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하는 법

마 18:10-14 묵상강의

하나지기 2022. 1. 10. 06:24

본문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가?

올바로 파악해야 올바른 묵상을 할 수 있다.

1.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마라.
2. 교만하지 마라
3. 양자됨
4. 선택, 하나님 형상
5. 하나님, 백성을 끝까지 찾으심(견인)

1번은 초점이 '나', 인간에 있다.
2번도 나, 인간이다.
3,4번은 하나님 중심으로 풀 수 있으나 5번이 핵심이다.
세리의 기도에 대해서도 우리가 인간에게 초점을 두면 우리도 저렇게 기도해야 한다던지, 우리는 그런 존재다 라고 묵상할 수 있는데 옳지 않다. 세리의 기도조차도 하나님이 어떻게 다스리셨기에 저렇게 겸손한 마음이 나오는가. 하나님께 핵심이 가도록 해야 한다.

본문도 하나님께서 작은 자일지라도 가만히 두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고 부르시는 자라면 항상 개입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선택도 생각해볼 수 있고, 은혜 언약에서 어떻게 인도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견인하시는가.
핵심 자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으신다는 것. 

 

이를 믿는가?
진짜 믿는 사람은, 어떠한 사건이 있고 문제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임을 믿는다. 내가 혼동하고, 혼란이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으시고, 올바로 붙들어주실 것이다. 이것이 양의 비유이다.
우리가 때로는 양들끼리 가다가 여러가지 이유, 문제, 이해하지 못함, 두 마음이 품어짐, 혼란스러움 등등 무리의 양들을 쫓아가지 못하고 뒤쳐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뒤쳐지게끔 가만히 두지 않으신다. 이를 믿는가?
그러나 '나는 양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염소다'라고 생각하면 이 말씀이 은혜가 되지 않는다. 받을 수가 없다. 나는 염소니까.
그런데 교회에 있다면, 양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교회만 구원이 있다.(교회론) 왜? 말씀,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오니까. 세상사람은 이를 듣지 못해서 믿음이 생길 수 없다.

과정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 계속해서 인도하시고, 믿음을 더하실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처음에 복음주의든 개혁주의든 거기로부터 불러오셨다면, 진리가운데 더 깨달아서 나오고 있다면, 당연히 여러분은 양이다. 행동을 보고 염소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 염소일 것이다.
염소들도 열심히 무엇인가 한다. 염소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와 양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가 다르다. 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인 양들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이다.
염소들은 사고자체가 율법주의자들이다. 자기가 무엇을 항상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안했습니까라고 한다. 항상 말씀을 지켰다는 원리에서 말한다. 반대로 양들은 언제 했나이까 라고 한다.
왜 염소들은 언제 안했나이까 라고 하고, 양들은 왜 언제 했나이까라고 하는지 아는가? 왜 이런 사고를 갖게 되는가?
성경에는 심판가운데서도 인간들이 하는 모습들이 있다.
억울함에 대한 호소. 이게 가장 핵심적인 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억울함에 대한 호소를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뜻에 맡긴다. 내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염소들은 자기 스스로 변화하고 억울해한다.
만약에 억울해하면, 그 사람에게는 뭐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가? 부부관계도 상대방에게 억울함, 무엇인가 기대했다가 기대한 만큼 오지 않고 반대로 올 때,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권면을 받으면, 화를 내고 분이 생기기 시작한다. 감정이 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억울함이 없다. 왜? 아무리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뜻에 있는줄 안다. 풀려고 하고 무마시키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의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억울함에서 자기 의로 넘어간다.

다시 본문으로 넘어가서,
양들은 하나님께서 지키신다. 무엇을 지키실까? 그들의 믿음을 지키시는 것이다. 믿음은 그들의 사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0절
우리가 생각할 때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시는 천사가 있다고 하는데,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 하나님께 보고한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전지하셔서 아시지만, 천사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듯이 우리도 아주 작은자일지라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작은 자일지라도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에.
구원하시기에 관심가지고 일하시는데 그를 내가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오히려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려 하시는데 나는 오히려 죽이려고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영혼에 대해 얼마나 온 마음을 쏟고 있는지 봐야 한다.

위대한 존재인 천사인데, 우리를 지켜보고 인도하고 보호하며, 섭리 가운데 주권적으로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이 다 이루신다면, 믿을만 하지 않을까? 이는 내가 양이라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가 나오고, 내가 양이면 나같은 존재를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천사들을 통해서 살피시는, 전지하시고 전능하시지만 모든 것을 협력해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12절
하나님께서 우리가 때로는 본인의 잘못으로 길을 잃던지, 미혹되던지 해도 여러분들을 지키시고, 반드시 그 양을 가만히 두시지 않으신다. 이런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은혜 언약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은혜언약에 대해서,
구원까지 이끄시고, 영화까지 이끄시는 것이 은혜 언약의 원리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있는 것이다. 과정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과정이 있고 지금도 우리는 과정속에 있다.
세상적 원리에서 허용적으로 심판하려고 내버려두시는 것과 은혜 언약에서 중생, 영화로 이끄시는 것.
나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찔리게 하시고 양심을 치시는 것이 다 은혜언약의 원리이다.
객관적으로 확신한다면 내 안에 하나님이 역사하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내가 주관적으로 가져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안에서 더 확신하는 것이 먼저다.
객관적 하나님을 공부하다보면 주관적으로 깨달아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데, 주시지 않았음에도 내가 주관적으로 들어가서 살피면 안된다.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단히 묵상하는 것은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부단히 할 때 공부와 연구가 객관적이지만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 이해가 될 때 하나님의 은혜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관적으로 오게 하신다. 주관적으로 올 때 나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지 스스로 살피면 더러운 것밖에 안보인다.

