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체인 성경읽기
룻기 3, 4, 사도행전 28, 예레미야 39, 시편 11, 12
묵상구절
14:6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14: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14: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14: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4: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4: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4: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14: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음이라
14: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매튜 헨리 / 옥스퍼드
▶ 스페셜 포인트
그러나 이것은 특권을 내세우며 기업 분배의 과정을 문란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그에 따라 자기 기업을 얻고자 하는 갈렙의 충실한 신앙의 표현이었다. 즉 갈렙은 특별히 기업을 요구할 권리를 가졌으나 그 특권을 행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결국 갈렙의 특별 기업 요구 및 쟁취 기사는 가나안 기업에 대한 언약 백성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모델로서 제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아낙 자손이 거하는 헤브론을 기업으로 구하는 것에서도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14:12). 더욱이 그는 힘들여 쟁취한 헤브론을 나중에 아론 계열의 레위인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헤브론의 들에 거한다(21:11-12). 기업의 쟁취 과정에 나타난 그의 열심은 단지 기업의 소유 자체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성취에 대한 그의 신앙적 열망에서 나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각 지파가 기업을 분배받기 위해 제비를 뽑기 전에 먼저 갈렙이 기업을 요구하고 여호수아가 그것을 수락하는 기사가 언급되어 있다{14:6-15). 갈렙은 제비뽑기의 방식에 따라 기업을 분배받는 것이 아니라, 일찍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을 근거로 특별 기업을 요구하는 것이다.
💡 갈렙은 본래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 45년 전에 여호수아 및 다른 10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가나안을 정탐하고(민13:7), 다른 10명의 정탐꾼들과는 달리 여호수아와 더불어 신앙적인 보고를 함으로써 모세로부터 그가 밟는 땅을 기업으로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신 1:36). 그러므로 이제 갈렙은 그 당시 함께 약속을 받은 자일 뿐 아니라 모세의 계승자인 여호수아에게 그 약속을 이행하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갈렙이 단순히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거나 혹은 옛날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헤 기업을 청원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즉 갈렙은 아직 정복되지 아니한 약속의 땅을 한시라도 속히 정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창 13:15)을 성취하고자 하는 진취적 신앙의 바탕 위에서 기업을 청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갈렙이 나이 많은 상태에서 이미 정복된 넓고 아름다운 평야 지대를 요구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 미정복 상태의 헤브론 산지를 요구한 점에서 충분히 입증됩니다(12절).
이처럼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행하며 자기보다는 다른 백성들을 더 위하고자 하는 갈렙의 이타적인 희생 정신은 바로 갈렙으로 하여금 여호수아와 함께 유일하게 가나안에 들어가는 축복을 얻게 하고(민 14:24,30), 또한 헤브론의 주인이 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갈렙은 85세의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10절) 결코 기골이 장대한 거인인 아낙 자손을 두려워하지 아니했으며, 반드시 그들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같은 갈렙의 신앙, 용기, 겸손 등은 오늘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사명을 맡은 그리스도의 군사인 성도들에게 귀중한 모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신앙은 결코 만용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정녕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결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막 9:23; 빌4:13).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같은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힌 바 되어 담대한 용기와 믿음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일익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마 6:10,33).
● 갈렙의 청원 (여호수아 14:6-15)
각 지파의 몫을 결정하는 제비가 던져지기 직전에 갈렙의 특별한 몫이 그에게 할당되었다. 그는 여호수아 다음으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연장자일 뿐만 아니라 그들 누구보다도 20년이나 더 나이가 많았었다. 그가 40세였을 때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은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이 불사조와 같은 나이의 그가 이땅을 나누는 일에 있어서 어떤 특별한 존귀의 표지를 부여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Ⅰ. 여기서 갈렙은 헤브론을 자기에게 주어 소유를 삼겠다고 청원하며, 그것을 "이 산" 이라고 부른다(12절).
그 땅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제비에 포함시키지 말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 요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모세를 통해서 그에게 "바로 그 산" 을 약속해 주셨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 문제에 대한하나님의 뜻이 이미 알려졌기 때문에 이 일을 가지고 더 이상 물어보기 위해서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쓸데없는 무익한 노릇이다. 제비란, 이 일과 같이 이미 결정되어진 그런 일들이 아니라 우리가 달리 결정할 수 없는 그런 경우에 하나님께 상소하는 것이다. 갈렙은 여기서 "겐 사람"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로마에서 아프리카나 게르만과 같은 나라들을 점령한 위대한 장군에게 그 지역의 칭호를 붙여주는 것과 같이, 여호수아가 겐 사람들을 정복한 놀라운 승리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1. 그의 요청을 실현하기 위해서
(1) 그는 유다 자손.
