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9, 시편 10, 잠언 24, 데살로니가전서 3
묵상구절
23:13 발락이 그에게 말하기를 "부디 당신은 나와 함께 그들을 볼 수 있는 다른 곳으로 갑시다. 당신이 단지 그들의 끝 부분만 보고 그들 전부는 보지 못할 것이니, 나를 위해 거기서 그들을 저주해 주시오." 하니,
23:14 발락이 비스가 산 정상에 있는 소빔 들로 그를 데려갔고 제단 일곱 개를 만들어 각 제단마다 수송아지와 숫양 한 마리씩 바쳤다.
23:15 발람이 발락에게 말하기를 "왕께서는 여기서 왕의 번제물 곁에 서 계십시오. 저는 저기서 여호와를 만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23:16 여호와께서 발람을 만나서 그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셨다. "너는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와 같이 말하여라."
23:17 발람이 발락에게 와서 보니, 발락은 자기 번제물 옆에 서 있고 모압의 고관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 발락이 그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소?" 하니
23:18 발람이 그의 신탁을 받들어 말하였다. "발락은 일어나 들어라. 십볼의 아들은 내게 귀를 기울여라.
23:19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하지도 않으신다. 말씀하신 것을 어찌 실행하지 않으시겠으며, 약속하신 것을 어찌 이루지 않으시겠느냐?
23:20 보아라, 나는 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또 그분께서 복을 주셨으니, 내가 그것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23:21 여호와께서는 야곱의 죄악을 보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보지 않으신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니 왕을 부르는 환호 소리가 그들 가운데 있구나.
23:22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부터 이끌어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의 뿔과 같구나.
23:23 야곱을 해칠 주술이 없으며 이스라엘을 해칠 점술이 없다. 이제 사람들이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23:24 보아라, 한 백성이 암사자처럼 일어나며 수사자처럼 몸을 일으켜, 움킨 것을 삼키고 살육한 피를 마실 때까지 눕지 않을 것이다."
23:25 그러자 발락이 발람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마시오." 하니,
23:26 발람이 발락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제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왕께 말하지 않았습니까?"
매튜헨리/옥스퍼드
●발람의 두 번째 신탁(민수기 23:13-30)
Ⅰ.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하기 위한 두 번째 준비가 전과 같은 모양으로 마련되었다.
- 그 장소가 달라졌다(13절).
발락은 발람이 "바위 위에서" 전체 이스라엘의 진영을 보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에 반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공포에 질려서 감히 그들을 저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발락은 발람을 다른 장소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부터는 이스라엘 진영의 일부분이 보일 뿐이며, 그들의 모습이 매우 형편 없도록 보일 만한 그런 곳이었다. 그리하여 거기 가면 틀림없이 발람이 저주의 불덩어리를 이스라엘을 향해 던질 수 있으리라고 믿어지는 곳이었다고 보인다.
💡 이렇게 말한 까닭은 발락은 첫번째 에언에서 발람이 이스라엘의 수를 보고 축복했기(9,10절)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이 정말 볼품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되면 자연히 그들을 저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락은 생각했던 것이다.
발락의 이러한 생각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쫓는 어리석은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세상의 헛된 것만을 좋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되고 영원한 것을 놓치고 마는 어리석은 인간은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멸망의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궤계를 써서 교회를 넘어뜨리고 쓰러뜨리려고 애쓰고 있는 교회의 원수들의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라.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며, 돌 하나라도 뒤집어놓지 않는 것이 없으며, 하여 보지 않는 시도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으며 얼마나 연구를 하여 보았는가!
💡발락은 인간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저주의 주문을 발람에게 강력히 요구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라면 이스라엘의 하나님까지라도 이용하겠다고 하는 불의한 의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 한 백성을 멸망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사악성을 보여 주는 것은 물론이고
- 더욱 중대하고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 뿐만 아니라 의로우신 성품까지 인위적으로 변경시키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 이는 지극히 사단적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행동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람의 기사는 전반적으로 볼 때 이같은 사단의 세력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나 결국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편결과 심판을 받게 된다는 구조라 할 수 있다.
발락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유형
한편 여기서 발락이라는 유형의 인물을 살펴볼 때 우리는 자신의 안녕과 성공에만 집착하는 전형적인 이기주의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그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파괴시키는 일조차 서슴치 않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 자기만이 잘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실패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인 것이다.
그런 종류의 사람은 설령 하나님의 이름을 찾는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방법으로 신앙을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인간적 바람에 어떻게 응답하는 분이신가?
그러나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누구도 하나님이 이미 작정하신 뜻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발람의 가는 길을 막으시고 그의 입에 말씀을 주신 것처럼 우리 인생을 막으시고 또한 길을 여시는 유일한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 다시금 제물이 다련되었다. 단을 새롭게 쌓았다.
