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9, 시편 10, 잠언 24, 데살로니가전서 3
묵상구절
23:17 발람이 발락에게 와서 보니, 발락은 자기 번제물 옆에 서 있고 모압의 고관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 발락이 그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소?" 하니
23:18 발람이 그의 신탁을 받들어 말하였다. "발락은 일어나 들어라. 십볼의 아들은 내게 귀를 기울여라.
23:19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하지도 않으신다. 말씀하신 것을 어찌 실행하지 않으시겠으며, 약속하신 것을 어찌 이루지 않으시겠느냐?
23:20 보아라, 나는 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또 그분께서 복을 주셨으니, 내가 그것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23:21 여호와께서는 야곱의 죄악을 보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보지 않으신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니 왕을 부르는 환호 소리가 그들 가운데 있구나.
23:22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부터 이끌어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의 뿔과 같구나.
23:23 야곱을 해칠 주술이 없으며 이스라엘을 해칠 점술이 없다. 이제 사람들이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23:24 보아라, 한 백성이 암사자처럼 일어나며 수사자처럼 몸을 일으켜, 움킨 것을 삼키고 살육한 피를 마실 때까지 눕지 않을 것이다."
23:25 그러자 발락이 발람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마시오." 하니,
23:26 발람이 발락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제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왕께 말하지 않았습니까?"
23:27 다시 발락이 발람에게 말하기를 "이리로 오시오. 내가 당신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겠소. 거기서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들을 저주하는 것을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실지도 모릅니다." 하고,
23:28 발락이 발람을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로 데리고 가니,
23:29 발람이 발락에게 말하였다. "저를 위해 여기에 제단 일곱 개를 만들고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23:30 발락은 발람이 말한 대로 하였고, 제단마다 수송아지와 숫양을 각각 한 마리씩 바쳤다.
24:1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기뻐하신 것을 깨닫고, 이전처럼 주술을 사용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광야로 향하여
24:2 눈을 들어 지파별로 거하는 이스라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셨다.
24:3 그가 그의 신탁을 받들어 말하였다.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뜬 남자가 말한다.
24: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고 엎드러졌으나 눈을 크게 뜬 자가 말한다.
24:5 야곱아, 네 장막이, 이스라엘아,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우냐.
24:6 그들이 골짜기들처럼 펼쳐 있으니 강가의 정원과 같고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 같으며 물가의 백향목 같구나.
24:7 그들의 물통에서 물이 넘쳐흘러서 그들의 씨앗이 풍성한 물을 얻을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아각보다 위대하여 그들의 왕국이 높아질 것이다.
24:8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으니 그들의 힘이 들소의 뿔과 같구나. 그들이 적국들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부스러뜨리며 화살을 쏘아 꿰뚫을 것이다.
24:9 마치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 같이 무릎을 꿇고 웅크리니 누가 그들을 일으키겠느냐?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
24:10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발람에게 말하였다. "내 원수들을 저주하기 위해서 당신을 불렀는데, 당신은 오히려 세 번씩이나 축복하였소.
24:11 이제 당신 땅으로 당장 돌아가시오. 내가 당신을 높여 심히 존귀케 한다고 말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당신을 막아 존귀하게 되지 못하게 하셨소."
24:12 발람이 발락에게 말하였다. "왕께서 제게 보낸 사신들에게 제가 이미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24:13 '만일 왕께서 은과 금을 자기 집에 가득 채워서 나에게 주실지라도 나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여호와의 명령을 거스르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만 그대로 말할 것입니다. '
24:14 이제 저는 제 백성에게 돌아가겠으나, 들어 보십시오, 이 백성이 후일에 왕의 백성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왕께 말하겠습니다."
매튜헨리/옥스퍼드
(2) 하지만 그들은 또 다른 시도를 계획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실패가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더욱 혼란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 계획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번째의 시도에 들어갔다.
[1] 그들은 장소를 옮겼다. 발락은 드디어 그러한 실패가 발람의 잘못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에는 발람을 나무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발람이 하나님께 얽매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도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막지 못할 그런 곳으로 발람을 데려가기를 원했다(27절).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 발락 자신도 발람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말했고 발람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락은 자신의 악한 계획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는 여호와가 말씀하신 것만을 전할 수밖에 없다는 발람의 말을 인정하면서 오히려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저주하시는 것을 허락하실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실행치 않으시라' (19, 20절)고 노래한 발람의 신탁을 전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의 몸부림이 아닐 수 없다.
