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 성경읽기
여호수아 7, 시편 137, 138, 예레미야 1, 마태복음 15
묵상구절
27:1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27: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27:3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27: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27: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27: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27: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27:8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27:9 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27: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매튜 헨리 / 옥스퍼드
스페셜포인트
27-30장: 전 3부로 구성된 신명기 고별 설교의 결론부
27장
- 가나안 입성 직후에 율법을 기록한 기념 돌비와 돌단을 축조하고 기념 제사 의식을 거행할 것에 대한 명령과 율법 준수 명령 및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른 측복과 저주의 선포 의식을 거행할 것에 대한 명령을 내린다. 그리하여 이같은 요단 도하 후 거행해야 할 두 가지의 의식 집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의 의무를 재각성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간접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지켜야 할 두 기념 의식에 대한 지시/명령.
- 곧 기념 돌비와 돌단 축조 및 기념 제사 거행 명령과 에발산과 그리심산 양측에서의 축복과 저주의 선포 의식은 그 형식이나 세부 내용은 비록 다르지만 그 근본 목적은 결국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에 대한 순종의 의무를 재각성하게 하는 것으로서 동일하였다.
-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해 주신 것도 그리고 앞으로 가나안을 정복하여 차지하게 될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또한 이는 향후에도 계속된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여야만 함을 효과적으로 교육할 수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이같은 점을 염두에 두시고 모세를 통하여 사전에 곧 요단강을 아직 건너기도 전에 이 두 의식의 거행을 연속적으로 지시하셨던 것이다.
- 즉 이 두 의식은 가나안 입성 직후에 거행되도록 지시된 것으로서
-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해 주신 것도 그리고 앞으로 가나안을 정복하여 차지하게 될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또한 이는 향후에도 계속된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여야만 함을 효과적으로 교육할 수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이같은 점을 염두에 두시고 모세를 통하여 사전에 곧 요단강을 아직 건너기도 전에 이 두 의식의 거행을 연속적으로 지시하셨던 것이다.
● 율법을 기록하라 (신명기 27:1-10)
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는 백성들에게 일반적인 분부가 내려졌다. 저들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계명을 안다는 것 자체로는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율법에 주어진 것은,
1. 강력한 권위로 명령된 것이다.
"모세는" 각 지파의 지도자들인,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이 명령을 내리고(1절), 또다시 "모세는 레위인 제사장들"과 더불어 고했다(9절). 따라서 이 명령은 여수룬의 군왕 격이었던 모세와 그를 보좌하는 영적 지도자와 현세적 지도자들의 일치단결로써 내렸던 것이다.
이것은, 저들의 종교에 그렇게 수선을 피운 자가 늙어서 다 죽어 가는 모세 한 사람이거나 종교 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거기서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레위인 제사장들 단독적인 처사라고 백성들이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존귀와 권세를 받은 자들로서, 모세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생존해 있으면서 이 세상에서 그의 대리인으로 있을 자들인고로 "그들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것을" 명했던 것이다. 모세는 자기가 차지하던 영광 중 일부를 장로들에게 일임하고 이 계명을 친히 그들과 공동으로 전달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바울 사도가 그의 서신에서 실루아노나 디모데와 함께 함을 나타낸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타인들과 이해관계를 가지거나 그들을 자기 권세 하에 두고 있는 모든 자들은 그들 중에서 신앙을 진작시키고 장려하는 데에다가 그 이해관계와 권세를 사용해야 마땅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비록 한 국가의 최고의 권력 기관이 그런 목적을 위하여 매우 훌륭한 율법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하급 행정관들이나 사역자들이나 가장들이 자기들의 처소에서 그 직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이다.
