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성경읽기
레위기 11, 12, 시편 13, 14, 잠언 26, 데살로니가전서 5
묵상구절
24:15 발람이 그의 신탁을 받들어 말하였다. "브올의 아들 발람의 말이며 눈을 뜬 사람의 말이다.
24:16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깨달은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엎드러진 자가 말한다.
24:17 내가 그를 보나 지금 있을 일이 아니며, 그를 바라보나 가까운 일이 아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고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날 것이다. 그가 모압의 변방들을 쳐부수고 셋 자손을 모두 멸망시킬 것이다.
24:18 에돔이 그의 소유가 되고 원수 세일이 그의 소유가 될 것이니, 이스라엘이 강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24:19 야곱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그 성읍의 남은 자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24:20 또 그가 아말렉을 바라보며 그의 신탁을 받들어 말하였다. "아말렉은 민족들 중 으뜸이었으나 마지막에는 멸망에 이를 것이다."
24:21 또 그가 가인 족속을 바라보며 그의 신탁을 받들어 말하였다. "네 거처가 견고하니, 너의 보금자리를 바위 위에 놓았구나.
24:22 그러나 가인이 쇠약해져, 머지않아 네가 아시리아의 포로가 될 것이다."
24:23 또 그가 그의 신탁을 받들어 말하였다. "슬프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실 때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24:24 배들이 키프로스 해안으로부터 와서 아시리아를 괴롭히고 에벨을 괴롭힐 것이나 그도 또한 멸망에 이를 것이다."
24:25 발람이 일어나 자기 땅으로 돌아갔고 발락도 자기 길로 떠나갔다.
매튜헨리/옥스퍼드
●발람의 예언(민수기 24:15-25)
선지자의 하는 일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일과 예언을 말하는 두 가지의 일이다. 발람은 선지자로서 지금까지는 억지에 못 이겨서라도 이스라엘을 축복하였다. 여기서는 장례의 일을 예언하였다.
💡 본문은 이 신탁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히 밝힘
“발람이 그의 신탁(네움)을 받들어 말하였다.”
- ‘신탁’ : 이 단어를 사용할 경우 그 발언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이 된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사용된 표현이라면 우리는 그 구절이 지니고 있는 신적인 권위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동사가 성경에서 사용된 것이 약 360여회인데 그 중 예언서에 사용된 횟수가 약 340회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비록 이방인 술사 발람의 입으로 예언을 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주체는 분명히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5,16절 사이에서 ‘말하며’로 번역된 단어도 모두 ‘네움’
- 이처럼 ‘네움'을 연속적으로 나열함으로써 결국 이어지는 예언의 기원은 술사 발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예언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
Ⅰ. 그의 서론은 앞에서 말한 축복의 말씀의 서론과 같다(3,4절).
그는 놀랍도록 참된 선지자인 체를 잘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에게 이를 허락해 주셨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사람이든 지간에 그 예언 자체는 참된 예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먼저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1. 그는 자기의 "눈이 열려졌다" (역주, 24:3 주석의 역주를 참조하라)고 자랑했다(15절). 선지자들은 "옛적에는 선견자라고 일컬었다" (삼상 9:9).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본 바를 말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입을 열기 전에 먼저 그들의 눈을 뜰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고 자랑하였다.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다만 그것을 유의하지 않을 따름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실 따름이다.
- 그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안다" 고 자랑했다. 이것은 여기에 새롭게 추가되었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못하며, 진리의 빛을 받고 있으면서도 이를 사랑하지 못하는 수가 많다.
💡 지극히 높으신 자(엘르욘)
- 하나님 자신이 최고로 높이 올려진 부. 하나님의 유일한 능력을 강조하고 있고, 이 예언이 그분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지식
- 지적으로 이해하는 지식 뿐만 아니라 감각 기관을 통해 다양하게 알 수 있는 것들까지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특별히 이 단어는 지혜 문학에서 상당히 자주 등장하여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포괄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술사 발람은 본문에서 자신은 분명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 그는 "전능자의 이상을 본다" 고 자랑했다. 그러나 전처럼 "같은 개념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자", 그리고 "전능자" 라고 일컬었다. 아무도 발람처럼 하나님을 높일 사람은 없다. 또 하나님과의 사귐에 대해 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는 그가 하나님을 진실로 두려워하거나, 사랑하거나,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늘을 향해 길을 많이 갔다고 하나 얼마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Ⅱ. 여기에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영광의 관을 씌울 사람에 대한 예언이 있다.