발락과 발람은 이러한 일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용기를 가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처음에는 가지 못하게 하셨다가, 두번째는 가도록 허락해 주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처럼 거듭하는 동안 그들이 원하는 지점까지 이르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범한 죄가 신속히 벌을 받지 않게 되자, 죄인들은 더욱더 악한 일을 하고자 열심이다.
💡 발락은 ‘혹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께 제사드린 장소가 나빠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문제는 장소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발상에서 좀더 좋은 장소로 옮겨 그 곳에서 제사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기뻐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하실지도 모른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착각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이것은 단지 외적인 조건일 뿐인 장소에만 연연해 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이러한 외형적인 조건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착각하는 이는 없는지 살펴보아야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통회하는 심령 곧 우리의 중심인 것이다(삼상16:7; 시34:18).
발락이 이번에 발람을 데리고 간 장소는 브올산 꼭대기이다(28절). 그 산은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아마 그 곳에는 바알신을 예배하는 곳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알 브올이라고 일컬어졌다.
발락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 장소를 택했다고 보인다.
- 첫째, 그 곳은 바알의 거처로 생각되어졌기 때문에 모압의 신인 바알의 거처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결코 와서 그들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둘째, 이곳은 그의 신이 좋아하시는 곳이니 만큼 여호와도 좋아하셔서 잘 생각해 주시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생각은 전적으로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아람 사람들은 여호와가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왕상 20:28).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곳에서보다 한 곳에서 더욱 능력을 발휘하신다고 보는 견해이다.
[2] 그들은 또 다시 일곱 수송아지와 일곱 수양을 일곱 단에 바치는 제사를 드렸다(29, 30절).
그들은 그들의 희망이 이루어지리라는 약속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이런 값비싼 제물을 참고 드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 바 환상이 마지막에는 꼭 실현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우리는 그 실현이 더디다고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눅 18:1).
💡 본장 전체 단락의 구성에서 29.30절은 본장의 처음 1,2절과 병행을 이루고 있다. 즉 23장의 첫부분에서 발람의 요구대로 발락이 제단을 쌓았던 것처럼 29, 30절에서도 역시 단을 쌓도록 부탁한 발람의 요청을 기록함으로써
→ 이들의 시도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행하는 사람들의 무모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시키려 했던 왕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함으로 많은 물질을 얻고 싶어했던 술사의 욕심은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는 죄악을 범할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언약과 그 약속의 말씀을 바꾸려는 악한 의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발람은 첫번재 제단(1,2절)과 두번째 제단(14절)에서 준비한 방법과 동일하게 제단과 제물을 준비하여 그 이전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세 번째 제사를 드렸다.
●발람의 세 번째 신탁(민수기 24:1-9)
발람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축복은 전 장에서 우리가 읽어본 두 개의 축복의 말씀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그 서론 부분은 매우 다르다
Ⅰ. 이 축복의 말씀을 도입하는 방법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면에서 매우 다르다.
1. 발람은 지금까지 의지해 오던 마법을 버리고, 그것들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주문이나 부적 또는 요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들을 저주하지 않기로 단단히 결심하신 것을 분명히 알게 되자(1절), 저주를 위해 악마와 관련을 맺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만간에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못된 것을 좇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어리석은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신다. 무엇 때문에 그는 마법을 사용하고자 했을까? 그는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는 전처럼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물러가지 않고, 곧장 그의 얼굴을,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는 들판(광야)을 향하여 돌렸다. 그리고 다른 방법은 없고, 오직 그들을 축복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셨다." 다시 말하면 사울이 다윗을 붙잡지 못하도록 사울 위에 임하였던 것과 같은(삼상 19:23) 예언의 신이 그의 위에 임하신 것이다. 그는 자기 생각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그의 위에 임하신 성령의 말씀을 전하였다.
💡 육신의 눈으로 바라본 광야 = 하나님의 신의 감동되어 환상 가운데 보게 될 아름다운 동산
-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발람의 육신적인 눈이 바라본 곳은 분명히 광야였다. 즉 발람의 얼굴이 향했던 곳은 분명히 광야였고, 그가 바라본 것은 황량한 광야에 진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이 곳을 바라보며 예언하고 있는 발람의 눈에 그 땅이 허허벌판 광야가 아니라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으로 바뀌어 보였던 것이다.