👀 모세가 스스로에 대하여 1인칭을 사용한 문제에 대해서 부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장로들의 역할을 자신의 사역과 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촉구하는 본장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언급된 것은 모세 자신이 지금 가르치는 율법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낭독해야 할 임무가 주어진 자들 중의 한 무리가 이스라엘 장로들이었기 때문이며(31:9-12), 모세가 죽은 이후에 모세 자신 대신에 그 장로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야 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로 보건대 모세는 본절에서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백성에게 율법의 순종을 촉구하고, 제 9절에서는 레위 제사장들과 함께 율법의 순종을 촉구함으로써 이스라엘 장로들과 더불어 레위 제사장 두 부류의 무리를 백성들 앞에 분명하게 소개함과 동시에, 그 두 부류의 무리가 모세의 권위를 위임받아 백성들 앞에서 말씀을 낭독할 수 있는 자들임을 분명하게 알려 준 것이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죽을 것이므로(31:2; 34:4-8), 가나안 땅에서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율법으로 가르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백성들로 하여금 명확하게 알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본문의 이 명령 = 27장~28장에 기록된 축복과 저주의 말씀.
2. 아주 간곡하게 명령됨.
저들은 백성들에게 극히 열성적으로 이 율법을 강조했다(9,10절). "오! 이스라엘! 주의를 기울여 들으라."(쉐마)
그것은 가장 고도의 주의와 조심을 요하며 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저들의 특권과 영광을 고한다. "오늘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주 여호와께서 너를 자기 소유로 인정하시고 이제 그가 오래 전에 네 하나님으로서 약속하셨던 바의(창 17:7, 8) 가나안 땅을 너로 소유케 하시려고 하시며 만약 하나님이 때가 이르러서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셨다면 네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부끄러워하셨을 터이었다(히 11:16). 이제 너는 영원히 그의 백성이 되었으니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특권은 의무 이행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 백성은 마땅히 저들의 하나님께 지배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 본문의 진술은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여 지켜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 (출 20:2)라고 먼저 선언하신 다음에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 된 도리로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되는 것이다.
말씀을 복종하여 — 행할지니라
듣고 행하는 이러한 행동의 순서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더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서는 들은 말씀에 따른 행함이 기대되며 (마7:24), 그러한 자는 곧 예수님의 가족으로 여겨지는 것이다(눅8:21). 이는 곧 말씀을 듣고 행한 자들이 언약 안에서 예수님의 가족으로 여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근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요 14:23,24).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어며, 그 말씀 안에 거하며 그 말씀 안에서 길을 찾으며, 그 말씀 안에서' 열매를 맺는 자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다(요15:7).
Ⅱ. 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대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 들을 아주 엄숙히 기록하라고 저들에게 내린 구체적인 지시가 나타나 있다.
그것은 이 율법에 내포되어 있는 몇 가지 단서와 조건들 하에서 저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것을 소유하게 됐다는 징표로서 단 한 번 행해야 했다. 시내산에서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언약의 인준식이 엄숙하게 베풀어졌던 바, 제단이 열 두 기둥과 함께 세워졌고 언약의 책이 만들어졌었다(출 24:4). 여기에서 지정된 의식은 그와 유사한 엄숙한 제전이었던 것이다.
1. 그들은 "이 율법의 말씀들을" 기록해 둘 기념비를 세워야만 하였다.
👀 언제 세워야 하는가?
→ 너희가 요단을 건너 .. 땅에 들어가는 날에
원문의 직역은 요단을 건넌 후 바로 돌비를 세워야 한다는 보다 급박스러운 느낌을 준다. 즉 원어 성경은 돌비를 세우는 일이 다른 일을 하고 난 이후가 아니라 모든 일에 앞서 신속히 수행할 일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가장 중요한 급선무로 여겨질 가나안 정복보다 그들이 살 땅에서의 삶의 기준이 될 율법을 선포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임을 보여 준다.
어디에 세워야 하는가?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모세는 지금 가나안 땅이 내다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지금이라도 당장 가나안 땅이 주어질 것처럼 생생하게 말하고 있다. 이는 40년 동안이나 메마르고 건조한 땅, 뜨거운 태양과 들짐승들의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지 못했던 광야를 방랑해 온 이스라엘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소망을 보여 주는 표현법이라 할 수 있다. 모세의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서 이스라엘은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가나안 땅을 그리면서 지난 40년 동안의 눈물과 아픔이 눈 녹듯 사라져 가는 내적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영적 지도자는 이스라엘의 광야 나그네 생활과 같은 험악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창 47:9) 성도들에게 미래의 소망을 보여 줌으로써 성도들의 지난날의 애환과 아픈 경험들이 쌓여 있는 상처받은 마옴들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의 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헌실로 이루어졌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영적 지도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과 기업은 반드시 우리에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1) 기념비 그 자체는 그 위에 회칠을 하고 다듬지 않은 거친 돌로 평범한 것이었다. 즉 닦아 연마한 대리석이나 설화 석고는 아니 되었고 또 놋쇠 판도 아니 되었으며 석회를 칠한 평범한 돌이어야 했던 것이다(2절).
