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칼럼

깨어 있음의 네 가지 요소(경성,주의,경계,기대)

하나지기 2022. 3. 15. 23:14

■ 깨어 있음의 네 가지 요소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성경에 사용된 이 용어들이 깨어있음을 실천하는 네 가지 요소(경성 , 주의 , 경계 , 기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경성 
나는 열여덟 살 때 졸음운전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 나의 아버지는 우리가 살고 있던 토키오의 농장으로부터 32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아침, 우리는 자동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그곳에 찬송 부르는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충분히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내가 운전하는 동안, 아버지는 설교 원고를 훑어보고 기도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던 중, 한 소형 승합차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텍사스 고속도로의 넓은 갓길을 따라 퉁퉁 튕겨졌다(다행히 주위에 차들이 없었다). 우리는 둘 다 깜짝 놀랐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더욱 신중하고 깨어 있는 태도로 졸음의 위험을 조심하게 되었다. 나의 여섯 가족을 데리고 일가친척을 방문하기 위해 인디애나에서 텍사스나 조지아로 장거리 운전을 할 때는 특히 더 그렇다. 나는 창문을 내리거나 빨대를 씹거나 해바라기씨를 먹거나 다량의 카페인을 섭취하거나 내 뺨을 때리는 등, 잠들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 한다.
 
자동차로 한적한 고속도로를 시속 110킬로미터로 달리는 상황에서는 잠시만 방심해도 치명적인 충돌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두려운 현실을 의식하면 어떻게든 깨어 있을 수밖에 없다. 운전대를 붙잡고 있는 한, 졸음은 결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조심하려면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한다. 졸음으로 눈이 감기면 주위를 살펴볼 수 없다. 잠을 자면서 동시에 깨어 있을 수는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시간 동안 깨어 자신과 함께 기도하자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깨어 있음의 훈련에는 물리적인 차원이 포함된다. 

윌리엄 거널은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라는 책에서 깨어 있음을 문자적인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로 모두 설명했다. 그는 '문자적인 의미의 깨어 있음은·· 물리적인 성질을 띤다… 그것은 경건 활동에 밤시간의 일부나 전부를 사용하기 위해 육체가 잠드는 것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했다. 금식이 일시적으로 음식을 삼가는 것인 것처럼 깨어 있음은 일시적으로 잠을 삼가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5절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입증하는 증거들을 제시할 때 이 의미를 적용해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진지하게 추구했던 다윗에게서도 깨어 있음의 문자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시편 63편 6절에서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라고 말했다. 시편 저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한밤중에 홀로 불침번을 서야 하는 파수꾼에 자신을 빗대었다. 

시편 130편 6절은 이렇게 말한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편 119편 148절도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라고 말한다.
 
예수님도 잠을 자지 않고 밤이 갚을 때까지 기도하거나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다(눅6:12; 막1:35). 신자들도 때때로 그렇게 해야 한다. 거널은 "경건한 영혼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미신적 관습을 피하거나 건강이 관련된 특별한 상황에서는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칭찬받을 만한 일이요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깨어 있음은 정신적, 영적 의미를 지닐 때가 더 많다. 거널은 "깨어 있음은 영혼의 경계나 신중함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의미를 지닌다." 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깨어 있음은 '일시적인 의무' 가 아닌 긴급하고, 지속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깨어 있음은 물리적인 의미와 영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물리적인 깨어 있음은 다윗이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처럼(시 6:6; 88:1) 기도하기 위해 육신의 잠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한밤중에도 잠을 자지 않고 일어나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시 119:62). 깨어 있음이란 육신적인 안일함이라는 요람 속에 누워 우리의 죄 가운데 잠들지 않고 거짓 없는 회개로 졸음을 몰아내고, 깨어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엡 5:14)라는 말로 우리에게 깨어 있음을 권고했다. 

우리는 이 점을 로마서 13장 11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그곳에서 신자들에게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바울의 말은 낮잠을 즐긴다는 이유로 신자들을 책망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7시간을 자거나 토요일 오후에 잠시 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낮잠은 우리의 성화를 가로막는 중대한 방해 요인이 아니다. 바울의 의도는 로마의 신자들을 죄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전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바울이 그렇게 권고했던 이유에 주목하라. 그는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아직 얻지 못한 구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가? 우리는 대개 구원을 과거의 사건, 곧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성경은 때로 구원을 그런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우리가 이미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가르친다(엡 2:8). 그러나 성경은 때로 구원을 미래의 사건으로 말한다. 이 구원은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구원, 곧 우리가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구원을 가리킨다. 미래의 구원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다. 

로마서 13장 12절은 "밤이 갚고 낮이 가까웠으니" 라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울이 염두에 둔 낮은 주님의 날, 곧 마지막 종말론적인 날을 가리킨다. 그날은 위대한 구원과 심판의 날이다. 교회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심판과 진노를 받는다. 바울은 이 두 시대를 염두에 두고 현세와 내세의 관점으로 인류 역사를 바라보았다. 현세는 밤, 곧 어둠의 시대이고, 내세는 낮, 곧 생명과 빛의 시대이다. 신자들은 이 두 시대가 서로 중첩된 시기를 살고 있다. 우리는 미래의 영원한 삶을 살게 될 빛의 자녀들이지만 지금은 어두운 현세, 곧 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잠옷을 벗고, 밝아올 날을 위한 옷을 입어야 한다.
 
바울은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올" 것을 알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런 논법을 사용했다(살전 5:2). 그날이 오면 영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소스라쳐 놀랄 테지만, 신자들은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4-5)라는 바울의 말대로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마땅할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이것이 우리가 부름받고 있는, 깨어 있고 경계하며 경성하는 삶이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들로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갑옷을 입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며 도덕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음은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