- 분명히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광야였지만, 영의 눈으로 보니 이스라엘이 거한 그 땅은 푸른 동산이며, 강가의 동산과도 같은 풍요가 있는 곳이었다. 발람은 이 곳을 바라보면서 억누를 수 없는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절로 감탄하고 만다(5절).
- 이처럼 성경은 의도적으로 발람이 처음 바라본 곳을 광야라고 말함으로써 이 땅은 누가 보더라도 소망이 없는 땅, 기쁨이 없는 땅, 쉴 곳이 없는 땅이란 의미를 부여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그 광야는 낙원이며 하나님의 동산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험난한 광야 생활과 같이 빈곤하고 초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 영적인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의 인생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비교될 수 없는 가장 값진 삶인 것이다. 또한 비록 현재는 부족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들의 광야 같은 삶을 완전히 바꿔서 축복의 삶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신앙인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보면서 그저 육신적인 눈으로 그들의 광야 같은 환경만을 바라보며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동산으로 변화시키실 주님의 은혜를 소망하면서 담대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 ⇒ 이것은 구약 선민 이스라엘과 대비되는 신약 선민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궁극적인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고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 발람은 전에 말했던 것과는 다른 서두를 말했다(3, 4절). 그것은 다윗의 마지막 말의 서두와 매우 흡사하다(삼하 23:1-3). 그러나(어떤 사람의 생각과 같이) 그것은 자랑과 헛된 영광을 많이 풍기는 것이며, 이 모든 예언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며, 자기 자신을 하늘 나라의 각료의 한 사람인 양 스스로 찬양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의 두 가지를 자랑하였다.
(1) 은헤로우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여 주셨다는 것을 자랑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전능자의 이상을 보았다" 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직접 만나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23:16). 그리고 이것 때문에 발람은 크게 우쭐하였다. 바울은 그가 본 바 환상과 계시에 대해 겸손하게 말했다(고후 12:1). 그러나 발람은 이를 자랑하며 말했다.
(2) 그러한 계시를 받아들인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였다.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때 황흘경에 빠진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눈은 뜨고 있었다. 이 사실을 그는 두 번이나 말했다. 그 원문에 있는 말씀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눈을 감았던 자" 라고 읽는다(3절. 역주 우리 나라 성경도 '감았던 자'라고 되어 있는데, KJV에서는 '눈을 뜬 자'라고 되어 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눈을 뜬 것이다(4절).
💡 ‘전능자(엘 샤다이)의 이상을 보는 자’
- 하나님의 칭호 가운데 ‘전능자’란 칭호는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이 있는 칭호. (창17:1, 출6:3) ‘샤댜이’는 당신의 신 백성과의 언약과 관련하여, 특히 그 언약을 성취하심에 있어서 능력과 지혜와 모든 것이 완전하시다는 의미로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칭호였다.
- 그러므로 지금 발람이 이 ‘전능자의 이상' 을 본다고 하는 것은 족장들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들에게 보여 주고 약속하셨던 축복의 내용을 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 발람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이 자기 생각을 반영한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상을 보고 나오는 말이며, 이 순간에 발람은 주님의 예언의 도구로 완전히 사로잡혀 쓰임을 받는 자이다. 이처럼 본문이 철저하게 발람이 바라보는 것에 대한 신적 기원을 강조하는 것은 이방인 술사에 의한 예언이라 하여 본문 이하에 나오는 예언의 내용을 거부하려는 것을 처음부터 방지하기 위함이다.
- 즉, 발람은 비록 이방인이라 해도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발람의 육신적 신분이 아니라 그가 말한 예언의 근원 즉 예언을 주신 주체인 것이다.
그는 엎드렸다
- 절하기 위한 동작을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그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이상을 보게 되었을 때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강한 능력에 떠밀려 넘어졌음을 표현한 것. 이처럼 본문은 인간의 힘어 무너지고 하나님의 능력아 그에게 간섭하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나팔’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후에 나오는 모든 예언의 말씀이 발람의 인간적인 지혜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신적인 예언의 말씀.
자기 스스로를 ‘눈을 뜬 자로 표현한다’
- 발람은 자신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이상과 그 말씀을 보고 듣게 되었지만 궁극적으로 그러한 일을 가능케 하신 것은 하나님이심을 최종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을 때, 그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라고 시인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탐욕과 야망과 어리석음과 욕망 때문에 여전히 눈이 멀어 있었다.