돌에 석회를 발라 그 위에 글을 쓰는 것은 애굽에서 시행되던 것인데, 이는 돌 위에 글씨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석회가 발라진 돌 위에 도료를 사용하여 글씨를 그려 넣는 방식이다. 그렇게 하면 돌 위에 기록된 글씨가 사람들의 눈에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고 그 돌들 위에 기록된 글씨를 보는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세로부터 육성으로 들었던 그 말씀을 재차 눈으로 확인함으로써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석회를 바른 돌 위에 기록된 율법은 이스라엘 대대로 기억해야 할 영원한 말씀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호기심을 가진 자들이 상찬하도록 이 명령은 반복되며(4절), 또 그것을 기록하되 아주 정교로이 할 것이 아니라 달려가는 자라도 그것을 읽을 수 있도록(합 2:2). 아주 명백히 기록하라는 명령도 내려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기술로 꾸미거나 "인간의 지혜로 짜낸 매혹적인 말로써 장식할 필요가 없다.
(2) 그 비에 기명하는 일은 아주 중대한 일이었으니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 이란 표현이 3절과 8절에서 중복되고 있다.
혹자는 그것을 단지 신명기 26장 17, 18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계약으로만 생각한다. 마치 라반과 야곱이 아무렇게나 던져 묻은 돌무더기를 언약의 증거물로 삼고 그 위에서 화목의 표시로 함께 먹었으며(창 31:46, 47) 또 여호수아가 세웠던 돌처럼(수 24:26) 이 돌 무더기를 세워 증거를 삼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자들은 27장에 나오는 저주의 언약들이 이 기념비에 새겨져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에발산에 세워졌기 때문에(4절) 더욱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또 신명기 전체나 혹은 최소한 12장부터 26장 끝까지의 규례와 법도가 이 기념비에 적혀 있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몇몇 학자들처럼) 이 비문에는 법궤 속에 간직되었던 은밀한 기록의 믿을 만한 복사판으로서, 십계명만 여기에 적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방대한 양의 비문을 그 모든 쪽에 다 기록할 만큼 그 돌무더기가 컸었으리라는 추측은 불가능한 것이다.
💡 옥스퍼드 주석은 27,28장에 기록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봄.
저들은 이것을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 기록해야 했다. 모세는 "이것을 네가 들어가거든 기록하라(3절).
즉 너는 편안한 마음과 성공과 정착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들어가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나으리라. 그것을 네 가나안 입경의 조건으로 기록하고 네가 이 조건들 이외에는 들어가지 않음을 고백하라. 가나안은 약속으로 주어진 땅이니 이것은 순종함으로 지켜야 할지니라" 라고 모세는 이른다.
👀 율법의 모든 말씀을 요단을 건넌 후 신속하게 돌 위에 기록하라는 명령의 의미는 율법의 말씀을 절대로 잊지 말고 다시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는 요단을 건너지 못하고 여호수아가 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가게 될 것이므로 모세가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이방 문화와 사상이 가득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거짓된 가나안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돌 위에 곧바로 기록하여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보고 마음에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즉 요단을 건넌 후 곧 율법의 말씀을 돌 위에 기록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율법 교육의 시급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지도자가 죽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지도자의 가르침을 다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모세는 자신의 부재 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영적 공황 사태를 사전에 막고자 한 것이다.
2. 저들은 또한 제단을 쌓아야 했다.