💡 17절, 내가 그를 보나
- 발람이 이상 중에 본 ‘그’에 초점이 있는 단어.
- ‘그’가 누구인가?
- 그'는 곧 야곱에서 나온 한 별이며,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난 한 홀이다. 즉 왕 중의 왕이신 메시야를 발람은 지금 보고 또 자세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그 사람은 다윗의 예표이다.
그는 이 때가 아닌 때에, 가깝지 않은 장래에, 언젠가 때가 이르면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세일 산도 취하며, 그의 지도로 이스라엘의 군대가 용감히 행동할 것이다. 이 예언은 다윗에게서 이루어졌다. 다윗은 과연 모압을 쳤으며, 그리고 "줄로 젠" 일이 있고, 그러하여 "모압 사람들이 다윗의 종이 되었다" (삼하 8:2). 동시에 에돔 사람들 역시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다(삼하 8:14).
- 그러나 우리의 주님 예수는 약속된 메시야로서 여기에 예표가 아닌 원형으로 제시되었다.
이는 주로 예수께 대한 생생한 예언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오심을 오래 전에, 다만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알고 있기를 원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초월해서 널리 번져나가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예언은 다음과 같은 예언들이었다.
(1) 그의 오심은 아직 아니며, 오랜 후의 일이라고 예언하였다.
"내가 그들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라" 고 하였다. 내가 그의 환상을 보는데 먼 거리를 두고 보며, 적어도 1500년의 간격을 두고 본다는 것이다. 또는 이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악한 사람인 발람은 그리스도를 보되, 그를 가까이 보지는 못하며, 욥이 보았듯이 그를 자기의 구속자로 보지도 못하며, 자기 자신을 위하신 분이신 것도 깨닫지 못했다(욥 19:25, 27).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실 때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음부에 떨어진 부자가 아브라함을 보듯이) 멀리서 그를 볼 것이다.
💡 지금 있을 일(현재 시간)이 아니며, 그를 바라보나 가까운 일(가까운 미래의 시간)이 아니다.
- 본문은 신 • 구약에 나타난 ‘예언(계시)의 시간성' 이란 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매우 탁월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 요한 등을 통해 보여 준 하나님의 예언과 계시 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의 예수님의 예언들에까지도 모두 적용되는 ‘성취의 시 간성' 이라는 측면을 본문이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이나 계시는 지금 당장 성취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또 당대의 역사 안에서 실현될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즉 그 성취의 시간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뿐이다.
- 본문의 예언이 그 예언이 주어진 이후 약 1400년의 시간이 지나 약 2천 년 전 나사렛 예수에 의해 성취되었듯이 또한 주님의 종말에 관한 예언 역시 그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으나 언젠가는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2) 그는 야곱과 이스라엘에게서 한 별로 그리고 한 흘로서 나오리라고 예언하였다. 별이란 "빛나는 새벽별" 과 같이 그의 영광과 광채를 나타내며, 흘은 그의 능력과 권세를 의미한다. "그는 다스릴 자이시다."
아마(동방의 아들인) 발람의 별에 관한 예언 즉 "한 별이 야곱에서 나오며 한 흘이 이스라엘에게서 나오리라" 는 예언이 그 나라에서 하나의 전설로 간직되어 오다가, 동방 박사들이 유대 땅의 이상한 별을 보게 될 때, 그것이 곧 "유대의 임금이 탄생한 것" 이 아닌가고 묻게 하였을 것이다(마 2:2).
💡 야곱에게서 ‘나오며’
- 나오며 : 1)밟다, 2)당기다로 의미가 이분되는 동사이다. 2번 의미와 마찬가지로 ‘밟는다’는 1번도 ‘소유, 정복, 통치’란 이면적 의미를 지니기 대문에 이 단어의 기본 개념은 ‘전쟁’과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다.비록 상징적 묘사이기는 하지만 별이 땅을 밟고 전진하는 것은 매우 신비롭고 기이한 모습이다. 이것은 분명 육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발람은 이상중에 환히 빛나는 한 별이 악한 대적들을 섬멸하기 위해 야곱의 진영 가운데서 행진하여 나오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 예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과 싸워 이긴 왕 곧 메시야를 상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 한 별이 악한 세력과의 전쟁을 위해 행진하여 나오고, 홀이 ‘일어나' 그 세력을 치려는 모습을 발람은 이상 중에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여 결국 그 별과 홀에 의해 모압, 에돔, 아말렉 등의 나라와 앗수르까지 멸망하게 될 것임이 이어지는 에언에서 밝혀지고 있다(17b-24절)
-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단순히 ‘나오며'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어 성경은 ‘한 별'이 마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행진하듯이 걸어나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3) 그의 나라가 우주적인 것이 될 것이며 모든 반대자들을 정복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모압과 에돔에 대한 다윗의 승리로 예표되었다. 그러나 메시야는 "모든 셋의 자식들을 다 멸절할 것이다" (17절). 다시 말하면 셋의 자식이란 온 인류로 말하는 것인데 아람의 자손 가운데서 셋의 자손 외의 모든 자손들은 모두 홍수로 인해 멸망받았기 때문이다.