즉 그 지파의 두령들과 요인들을 데리고 나와 이 일을 제안한다. 유다 지파들은 이렇게 해서 자기 부족의 자랑거리인 그에게 기꺼이 자기들의 존경을 표했고 갈렙이 단독으로 몫을 받아야 한다는데 동의를 표시했다. 갈렙은 땅을 나누는 일에 종사하도록 하나님께서 그 지파로부터 선택한 사람이었다(민 34:19).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사적인 유익과 민족을 위해서 위원으로서의 자기 권리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형제들을 이끌고 나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오히려 그들의 이익에 관심하는 자처럼 보인다.
💡 본문이 갈렙이 대해 기록하면서 굳이 ‘그니스 사람’ 인 것을 밝힌 데에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대조는 본문 이후 본장 전체에 걸쳐 드러나는 갈렙의 신앙의 탁월성과 연관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출애굽 1세대 가운데 40년의 광야 생활 중에 죽지 않고 살아서 가나안에 들어오도록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약속을 받은 유일한 두 사람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와 갈렙뿐이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인 갈렙이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신앙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는 이방인 출신의 신앙의 모범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이 혈통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민족적 편견을 불식시키고 참된 신앙은 오직 참된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2) 그는 자기의 청구에 관한 진술의 진실성을 여호수아 자신에게 호소한다. "당신이 아시는 바라" (6절).
💡 이미 4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갈렙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내용(14:27-35)과 이와 관련된 사건(민 13:25-14:10)을 기억했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의 이 약속에 대해 이제까지 단 한시도 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2 정탐꾼 중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뿐이었고 출애굽 1세대 중에서 현재 살아서 가나안에 들어온 사람도 둘 뿐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그 사건의 내막에 대헤서 실제 체험하여 아는(야다) 사람은 여호수아 밖에 없다는 점을 본절에서 갈렙은 강조하고 있다.
(3) 그는 모세에게 대해서 아주 정중하게 언급한다. 그리고 이 일이 여호수아에게도 결코 불쾌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6절) 그리고 "여호와의 종" 모세(7절)라고 말한다. 모세가 말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으로 그는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입이며 하나님의 대리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도 선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이 당연하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보다 더 간절히 소원할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보다 더 확실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2. 그의 요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1)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중대한 일.
즉 그 땅을 정탐하는 일에 있어서 그가 성실했었던 점을 양심의 증거로 설명한다. 갈렙은 이 일을 맡고 파송되었던 열 둘 중의 하나였다(7절).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일을 기쁘게 회상하며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만에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양도된 땅을 생각하면서 이 이야기를 이 간청 속에 끼어 넣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 그는 그의 마음에 생각하는 그대로 보고 했었다. 즉 그가 가나안 땅에 대해서 아주 훌륭하게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그 땅을 소유하게 하실 것이라는데 대해서는 아주 확신있게 그리고 가나안 자손들 특히 아낙 자손들이 그들을 대항할 그 반격에 대해서는 아주 경멸하는 자세로 이야기했을 때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말했을 뿐이었다(우리는 그가 이렇게 한 것을 민 3:30; 14:7-9 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이 일을 단순히 모세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나 혹은 백성들을 자기 동료들의 부정의 정신에서부터 다소나마 진정시켜 두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말하는 바에 대한 완전한 진실에의 확신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앙에서 그랬던 것이다.
💡 열 정탐꾼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워 떨었던 이스라엘의 이러한 태도를 하나님 자신을 멸시한 것으로 간주하셨다(민 14:11). 이런 그들의 믿음 없는 태도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반면 갈렙이 여호수아와 함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담대하게 선포하였던(민 13:30) 당시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이라고 그들의 선조에게서부터 줄곧 약속해 오신 말씀이 (창 15:12-21; 37:9-15; 출 3:5-10)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는 언약에 입각한 신앙적 행위였다. 갈렙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가득 채워져 성취될 것을 확실히 믿었던 것이다. 아니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믿음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졌다는 것이 본문이 묘사하고자 하는 요점이다.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멸시한 것에 비하면(민 14:11) 갈렙의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 앞에 참으로 신실한 모습이었다. 성도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채워 충만케 하는 것이라는 뜻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더욱 분명히 붙들 수 있을 것이다.