석회 위에 쓰여진 율법의 말씀들로서 하나님이 "저들에게 말씀하셨고" 저희는 제단과 그 위에 바친 희생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과 저들 사이의 교제가 유지되었다. 말씀과 기도는 동행해야만 한다. 비록 저들이 장막에 있는 제단 이외에는 저들 자의대로 어떤 제단도 쌓지 않도록 되어 있었으나 하나님의 명으로 특별한 경우에는 가하였다. 이 경우와 비슷하게는 엘리야가 열 두 개의 거친 돌로 임시 제단을 쌓았던 일이 있으며 그는 이때 이스라엘 백성을 이 언약으로 돌이키게 했던 것이다(왕상 18:31, 32).
💡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을 건너고 여리고와 아이성 점령을 마친 후 다른 지역의 정복에 앞서 에발산에 이르러 돌단을 쌓고 율법을 기록한 돌비를 세우며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선포했다(수8:30-35).
실제로 에발산은 풀과 나무는 거의 없고 온통 돌과 바위로만 뒤덮여 있는 산이다. 세겜 지역의 북쪽에 위치해서 세겜 남쪽에 위치한 그리심산과 마주 보고 있는 산으로서 해발 940m에 이르는 산이며 남쪽에 위치한 그리심 산의 그림자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그늘로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이유 즉 산에 울창한 나무와 숲이 거의 없고 거의 항상 그늘져 있는 이유로 인해서 에발산은 저주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나무와 숲도 울창하고 항상 햇빛이 많이 비쳐 축복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그리심 산이 아니라, 저주의 상징인 에발산에 율법을 기록한 돌들을 세우라고 명령하셨을까?
그것은 율법이 가지는 저주의 측면(고후3:7) 을 강조하여 율법이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1) 이 제단은 돌로 쌓아야 했는데 저들이 들에서 아무렇게나 주울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바위에서 새로 깎은 것이어서는 안 되었으며 인위적으로 모나게 다듬은 것은 더더구나 불가했다. 즉 "너는 철기를 그 위에 대지 말지니라" (5절).
우리의 제단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산돌" 이라서(단 2:34, 35)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즉 "건축자들에게 버리운 바 되었으나" 아버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사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신 것이다.
💡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돌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것
이는 종교적인 의식이다. 이러한 종교의식, 즉 예배를 하는 목적이 이스라엘 자신을 위함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위함이라는 사실이 본문의 초점이다. 이로 보건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쌓게 될 단, 그리고 거기에서 드릴 제사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져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예배의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만 올려져야 한다. 따라서 그 영광을 예배드리는 자, 곧 사람이 가로챈다면 그는 하나님의 것을 가로채고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들어가 거주하게 될 땅 가나안의 종교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인간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자신들이 세운 신들(gods) 을 섬기는 것이었다. 가나안 족속들은 그 신들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성적 쾌락을 정당시 했으며, 계절에 따라 섬기는 신을 바꾸기도 하였다. 즉 초목이 메말라 있는 겨울에는 죽음의 신, ‘모트'를 섬기다가, 새싹이 돋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봄과 여름에는 바람과 비를 몰고 온다고 여긴 폭풍과 바람의 신 ‘바알'을 숭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섬기는 신을 상황과 조건에 따라 바꾸는 것은 곧 육신적 유익을 위하여 인간 본위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 이스라엘은 그렇게 해서는 안되었다. 그들이 예배하는 목적, 그리고 그들이 신앙 안에서 말씀을 지키고 즐거움을 누리는 모든 목적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과 명예와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돌단에 철기를 대지 말 것(자연석 그대로여야 함)
2-4절에 나오는 돌들은 제사를 드리는 돌단이 아니라 율법을 기록하기 위한 돌들인 반면 본문의 돌단은 제사를 드리기 위한 돌단을 가리킨다. 출 20:25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돌단을 철기구를 사용해 다듬어 쪼지 말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인데,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한 가지는 제단을 만들 때 돌을 철기로 매끄럽게 다듬는 것은 가나안 종교의 관행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종교와 구별되게 하시려고 돌을 철기로 다듬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돌의 거친 표면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제단을 만들라고 하심으로써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예배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 번제와 화목제가 이 제단 위에서 드려져야 했으니(6,7절), 이로써 저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은총을 얻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율법이 기록되어 있는 곳에는 제단도 그 가까이에 세워져야 했다. 이는 만약 속죄를 이루어 주는 위대한 희생 제물이 없다면, 우리가 범법 의식을 가지는 것만으로서는 율법이 우리에게 아무런 위안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제단은 에발산 위에 세워졌는데, 거기서 각 지파들은 그 저주들에 응답하여 "아멘" 하고 서서 있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 받게 됨을 암시하는 것이다.