모든 단에 수송아지와 수양을 드렸다. 그리고 발락은 전과 같이 드린 제물 곁에 가까이 서 있었다(14, 15절). 우리가 만일 발락이 저주를 내리게 하려고 열심이었던 것처럼, 축복을 얻기 위해 열심을 다한다면(물론 발락이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내리게 하려고 하였지만 결국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와 또 자기 백성에게 내리기는 했어도), 우리는 결코 신앙적인 의식을 위해 우리가 마쳐야 할 부담과 수고를 아낌없이 바칠 수 있을 것이다.
💡 15절,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날 동안,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데 있어서 발락의 생각과 의도는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가 되었으므로 발람은 발락에게 번제물 곁에 거하라고 말하면서 ‘여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러고 자신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나겠다고 말한다.
본문은 발락과 발람의 거리 즉 하나님의 뜻을 받아 이스라엘을 축복할 수밖에 없는 자와 ↔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애쓰는 자의 거리감..
- 발람은 다시금 하나님께 나갔다. 하나님도 그를 두번째 만나주셨다. 그리고 다른 말씀을 그의 입에 넣어주셨다. 그런데 그 말씀은 지난 번 주신 말씀과 반대되는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는 말씀이었다(16, 17절).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헛되이 찾지 말라" 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더욱더 "야곱의 후손 중 누구" 에게나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누구나 틀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발람과 같이, 그의 가르치심과 명령뿐만 아니라, 관대한 보상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발람이 돌아왔을 때, 발락은 어서 속히 어떤 소식을 가져오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이까! 좋은 소식이 있읍니까? 아니면 일이 잘 될 희망이라도 있읍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할 때의 우리의 물음이 되어야 한다(렘 23:35 참조).
💡 발람의 인식 변화
- 16절 말씀은 발람이 더 이상 제물의 많음이나 인간의 수고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와 만나시는 분이 아님을 인식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4절 설명 참조). 비록 이방 술사이며 하나님 앞에서 거듭난 인생은 아니지만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5절) 하나님에 대한 신 지식이 향상되었던 것.
하물며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고후5:17)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좋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골 3:10). 이 지식은 세상의 지식과 비교될 수 없는 가장 고상한 지식으로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며(빌 3:8) 진리이신 주님을 아는 지식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Ⅱ. 하나님의 넘치는 능력은 두 번째도 저주의 말씀을 축복의 말씀으로 변화시켰다. 그런데 이 두 번째의 축복의 말씀은 첫 번째의 축복의 말씀보다 훨씬 크고 그리고 강력한 것이며, 그 축복의 말씀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가망을 완전히 배제시킬 만한 것이었다.
발락이 애써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듣기를 원하기 때문에(17절), 이번에는 발람이 특별히 그를 지칭해서 "발람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라고 말을 하였다(18절).
이 말씀은 발락이 비록 왕이지만(한 마디라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여 경청하여야 하는 말씀이며), 두려움으로 들어야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일어나 들을지어다" 라고 말했다. 그의 후계자인 에글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을 때 "좌석에서 일어났다" (삿 3:20).
💡 “일어나라”(쿰)
- 이 단어는 단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미 발락은 서 있었기 때문이다(17절).→ 따라서 본문의 ‘쿰’은 ***‘이제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려는 악한 심령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그를 경배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의미가 담겨진 것.
- 그러므로 이 말은 ‘잠자고 있는 영혼아 깨어 일어나라’ 는 영적인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왜나하면 실제로 ‘일어나다(쿰)'란 말은 어른을 공경하는 의미에서 ‘일어서는'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한 예비 동작도 표현하기 때문이다.
“들을지어다” ... “자세히 들으라”
- 듣다(쉐마) : ‘순종하다’(삼상15:22)란 뜻도 지닌다. 성경에서는 항상 ‘들음’은 ‘순종’의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 ‘자세히 들으라’ “ ‘귀를 기울이다, 청종하다’를 강하게 명령하는 의미. 이 역시 ‘들음’과 ‘순종’의 의미를 동반한다.이는 역으로 발락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며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고 있는지틀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발락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은커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는 무지몽매한 이방 술사였던 것이다(27절).
- ⇒ 본문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 어법적으로 강조 명령형까지 사용하여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 발람은 이 말씀 속에서 발락을 확실히 슬프게 하고, 실망시키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1) 그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1]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아무 쓸데가 없는 것이며, 그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 첫째,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신다" (19절).이어서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뜻을 변화시키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불완전함이요, 하나님의 완전함이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가 없으시다" (히 6:18). 간혹 성서가 하나님께서 "돌이키셨다" 고 말하고 있지마는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이 변했다는 뜻이다(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마음이시며, 누구도 그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조금도 변동이 없으시며, 변화의 그림자도 없으시다" 는 것은 위대한 진리이다.