[2] 여기서 그는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따랐다." 즉 그는 자기 의무에 충실했고 성실하게 이 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목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그는 이 증거를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냈다(민 14:24). 그러므로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 안에 있는 헛된 영광에서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그들의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영" 을 소유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행하신 바를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서 그들을 격려한다. 젊었을 때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은 늙어서 명예와 위로를 소유하게 되며, 천국 가나안을 영원히 보상으로 소유하게 될 것이다.
[3] 그는 또한 여호수아를 제외한 모든 형제와 동료들이 이 일에 반대 입장을 취할 그때에 이와 같이 행동했었다. "그들이 백성들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8절)라 했다. 이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형벌이었는지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에게 듣지 않을 때 만일 우리가 그에게 순복한다면 하나님을 따름에의 영광도 더욱 커진다. 갈렙은 이 일에 있어서 여호수아의 처신을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고, 또 그에게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당신과 나에 대하여 이르신 바를 당신이 아시나이다" (6절)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했었다.
(2) 오늘날까지 한결같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받아 누려온 경험을 이야기한다. 비록 그가 광야에서 잔존자들과 함께 방랑 생활을 하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38년이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살아왔지만-그것은 그가 끝까지 막으려고 했던 죄 때문이었으며 그는 이 죄에 전연 관계가 없었다-그러나 그는 이 일을 불평하는 대신에 두 가지 면에서 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를 언급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 그 지겨운 행진 가운데서 당하는 보편적인 위험과 피로에서 뿐만 아니라 그 자신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온 이스라엘 세대가 이런저런 방법으로 죽어 없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광야에서 살아남게 해 주신데 대해서 그가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얼마나 고맙게 느꼈을 것인가!(10절).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45년 동안을 나로 생존케 하셨나이다." 광야에서의 38년 동안은 사막의 위험을 거치며 살아 왔었고 또한 전쟁의 위험 속에서 가나안의 7년을 살아 왔었다! 명심해 두자.
- 첫째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를 살아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능력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보호하시며 그의 풍성하심으로 끊임없이 생의 살 것과 위로를 공급해 주신다. 그는 "우리 영혼의 생명을 주관하신다."
- 둘째로 우리가 더 오래 살면 살수록 우리를 살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의 연약한 삶을 연장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몰수된 삶을 참아 주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더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가 이 45년 동안 나를 살아남게 하셨는가? 이 45년간만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혹은 더 오래 그렇게 하시는가? 혹은 덜 그런가? "우리가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라고 당연히 말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신세진 것이 얼마인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이토록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주어지는 삶을 그의 영광을 위해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 셋째로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를 남겨 두시고 살아 남게 하시는 하나님께 더 감사하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좌우 편에서 수천의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우리 자신을 남겨 두셨다. 이 특별한 사랑은 우리들에게 오직 순종만이라고 하는 강력한 의무를 부과시킨다.
[2] 지금 그가 가나안 경내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비록 85세의 나이지만 40세의 사람처럼 정력적이고 활달했었다(11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이것은 약속의 열매이요 또한 그 이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약속하시는 바를 주실 뿐만 아니라 더 주신다. 약속에 의한 삶은 생명과 건강과 힘과 그리고 약속된 그 삶을 축복과 위로로 만들어 주는 전부를 있게 해 줄 것이다. 모세는 그의 기도에서(시 90:10) "우리의 연수가 ……강건하면 80이다.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 고 말했다. 그러나 갈렙은 이 규칙에서 제외되었다. 85세의 그의 건강은 편안과 기쁨이었다. "그는 온 마음으로 여호와를 따름" 으로써 이것을 얻었다. 여기서 갈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거인들의 손에서 빼앗아야 하는 자기가 요구한 몫에 대한 변명으로 이것을 이야기한다. 여호수아가 "자기의 요구하는 바를 모르고 있었다" 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자기에게 자격을 달라고 한 그 소유를 획득할 수 있는가? "그렇다" 라고 그는 말한다. "왜못하는가? 나는 옛날이나 마찬가지로 지금도 싸울 수 있다" 라고 한 것이다.