구약 성서에는 율법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는 저주도 곁들여 있으니 만약 우리가 신약에서 (구약과 같이 합본되어 있지만) 우리에게 늘 변치 않는 위로를 가져다주는 제단을 그 율법 곁에 세워주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공포와 놀라움을 가득차게 할 만한 저주들인 것이다.
💡 ‘다듬지 않은’ 돌로 번제를 드림
쉘레모트: 이 단어는 오늘날까지 히브리인들이 상호 간에 인사할 때 사용되는 ‘평화'란 뜻의 ‘솰롬'과 같은 어근의 단어로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마음의 평화를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이다(왕상8:61; 11:4;15:3,14). 그러므로 본문에서 이 단어가 바로 에발산에 쌓게 될 돌단의 재료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것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장소인 돌단이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갈등이 없어지며 돈독한 평화가 유지되는 장소가 될 것을 암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이 에발산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행하는 일이 바로 돌단을 쌓은 일이며 번제를 드리는 일이란 사실에서 확인된다. 번제에는 내 자신의 죄악을 완전히 태우고, 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 하나님과 평화를 도모한다는 의미가 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단을 쌓은 후에 제일 먼저 번제를 드린 이유는: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함으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나타내는 것이다. → 번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온전한 헌신의 상징.
💡 화목제(쉘라밈)를 드림
본문은 하나님께 번제로써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릴 뿐만 아니라 화목제로써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구원과 축복의 선물을 상징할 수 있으므로 본문에서 사용된 와우 접속사는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원과 축복의 선물을 내려주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해 주는 기능도 한다. ‘솰롬'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단지 아무 탈없이 지내는 삶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게 함으로써 당신의 백성의 삶에 참 평안을 이뤄주시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화목제의 희생 제물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화목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의지를 나타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단순히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리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솰롬'을 이루는 화목의 삶을 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육신의 삶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함으로 새로운 땅에서 것이다.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순종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화평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은 죄인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바꾸어 진정한 ‘솰롬'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3) 그들은 그곳에서 먹으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해야 했다" (7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했다.
[1] 그들은 그 계약에 동의를 표시했다. 왜냐하면 계약에 관계하는 당사자들은 함께 먹고 마시며 즐김으로써, 그 계약을 인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소작인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식탁인 그 제단에 참여했던 것이다. 저들은 그런 것을 인정하고 또 이 좋은 땅을 소유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들 스스로가 땅세를 바치지 않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예비된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저들은 그 계약 속에서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제단을 세우게 되었을 때, 곧 율법에 대한 하나의 구제 조항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그의 법도를 가르치시며" 저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또 "약속의 자손"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저희에 대한 은총인 동시에 자비에 대한 영원한 표징이었다. 이것은 비록 이 의식이 거행될 당시에 가나안 전체가 그들의 수중에 완전 장악되지는 못하고 있었을지언정 그들이 기뻐할 만한 이유가 됐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심 가운데서 말씀하셨으니 길르앗도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라. 모두가 내 것이로다.
💡 여호와의 임재를 즐거워 함
돌단을 쌓고 단지 그 앞에서 예식을 행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돌단이 있는 곳이 바로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며 여호와의 임재가 실재하고 있는 곳이란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러 있는 곳에서 누리는 기쁨은 인간적인 마음에서 나온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화목제를 드리고 그 제물을 먹는 것으로 상징되는 바 하나님과의 교통과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기쁨인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언약의 율법을 세우신 이유는 곧 그 백성에게 기쁨을 주시려는 의도이지 결코 그들을 속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