[1]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거역하는 자들은 조만간에 그들이 잘못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 육신의 눈은 뜨되 마음의 눈은 뜨지 못한 사람들은 계발을 받기는 하되 성화받지는 못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랑으로 이끄는 지식은 지옥으로 가는 길을 밝혀줄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을 뜬 채 지옥으로 간다.
Ⅱ. 그러나 그 축복이 본질적으로는 전 번 것들과 같은 것이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면에서 발람은 이스라엘에 대해 경탄을 발했다.
1. 그들의 아름다움을 경탄하였다(5절).
"야곱이여 네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 그들이 비록 궁정에 살지 못하며, 거칠고 초라한 장막에 살며, 기후 마저도 사나운 곳에 살지마는, 발람은 그들이 그 지파대로 질서정연하게 거처를 정한 것을 보고(2절) 그 장막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였던 것이다. 통일되고 조화를 이루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것 이상 아름답게 보여주는 신앙이 또 없다(시 133:1). 이 백성들의 사랑스러움과 이웃 민족들에게서 받는 좋은 평판이 풍성한 골짜기, 아름다운 동산, 무성한 나무들, 그리고 향기로운 나무들의 아름다움과 비교되었다(6절). 눈이 열린 사람들은 땅에 사는 성도들의 훌륭함을 보며 그들과 함께 기쁨을 누린다. 틀림없이 "의로운 자들은 그들의 이웃들보다 훌륭하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심으신 나무들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훌륭함이다. 의로운 자의 가지는 여호와께서 심으신 식물이다(호 14:5-7 참조).
💡 특히 이스라엘이 거한 광야를 바라보면서 그들의 장막과 처소가 아름답다(토부)'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미래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감탄은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고 영적인 눈으로 그 대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2. 그들의 풍성한 열매와 번성함을 경탄하였다.
이것은 아마 골짜기와 동산과 그리고 나무들과의 유사성(6절) 그리고 또한 그 표현 (7절)에서 기인된 것인지 모른다.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다" 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비를 내려주시듯이 축복의 소나기를 부어주신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 종자는 많은 물가에 있으리라" 고 하였다.
💡 본문의 마르지 않는 강가의 동산의 모습은 풍요롭고 여유 있는 동산을 그리고 있다.
- **‘강가의 동산’**이란 말을 떠올릴 때면 히브리인은 풍요와 번영 그리고 평화를 상상하게 된다. 이런 동산의 가장 아름다운 전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첫 인류가 살았던 에덴 동산이다. 본문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동산은 바로 그 태초의 풍요로웠던 에덴 동산을 연상하게 한다(사51:3).
- 그러나 더 나아가 이 동산의 궁극적인 모습은 생수의 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산과 같이 울타리에 의해 보호를 받는 성도의 모임인 교회의 아름다운 연합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심으신(’나타’)
- 여호와는 아름다운 동산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이를 보호하고 물을 대고 동산을 지키시며 그 동산에 하나하나 나무를 심고 계신 분.
- 이처럼 이 시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동산을 만드시고 보존하시는 동산지기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특이하며, 동시에 매우 아름답다.
- 심으신(나타) : ‘나무를 심는다’는 의미로 사용되나,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운다는 의미도 담고 있음.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나타내고 있음도 잘 보여 준다(출15:17).
⇒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 본문에서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은 나무를 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나무들을 장성하도록 보호하시기까지 하신다는 것이다. 어린 묘목을 정성스럽게 땅에 심고 때를 따라서 물을 주고 가지를 치고 벌레를 잡고 잘 자라나도록 기르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모든 백성들을 세밀하게 보살피신다.
-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물을 준 것은 자신들이지만, 결국 이 씨앗을 자라게 하여 열매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고전3:6, 7)
침향목, 백향목들 같다
- 침향목은 식물 생태학적으로는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자라날 수 없다고 한다. 본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는 이 나무들이 자라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처럼 귀중한 침향목들을 가장 아름다운 동산에 심으셨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영광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백향목들도 마찬가지.
- 발람은 이스라엘의 거한 땅이 강가의 동산이었다고 말하고 나서 이제 그 동산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동산 안에는 보잘것없는 잡초나 평범한 잡목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으신 귀중한 침향목들이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이 동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하고 있는 것이다.