- 발람은 발락에게 아래와 같이 반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리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이 있어서 말씀하셨는데 당신의 섭리에 따라서 그것을 실천하시지 않으시리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며, 약속하셨는데 어찌 그대로 이루시지 않으시리요?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며, 자기 자신의 말씀에 충실하신 분이 아니시라고 우리가 어찌 감히 생각할 수 있으리요? 그의 모든 명령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그의 모든 약속은 어길 수 없는 것이니이다."
- 발람은 이상과 같은 일반적인 원칙을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에 적응시켰다(20절). "내가 축복의 영을 받았으니 나는 돌이킬 수 없나이다" 고 말했는데, 이 말씀은 다시 말하면 "나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할 수 없나이다" 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축복 받은 백성이요, 여호와께서 축복하신 자의 후손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그들 머리 위에 있다. 그들은 축복의 약속 아래 태어났고, 가나안의 축복을 위해 태어났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진리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어기시고 당신 스스로를 속이시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들에게 저주를 내릴 수 없다.
- 특히 불신자들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섭리가 제대로 이해되기 어려운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악한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하나님의 뜻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선한 의지인 것이다.
-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선한 뜻을 따라 복을 줄 자에게 복을 주시고 화를 주실 자에게 화를 주신다.
- 이 말씀은 물론 발락의 악한 의도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또한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생생한 약속이기도 한 것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백성을 저주하게 하려고 번제를 드린 발락의 의도는 하나님을 자신의 말에 책임지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인간들과 같은 위치로 격하시키려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야곱에게 복을 주시고 번성케 하시며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하나님의 이런 속성은 ‘하나님(엘)’의 그 언약과 관계를 맺고 있다(창28:3,4). 즉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에 대해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되게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 인간의 마음은 쉽사리 변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말을 어긴다. 인간은 후회를 잘하기 때문에 식언도 잘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결코 그의 약속을 취소하시지 않으신다. 발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바꿀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일이 있다(8절).
- 둘째, 이스라엘은 지금 당장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으신다" (21절).
- 다만 아직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며, 그들을 멸망시켜야 할 정도의 허물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이 나쁘기는 하지만 그처럼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다.
- 그들에게 특히 허물과 죄가 된다는 우상 숭배의 망령됨이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금송아지 사건 이후 다시는 그러한 일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다른 일로서는 잘못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시려고 하시지 않으셨다.
- 본문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무수한 범죄를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한 계획을 변경시키시지 않으시고 크신 인자와 자비를 보여 주셨음.
-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이렇게 읽는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보고 계시지 않으시며, 이스라엘에게 불행을 끼치는 것을 묵과하시지 않으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지도 묵과하시지도 않으시며, 이스라엘이 해를 입는 것을 보고 계시지 않고, 그들을 바르게 하여 주시며, 그들의 억울함을 갚아주신다" 는 뜻으로 읽는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나 그의 백성들이 당하는 위해를 그냥 보고 계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끼치는 해가 곧 당신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간주하시고 이를 갚아주신다.
- 야곱에게 전혀 허물이 없다거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못보셨다는 것은 아니다.
- 셋째, 야곱과 이스라엘의 힘을 감히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발람은 발락에게 그들과 겨루어 싸울 방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특별한 양식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에게서 떠나려고 하시지 않으신다."
-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며, 그 때문에 오는 승리를 노래하고 있다. "왕을 부르는 소리 또는 경고가 그 중에 있다." 승리와 성공을 확신하며 원수들을 향해 부르짖는 함성은 계속 하나님을 왕과 정복자로 여기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은총을 체험했으며, 그들을 위해 작용하신 그의 능력을 힘입은 바가 많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던 것이다"(22절). 그의 능력은 막을 수도 제재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처럼 영광스럽게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영광스럽게 마치게 하실 것이다.
-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동안 이스라엘은 적대자들을 능히 대항해서 이길 수 있는 들소의 힘을 가질 수 있었다(24:8 참조). 이런 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힘이다.
[2]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발람은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사술을 다해도 이스라엘을 해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였다(23절).
👀 사술과 복술은 고대 이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로 여겨졌다. 본문에서 발람은 술사인 자신이 사용하는 이같은 강력한 무기로써도 야곱을 능히 대적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참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의 백성은 세상이 능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 첫째, 발람은 자기가 실패한 것을 자인하였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나 복술이 진정 있을 수 없다. 지옥의 저주는 하늘의 축복을 좇아 낼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시도는 어떤 것이든지 간에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야곱이 가난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저 교회를 나타내고 이스라엘은 번창하고 진보된 고 교회를 나타낸다고 본다. 그러나 고(高)교회이건 저교회이건, 교회의 친구가 많건 적건 모두가 하나의 교회가 된다. 그리고 그 교회의 번창을 막을 무기는 없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반대하는 어둠의 세력들의 책략과 계획을 쉽사리 좌절시키며 실망시킬 수 있으며 또 꼭 그렇게 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할 수 없다.