💡 ‘모압, 에돔’ = 단지 한 민족을 말한다기보다는 모압으로 대표되는 하나님과 대적하는 이 세상의 세력. 이 예언의 목적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세상의 세력의 멸망에 대한 것. 에돔은 이스라엘 형 에서의 자손으로 약속의 자녀가 아닌 육신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성경에서는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르는 백성이 아닌 세속의 백성들은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의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야곱과 이스라엘만이 아닌 온 세상의 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셋의 자식들은 그의 황금의 흘로 다스리심을 받든가 아니면 그의 철장으로 진멸된다. 그는 하나의 우주적인 원칙과 그 자신의 권세와 능력들을 세우시고 이에 반대되는 모든 원칙들을 멸하실 것이다(고전 15:25).
어떤 사람은 그가 "셋의 자식들의 벽을 헐리라" 고 읽는다. 그는 그들의 모든 방비와 육체적인 신뢰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의 통치를 받든가 아니면 그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4) 그의 이스라엘이 용감히 행동하리라는 것을 예언하였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어둠의 세력과의 영적인 싸움을 싸우며, 단순한 정복자 이상의 신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며 용맹을 발하리라" (단 11:32).
Ⅲ. 여기에는 아말렉과 가인 족속에 관한 예언이 있다. 그것은 노래로 된 비유이다. 그들에 대해 발람은 이렇게 보았다.
1. 아말렉은 지금 "열국 중의 으뜸이다" (20절). 그러므로 그들의 왕 아각은 탁월한 왕으로 지칭되었고(7절).
그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나온 이후 맨 먼저 싸움을 한 백성이다. 그러나 지금은 위대해 보이는 그 나라도 완전히 멸망하고 뿌리 뽑힐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 여기서 발람은 모세가 선포한 아말렉의 운명을 재확인하였다(출 17:14, 16).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시리라" 고 맹세하셨다. 하나님께서 더불어 싸우는 자는 분명히 멸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견딜 자가 없기 때문이다.
💡 아무리 역사가 깊고 힘이 셀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의 종말은 곧 멸망뿐임을 본절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아말렉' 은 구체적으로 사울과 다윗이 무찔렀던, 그리고 히스기야 시대에 멸망당했던(대상4:43) 역사 속의 아말렉을 말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압과 마찬가지로 영적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악한 사단의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2. 가인 족속은 지금 열국 중에 가장 안전하다. 그들은 자연적인 조건에서 그들을 방비해 주는 그런 곳에 처해 있었다.
"(독수리 와 같이) 네 보금자리는 바위 위에 있도다" (21절). 너희는 너희가 안전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인 족속이 쇠미하리니" (22절). 점차 쇠퇴하여 "앗수르의 포로가 되리로다."
💡 (21절) 본문의 ‘가인 족속’은 ‘겐 족속’.
이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실 땅을 말씀하실 때에 처음으로 성경에 등장하고 있다. 또한 모세의 장인 호밥이 ‘겐 족속’에 속하였다. 이들은 대개 이스라엘에게 호의적인 것으로 성경에 나타난다. 이들의 모습은 지금은 새가 그 보금자리를 안전한 바위틈 안에 지어 놓은 것처럼 매우 안전한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을 하였다.
(22절) 이들은 ‘소멸될 것’
- 성경에서 이처럼 한 나라가 쇠하여지는 모습을 불에 타 소실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 결국 한 족속이 타는 나무와 같이 멸망하여 사라지고 만다고 하는 예언의 말씀은 각 사람의 생애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들풀과 같은 인생의 덧없음을 올바른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면 현재의 생이 전부라고 생각하여 결국 우리의 삶을 올바로 통찰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 예언은 그들의 열 지파가 포로됨으로 실현되었다. 육적인 술책은 자연적인 육체와 마찬가지로, 비록 강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점차 쇠퇴하여 마지막에는 멸망한다. 비록 바위 위에 있는 보금자리라 할지라도 영원히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한다.