⇒ 강이 흐르는 동산에 향기틀 발하는 침향목과 아름다운 백향목들이 솟아 있는 이 동산은 이스라엘의 번영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성도의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7절,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 물이 귀한 근동 광야 지역에서 이처럼 물이 넘친다는 것은 삶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환상 속에 나타난 이러한 모습은 근본적으로 모든 풍요로움의 근원이자 생수의 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예표하는 것이기도 하다**(렘2:13; 17:13; 슥14:8; 요4:10-14; 7:38).**
그 왕
- 메시야. 본문은 이 왕이 아각보다 ‘높다'고 말함으로써 이 왕의 지위를 분명하게 말해 준다.
- 높다=존귀함.
- 그 나라는 진흥하리로다=’그의 나라가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주님의 ‘주권적 개입’ ⇒ 결국 본문은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임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말씀을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었다" 고 하신 말씀(호 2:23)과 비교해 보라. 성경에 보면 물들은 "여러 백성들과 많은 우리들에게 그리고 모든 열방에" 부어진다고 하였다. 이 예언은 그 백성이 흩어져 사는 동안에도 놀랍도록 번성하고 많은 무리를 이룬 것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
- 그들의 자랑과 진보에 대해 경탄했다. 많은 무리의 백성이 왕의 자랑인 것처럼, 왕의 장대함은 백성들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발람은 그들의 "왕이 아각보다 높아지리라" 고 예언하였다. 아각은 아마 그 당신 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것 같다. 발람은 그 보다 더 유명한 사람을 몰랐을 것이다. 그처럼 아각은 다른 이웃 나라의 왕들보다 뛰어났었다. 그러나 발람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를 뒤이은 여호수아가 아각보다 훨씬 자랑스러워지리라고 예언하였으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 사울은 아각과 싸워 이겼다(삼상 15:8).
- 그들의 능력과 승리에 대해 경탄했다(8절).
(1) 발람은 이스라엘이 어떤 일을 과거에 행하였는지, 아니 오히려 어떤 일이 그들을 위해 베풀어졌는지 회고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이에 대해서는 전 번에도 언급한 바가 있다(23:22).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신 일에 따라 오는 놀라움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예를 높여 주었으며, 그들의 원수들에게는 두려움을 안겨주었다(여 2: 10).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신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는데 결코 실패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시매 그의 일은 완벽하시기 때문이다."
(2) 발람은 그들의 현재의 강한 힘을 내려다보았다. 이스라엘은 "들소의 힘" 을 가지고있었다.
이 짐승에 대해서는 이런 말이 있다(욥 39:9, 10).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였느냐?" 발람은 말했다. "그럴 수 없다. 이스라엘은 너무나 힘이 세기 때문에 내 저주로도 그리고 당신의 군대로도 막을 수 없다."
(3) 발람은 그들의 장래의 정복을 내다보았다. "그들은 그들의 적국을 삼킬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의미이다. "그들은 단지 사자가 그 먹이를 잡아먹듯 쉽사리 그리고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적국들을 멸망시키며 그들을 집어삼킬 뿐만 아니라, 그 먹이를 먹음으로 스스로 힘이 강해지고, 비대해지고 부해질 것이다.
5. 발람은 그들의 용기와 안전에 대해 경탄했다. "그들은 꿇어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다" (9절).
💡 본문은 동물들 가운데서 가장 용맹스러운 암사자와 젊은 수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가장 강한 자의 모습을 그러고 있다.
주님의 백성을 사자로 비유한 본문은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비유할 대상이 참으로 많이 있겠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동물의 왕으로 불리우는 사자로 표현함으로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보잘것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은 누운 사자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약속 받은 백성 이스라엘을 자기 마음대로 저주하거나 어떻게 할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을 표현한다.
오늘날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
- 세상의 권세에 나약하게 피하고 소극적으로 자기 무리 안에 거하기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훈련받아 독수리와 같고 젊은 사자와 같은 강한 권세로 세상을 이기는 신앙이다(롬12:21; 살전2:2)
이제 그들은 모압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모압 평원에 그렇게 누워 있으며, 곧 가나안 땅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들이 먹이를 삼켰을 때는 "해받을 두려움을 전혀 떠나서" 휴식을 취할 것이며, 모든 이웃 나라들을 무시할 것이다. 누가 감히 잠든 사자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박식한 주교 패트릭-Patrick이 말한 바와 같이) 사자들은 잠을 자기 위해 어떤 구석진 곳으로 가지 않고 어디서나 잠을 잔다. 그것은 누구도 감히 자기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안전하였다. 이처럼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다(잠 28:1). 그런데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편히 쉬게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전히 거하게" 하시기 때문이다(시 4:8).