- 둘째, 발람은 이것이 앞으로도 계속 기억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 때에" 즉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한" 말을 기억하고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일을 그 백성들을 위해 행하셨는가 ! 이것은 놀라움과 감사의 념을 가지고 말해질 것이며, 이웃 백성들에게 대해 그들의 신이 그들을 이처럼 돌봐준 일이 있는가고 묻는 도전과 함께 말해질 것이다. 교회의 대적들의 악한 계획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여수룬의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신 33:26). 👀 이방인인 발람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이스라엘의 실상을 알고서 이들에 대해 지극한 감탄을 하고 있다. 이것은 논리정연한 분석과 논쟁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들에 대해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심령의 상태에 의한 것이다.
-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보고서 감탄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발람은 하나님이 행하신 이 일들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온 궁극적으로 철학적, 신학적으로 논평되어야 할 부분이라기보다는 마음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탄과 찬송으로 영광돌려야 할 부분이다.
- 발람이 여기서 다른 이방의 모든 신들보다 훨씬 뛰어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우월성에 대해서 말한 것을 모세가 기억하고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특히 발람은) 스스로 판단하도다" 라고 말씀하였을 것이다(신 32:21). 그러므로 발락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가망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었다.
(2) 발람은 발락에게 오히려 그들로부터 멸망당할 것을 두려워하여야 할 이유를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웃 나라에 피를 흘리게 하는 백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와 그의 나라가 피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다루기에 너무 큰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계획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24절).
보라 그리고 두려워하라. 머리를 웅크린 사자와 같이 한동안 가까이에 자리잡고 누워 있는 이 백성은 조만간에 말로 하는 큰 "사자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얻을 승리를 발람이 예견하고 그것을 두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지금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그 땅을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결코 그들의 싸움을 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웃의 집이 불탈 때 그는 마땅히 자기의 집도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던 것이다.
👀 본문을 앞선 문맥과 연결해서 볼 때 ‘움킨 것을 먹으며 죽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않는다'는 표현은 사냥을 완전히 끝장낼 때까지는 그 사냥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어는 곧 가나안 정복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이루기 전까지는 정복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 그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의 군사로서(딤후2:4) 영적 싸움에 나갈 군장을 철저히 갖추고(엡6:10-18)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의 군기를 높이 들고 힘차게 진군해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 싸움에 있어서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이미 우리 주님이 승리하신 싸움이기에(요16:33).
- 이 실패 뒤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 발락과 발람은 두 사람이 모두 그 바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1] 발락은 이제 그의 마술사가 침묵하기를 원했다. 발람이 그의 원하는 대로 말을 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그들을 축복하지도 말라" (25절).
👀 지금까지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던 발락은 아무리 저주를 하려 해도 발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명령한 것이다. 이것은 곧 발락이 발람의 주술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패배시키려 한 계획에 더 이상 소망을 둘 수 없었음을 깨달았음을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발락은 어리석게도 또 다시 마음을 바꾸어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27절). 마치 계속되는 재앙 가운데서도 강퍅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던 애굽의 바로처럼(출 7:13,22; 8:19; 9:35) 다시 한번 어리석은 시도를 하게 된다
만일 그대가 그들을 저주할 수 없다면, 나는 그대가 그들을 축복하지 않기를 간청하노라. 만일 그대가 나의 군대를 도와주고 고무하여 줄 수 없다면, 그들을 반대하거나 낙담시키지 말라." 하나님은 그를 떠난 자들을 "많은 모략으로" 피곤케 하실 수 있으시다(사 47:13; 57:10).
[2] 발람은 여전히 자기가 위압당하였다는 것을 시인하며,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 한 말을 되풀이하였다(22:38).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6절).
👀 발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콜)'을, 즉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발락의 질책에 대해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당시 발람은 여호와의 강권적 역사하심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을 발락에게 전하였지만 이것은 다른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발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술사로서의 사악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발람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순종 의사틀 밝힌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해도 하나님의 강권적 섭리로 어쩔 수 없이 축복할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에 대한 변명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발람은 이스라엘을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이방국가들에 대한 저주까지 했고(24:17-24), 이 저주는 그대로 실현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 첫째,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길은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궁리가 있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강하게 작용한다.
- 둘째, 좁은 의미에 서 볼때도, 교회를 해치려고 만들어진 무기가 맥을 못추듯이, 교회를 송사하기 위해 일어난 해도 하나님은 정죄하신다(사 54:17).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매일 아침마다 정리해주는 찬미자매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