주관적으로 가시는 분들을 보면 보통 욕심에 의해 많이 간다. 주관적은 내가 얻고자 하고, 갖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원리, 신앙의 원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은 이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모든 보화를 넣어주셨다. 이 안에 있는 보화만 가져가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가져야 이 보화를 가지는 것이다.
주관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화만 가지려고 한다. 내가 객관적으로 깨달아서 하나님이 이해되어지고, 이해되어지면서 은혜 가운데 자연스럽에 주관적으로 와야 하는데 주관적으로 급히 달려가서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보다 주관적으로 먼저 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보화만 얻길 원하는 것이다.
내 상태, 마음과 생각의 상태. 내 욕심, 관대하지 못함에 대해 우리는 계속 부딪히는데 내가 변화되고 싶어 하고, 승리하고 싶어한다. 관대함, 사랑, 온유함 이것만 가지고 싶어한다. 그리스도 안에 이것들이 있고, 그리스도를 가질 때 이것들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갖는게 무엇일까? 그리스도를 갖는 것이 무엇인가? 다음의 원리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데,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는 것이다. 연합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가질 수 없다.
연합하려면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내 자아가 죽어야 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어야 하고,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죽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죽을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전체를 가지려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 자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오셔서, 어떤 분으로, 어떤 본성으로, 성향으로 살아가셨는지 전체를 가지려고 해야한다. 그리스도의 한 부분만 뽑아내는 것이 아니다. 부분적으로만 얻으려고 할 때 절대 얻지 못한다. 예수님을 전체 얻고, 의지하고, 신뢰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예수님이 어떤분인지 보려고 해야 하고, 전체적으로 삶 전체에서 어떻게 아버지에게 순종, 사랑,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자신의 영광을 버리시며, 겸손, 관대, 신실하셨는지 전체를 봐야 한다.
그런데 자꾸만 적용이라고 해서 내가 부족한 점을 예수님의 한 부분만 가지고 생각해서 가지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전체를 얻으려면 내가 죽어야 한다. 그것 외에는 없다. 전체적으로 내가 죽었다고 하는 사람은 나에 대해서 살아나지 않고, 그것이 살아나는 것도 싫어하게 되어 있다. 
나에 대해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 무엇인가? 부패성과 구분해야 한다. 부패성은 우리 욕심, 자만심, 교만을 계속 치고 일어난다. 그런데 내 존재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부패성은 올라오지만, 나라는 존재를 의존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을 의존하는데, 의존하는 원리는 주님의 선과 의로움을 확신하게 되고, 주님이 선하시고, 사랑, 자비, 긍휼이 많으시고, 내 부패성이 올라올지라도 주님의 이런 것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죄가 생기면 예수님의 선하심에 끌리는 사람이 있는가? 끌려야 한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작은 자들 중 하나, 내가 아무리 작은 자일지라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으시고, 천사를 통해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뿐만 아니라 전지전능하셔서 눈동자같이 지키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개입히시고, 인도하시는지 실천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때로는 우리에게 악한 생각이 들어올 수 있다. 우리에게 들어오는 악함을 막을 수 있는가? 네, 아니요 둘 다다. 막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묵상하며 바라볼 때 악한 생각이 들어올 수 없게 된다는 것이고,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내가 공허하고, 연약하고, 지치기도 하면서 사탄이 주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머리에서, 생각에서 털어내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는 것도 은혜의 반응이다. 잘 안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든 섭리로 끊어지게 하실 것이다. 이것도 은혜이다. 하나님을 좇고자 하는 모든 것이 은혜이다.

빌1:6 나는 너희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

내가 중생했어 안했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사람이 중생한 사람이다. 내가 죄를 이기고 이기지 못하고가 아니라, 내 마음을 선으로 조금이라도 인도하시는가를 보는 것이다. 
내 생각과 마음에 죄가 있을지라도 올바른 마음과 생각을 가지게 하시는 것. 우리에게 죄가 있을 수있다. 생각과 마음 자체가 올바로 가는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붙드셔서 가능한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 문제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잡아주시고 하나님께 향하게 나가게 해주시는 은혜. 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안다.
하나님을 올바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얻을 때 죄가 이겨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 마음, 성향, 어떤 올바른 마음과 생각을 가지셨을까. 그래야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죄부터 이기려고 하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문제가 있으면, 묵상이 잘 안되면 근원부터 해결하려고 한다. 근원부터 올바로 잡아야 묵상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양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붙들고 계심을 이해할 때, 은혜가 되고 묵상이 되는 것이다. 내가 염소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아직 아니야라고 하면 은혜, 묵상이 되지 않는다.

※ 정리해 주신 분 : 김면 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