💡 본장은 요단 서편 땅 분배에 관한 서론적 이야기를 마친 뒤에 (1-5절) 대부분을 갈렙 개인의 특별 기업에 대한 요구와 분배에 대한 이야기에(6-15절) 할애하고 있다. 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에 이렇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과 정복 천쟁과 기업의 분배 등의 언약 성취 과정에서 같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벌로 특별한 점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먼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갈렙이 들었던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은 특벌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벌써부터 주어진 약속이었다. 둘째, 그 약속을 현실로 이루는 방법도 특별히 다른 것이 아니었다. 어떤 좋은 땅을 따로 보장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것이며, 거저 주는 것도 아니고 싸워서 밟는 땅을 주시겠다는 내용은 (본절에 관한 설명 참조)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주어진 내용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셋째, 지금 정복 전쟁을 마치고 땅을 분배하는 시점에서도 갈렙 혼자만 땅을 분배받는 것이 아니고 모든 지파와 가족에게도 동일하게 땅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갈렙에게 땅이 주어지는 과정을 길게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전체 공동체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언약의 내용을 특별히 굳게 믿고 순종한 한 개인의 기업 성취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본문의 의미를 통하여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아무리 건전한 신앙 전통이나 건전한 신학의 토대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적인 삶, 곧 하나님 앞에서의 같은 철저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체험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3) 이 산을 가지라고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약속했던 바를 이야기한다(9절). 이 약속이 그의 첫째가는 주장이며 그가 믿고 있는 바다. 우리가 이 글을 읽을 때는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다(민 14:24).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그러나 이것은 보다 더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쌍방이 다같이 이 산을 알고 있었고, 갈렙은 지금 이것에 대한 지정된 청원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산은 정탐꾼들이 정보를 얻어냈던 곳이었고 여기서 그들은 아낙 자손들을 만났고(민 13:22) 이들의 모습이 그들에게 이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민 13:33).
갈렙은 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이 도시 헤브론을 정복하는 일의 난관을 역설하는 나머지 이것으로 해서 온 땅을 점령하는 것조차도 실제로 실행 불가능이라고 하는 추측을 하게 되는 백성들의 이야기를 관찰한 후에 이들의 의견에 반대하고 그리고 또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했다고 하는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서 자기 몫으로 그에게 할당한 소위 이 "무적의" 도시를 탈취하게 해달라고 용감하게 요구하게 된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맡아 정복하겠습니다. 만일 내가 그것을 나의 기업으로 만들 수 없다면 나는 기업이 없이 살겠습니다." "좋다" 라고 모세는 말했다. "그 성은 그 때에 가서 너의 소유가 될 것이다. 싸워 이기고 그것을 차지하라." 갈렙은 이 성이 난공불락의 요새이기 때문에 자기가 이 곳을 선택했을 정도로 고상한 영웅적 정신의 소유자였고, 또한 그것으로써 형제들을 고무시키기를 원했다. 그리고 45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정신은 물론 몸까지도 기력을 잃지 않았고 그의 선택에 대한 마음도 한결 같았다.
(4) 비록 아낙 자손이 그 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는 자기가 이 성의 주인이 되겠다고 하는 소망을 이야기한다(12절).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면 내가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헤브론 도시는 여호수아가 이미 점령했다(10:37). 그러나 아낙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이 성에 속한 산은 아직 정복되지 않고 있었다. 비록 헤브론에 사는 아낙 자손들이 멸망당한 것으로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11:21) 그것은 역사가가 모든 군사적 행동을 일괄해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고 실제로는 땅을 분배하기 시작한 후에 까지도 정복되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아낙 자손들을 몰아내리라는 소망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근거한다. 그는 자기의 개인적인 용기를 의지하여 "나는 지금 40대 때와 마찬가지로 건강하여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쫓아내고야 말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이 말을 하는데 같이 배석하고 있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를 도와줄 용맹무쌍한 유다 지파에게 자기 일을 의지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는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그것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여호수아의 조력을 구하거나 힘입으려 하지도 않는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이라고 할 뿐이다.
여기서
[1] 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일을 약간 회의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에 대한 어떤 불신에서가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일말의 주저도 없이 말했었다(민 14:9).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러나 그 자신으로는 이와 같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겸허한 생각을 품고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이라는 표현을 빌린 것이다. 갈대아 역에는 이 말이 "만일 여호와의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육신을 입으신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시다."