- 발람은 이웃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영향력에 대해 감탄했다. 그들의 친구와 그들과 동맹한 자들은 행복하였다.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다."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자들은 그 때문에 좋은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원수들과 그들에게 대적하는 자들은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된다.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그들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자들은 그 때문에 자기들이 고통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간에 그들에게 행한 그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발람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축복(창 12:3)을 확인하고 "그러므로" 이제 자기도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이스라엘의 친구가 되어 그 축복에 참여하고,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받는 저주를 받지 않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발락의 항의(민수기 24:10-14)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였던 헛된 시도의 결말과 그 시도를 완전히 포기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 발락은 더욱 잘못된 길도 빠져 들어갔다. 그는 발람에 대해서 대단히 진노했다(10절).
💡 22-24장에 나오는 발람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시작되어 인간의 노함으로 끝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과 대걸하는 세력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패배함으로 말미암아 분노하는 것으로 마감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하나님이 발람에게 진노하심.
- 발람이 나귀에게 노함.
- 발락이 발람에게 진노함.
그는 실망 때문에 몹시 괴로워 한다는 것을 그의 말로 그리고 동작으로 표시하였다. 그는 자기의 모든 방법이 실패하고 그 계획이 좌절된 것을 알고 분을 못참아 손뼉을 쳤다. 발락은 발람을 매우 모욕하는 언사를 가지고 그를 비난하였다.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들의 편이 되어 그들을 위해 세 번씩이나 축복하였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그들을 틀림없이 저주하리라고 믿게 하기 위해 단을 쌓으라고 하고, 또 제물을 바치라고 하였다."
이에 발락은 발람을 향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하였으며 그를 국외로 쫓아버렸으며, 그가 발람에게 주려고 하였던 높은 지위를 들먹이며 그를 비난하였다(11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가 그대를 막아 존귀치 못하게 하였도다. 보라, 네가 나를 기쁘게 하지 않고 여호와를 기쁘게 하여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네가 높은 자리를 얻지 못한 것밖에 더 있는가!"
이처럼 그들의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는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바보라는 비난을 듣는다. 그런데 여기서 발람이 자진해서 그리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랐다면, 발락이 그에게 주려고 하였던 온갖 영예를 잃었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온갖 손실을 회복시켜 주셨을 뿐 아니라 더 풍성한 것을 내려주셨을 것이다.
💡 본문에서 발락이 제시한 최고 대우의 약속은 어떤 조건을 만족시킬 때 주어질 수 었었는가?
-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발락의 요구를 충족시킬 때만 이 발락이 제시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었었다. 그러나 당시 발람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축복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러므로 발람은 당연히 발락이 제시한 부와 명예는 얻을 수 없었다. 후에 발람은 악한 꾀를 내어 결국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와 성적 타락으로 물고 갔지만(25:1-5; 31:16) 발락의 호의는커녕 하나님의 심판으로 비참한 죽음만을 맞았을 뿐이다(31:8). 결국 발람은 세상적 성공의 유혹을 뿌러치지 못하여 파멸의 길을 자초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세상적 성공을 우리 인생의 최고 목표로 두고 하나님의 말씀은 부차적인 것으로 두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에는 맞지 않지만 세상적으로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우리 앞에 있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 앙심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대해 조용히 성찰해 봐야 할 것이다.
- 발람은 처신을 잘했다.
(1) 그는 그 실패를 번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가장 그럴 듯한 변명을 말했다. 즉 하나님께서 그가 말하고자 하였던 것을 말못하게 하시고, 말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을 억지로 말하게 하신 것이다고 변명하였다. 그리고 이는 자기도 어쩔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또 발락에게 이미 말한 사실이 있으므로 그렇게 노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말했다(12, 13절). 발람은 자기가 이미 자기의 심정을 말했기 때문에 발락을 속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 2절, 발람은 발락이 처음부터 그 요구 조건을 들어주면 자신을 존귀케 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22:17)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뜻대로 변경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대응햇다. → 곧 이 사실은 발람이 발락의 사신들에게도 미리 알린 것이므로 지금의 사건은 예기치 않은 사건이 아니라 있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주장하는 것.
발람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대항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들어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것이다.
13절을 보면,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고 덜하거나 더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발락의 추궁에 대한 발람의 변명에 불과하며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종하려는 순수한 열정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매일 아침마다 정리해주는 찬미자매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