : 이 단어는 특히 여호와의 급박한 활동을 언급하는 예언적 문맥에서는 축복(사43:19), 심판(사33:1)의 때가 임박했음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 본문에서는 모세의 불신앙에 대한 책망에 뒤이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즉각적이고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 준다.
- 23절은 —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15절)라고 호소한 모세의 인간적 간구에 대한 하나님외 신적 응답으로 ***‘나 여호와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너로 보게 할 것이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열심으로 인하여 당신의 일을 행하시고 우리를 당신 자신의 역사 속에 등참하게 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면(신 7:9) 모든 난관과 혼란을 능히 뛰어넘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은혜롭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모세가 만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오른손의 역사" 를 기억했더라면, 그에게는 아무런 곤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 자신이 수차에 걸쳐 하나님의 권능의 증인이요, 도구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셨다. 모세가 하나님의 권능이 그 백성을 위해 베푸셨던 기사를 잊었는가? 즉 애굽에서의 재앙과 바다가 갈라진 일, 그리고 바위를 갈라 물을 내던 일, 하늘에서 떡을 비같이 내리던 일들을 잊었다는 말인가? 그 권능이 없어졌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전보다 약해지셨다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은 이제 과거 당신의 행적에 권태를 느끼신 것인가? 우리들의 불신앙이 의심으로 어떤 이의를 제기하든, 그것은 변함 없다. 즉
(1) 하나님의 손은 짧지 않다. 하나님의 권능은 어떤 일의 쉽고 어려움에 따라 제약될 수 없으며, 오직 당신 지신의 뜻에 따라서만 제약된다.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바다를 측량하시고 하늘을 펴시며(사 40:12), 바람을 움직이던 (잠 30:4) 그 손은 짧지 않다.
(2) 하나님의 손이 짧아지지는 않았다. 그는 전과 같이 여전히 강하시다. "쇠약해지거나 피곤해지지 않는다." 또 우리가 절망하고 있을 때에라도, 우리의 불신을 능히 씻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 하지 못할 힘든 일이 무어뇨?"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제 1원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의 교훈을 되돌아 보게 하시며, 옛부터 있던 하나님의 이름 곧 "전능하신 여호와" 의 뜻을 배우게 하시고, 그 일의 결말을 통하여 사실 여부를 밝히신다. "너는 이제 내 말의 실현 여부를 보리라." 하나님의 일은 결코 폐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위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찬미해 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 찬미 자매의 수고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