[2] 그러나 그는 만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면 아낙 자손들을 정복할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주저없이 표현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즉 만일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겠는가?" 이것은 또한 만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비록 이스라엘의 온 군대가 그를 도와준다고 해도 그는 이곳을 점령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슨 일을 맡든 간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현존만이 농민의 성공의 전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간절히 구하며 조심해서 그것을 확인하며, 우리 스스로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그 은총에 의지하며 어떠한 난관에 처하게 될지라도 용기를 얻어내야 한다.
3. 전체적인 면에서 갈렙의 요구는 "이 산을 내게 주십시오" 라는 것이다(12절).
(1)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가 그 약속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다른 사람들과 같이 제비를 뽑는다면 더 좋은 몫이 그에게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가 "여호와께서 그 날에 말씀하신 이 산을" 주장한다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자연의 섭리를 통해서 받는 것보다 약속에 의해서 받은 것을 훨씬 더 귀하게 본다.
(2) 비록 그곳은 지금 아낙 자손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가 그 원수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자기를 본보기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정복해 나가는 일에 활기를 불어넣기 원해서였다. 여기서 갈렙은 자기 이름으로 응답했는데 그 이름은 "온 마음" 을 뜻한다.
💡 갈렘이 요청한 곳은 땅 중에서도 굳이 ”산” 이었고 그중에서도 장대한 아낙 자손들과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견고한 성읍이 있는 헤브론 산지를 요구하였다(민 13:28,33). 살기에나 정복하기에 어려운 산지를 달라고 한 갈렙의 요청은 그의 진취적이며 강건한 신앙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이런 그의 선택을 볼 때 갈렙은 사사로운 욕심이나 자신의 신상의 환경에 매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이스라엘 전체가 성취하기를 갈망했고 거기에 자신이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 그래서 남들이 정복하기를 꺼리는 산지를 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갈렙은 오늘의 교회가 본받을 만한 내적 믿음의 신실성과 외적 삶의 적극성을 겸비한 균형잡힌 삶을 살았음을 엿볼 수 있다.
Ⅱ. 여호수아는 그의 청원을 허락한다(13절). "여호수아가 그를 축복하고" 그의 용기를 칭찬하며 그의 요청을 성원해 주고, 그가 요청하는 바를 들어 주었다. 여호수아는 또한 그를 위해서 그리고 그가 맡게 된 아낙 자손을 공격하는 일에 성공하기 위해서 기도해주었다. 여호수아는 족장인 반면 또한 예언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두 직책에서 여호수아가 갈렙을 축복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릇 적은 자가 큰 자에게 축복을 받기 때문이다. 헤브론은 갈렙과 그의 상속자들이 거주하게 되었는데(14절) 그것은 그가 온 마음을 다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랐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를 따르면 행복해질 것이다. 한 마음의 경건은 한 마음의 사랑으로 관 씌워지게 될 것이다.
1. 우리는 여기서 헤브론이 아르바의 도시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큰 사람의 이름이다(15절). 우리는 사라가 죽어 묻힌 곳이 기럇 아르바(창 23:2)라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이 주변을 돌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생의 대부분을 가나안에서 살았고 그 가까이에 그들이 묻힌 막벨라 동굴이 있었다. 아마도 갈렙이 이 땅을 정탐하러 왔을 때 이리로 오게 되었고 그래서 기업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더욱 이 곳을 욕심내게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2. 우리는 이후의 역사에서 헤브론이 어떻게 되었는지 들어보자.
(1) 그것은 제사장들에게 속한 성읍들 중의 하나가 되었고(수 21:13) 그리고 "도피성" 이 되었다(수 20:7). 갈렙이 그 산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주변의 마을들로 만족하고 또 자기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결코 적은 일이 아니며 또 이보다 더 좋은 증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성을 자기 자손에게 물려 주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인 제사장들에게 기꺼이 바쳤다.
(2) 이 성은 왕도였고 다윗의 통치 때부터는 유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거기로 사람들은 다윗에게 드나들었고 다윗은 거기서 7년을 다스렸다. 이처럼 갈렙의 성은 높이 존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가계 안에 오랜 후에 나발과 같은 오점이 생겨났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그는 "갈렙의 집안" 을 이어 받은 사람이었다(삼상 25:3). 그러나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기의 공덕을 상속시킬 수는 없다.