Ⅳ. 여기에는 또 "심딤 해변" 과 관련된 예언이 있는데, 그것은 훨씬 오랜 후에 나타날 헬라와 로마에 대한 예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24절).
1. 이 비유의 도입 부분에 있어서 그 예언의 표현 기술이 매우 주목을 끌 만한 것이다(23절).
"슬프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시니 그 때에 살 자가 누구이랴!"
💡 발람 자신의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의 멸망을 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조롱하는 말.
******여기서 발람은 여호와께서 모든 나라와 왕국에 대해 행하시는 변혁을 깨닫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다." 실제적인 도구는 누구이든지 간에 그것을 움직이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비통한 어조로 그들에 관해 말했으며, 그 사건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그때에 쓴 자가 누구 이랴" 고 말했다.
💡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에언 전체는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실 때'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본문의 역할은 미래에 있을 사건이 정말로 이뤄지는지 그렇지 않은지, 또는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나라는 결국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있지 않다.
이 예언의 성격은 개인과 족속과 전 인류의 시작과 마지막이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다스려지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24절, 구약에 나오는 ‘깃딤'
- 본문에 등장하는 자들은 고대 근동을 제패하여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던 앗수르를 학대하기 위해 쳐들어온 지중해 연안의 여러 민족이나 바벨론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정확히 어떤 민족인지 규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들 역시 멸망할 것을 밝힘으로써 인간의 나라는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오직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뿐이다.
(1) 이 사건들이 아주 멀리서 그리고 아주 오랜 후에 일어날 것이니만큼 "그들이 올 때까지 누구나 살 수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거기에 놀라운 변화가 있으므로 해서 누구든지 살아 남아서 그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2) 그러나 또 다른 의미로서, 그들은 철저하게 황폐해져서 아무도 거기서 도망치거나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사망이 말을 타고 나을 때 누가 살아 남을 수 있을까?" (계 6:8) 그 때에 살아 남는 자는 불에서 꺼낸 타다남은 나무토막 같을 것이며, 그들의 생명은 다시 찾아온 약탈품처림 주어진 생명이 될 것이다. 하나님 만이 이런 악한 시대에 우리를 살아 남게 하여 주신다.
👀 25절, 본문은 발람이 자신의 고향 곧 메소포타미아로(22:5)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디안에 머물렀옴을 이후의 기사를 통해(31:16)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발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다 발길을 다시 돌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신에 충만했을 때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을 축복하였고 이제 그 뜻을 시행한 후에는 과감히 발락과 결별하여 자기 고향으로 향했지만 가는 도중 이방 술사로서의 탐욕이 그를 붙잡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이 발람에게서 떠나게 되자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발람은 원래의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돌아가서 발락이 약속했던 재물과 명에(22:17; 24:11)가 탐이 나서 다시 발락에게 되들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그는 저주의 예언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음을 알고 대신 적접적으로 이스라엘을 해칠 다른 방법을 발락에게 알려 주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그는 탐욕으로 뒤돌아본 롯의 아내와 같이(창 19:26)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다시 돌이킴으로 멸망의 길을 재촉했던 것이다(31:8.16).
👀 영적 교훈 서론
본문은 모압 왕 발락의 전 3차에 걸친 이스라엘 저주 시도와 발람의 전 4차에 걸친 에언의 노래를 기록하고 있는 22:41-24:25의 종결 부분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발락의 제 3차 저주 시도 및 발람의 세번째 예언의 노래를 기록하고 있는 지난 단락(23:27-24:13) 에 이어 발람의 마지막 에언의 노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본문의 네번째 발람의 에언은 앞선 세 번의 예언과는 성격상 조금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즉 앞서 행한 에언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의 요구에 응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받은 예언이었지만 본문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먼저 발람을 통해 행하신 예언인 것입니다.
또한 내용면에서도 단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차원을 넘어서 에돔과 아말렉을 비롯한 이스라엘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가나안 주변 민족들의 장래에 관해 예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에 의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나 본문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메시야의 출현을 에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17-19절).
물론 발람의 에언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장차는 다윗과 같은 왕이 나타나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은 자신의 예언 속에 불특정 인칭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동시에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본문은 최후의 승리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음을 예언함으로써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계시하며 동시에 이미 하나님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성도들에게는 확정된 승리의 결말을 보여 줌으로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매일 아침마다 정리해주는 찬미자매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